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 사죄와 대중문화 개방 이끈 김대중-오부치 선언 산파역
⊙ DJ, 日 국회서 연설… “불행한 42년 때문에 1500년 교류 저버릴 건가”
⊙ “역사 교과서 갈등 중에도 한일 정상 간엔 신뢰 있었다”
⊙ “건국의 이승만, 산업화의 박정희, 민주화의 김대중… 공통점은 일본을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것”
崔相龍
1942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도쿄대 정치학과 석·박사, 릿쿄대 명예 인문학 박사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평화연구소장·아세아문제연구소장, 하버드옌칭연구원 객원교수, 日 호세이대 교수, 세이케이대 교수,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평화학회 회장, 제14대 주일 대사, 통일부 고문 / 저서 《미군정과 한국 민족주의》 《평화의 정치사상》 《중용의 정치사상》 《중용 민주주의》 《정치가 정도전》 등
⊙ DJ, 日 국회서 연설… “불행한 42년 때문에 1500년 교류 저버릴 건가”
⊙ “역사 교과서 갈등 중에도 한일 정상 간엔 신뢰 있었다”
⊙ “건국의 이승만, 산업화의 박정희, 민주화의 김대중… 공통점은 일본을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것”
崔相龍
1942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도쿄대 정치학과 석·박사, 릿쿄대 명예 인문학 박사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평화연구소장·아세아문제연구소장, 하버드옌칭연구원 객원교수, 日 호세이대 교수, 세이케이대 교수,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평화학회 회장, 제14대 주일 대사, 통일부 고문 / 저서 《미군정과 한국 민족주의》 《평화의 정치사상》 《중용의 정치사상》 《중용 민주주의》 《정치가 정도전》 등

- 사진=조준우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독자적 근대화에 성공했고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여 큰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은 제국주의와 전쟁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일본 국민은 물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의 국민들에게 큰 희생과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달라졌습니다. 일본 국민은 땀과 눈물을 바쳐 의회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세계가 놀랄 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은 아시아 각국의 국민들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의 길을 보여 주게 된 것입니다.
지금의 일본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세계 최대의 경제 원조국으로서 자신의 경제력에 상응하는 국제적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원폭의 피해를 체험한 일본 국민은 변함없이 평화헌법을 지켜 왔고, 비핵 평화주의의 원칙을 고수해 왔습니다. 이렇듯 전전(戰前)의 일본과 전후(戰後)의 일본은 참으로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후의 일본 국민과 지도자들이 쏟은 피땀 어린 노력에 대해 깊은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중략)
우리 양국은 1500년 이상이나 되는 교류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역사적으로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불행했던 것은 약 400년 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7년간과 금세기 초 식민 지배 35년간입니다. 이렇게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중략)
(한국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도움이 참으로 컸습니다. 일본은 우리의 단기 외채 연장에 있어서 그 3분의 1이 넘는 79억 달러를 중장기 외채로 전환시켜 주었습니다.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일본의 적극적이고 성의가 담긴 협력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당시 특별수행원… 2년 뒤 첫 민간 출신 駐日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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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10월 8일 일본 국회에서 연설 중인 김대중 대통령. |
역사적인 김대중-오부치 선언과 DJ의 일본 국회 연설 뒤에는 한 정치사상가의 공헌이 있다. 김 대통령의 특별수행원으로 당시 방일(訪日)에 함께한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前 주일 대사)다. 그는 연설에 귀 기울이던 그날의 일본 국회 풍경을 들려주며 눈물을 글썽였다. 최 교수는 역사적인 1998년 한일 공동선언의 산파 역할을 했다. 두 정상이 서명하는 모습까지 지켜봤다. 이후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주일 대사를 역임했다. 최초의 민간인 출신 주일 대사였다.
5월 3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묻고 싶은 얘기가 많았지만 최 교수의 목 상태가 좋지 않아(성대결절) 긴 대화를 나누긴 어려웠다.
“‘기적은 기적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내 작품”
― 연설 중 “기적은 기적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당시 일본을 비롯한 해외 언론에 대서특필됐습니다.
“그 문장은 원래 연설문엔 없었습니다. 나중에 번쩍 떠오른 겁니다.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에게 전화했더니 이미 연설문 인쇄가 끝났다는 겁니다. ‘그래도 제 뜻을 대통령께 전해 주세요.’ 결국 막판에 연설문에 포함됐지요.”
기적적으로 들어간 이 문장이 연설 다음 날 일본 주요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가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면, 민주화는 국민의 피와 땀으로 이룬 거라는 걸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 끝에 만든 문장입니다. 영문 표현으로 먼저 생각했어요. ‘Miracle does not happen miraculously.’ 공식 번역관(官)이 처음엔 ‘Miracle just doesn’t occur’라고 번역했다가 나중에 제가 쓴 표현으로 바꿨더군요. 감동스러웠지요.”
DJ의 일본 국회 연설은 다른 나라 정치가들에게도 화제가 됐다.
“미국의 마이크 맨스필드(Mike Mansfield) 민주당 상원의원이 연설문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어요.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주석도 관심을 가졌지요. 일제히 1면에 연설문을 보도한 일본 신문들을 보고 김대중 대통령이 파안대소했던 게 기억납니다. 평소에 웃음이 별로 없는 분이었거든요.”
‘무라야마 담화’ 발전시켜 구체적으로 문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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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국빈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10월 8일 도쿄 영빈관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오부치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학계와 논단에서는 ‘65년 체제’와 ‘98년 체제’라 합니다. 한일 수교와 한일 공동선언을 각각 이정표 삼아 지난 60년을 두 기간으로 나눈 거지요.
65년 체제는 냉전 시대의 산물이에요. 미국의 역할이 컸습니다. 98년 체제는 냉전 시대엔 상상하기 힘들었던 탈(脫)냉전의 파생물이지요. 20세기의 황혼에서 21세기의 여명을 바라보며 기획한 겁니다. 오부치 총리도 유덕한 분이었지만, 공동선언은 DJ 이니셔티브의 산물입니다.”
한일 파트너십 선언의 핵심 조항은 두 가지, ‘역사’와 ‘문화 교류’다.
“역사 조항에서는 그 3년 전의 ‘무라야마 담화’를 더 구체화해 문서화했습니다. 무라야마 담화는 양질의 역사관을 담고 있지만, 사죄의 대상을 ‘아시아 제국(諸國)’이라 뭉뚱그려 표현했습니다. 파트너십 선언에는 ‘일본이 한국에’ 고통을 안겼다고 명시했지요.”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 81대 총리인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1995년 8월 15일 발표한, 일본 총리가 최초로 식민 지배를 사죄한 공식 발언이다. 한일 파트너십 선언에는 “오부치 총리대신은 금세기의 한일 양국 관계를 돌이켜 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한다”고 명시했다. 과거를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확실한 근거였다.
“日 망가·아니메는 禁書와 같아… 풀어 주면 시들해진다”
문화 교류 조항엔 당시로선 파격적인 내용이 들어 있었다. 바로 ‘일본 대중문화에 한국 시장 개방’이다.
― 당시 여론은 대중문화 개방 반대 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여론조사 결과 반대가 70% 이상이더군요.
“‘문화 교류란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상호 학습의 과정입니다. 우리도 과거 오랫동안 일본에 대해 문화 전수자의 입장에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 일본의 애니메이션, 만화가 우수하면 배우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호소했습니다.”
사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DJ 정부 초기부터 논의된 사안이었다. 정권 출범 직후인 1998년 봄, 최상용 교수는 청와대의 연락을 받고 김 대통령을 만났다. 김 대통령이 물었다. “최 교수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 교수가 답했다.
“지금 일본 망가(만화)와 아니메(애니메이션)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우리나라 청년들이 이미 많이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막겠습니까? 대통령께서도 금서(禁書) 읽어 보셨죠? 금서는 ‘금지된 책’이 아니라 ‘인기 있는 책’입니다. 금서를 없애려면 단속할 게 아니라 풀어 줘야 합니다. 금서는 풀리는 그 순간부터 인기가 떨어집니다. 일본 대중문화도 같다고 봅니다.”
최 교수는 “잘 웃지 않는 분이 금서 얘기를 하니 막 웃으셨다”고 회상했다.
한일 파트너십 선언 후 일본에서의 일정 내내 DJ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다고 한다. 수행원들끼리의 회의가 끝날 쯤 DJ가 말했다. “최 교수도 한마디 하세요.”
―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일본 정치가의 부적절한 발언, 망언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겁니다. 정치가나 일본인 개인이 자신의 역사관으로 말하는 것에 일희일비하지 마십시오. 일희일비하지 않겠다고 국민에게 공개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 총리나 외무, 문부(文部)대신이 평균적인 한국 국민이 분노할 수 있는 언동을 보인다면 단호히 반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만, 그것 외는 무시하는 게 좋습니다. 한국은 그렇게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 당시 선언에 한국이나 일본에서 반대의 목소리는 없었나요?
“유일하게 반대한 일본 정치인이 나중에 총리가 되는 아베 신조(安倍晉三) 중의원 의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베도 나중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2018년 도쿄에서 김-오부치 선언 20주년 행사가 열렸어요. 총리가 된 아베가 직접 참석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언 당시엔 반대했다. 일본이 역사 문제에 대해 너무 양보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지도자의 결단이란 이런 거구나 생각한다.’ 제가 현장에서 들었습니다.”
도쿄大서 박사, ‘가장 아카데믹한 주일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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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차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멕시코를 방문 중인 김대중 대통령이 2002년 10월 27일 새벽(한국시간) 로스카보스 웨스틴호텔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3국 정상회담을 마친 후 나란히 걸어 나오고 있다. 사진=조선DB |
“1965년에 일본에 건너갔으니 제가 개인적으로 일본과 인연을 맺은 지도 60년입니다.”
그는 도쿄대 법대 대학원에 진학해 일본 국제정치학의 대가 사카모토 요시카즈 교수와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 교수 등 쟁쟁한 석학들의 지도를 받았다. 박사 논문 제목은 ‘미군정과 한국 민족주의’. 도쿄대에서 그는 일본 학계의 최상층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이때의 인연들은 향후 한일 관계 개선에 큰 도움이 됐다. 훗날 그가 ‘가장 아카데믹하면서 빼어난 성과를 낸 주일 대사’가 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일 테다.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최 교수는 고려대에서 강의를 시작한다. 그러나 1973년 1학기가 개강한 3월 2일 그는 영장없이 노상에서 체포되어 남산으로 끌려갔다. “북한에 다녀오지 않았냐”는 추궁이 이어졌다. 증거도 뭣도, 밑도 끝도 없는 조사였다. 그는 40일간 고문 당한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고문 사실이 일본 신문에 폭로되고 도쿄대·호세이대 등 일본 대학 교수들이 그를 응원하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8개월여 복역한 후 풀려나왔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노태우의 정치권 영입 제의 거절
복역을 마치고 강단에 돌아온 그는 ‘중용의 정치’ ‘평화의 정치’ 연구에 몰두했다. 그런 그에게 정치인들이 조언을 구했다. 노태우 대통령도 그런 경우였다.
“노태우 대통령 재임 중에 한 번 독대를 했지요. 좌파 학생운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노 대통령은 ‘좌익을 뿌리채 뽑겠다’고 했습니다. 그 며칠 전 대학 총장들과 만찬에서 ‘좌익 학생들에게 단호한 조치를 해달라’는 요청을 들었다면서요.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각하, 좌익은 최소한이 되게 해야지, 뿌리채 뽑는 건 불가능합니다. 소수의 좌익은 보수 정권을 강화합니다.’”
― 노 대통령이 뭐라 하던가요?
“‘최 교수는 현실정치엔 관심이 없는가?’ 하고 물으시기에 답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학자가 정치를 해서 나라에 도움이 되는 사례가 드뭅니다. 미국의 키신저 국무장관 정도입니다. 국제정치학자로서 자신의 이론을 토대로 세계를 구상하고 있으니까요.’ 노 대통령은 자신도 알고 있다는 표정이더군요. 다시 드골 정권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을 지낸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의 예를 들었습니다. ‘지적(知的) 지도자 말로와 정치 지도자 드골의 만남은 훌륭합니다.’”
노벨평화상 심사위원장 방한 주선 계기로 DJ와 첫 만남
― 정치권 영입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하셨군요.
“이때다 싶어 노 대통령께 한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북한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에 적대적 태도를 보여 온 일본 사회당 국회의원들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한국에서 열리는 포럼에 참석할 수 있게 비자를 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그런 줄 몰랐다며, 그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노 대통령은 겸허하고 민주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어요. 그분 덕에 일본 사회당과 대한민국의 최초의 공식적인 만남이 가능했습니다.”
― 김대중 대통령과는 어떻게 인연을 쌓았나요?
“1991년 이토 히데코 등 일본 사회당 중·참의원 11명에 이어 1992년 프랜시스 사이스테드 노벨평화상 심사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성사시킨 것에 DJ가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아요.”
― 노벨평화상 심사위원장은 어떻게 서울에 초청할 수 있었나요?
“사적으로 인연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냉전의 마지막 외로운 섬 한반도를 한번 봐야 하지 않느냐’고 제가 간곡하게 편지를 보내자 초청에 응했어요. 4일간 서울에 머무르며 고려대에서 강연하고 판문점도 시찰했지요.”
― 현실정치 참여를 계속 고사하다가 대사 직을 수락한 이유가 있습니까?
“정치학자로서 자신이 유학한 나라의 대사가 되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연속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전문 분야인 평화사상 연구가 실제 외교활동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외교는 어느 의미에서는 평화사상의 실천이니까요.”
최상용 교수의 대사 내정이 알려지자 오부치 총리가 환영 인사를 건네려 국제전화를 걸어 왔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오부치는 그 직후 뇌경색으로 쓰러져 총리직에서 사퇴한 후 5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최 교수는 “오부치 총리가 1년 반쯤만 총리를 더 했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역사 해석은 다를 수 있어도 ‘팩트’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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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3월 31일 오후 국회에서 일본 교과서 문제에 대해 한중일 시민단체와 국회의원들이 간담회를 가졌다. 왼쪽부터 자유선진당 박선영, 민주당 김영진, 한나라당 박상은 의원과 3국 시민단체 대표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조선DB |
― 당시도 심각했지만 아직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소된 건 아니지요.
“저는 교과서 문제, 나아가 역사 문제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 역사적 사실의 확인, 둘째 그 사실의 해석, 이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정부 레벨의 회의에선 늘 ‘양국은 역사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고 틀에 박힌 말을 합니다. 저는 그 내용을 ‘사실 인식’과 ‘해석’으로 나누어 설득했습니다. 해석의 다름에 대해서는 서로 이해해야 한다고요. 같은 나라 사람, 같은 전공의 학자라도 해석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확인된 팩트는 서로 인정해야 합니다.”
2001년 4월 10일 최상용 대사는 일시 귀국했다. ‘외교 협의를 위한 귀국’이라 했지만 사실상의 대사 소환이었다.
― 상황이 안좋았는데 어떻게 대처했나요?
“일본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정신을 130여 차례 강연했습니다. ‘강연 외교’라는 공공외교 장르를 하나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매체에 칼럼도 자주 썼지요. 한번은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과 이웃 나라를 배려하는 마음이 모순될 수 있지만 그것을 같이 가질 수 있는 리더십이 한국에도 부족하지만, 일본도 내가 보기에는 아주 부족하다’는 취지로 썼는데 일본 어느 대학의 입학시험에 그 칼럼을 읽고 논하라는 문제가 출제됐습니다. 본인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라 대사의 글인데 그렇게 평가해 주니 평균적인 일본 국민은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 대학 입시에 ‘한국어’ 관철
― 일본의 오피니언 리더와 대중들에게 직접 메시지를 전달했군요.
“그랬지요. 후소샤 교과서의 채택률은 겨우 0.039%였습니다. 일본 국민에게 합리적으로 설명하면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없겠구나, 일본 국민에 신뢰를 갖게 됐습니다. 우리가 한일 관계를 생각할 때 이런 ‘평균적인 일본인’의 감성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거부하지 못할 비판을 해야 우리의 협상력이 높아집니다. 교과서 문제로 한일 갈등이 극심한 가운데도 당시엔 한일 정상 간 신뢰가 있었습니다.”
― 공동선언의 주역인 오부치 총리가 급서(急逝)한 뒤로도요?
“오부치 총리와 김대중 대통령과의 신뢰는 말할 것도 없고, 후임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도 김-오부치 선언에 적극 참여했지요. 제가 보기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도 김 대통령에게 경외감을 갖고 있었어요. ‘파란만장한 일을 겪은 정치 대선배로 존경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 모리 총리 땐 일본 대학 입시 외국어 과목에 한국어가 포함되게 하는 성과도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어, 독어, 불어 그리고 아시아의 대표적인 언어론 간신히 중국어가 들어가 있던 상황이었어요. 유럽어 중 스페인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한국어가 들어간 겁니다. 처음엔 ‘조선어로 검토하고 있다’라는 말을 듣고 아찔했지요. 조선어를 한국어로 고쳐 달라고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문부과학대신에게 요청했습니다. ‘조선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한국 국민에겐 긍정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한국 중심으로 통일이 된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시절 대사들은 다른 나라의 외교 사절이나 지도자들에게 통상 100달러 내외 상당의 선물을 하곤 했다. 그는 자신의 돈으로 자신의 영문 저서 《A Political Philosophy of Peace》(평화의 정치 철학)를 사서 선물했다.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 같은 이들은 독후감을 보내왔다. 이 책은 노벨위원회 부속 도서관에 지정도서로 들어가 있다고 한다.
최상용 대사는 당시 일본에선 한국에서 짐작하는 이상으로 저명한 한국 인사였다. 김종필 전 총리는 훗날 최 교수의 정년퇴임식(2007년)에서 “주일 대사 지낸 이들이 많지만, 일본 수상한테 전화 걸어 당장 만나고 일본의 유력 정객(政客)들을 간단하게 만나서 얘기하고 외교관다운 외교를 벌인 분은 최 대사 말고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동료였던 최장집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보통 학자는 학문적 업적을 많이 남기는 것도 힘든데, 현실정치에서 능력을 가지기까지 한 드물게 보는 빼어난 학자다. 일본에 가면 일본인들에게 최상용 교수의 기여에 매우 감사하다는 말을 늘 들었다. 어떤 일본 학자는 ‘일본에서 근무한 외국 대사 중 가장 훌륭한 대사가 아닐까. 1960년대 미국의 주일 대사였던 에드윈 라이샤워에 비견되는 학자 외교관’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아키히토, “개인적으로 한국과 ‘유카리(인연)’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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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국빈 방문 중인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10월 7일 저녁 아키히토 천황 초청 만찬에서 건배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그야말로 ‘특명전권대사’입니다. 재임 중 천황, 총리와 각료, 중·참 양원(兩院) 의장, 재계·언론계의 고위층 리더를 만날 수 있어요. 다른 나라에 부임한 대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활동 범위가 넓습니다.”
그는 아키히토 천황과 비교적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대사 부임 후 천황에게 신임장을 제정(提呈)하는 자리에서였다.
“다른 외국 대사들은 대개 통역과 함께지만 저는 직접 일본어로 했습니다. 대부분 정해진 대화 정도가 오가는데, 저에겐 천황이 사적인 질문을 건넸어요. ‘대사는 일본에 몇 번 오셨나요?’ ‘셀 수 없습니다.’ ‘그럼 홋카이도부터 오키나와까지 가보셨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오키나와는 아직입니다.’ ‘부디 오키나와에도 가보시기 바랍니다.’ 이후 2001년 어느 날 다시 천황 내외와 저희 부부, 네 사람이 20분가량 만난 적이 있습니다.”
― 그때는 무슨 대화가 오갔나요?
“천황이 ‘일본에서 존경받는 간무(桓武) 천황(781~806년 재위)의 모친은 백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대 일본의 형성에 공헌한 엘리트 지배층 중엔 한반도에서 넘어간 이들(渡來人·도라이진)이 많았어요. 보수적으로 잡아도 20% 이상이었지요.”
이후 아키히토 천황은 2001년 12월 23일 생일을 맞아 기자회견에서 다시 한 번 공식적으로 그 사실을 언급했다.
“개인적으로는 간무 천황의 생모 다카노노 니가사가 백제 무녕왕(501~523년 재위)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 에 기록된 것과 관련해 한국과의 인연(유카리)을 느끼고 있다.”
유명한 ‘유카리’ 발언이다. 《속일본기》는 일본 황실이 797년 편찬한 역사서다.
“언젠가 이승만·박정희·김대중 동상 세울 날 올 것”

― 지금도 여전히 한국은 일본을 잘 알아야 하나요?
“친일(親日)·항일(抗日)·극일(克日) 다 관심의 표현입니다. 관심이 있으면 잘 알아야지요. 저는 찬반양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정치가가 큰 정치가라고 생각합니다. 4·19혁명에 참여하고 유신 시대 고문을 당했던 사람으로서 건국의 이승만, 산업화의 박정희, 민주화의 김대중, 이 세 분을 큰 정치가로 당당히 꼽습니다. 이 세 지도자의 공통점이 뭔지 압니까?”
― 뭔가요?
“정치 스타일은 각각 다르나 세 분 다 일본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14~15세기의 정도전 세종대왕과 19~20세기의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은 찬반 토론을 치열하게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정치가들 입니다.”
― 결국 일본을 꿰뚫어봐야 한국에서 큰 정치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흔히 ‘균형 외교’라는 말을 하는데, 균형이 뭘까요? 비례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한미 관계는 동맹이잖아요. 그 외의 관계와는 비례가 전혀 다릅니다. 가령 어느 정도가 과식(過食)인가 했을 때 사람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집니다. 3이라야 과한 사람도, 1이면 벌써 과한 사람도 있거든요. 그러니 3과 1을 더해 나눈 평균값 2가 최적의 답은 아닙니다. 여러 답 중 하나는 될 수 있지만요.”
중용과 ‘구동존이’(求同存異)
―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중용(中庸)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원칙’과 ‘상황’의 왕복운동에서 최적의 판단을 하는 게 바로 중용입니다. 상황만 너무 따지면 가치가 배제되고, 가치만 얘기하면 현실성이 없지요. 중용의 뜻을 공부 안 해도 중용의 학습력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중용은 천재 어린이의 미덕이 아닙니다. 경험이 많고 경륜이 깊을수록 농도가 진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경험이 많다고 중용에 능한 건 아닙니다. 동서양의 철인(哲人)·현자(賢者)들이 중용의 어려움을 이야기하지요.”
― 어떻게 해야 중용을 체득 할 수 있을까요?
“지성과 경험의 융합이라 봅니다. 사람은 ‘무지(無知)의 베일’을 걷고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그 순간부터 심신(心身)을 움직여서 알고 경험하지요. 경험의 양은 일반적으로 시간이 중요하지만 꼭 시간에 비례하는 건 아닙니다. 지성이 멎은 채 사는 경우도 있잖아요.”
“외교는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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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출판된 최상용 교수의 저서 《중용민주주의》(2022년). |
“예. 성찰의 대상은 과거입니다. 반성과 교훈은 현재와 미래를 위한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와 미래의 발목을 잡으면 안 됩니다. 한일 간에 역사 문제, 영토 문제는 영원한 쟁점입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그럴 겁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게 676년입니다. 한일합방은 1910년이었고요. 그러면 1234년 동안 한반도는 통일·독립을 유지한 겁니다. 세계적으로 이 정도 통일을 유지한 나라가 많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 국민의 일본을 향한 원망이 뼛속까지 사무친 겁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 정신을 잘 계승하면 쟁점들을 잘 넘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교류를 멈추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양국의 지도자들은 역사 쟁점을 상대화하는 안목을 키워야 해요. 독도 문제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현상황에서 바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없는 한, 평화적 현상 유지가 현실적인 최선의 방법입니다.
제 좌우명이자 가훈이자 정치철학이 ‘구동존이(求同存異)’입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철학이기도 한데, ‘같은 것을 추구하고 다른 것을 유보하면서 끝없는 대화를 통해 가까워진다’는 뜻입니다. 외교는 구동존이의 실천입니다. 특히 갈등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두 나라 간 외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소통과 관리가 정치의 일상 아닙니까.”
최상용 교수가 2016년 펴낸 《중용의 삶》은 기자가 아는 한 가장 멋진 회고록이다. 네 명의 일본인 정치학자가 일본 정부로부터 과학연구비보조금을 지원받아 3년 4개월간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최 교수를 인터뷰하고 낸 구술사(口述史) 보고서를 국역한 책이다. 읽어 보면 일본이 어느 정도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어느 정도의 지식을 축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2022년엔 그의 《중용민주주의》가 일본의 정치철학·정치사상 전문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그의 필생의 연구와 외교 경험을 일본 학계가 하나의 ‘정치사상’으로 인정한 것이다. 한일 수교 60년, 우리는 일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