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권의 반일 포퓰리즘… 한일 관계 ‘잃어버린 10년’
⊙ “독일과 프랑스의 엘리제 조약처럼 한일도 교류 제도화해야”
⊙ “한국 외교, 한국 전쟁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 이재명 정권은 일본과 역사 화해 이루고 전략적 파트너십 관계 구축해야”
⊙ MB의 독도 방문, 천황 사과 요구… 한 달에 네 차례 초치된 유일한 주일대사
申珏秀
1955년생. 서울대 법대 졸업, 서울대 법대 국제법 박사 / 제9회 외무고시 합격(1975), 외교통상부 제1차관·제2차관, 주일본 대사, 주이스라엘 대사, 주유엔대한민국대표부 차석대사 역임. 現 니어재단 부이사장
⊙ “독일과 프랑스의 엘리제 조약처럼 한일도 교류 제도화해야”
⊙ “한국 외교, 한국 전쟁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 이재명 정권은 일본과 역사 화해 이루고 전략적 파트너십 관계 구축해야”
⊙ MB의 독도 방문, 천황 사과 요구… 한 달에 네 차례 초치된 유일한 주일대사
申珏秀
1955년생. 서울대 법대 졸업, 서울대 법대 국제법 박사 / 제9회 외무고시 합격(1975), 외교통상부 제1차관·제2차관, 주일본 대사, 주이스라엘 대사, 주유엔대한민국대표부 차석대사 역임. 現 니어재단 부이사장

- 사진=조준우
“1년은 천국, 1년은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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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도쿄 북동쪽 373km 지점에서 사상 최악의 9.0 강진이 발생, 전국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원자력 발전소 등이 무너진 가운데 한국에서 급파된 중앙119 구조대원들이 3월 15일 오후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1년은 천국, 1년은 지옥이었지요.”
주일대사 2년 임기를 회상하며 그가 말했다.
“1998년 한국이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시작했습니다. 2003년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방영됐어요.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에 대해 느끼는 일본의 친밀도가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2010년 한일 무역액이 처음으로 1000억 달러를 넘겼습니다. 이전엔 B2B 교역이 대부분이었다면 B2C 거래가 열리기 시작했어요.”
― 한류도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지요.
“어느 정도였나면요, 가장 우파인 후지TV에서 골든아워(아침 10시와 저녁 7시)에 주당 40시간씩 한국 드라마, 영화를 방영했어요. 한류 가이드 책이 10만 부씩 팔렸고요. 2012년엔 한국 뮤지컬 전용극장이 롯폰기에 생겼습니다. 1년 내내 한국 뮤지컬만 공연하는 곳이었어요.”
당시 분위기를 통계로도 알 수 있다. 일본 내각부는 매년 일본인이 주변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친밀도 조사를 한다. 한국에 대한 친밀도(100점 만점, 친밀감+다소 친밀감)는 2009년 63.1점, 2010년 61.8점, 2011년 62.2점을 기록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2011년 3월 11일에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잖아요. 대사로 부임하자마자 바로 현장인 동북 3현(미야기·이와테·후쿠시마)을 3박 4일 동안 다 돌았어요. 그랬더니 어딜 가나 한국에 대해 엄청 고마워했습니다. 한국이 대만 다음으로 일본을 많이 도와줬거든요. 당시 한국 정부와 민간이 8000만 달러를 지원했어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도 모금에 참여했고요. 긴급구호대 파견, 물자 지원, 의료 지원 등 다양한 형태였지요. 한국 NGO들이 자원봉사활동도 많이 갔습니다.”
― 8000만 달러요? 엄청난 금액이네요.
“이런 식으로 돕기도 했어요. 치바에 있는 정유 시설이 고장 난 겁니다. 한국에서 정유한 석유를 일본으로 보내주고, 일본으로 갈 원유를 한국으로 돌렸어요.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에 대해 어떤 호감도를 떠나 ‘정말 우리의 이웃이구나’라고 강하게 느끼고 있었어요. 그러다 2012년 후반부터 관계가 급속도로 안 좋아졌지요.”
엇나간 2011 한일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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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맨 왼쪽)와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맨 오른쪽)이 2011년 12월 17일 일본 교토의 교토 게스트 하우스에서 저녁 식사 전에 메뉴를 읽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신각수 당시 주일대사다. 사진=뉴시스 |
“저는 사실 2011년 12월 18일 교토 한일정상회담을 많이 기대했어요. 전날이 이명박 대통령 생일에다 대통령에 당선된 날이기도 했습니다. 일본 측에서 생일 케이크를 준비해 이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함께 3시간 동안 식사하며 대화를 나눴어요.”
― 분위기가 어땠나요.
“저는 이 대통령을 4년 반 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봤어요. 이 대통령 임기 가운데 6개월은 주이스라엘 대사를 했고, 귀국하자마자 외교부 2차관과 1차관을 지낸 다음 주일대사를 맡았지요. 이 대통령은 정말 CEO로서의 자질을 타고났습니다. 경제 외교에 발군이었어요. 사람을 설득하고 비즈니스를 하는 것은 역대 대통령 중 제일이지 않았을까요? 여기에다 이 대통령이 일본에 애정이 있었어요. 당시 이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뭔가 전향적인 조치를 얻어내려 굉장히 많이 노력했습니다.”
― 일본 측이 여기에 화답했나요.
“노다 총리가 한마디로 ‘영 아니올시다’였어요. 최고 지도자인 정치인으로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잖아요. ‘이게 참 복잡한 문제다. 어려운 문제인 걸 잘 알지 않으냐. 우리도 뭘 할 수 있는지 검토하겠다. 대통령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니 한번 함께 맞춰보자’ 이 정도 얘기했으면 충분했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법적으로 어떻고’ 실무자 수준의 대응을 한 겁니다.”
MB의 독도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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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8월 10일 오후 전격적으로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대형 태극기가 새겨진 조형물을 만져보고 있다. 현직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진=연합 |
“결국 회담은 결렬됐고 한일 관계는 기름 다 떨어진 자동차처럼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으로 2012년 8월 10일 이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지요.”
― 좀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어요. 더군다나 임기가 반년 남짓 남은 시점에서요.
“그전에도 ‘독도 갈까’라고 하셔서 제가 면전에서 안 된다고 한 적이 한 번 있었어요. 나중엔 편지를 두 번 드려서 말렸어요. 그런데 결국 방문하셨지요.”
당시 이 대통령은 수세에 몰려 있었다.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을 비롯한 주변 인사들이 잇따라 구속됐고, 낮은 지지율(18%)은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국면 전환용으로 독도행을 택했다는 의심을 받기 충분했다.
독도 방문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대형 지뢰가 터졌다. 충북 청원군의 교사 워크숍을 찾은 이 대통령이 천황을 거론한 거다. 당시 한 교사가 ‘아키히토 일본 천황의 한국 방문을 추진할 생각이 있느냐’고 질문하자, 이 대통령은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려면 우선 지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저질렀던 악행과 만행에 대해서 진심으로 반성해야 한다. 일왕이 대한의 독립투사들 앞에서 고개 숙여 사죄를 한다면 일왕 방한(訪韓)도 가능할 것이다. ‘통석의 염’ 같은 단어를 찾아서 올 거면 올 필요 없다”고 답했다. ‘통석(痛惜)의 염(念)’은 1990년 5월 24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일본을 찾았을 때 아키히토 천황이 과거사와 관련해 쓴 표현이다.
MB發 반일 포퓰리즘
일본 조야(朝野)가 발칵 뒤집혔다. 일본의 혐한 세력들은 ‘한국이 천황에게 도게자(土下座)를 요구했다’며 발언을 과장해 옮겼다. ‘도게자’는 땅 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절하며 사죄하는 걸 뜻한다. 우리로 치면 ‘석고대죄’와 비슷하다. 노다 총리는 “즉각 사죄하고 철회하라”고 항의했다. 심지어 오랜 기간 천황제를 부정했던 일본 공산당마저 이 대통령의 발언을 비판했다.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아사히신문》 칼럼(天声人語)엔 이 대통령을 두고 “정신이 나갔다(乱心)”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었던 천영우 전 수석은 훗날 이 사건을 두고 “이 전 대통령이 교사의 질문을 받고 평소 생각을 즉흥적으로 대답한 것”이라고 말했다. 현장엔 교육문화수석만 동행했다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예상 질문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참모진의 잘못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친일파 논란에 시달렸다. 일부 좌파 세력은 이 대통령의 출생지가 ‘오사카’라는 점을 들며 집중 공격했다. 이 대통령이 반일 포퓰리즘의 유혹을 쉽게 거부하지 못한 이유가 짐작된다.
한 달에 4번 주일대사 초치
― 일본 현지 분위기가 험악했겠네요.
“그렇지요. 제가 8월에만 10일, 17일, 24일, 31일 네 차례 외무성에 초치됐어요. 사실 이 대통령은 한일 관계를 잘해야 한다고 확고히 생각했거든요. 결국 한일 정상이 충돌한 게 위안부 문제 때문이잖아요? 아쉬운 대목이 있어요. 2012년 4월 사사에 겐이치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서울을 방문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사사에 안(案)’을 제안했습니다.”
― 어떤 내용이었나요.
“‘일본의 책임을 인정한다’ ‘일본 총리의 사죄 편지를 주한 일본 대사를 통해 피해자들에게 전달한다’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 지원기금을 조성한다’ 이 세 가지예요. 이것보다 나은 합의안이 나온 적이 있나요? 2015년 한일 합의도 결국 사사에 안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어요. 사실 사사에 안은 제가 사이토 쓰요시 당시 내각 관방부 장관에게 힌트를 준 겁니다.”
― 그랬나요?
“민주당 내에 과거사 문제에 전향적인 진보 계열 의원 그룹이 있었어요. 부임하자마자 그 그룹과 모임을 가지면서 사이토 부장관에게 타협 지점이 될 수 있는 사항들을 알려줬어요. 그걸 갖고 사이토 부장관이 외무성과 협의하여 만든 겁니다. 외교라는 게 타협 아닙니까. 우리가 100% 갖는 건 없어요. 일본 정부가 예산을 내놓겠다는 건 획기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사사에 안을 두고,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거부했다. 돌아보면 아쉬운 대목이다.
“당시 우리 정부에서 사사에 안을 진지하게 검토해서 밀어붙이겠다는 생각으로 임했더라면 8월의 독도 방문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 주일 한국 대사가 한 달에 네 번 초치된 건 유례없는 일 아닙니까. 초치되면 무슨 대화를 하나요.
“한 달에 네 번 초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일단 외무성 들어가는 입구부터 기자들이 빽빽하게 몰려 있어요. 기분이 무척 안 좋아요. 외무성 사무실에 들어가면 외무대신이 준비한 자료를 읽습니다. ‘귀 정부에 엄중히 항의한다’는 내용이지요. 그럼 가만히 앉아서 듣고 그 자리에서 대응할 말이 있으면 하고, ‘귀 정부의 입장은 본부에 보고하겠다’고 답하고 나옵니다.”
― 초치당하면 꼭 가야 하지요?
“그렇죠. 안 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 정부도 초치를 자주 합니다. 독도 문제나 과거사 발언 문제가 불거지면 일본 대사나 총괄공사를 초치하지요. 하여튼 네 번이나 불려가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도 수습은 해야 하잖아요. 대사관원들에게 말했지요. ‘평상시처럼 일하자. 한일 관계가 상처를 입었지만 회복할 수 있다.’ 매년 9월에 도쿄에서 한일축제한마당을 열곤 했어요. 한데 그 전까지 롯폰기에서 작게 열고 있었는데 이걸 하느냐 마느냐 하는 지경까지 된 거예요.”
― 중단했나요?
“무조건 하자고 했어요. 오히려 히비야공원에서 전해보다 더 크게 열었지요. 이렇게 노력을 쌓아가니 조금씩 정상화가 됐어요. 저는 재임 기간 일본 47개 도도부현을 다 방문했어요.”
“韓을 주요국 대우해 주는 日”
― 가면 뭘 합니까.
“우선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해요. 일본의 지역 신문은 영향력이 셉니다. 발행부수도 30만 부 이상이에요. 현지의 지사와 일한친선협회,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분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대학에서 강연을 해요. 공공외교죠. 국교 수립 이후 주일 한국 대사가 한 번도 안 찾은 현이 상당히 많더군요. 민단 분들을 초청해 그 지역의 한국 식당에서 식사를 대접했어요. 대사를 처음 만난다며 굉장히 고마워하고 감격해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 뜻깊은 방문이었네요.
“재일 한국인들이 어떻게 보면 참 외로운 경계인입니다. 일본 사회에선 이방인, 한국에서도 이들을 ‘반쪽발이’라 외면했었지요. 한일 관계가 나쁘면 이분들이 힘들어집니다. 그분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었지요.”
―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군요.
“강연도 많이 다녔습니다. 일본 상층부에는 상층부 사람들끼리 갖는 스터디 모임이 있어요. 주일대사가 좋은 건 그런 모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일본 사회 요소요소 사람들과의 접촉이 다 허용돼요. 미국에선 거의 불가능합니다. 미국에서 이런 모임에 접근하려면 G7 대사 정도는 되어야 해요.”
― 일본은 한국을 주요국으로 대우해 주는군요.
“완전히 주요국이에요. 주일대사는 외무대신을 자주 만날 수 있어요. 총리도 1년에 서너 번은 보고요. 제가 있을 때는 자민당 총재, 간사장, 정책위 의장이 한꺼번에 만나러 오곤 했어요. 이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한일 관계를 어떤 면에서 보면 좀 특수 관계로 대우해 줬죠. 그래서 주일대사의 활동 영역이 4개 주요국(미·일·중·러) 공관 가운데 제일 큽니다. 굉장히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자리예요.”
주일대사는 한국에서도 중요한 자리다. 주요 6개국(미국·일본·중국·러시아·UN·OECD) 대사의 일원으로 장관급 고위공무원에 속한다.
박근혜 정부의 反日親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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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3월 25일(현지시각) 네덜란드 헤이그 미 대사관저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맨 오른쪽)가 “박 대통령을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라고 한국어로 인사말을 건네고 있다. 사진=연합 |
“박근혜 정부는 ‘원 트랙’을 취했어요. 원 트랙은 과거사, 즉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 안 되면 한일 협력 없다는 겁니다. 굉장히 경직된 판단이었어요. 거기에 2014년 1월 다보스포럼과 3월 헤이그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은 아베 총리를 피해 다니다시피 했잖아요.”
다보스포럼에서 아베 총리는 일부러 일정을 바꿔서 박근혜 대통령 기조연설을 맨 앞자리에서 듣기도 했다. 그런데도 두 정상의 만남은 불발됐다. 헤이그 한·미·일 정상회담에서는 아베 총리가 먼저 박 대통령에게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박근혜 대통령님을 오늘 만나서 반갑스무니다(반갑습니다).’ 인사를 듣고도 박 대통령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아 당시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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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2015년 9월 3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망루에 올라 중국의 전승절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행사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맨 오른쪽)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에서 두 번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왼쪽에서 두 번째) 등이 참석했고 미국과 일본 정상은 불참했다. 사진=뉴시스 |
박근혜 정권이 왜 뜬금없이 반일친중 외교로 갔는지는 좀 더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의심되는 단서는 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이명박 대통령처럼 친일 논란을 겪었다. 아버지 박정희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일부 세력들은 이런 이유로 박정희 대통령을 두고 친일파라 비난한다.
“토착 왜구 운운한 文 정권”
일본 다쿠쇼쿠(拓殖)대학 해외사정연구소의 아라키 가즈히로(荒木和博) 교수에게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라키 교수의 부친 역시 일본육사 출신이었다.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과 동기(57기)였다. 그의 부친은 ‘한국 대통령이 동기생’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동문 대다수가 같은 마음이었단다. 1945년 폐교된 학교이니 졸업생끼리 동지애가 얼마나 끈끈했을까. 그런데다 동문 중 대통령이 나왔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웠겠는가. 아라키 교수가 한번은 박근혜 대통령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제 아버지가 (박정희 대통령과) 일본육사 동기”라며 “동문들이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박근혜 대통령이 아주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근혜 정권 기간에도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호감도는 급락한다. 2013년 40.7%, 2014년 31.5%로 수직 하락했다.
박근혜 정권이 어이없이 퇴진하고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했다. 문 정권 시기엔 어땠을까.
“문 대통령 때 한일 관계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문 정권은 외교의 축을 북과 서에 뒀잖아요. 남북 관계와 한중 관계죠. 그러다 보니 한미동맹, 한일 관계가 삐거덕댔어요. 역시 반일 포퓰리즘이었죠. ‘죽창가’ ‘토착 왜구’ 운운이 국내 정치에 도움이 됐으니까요. 그게 야당인 자유한국당의 정통성을 흔드는 재료였잖아요. 이런 차원에서 반일 여론을 이용한 거죠.”
한미 만찬에 ‘독도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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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11월 7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국빈만찬에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와 포옹하며 인사하고 있다. 왼쪽은 문재인 대통령. 사진=연합 |
여기에 비하면 다소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도 일어났다. 2017년 9월 뉴욕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동에서 문 대통령은 “미국은 우리의 동맹이지만 일본은 동맹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청와대는 2017년 11월 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 만찬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초대하고 독도 주변에서 잡히는 ‘독도새우’ 요리를 메뉴로 올렸다. 이런 일도 있었다. 2018년 12월 10일 재외공관장 만찬이 열렸는데, 이때 주러대사(우윤근), 주중대사(노영민)가 가장 상석에 앉았다. 주미대사와 주일대사가 상석에 앉는 관행을 깬 것이다. 신 전 대사의 말이다.
“왜 만찬에 독도새우를 냅니까. 독도가 우리 땅이 아닙니까? 일본 사람이 독도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한국에 들어와서 가야 하잖아요. 우리 땅인데 굳이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있습니까? 영유하는 입장에서 차분하게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반일 감정을 이용하려 하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일본은 우리의 동맹이 아니라는 말도 맞지만, 일부러 할 필요는 없지요. 한·미·일 삼각협력체제가 한반도 안보에 큰 도움이 되는 거 아닙니까?”
― 외교야 어떻게 되든 국내 정치만 의식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지요.
“윤석열 정부 들어와서야 일본과 북한 미사일 정보를 실시간 공유하잖아요. 그거 없이 북한 미사일을 어떻게 통합적으로 억지하나요? 북한의 잠수함 감시하는 데도 일본 도움이 필요합니다. 동중국해나 동해의 잠수함 탐지는 일본이 집중적으로 하고 있을 겁니다.”
“동나버린 신뢰 자산”
― 일본이 우리보다 대잠 탐지 실력이 뛰어난가 보죠?
“일본 해군은 미국 해군과 전쟁을 했던 군대예요. 특히 잠수함 부문은 상당히 뛰어납니다. 한국도 많이 따라잡았어요. 우리 잠수함이 림팩(다국적 해군 훈련)에서 미국 항공모함을 격침해 주목을 받기도 했지요. 한일이 협력해서 북한과 중국의 군사 위협을 억제하면 그게 국익 아닙니까? 왜 일본과는 협력하면 안 되죠? 우리 안보를 지키는 일인데요.”
― 문재인 정권을 거치며 일본 내 혐한 정서가 정점을 찍은 것 같습니다.
“강제 징용 대법원 판결 후, 서점 한국 관련 코너가 다 혐한 서적이었어요. 혐한 서적이 나오면 10만 부는 금방 팔렸습니다.”
― 혐한 정서가 생각보다 영향력이 셌군요.
“아직도 이런 정서가 지속되고 있어요. 윤석열 정권 시기 한일 관계가 개선되면서 많이 완화됐지만, 그 전에 신뢰 자산이 이미 동나 있는 상태였잖아요. 일본은 신뢰 자산을 채우는 데 오래 걸립니다. 제가 일본에서 7년을 살았는데 공공장소에서 누가 싸우는 걸 한 번도 못 봤습니다. 우리는 죽어라 싸우고 그다음 날 술 한잔하고 싹 잊잖아요. 일본인들은 평생 안 봅니다. 한번 싸우면 끝이에요. 그러니 관계를 끝낼 각오 없이는 절대 안 싸웁니다. 이게 한일 간의 문화 차이예요.”
‘잃어버린 10년’의 원인
― 결국 이명박-박근혜-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정권의 난맥 때문에 한일 관계의 ‘잃어버린 10년’이 이어진 걸까요?
“그렇기도 하지만 구조적 원인을 봐야 합니다. 2010년이 분수령이에요. 그해 일본이 세계 경제대국 2위 자리를 중국한테 내줍니다. 같은 해 중국에서는 시진핑이 제5세대 지도부로 들어가지요. 그러면서 일본에 대해 강압적인 외교를 폅니다. 2010년·2012년 센카쿠 분쟁을 둘러싸고 일본을 압박합니다. 이 결과 일본 외교 안보 정책에 일대 전환이 이뤄집니다. 그 시기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는 제대로 관리 안 되는 상황에서 중국에 붙는 것처럼 보였지요.”
― 한국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과 나란히 천안문 망루에 올라갔지요.
“2013년 초부터 한국의 중국 경사론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한국이 이제 중국 궤도 내에 들어간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이런 생각이 강해졌어요. 또 한 가지는 당시 일본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아노미 상태였습니다. 아베 직전까지 7년 동안 7명의 총리가 나왔습니다. 1년마다 총리가 바뀐 거예요. 경제적으로는 ‘잃어버린 20년’이 ‘잃어버린 30년’이 되는 시점이었어요. 사회적으로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엄청난 충격을 줬습니다.”
― 그렇지요. 전 세계가 우려할 정도였으니까요.
“2011년 일본에서 뽑은 그해의 단어가 ‘반(絆, 유대·결속이라는 뜻)’이었어요. 재해가 많고 힘드니까 사람과 사람 간의 끈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거죠. 일본이 심리적 공황 상태에 들어간 시점에 한일이 대립한 겁니다. 게다가 한국은 올라가고 있었어요. 2012년 가을에 NHK가 3일간 삼성 특집을 내보냅니다. 당시 삼성전자 한 회사의 수익이 일본 6개 전자회사 수익을 넘어섰거든요. 이전까지 일본이 한국에 한 수 접어줬다면 이제는 경쟁 상대가 된 겁니다.”
― 여러 가지로 일본이 어려운 상황이었군요. 이런 흐름을 한국의 지도자들이 제대로 읽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쉽습니다.
“당시 중국이 부상하고 있었잖아요. 그러니 한국은 중국을 과대평가하고, 일본은 경제가 쇠퇴하고 있다며 과소평가했어요. 2010년대 초반에 일본을 경시하는 풍조가 생긴 겁니다. 이런 것들이 한일 관계에 투영된 겁니다.”
― 한일 양국 모두 전후 세대가 사회를 이끌고 있지요. 한데 한국의 일부 기성세대는 일본 문제에 관한 한 한국 청년들에게 피해자 의식을 강요하는 듯합니다.
“피해자 의식은 과거 지향적입니다. 빨리 청산해야 해요. 미래 담론을 구성해 나가는 게 선진국의 자격 요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 피해자 의식으로 무장하고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차단해 온 겁니다. 역사에서 배운다는 게 뭡니까? 역사 속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 거 아닌가요? 일본의 식민 지배를 비판하는 동시에 왜 우리는 식민 지배를 당했는가 철저히 반성해야 할 거 아니에요. 우리 사회에 그런 게 있나요? 별로 없잖아요.”
죽창가 외친 文 정권
반복적으로 죽창가를 올린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의 페이스북 모습. |
“일본을 탓하며 스스로 돌아볼 기회를 걷어찬 겁니다. 아직도 19세기 위정척사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21세기 한일 관계에 왜 죽창가가 나옵니까.”
‘죽창가’는 문재인 정권 시기 단골로 등장했다.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는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 그리고 이후에도 페이스북에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노래인 ‘죽창가’를 여러 번 올렸다.
― 한국에서 정치인이 ‘죽창가’나 ‘토착 왜구’를 외치면 일본에서도 그 소식을 접하나요?
“그럼요. 요즘은 실시간이에요. 제가 일본에서 첫 근무한 게 1986년입니다. 그때만 해도 한국 소식이 일본에 별로 안 전해졌어요. 대개 식자층만 한국 소식에 관심이 있었거든요. 바로 번역도 안 됐고요. 지금은 실시간입니다. 야후에 들어가면 한국 주요 신문의 기사가 일본어로 다 올라와 있어요. 그래서 잘못됐거나 조작된 정보가 전해지면 잘못된 프레임이 형성되어 버려요. 의도가 곡해되는 거죠.”
소통 부족했던 박근혜·윤석열 정권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두고 한일 양국 정부가 합의안을 내놨다. 그는 박근혜·윤석열 정부가 한일 간의 합의를 국민들에게 좀 더 알렸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2015년 한일 합의, 타협안으로 괜찮았어요. 상품을 잘 만들었으면 잘 팔아야 하잖아요. 한일 양국이 다 파는 데 너무 어쭙잖았어요. 합의안 발표 후에 아베 총리는 ‘이걸로 끝이다, 더 이상 사과 안 하겠다’고 말했어요. 이런 말이 안 나오게 했어야지요. 이러니 한국 여론이 더 나빠졌어요.”
― 박근혜 정부도 피해자 할머니들과의 소통 부재로 논란이 됐죠.
“위안부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 끌어안고 설명하는 데 인색했어요. 청와대로 초청해 식사하면서 직접 설명했으면 어땠을까요. ‘우리 정부가 열심히 했지만 외교 교섭이라 좀 모자라도 이해해 주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충실히 채우겠습니다’라고 하면서요. 과거사 문제는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줘야 해요. 단순히 합의나 판결로만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2015년 위안부 합의 당시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는 합의 내용을 사전에 외교부를 통해 전해 들었으면서도 위안부 할머님들께는 알려주지 않았다. 위안부 생존자인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로 2020년에 알려진 사실이다.
“윤석열 정권도 마찬가지예요. 윤 정권이 내놓은 ‘제3자 변제안’은 잘한 겁니다. 그런데 피해자에게 다가가는 과정이 부족했어요.”
제3자 변제안은 2023년 3월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강제 동원 문제의 해법으로,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수혜를 입은 한국 기업이 기금을 마련해 일본 피고 기업 대신 배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 박근혜·윤석열 대통령 모두 지나치게 일본 편을 드는 것처럼 대중에 비칠까 봐 우려했던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지도자는 사람의 마음을 읽고 같이 아파하고 함께 극복할 수 있어야 해요. 돈만으로는 과거사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한일판 엘리제 조약
엘리제 궁에 전시되어 있는 프랑스-독일 엘리제 조약 체결서의 마지막 페이지. 사진=위키피디아 |
첫째, 과거사 문제를 매듭짓고 역사 화해로 나아가는 것이다.
“투 트랙으로 가야 합니다. 2018년 문재인 정부가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했는데, 여기에 일본 정부가 출연한 기금(10억 엔) 중 56억원이 남아 있어요(이자가 붙어 지난해 기준 59억원으로 증가). 우리 정부가 내놓았던 100억원을 더하면 150억원 이상이 남아 있으니 이걸로 남은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위안부를 기리는 사업 같은 걸 할 수 있겠지요.”
취임 후 이재명 대통령은 강제 동원 문제를 두고 제3자 변제안을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역사 화해 문제를 거시적인 차원에서 풀 수 있는 장치, 이를테면 양국 역사가들이 참여하는 한일역사공동위원회를 만들어서 그야말로 역사 문제를 역사에 맡기는 겁니다. 현안은 현안대로 풀고요. 그래야 과거사 부담에서 한일 관계가 자유로워집니다. 한일이 공유하는 실질적·잠재적 상호 이익이 많거든요. 양국 간 인적 문화 교류를 제도화하는 장치도 만들었으면 합니다.”
― 예를 들면요?
“1963년에 프랑스와 독일이 엘리제 조약(프랑스·독일 화해협력조약)을 맺고 대규모 교류를 합니다. 이게 결국은 불·독 화해를 가져오고, 이후 EU 창설, 독일 통일로 이어진 거예요. 엘리제 조약 같은 방식이 한일 역사 화해에 적합하지 않을까요.”
獨 통일 불러온 엘리제 조약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8년 후인 1963년 1월 22일 서독의 아데나워 총리와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파리 엘리제궁에서 조약에 서명했다. 전후 프랑스·독일 간 우호 관계의 기반인 엘리제 조약은 내용이 매우 포괄적이다. 양국 정상은 적어도 매년 2회는 만나도록 했다. 외교부 장관은 최소 3개월에 한 번씩 만나, 서로 협조해야 한다.
양국 국방부 장관들도 최소 3개월에 한 번씩 만나, 서로의 전략·전술을 맞춘다. 양국 군대의 인적 교류와 장비·예산 협조, 민간 방위 분야의 협력 등이 엘리제 조약에 규정되어 있다. 외교·국방뿐 아니라, 교육·청소년 정책 담당자들도 2개월마다 정기 모임을 갖도록 했다. 프랑스와 독일 국민이 상대국 언어를 습득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약은 강조한다.
― 원수였던 프랑스와 독일을 화해하게 한 조약 말이군요.
“한국이 통일을 이루려면 주변국의 블레싱(blessing·축복)이 필요해요. 제가 보기에 미국은 가장 전향적일 테고, 일본이 지지해 줘야 해요. 중국과 러시아도 마찬가지지요.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한반도 통일에 관한 한일 간의 탄탄한 공감대와 일본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미·일 동맹 강화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왼쪽부터) 일본 총리가 2023년 8월 18일(현지시각) 미국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나 활짝 웃고 있다. 사진=연합 |
“국제정세를 보세요. 트럼프주의 등장 이후 미국의 동맹에 대한 대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북핵 위협과 미·중 경쟁 구도도 심화되고 있고요. 한일 간 전략적 이해의 교집합이 어느 때보다 늘어났어요. 첫째, 우리도 커졌지만 중국이 엄청나게 커졌어요. 힘의 균형을 맞추려면 한일이 협력하고 미국이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일이 협력하지 않으면 한국도 일본도 손해예요. 어느 쪽이 더 손해일까요? 저는 한국이라고 봅니다. 한일이 충돌하면 미국이 어느 쪽 말을 들을까요. 저는 일본이라 봅니다.”
― 문재인 정부 시기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의 ‘코리아 패싱’이 불거졌지요.
“당시 한국은 오면초가 상황이었어요. 북한까지 한국을 무시했으니까요. 한일이 협력해 미국을 설득하고 중국과 북한에 대한 억지력을 높일 수 있다면 해야지요. 이게 국익입니다.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한일이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 북·중·러가 가까워진 점도 문제지요.
“한·미·일은 캠프 데이비드 회동으로 절정에 올랐다가 트럼프 2기 들어와서 동력이 약해졌어요. 한일 협력이 잘되면 우리 미래를 담보할 한미동맹과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유지가 더 수월해집니다. 한일 관계가 좋을 때와 나쁠 때 중국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 어떻게 다른가요.
“한·미·일이 느슨하면 중국이 더 강압적으로 나올 여지가 커집니다. 여기에, 예전엔 동맹에서 얻는 배당이 있었어요. 지금은 미국 우선주의로 가겠다는 거잖아요. 포스트 탈냉전 시대에는 네트워킹(networking·국가 간 관계망 구축)과 레버리지(leverage·한정된 자원으로 더 큰 외교 성과를 얻어내는 것)를 많이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일본 네트워크 가진 사람 양성해야”
― 이재명 정권도 지지율이 낮아진다든가 하면 반일 포퓰리즘의 유혹에 빠질 수 있을 텐데요.
“한일 관계를 양자 관계로만 보면 안 됩니다. 인도·태평양, 동아시아 글로벌 차원에서 봐야 해요. 이제 한국도 글로벌 중추 국가(GPS·Global Pivotal State) 외교를 해야 합니다. ‘글로벌 중추 국가’가 윤석열 정부의 아이디어였다고 걷어차지 말고 유지 발전해야 해요. 제3자들이 우리를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국익 계산은 속으로 하고, 한국이 국력에 걸맞은 역할을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진정한 선진 강대국으로 가기 위한 마음가짐이군요.
“한국은 열심히 달려서 선도국을 따라잡는 후발주자에서 시장을 이끄는 선두주자가 됐지요. 이제는 그 단계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북·중만 바라볼 게 아니라 시야를 넓혀야 해요. 한미동맹을 기본으로 한일 협력을 바탕 삼아 동남아, 인도, 유럽과 연대해 중국과 공존할 수 있는 강대국이 되게끔 협력해야지요.”
― 한일 양국의 협력을 재건하는 게 이재명 정부가 디뎌야 할 첫걸음이겠군요. 한일 간 다리 역할을 했던 JP(김종필) 같은 존재가 아쉽네요.
“지금은 그런 평형수 같은 분들이 별로 없어요. 다 끊어져 버렸지요. 일본에 네트워크를 가진 사람을 양성해야 해요. 외교관, 정치인, 학자, 기업인… 이런 인재들이 하루아침에 뚝 떨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 예전엔 한일의원연맹이 활발했는데요.
“지금도 있지만, 예전만큼의 영향력은 없지요. 젊은 한일 정치인들의 교류가 활발해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외교가 건국 이래 한국 전쟁 시기 빼고 가장 힘든 시기입니다. 한미동맹과 자유주의 국제질서라는 울타리가 흔들리고 있잖아요. 두 가지가 동시에 흔들린 적이 그동안엔 없었거든요. 새로운 국제질서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부상할 것인가, 침몰할 것인가 기로에 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힘든 시기예요.”
“외교 역량 키워야”
2001년 1월 26일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숨진 고(故) 이수현씨는 한일 우호의 상징이 됐다. 그의 뜻을 이어 설립된 ‘LSH아시아장학회’가 23년째 운영 중이다. 이 장학회 명예회장인 모친 신윤찬씨는 작년 말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사진=조선DB |
“외교 예산을 보세요. 전체 예산의 1%는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0.6%예요. 그나마 이 중 절반 이상이 개발원조기금과 국제기구 분담금입니다. 결국 외교 예산은 0.2%인 겁니다. 돈 안 들이고 공짜로 외교를 어떻게 합니까.”
외교 예산 문제는 좀 심각하다. 2025년 전체 예산(673조3000억원) 중 외교부 예산은 4조2788억원이다. 이 중 저개발국에 지원하는 무상 공적개발원조(ODA)가 2조8093억원이다. 결국 진짜 외교 예산은 인건비·경상운영비 포함 1조469억원이란 얘기다. 이순신대교 건설비용(1조700억원)과 비슷하다.
한일 관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이수현, 2001년 1월 26일 신오쿠보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일본은 2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수현씨를 기린다. 일본 내각은 지난해 이씨의 모친 신윤찬(75)씨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수현씨의 부모는 스물일곱 아들이 죽은 나라, 일본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들을 잃은 이듬해 ‘일본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을 위해 써달라’며 1억원을 내놨다. 이 돈을 바탕으로 일본에 ‘LSH아시아장학회’가 설립됐다. 여기에 일본인들의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1200명 이상의 유학생들이 도움을 받았다. 비결이 뭘까. 이씨의 부모는 피해자를 자처하지 않았다.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로써 일본은 이수현씨와 그 가족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
“사람 사이에도, 나라 간에도 가리(かり), 즉 빚이 쌓이게 하는 게 결국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겁니다.” 신 전 대사의 말처럼, 이제부터 한일 간에도 마음의 빚이 쌓여가길 바란다.⊙







반복적으로 죽창가를 올린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의 페이스북 모습.
엘리제 궁에 전시되어 있는 프랑스-독일 엘리제 조약 체결서의 마지막 페이지. 사진=위키피디아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왼쪽부터) 일본 총리가 2023년 8월 18일(현지시각) 미국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나 활짝 웃고 있다. 사진=연합
2001년 1월 26일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숨진 고(故) 이수현씨는 한일 우호의 상징이 됐다. 그의 뜻을 이어 설립된 ‘LSH아시아장학회’가 23년째 운영 중이다. 이 장학회 명예회장인 모친 신윤찬씨는 작년 말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사진=조선D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