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해방 80년 | 김태완의 인간탐험

105세 철학자 김형석이 겪은 1945년 8월 15일

“이젠 나라다운 나라. 그래도 남북이 통일해야”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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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나라에서 살아야겠다! 내 나라가 아니면 희망도 없고 가정도 없고”
⊙ 그해 8월 15일 새벽 꿈에 쟁반 같은 태양이 동쪽으로 저물어
⊙ 해방 직후 고향에 나타난 김성주… 그해 10월 14일 김일성 환영 평양군중대회에 김일성으로 나타나
⊙ “두 개의 강물이 하나로 될 때까지 북한을 ‘옆 나라’로 생각해야”
⊙ “대한민국이 ‘나라다운 나라’를 시작한 건 6·25 전쟁 때라고 생각”
사진=김태완
《월간조선》 1월호 때 뵈었던 105세 철학자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를 다시 만났다. ‘신년 메시지’를 통해 인연을 맺었던 선생에게서 8·15 해방의 기쁨을 육성으로 듣고 싶었다. 해방 80주년을 기념하며, 그날의 환희를 기억하는 이의 육성을 통해, 한 세기에 걸쳐 다듬어진 삶의 철학-‘세기의 인생론’-을 듣고 싶었다. 우리는 지난 6월 27일 서울 홍제동에서 만났다.
 
  ― 해방 80년의 기억을 듣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그날의 기억을 들려주세요.
 
  “우리가 이런 문제를 취급할 때에 정치나 사회 문제를 취급할 때 밖에 나타나는 걸 보고서 취급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철학 계통을 공부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반드시 그 밑에 사상의 흐름이 있고 또 역사의 흐름이 있어요.
 
  어떤 사상 때문에 역사가 되고 그것이 사건이 되는 건데, 나는 이제 좀 오래 살다 보니까 제2차 세계대전을 직간접적으로 겪었거든요.”
 
  첫마디를 던졌을 뿐인데 이미 거대담론의 서막이 펼쳐지고 있었다.
 
  ― 맞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일본에서 대학 생활을 할 때에 독일이 주동이 돼가지고 일본을 끌어들이고, 유럽에서는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일으킨 게 2차 세계대전이죠. 근데 그 주인공은 사상적으로 히틀러(1889~1945년)인 것 같아요.
 
  앞선 세대에 독일에 쇼펜하우어(1788~1869년)라는 철학자가 있었어요. 그는 인간이 지성(知性)이라든지 이성(理性)이 중심이 아니고 의지(意志)와 감성(感性)이 중심이라는 주장을 했고 그래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이 나와서 독일 사상계가 좀 바뀌었거든요.”
 
 
  권력 의지
 
  이 대목에서 잠시 곁가지로 가자면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 참호에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었다는 일화가 있다. 계속된 김형석 선생의 말이다.
 
  “이성적(理性的)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의욕이 더 강하다! 근데 그걸 누가 받아들였냐 하면 니체(1844~1900년)라고 하는 시인이자 철학자가 받아들여가지고, 그 의지 중에서 사회생활에서는 제일 중요한 게 ‘권력 의지’라고 했어요. 권력을 향한 의지!”
 
  선생은 쇼펜하우어와 히틀러 사이에 니체를 넣어 연결시켰다.
 
  “사실 성경에서도 예수가 세 종류 악마의 유혹을 받거든요. 그 가운데 하나가 뭔고 하니 권력이에요. 사람이 권력에 대한 의지가 있으면 그걸 어떻게 발산시켜야 하거든요. 니체의 권력 의지를 히틀러가 받아들였어요. 그래가지고서 게르만 민족이 우수하기 때문에 세계를 좌우해야 한다! 지배해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거기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배제해야 한다! 그걸 역사적으로 실현하려고 하니까 동맹국이 필요한데, (그래서) 일본을 끌어들이고 이탈리아를 끌어들여가지고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거거든요. 그때 내가 일본에서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나 같은 세대(世代)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참 컸거든요.”
 

  김형석 선생은 1943년, 도쿄 조치(上智)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이 대학은 예수회가 설립한 가톨릭계 명문 사립대학으로, 일본 내에서는 와세다대, 게이오대와 함께 ‘소케이조치(早慶上智)’라 불린다. 선생의 당시 대학 후배로 김수환(金壽煥·1922~2009년) 추기경이 있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고 한다. 계속된 선생의 말이다.
 
  “우선 첫째가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거예요. 나도 그때 이제 대학에 있었을 때인데 일본에 공부하러 왔다가 군대로 끌려가게 되니까 너무 억울하고 고통을 참 많이 겪었죠. 한반도에서 끌려간 사람은 중국 쪽으로 가니까 탈출하기도 하고 피할 수 있었는데 일본에서 끌려가면 남태평양으로 가게 돼요. 나는 거기에 해당하게 됐어요. 피할 수도 없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고향엔 학도병에 자원해서 나간 걸로 돼 있고, 일본 안에서는 학도병을 피해 (군대에) 안 가고 있었거든요. 돌아갈 수도, 있을 수도 없고….”
 
 
  “내 나라에서 살아야겠다!”
 
  선생은 그 무렵, “내 나라에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을 가만히 보니까, 일본 육군이 중심이 돼서 권력을 행사하는데, 일본 황실하고 합해가지고서 아시아를 점령해야겠다, 지배해야겠다! 그런데 아시아를 지배하려니 미국을 배제해야 하는데 미국이 너무 강하니까 진주만을 폭격하고서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거죠. 나는 공부도 못 하게 되고 전쟁에 끌려가게 되니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 어떤 생각요?
 
  “내 나라에서 살아야겠다! 내 나라가 아니면 희망도 없고 모든 것이…. 국가가 없으니 가정도 없고.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해방이 됐거든요.”
 
  ― 모두에게 해방이 갑자기 찾아왔겠지요.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8월 14일 자다가 꿈을 꾸었어요. 누구의 안내를 받아가지고 나갔는지 모르겠는데요, 평양에서 서남쪽으로 가면 대동강 입구에 진남포가 있거든요. 바닷가에 안내를 받아서 이렇게 가보니까 넓은 바다에 사람은 하나도 없고, 역사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아요.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고 꿈이니까 그렇잖아요?
 
  그래서 그걸 느끼고 서 있는데 거기 오는 사람이 있기에 누군가 하니 한국 이름은 모의리(牟義理)고, 선교사니까 원래 영어 이름은 마오리 선교사인데….”
 
  미국인 마오리(Eli M. Mowry· 1880~1970년) 선교사는 평양 숭실학교 교장을 역임한 애국지사다. 1909년부터 1941년까지 평양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그는, 소년 김형석에게 신앙과 인격의 깊이 면에서 많은 영향을 준 스승이다. 그는 일제치하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학생들에게 민족주의 사상을 심어주었다. 항일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 목숨을 구해주었으며,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마오리 교장은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일본 사람 시신이 가득한 꿈을 꾸다
 
  “(꿈에) 그 선교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기다리고 있다가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같이 가자는 눈짓을 하는데 바닷가에 임시로 지은 창고가 큰 게 두 개 있는 데로 가더니 창고 문을 열어봤어요.”
 
  ― 뭐가 보이던가요.
 
  “보니까, 일본 사람 시신이 거기 가득 찼어요. 저 밑쪽까지. 깜짝 놀랐거든요. 또 날 데리고 두 번째 창고에 가더니 또 열어봐요. 그 자세히 보라고 말이야. 이렇게 보니까 내가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일본 동창들도 있는데 전부 일본 사람이야. 그래 깜짝 놀라서 깨고 나니까, ‘뭐이’ 좀 이상하데.”
 
  이 대목에서 선생은 이북 사투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때 떠오르는 거야. 뭔고 하니, ‘혹시 일본이 전쟁에서 졌을지 모르겠다’고. 그러고선 또 잠이 들었거든요. 새벽 늦게 또 꿈을 꾸는데 내가 넓은 옥토(沃土)에서 연장 멘 소를 끌며 밭을 갈고 있어요. 이렇게 밭을 가는데 정말 밤인지 낮인지 모를 이상한 날씨인데, 시간이 어떻게 됐나 보니까 동쪽에 태양이 있어요. 큰 태양. 아주 큰 태양. 쟁반 같은 태양이 동쪽에서 올라오는 게 아니고 동쪽으로 넘어가요.
 
  그래서 이상하다. 태양이 저 동쪽으로 넘어가게 되면 어두워질 텐데 저녁이 되면 밭을 어떻게 가나 말이지. 갈긴 갈아야겠고, 그러고선 꿈에서 깼어요.”
 
  선생은 아버지에게 꿈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 말을 가만히 듣던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 나이 때에 꿈을 꿨는데 동쪽 산에서 야구공같이 작은 태양이 거기서 무수히 떠올라 하늘에 깔리더라. 그러더니 일제 시대가 됐다’고 하는 겁니다. 일본 깃발이 태양 아니에요? 아버지가 ‘태양이 동쪽으로 졌으니까 오늘 조반 먹고 평양 좀 가서…’. 그때는 뉴스가 없었으니까요. ‘평양에 무신(무슨) 소식이 없나 보고 오라’는 겁니다.
 
  평양에 누이동생이 살고 있었는데 만나보려고 한 8km 정도 가도 변화가 하나도 없어요. 역시 꿈은 꿈인가 보다 생각하며 평양역에서 서평양역까지 가는 전차를 탔어요. 그걸 타고 가다가 시청 앞에 멎으니까 내리는 사람은 내리고 타는 사람은 타는데, 전차 문이 열릴 때 길 건너 가게에서 방송이 들려와요. ‘천황 폐하의 방송이 있다’고. 뛰쳐 내려가지고 가게에 들어갔죠.”
 
  선생의 말씀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그때가 정오였어요. (라디오에서) 기미가요가 끝나고 천황이 말하는데 뭔고 하니, ‘이제 모든 전쟁은 끝났고 우리는 조건 없이 항복한다’는 거예요.
 
  아, 전쟁이 끝났구나. 20리 밭길을 걸어 집으로 오는데 어떻게 그 소식이 전해졌는지 소달구지에 짐 싣고 피란 가던 사람들이 길에 멈추고서 ‘더 피란을 가야 하나 어떡하나’ 하고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평양에서 오니까 ‘전쟁이 끝난 건가요?’ (하고 묻기에) ‘끝났어요’ ‘그럼 피란 갈 필요가 없겠네요’ ‘이젠 피란 갈 필요 없어요’라고 그랬죠. 그렇게 해서 고향으로 왔거든요.”
 
  선생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꿈은 시간의 강을 건너 선생에게 닿았고, 태양이라는 상징을 품은 채 돌고 돌아 마침내 해방이라는 찬란한 결말에 이르렀다. 그 모든 흐름이 하나의 선율처럼 이어지는 유기적 연대라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8년 선배 김성주와의 만남
 
  ― 해방이 되니 제일 먼저 어떤 생각이 드시던가요.
 
  “이제는 내 나라에서 살게 됐다, 말이야. 그때 감격은 뭐라고 말할 수 없어요. 우리 젊은 사람들은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죠. 나이 든 사람들은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고. 감격스럽게 해방을 맞이했는데,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은 겪지 못한 경험을 했어요. 해방이 되고 한 일주일? 열흘은 안 됐던 것 같아요.
 
  내 고향은 평양 만경대고요, 졸업한 초등학교는 거기서 한 2km쯤 떨어진 칠골(평양 대동군 칠골마을)인데 거기 창덕소학교를 5~6학년을 다녔거든요.
 
  고향에서 다닌 학교는 4학년까지밖에 없어서…. 교회에서 세운 학교예요. 그 학교에 여덟 살쯤 많은 김성주라는 선배가 있었는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후 만주로 갔다는 것만 알지 행방을 몰랐거든요. 그 김성주가 해방이 되어 20년 만에 고향에 왔단 말이죠. 그래서 그날 아침 할아버지 집에서 동네 어른들 모시고 조반(朝飯)을 드는데 그 마을에 대학 나온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너도 가서 보자’고 해요. 그래서 그때, 내가 25세 때인데 갔다고요. 가니까 김성주가 왔는데 스포츠카 같은 걸 타고서 왔어요.”
 
  이 대목에서 ‘스포츠카’에 대해 더 묻고 싶었지만 대화의 흐름을 깰까 봐 묻지 않았다. 아마도 지프가 아닐까.
 
  “내가 보기에 하나는(한 명은) 비서고 하나는 기사인데, (김성주와 함께 온) 그 사람들은 그 조반을 못 들고 밖에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김성주한테 ‘이제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 어떻게 됐으면 좋겠냐’고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김성주가 초등학생이 선생한테 숙제해서 바치는 것같이 ‘첫째는 친일파 숙청이고, 둘째는 전 국토를 나라가 가지는 거고, 셋째는 모든 공장이나 생산·경제 시설은 개인은 못 하고 나라가 하는 거고, 또 지주는 숙청하고…’ (모두) 6가지를 얘기해요.”
 
 
  김일성과 김성주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에서 원고를 보며 연설하는 김일성. 사진=미디어한국학
  선생은 얼핏 ‘저 사람은 사상이 없던 사람인데 일찌감치 공산당원이 됐구나’ 하고 느꼈다고 한다.
 
  “공산당원은 세계 어디나 똑같거든요. 그래서 좀 실망스러웠고 난 공산주의를 책으로 (읽어) 봐서 아니까 가까이할 사람도 아니라고 했었어요(느꼈어요). 그게 아마 (1945년) 9월 초쯤 될 거예요.”
 
  그렇게 9월이 지나고 10월 초, 김형석 선생은 “10월 3일로 기억한다”며 말을 이어갔다.
 
  “당시 북한의 일반 사상(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 뭔고 하니,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은 서재필(徐載弼)인데 서울로 갈 사람이고, 이승만(李承晩)도 서울로 갈 사람, 김구(金九)도 서울로 갈 사람, 평양에 올 사람은 김일성 장군밖에 없단 사상이었어요.
 
  ‘김일성 장군이 평양으로 올 텐데 언제 올까? 기다리자’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가득 찼거든요. 그때 소련군정실에서 김일성 장군이 돌아와 환영회를 한다고 해요. ‘그 사람은 이승만이나 서재필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이끌어줄 지도자’라는 암시를 주니까 (환영회를 하러) 평양 공설운동장에 갔어요. 그런데 소개를 받아 나타나는 이를 보니까 젊은 사람이야. 김성주가 나왔어요.”
 
  놀랍게도 김일성은 다름 아닌 여덟 살 많은 고향 선배 김성주였던 것이다. 김일성 환영 평양군중대회는 1945년 10월 14일에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대대적으로 열렸다. 북조선분국과 소련 제25군의 주최로 30만~40만 명으로 추산되는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이날 33세의 김일성을 두고 가짜 소동이 일었다고 전한다. 김구나 이승만 정도의 노장(老壯)이 등장할 줄 알았는데 예기치 않게 젊은이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김일성 집안 이야기
 
  “만약 김성주를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가 (그에게) ‘종교 문제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면 뭐라 했을까요. 왜냐면 거기 모인 사람(마을 어른)들이 (교회) 장로였거든요.
 
  김성주는 그 자리에서 뭐라고 했을까요? ‘그건 당(黨)에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정치하고는 한계가 있다. 종교 문제는 사상적인 문제이기에 당에서 하는 거다’라고 아마 그랬을 거야.
 
  북한에서 기독교가 없어지는데 왜 없어지는지 누구도 몰라요. 그냥 당에서 ‘저 사람은 공산주의와 같이 있을 수 없는 종교 지도자’라고 하면 없애버리는 거예요. 예를 들어 우리 교회 김철인 목사님이 그런 편이었거든요.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님은 절대로 혼자 나가지 마라’고 ‘집을 떠나게 되면 위험하니까 누구와 꼭 같이 가라’고, 그리고 그 목사님 가는 데는 누구나 따라갔는데 한번은 목사님 집으로 전화가 왔어요.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나, 지금 목사님 만나러 가는데 잠깐 들러서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그러니까 목사님이 ‘거기 가서 같이 만나자’고 (그랬는데), 가는 15분 동안에 없어졌어요.”
 
  ― 김성주는 과거 교회에 다녔습니까.
 
  “그 집안이 철저한 기독교 집안이에요. 김성주 외삼촌은 강양욱(康良煜·1903~1983년) 목사고. 강씨 중에 강면석이라고 내 초등학교 동창이 있거든요. 걔가 반공(反共)운동에 걸려가지고서 감옥에 갔다가 병에 걸려 죽었거든. 유해를 받아와 장례를 치르려고 옷을 갈아입히는데, 가슴 안에 젓가락을 잘라 만든 십자가가 있었어요. 그 애는 나하고 가까웠거든요.
 
  (김성주가 살던) 그 동네 전부가 기독교 동네야. (김성주) 할아버지는 직업이 천했기 때문에, 부잣집 묘소 보는 일을 했어요. 아버지는 똑똑하니까 강씨 집안이 (사위로) 맞아들인 거예요. 그분은 내가 다닌 숭실학교 선배이자 크리스천이고요.”
 
 
  자유와 종교
 
2010년 10월 평양의 칠골교회의 일요예배 모습이다.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없다는 점을 감안해 체제선전용 예배로 추정된다. 사진=연합뉴스
  해방 후 김형석 선생은 자신이 다닌 초등학교 건물을 증축하고 농촌 청소년을 위한 중학교를 재건했다. 낮에는 정규 중학 과정을 가르치고 밤에는 인근 농촌의 청년을 대상으로 야학을 열었다. 당시 학교 재단 이사장은 선생의 아버지와 친구인 김현석 장로. 훗날 6·25 전쟁 때 피살되었다고 한다.
 
  ― 해방되고 2년 뒤 선생께서 가족과 동반해 38선을 넘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해방 후 2년 동안 공산 치하에서 사는 건 일제 시대를 사는 것보다도 힘들었어요. 자유주의자는 생각이 바뀌어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어도 종교를 가진 이는 안 된다고요. 그건… 아주 뭐 확고하거든.
 
  하여튼 내가 학교 교장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그중 ‘민청(民靑)’에 간 제자가 밤에 날 찾아오더니 ‘교장 선생님! 선생님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와요’ 그래요.”
 
  ― 그래서 남한으로 떠나실 각오를 하셨군요.
 
  “그때 내 목적은 ‘우리 (주변) 몇 마을에 젊은이들 중·고등학교 교육은 다 받게 해주자’였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 이상은 없었죠.
 
  어느 날 학교 이사장이 ‘이제 더는 도와줄 수가 없으니까, 김 선생도 아무래도 떠나는 게 좋겠다’ 그래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랬어요. 우리 집이 산 위에 있었어요. 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등지고서, ‘아무래도 좀 떠나야 할 것 같은데 어떡하지’ 고민하다가 그만 잠이 들었어요.”
 
 
  꿈에서 깨어
 
  선생의 꿈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심상치 않은 꿈 이야기일 거라 유추하며 기자는 집중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잠이 들었는데, 꿈에, 보안군(보안서원)이 총을 내 가슴에 갖다 대고서 ‘왜 김일성대 교수로 안 오느냐’고 추궁해요.
 
  그래, ‘나, 그 얘기 들었다. 나보다 더 유능하고 훌륭한 교수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을 먼저 쓰고 내가 실력이 있으면 그땐 가겠는데 지금은 내가 갈 자격이 없다’ 그렇게 말했어요. 보안군이 생각을 하더니 ‘알겠다’고 그래요.
 
  그러더니 하늘을 향해서 총을 쏴요. 탕! 하는 소리가 나서 깼거든요.”
 
  ― 용한 꿈을 자주 꾸시네요.
 
  “살다 살다 참으로 별일도 많은데,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자꾸 이런 얘기하면 ‘종교인이 이상한 꿈을 많이 꾼다’고 그럴까 봐 얘기를 안 하는데요….”
 
  선생은 꿈을 알 수 없는 어떤 섭리로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선생이 꿈에서 깨어 산 아래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트럭 한 대가 오더니 그의 집으로 올라오는 길가에 멈추더란다. 두세 사람이 차에서 내려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 후 막내 남동생이 헐레벌떡 뛰어올라오더니 ‘형님 빨리 도망가라’고 그래요. ‘왜?’ 그랬더니 ‘이사장님이 지금 잽혀(잡혀)가는데 아마 형님 잡으러 올라올 것 같다’고 해요. 당시 재단 이사장(김현석 장로)이 평양에서 사업을 하다가 38선을 넘을 준비를 다하고 여든 넘은 어머니에게 인사드리러 왔었거든요. ‘어머니 저 얼마 동안 못 모시겠습니다’ ‘멀리 가냐’ ‘어디 좀 가야 되겠습니다’라고 말이야. 인사드리고 나오다가 잡혔다는 겁니다.
 
  그래서 서둘러가지고서 8월 16일 떠났거든요.”
 
 
  평양에서 사리원, 해주, 용당으로
 
  김형석 선생 가족은 평양에서 하룻밤 자고 기차를 타고 사리원까지 갔다. 이후 해주로 갔다가 배를 타고 남한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참 별일이 다 있어요. 객차의 제일 앞자리에 앉았거든요. 아내와 아이하고 앉았는데 우리 맞은편 자리에 젊은 사람 둘이 앉았어요. 가만히 보니, 기차가 (간이역에) 멈추면 나갔다가 오고, 멈추면 나갔다가 오고, 내 예감에 ‘저 사람들 저거, 탈북하는 사람들 잡는 형사로구나, 보안 형사로구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는) 너무 가까이 있으니까 못 본 것 같아. 하여튼 그래서 해주에서 내렸거든요.
 
  여관에 들어가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 몇 달이 안 된 아들을 아내가 업고서 (바다와 접한) 용당이란 곳으로 향했어요. 아들을 업은 아내를 50m쯤 앞세워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사복형사가 아내를 불러 세워 무언가를 물어봐요.
 
  걱정스러워하며 걷는데 아내가 내 남편하고 같이 간다고 그랬겠죠. 이들이 내게 오더니 ‘어디 가느냐’고 물어봐요. 근데 아내의 눈치가 뭔고 하니 ‘돈 좀 주면 풀어줄지 모르니까 좀 어떠냐’는 거예요. 그러고 싶진 않았고요. 그래서 우리를 초등학교 교실로 데려가요.
 
  앞동에는 남자들이, 뒷동에는 여자들이 따로 있었어요. 날 데리고 온 사람이 계장을 만나더니 ‘이 사람(들)은 아무래도 38선을 넘으려는 사람 같아서 데리고 왔다’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계장이 나와 아내를 책상 앞에 앉으라고 해요. 이제 조사를 하는 거죠. 서류를 꺼내놓고서 뭐라 물어보려는데 전화기가 따릉따릉 울려요. ‘누구 전화받는 사람 없느냐’고 말하는데 아무도 없으니까 자기가 일어서서 전화를 받고 말하는데 소리가 내 귀에 다 들려요.”
 
  선생은 이 대목에서 잠깐 호흡을 가다듬은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전화를 건 쪽에서 하는 얘기가 ‘오늘 거기 잡힌 놈들 많이 있냐’ 그래요. 그러니까 ‘이상하게 어제 오늘 많다’고 말해요. ‘지금 평양에서 지령이 떨어졌는데 이제부터 재피는(잡히는) 놈들은 전부 되돌려 보내라’니까 ‘알겠습니다’.
 
  (계장이) 조사하려다가 ‘따라 나오라’고 그래. 나가니까 부하 한 명을 찾더니, 내가 용당이 아니라 ‘장연으로 간다’고 거짓말을 했거든요. ‘이 선생님이 장연으로 가신다고 그러는데 버스 정류장까지 데리고 가서, 떠나는 것 보고 오라’고 그래요. 그 사람이 ‘알겠습니다’ 하더니 날 데리고 버스 정류장까지 갔어.
 
  내가 아슬아슬하게 ‘호랑이 입’에서 나오긴 했는데 이제 어떻게 할까 하고 있었거든. 버스표를 사면서 ‘틀림없이 갈 테니까 마음 놓고 가시라’고 그러니까 ‘꼭 가셔야 합니다’, ‘그러겠다’고 하고 정류소에 그냥 앉아 있는데 참, 사람이 운명이라 해야 할까요?
 
  내가 중학교 교사를 하기 전에 초등학교 교장을 잠깐 했어요. 고향 학교에서요. 그 학교에 ‘조 선생’이라고 있었는데 언젠가 ‘교장 선생님, 제 누님이요, 해주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38선을 넘어가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하고서, 누님 이름하고 전화번호를 줬던 게 있었거든요. (평양에서 떠나올 때) 짐을 가지고 다닐 수 없으니까 (그 메모를) 주머니에 넣고 왔거든요. 그래서 전화를 걸었죠.
 
  직접 받더니 ‘가만히 거기 계시라. 두 사람이 갈 거다’고 해서 있는데 두 사람이 와요. 남녀가 오는데 남자가 나더러 ‘혹시 김 선생님 아니세요?’ 그래요. 내 아내는 그 여자가 데려가고, 나는 남자를 따라 골목골목으로 가서 조 선생의 누님 집에 갔어요.”
 
 
  ‘이제 넘었습니다’
 
1945년 8월 평양에 들어온 소련군이 행군하는 모습을 평양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사진=조선DB
  그 집에 도착하니 함께 38선을 넘으려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조 선생의 누님이라는 분이 아내더러 ‘사모님은 여기가 괜찮은데 김 선생님은 (어디서) 조사를 오면 좀 거북스러우실 테니 미안하지만 다락방에 올라가 있으라’고 그래요. 밤 12시쯤 되어 우리를 데리고 내내 수수밭 같은 곳으로 데리고 갔어요. 그 길의 끝에 이르니 바닷가였어요. 가만히 살펴보니까 수비(경비)하는 사람(군인)들이 한 100m 거리를 두고서 왔다 갔다 해요.
 
  그러면 나룻배가 그 빈틈을 타고 네 명씩 데리고 떠나는 거예요. 깜깜한 밤에 나룻배들이 여기저기 보여요. 그 배를 잡으려고 또 통통선(일종의 북한 경비정)이 따라다니고…. 마치 전쟁 마당 같았어요.
 
  그런데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게, 배 젓는 사공의 땀이에요.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렀어요. 그러더니 ‘수영하는 선생이 누구냐’고 그래요. 내가 ‘수영할 수 있다’고 하니 ‘수영하는 선생은 옷을 벗고 있다가 통통배 소리가 들리면 바다로 뛰어들어 배 밑에 숨으라’고 해요. 그렇게 한참을 노를 저어 가더니 사공이 ‘이제 넘었습니다’ 그래요.
 
  (남한에) 도착하니 서북청년단이 있었고 그들이 여기저기 피워놓은 모닥불 앞에 배 타고 건너온 사람 5~6명이 모여가지고 날이 밝으면 떠나려고 불을 쬐고 있는 거예요. 거기(서북청년단원에게) 가서 내 아내 이름을 알려주고는 찾아달라고 하니 얼마 후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왔어요.”
 
  아내는 그날 북한 경비정에 의해 끌려가는 나룻배를 세 척이나 보았다고 했다. 숨이 멎는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그는 자유가 생명보다 값지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체험했다. 그날은 1947년 8월 18일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김형석 선생은 당시의 기억을 하나씩 서랍에서 꺼내듯이 차근차근 정리해 나갔다.
 
  “대한민국이 ‘나라다운 나라’가 된 건 언제인가?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 될 때가 아니고요, 나는 6·25 전쟁 때라고 봐요. 3년 동안 전쟁을 겪으면서 ‘이게 대한민국이다!’ 말이지.
 
  자유민주주의는 6·25 전쟁 때 확고해졌어요. 이승만 때에 확고해지고 나니까 새 출발을 하게 되었어요. 그분은 국제 현실은 잘 아는데 국내 현실은 잘 몰랐어요. 정말,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쳤는데 4·19 때 수백 명의 젊은이가 희생됐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그래서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는데도 왜 아무도 얘기해 주는 이가 없느냐’고 해서 누가 ‘허정(許政·당시 서울시장, 국무총리 서리 등 정부 요직을 역임했다) 선생을 모셔오면 어떨까?’ 해서 허정이 왔거든요.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와서 얘기도 안 해줬냐?’고 하니 허정 왈(曰) ‘여러 번 왔습니다. 왔는데 비서들이 문전박대하면서 뵙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승만) 박사가 울더라고 그래요.
 

  4·19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는가? 독재와 부정은 대한민국에서는 용납 안 된다! 부정투표를 했거든요. 부정투표나 독재는 대한민국에서 용납될 수 없다! 그 희생의 강물을 겪었기 때문에 그 한 단계를 넘은 거야. 4·19를 겪고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들어섰는데 박정희는 군대에서 다 아는 좌파입니다. 공산당원 같기도 해요. 이런 정권이다 보니 나는 대한민국이 끝났다고 봤거든요.
 
  한데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서 ‘대한민국의 국시(國是)는 반공(反共)’이라 그러는 거야. 정치의 첫째 목표가 반공, 두 번째는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의지라는 거야.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를 건설했으니, 박정희의 경제도 그 길로 갈 수밖에 없었거든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국가, 경제는 자유시장경제… 이게 결국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거든요. 그리고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때까지 독재를 했고 군사정권이었는데 이걸 통틀어 말하면 ‘권력 국가’였지요.”
 
 
  “이제 남은 것이 통일인데…”
 
2016년 8월 서울 연희동에서 촬영한 97세의 철학자 김형석. 사진=조선DB
  김형석 선생이 말하는 권력 국가는, 단순한 행정기구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권력의 심장부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하는 합법적 폭력을 구사하는 국가를 일컫는 것으로 해석된다. 권력 국가라고 해서 반드시 독재 국가는 아니지만, 독재 국가 대부분은 극단적 권력 국가의 형태를 띠기 마련이다.
 
  “힘을 가진 강자가 지배하는 국가가 권력 국가입니다. 군사 정권이 끝난 다음에는 권력 국가도 끝이 나고 법치 국가가 되거든요. 이제부터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나라거든요. 나보고 얘기하라고 하면 그때가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때부터예요. 이후 군사 정권도 끝나고, 법치(法治) 국가가 돼서 법이 지배하는 나라가 된 겁니다. 나 혼자 생각에 ‘이젠 나라다운 나라가 됐다’ 말이야. 나라다운 나라가 됐다….”
 
  김형석 선생은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 그래도 남북이 통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통일에 대해 제일 구체적인 안(案)을 가지고 북한에 가서 김정일 만난 사람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죠. 그분이 우리 대통령 가운데 제일 생각이 넓었던 것 같아요. 돌아와서 한 얘기가 뭔고 하니 ‘남북한의 경제 격차가 너무 크기에 북한 경제가 올라오고 우리 경제가 비슷해지면 그때 통일된다’고 봤죠. ‘북한을 경제적으로 키워주자’고요.
 
  근데 공산주의를 모르고 한 말이죠. 나는 ‘그건 아니다’고 생각했어요. 공산 정권이라는 강이 하나 생기고, 대한민국이라는 강이 또 하나 생겼는데, 같은 강에서는 (두) 배가 손잡을 수 있어도 강이 다르면 안 됩니다.”
 
 
  통일은 시간이 되면 이루어진다
 
제공=파카(PARKER) 만년필
  이런 말도 덧붙였다.
 
  “이제 남은 것이 통일인데 두 개의 강물이 하나가 될 때까지 북한을 ‘옆 나라’로 생각해라, 말이지. 자극을 주지 말고! 정부가 앞장서지 말고 남북한 동포들이 교류할 수 있는 데까지 많이 하게 하라! ‘정치’ 없이 말이죠.”
 
  기자는 《월간조선》 독자를 위해 통일에 관한 문구 하나를 써달라고 청을 드렸다. 선생은 망설임 없이 통일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담아냈다.
 
  〈통일은 시간이 되면 이루어진다. 서로 만나고 문화를 나누며 경제적 교류를 가진 후에 정치와 정부 간의 통일이다. 인내와 동포애를 높여 가자. 김형석〉
 
  선생의 역대 대통령 평이 이어졌다. 다소 부정적이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을) 계승하거든요. 미안하지만 노 대통령은 상식과 인격으로 정치한 사람이 아니고, 성격으로 정치한 사람이거든요. 성격으로 (정치)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어요.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토목 공사를 할 사람이지 정치할 사람이 아니거든요. 대단히 미안한 얘기지만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은 아버지가 대통령이니까 청와대를 따라다니면서 보긴 봤지만 대통령 할 사람 아니거든요. 그래서 주저앉았죠.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이 들어오니까 같이 일할 사람은 운동권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친북(親北) 좌파까지 거기(청와대에) 들어갔거든요.
 
  문재인 대통령 5년 동안에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경제 노선을 끌고 갔으면 훨씬 좋았을 거예요. 제일 나쁜 게 뭔고 하니 ‘기업가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 ‘부자 때문에 가난해졌다’. 이후 우리 국민이 분열됐거든요. 윤석열(尹錫悅) 대통령 역시 대통령이 될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실용주의 노선이 필요한 까닭
 
  선생은 이재명(李在明) 정부에 대해서는 기대감을 내비쳤다.
 
  “이재명 대통령을 보니 ‘경제는 문재인 대통령과 같이 가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내가 항상 하는 얘기 가운데 하나가 실용주의예요. 국제무대에서 실용주의로 성공한 나라가 미국이거든요. 정치, 경제가 실용주의로 가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어요.
 
  실용주의가 뭔고 하니 경험주의에서 시작됐어요. 카를 마르크스같이 이념을 먼저 세우고 따라가는 게 아니고, 현실을 개선하자! 실용주의에서 대화는 혁명과 폭력이 아니다! 언어폭력도 아니다! 끝까지 대화를 하다 보면 저절로 열매를 많이 거두게 됩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운 좋게 그 변화로 가면…. 지금 야당이 너무 힘이 없으니까 말이죠.”
 
  격동의 한 세기를 살아오며 한반도와 국제 정세의 굽이치는 물결을 온몸으로 겪어낸 철학자 김형석. 105세 노(老)철학자가 또렷한 기억으로 서술해 준 한국 근현대사의 기억 앞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감격해했던 해방의 기쁨을,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 해방 80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는 그날의 감격만큼 깊고 단단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지금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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