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인물

내가 만난 딘 헤스 대령

한국군 조종사 양성, 전쟁고아 1000여 명 구제

  • 글 : 홍성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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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 250회 이상 전투 출격
⊙ 전쟁고아 위해 제주에 한국보육원 건립… 귀국 후에도 방송 등을 통해 지원 호소
⊙ 이승만, 한국군 조종사들에 대해 보고하니 “우리 애들이 잘하고 있어? 비행기를 조종할 줄 아나?”라며 좋아해

홍성표
1956년생. 공군사관학교 졸업, 한국외국어대 정치학 석사, 영국 헐대학(Hull University) 국제정치학 박사 / 공군 조종사, 미 랜드연구소 연구원, 국방대 안보대학원 군사전략학과 교수, 미국 공군대학원(AFIT) 교환교수, 공군 대령 예편, 아주대 대학원 국방디지털융합학과 교수,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연구소장 역임. 現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전문연구위원 / 저서 《걸프전 항공전역 분석》 《항공전의 역사》 《아틀라스 세계항공전사》(공역)
딘 헤스 대령(오른쪽 군인)은 6·25 전쟁 중 1000여 명의 고아들을 돌봐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졌다.
필자는 국방대학교 군사전략학과 교수 시절 안식년을 맞이하여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공군대학원(AFIT)에 교환교수로 가 있던 2009년 5월 딘 헤스(Dean Hess·1917~2015년) 예비역 공군 대령을 처음 만났다. 92세의 고령에도 그는 휴버 하이츠 고등학교의 보조교사로서 아주 건강하고 평온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손주와 컴퓨터 항공 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기는데 거의 매번 손주한테 진다. 공산군보다도 더 센 녀석”이라고 조크도 했다. 이후 근 5개월간 매주 일요일 조찬을 함께 하면서 한국전 경험담을 들었다. 오랜 경륜에서 나오는 깊이 있고 품격 있는 위트와 조크는 그와의 만남을 매번 기다려지게 했다.
 
 
  ‘1인 공군’
 
  딘 헤스 대령은 대학에서 신학(神學)을 공부하고 전도사 생활을 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하여 유럽 전역(戰域)에서 300회 이상 전투 출격한 베테랑 전투조종사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공군 소령이던 그는 한국군 조종사 양성 부대인 제6146부대장으로 차출되어 7월 4일 대구 활주로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한국 조종사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공산 침략군을 막기 위한 전투 출격도 250여 회나 했다. 1인 다역(多役)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그를 미 공군에선 ‘1인 공군(One Man Air Force)’이라 불렀다.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불과 1년도 못 되는 기간에 그의 휘하 10명의 조종사 중 7명이 전사했다.
 
  대구기지는 주위가 논바닥이다 보니 항상 질척하고 습했다. 그래서 기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쪽에 땅을 파고 천막을 쳤다. 이 작업을 하면서 그는 공동묘지를 처음 보았다. 한번은 한 무리의 사람이 공사 현장에 나타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잠시 후 검은 망사모자(갓)에 흰 두루마기 차림의 점잖은 노인이 무리 사이로 나타났다. 지주(地主)쯤 되는 기품 있는 노인이었는데, 한 줌의 턱수염 때문에 마치 족장(族長)같아 보였다. 그는 통역관을 통해 조상 묘는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공손하게 요청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답하자 노인은 군중을 데리고 내려갔다.
 
 
  이승만과의 만남
 
소령 시절 헤스는 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을 수시로 예방해 한국 공군의 성장과 전황 등을 보고했다.
  당시 대구 동천비행장에 주둔한 제6146부대장 헤스 소령은 대구로 피란 내려온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임시관저로 직접 찾아가 뵈었다. 존 무초(John J. Muccio) 주한미국대사의 수석보좌관 존 노블(John Noble) 박사가 몹시 지쳐 있는 이 대통령을 만나 여러 이야기를 건네면 기운을 북돋울 수 있을 것이라며 방문을 권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첫 만남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첫인상은 무척 인자해 보였다. 그의 눈은 열정적이었고 카리스마를 지닌 선구자라 할 만했다. 그는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인물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헤스 소령이 전하는 그날그날의 전황(戰況) 소식을 무척 반가워하면서 관저로 자주 불러 심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한국군 조종사들의 훈련 얘기를 들을 때면 흥분하여 “우리 애들이 잘하고 있어? 비행기를 조종할 줄 아나?”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루 12회 출격하기도
 
진해기지 시절의 딘 헤스. 그는 한국군 조종사 양성과 전투 출격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불운의 두 장군, 윌리엄 딘 소장과 월튼 워커 중장도 가끔씩 부대를 찾아와 긴급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사단의 부대 배치 상황을 자주 알려주었다. 헤스 소령은 이를 기회가 될 때마다 적군들을 항공기로 공격해 달라는 주문이라고 생각했다. 미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질서 정연해 보이면 무조건 폭격하게. 아군은 질서고 나발이고 없으니까 말이야”라면서 파안대소했다. 훗날 딘 소장은 대전 전투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워커 장군은 크리스마스 이틀 전 의정부 인근에서 지프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제6146부대는 전황에 따라 사천, 진해, 김포, 여의도, 평양, 대전, 다시 여의도로 이동하면서 비행훈련과 전투 임무를 계속했다. 특히 진해로 이동했을 때에는 활주로가 짧아 항공기 이착륙이 불안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이 대통령은 인부 450여 명을 우선 동원하여 활주로 연장 공사를 하도록 했다.
 

  이 시절 헤스 소령은 미 제25사단의 항공 지원 요청으로 하루에 12회나 출격하는 대기록도 남겼다. 낙동강 방어전을 치르던 25사단의 긴급 요청으로 진격하던 공산군들을 차단 격퇴하기 위해 공습을 줄기차게 감행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후 진해를 거쳐 부산으로 피란했다. 헤스 소령은 관저로 자주 찾아뵙고 전황을 보고 드렸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서울이 함락될 때 겨우 챙긴 한복 서너 벌로 대통령의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헤스 소령이 일본 출장길에 양장 몇 벌을 사 오겠다며 옷 사이즈를 여쭙자 프란체스카 여사는 “우리 국민들이 전란(戰亂)으로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데 어찌 좋은 옷을 탐하겠느냐?”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중령 진급과 100회 출격
 
한국군과 미군은 한마음으로 헤스 중령의 100회 출격을 축하해 주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헤스 부대는 여의도기지로 이동했다. 활주로 복구 작업에 한창이던 어느 날, 예고도 없던 항공기가 갑자기 착륙하더니 제5공군사령관 얼 파트리지 중장이 내렸다. 파트리지 중장은 다짜고짜 그에게 다가와 “자네 복장이 그게 뭔가? 미군 장교 맞아?” 하면서 버럭 화를 냈다. 헤스 소령이 황급하게 자신의 행색을 훑어보니, 바지는 한쪽이 무릎 위까지 걷어 올려져 있었고 웃옷은 흙이 묻은 채 땀에 절어 완전히 노무자나 다름없었다. 그가 당황해하자, 파트리지 장군은 화난 표정으로 소령 계급장을 확 잡아 뜯더니, 주머니에서 중령 계급장을 꺼내 달아주며 말했다. “고생 많았네. 진급 축하해!” 일종의 ‘서프라이즈!’였던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헤스 소령은 중령으로 진급했다.
 
  100회 전투 출격을 하고 돌아왔을 때에는 특별한 축하를 받았다. 기지로 복귀하여 착륙을 하는데 전(全) 부대원이 해안벽과 활주로 경계를 따라 도열한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비행기가 완전히 멈추자 병사 2명이 다가와서 조종석의 그를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태우고는 콧수염을 길러 ‘구둣솔’ 별명이 붙은 장덕창 대령 앞으로 갔다. 장 대령은 그에게 ‘一百(일백)’이라고 한자로 쓴 금메달을 선물했다. 헤스 중령은 ‘벌써 100번이나 출격했구나’ 하는 감회와 함께 한국인과 미국인 전 부대원이 한마음 되어 하나로 뭉친 모습에 진한 감동을 받았다.
 
  이에 앞서 그가 감동을 준 행사도 있었다. 하루는 한국 조종사들이 황소 한 마리를 가져왔다. 한국 공군참모총장 김정렬 장군이 그에게 그 황소를 수여했다. 그 자리에는 황소의 주인인 농부도 함께했는데 “정든 소를 팔기 싫어서 퍽 망설였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 마음이 안쓰러웠던 그는 며칠 후 그에게 황소를 돌려주었다.
 
  이 무렵 고아들이 부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헤스 중령은 고아들을 쫓아내는 부대원들에게 따로 천막을 치고 고아들을 거두게 했다. 이렇게 하나둘 모여 그 수가 금방 1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군수물자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이들을 서울의 중앙고아시설로 보냈다. 후에 이곳은 제5공군고아원이 되었고, 사령부 산하 모든 미 공군부대가 이러한 고아들을 위한 구호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제6146부대의 작전
 
  유엔군의 북진(北進)에 따라 제6146부대도 평양의 미림비행장으로 이동했다. 평양에서의 2개월 작전 기간 동안 유엔군과 공산군 조종사들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했다. 압록강을 넘지 말라는 백악관의 지시에 따라 압록강 상공에서 돌아가는 유엔 공군기들을 보고 공산군 조종사들은 공중에서 급습한 후 전속력으로 압록강 너머로 달아났다. 이 때문에 적기(敵機)를 단숨에 격추하기 위해 유엔군 조종사들은 사력(死力)을 다해야 했다. 개중에는 적기에 피격되어 희생되는 동료를 보고는 눈이 뒤집혀 압록강이고 뭐고 안중에도 없이 단둥(丹東)의 적 비행장을 초토화해 버린 조종사도 있었다. 그는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본국으로 즉각 송환되었다.
 
  제6146부대원들은 주로 적 지상군을 공격하는 항공근접지원 임무들을 수행했다. 어느 새벽 함께 출격했던 잭슨 대위가 적의 고사포(高射砲)에 맞아 불시착했다. 그는 다행히 구조되어 장기간 치료받은 후 지상 근무로 전환되었다.
 
  또 한번은 4기 편대로 출격하여 시흥 인근의 어느 숲 상공을 지나는데 적의 고사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한국 조종사가 모는 전투기가 고사포에 맞았는데, 통제가 안 되는 와중에도 끝끝내 적의 고사포대를 향해 급강하하여 자폭(自爆) 공격으로 박살 내며 장렬하게 전사(戰死)했다.
 
 
  제주 한국보육원
 
제주에 건립한 한국보육원의 관계자와 전쟁고아들이 모여 찍은 기념사진. 1·4 후퇴 후 1000여 명의 전쟁고아를 수용했다.
  북진의 기쁨도 잠시,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유엔군은 후퇴했고, 서울은 다시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됐다. 당장 급하게 1000여 명의 고아들을 제주도로 긴급 후송해야 했다. 인천항으로 오기로 했던 해병 LST는 오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제5공군의 C-54 및 C-47 항공기 15대가 혜성처럼 나타나 김포에서 제주도로 고아들을 실어 날랐다. 폐교(閉校)한 학교 건물을 대충 손봐 고아들을 수용했는데 당장 추위와 식량 부족을 해결해야 했다. 제주도의 한국보육원은 그 수용 인원에 비해 모든 것이 턱없이 부족하여 닥치는 대로 긴급 지원물품을 끌어대야 했다.
 
  당시 6146부대는 20대의 항공기를 운용했다. 10대는 대전에서 전투 임무에, 나머지 10대는 제주도에서 비행 훈련에 투입되었다.
 
  제주기지 인근의 한국보육원을 위해 장병들은 급여의 일부를 기부하기도 했지만 1000여 명의 고아들을 돌보기엔 부족했다. 1000명이 넘는 고아원에 신발은 겨우 200켤레밖에 없었다. 며칠 후 뜻밖에도 300달러가 모금되어 600켤레의 신발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군 조종사 대령의 월급이 8달러였으니, 300달러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이 외 부대 내에 목로주점을 열어 주당 벌어들이는 수익금 500~1000달러를 고아원 지원을 위해 기부했다. 장병들은 고아들을 위한 자선사업이라는 얘기에 한잔에 5센트 하는 술 한 잔을 마시고 달러 지폐들을 선뜻 기부했다.
 

  1951년 3월엔 매일 출격해 300마일이나 북상하여 정찰 비행을 했다. 통상 인천으로 갔다가 북상하여 전선 일대의 산악 지역에서 목표물을 찾아 공격하곤 했다. 한국 조종사들은 특히 탄약 차량을 발견하면 더욱 신이 났다. 폭발할 때 솟구치는 불꽃이 장관이어서 적을 통쾌하게 응징했다는 자부심을 화끈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4월이 되자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적군은 서울을 재탈환할 목적으로 여의도 비행장 맞은편 한강변까지 진격해 와 거센 공격을 퍼부었다.
 
  전쟁 초기 유엔군은 한국 공군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공군 전력(戰力)이라는 것이 변변치 못했기 때문이다. 미 공군이 제공한 F-51 무스탕 10대에 연락기 및 훈련기 20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점차 조종사와 항공기 수가 늘어나고 정비 기술도 향상되면서 그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특히 F-51 무스탕을 75대나 보유하게 되자 유엔군도 한국 공군의 전투력을 인정하여 중요한 작전 임무를 배당했다. 한국 공군의 전투 출격도 급증하였으며 괄목할 만한 전과(戰果)를 올리기도 했다.
 
 
  한국 고아 입양해 키워
 
헤스 대령 내외는 종전 후에도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는 등 한국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헤스 중령은 1951년 5월 하순 제5공군사령관 팀벌레익 장군의 출두명령서를 받고 대구로 갔다. 무슨 작전회의가 있나 싶었는데, 장군은 그에게 250여 회의 전투 출격 공로를 치하하며 “한국 공군의 훈련 상황이 완벽하니 이제 한국을 떠나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헤스 중령은 허탈한 마음을 안고 여의도로 돌아왔다. 생사(生死)를 같이했던 전우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 다음 날 제주도로 날아가 부대원들과 고아원에 작별을 고할 때는 더 이상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부산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뵙고 대구의 제5공군에 제6146부대에 관한 최종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을 끝으로 모든 공식 절차를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극동공군사령부에서 복무 소감을 보고하면서 헤스 중령은 한국 공군에 더 많은 무기와 장비, 물자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헤스 대령의 자서전 《전송가》는 1956년 록 허드슨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져 큰 흥행을 거뒀다.
  귀국 후 헤스 중령은 자서전 《전송가(戰頌歌·Battle Hymn)》(1956년)를 출판했다. 책은 영화로도 제작됐는데 당시 톱 배우 록 허드슨이 주연을 맡았으며, 세계적으로 큰 흥행을 거뒀다. 수익금은 전액 제주도 한국보육원으로 직접 들어가게 했다.
 
  헤스 중령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NBC 방송의 〈This is your life!〉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미국 전역에서 전쟁고아들을 위한 구호품이 쇄도했다. 텍사스의 농부 제임스 르불론드는 젖소 20마리를 기부했는데, 이 소들은 바로 공군 C-123 수송기 편으로 제주도로 공수(空輸)되었다. 덕분에 고아들은 우유를 맘껏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헤스 중령은 6세짜리 한국 고아를 직접 입양해 키우기도 했다.
 
 
  김선도 감독의 보은
 
필자는 미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미 공군대학원 교환교수로 나가 있으면서 5개월 동안 헤스 대령과 만났다.
  다시 2009년. 주일 조찬을 함께 하던 중 헤스 대령은 한국에서 온 편지를 보여주며 필자에게 아는 분이냐고 물었다. 광림교회 김선도 감독의 편지였다. 내용은 “생면부지지만 이제야 헤스 대령님의 은공을 듣고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헤스 대령이 같이 만나자고 하여, 김선도 감독을 만나는 자리에 필자도 동석했다. 김선도 감독은 “이승만기념사업회 이사로 일하면서 헤스 대령의 공적에 대해 듣게 되었다”면서 “한국민을 대표해 꼭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이승만 대통령의 ‘경천애인(敬天愛人)’ 휘호 한 점과 현금 2000달러를 헤스 대령께 전했다. 헤스 대령은 깊은 감사를 표했다.
 
  안식년을 마칠 즈음 헤스 대령과의 주일 조찬 동석자들도 늘어났다. 김선도 감독 재방문일에 맞추어 라이트 패터슨(Wright-Patterson) 기지 장교클럽에서 오찬 모임을 가졌다. 30명 넘게 참석했다. 지난 이야기꽃들을 피우며 3시간 넘게 지속된 모임에서 참석자 모두는 크게 감동받았다. 신시내티에서 온 이배석 박사가 900달러가 넘는 점심값을 아무도 모르게 미리 지불하면서 필자에게 귀한 모임 주선해 주어 고맙다고 인사했다. 훗날 김선도 감독과 광림교회 신자들은 제주도 항공박물관에 딘 헤스 기념탑을 세울 수 있도록 재정적 후원을 했다.
 
 
  아들들, 한미동맹상 상금 고아원에 기부
 
  2024년 가을 둘째 아들인 에드워드 헤스(Edward Hess)의 전화를 받았다. 제3회 백선엽장군한미동맹상을 선친(先親)이 수상하였는데, 형제들이 그 상금 3만 달러 전액을 한국의 고아원에 기부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니 주선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제주도의 홍익원으로 연결해 주었다.
 
  올해는 헤스 대령 서거 10주기이다. 5월 22일 제주항공박물관에서 아들 3형제가 참석한 가운데 이영수 공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추모식을 거행했다. 다음 날에는 공군발전협회·한미안보연구회 공동 주관으로 전쟁기념관에서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딘 헤스 스토리 토크 콘서트’를 열어 헤스 대령을 회고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오늘날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세계 10대 경제강국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 헤스 대령과 같은 분들의 숭고한 헌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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