⊙ 2000년 리어카에서 1000원짜리 영철버거 팔며 시작한 성공신화
⊙ 한때 80여 개 달했던 프랜차이즈 접고 폐업까지… 2016년과 2019년 다시 일어나
⊙ 작년 7월 폐암 4기 진단… 고대병원에서 치료받으며 영철버거 운영 중, “내 꿈은 여기에서 해피엔딩 맞는 것”
李永轍
1968년생. 고려대 앞에서 손수레 노점상으로 창업(2000), 국민포장 대통령표창장 수상(2004) / 《내가 굽는 것은 희망이고 파는 것은 행복입니다》 출간
⊙ 한때 80여 개 달했던 프랜차이즈 접고 폐업까지… 2016년과 2019년 다시 일어나
⊙ 작년 7월 폐암 4기 진단… 고대병원에서 치료받으며 영철버거 운영 중, “내 꿈은 여기에서 해피엔딩 맞는 것”
李永轍
1968년생. 고려대 앞에서 손수레 노점상으로 창업(2000), 국민포장 대통령표창장 수상(2004) / 《내가 굽는 것은 희망이고 파는 것은 행복입니다》 출간

- 사진=하주희
1000원짜리 버거로 성공신화
떠들썩한 대학가 한쪽 한적한 곳으로 리어카를 끌고 온 그는 온종일 그 앞에 서서 버거를 만들었다. 돼지고기와 양배추, 양파를 볶아 핫도그 빵 속에 잔뜩 채운 그 버거의 가격은 단돈 1000원. 거기에 콜라까지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었다. 이 1000원짜리 버거는 입소문을 타더니 금방 학생들 사이에서 명물이 됐다. 얼마 후 덥고 추운 거리를 벗어나 드디어 매장까지 열었다. 바로 ‘영철버거’와 영철버거를 만든 사장 이영철씨의 얘기다.
특히 지방에서 올라와 식비 한 푼이 아쉬운 학생들에게 영철버거는 요즘 말로 ‘그저 빛’이었다. 하루에 2000개 가까이 팔린 이유다. 가게가 자리 잡힌 후에도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철판 앞에서 야채와 고기를 직접 볶았다. 꼭 10년 후인 2010년 영철버거는 고려대 졸업식장과 입학식장에 등장했다. 고려대가 학생들과 학부모를 위해 영철버거 1만 개를 주문한 것. 이기수 당시 고려대 총장의 아이디어였다.
자수성가한 무학(無學)의 남성이 수천 명 학생의 학창 시절 처음과 마지막을 따뜻이 데워주는 동화 같은 풍경은 당시 큰 화제가 됐다. 그해엔 영철버거가 고대 졸업식과 입학식의 주인공처럼 보였을 정도다. 이영철씨는 그간 해마다 수천만원씩 고려대에 장학금을 기탁했다. 고대와 연대의 정기 교류전 때는 무료로 버거를 나눠주기도 했다. 이런 드러난 기부 외에도 조용히 도와준 학생만도 수백 명이 족히 넘는다. 노트북 살 돈이 없다는 말에 선뜻 돈을 내주는 식이었다. 버거 1만 개는 이런 인연에 따른 진풍경이었다.
폐업 후 학생들 도움으로 재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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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4년 고려대 앞 ‘영철 스트리트 버거’에서 일하는 이영철씨. 2000년 리어카 노점으로 시작해 당시엔 작은 매장을 운영했다. 사진=조선DB |
지난 6월 24일 영철버거를 찾았다. 인터뷰를 위해 간 건 아니었다. 다른 일로 고려대에 갔다가 문득 요즘 영철버거는 어떤 맛일까 궁금했다. 영철버거의 문은 닫혀 있었다. 당분간은 낮 영업을 안 한다는 공지문이 보였다. 혹시나 싶어 이영철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가게 문이 열렸다. 안에서 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기자는 2000년부터 몇 년간 영철버거를 열심히 사 먹었다.
― 그러고 보니 25년 동안 인상이 어딘가 달라진 것 같네요. 부드러워졌다고 할까요.
“맞아요. 환경이 사람을 바꾸나 봐요. 처음엔 말이죠, 밤에 버거가 남잖아요. 남학생들에게 ‘와서 그냥 먹으라’고 말하면 무서워 보였는지 도망가기도 했어요.”
― 처음에 왜 고대 앞으로 왔나요? 연고가 있었나요?
“아내가 성북구 보문동 출신이에요. 제가 노점 장사를 했던 곳이 아내의 동창네 건물 앞이었더라고요. 나중에 알았어요.”
영철버거는 하루에 2000개씩 팔려나갔다. 그는 성공한 소상공인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2004년 저축의 날에는 국민포장까지 받았다. 한때 프랜차이즈에도 도전했다. 2007년경엔 전국 80여 곳에 영철버거 가맹점이 있었다. 하나둘 문을 닫더니 2015년엔 결국 본점인 그의 가게까지 문을 닫아야 했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뒤끝이 좋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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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월 25일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교정에 선 영철버거 이영철 사장. 그 해 고려대는 졸업식과 입학식에 참여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을 위해 영철버거 1만 개를 주문했다. 사진=조선DB |
“프랜차이즈를 해보니 구조적으로 어느 정도는 가맹점주들의 피를 빨아먹어야 돈을 벌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럴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영철버거가 성공하면서 ‘고대 영철버거’로 알려졌잖아요. 제 명예만 달린 게 아니게 됐어요. 나쁜 일과 연루될까 조심조심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니 갈등이 생기면 제가 그냥 지게 되더라고요.”
― 그게 무슨 얘기죠?
“어느 날은 한 가맹점 점주가 제 매장에 와서 막 우는 겁니다. 1억7000만원을 들여 가게를 차렸는데 손해를 보고 있다며 인수해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도와줬어요. 가맹점들이 망하면 비품 같은 것도 공급했던 가격으로 다시 되사주고요.”
― 굳이 왜 그랬나요.
“제가 책을 낼 때 추천사를 받으러 어윤대 당시 고려대 총장님을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자수성가하는 사람은 뒤끝이 좋기가 쉽지 않다.’ 이 말씀을 듣고 인생의 기준을 제대로 잡고 살아야겠다 다시 한 번 생각했지요. 만약 그 시절 제가 가맹점주들에게 안이했다면 재기할 수 없었을 거예요.”
결과론적인 얘기겠지만 프랜차이즈화는 영철버거와 애초부터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영철버거의 핵심 콘텐츠는 버거가 아니다. 이영철이라는 사람의 인생 스토리다. 1000원짜리 버거로 인생을 일으킨 그의 의지, 학생들과 나누는 정(情) 말이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사장이 노동력을 쏟아부어 박리다매하는 구조였다. 물가가 오르면 버거 가격도 당연히 올려야 하는데 메뉴를 재정립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을 게다.
게다가 2010년대 중반으로 가면서 고려대 부근이 급속하게 상업화됐다. 덩달아 임대료가 빠르게 올랐다. 돈을 벌어 부동산이라도 사들이기는커녕 해마다 수천만원씩 고려대에 장학금을 기탁하고 학생들에게 버거를 나눠주는 등 이익 환원에 앞섰으니 그에게 크게 오른 임대료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국 2018년에 또 문을 잠시 닫아야 했다.
“2015년에 폐업한 후 학생들의 도움으로 이듬해 다시 문을 열었는데 2018년에 다시 폐업했어요. 120평 가게 월세를 감당하기 힘들더라고요. 그러다 이듬해 현재 자리에 다시 문을 열었어요.”
6년 동안 3시간 수면
현재 영철버거는 술도 파는 30여 평 규모의 펍이 됐다. 대출을 받고 딸아이의 퇴직금까지 빌려 다시 차린 가게다. 가게를 닫았다 다시 열기를 반복하는 과정은 그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냈다.
“예전엔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수익이 났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임대료 내고 대출 상환하기도 빠듯한 구조가 되더라고요, 6년 동안 아내와 어디 가서 외식도 제대로 못 하고 가게에서 일만 했는데도요.”
― 스트레스가 컸겠군요.
“빚쟁이들에게만 전화가 걸려오던 시기도 있었어요. 아내가 많이 힘들어했지요. 그러다 보니 모든 사람이 적으로 보이는 겁니다. 대인기피증이 왔어요. 자연히 담배를 많이 피웠어요. 거기에 의지를 한 거죠. 그런데다 일부러 하루 종일 몸을 고달프게 움직이고 겨우 세 시간쯤 잤습니다. 몸이 편하면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이 안 오니까요. 이런 생활을 6년 동안 했어요.”
― 하루 세 시간이면 수면이 너무 부족했네요.
“아침 9시에 문을 열어서 새벽 2시까지 영업하는데, 청소를 한 3시간 했으니까요. 3시간도 많이 잔 거죠.”
그는 리어카 노점상 시절부터 유난히 깔끔했다. 그 성격은 요즘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고대병원 간호사들이 VIP처럼 대우”
“그러다 어느 날 아내가 머리가 아프다는 겁니다. 그래서 같이 병원에 갔어요. 저도 영양제나 맞을까 하고 의사 선생님에게 진료를 봤어요. 한데 의사 선생님을 마주하니 갑자기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 왜요?
“모르겠어요. 너무 지쳐 있었나 봐요. 의사 선생님이 놀라며 왜 그러냐고 물어요. ‘생전 안 걸리던 축농증도 오고, 넘어진 적도 없는데 옆구리 쪽이 자꾸 아픕니다.’ 검사를 하더니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더군요.”
고대병원으로 갔다. ‘영철버거 아저씨…’ 진단하던 의사가 그가 누군지 알아보더니 눈물을 흘렸다. 폐암 4기였다. 그게 작년 7월 얘기다. 이후 그는 고대 안암병원에서 열심히 치료받고 있다. 투병 얘기가 나오니 그의 얼굴이 되려 밝아졌다.
“일단 고대병원에 가면 마음이 편해요. 마치 집 같아요. 항암주사 맞으러 갈 때마다 간호사 선생님들이 얼마나 친절히 대해주시는지 몰라요. VIP처럼 대우해 주세요.”
그는 병원비도 얼마 안 나온다며 뿌듯해했다. 암 환자들에게 적용되는 중증환자감면제도뿐 아니라 ‘아너스클럽’ 회원인 덕도 있을 거다. 고려대는 고액 기부자들을 ‘크림슨 아너스 클럽(Crimson Honors Club)’ 회원으로 대우한다. 아너스클럽 회원은 의료원에서 건강검진을 일정 기간 무료로 받을 수 있고 진찰료 무료에 진료비도 감면해 준다.
그러더니 그는 학생들 걱정을 했다.
“물가가 너무 올랐어요. 27년 가까이 학생들을 지켜봤잖아요. 예전엔 한 달 용돈으로 30만원이면 충분했는데, 지금은 100만원도 부족하대요. 방세를 빼고서도요. 밥값도 이제 1만원이 넘잖아요. 동아리 모임을 하면 1차, 2차 가는데 1인당 3만원은 잡아야 하는 거죠. 이런 모임이 어쩌다 한 번이겠어요.”
“햄버거 팔 때가 가장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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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철버거를 연 지 20년이었던 지난 2020년 영철버거 이영철 사장이 가게 안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앞에 놓여 있는 건 아저씨를 걱정하지 말란 뜻의 ‘돈워리버거’다. 사진=조선DB |
“저는 어린 학생들이 오면 너무 불안하고 초조해요. 술을 많이 마셔도 걱정되고…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햄버거 하나를 팔아서 백원을 남길지언정 햄버거 팔 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술 파는 건 아직도 마음이 너무 불편해요.”
그는 요즘도 학생들을 동생처럼, 자식처럼 대한다. 봄이면 줄지어 오는 청첩장에 축하의 마음을 전하고 동아리 행사가 있을 때마다 비상금을 털어 보탠다. 5억 빚을 다 청산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 우선 빚을 다 갚고 나중에 돕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제가 보니까 나중은 결국 나중이더라고요. 지금 학생들과 식구처럼 지내는 게 참 행복해요. 병을 진단받고 마음을 많이 내려놔서일까요? 남들은 살이 빠진다는데 저는 살이 10kg 쪘어요. 얼마 전엔 고려대 식품공학과에 특강을 하러 갔어요. 거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의 꿈은 여기에서 해피엔딩하는 거다.’ 꿈이 없었다면 병을 진단받았을 때 아마 포기했을지도 몰라요.”
― 해피엔딩이요?
“처음에 이십몇만원짜리 리어카를 끌고 고대 앞에 들어왔어요. 그때 제가 신용불량자였습니다. 설성반점, 주유소(돈가스식당) 같은 고대 앞의 오래된 식당들이 이제 다 없어지고 삼성통닭과 저만 남았어요. 정문 앞쪽에 전집 몇 군데 남아 있고요. 이 동네분들이 그랬어요. 저는 벤츠 타고 떠날 거라고요. 그렇게 떠날 타이밍은 놓쳤지만, 여기에서 학생들과 행복하게 해피엔딩하고 싶어요. 요즘처럼 마음을 내려놓고 편하게 살아본 적이 제 인생에 있었나 싶어요.”
꿈은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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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암 4기 투병 중인 영철버거 이영철 사장과 김한겸 고려대 의대 명예교수. 김 교수는 2010년 고려대가 영철버거를 1만 개 주문했을 당시 고대 학생처장이었다. 사진=하주희 |
‘이곳에는 세상 어디에 가도 볼 수 없는 미소가 있다. 궁극의 미소, 영철의 미소다.… 영철 아저씨의 환한 미소는 시골에서 상경한 가난한 유학생들을 위해 아버지가 되어주었다.… 영철의 미소는 칡넝쿨보다 질겨 어설프게 포기하고픈 날을 보듬어 준다.’
― 고대의 어느 총장이나 교수보다 더 많이 학생들을 아실 것 같네요.
“학생으로 오던 친구들이 이젠 교수가 돼서 와요. 기다려보세요. 10년 후엔 여기 졸업생 중에서 대통령이 나올 겁니다.”
그와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문득 그가 처음 고대 앞에 나타난 2000년의 어느 쌀쌀한 밤이 떠오른다. 날렵한 체구에 어딘가 날카로운 인상의 그에게서 영철버거를 건네받으며, 녹록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학생들이 맛있게 먹는지 어떤지, 힐끗힐끗 살피는 눈길이 어쩐지 애처롭고 친근해서였을까, 경계심이 들진 않았다.
그날 밤 이후 그의 인생행로가 가끔 궁금했다. 가난을 딛고 일어나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서,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번 돈을 후세대와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한 번의 성공과 두 번의 실패, 그리고 재기(再起). 그 끝은 그가 염원하는 해피엔딩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