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되자 땅에 묻어두었던 빛바랜 태극기를 꺼내온 선생님
⊙ 일본인 교련 교관, “일본이 곧 수저를 내던지고 항복할 것”
⊙ 광석라디오 만들어 VOA 방송 듣고, 친구들과 김일성·김좌진·지청천 장군 이야기 나눠
趙完圭
1928년생. 서울대 문리대 생물학과 졸업, 同 대학원 생리학과 이학 박사 / 서울대 자연대 교수·총장, 교육부 장관, 국제백신연구소(IVI) 한국후원회 이사장, 現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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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조선DB |
1945년 8월 15일. 이날 역시 우리는 옹진(甕津) 비행장을 닦고 있었다. 정오에 예고되어 있던 천황의 특별방송이 나왔다. 엎드려서 방송을 경청하고 있던 일본인 선생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일제(日帝)가 패망한 것이었다. 우리는 박수를 치고 환성을 내질렀다. 해방은 우리 모두가 목놓아 기다리던 일이기 때문이다.
일본 패망 공언하던 교련 교관
비록 일제 식민 지배가 시작된 후 태어났고,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지만, 우리는 우리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것을 자각(自覺)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내선일체(內鮮一體) 동조동근(同祖同根)을 강조하고, 집에서도 일본말을 상용(常用)하라고 강요하고, 이름까지 빼앗아갔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으면 배급에서 불이익을 주었다. 먹고사는 문제다 보니 대부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집은 본관(本貫)을 따라 하야시가와(林川)로 창씨했다. 그런다고 민족의식까지 앗아갈 수는 없었다.
3학년 때부터인가 우리 사이에서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진짜’ 김일성(金日成) 장군, 김좌진(金佐鎭) 장군, 지청천(池靑天) 장군 등에 대한 이야기가 조용히 전파(傳播)되고 있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독립(獨立)’을 꿈꾸었다. 근로동원을 나가면 백년설, 남인수, 고복수, 이난영, 신카나리아 등의 조선어 노래를 합창했다. ‘국어(일본어) 상용’을 강요하는 일제에 대한 나름의 저항이었다.
광석라디오(Crystal radio)를 만들어 VOA(Voice of America) 일본어 방송을 듣기도 했다. 일본 라디오에서는 ‘일본군이 승리했다’ ‘미군의 공격을 격퇴했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VOA 방송을 들으면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해주 상공에 미군 폭격기가 나타나면 공습경보가 울렸다. 공습하는 걸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하늘 높이 생기는 비행운(飛行雲)과 그 끝에 나타나는 까만 점을 통해 그게 미군 폭격기라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교련(敎鍊) 교관도 공공연히 일본이 질 것이라고 말했다. 교련 교관은 일본인 교사 중에서도 특히 엄격하고 학생들을 들볶았다. 어떤 교관은 학생들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지 못하도록 주머니를 꿰매라고까지 했다. 그런데 하기와라(萩原)라는 교련 교관은 달랐다. 야외 군사훈련에 학생들을 내몰기보다는 주로 실내에서 훈화(訓話)를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수업 중에 “일본이 곧 수저를 내던지고 항복할 것”이라거나 “해주에 연합군이 상륙하면 권총으로 가족을 다 죽이고 목숨을 끊겠다”고 말하곤 했다. 아마도 예비역 육군 대위여서인지 따로 들리는 얘기가 있던 모양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하기와라 교관에게 학생들은 호감을 가졌다. 그의 집에 놀러 갔다가 모찌(찹쌀떡)를 얻어먹기도 했다. 해방 며칠 후 그의 집에 가보았다. 집이 텅 비어 있었다. 가족 모두 일본으로 탈출한 듯했다.
해주에 온 ‘김일성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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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모습을 나타낸 김일성. 뒤편의 소련군 장성들이 김일성 정권이 소련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
문현주 선생님(전 경희대 체육학과 교수)은 그동안 땅속에 묻어두었다는 빛바랜 태극기를 들고 나왔다. 난생처음 보는 우리나라 국기를 보면서 모두 감격스러워했다.
일본인 선생들이 떠나면서 생긴 빈자리는 학병으로 떠났던 해주동중 선배들이 메웠다. 황찬호 선생(전 서울대 교수), 김붕구 선생(전 서울대 교수), 조성식 선생(전 고려대 교수), 강봉식 선생(전 고려대 교수) 등이 그들이다. 선생님들은 ‘봉선화’ 등 우리 노래와 우리 역사를 가르쳐주면서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우리 민족이 건국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역설했다. 이미 소련 군정(軍政)이 시작되면서 공산당이 발호하기 시작했지만 그분들의 교육은 반공적(反共的)이었다. 우리 학생들은 선무대(宣撫隊)와 악대(樂隊)를 만들어 마을을 돌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했는데, 나는 악대에서 나팔수를 했다.
소련군이 진주(進駐)해 왔다. 머리를 박박 깎은 소련군 병사들은 죄수들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들은 밤이면 민가에 들어가 재물을 약탈하고, 여성들을 겁탈했다. 여성들은 남자처럼 보이려고 머리를 박박 깎았고, 집에는 ‘카레이스키 돔(한국인의 집)’이라고 써 붙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10월 어느 날 학생들에게 해주 공설운동장으로 모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김일성 장군’이 해주에 온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이미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30대 초였던 그를 보고 실망한 군중에 의해 ‘가짜 김일성’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많은 학생이 ‘김일성 장군’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공설운동장으로 갔다. 얼마 후 그가 단상에 올랐다.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김일성 장군’의 모습과 너무나도 달랐다. 한눈에 모두 실망했다. 여기저기서 “가짜다”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모두가 일제히 “가짜다!”라고 외쳤다.
38선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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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월남 직전의 조완규 전 장관(앉은 이). |
이듬해 2월 나와 동생은 어머니, 누이와 함께 해주를 떠났다. 신분증명서와 사진 등만을 챙기고 해주항(용당포)에서 미리 수배해 놓은 범선에 올랐다. 선장은 우리 가족에게 배 밑바닥에 엎드려 꼼짝 말라고 했다. 발각되면 즉시 처형된다고 했다. 탐조등(探照燈) 불빛이 비출 때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선장이 “이제 다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38선을 넘은 것이다.
이때 아버지는 대전지방법원장으로 계셨다. 우리 가족은 대전으로 가서 합류했다. 관사는 제법 넓었지만, 가재도구가 없어 썰렁했다. 대전중학교로 전학해 중학(당시는 중·고교가 중학교로 통합되어 있었음) 과정을 마친 후 1946년 9월 서울대 문리대로 진학했다. 공직자였던 아버지의 박봉으로 생활해야 했던 부모님께서는 내가 의사가 되길 바라셨지만, 나는 신생 학과였던 생물학과를 선택했다. 평소 꿈이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었고, 과학을 하는 것이 새로 태어나는 조국에 이바지하는 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지금도 이 길을 선택하기를 참 잘했다고 자부한다.
한편 해주동중 동기생 200명 중 170명이 월남했다. 이들 중 정원식 전 국무총리, 윤자중 전 공군참모총장 등과는 각별하게 지냈다.⊙
정리=배진영 기자 ironheel@chosun.com
박경석 작가
근로정신대 피해 도망 다닌 누나
⊙ 1년에 한 번씩 만주에서 찾아오던 어떤 할머니… 아버지가 독립운동 자금 줘
⊙ 일제, 싱가포르 점령 후 정구공 나눠줘… “일본이 저렇게 힘이 세구나” 생각
박경석
1933년생. 육군사관학교 졸업(생도 2기) / 예비역 육군 준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 파월 제1진 맹호부대 제1연대 초대 재구대대장 역임 / 작가,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8남매 중 세 번째 아들이자 막내다. 지금은 세종시가 된 충북 연기군 조치원읍에서 1933년 태어났다. 조치원은 당시 경부선과 충북선이 지나고 있었다. 인구 2만 명에 규모 있는 번화한 지역이었다.
나는 일본인 유치원에 다녔다. 당시 조선인이라곤 딱 둘뿐이었다. 하나는 나 박경석이었고 또 하나는 땅 부잣집인 이(李) 부자(富者)네 아들이었다. 일본인 추천으로 유치원에 들어갔는데, 조선 사람도 몇 있어야 평등하다고 내세울 수 있어, 구색 맞춤용이었다. 배경에는 당시 우리 집이 사업을 한 덕분에 형편이 좋아 일본인들 처지에선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었을 터다.
우리 할아버지는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초등학교인 삼성초등학교의 전신인 신식(新式) 학교를 세운 설립자다. 우리 어머니가 삼성초 1회 졸업생이다. 아버지는 조치원에서 공장을 세워 사업을 했는데, 대동고무 충남 지사(支社)쯤 됐다.
일장기에 파란색 덧칠해 태극기 만들어
나는 조치원 교동초등학교(당시 보통학교) 1회 졸업생이다. 1940년 입학해 6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해방을 맞이한 그날, 시장은 시끄러웠다. 일본 국기 위에 파란색을 덧칠해 태극(太極) 문양을 만들고 모서리 네 군데에 붓으로 줄을 그리고는 이를 흔들며 난리를 쳤다.
유치원은 2년 반가량 다녔다. 조선인이라곤 둘밖에 없었지만, 차별을 당한 기억은 없다. 조선어(한국어)는 집에서 부모님이 주고받는 걸 듣고 배웠다. 소학교에 들어가려면 창씨개명을 해야만 했다. 밀양 박씨여서 ‘아라히 에이노부야(新陽義信)’였다. 정식으로 한글 공부를 한 건 해방 이후였다. 6세 때부터 6년 반 동안 일본어를 배우곤 그 뒤로 손을 놓았는데 지금도 일본어를 할 수 있다. 조기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된다.
아버지는 독립 정신이 투철했다. 초등학교 4~5학년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1년에 한 번씩 만주에서 어떤 할머니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이 할머니가 집에 오면 우리 어머니는 대문을 지키곤 난리법석을 떨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가 독립운동 운영 자금을 준 것이었다.
일제 당시 조선인은 조선이 힘이 없다는 이유로 일본에 무력으로 억누름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이라 독립,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는 있었다.
싱가포르 점령 후 정구공 선물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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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군 준장 시절의 박경석 작가. |
당시에도 민족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이 민족의식이라는 게 참 무섭다. 해방이 되자 그 난리통에도 순식간에 조선말로 된 교과서가 나오고 조선어를 하는 교사로 다 바뀌었다. 조선어는 중학교 때부터 배웠다. 해방 뒤 그다음 해 3월 졸업했는데 졸업식 노래도 바뀌어 있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도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노래를 처음 부르고 79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머릿속에 가사가 또렷이 남아 있다.
누님이 15~16세쯤 되자 당국에서는 근로정신대(勤勞挺身隊)라는 이름으로 끌고 가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누님은 이를 피해 도망 다녔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누님을 17세에 시집보냈다. 근로정신대에는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이들도 있었고 위안부(慰安婦)라는 이름으로 몹쓸 짓을 당한 이들도 있었다. 당시 조선 여자들이 겪은 큰 흐름은 정신대 동원을 피해 숨거나 도망치는 방법, 결혼을 일찍 하는 삶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사정이 어려운 집안에서는 끼니는 때울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일본인을 따라간 경우도 있다.
보따리만 메고 부산으로 간 일본인들
조치원은 농촌과는 달리 번화했기에 일본인이 많이 살았다. 주로 과자점, 과일점을 했다. 은행에 다니는 이들도 있었고 군청이나 관공서에서 일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배척하거나 차별한 기억은 없다. 이들은 친절했다. 오히려 나는 일본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며 부려먹은 기억이 남아 있다. 신체적 차이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옷 차림새에서 차이가 났다. 일본인은 깔끔한 차림새를 하고 다녔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아주 비참했다. 조치원에서는 일본인에 대한 보복이 없었지만, 시골에선 조선인이 일본인의 집을 부수거나 동네에서 내쫓는 일이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도망가다시피 몰래 밤에 떠났다. 집에 물건과 살림살이를 모두 남겨두고 보따리만 멘 채 부산에 배를 타러 갔다. 주변 조선인에게 집과 물건을 넘겨주고는 다시 돌아오거든 돌려달라고 약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해방 직후 좌우익 갈등이 있었다.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생기며 동네마다 빨갱이들이 있었는데, 우리 조치원에는 악랄한 좌익은 없었다. 대신 대전중학교 2학년 시절인 1946년부터 학교에서는 좌파와 우파가 서로 갈라져 격렬하게 싸웠다. 나는 조치원에서 대전까지 기차로 통학했는데 대전중 운동장에 어느 때는 빨간 깃발이 꽂혀 있었다. 조금 있으면 우익 학생이 와 이 빨간 깃발을 불태웠다. 아직도 좌익들이 불렀던 노래(적기가)가 기억난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가려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나는 좌익은 아니었지만, 그놈들이 하도 이 노래를 부른 탓에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 민족주의 우파에 대한 지지세가 훨씬 강했다. 비율로 치면 8대 1~2쯤 됐다.
일본의 신문물이 조선에 들어와 민족의식에 불을 댕기고, 경부선을 놓고 조선을 발전시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열등의식을 갖고 과거사를 바라볼 필요는 없다. 이제는 1인당 평균 소득이 일본을 앞선다. 일본인이 한국 문화를 선호하는 현상까지 벌어지는 걸 보고 있지 않나.
당시를 열심히 살았던 이들까지 친일파로 매도해선 안 된다. 나는 박정희를 친일파로 비판하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 조선 사람이 출세하려면 그 길밖에 없지 않은가. 공부 열심히 해서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집념을 가진 사람은 친일파라고 할 수 없다. 박정희도 그런 종류다.
지금도 광복절 맞으면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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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 당시 포로가 된 박경석 당시 소위가 전사한 줄 알고 현충원에는 가묘를 설치해 기렸다. 박경석 작가의 생존을 확인한 국립서울현충원은 이 가묘를 2020년 8월 철거했다. |
군 생활 중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은 1965년 베트남전에 전투병 파병을 앞두고 맹호사단 대대장으로 임명됐을 때다. 대대장 시절 내 부하가 강재구 중대장(대위, 추서 계급 소령)이었다. 강 소령이 순직한 후 이를 기리기 위해 우리 대대가 재구대대가 됐다.
소장(少將) 진급을 앞둔 1980년 말, 12·12 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개입한 군인에게 훈장을 수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당시 훈장 지급을 심사하는 공적심사위원장(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이 나였다. 나는 여기에 사인하지 않겠다고 했다. 진급을 빌미로 회유했지만 거절했다. 후회는 없다. 나는 역사를 존중한다. 정치 군인에게 무공훈장을 주면, 쿠데타가 정당화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전두환과 내가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육군대학 동기이기에 서로 친했지만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게 1981년 군복을 벗었고, 1992년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하나회의 실체가 드러났다.
후대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 책도 87권이나 썼다. 이제는 눈이 나빠 더는 못 한다. 1959년부터 1981년까지는 한사랑(韓史郞)이란 필명으로 활동했다.⊙
정리=이경훈 기자 liberty@chosun.com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만세를 부르러 복계리 기차역으로 나가자”
⊙ “덤비려면 덤벼라, 지렁이 새끼 맥아더” 노래 외워
⊙ 어머니, 제사에 필요한 놋그릇과 아버지 국·밥그릇은 순사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딱 숨겨 둬
李龍萬
1933년생. 고려대 행정학과 졸업 / 재무부 차관보, 신한은행장, 한국외환은행장, 은행감독원장, 재무부 장관, 우리금융지주 이사회의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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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조선DB |
한창 더워서 모시 적삼을 주로 입던 마을 어른들은 8월 16일에 “드디어 해방이 됐다고 한다”며 “태극기를 그려야 한다”고 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해방’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8월 17일이 되자 마을의 젊은이들이 “만세를 부르러 복계리 기차역으로 나가자”고 했다. 복계리역은 서울에서 원산으로 가는 경원선 한가운데에 있는 곳으로, 우리 마을에서 2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아버지의 기억 속에 있는 복계리역은 3·1운동 때 동네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려고 갔다가 총을 든 일본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위협해서 식겁을 했던 곳이었다.
싱가포르 함락 때 전교생에게 공 나눠 줘
당시 우리 집은 농사를 꽤 크게 지었고 양 120마리, 돼지 30~40마리, 소 세 마리, 말 한 마리, 닭 500마리 정도를 기르고 있었다. 가축 배설물을 넉넉하게 퇴비로 사용해서 봄에 밭에 씨를 뿌리면 우리 집 곡식들은 다른 집들과 달리 곡식이 싱싱하게 자라서 마을에서 꽤 부자 소리를 들었다. 양을 방목하는 것이 학교를 다녀온 내 임무 중 하나였다.
당시 내 이름은 이승만, 일본식으로 구니모토(郡本) 쇼만이었다. 어려서 아버지는 형 두 명과 나에게 집에서 〈천자문〉을 가르쳤고, 이후 마을에 서당이 생기며 《명심보감》을 배웠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은 일본인 교감이었다.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교감이었는데 어린아이들에게 신발 신는 법이며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는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 교감을 제외하고 학교의 모든 선생님들은 한국 사람이었지만 수업은 일본어로 이뤄졌다.
나는 2학년 때부터 급장을 맡았다. 학급 급장은 선생이 들어오면 으레껏 외쳤다.
“기리쓰! 게리레이!(기립, 경례!)”
그리고 ‘황국신민의 서(誓)’를 외운다. 이걸 끝내면 비로소 수업이 시작됐다.
급장은 약간의 특별 대우를 받았다. 당시 전쟁통에 물자가 귀했는데 학교에 배급이 나왔다. 한 반에 학생이 30~35명이었는데, 급장은 운동화와 양복 배급을 받을 수 있는 표를 한 장씩 받았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일본인들은 이상한 얘기들을 많이 했다.
“잇사오이 미미즈 맛카사, 데테쿠라 지고쿠에 사카오토스.”
번역하면 “자, 덤비려면 덤벼라, 지렁이 새끼 맥아더. 나타나기만 하면 지옥에 거꾸로 빠뜨린다”라는 노래 가사였다. 그걸 매일 외웠다.
소나무 찍다가 다리 찍어
일본이 파죽지세로 전쟁에서 이기고 있던 즈음에는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수업 시간에 “일본군이 어디까지 들어갔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일본이 싱가포르를 함락했을 즈음 전교생에게 공을 하나씩 나눠 줬다. 동남아시아에서 고무가 많이 나서 그걸로 만든 공이었던 것 같다. 공에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니니, 여자아이들이 공을 갖고 놀다가 멀리 날아가면 공을 잃어버렸다고 울고불고했던 것이 기억난다.
우리 마을에는 일본 사람이 사는 여섯 부락이 있었는데, 4학년 때부터 매주 월요일에 그 집으로 가서 농사짓는 일을 도왔다. 하루 일을 하고 나면 저녁에 그 집에서 도장을 받아서 학교 선생님에게 그걸 제출했다.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한 2km, 또 학교에서 일본인 부락까지 4km 정도였으니 그저 매번 걷고 또 걸었던 기억이 난다. 한동안은 송탄유(松炭油)를 만든다고 학급별로 솔팽이를 잘라 오라고 했다. 소나무가 5~10년이 지나면 가지가 벌게져서 불에 잘 타는 솔팽이가 된다. 나중에는 학급에 할당된 솔팽이를 몇 kg씩 채우지 못해서 멀쩡한 큰 소나무를 잘라서 마대를 채웠는데, 나무 위에서 소나무를 찍다가 잘못 내 다리를 찍어서 흉이 난 자리가 여전하다.
‘일본인들이 나쁘다, 좋다’를 평가할 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일본 순사들이 마을을 돌아다닐 때 허리춤에 찬 반짝반짝한 칼이 보기에도 무서웠던 기억은 난다.
한동안 일본 사람들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들을 걷어 간다고 혈안이 돼있었다. 그들 눈에 들어온 것은 놋그릇이었는데, 집집이 놋그릇을 내놓으라며 전수(全數)조사를 했다. 우리 집은 농사를 크게 지어서 일꾼들 밥을 주느라 모아 둔 반짝반짝한 놋그릇이 꽤 있었는데 다 뺏겼다. 해방 이후에 보니 어머니는 그 많았던 놋그릇 중에서 제사 지내는 데 필요한 놋그릇과 아버지 국, 밥그릇은 일본 순사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딱 숨겨 뒀다.
‘지주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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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선을 넘는 월남 가족들의 남루한 행색과 그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미군 병사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
해방 이후 일본인의 빈자리는 우리와 생긴 것부터 다른 소련군이 차지했다. 우리 마을은 서울의 용산에 있는 일본군 부대가 전쟁 연습을 하던 곳이라서, 일본인들이 떠나며 마을에 남긴 쌀, 건빵, 군복, 군화 등을 소련군이 다 차지했다. 소련군은 계란을 굉장히 좋아했다. 마을 사람들이 계란 한 줄을 소련군에게 갖다주고 쌀이며 건빵을 받아 오곤 했다.
1946년부터 우리 동네에는 인민위원회라는 것이 생겼다. 노동절, 여성 해방의 날 같은 것들이 생겼고 8월 10일에 산업 국유화를 했다. 토지개혁 때 집집이 전부 재산을 신고했다. 가령 가족이 다섯 명이면, 이들이 경작할 수 있는 땅을 제외하고는 전부 나라가 가져가는 형태였다. 한번은 집집이 가마니를 만들어 내라고 해서 형이랑 베틀에서 가마니를 많이 짰다.
나는 공부를 꽤 잘해서 요즘으로 치면 최우등생인 전교 1등을 했다. 최우등생은 평양에서 하는 전국 최우등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나는 ‘지주의 아들’로 찍혀서 여기에 갈 수 없었다. 그때 아버지는 ‘자식들을 공부시켜야 한다’는 각오로 남쪽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김화(오늘날의 철원)로 오던 중에 6·25전쟁이 났다.
전쟁이 터지자 고등학교에서 신체검사를 해서 군인으로 차출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게 “눈이 안 보인다, 귀가 잘 안 들린다”고 하라고 했지만, 신체검사 결과는 합격이었다. 큰아버지는 담배를 피우며 “우리 승만이(어릴 적 이름)는 이제 죽는구나”라고 했고, 한번도 아버지 말에 거역한 적이 없던 어머니도 “우리 승만이 어떻게 되는 거냐”며 눈물을 보였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알아보고 오시더니 “이번에는 장교를 뽑는다더라. 남한에 친척이 있는 사람은 차출하지 않는다니 아주 먼 친척이 남(南)에 있다고 하라”고 했다.
정치보위부는 신체검사를 통과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밤 12시에 심층면접을 했다. 미리 준비를 했던 나는 이북부터 이남에 있는 사람들의 항렬자를 다 맞춰서 얘기했다. 그리고 난 뒤에 나는 장교 차출에서 제외됐다. 민주청년동맹(민청)이 내게 “이 동무는 왜 안 됐어?”라고 하기에 나는 “폐가 나빠서 치료하고 오라는 모양”이라고 둘러댔다. 나 외에 전쟁에 끌려갔던 친구들은 모두 죽었다.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냐고 묻는다면 나는 긴말 필요없이 “참 좋은 나라, 잘 사는 나라”라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 한 명이 이뤄 낸 곳이 아니고, 모든 국민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 낸 국가가 대한민국이다.⊙
정리=정혜연 기자 hychung@chosun.com
강인숙 영인문학관장
“다 제 팔자겠지만… 글쎄 두 시간만 참았으면…”
⊙ 8월 15일 오후 3시, 큰언니 혼사… 정신대 때문에 부랴부랴 원치 않던 결혼식
⊙ 2시간 뒤 일본 항복 소식에 “결혼식 무르잘 수도 없고…”
姜仁淑
1933년생. 서울대 국문과, 숙명여대 대학원 졸업(문학 박사) /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평론가로 등단, 건국대 교수 역임. 現 영인문학관장, 건국대 명예교수 / 저서 《일본 모더니즘 소설 연구》 《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도시와 모성》 《김동인》 《자연주의 문학론 1·2》, 수필집 《언어로 그린 연륜》 《아버지와의 만남》 등 다수. 고 이어령(李御寧·1933~2022년) 선생의 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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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조선DB |
나는 노래하듯 가락에 맞춰 그 단어를 되풀이하며 깨금발을 뛰기 시작했다. 한 발로 두 번 뛰고 다음은 두 발로 땅을 디디면서 박자를 맞추었다. 처음으로 구구단을 배우던 날도 나는 아무도 없는 신작로 위에서 이렇게 깨금발을 뛰면서 집으로 갔다. 그러면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먼 길이 덜 아득했다.[‘류우겐히고(流言蜚語·유언비어)’는 근거 없이 부풀려진 허황된 말 또는 사실이 아닌 뜬소문-편집자 주]
8월 15일 오전 9시
함경남도 이원군 곡구(谷口)심상소학교. 등교 후 궁성요배(도쿄 황궁을 향해 절을 올리는 의식)가 끝나고 ‘황국신민의 서’를 외우고 나자 도시카와(利川) 교장은 대뜸 ‘류우겐히고’라는 말로 그날의 훈시를 시작했다. 각반을 바짝 올려 치고 전투복을 입은 교장은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류우겐히고’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실력으로는 도저히 대일본제국을 이길 자신이 없어진 적들이 다급해지니까 ‘러시아가 만주로 쳐들어갔다’는 둥, ‘소비에트 함대가 일본해(동해)로 남하하고 있다’는 둥 당치도 않은 ‘류우겐히고’를 퍼뜨리고 있다. 그러니 절대로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오금을 박았다.
소비에트 군대에 관한 말을 들으니 공습경보가 났을 때 큰언니가 땅에 납작하게 엎드리던 모습이 생각나 나는 그만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동덕여고 졸업반인 큰언니는 좀 겁이 많았다. 걸핏하면 아무데서나 납작하게 엎드렸다. 두 손을 벌려 엄지로는 귀를, 손바닥으로는 눈을 가렸다. 학교에서 배운 비상시 수칙을 곧이곧대로 따른 것이었다. 그렇게 고지식하니 늘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다. 동생들에게도 싫다는 말을 한 일이 없었다.
“미야[宮·우리 집 창씨(創氏) 성. 삼공(三公)이 난 집안이라고 할아버지가 그렇게 지었다. 미야·미고·산고 등으로 읽혀 선생님들을 힘들게 했다]꾼! 나제 와라운다!(미야! 왜 웃는 거야!)”
교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뜻은 잘 모르지만 오늘 새로 배운 ‘류우겐히고’라는 말은 대견스러웠다. 어려운 한자로 되어 있고, 생전 처음 듣는 단어였다. ‘빨리 가서 오빠한테 자세히 물어봐야지.’
사실 그날은 오랜만에 학교에 간 날이다. 학질에 걸려 한 달을 앓았었다. 6학년에서 제일 키가 작고 나이도 어린 나는 위(胃)까지 약해서 노상 현기증에 시달리는 약골이었다. 공의(公醫)가 써준 진단서를 가지고 어머니가 학교에 가서 교섭을 했다. “송근유(松根油·소나무 그루터기나 관솔에서 뽑아 낸 기름) 할당량은 사람을 시켜 채울 테니 며칠만 더 작업을 면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드디어 허락이 내려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며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 ‘류우겐히고’을 떠올리며 깨금발로 뛰었던 것이다.
8월 15일 오후 1~4시
숨이 턱에 닿아 집에 온 나는 막상 대문이 보이자 걸음을 멈추었다. 오른쪽 문기둥 옆에 웬 낯선 여자가 서있었다. 남치마에 흰 깨끼적삼을 입은 여자는 새색시처럼 젊었다. 말간 살결에 유난히 동그란 눈이 머루처럼 까맸다. 한참을 멍하니 서서 그 여자를 관찰했다. 그 세련된 여자는 우리 집에 올 손님 같아 보이지 않았다.
좀 머쓱해서 조심스레 그 옆을 지나 문 안에 한 발을 들여놓았다. 웃방 댓돌 위에 남자 구두가 여러 켤레 놓여 있었다. 요란스러운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악! 핫! 핫! 핫!” 숨이 막힐 듯이 웃는 독특한 웃음이었다. 거기 화답하듯이 여러 어른의 호방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살금살금 걸어가 부엌 문을 열었다. 널따란 방에 혼자 앉아 있던 작은언니가 얼른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댄다. 작은언니한테 눈을 흘겨 주고 뒷문을 통해 유원네로 갔다. 곰방대를 물고 정지(부엌)에 혼자 앉아 있던 유원이 할머니가 나를 보자 반색을 했다.
“넌 좋겠다.”
두루 심기가 불편해서 들은 체도 않고 돌아서는데 웃방에서 새언니 말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그 방문을 연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처음으로 화장을 한 큰언니는 막 피려고 하는 백모란(白牧丹)처럼 우아하고 깜짝 놀랄 만큼 예뻤다.
“네 성[형]이 시집을 간단다.”
어느새 문을 열어 놓고 유원이 할머니가 참견을 하길래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작은언니가 그제야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정신대에 대한 소문이 나날이 흉흉해져서 부모님이 갑자기 언니를 시집 보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혼담이 들어왔다. 고모부가 가져온 혼담의 대상은 고등학생인 연안 이씨 집 맏아들이었다. 서울에서 작은할아버지가 오신다니까 어머니가 오시는 김에 신랑감을 좀 보고 오십사고 부탁을 드렸더니 성급한 어른이 사윗감이 마음에 든다며 덜컥 정혼을 하고 약혼 절차를 밟으려고 사돈까지 모시고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우리 집에 내린 날벼락이었다. 부모도 당사자인 큰언니도 전혀 결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는 신랑을 본 일이 없으니 펄펄 뛰면서 반대를 했다. 첫딸인 큰언니는 아버지에게는 보배였다. 오빠를 낳은 후 10년간 아이를 계속 잃다가 겨우 건진 귀한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혼담을 전하러 온 일행이 법석을 떨어 겨우 아버지 허락을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혼인 잔치가 벌어진 것은 그날 오후 3시. 백모란같이 훤칠한 큰언니가 들어와 시아버지 될 어른께 절을 했다. 마당에 서있던 젊은 여인(신랑의 누나)도 방으로 모셔졌다. 사돈어른은 며느릿감이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서 숨이 막히는 듯이 “악! 핫! 핫! 핫!” 하는 요란한 웃음을 연거푸 쏟아 냈다.
그렇게 잔치는 끝났다. 낯선 손님들은 한데 모여 서둘러 그날 4시 차로 돌아갔다.
8월 15일 오후 5시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들이 떠나고 한 시간쯤 지난 후였다. 구장(남한의 이장) 영감이 읍에 갔다가 라디오 방송을 듣고 온 것이다. 역부(驛夫)가 단천역에 연락해 그 소식이 사실이라는 확인을 받았다. 소문은 정거장을 중심으로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 역전 광장에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그날 밤은 어유(魚油) 등잔에 기름을 여러 번 갈아 쳐가며 ‘박꽃이 합주룩히 오므라들 때까지’ 온 동네가 깨어 있었다. 젊은이들은 우리 집에 모여 태극기를 그리고 애국가를 베꼈다. 나도 동참했다. 오빠한테 배워 한글을 제대로 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고색창연한 옛날 애국가 4절까지 다 외워 버렸다. 그리고 후렴을 쓰고 또 썼다.
〈무궁화하(下) 삼천리 화려한 강산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존하세.〉
어른들은 구장 집에서 밤이 새도록 술잔을 기울였고, 아이들은 지쳐서 아무데서나 쓰러져 잠이 들었다.
8월 16일
이튿날 학교에서는 축하 모임이 열렸다. 어제 ‘류우겐히고’ 훈화를 하던 도시카와 교장은 십 리 밖에 있는 본가로 피신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은 어디서 났는지 사괘(四卦)의 위치가 저마다 다른 태극기를 손에 들고 5리, 10리 길을 멀다 않고 걸어서 하나둘 학교로 모여들었다. 만세를 외치고는 애국가를 부르고, 또 만세를 외치고는 애국가를 다시 부르고…. 사람들은 벅찬 마음을 주체할 길 없어 한나절을 그렇게 반복하며 감정을 쏟아냈다. 그러더니 드디어 줄을 서서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맨 앞에 남정네들이 서고, 소학교 아이들과 아낙들이 후미를 장식했다. 아이, 어른이 모두 태극기를 흔들었다. 산과 들은 깃발로 가득 차 용트림하듯 일렁였다. 건곤감리(乾坤坎離)의 기운이 하늘을 가르며, 마치 그 용솟음이 소리로 들려오는 듯했다.
그날 밤, 심한 갈증에 잠이 깬 나는 맞은편 벽에서 흔들리는 두 개의 커다란 그림자를 보고 기겁을 했다.
“무르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목이 꽉 잠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비로소 막혔던 숨이 내쉬어졌다. 어유 등잔이 켜있는 방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앉아 계셨다.
“다 지 팔자겠지만… 글쎄, 두 시간만 참았으면….”⊙
정리=김태완 기자 kimchi@chosun.com
오덕주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조선이 세계에 우뚝 선다”
⊙ 대동아전쟁 말기엔 국민학생이 군함 手旗신호와 무전 익히기도
⊙ 집 한 채 주고 “종전 임박하면 조선인 리더들 죽일 것” 정보 입수, 피신해 있다 돌아온 아버지
吳德珠
1934년생. 美 일리노이주립대, 컬럼비아대 대학원 사회학과, 일리노이주립대 대학원 신문학과 수학 / 세계가톨릭여성연합회 이사·아시아태평양지구 회장, 가톨릭여성연합회 회장 / 저서 《여성연합회 50년사》 《김수환 추기경과의 추억》 《시대의 기억》 등

일본이 미국을 향해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시작한 1941년, 나의 가족은 대구에 살고 있었다. 소위 대동아전쟁[일본인들이 태평양전쟁을 이르는 말. 당시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대동아전쟁’이라는 증언자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다-편집자 주] 직후까진 물자 사정이 아주 나쁘지 않았다. 싱가포르를 함락한 후에는 고무공을 하나씩 나눠줬다. 얼마 후에는 운동화를 60명 한 반에 20켤레씩 두 차례 배급했다. 반장이었던 내가 나눠 주었다.
점점 전쟁이 확대되고 모든 물자가 전장으로 빨려들어 갔다. 집안의 놋그릇은 물론이고 쇠붙이라는 쇠붙이는 다 걷어 갔다. 생필품도 너무 부족해졌다. 배급제가 되더니 밀가루, 설탕은 자취를 감춰 버렸다. 양식이 없어 막판엔 도토리 말린 걸 빻아서 쌀에 섞어서 배급을 줬다.
억지스러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일본은 초등학생이었던 우리까지 닦달하며 들들 볶았다. 어느 새벽엔 주먹밥 하나, 눈깔사탕 몇 개만 가지고 교문을 나서야 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대구에서 아주 먼 어느 절까지 걸어갔다가 학교로 돌아오니 서산에 해가 기울었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루를 걸었다. 대동아전쟁 때 일본인들이 강요한 ‘닌쿠단렌(忍苦鍛鍊·고통을 참으며 단련함)’이었다.
어느 날엔 대구비행장 건설을 위해 질기고 뿌리 깊은 골프장 잔디를 호미로 캐내는 작업을 종일토록 했다. 보리가 자랄 때는 보리밭을 밟았다. 모내기 철에는 거머리가 들러붙는 논에서 모심기를 거들었다. 높은 산에 올라가 송진을 톱으로 캐는 노동도 했다. 비행기 연료로 쓸 기름을 짠다고 했다. 국민학생 손으로 캐는 송진 양이 얼마나 된다고 말이다. 여름에는 매일 잡초 1kg을 교정 퇴비장에 묻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동네 잡초가 동이 났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우리의 일상은 점점 험악해졌다. 본토에 상륙할 미군을 죽이기 위해서라며 검도와 나기나타(薙刀·일본의 여성용 창) 연습을 하기도 했다. 6학년은 해군 군함에서 사용하는 수기(手旗)신호와 무전(無電) 치는 법도 익혀야 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소화해 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공포의 B-29가 한국 하늘에 나타나기 시작하니 매일 밤이 등화관제(燈火管制)였다. 오빠(오재근)는 전등 줄을 책상 위까지 길게 늘어뜨려 공부했다. 낮에는 공습경보에 맞추어 방공호 대피 연습을 했고, 솜 두둑한 방공모(防空帽)를 만들어 썼다.
돌아온 아버지, 덩실덩실 춤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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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위영 전 무임소장관·국회의원. |
큰언니 부부는 대본영(大本營)의 중요한 발표를 함께 듣자며 라디오를 마루에 내놓았다. 그때는 라디오가 흔하지 않았다. 나중에 6·25가 일어났을 때도 라디오가 없어 전쟁 난 줄도 몰랐다는 사람들도 많았으니 말이다. 가족이 모두 라디오를 두고 둘러앉았다. 일왕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렸다 끊겼다 하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확인했다. 형부가 만세를 불렀다.
그때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있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 오위영(吳緯泳, 2대·4대 국회의원)은 당시 신탁회사에 다니셨다. 대구는 지주(地主)가 많이 사는 소비도시이자 교육도시였다. 대구엔 만석꾼 서(徐)씨 집안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 집안의 한 분과 친했는데 그분은 일본인들을 돈으로 매수해 정보를 얻어 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중요한 정보를 하나 입수했다. “조선인 리더들의 리스트가 있다. 종전(終戰)이 임박하면 이들을 다 죽일 것이다.” 이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 서 씨는 일본 헌병에게 집 한 채 값을 내어줬다고 들었다. 서 씨는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며 빨리 어디 가서 숨어 있으라고 말해 줬다.
일왕이 항복한 후, 시골에 몸을 숨기셨던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마당에 들어서자 자전거를 땅바닥에 팽개치고는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도사의 예언
천지가 하루아침에 뒤집혔다. 해방되고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가셨다. 미 군정청이 아버지를 불러서 곧장 올라가셔야 했다. 나머지 가족들도 서울로 이사 갈 준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대구 교외에 있는 산의 언덕을 올랐다. 민둥산을 오르길 한참, 언덕 중간쯤 동굴이 나타났다. 어머니는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흰 한복 차림의 부인이 동굴 안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방에는 한복 차림의 스님 같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도사님, 서울로 떠나게 되어 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어머니는 절을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생소한 풍경에 어리둥절한 나는 어머니 뒤에 숨는 듯 앉았다. 어머니는 도사님과 잠깐 말씀을 나눈 후 이내 작별 인사를 했다.
언덕길을 내려가며, 깊은 생각에 잠긴 어머니에게 물었다. “무슨 말씀을 나누셨어요?” 그러자 어머니가 답했다.
“응… 그분 말씀이, 앞으로 우리나라는 잘될 거라고. 그리고 조선이 언젠가는 세계에서 우뚝 서게 되는 날이 온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전에 이 땅에서는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고, 은줄기 같은 사람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끔찍했던 대동아전쟁이 이제 막 끝났는데 또 이 땅에서 피를 흘린다고? 그런데 그 후엔 우리나라가 세계에 우뚝 서게 된다고?’
11살 내가 들은 그 말은 이후 삶의 믿음이 됐다.
신문에 난 도표 보며 한글 깨쳐
서울은 모르겠지만 당시 대구는 일본인 교사들의 수준이 꽤 높았다. 일본은 일부러 가장 우수한 사범학교 출신들을 뽑아서 한국에 보냈다고 한다. 우수한 일본 신민(臣民)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교사의 절반가량이 일본인이었다. 이들이 학생을 학대하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선생님들은 해방 후 다들 일본으로 무사히 귀국했다. 선생님뿐이 아니다. 해방 후에 한국인이 일본인을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일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없었다. 일본인들이 독립운동가들을 그렇게 괴롭혔는데 해방 후 일본인을 향한 폭동이 없었던 건 의외였다.
아버지에 이어 중학생이던 오빠, 언니(오정주·前 서울대 음대 교수)와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내가 먼저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빨리 학기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기차표였다. 어떻게 어떻게 어머니가 밤기차표를 구했다. 역마다 서는 완행 기차인 데다, 기차칸과 칸 사이의 공간에 서서 가는 자리였다. 우리 셋은 밤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당시 기차는 석탄차였는데 밤새 달려 서울역에 도착하고 보니 얼굴이 새까매져 있었다. 서울역을 나서고 보니 전차 외에는 교통수단이 없었다. 조랑말이 끄는 마차가 택시 역할을 하기도 했다. 큰언니 부부가 사는 돈암동까지 우리 셋은 걸어갔다.
6학년으로 재동국민학교에 전학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한글을 줄줄 읽는데 나는 한글을 못 읽었다. 그때까지 학교에서는 일본어로 공부했고, 부모님은 미처 한글을 안 가르쳐 주셨다. 곤란한 참인데 언니가 《동아일보》를 건네줬다. 거기에 한글 읽는 방법을 설명한 도표가 실려 있었다. 혼자 그걸 보며 그 자리에서 한글을 깨쳤다.
서울에서 지내며 한 가지를 알게 됐다. 일본 정부가 서울시민은 지방 시민한테 하듯 괴롭히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서울에는 창씨개명 안 한 이들도 많았다. 지방에선 어림도 없었다. 나 역시 구레모토 교코(吳元京子)라는 이름이 있었으니 말이다. 서울의 국민학생들에겐 논에 가서 모내기를 한다거나 하는 험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기껏해야 여중생들이 군복 단추를 달든지, 운모(雲母)를 가려 내는 작업 정도였던 것 같았다. 지방에서는 1인 10역을 했는데 말이다.
해방정국의 한국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신탁통치 찬반을 두고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존경받는 지도자들이 차례로 암살도 당했다. 돌아보면 한국 사회는 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그 소용돌이 중 내가 들은 것, 내가 본 것은 한 단면에 불과할 것이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었을까.⊙
정리=하주희 기자 everhope@chosun.com
민병돈 전 육사 교장
한글 공부는 선생님이나 학생이나 동기생
⊙ 일제 말 ‘국어 상용’ 강요… 조선어로 말하면 버스표도 안 팔아
⊙ 조선정판사 사건 후 정판사 지폐로 딱지 만들어 딱지치기
閔丙敦
1935년생. 육군사관학교 졸업(15기) / 육군 20사단장, 육군정보참모부장, 육군특수전사령관, 육군사관학교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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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조선DB |
솔직히 말하면 8월 15일엔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당시엔 조금 산다고 하는 집에나 라디오가 있는 정도였다. 우리 집에는 라디오가 있었지만, 집에서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은행원인 아버지는 출근했고, 어머니를 비롯한 집안 여인들은 일본어 방송을 알아듣지 못해 굳이 라디오를 듣지 않았다. 내가 학교에 갔으면 또 모르겠는데, 방학 중이었다.
사나흘 지나서였을까,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친구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가 그러는데, 일본이 항복했대.”
나와 친구들은 “에이, 그게 말이 되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일본이 항복한 게 맞다”고 하셨다. 알고 계시면서도 일제(日帝) 하를 사시면서 입조심하는 게 몸에 배셨던 것이다. 일본이 항복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조선총독부와 일본 관리, 군인들이 하루아침에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따라서 일제의 보이지 않는 감시 아래서 살아야 했던 중류층 지식인들은 해방이 됐어도 말조심을 하고 살았다.
태극기가 등장한 것은 그러고도 며칠이 지나서였다. 일장기에 파란색을 덧칠해서 태극까지는 그렸는데, 문제는 사괘(四卦)였다. 저마다 다른 괘를 그렸고, 심지어 팔괘를 그린 것도 있었다.
8월 말에 개학했다. 일본어 교과서들은 사라졌지만 새 교과서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등사판으로 민 언문(그때는 한글보다 언문이라고 많이 불렀다) 교재로 수업을 했다. 한글을 모르기는 선생님이나 우리나 매한가지였다. 나는 어머니 품에 안겨서 어머니가 언문으로 된 《옥루몽》 《춘향전》을 읽으시는 걸 보면서 자라난 터라 언문이 눈에 익었다. 따라서 언문을 깨치는 속도도 빨랐다. 선생님이 나를 보고 일어나서 읽으라고 하시면, 나는 뜻은 잘 몰라도 어쨌든 글을 읽어 냈다. 한글 공부에는 선생님이나 학생이나 동기생이었다.
‘김일성 장군’과 김두한
해방 전후에 대한 나의 기억은 어디까지나 10대 어린아이로서의 기억이다. 억눌려 사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담’이다. 그 시절 영웅담의 단골 주인공은 두 사람, ‘김일성 장군’과 김두한이었다. “김일성 장군이 그젯밤엔 개성에 나타났다가, 어제는 원산에 나타났대” “김두한이 몇 명이랑 싸워서 이겼대” 같은 이야기들을 수군거리는 걸 들었다.
훗날 중학생 때 다방에서 김두한을 두 번 본 적이 있다. 영화 〈장군의 아들〉 (1990)에서는 곱상한 배우가 김두한 역을 맡았던데, 김두한은 체구가 작고 얼굴은 못생긴 편이었다.
이런 얘길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일본인 선생 중에는 훌륭한 분들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누런 코를 줄줄 흘리는 애들이 있었다. 어느 날 우리 반 아이가 코를 흘리고 있는데, 와다(和田)라는 여선생님이 교단에서 내려와 하얀 손수건으로 그 코를 닦아 주었다. 나도 더럽다고 그 아이 곁에는 안 가려 했는데, 선생님의 그 모습이 어린 마음에도 무척 감동적이었다. 집에 와서 아버지께 그 말씀을 드리자, “그 선생님, 사범학교 출신인가 보구나”라고 하셨다. ‘사범학교는 가난하지만 머리 좋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케다(池田)라는 선생님은 아이들을 때리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창씨개명(創氏改名)이나 국어(일본어) 상용(國語常用) 같은 일들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꽤 늦게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텼다. 하지만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려 하자 담당 관리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접수를 받을 수 없다”면서 “그냥 한 글자만 더 넣어서 네 글자 이름으로 해오면 된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집안은 ‘민(閔)’자 뒤에 ‘가(家)’자를 덧붙여서 ‘민가(閔家·빈케이)’로 창씨했다. 내 이름은 ‘빈케이 헤이돈(閔家丙敦)’이 됐다.
영등포에서 파주로 소개
파고다공원(탑골공원) 앞에 버스표 판매소가 있었다. 어느 날 지나가면서 보니, 어떤 아주머니가 “표 한 장 주세요”라고 하는데 안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나는 얼른 달려가서 표를 몇 장 사려고 하는지를 물어본 후, 일본어로 “표 한 장 주세요”라고 했다. 바로 표가 나왔다. 그 안에서 표를 파는 사람도 조선인이었을 것이다. 그런 하찮은 일은 일본인들은 하지 않았으니까. 아마 그는 윗사람으로부터 “조선말로 표를 달라고 하면 팔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버스표 파는 일이기는 해도 생계가 달린 일인지라 그는 그 지시에 따라야 했을 것이다. 그를 누가 욕할 수 있을까?
종종 아버지를 찾아오는 일본인 대학 후배들이 있었다. 남의 집을 찾아갈 때 일본인들이 늘상 하는 것처럼 그들은 작은 선물을 가져왔다. 대개 설탕이나 초콜릿이었다. 어머니는 볶음고추장을 작은 용기에 담아 답례하곤 하셨다. 그들은 “도쿄(東京)는 매일같이 폭격을 당하고 있다. 경성(京城·서울)도 안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영등포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나는 경기도 파주로 소개(疏開)했다. 그러다가 방학을 맞아 서울 집으로 돌아와 있다가 해방을 맞은 것이다.
‘조선공산당 만세!’ ‘무상몰수 무상분배’
해방 후 좌익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해방이 되고 시간이 좀 흐른 다음이었을 텐데, 집 근처 담벼락에 벽보가 나붙었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인지라 신문지에 붉은 글자로 쓴 벽보였다. ‘조선공산당 만세!’ ‘무상몰수 무상분배’라고 적혀 있었다. ‘무상분배’는 알겠는데 ‘무상몰수’는 뭔 소린지 알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무상몰수가 뭐냐”고 치과전문학교에 다니던 형에게 물으니 얼굴이 굳어지면서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냐?”고 했다. “밖에 붙어 있더라”고 했더니 달려 나가 벽보를 북북 뜯어 냈다.
1946년 5월 조선정판사 사건 전후의 일도 기억이 난다. 조선공산당이 위조지폐를 찍어 내 공산당 활동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인플레이션을 야기해 경제를 교란하려고 했다는 것이야 어린 내가 알 리 없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화폐 가치가 폭락했던 것과 관련된 기억은 남아 있다. 한번은 길에서 아는 어른과 마주쳐 인사를 드렸다. 웬만큼 사는 분이었는데 평소의 격(格)에 맞지 않게 쌀자루를 들고 계셨다. 그분은 “뭘 좀 사러 간다”며 쌀자루를 들어 보이셨다. 돈을 못 믿게 된 시장 상인들이 돈을 받으려 하지 않자 쌀을 가지고 가서 물물교환을 해야 했던 것이다. 지폐로 딱지를 접어서 딱지치기를 했는데, 그 지폐들은 일련번호가 ‘48’로 시작되었다. 48 뒤에 붙은 글자가 ‘A’였다는 것이나, 그 지폐들이 조선정판사 사건 후 ‘위폐’로 알려진 것들이라는 사실은 물론 나중에 알았다.
해방 후 어른들의 말씀을 통해 구한말에 형조·예조·호조판서와 내부(內部)대신을 지낸 큰할아버지[민영달(閔泳達)·1859~1924년]께서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시영(李始榮) 선생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때 중간에서 연락책 역할을 한 사람이 소설가 홍명희(洪命熹·1888~1968년)였는데, 언젠가 이시영 선생으로부터 “돈이 오지 않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이냐?”는 문의가 와서 은밀히 알아보니, 홍명희가 임시정부로 가야 할 돈을 공산당으로 빼돌리고 있었다고 한다.⊙
정리=배진영 기자 ironheel@chosun.com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
독립운동가였던 어머니, “일본은 어제까지는 우리의 가장 큰 원수, 오늘부터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
⊙ 아버지, 진주만 기습 소식 접하고 어린 나를 업어주면서, “망했지! 망했어!”라며 기뻐해
⊙ 어머니, 해방 후 일본인 판사 부인과 자식들의 탈출 도와줘
張致赫
1935년생. 서울대 법학과 수학. 단국대 법정대 졸업 / 고려합섬 창업, 고합그룹 회장, 전경련 부회장,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 전경련 남북경협특별위원장, 대통령 비상경제자문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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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조선DB |
1941년 12월 8일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버지는 어린 나를 업어주면서, “망했지! 망했어!”라며 기뻐하셨다. 다음 날 아버지는 집을 떠나 평남 중화의 깊은 산속 숯막으로 들어가셨다. 당시 그 지방에 살던 유창순(劉彰順) 전 국무총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일본 경찰이 찾아오자 아버지는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면서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아버지는 평북 영변에 있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서울로 올라가 《민중일보》를 창간하셨다. 이 신문은 당시 유일하게 보수지(保守紙)를 표방하는 신문이었는데, 후일 윤보선(尹潽善)씨를 거쳐 장기영(張基榮)씨에게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지금의 《한국일보》가 되었다.
조선인 형사, 일본인 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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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운 장도빈 선생. |
이후 어머니는 고향인 평북 영변으로 돌아와 숭덕여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김마리아·유각경(兪珏卿)·황애덕(黃愛德) 등이 주도하던 애국부인회의 평남조직책을 맡으셨다. 어머니는 얼마 후 독립군 군자금(軍資金) 조달을 하다가 발각되어 서울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다. 이때 어머니는 임신 7개월이었다. 조선인 형사는 지나갈 때마다 어머니를 발로 툭툭 차면서 “야, 이 X아! 네가 그런다고 독립이 되냐”고 이죽거린 반면에, 일본인 형사는 “임신부가 참 고생한다”며 빵과 우유를 사다 주면서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임신부이기에 검찰에 송치되지 않고 석방되던 날에도 그 조선인 형사는 “나가서 잘 먹고 잘살아라”면서 엉덩이를 걷어찼지만, 일본인 형사는 “참 잘되었다. 부디 순산(順産)하기 바란다”며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일본은 우리 민족의 원수지만, 일본 사람이라고 해서 다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은연중 품게 되었다. 우리 스스로의 부끄러운 오점(汚點)도 있었음을 알았다.
아버지, 거물 친일파 김대우 등 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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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여고보 시절의 김숙자 여사(원 안). 앞줄 오른쪽이 김활란. |
“일본은 어제까지는 우리의 가장 큰 원수였지만, 오늘부터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일제 때문에 평생 고난을 겪은 분이셨다. 3·1 만세운동으로 유학의 꿈을 접어야 했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집을 나갔다가 몇 년에 한 번 나타나는 아버지를 대신해 가난한 집안을 건사해야 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대해 미움을 품지 말라고, 일본은 우리의 이웃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어머니는 말씀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영변에서 근무하다가 소련으로 잡혀간 일본인 판사의 부인을 남장(男裝)을 하게 하고 몇 달간 집에 숨겨주었다가 두 아들과 함께 남한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었던 것이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민족사학자였던 아버지는 ‘친일사관(親日史觀)의 좌장(座長)’이라고 비판받던 사학자 이병도(李丙燾) 선생과도 소통하셨다. 평생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지만, 건국 후 반민특위(反民特委)를 만들어 친일파(親日派)를 단죄(斷罪)하려 할 때에는 ‘관용’을 역설하셨다. 일제하에서 전북·경북지사를 지낸 김대우(金大羽), 안둥(安東) 총영사를 지낸 김우영(金雨英) 등이 법정에 서게 되자 아버지는 “그들은 일본의 통치하에서도 나름대로 우리 국민을 위해 일한 면도 있다. 그들의 행정 경험을 신생(新生) 조국을 위해 써야 한다”고 변호하셨다.
개발연대의 일본인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이런 부모님으로부터 애국심과 함께 유연한 사고(思考)를 물려받은 것 같다. 6·25 전쟁이 나자 15세임에도 나는 나이를 속이고 육군종합학교에 입학, 장교로 임관한 후 3년 동안 전쟁터를 누볐다. 이는 부모님으로부터 어려서부터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독립운동가인 부모님을 두고 있으면서도 일제 시대에 대본영(大本營) 참모였던 세지마 류조(瀨島龍三)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의 기업인·정치인과 사귀면서 사업을 일구었다.
1950년대 중·후반 홍콩에서 언론인 생활을 하다가 경제계로 뛰어든 나는 1961년 5·16혁명 뒤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5년간 나는 도쿄(東京)에서 지내면서 일본을 알게 되었다.
그 시절 사귄 일본인 지인(知人)들이 내 눈을 뜨게 해주었다. 특히 미쓰이농산의 구로이와 마사미쓰(黑岩正光), 미쓰이석유화학의 나가미(長見) 전무와 마부치(馬淵) 부장, 도요(東洋)면화의 온다(恩田) 부사장, 마쓰모토(松本)유지(油脂)의 기무라 고로(木村五郞) 사장 등의 고마움은 잊을 수 없다. 일제 시대 용산중학교를 나온 일본인 선배들도 도움이 됐다. 이 밖에 이토추, 히타치, 유니치카, 가네보, 무라다기계, 니혼정밀 등의 도움을 받아 나는 1966년 고려합섬을 창립했다. 일본에서 들여온 새로운 기술과 경영 기법에 힘입어 나는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특히 미쓰이석유화학으로부터 배운 시스템엔지니어링과 PERT(Program Evaluation and Review Technique) 기법 덕분에 고합은 우리나라 최초로 플랜트(plant) 국산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공장이 지금의 롯데케미칼 울산 공장이다.
그 시절 내가 만났던 일본인 중에는 새로운 한국의 발전을 진심으로 바라면서 한국을 돕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양국이 진정 가까운 이웃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나도, 개발연대(開發年代)의 대한민국도, 이런 일본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물론 내가 본 모든 일본인이 선했던 것은 아니다. 포항종합제철을 만들 때 진심으로 도움을 주려 애썼던 신일본제철 같은 회사가 있는가 하면, 도면을 불태우면서 기술 이전을 한사코 외면했던 회사도 있었다.
감정보다 실리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일본, 혹은 일본인의 어느 한쪽만 보고 그것이 일본, 일본인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일본인의 나쁜 모습, 일본이라는 나라가 저질렀던 악행(惡行)만 부각하면서 그게 일본의 전부라고 여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뼈아픈 과거사들은 철저히 뿌리를 뽑아내야 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각성해야 하지만, 그런 잘못이 시정되기 전까지는 일본과 일절 상종하지 않겠다는 자세는 곤란하다. 오히려 더 높은 차원에서 감정보다는 실리(實利)를 찾아 협력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앞으로 한일 양국민의 양심 세력 제휴가 더욱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우리 스스로의 품격을 높이고 이를 지킬 수 있는 국력(國力)을 키워야 한다. 정의를 지키는 데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억울하면 강해져야 한다. 오늘날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까딱 잘못하다가는 다시 한 번 역사의 낙오자가 될 수 있다.
[편집자 주]
이 글은 2015년 《월간조선》 8월호에 수록되었던 ‘독립운동가의 아들이 말하는 한일 어제, 오늘, 내일’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널리 알릴만한 의미가 있는 증언이라고 생각해서 발췌, 정리하여 다시 수록한다.⊙
정리=배진영 기자 ironheel@chosun.com
이종찬 광복회장
아버지 “아, 이제 우리도 집에 가게 됐다.”
⊙ 원자폭탄의 ‘원자’는 상하이말로 ‘단추’와 발음 같아… “단추만 한 폭탄이 도시 하나 날려 버렸다” 소문
⊙ 임정 요인들, 상하이 교민이 맞춰 준 영국제 양복 입고 귀국
李鍾贊
1936년생. 육군사관학교 졸업(16기) / 제11~14대 국회의원, 민정당 원내총무·사무총장, 정무제1장관, 국가정보원장 역임. 現 광복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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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조선DB |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우리 집이 여긴데 어딜 또 간다는 걸까?’
그게 무슨 뜻인지 어머니에게 물었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도 고향집에 갈 수 있다는 뜻이란다.”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나 이제 아홉 살이 된 나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뭔지 그때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1945년 8월 10일경 우리 집의 풍경이다.
그날 낮 마치 베트남의 호찌민처럼 깡마르고 체격이 작은 분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베이징(北京)에서 살던 시절 만났던 교포 정화암 씨였다.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황급히 2층 창고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일전에 일본 순사들한테 당한 고문으로 고막이 터져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나중에 재떨이에 소복한 재를 보고 두 분이 필담으로 대화를 나눴겠구나 짐작했다. 어머니는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걸터앉아 바깥 동태를 감시하고 계셨다. 혹시 일본 형사가 미행해서 들이닥치든가 하면 뒷방에서 밀담을 나누는 두 사람에게 대피 신호를 주기 위해서였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정화암 씨가 나와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여보, 이제 왜놈들이 손을 들게 되었나 보오. 미국이 ‘뇌쯔쪼다이(原子炸彈·원자폭탄의 상하이어)’를 퍼부어 더 이상 전쟁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정 동지가 다녀간 거요.”
운현궁에서 준 돈으로 산 상하이 집
나의 부모님은 1919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같은 해 고종황제가 승하한 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였다. 고종의 뜻을 받아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외할아버지 조정구 대감도 같은 해 베이징으로 망명하셨다. 첫딸과 둘째 딸을 디프테리아로 잃은 부모님은 상하이로 거점을 옮겼다. 1926년부터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살았다.
각 층마다 방 2개가 있는 3층집이 우리 집이었다. 건물에 화장실이 따로 없어 온 가족이 중국식 마통(馬桶)에 일을 봤다. 한국으로 치면 요강인데 나무로 만들었다. 아침마다 분뇨수거차가 와서 마통에 있는 오물을 수거해 갔다. 화장실도 없는 집이었지만 우리 가족의 생계 수단이었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하며 근근이 사는 우리 가족을 위해, 운현궁에 살고 계시던 흥선대원군의 큰며느리 여주이씨가 개인 돈으로 3000원을 어머니에게 내어주셨다. 그 돈으로 구입한 집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흥선대원군의 외손녀이자 고종황제의 생질녀셨다. 아버지는 상하이에 있는 영국 전차회사의 검표원으로 일하기도 하셨지만 독립운동을 하는 통에 직장을 잃으셨다.
집 1층에는 시라카와(白川)라는 40대 부부가 노모를 모시고 세들어 있었다. 일본 영사관에서 소개해 들어온 가족이었다. 이들은 방 한쪽 벽에 벽면을 모두 덮을 정도로 큰 일장기를 걸었다. 그들이 들어와 산 후 일본 영사관의 주기적인 방문이 뚝 끊겼고, 시라카와의 집엔 중국인들이 자주 들락날락했다.
시라카와 부인은 나를 무척 귀여워했다. 그 집에서 몇 시간이나 머물며 사탕이나 과자를 먹기도 했다. 그 집에 다녀온 후 내가 마약(모르핀)을 연기로 만들어 흡입하는 흉내를 내서 어머니가 놀랐다. 시라카와는 일본 영사관과 군부에서 암암리에 묵인하는 마약상이었던 것이다. 묵인의 대가로 우리 집을 감시하는 밀정 역할을 한 것 같다.
사라진 밀정 가족
1943년경부터 상하이는 일본군이 완전히 점령해 조계도 사실상 없어졌다. 큰누나 이정현은 당시 수녀예비학교인 효명학교를, 큰형 이종무는 유명한 가톨릭계 학교 성방제학교(St. Francis Xavier’s College)를 다니고 있었다. 우리 가족과 친하게 교류했던 프랑스인 신부님의 도움 덕이었다. 성방제학교는 8학년제였는데 졸업하면 바로 영국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어 명망이 높았다.
나만 중국 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일본 영사관의 장학관이 “일본의 유명 학교 분교가 상하이에 생기니 여기로 전학하라”고 권했다. 거절할 명분을 찾던 어머니는 나를 한국 교민학교로 전학시키기로 했다. 나는 중국 학교에 남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자 어머니가 나를 붙잡고 울면서 호소했다.
“너도 보지 않았느냐. 영사관에서 오면 으레 아이들을 외국 학교에 보냈다고 시비하지 않더냐? 그들의 요구를 회피하기 위해 교민학교로 가려는데, 너까지 이 에미 심정을 몰라주면 어떻게 하냐?”
결국 교민학교로 전학갔다.
1945년 6월 어느 날 일본 영사관에서 전갈이 왔다. 상하이 경마장에 모이라는 얘기였다. 어머니와 나는 시라카와 부인과 함께 경마장으로 갔다. 격추된 미국 전투기 잔해가 전시되어 있었다. 미국이 3월 도쿄 폭격할 때 격추된 전투기란다.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3월에 벌써 도쿄를 폭격했는데 6월에 와서야 상하이에서 전시하는 것이로군. 그러면 도쿄는 지금쯤 미국 비행기 판이 됐겠네.”
7월에 접어들며 일본 영사관의 활동도 소극적이 되었다. 쑤저우(蘇州)로 피신해 있던 아버지가 집을 자주 찾았다. 전황(戰況)이 그만큼 연합군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방증(傍證)이었다. 그러다 8월 10일경, 미국이 일본에 신형 무기 원자폭탄을 터트려 일본이 손든다는 소문이 확 퍼졌다. ‘원자(原子)’는 중국 상하이 지역 발음으로 ‘뇌쯔’여서 단추라는 말과 같았다. 폭탄의 크기는 겨우 단추만 한데 그 피해 범위는 한 개 도시를 날려버릴 정도로 넓다는 설명이 붙었다.
“와! 단추만 한 폭탄이 어떻게 그런 위력을 가지지?”
모두 놀랐다. 일본 황실에서 항복을 준비하는데 군부가 막고 있다는 소문을 희미하게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정화암 씨가 다녀가고 사나흘이 흘렀을까. 주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함성을 지르고 소란스럽다.
“전쟁이 끝났다!” “일본이 패했다. 일본이 항복했다!”
중국인들이 거리 곳곳에서 폭죽을 터뜨렸다. 8월 15일, 이후 광복절로 기념되는 그날의 상하이 거리 모습이었다.
1층 시라카와 가족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커다란 일장기도 어느 틈엔지 사라지고 흰 벽만 남았다. 집안 모습을 보니 급히 귀중품만 챙겨 도망간 모양이었다.
저녁 무렵 쑤저우에 피신 가있던 아버지가 아주 돌아오셨다. 우리 가족은 다시 함께 모여 살게 되었다. 다음 날부터 여러 분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찾아오는 손님들로 우리 집은 연일 잔칫집 같았다.
종전 직후 상하이는 대단히 어수선했고, 교민 사회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일련의 잡음 끝에 교민회가 정상화됐다. 과거 임시정부가 운영하던 인성학교도 다시 문을 열었다. 그 학교에서는 한글을 가르쳤다. 우리 형제들도 모두 인성학교에 등록했다. 다니던 학교에 정규 수업이 없는 토요일이면 인성학교로 가서 하루 종일 한글을 배우고 애국가, 3·1독립운동가 등 노래를 익혔다. 1945년 8월 상하이의 풍경은 이랬다.
어머니, 밤새 태극기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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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 전 상하이 공항에서 찍은 사진. 앞줄 가운데 태극기를 든 소년이 이종찬 회장이다. 꽃다발을 목에 건 사람이 김구, 오른쪽에 눈물을 닦고 있는 중절모 쓴 노인이 이종찬 회장의 작은할아버지인 성재 이시영이다. |
아버지는 원 씨를 찾아가 “충칭에 머물고 계신 요인들 가운데 김구 주석, 이 시영 법무총장, 조완구 재무총장 등 세 분에게 양복 일습(一襲)을 보내고자 한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그분은 아버지의 요청을 반기며 흔쾌히 수락했다. 세 분의 치수에 맞게 영국 세비로(Savie Row)에서 맞춰 온 양복, 흰 셔츠, 외투, 중절모, 목도리에서 양말까지 세 세트를 마련해서 보내왔다. 백범 선생의 것은 체격에 맞게 제법 크고, 나머지 분들 것은 작은 양복이라 한눈에 구별됐다.
1945년 10월 말, 드디어 임정 요인들이 귀국행의 기착지로 상하이에 온다는 소식이 왔다. 어머니는 밤새 재봉틀에 매달려 흰 감으로 태극기를 만드셨다. 11월 5일, 이렇게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우리 가족은 비행장으로 마중 나갔다. 비행기 트랩 앞에 우리 가족들이 나란히 섰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장대한 체격의 백범 선생이 먼저 내렸다. 뒤이어 이시영 옹이 내렸다. 주변은 교민들로 꽉 차있었다.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알았을까? 이것이 끝이 아니라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는 걸.⊙
정리=하주희 기자 everhope@chosun.com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어머니 “이제 조선글을 배우자”
⊙ 징용 가던 길 부산에서 사람을 사서 대신 보내고 일주일 만에 돌아온 아버지
⊙ 해방 후에도 “일본놈들이 들어와서 제대로 밥 먹게 됐다”던 어른들
宋復
1937년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미국 하와이대 대학원 사회학 석사,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사상계》 《서울신문》 기자,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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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월간조선 |
일본의 항복 소식이 전해진 직후 어머니는 우리 삼형제를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너희들, 이제 조선글을 배우자.”
우리가 물었다. “조선글이요? 조선글이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어머니께서는 책을 하나 들고 나오셨다. 한글 책이었다. 일제(日帝) 말에 조선어 책을 갖고 있으면 고초를 겪어야 했다는데 그걸 어디에 감추어 두셨던 것인지….
어머니는 ㄱ, ㄴ에서부터 ㅏ, ㅑ, ㅓ, ㅕ 등 한글 자음과 모음을 적어 놓고는 가르쳐 주셨다.“‘기역(ㄱ)’하고 ‘아(ㅏ)’를 합치면 ‘가’가 되고, 그 아래에 기역을 더하면 ‘각’이 되고, ‘니은(ㄴ)’을 더하면 ‘간’이 되고, ‘리을(ㄹ)’을 더하면 ‘갈’이 되고….”
어린 마음에도 ‘이렇게 잘 짜여진 글이 있나? 참 신기한 글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과학적’이라는 말을 몰랐지만, 한글이 참 과학적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나는 그날 바로 한글을 깨쳤다. 형들은 며칠 더 걸렸다. 글이나 말은 어릴 때 배울수록 빨리 깨친다고 하는데, 그래서였을 것이다.
일본 패망하지 않았으면 한국말은 사라졌을 것
1907년생인 어머니는 마을에서 ‘문장가’셨다. 인근에서 사돈지(査頓紙·결혼할 때 사돈댁에 보내는 편지)나 제문지(祭文紙)를 쓸 일이 있으면 어머니께서 한글 붓글씨로 잘 써주셨다. 내가 학교 다닐 때 동요를 지어 오라는 숙제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대신 지어 주신 동요를 제출하면 나는 ‘천하신동(天下神童)’이 됐다. 외할아버지는 한학자였지만 구한말(舊韓末) 개화기에 그 고장에 학교가 설립되자 교장을 지낸 개명(開明)한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진사(進士)로 훈장(訓長)을 하셨고, 아버지는 중농(中農)이셨다.
9월이 되면서 새학기가 시작됐다. 일본어 교과서는 못 쓰게 되었지만, 아직 한글로 된 새 교과서는 나오지 않았다. 《새동무》라고 하는 잡지가 왔다. 이 잡지가 교과서 대신이 됐다. 그런데 아무도 한글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님이래야 20대 초 정도였는데, 그들도 한글을 몰랐다. 한글을 깨친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내가 《새동무》를 읽으면 선생님과 학생들이 따라 읽었다.
나는 일본어 가타카나만 배우고 히라가나를 배우기 전에 해방을 맞았다. 나보다 두세 살 정도 많은 이들은 모국어인 것처럼 일본어를 잘했다고 한다. 세 살, 여섯 살 연상인 형들을 보면서 자란 나도 일본어를 상당히 잘했다. 선생님이 “너는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반 아이들 태반이 그랬다. 아마 일본이 패망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일본어만 쓰면서 살았을 것이고 한국어는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마을에 일본인은 네 가구가 살고 있었다. 호주(戶主)는 국민학교 교장, 의사, 그리고 농민이 둘이었다. 일본인 농민들은 해방되기 10~15년 전쯤에 땅을 사서 들어와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사는 정도는 조선인 농민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이 패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창피스런 일을 겪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관솔, 이나고, 돈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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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망 직후 부산항에서 철수하는 한국 거주 일본인들. 경남 김해군 진례면에 살던 일본인들도 이렇게 떠나갔을 것이다. |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가져오라고 하는 것이 많았다. 관솔(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가지나 옹이), 이나고(메뚜기), 돈부리(도토리)…. 관솔로는 비행기 기름을, 메뚜기는 군인들 간식을 만든다고 했다. 선생님은 때가 되면 “너, 오늘 이나고 가져왔나?” “돈부리 가져왔나?” 하고 물었다. 안 가져왔다고 하면 한 대씩 때렸다.
시골 마을에서 전황(戰況)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나도 그런 걸 알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상한 일들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동네마다 봉화대 같은 망루를 만들어 놓고 밤에 불 켜진 집이 있는지를 감시했다. 등화관제(燈火管制)를 한 것이다. 어른들은 “이기고 있다면서, 왜 전에 안 하던 짓을 하는 건가?”라고 수군댔던 것 같다.
한번은 길을 가는데 마을에서 어른들이 달려와서 “B-29다!” “모두 엎드려라!” 외쳤다. 아마 주재소(파출소)에서 공습경보가 하달됐던 것 같다. 저 하늘 높이 하얀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일본 본토를 폭격하러 가는 폭격기였을 것이다.
흔히 ‘수탈’이라고 알려진 공출(供出)이 시행된 기간은 채 2년이 안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출이라고 하지만 집에서 먹을 만한 정도는 남겨 두고 가져갔고, 가져간 것에 상응해서 배급을 주었다. 아버지가 징용(徵用)을 나간 적은 있는데, 일주일 만에 돌아오셨다. 연세도 있으셨던 데다가, 부산항에서 쌀 한 가마니를 주면 대신 징용을 간다는 사람이 있어서 쌀 한 가마니를 주고 돌아왔다고 하셨다. 마을에서 징용·징병을 간 사람은 없었고, 인건비가 높은 일본으로 돈벌이 하러 간 사람이 네 명인가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번 돈으로 고향에 땅을 샀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은 피해 갈 수 없었는데, 우리 집안의 창씨성(創氏姓)은 본관인 청주의 옛 이름인 ‘서원(西原)’을 따서 ‘니시하라’였다.
마을에는 정자나무가 하나 있었다. 그 아래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들은 대개 1900년대 초에 태어나신 분들로 당시 40대였다. 해방 후, 이야기 끝에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일본 사람들이 착취해서 우리가 가난하게 됐다”고 말하면 그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뭘 아노? 다 일본놈들이 들어와서 우리가 제대로 밥을 먹게 된 기다. 그전에는 굶고 살았다. 일본놈들이 그래도 잘 다스렸다.”
요즘 이런 얘기를 하면 시골 노인네들이 못 배워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라느니, 친일파(親日派)라느니 할 것이다. 하지만 김구(金九) 선생도 “일본이 바로 이웃인데 친일파는 많을수록 좋다. 반민족적 친일파를 처단하라는 것이지, 언제 단순히 친일파를 처단하라고 했느냐”(김구 선생의 비서였던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회고)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내가 생각해 봐도 우리 면(面)에서 ‘친일’한 사람이 누구였을까 싶다. 면장? 구장? 반장? 순사? 그들이 무엇을 빼앗아 가거나 누구를 탄압했던가? 그냥 자기 직책에 따른 일을 했을 뿐이었다.
좌우 대립
해방이 되자 시골 마을에도 좌우 대립이 생겼다. 특히 1946~47년에 극심했다. 우리 면(面)은 한 마을만 빼고 모두가 좌익 마을이었다. 가운데 있는 우익 마을을 좌익 마을들이 포위한 형국이었다. 밤만 되면 ‘적기가(赤旗歌)’를 불러 댔다.
국민학교 4학년 때의 어느 날, 동네 아이들과 산에서 소를 먹이고 있는데 갑자기 “쾅,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산이 무너지면서 나는 소리 같았다. 저 아래서 사람들이 도망쳐 오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좌익 마을 사람들이 우익 마을로 쳐들어오자 우익 마을 사람이 경찰에 신고했고, 달려온 경찰들이 공포탄을 쏜 것이었다. 내가 총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해서 산으로 도망쳤던 사람들이 밤에 다시 내려와 우익 마을을 둘러싸고 ‘적기가’를 불렀다. 간혹 누가 지서(支署)에 끌려가서 밤새 매를 맞았다는 말도 들렸다. 그래도 마을에서 좌우 대립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때는 ‘공산주의’라는 말보다는 ‘사회주의’ ‘빨갱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부산이 가깝기는 하지만, 국민학교를 졸업하기만 했어도 ‘지식인’ 대접을 받던 시골에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제대로 알고 거기 빠져든 사람들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들이 아는 것, 그들이 말하는 것은 간단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갈라먹기’였다.⊙
정리=배진영 기자 ironheel@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