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살에 해인사에 출가해 일타·성철 스님 가르침 아래 수행의 길로
⊙ 22살에 세 손가락 연비… 장좌불와 수행하다 저승 다녀오기도
⊙ “시비하고 싸우는 데 관심 두지 않고, 국민들이 내 할 일 열심히 하는 게 땅을 짚고 일어나는 것”
⊙ “상대를 ‘생각이 다른 나’라고 생각하는 사상이 자리 잡았으면”
⊙ “AI 시대? 내 마음이 움직이는 몸뚱아리가 각자의 AI… AI 잘 활용할 방법 찾아야”
慧國 스님
1948년생. 13세 때 해인사에서 출가(1961), 22살에 오른손 세 손가락 소지 공양 / 제주 관음사 주지 역임, 제주 남국선원 개원(1994), 부산 홍제사 창건(1997), 충주 석종사 창건(2004)
⊙ 22살에 세 손가락 연비… 장좌불와 수행하다 저승 다녀오기도
⊙ “시비하고 싸우는 데 관심 두지 않고, 국민들이 내 할 일 열심히 하는 게 땅을 짚고 일어나는 것”
⊙ “상대를 ‘생각이 다른 나’라고 생각하는 사상이 자리 잡았으면”
⊙ “AI 시대? 내 마음이 움직이는 몸뚱아리가 각자의 AI… AI 잘 활용할 방법 찾아야”
慧國 스님
1948년생. 13세 때 해인사에서 출가(1961), 22살에 오른손 세 손가락 소지 공양 / 제주 관음사 주지 역임, 제주 남국선원 개원(1994), 부산 홍제사 창건(1997), 충주 석종사 창건(2004)

- 사진=하주희
스님에게 물었다. 첫 만남에 썩 예의 있는 질문은 아닌 것 같지만 궁금한 걸 어쩌나. 연비(燃臂)는 글자 그대로 ‘팔(손가락)을 태우는 수행’을 뜻한다. 몸의 일부를 스스로 태워 수행 혹은 참회하는 행위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답이 돌아왔다.
“알고 싶으면 한번 태워 봐.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인생관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 육신도 정신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보통은 손가락 한 마디 태우기도 힘들지만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손이 다 탈 때까지 까딱 안 하고 꿇어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13살에 부모 몰래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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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타 스님과 함께. |
혜국 스님은 1961년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은사는 경전과 율장에 능통했던 일타(日陀·1919~1999년) 스님. 그 시절 해인사엔 성철(性徹·1912~1993년) 스님도 있었다. 혜국 스님은 일타 스님을 은사로, 성철 스님 가르침 아래 참선 수행의 길로 들어섰다.
― 열세살 어린 나이에 절 생활을 시작하셨네요.
“제 6촌 형님이 스님이었어요. 중학교 들어가자마자 어떤 일에 충격을 받아 형님 절에 갔더니 해인사로 보내더라고. 아버님이 해인사로 오셔서 나를 엄청 찾아다녔지. 속가(俗家) 이름으로 찾으면 누가 아나. 아버님 찾아온다고 연락 오면 노스님들이 아무도 모르게 날 산에 데리고 가버렸어. 그게 참 지금도 고맙게 느껴져.”
― 어린아이가 절 생활이 할 만했나 봅니다.
“아마 전생(前生)에 인연이 있었겠지. 안 그러면 어머니 생각하고 울고 열 번은 도망갔을 텐데 말이야. 장난치다가도 ‘그냥 너는 집에 가거라’ 하시면 그게 그렇게 겁나더라고. 염불 외고 경 외는 게 그렇게 좋더구먼.”
사춘기가 되고 또래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싶은 생각에 잠시 학교로 돌아가기도 했다. 다른 절에도 가있었다. 그러다가도 결국엔 다시 해인사였다. 스물두 살, 머리 푸른 수좌(首座)였던 스님은 오른손가락에 천을 동여매고 해인사 장경각(藏經閣)으로 들어갔다. 소지(燒指) 공양을 하기 위해서였다. 왜 그랬을까.
“저는 참선이나 수행보다는 경전을 읽고 외는 걸 좋아했어요. 성철 큰스님께 〈화엄경〉과 〈법화경〉을 연구하고 싶다고 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세요. ‘글이란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 일어난 다음에 나온다.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글은 있을 수가 없다. 부처님 경전은 감정을 떠나고 생각을 넘어선 세계다. 도(道)를 통하지 않고 그런 경전을 열 번 백 번 봐야 참다운 뜻을 알아낼 수 없다. 참선을 해라.’”
― 참선이 잘되던가요?
“잘 안 되더라고. 1시간을 참선하면 5분도 안 돼 내내 잡생각이 나요. 번뇌 망상에 시달려. ‘아무래도 경전 연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렸어요. 그때가 저녁 시간이었는데 성철 스님이 죽비(竹扉)를 들고는 물으세요.
‘이게 보이느냐?’
‘예, 스님. 잘 보입니다.’
‘무엇으로 보느냐?’
‘눈으로 보지요, 스님.’
그러자 스님이 불을 탁 꺼요. 절에 전기가 없고 촛불을 쓰던 때였어요.”
성철, “몸 안에는 마음이 없다”
― 엄청 깜깜해졌겠네요.
“다시 물으세요.
‘내가 이걸 들었느냐 안 들었느냐?’
‘모르겠습니다.’
‘아까 금방 본다고 하던 눈이 어디 갔느냐?’
‘눈은 그냥 있습니다.’
‘눈으로 본다면서 왜 안 보인다는 거냐?’
‘스님, 깜깜해서 안 보이는 거 아닙니까.’”
스승과 제자의 알 듯 모를 듯한 문답이 이어졌다.
‘고양이나 올빼미는 깜깜할수록 더 잘 보는데 그럼 그건 무슨 까닭이냐?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너희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 봤느냐?’
‘예, 어릴 때 기억이 조금 있습니다.’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눈이 역력하게 그냥 있는데 눈을 뜨지도 못하지 않느냐? 입이 있지만 말을 못 하지 않느냐? 네 마음이 몸 안에 있을 때는 눈을 통해 보고 입을 통해 말한다. 귀를 통하면 듣는다. 내내 그 하나가 하는 건데 그게 어디 있느냐? 네 몸 안에 갇혀 있는 걸로 알지만 몸 안에는 마음이 없다.’”
―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세 가지를 물어서 대답하면 경전 연구로 보내 주기로 하셨어요. 첫 번째 질문엔 이미 대답을 못 했지요. 두 번째는 ‘억!’ 하고 소리를 지르시곤 물으시데요. ‘몇 근이나 되느냐?’ ‘소리에 무슨 근수가 있습니까?’ 했더니 그러십니다. ‘니는 소리 무게도 모르면서 경(經)을 보겠다는 거냐?’
세 번째는 아예 묻지도 않으세요.”
― 결국 다시 참선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세가 됐네요.
“도대체가 참선이 안 돼요. ‘앉기만 하면 번뇌 망상이 많이 일어납니다’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성철 스님이 그러세요. ‘그 번뇌 망상이 있는 것이냐? 네가 꿈꿀 때 불을 만나면 뜨겁다고 하고 물을 만나면 허우적거리는데, 아침에 깨고 보면 불이 있더냐? 네 번뇌 망상이라는 게 꿈속에서 간직하고 있는 환영이지, 실제 있는 게 아니다. 그걸 내려놔라.’”
― 어떻게 내려놓나요?
“장경각에서 하루 3000배(拜)씩, 조금 지나서는 5000배씩 총 10만배 절을 하기로 했어요. 3000배를 해보니 무릎이 다 까지고 다리만 엄청 아프지 번뇌 망상이 내려놔지질 않아요. 큰스님이 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하면서도 불평불만이 가득했지요.
‘한 번을 하더라도 정성을 다해서 하는 게 절이지, 이렇게 굴신(屈伸)운동 하듯이 하면 이게 절인가?’
약속을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하고 또 하는데, 7만배쯤 됐을까,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요.”
― 어떤 생각이었나요?
“‘내가 저 구리로 만든 부처님께 절하는 게 아니구나. 번뇌 망상, 모든 불평과 불만, 세상을 향한 원망 그런 모든 감정을 땅바닥에 딱 내려놓고 때묻지 않은 내 마음을 떠받드는 것이 절이구나. 내 감정이 내 인격에 무릎을 꿇도록 내가 내 자신과의 싸움을 하기 위해 이 절을 하는구나.’
그 한 번의 절을 위해 7만 번 헛절을 한 거야.”
“한 번의 참절은 이미 흘러가 버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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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 해인사 장경각에 있는 팔만대장경.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
“그 길로 성철 큰스님께 쫓아갔지요. ‘절 새로 시작하겠습니다. 마음속으로 이게 굴신운동이지 무슨 절인가 불평 속에서 했는데, 이제 보니 부처님께 절을 하는 게 아니라 내 번뇌 망상 모든 감정을 부처님께 올리고 그 올리는 자리가 바로 내 마음인 줄 아니, 이거야말로 수만 번 헛절을 하다가 그 한 번의 참절이 나오면 그 절 한 번으로 인생이 해결된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 성철스님이 뭐라 하셨나요?
“엄청 좋아하셨어요. 그렇게 새로 절을 시작했지요. 그런데 앞전에 겪은 그 상태, 경계만 기다려지고 그런 절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큰스님께 다시 갔죠.
‘금방 그렇게 될 것 같은데 안 됩니다.’
‘네가 흘러가는 강물을 보는 찰나, 그 강물은 바다로 흘러간다. 1분만 지나도 그 강물은 다시 안 온다. 한 번의 참절은 이미 흘러가 버렸는데, 흘러가 버린 강물을 다시 찾아보려고 하는 네가 어리석음 아니냐. 그와 똑같은 상태가 되더라도 그렇게 안 느껴진다. 모든 건 살아 움직이고 통하여 흐르는 것이지, 고정된 것이 진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그걸 다시 보려고 하지 말고, 맹목적으로 네 인생을 절에다 바치고 한번 해봐라.”
그렇게 다시 절이 시작됐다. 10만배를 마치는 날 스님은 깨달았다.
‘하루이틀 하다 말 게 아니구나. 내 인생을 바쳐야 되는 거구나.’
손가락에 천을 감았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으로 향했다.
장경각에서 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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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합천 해인사 장경각. 사진=조선DB |
그 길로 절에서 내려가 아는 신도에게 갔어요. 병원에 갔지요. 뼈만 톱으로 좀 끊어 줬으면 좋겠더라고. 화독(火毒)이 들어 퉁퉁 붓고 아주 형편없게 됐어요. 뼈를 끊고 살을 꿰매서 붕대로 감아 놨어요. 두 달은 입원해야 한다는데 새벽 2시에 병원에서 나왔지요.”
― 절에선 난리가 났겠네요.
“장경각에서 탄 냄새는 나는데 사람은 안 보이지, 성철 큰스님이 나중에 제가 연비한 걸 아시고는 욕을 하셨지요.
‘이놈의 자식아, 연비하다 쓰러져서 불이 나는 경우가 있단 말이다. 장경각에선 연비를 못 하게 돼 있는데, 이 무식한 놈아 잘못해서 장경각 홀랑 탔으면 어떡할 뻔했냐.’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싶고 아주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더만.”
― 정말 그러네요. 연비하다 기절이라도 하면 팔만대장경이 다 타버리겠네요.
“아마 딱 나 하나뿐일 겁니다, 장경각에서 연비한 이는요. 실수할 수 있거든. 아파서 떼굴떼굴 구르다 장경각에 불이라도 났으면 나도 그냥 같이 죽어야지. 정말 오만했고, 너무 철이 없었어. 지금 생각하면 아찔해. 그게 1970년이었으니 벌써 55년 전이구만.”
“무조건 한 구멍을 넘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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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철 스님. 사진=조계종 백련문화재단 제공 |
― 새벽에 병원을 나와 어디로 가셨어요?
“그때만 해도 그렇게 오래 살 생각이 없었어요. 도만 통하면 그날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었지요. 새벽2시에 일어나 보니 간호사도 의사도 다 자기에, 걸망 챙기고 기차역으로 갔어요. 태백산 가는 기차가 있기에 타고 가버렸지. 도솔암에 들어가서 밥을 안 먹고 생식을 했어요. 소금을 전혀 안 먹었지. 상처가 덧났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희한한 게, 아물더라고. 의사는 큰일 난다고 했다는데, 그냥 아물어 버렸어.”
그 길로 스님은 도솔암에 들어가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시작했다. 장좌불와는 밤낮으로 오직 앉아서 좌선(坐禪)을 하면서 결코 눕지 않는 수행을 뜻한다. 장좌불와 하면 역시 성철 스님이다. 성철 스님이 해인사 백련암에서 10년(혹은 8년)간 장좌불와를 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 안 졸리던가요?
“한번 해보십시오. 사람이 앉으면 계속 졸아요. 안 졸려고 별짓을 다 했지요. 한번은 막대기를 뾰족하게 갈아 턱 밑에 세워 뒀어요. 꿈벅 졸다 턱에 막대기가 확 박혀서 대롱대롱 매달려요. 탁 빼니 피가 쫙 나더라고요. 그 덕을 본 게, 그 후로는 옆으로는 졸아도 앞으로는 가는 법이 없어요.”
장좌불와를 하는 동안 생식을 했다.
“도솔암에 있다 중간에 성철 큰스님께 인사 드리러 갔더니 밥은 어떻게 먹냐고 물어요. ‘생식하고 있습니다.’ ‘떫든 쓰든 무조건 한 구멍을 넘겨라. 한 구멍 못 넘기면 생식 못 한다.’”
풀을 잘못 먹고 쓰러지다
― 그게 무슨 뜻인가요?
“맛없다고 뱉어 버리면 생식을 못 한다는 얘기지요. 맛에 취하지 말고 일단 먹고 그 에너지를 수행에 써야 되지, 맛을 보기 시작하면 생식을 못 한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어요. 내가 도솔암에서 생명을 떼어 놓고 공부했다는 거, 말짱 거짓말이야. 애쓴다고 하는데도 사람이 그립고, 배가 고프고 늘 그 번뇌 망상이 끊어지질 않더라고요.”
그러다가 스님은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경험을 했다.
“4월 초쯤인가, 하도 배가 고프니 무슨 풀이든 그냥 뜯어 먹었어요. 봄 어느 날 풀을 뜯어 먹는데 혀가 좀 독하더라고요. 그런데 스님이 한 구멍을 넘기라고 했으니 무조건 한 구멍을 넘겼어요. 풀은 그것밖에 없으니 자꾸 뜯어 먹는데, 이상하데요.”
― 어떻게 이상한가요?
“갑자기 막 통증이 오기 시작해요. 정신은 멀쩡한데 어떻게 아픈지…. 소리도 안 나와요. 한 4~5km 안에 내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믿을 땐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한 7~8km 안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면 소리도 안 나와요. 그러다 뒷발이 쓰러지며 탁 엎어진 것만 기억나요.”
― 기절하신 건가요?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한 방울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길은 바다에 떨어지는 길이다. 개개인의 욕망이라는 물이 허공성(虛空性)이라고 하는 참나[眞如]의 바다에 들어가면 대자유(大自由)다.’ 바다는 온갖 똥물과 오물을 받아들이지만 뒷날 보면 바다 색깔을 하고 있지요. 바다는 안 받아들이는 것 없이 다 받아들이는데 사람 시신만 안 받아들여요. 물고기가 뜯어먹어 버렸거나 돌멩이에 찡겨 있지 않은 이상 사람 시신은 반드시 바다 밖으로 밀어내요.”
“이 몸뚱이는 잠깐 빌려 쓰는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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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초반 해인사 장경각 앞에 선 성철 스님. 사진=조계종 백련문화재단 제공 |
“글쎄, 엎어지고는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깨어난 후부터 공부가 조금 되기 시작했어요. ‘이 몸뚱이가 내가 아니구나. 잠깐 빌려 쓰는 자동차였구나. 내가 이 자동차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망상, 번뇌를 피웠던고. 좋은 것 먹고 싶은 생각, 뭘 가지고 싶은 생각, 누굴 그리워하는 생각, 누굴 미워하는 생각, 이게 전부 이 몸, 자동차에서 일어났던 하나의 그림자였구나.’”
― 몸이 자동차라면 언젠가는 폐차하고 다른 자동차로 갈아타야겠군요.
“그때부터는 앉아 있는데 다리가 아파 오면 생각했어요. ‘너는 내가 아니야. 내가 따로 있다는 걸 난 경험해 봤어.’ 지금 와서 보면 그 영혼도 내가 아니에요. 내 생각이 모인 것이지. 청정(淸淨)한 본래의 나는 아니지만 그때는 그게 나라고 생각했어요. ‘그것만 찾으면 되는구나.’ 사람에 대한 그리움도 조금은 좀 덜해졌어요. 그런 것들도 다 필요 없는 옛날얘기들이지요.”
― 엄청 흥미로워요, 스님.
“이런 인터뷰 자체가 다 중생들 하는 소리라. 말로 할 수 있는 거라면 뭐가 걱정이겠어요. 말로 하는 건 전부 감정이 들어가지요. 전쟁의 역사는 지구상에 꽉 찼는데 평화라는 건 ‘평화’ 두 글자 외에는 더 쓸 게 없어요. 고요한 세계는 ‘고요’라는 글자 외에는 더 쓸 게 없어요. 인터뷰한다는 이 자체가 행복을 주는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분열이지. 무엇이 좋다 나쁘다, 언어를 통해선 제대로 전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옛 스승들이 ‘억’ 소리 지르고 주장자(柱杖子)를 꽝 치는 게 대단한 세계죠. 말 이전의 세계.”
사실 혜국 스님은 인터뷰를 처음부터 고사했다. 석종사에서 마주한 후에도 ‘인터뷰 무용(無用)론’을 내내 펼쳤다. 기자가 이번 생에 탄 자동차는 여기저기 들러 질문을 던지고 받아 적는 운명인 걸 어쩌나.
― 그렇지만 우리는 말을 해야 소통이 되는 세계에 살고 있잖습니까.
“성철 스님이 어느 날 물으시더군요.
‘저 앞에 산이 보이지?’
‘예, 보입니다.’
‘언제부터 있었냐?’
‘그건 뭐 알 수 없죠. 옛날부터 있었으니까요.’
‘바로 봐라. 네가 태어난 다음 저 산이 생겼다. 네가 태어날 때 이 삼라만상, 이 우주가 생겼고, 네가 죽는 날 같이 없어진다.’”
“윤회, 난 그런 거 몰라”
― 윤회(輪廻)가 존재하나요?
“난 그런 거 몰라. 기자님 태어나셨어요, 안 태어나셨어요? 태어나서 지금 살고 있죠? 태어난 게 윤회입니다. 태어났으면 죽는다는 얘기 아니여. 태어나고 죽으면 저쪽에서 태어나니까, 나고 죽는 걸 윤회라 그래요. 흘러가는 강물은 높은 곳에 있다가 구덩이를 채우고 또 어디를 건너고 계속 나고 죽고, 바다에 가면 그 흐름이 끝나요. 윤회가 끝나는 거죠.”
― 그렇군요.
“부처님 같은 분은 미움, 원망, 좋고 나쁜 그 양쪽을 다 떠나 죽고 나는 데서 벗어났으니, 윤회가 없어요. 그러면 윤회가 있다 없다 하는 것은 중생들의 세계에서는, 윤회 없이 어떻게 태어나느냐, 100% 있다. 그러나 도를 깨달아서 부처님처럼 자기 감정이 없어져 버리고 순수 이성까지도 끊어진 자리는 허공성이 된다. 허공이 태어나고 죽습니까?”
허공성은 마음이나 법의 본질이 ‘텅 비어 걸림 없고, 본래 청정하며,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상태’라는 걸 나타내는 불교의 핵심 개념이다. 스님의 설명이 이어진다.
“예를 들면 이 건물은 500년을 못 가요. 없어지면 또 다른 사람이 짓습니다. 죽고 나고, 건축하고 사라지고, 윤회를 해요. 그런데 이 허공은 윤회를 안 해요. 그렇기에 본질적인 공성(空性) 지혜의 입장에서 볼 때 윤회는 없고, 중생들 입장에서는 100% 윤회가 있어요. 그러니 윤회가 있냐는 질문에 정확한 답은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닙니다.”
―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요?
“지금 우리는 이 건물 안에 앉아 있어요. 저 밖에 왔다갔다 하는 분은 밖에 있어요. 벽을 싹 허물어 버리면 어떻게 돼요? 안이 없어져요. 동시에 밖도 없어져요. 허공이 어디 안팎이 있냐 이 말이야. 그러면 윤회가 없는 거라.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는 건 죽는 것, 그럼 여기에서 해가 죽으면 오스트레일리아에선 해가 뜨고 있으니 여기에서 죽어서 거기에서 태어나는 것이지요. 윤회 없는 건 하나도 없어요.”
석종사 창건 이유
석종사의 경우도 오래전에 죽은 절이 혜국 스님을 만나 다시 태어난 경우다.
“제주도 남국선원 선원장이 내 큰 상좌(上佐)인데, 아버지가 이북에서 넘어와서 남한에서 결혼해서 살면서 아들딸 9명을 낳았어요. 다 어려서 죽고 이 아이 하나만 남은 겁니다. 이 아들도 집에 놔두면 죽을까 봐 멀쩡한 집 놔두고 밖에 텐트를 치고 학교를 보냈어요. 결국 이 아들이 출가를 해서 스님이 된 거지요. 어느 날 나와 참선하기로 해놓고는 안 왔기에 이유를 알아봤어요. 어머니가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아무도 모실 사람이 없어서 모시고 있었던 겁니다.”
― 어머니가 사고무친(四顧無親) 신세였군요.
“제가 상좌에게 그랬습니다. ‘네가 40살 전에 한 손바닥에서 나는 소리가 어떤 소리냐 하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수행할 자신이 있다면 네 어머니를 내가 모시겠다. 백일기도를 하고 자신이 서거들랑 어머니를 모셔 달라 하고, 안 그러면 네가 어머니를 모시고 살라.’ 100일 후에 오더니, 어머니만 모셔 주면 그 대답을 할 수 있을 만큼 공부를 하겠다고 합디다.”
― 제자의 어머니를 대신 모셔 주셨군요.
“여기저기 찾다가 이곳 충주의 800평 과수원을 사가지고 들어왔어요. 과수원 농사를 지으면서 상좌 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그 노인네 혼자만 있으니 적적하잖아요. 그래서 아들딸이 출가해 버려서 갈 데 없는 그런 노인네가 있으면 오시라고 몇 군데 얘기해 뒀더니 다섯 분이 오셨어요. 그런 할머니들 다섯 분과 고아들 다섯이 모여서 과수원 관리사(舍)에서 살기 시작한 게 이 절의 시작입니다.”
1984년 과수원 땅 800여 평(2644㎡)에서 시작된 석종사는 현재 10만 평이 훨씬 넘는 대가람이 됐다.
고려 죽장사 터에 세워
― 그런데 왜 충주였나요?
“이런저런 인연들로 이 터에 오게 됐는데, 그때는 여기가 고려 초 탑이 방치돼 있는 폐사지(廢寺址)였어요. 와보니 꼭 전생에 내가 살았던 곳 같아요. 아마 고려 때쯤 여기서 스님 생활을 하다가 생각을 잘못해서 한 10만 평 팔아먹고 도망을 갔던가 봐요. 그거 갚느라 한 평 한 평 다시 사서 이자까지 합쳐 15만 평 만드느라 아주 혼났죠.”
석종사 자리엔 본래 죽장사라는 절이 있었던 걸로 전해진다. 고려사를 보면 1170년 4월 4일에 죽장사가 등장한다.
〈충주목부사(忠州牧副使) 최광균(崔光鈞)이 아뢰기를, “지난달 28일에 죽장사(竹杖寺)에서 노인성(老人星)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 저녁 수성(壽星)이 나타나더니 술잔을 세 번 올리자[三獻] 곧 없어졌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였고, 백관은 칭송하며 하례하였다.〉
노인성은 카노푸스(Canopus·용골자리 알파성)다. 밤하늘에서 두 번째로 밝은 별로, 동아시아에선 어진 정치와 평화를 상징했다.
수행 공간도 깨달음의 표현이 될 수 있을까? 석종사는 사찰이 앉은 모습이 담백하면서 조화롭다. 특히 대웅전이 발군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한 삼존불(三尊佛)은 물론, 닫집이나 후불탱화(後佛幀畵), 단청, 외벽 탱화 모두 한눈에 봐도 완성도가 높다. 자동차로 치면 덩치만 크고 마력은 약한 대형차가 아니라, 덩치는 중간치지만 마력은 세고 야무진 고성능 스포츠 세단 같다고 할까. 공간은 만든 이를 닮는 법이다.
하긴 그런 스님이니 20여 년 만에 선원(禪院)에 불교대학, 템플스테이 공간까지 갖춘 대가람을 세웠다. 부산 홍제사, 제주도 남국선원도 혜국 스님이 설립했다.
불가의 가장 큰 명절인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도 도량은 조용했다. 여느 절들은 기와불사나 연등 접수처가 크게 벌여져 있을 텐데 소박한 분위기다. 선풍(禪風)이 짙은 절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간화선이 어려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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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5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담선 대법회에서 〈육조단경〉을 설하는 혜국스님. 사진=조계종 제공 |
― 깨달음의 계기가 무엇일까요?
“내 속의 모든 생각이 내가 아니라는 것, 내가 만들어 놓은 거라는 걸 깨닫고 내 안의 모든 생각을 모르는 화두(話頭), 백지로 만들어 버리면 계기는 오지 말라고 해도 와요. 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생각이 꽉 차있는데, ‘왜 뜰 앞의 잣나무지?’ 모르는 걸로 자꾸 채우면 생각은 설 자리 없이 손님이 되어 나갑니다. 백지가 머리끝까지 차면 보여요. 그건 뭐 어렵고 쉬운 게 아니라 누구나 볼 수 있어요. 눈 뜨면 허공 못 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꿈 깨면 생시 이 몸뚱이로 안 돌아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 꿈만 깨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지금 그쪽을 향해 가고 있지 않지요. 이쪽으로 가면서 저쪽 걸 얘기해 달라면 힘들 수밖에.”
조계종은 간화선(看話禪)을 수행의 기본으로 삼는다. 간화선은 화두(한 문장이나 짧은 구절)를 붙잡고 그것을 묵상하고 탐구함으로써 깨닫는 수행 방식이다.
― 일반 대중들에게 간화선이 너무 어려운 것 아닌가요?
“간화선이 어려운 게 아니고, 세상의 교육 수준이나 가치관과 안 맞는 겁니다. 왜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지? 모른다, 모른다. 모르는 건 아무것도 없는 백지니까 한번 모를 때 백지 한 장. ‘왜 뜰 앞의 잣나무라 했지?’ 백지 2장. 백지가 착착착 쌓여서 10년, 20년, 30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백지가 딱 되면 공성이 보여요. 그 마음 비우는 법이 지금 사람들에게는 아주 어려운 시절이라. 컴퓨터로 답을 알아내고 외우고 채워 놓는 건 아주 잘하는데, 다 놔버리고 모르는 백지로 돌아가는 시절 인연은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어요.”
AI 시대의 화두
기자가 계속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스님이 설명을 이어 간다.
“허공을 다른 이에게 줄 수 있어요? 나한테 꽉 찬 게 그건데, 허공은 주고받고 할 수 없어요. 간화선은 주고받는 게 아니라 눈만 떠버리면 깨달아요. ‘아이고, 나도 허공 속에 있었구나! 나도 부처였구나!’ 요즘 사람들에겐 많이 어렵지. 나도 그렇게 어렵다가 홀연히 생각이 한 지경에 이른 겁니다. 누구나 허공 속에 살고 있잖아요. 눈만 뜨면 허공은 보이는데, 눈 감은 사람에게 허공을 설명해 주기는 어려워요.”
AI 챗봇인 챗GPT를 열어 ‘뜰 앞의 잣나무’가 뭔지 물어봤다.
〈제자가 ‘불법의 본질’을 묻는데, 스님은 아무 설명 없이 ‘거기, 네 앞에 서있는 나무’를 지적함 →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자체의 자리, 바로 지금 여기를 가리킴. ‘공, 불성, 자성’ 같은 교리적 답이 아닌, 그냥 ‘거기 있는 그대로’, 즉 있는 것의 그대로 됨이 선의 정신.〉
― 챗GPT한테 ‘뜰 앞의 잣나무’가 뭔지 물었더니 바로 설명해 줍니다.
“저는 그게 처음부터 이상하질 않더라고요. 많이들 와서 물어요. AI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내 마음이 만들어 놓은 이 몸뚱이가 나의 AI예요. 아버지 정충(精蟲)과 어머니 난자가 만나서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 동안 내가 익힌 대로 ‘손 들어’ 하면 착 올리고, 안에 있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이 몸뚱이가 내 AI입니다.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요.”
― 이 몸 자체가 AI군요.
“이 몸뚱이도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가 아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나는 AI나 이런 것들이 우리가 시킨 것 외에 자기 배짱대로 할 때가 얼마든지 올 것이다, 그것도 인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두려워할 게 아니라 거기에서 어떻게 돌파구와 희망을 찾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AI는 이미 막을 수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이제 와서 자동차 없이 우리가 살아지겠습니까.”
“밤에 휴대폰 보면 혼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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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9월 10일 한국을 찾은 스티븐 호킹 박사가 서울대 문화관에서 ‘우주의 기원’에 관해 강연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상좌 중에 수성이라고 있는데, 어릴 때 미국에 건너가 미국 육사를 나왔어요. 아프가니스탄에서 부하들을 잃고 인생무상을 느낀 거라. 그 길로 저에게 찾아왔어요. 그런데 비실비실 힘들어 해요. 들어 보니 육사 훈련보다 행자 생활이 더 어렵다는 겁니다. 다른 건 괜찮은데 2시 반에 일어나는 게 힘들다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저녁에 휴대폰 보다가 잠들지? 그게 얼마나 인생을 모욕하는 건 줄 아느냐.’”
― 저도 휴대폰 보다 잠드는데요.
“해가 뉘엿뉘엿 지면 온 우주의 진리, 어머니의 손길이 어둠이 되어 우리를 덮어 주면서 ‘잘 자거라’ 합니다. 그걸 역방향으로 거스르면 몸의 에너지가 어떻게 됩니까? 일찍 못 자니 새벽에 못 일어나요. 말했지요. ‘나는 8시만 되면 일체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서 꾸벅꾸벅 몇 번 졸다 그냥 폭 자버린다. 너댓 시간 자도 너희들 7시간 잔 것과 같다. 새벽 2시만 되면 저절로 일어난다. 오늘부터 무조건 8시 되면 앉아서 오늘 내가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었던가 돌아봐라.’”
― 진짜 8시에 주무세요? 저는 새벽까지 안 잘 적도 많은데요.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그래요. 세상 재밌는 일은 다 밤에 일어난다면서요.
“그건 좀 혼나야 돼. 밤에 온 우주가 자기를 위해 어둠이란 이불을 덮어주는데 스마트폰 보고 안 자고 있으면 혼나야 돼. 저녁 일찍 잤다가 하늘이 열리고(12시), 땅이 열리고(1시), 인간이 일어나는 시간(3시)에 맞춰 일어나면 얼마나 기운이 맑은데. 3시 전에 일어나서 밤하늘의 별자리라든가 새벽 새 소리에 재미를 붙이면 얼마나 생기가 나는데. 스마트폰 그놈한테 너무 놀아나질 마십시오.”
“지장 머리는 희고, 회해 머리는 검다. 억!”
간화선이니 ‘뜰 앞의 잣나무’니 하는 공안(公案·화두)에 무지한 기자에게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쉽게 설명하려 하는 게 느껴졌다. 성철 스님은 달랐다고 한다. 심지어 상좌들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말이 빨랐단다.
“얼마나 말이 바쁜지, 통역을 해야 할 정도였어요. ‘지장 머리는 희고, 회해 머리는 검다. 억!’ 하면서 끝내거든요.
‘스님, 너무 말이 빠르고 사투리가 심해서 못 듣겠습니다.’
‘그렇지, 빠르지 빠르지. 내 말 빠르다!’
말이 빠르기도 하지만, 또박또박 말해도 말이 아닌 암호예요. 그때는 들을 생각을 안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안 들었으면 다시 못 들을 말씀이었습니다. 그거야말로 진짜 말이고 화두예요. 우리는 감정이 개입된 말만 말로 듣고 있거든. 그러니 감정이 딱 없어진 순수언어를 못 알아듣는 겁니다.”
― 못 알아들을 정도로 말이 빠르셨군요.
“그분은 알려진 것보다도 더 검소하고 더 잘 살았어요. 1970년 해인사에 있을 때였어요. 스무 살 남짓 또래 다섯이 참선을 하는데 잠은 오지, 여름이라 얼마나 더운지, 마애불에 가서 부처님께 하소연이라도 하고 오자고 살짝 나왔어요. 소나기에 옷이 젖을까 속옷까지 다 벗어 두고 맨몸으로 마애불에 갔다가 내려오는데 소변 보러 나오신 성철 큰스님과 하필 마주친 겁니다.”
― 혼내셨나요?
“맨몸으로 스님께 붙들려 갔어요. ‘스님, 놀러 갔다 온 게 아니라 하도 잠이 오고 공부가 안 돼서 석불 가서 대성통곡하고 기도하고 왔습니다’ 그러면 봐줄 줄 알았는데 혼을 내세요. ‘너희들 수행자 맞냐! 땅에서 넘어진 자 어떻게 하라고 했어!’
‘땅을 짚고 일어난다 했습니다.’
‘땅에서는 땅을 짚고 일어나라, 이놈들아. 너희들이 참선할 때 땀이 나고 잠이 오면 거기서 그걸 해결해라. 안 되는 그 자리를 짚고, 되도록 하라는 말이다. 그걸 석불에까지 짊어지고 가? 거기서 안 됐으면 거기서 되도록 해야 수행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지, 안 된다고 나가면 항상 거기에서 멈추는 거야!’”
― 그게 그런 뜻이군요.
“지금도 세상이 이러니저러니 불평하긴 쉽습니다. 거기에 휘말리지 않고, 시비하고 싸우는 데 관심 두지 않고, 국민이 내 할 일 열심히 하는 게 땅을 짚고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참 대단한 나라입니다. 중국이 천하를 통일하면서도 고구려, 우리나라만큼은 점령하지 못했어요.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서 민주화를 이루는 건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는 것보다 어려울 거라 장담했지만, 결국 해냈잖아요.”
“이것 또한 지나갑니다”

― 그런데 한국 사회가 양극단으로 갈라졌어요.
“당연한 겁니다. 다른 나라가 200년, 300년 걸려서 이룬 걸 50년 만에 해놓으니 부작용이 오는 겁니다.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겁니다. 희망으로 보면 희망입니다. 절망으로 볼 필요가 없어요. 다만 요즘 정치 돌아가는 걸 가지고 가족끼리 싸우고 분열하지요. 우리나라 국민들이 머리 좋고 대단한 백성인데,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건 왜 못 고칠까 싶어요.”
― 갈등이 봉합되기는커녕 더 격화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법대 나는 의대, 너는 공대 나는 문리대, 이런 거지. 대학 갈 때 전부 한 과만 지목하면 그 나라 꼬라지가 뭐가 돼? 각자 자기 길을 가야 종합대학이 되고 꽃이 피는 건데 왜 다름을 인정 못 할까? 왜 다르기만 하면 아예 없애 버려야 할 적(敵)으로 볼까? 남편은 진보, 어머니는 얼마든지 보수일 수 있어요. 상대를 ‘생각이 다른 나’라고 생각하는 사상이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어요. 종교가 해야 할 일인데 다 못 하고 있는 택이지.”
― 상대를 ‘생각이 다른 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군요.
“우리나라가 옛날 조그마했던 그 나라가 아니예요. 지금은 눈에 보이는 땅덩어리만 갖고 말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정신문화가 퍼져 있는 만큼이 우리나라의 땅입니다. UN 사무총장, 세계은행 (부)총재까지 배출했잖아요. 한국 음악, 드라마가 전 세계에 퍼져 있어요. 한국 정신문화의 땅이 이만큼 넓어졌으면 마음도 덩달아서 넓어져야지요.”
― 혹자는 한국의 운이 다한 게 아니냐는 말도 합니다.
“만일에 우리나라 땅밑에 흐르는 기운이 푹 처져 있다면 저렇게 싸우라고 못 해요. 나무 심어 보면 압니다. 저는 매년 봄마다 남의 산이건 내 산이건 할 것 없이 몇백 그루씩 나무를 심습니다. 옛날 박정희 대통령 때는 전문가들이 심어도 100그루 심으면 한 30~40%가 죽었어요. 지금은 100% 다 살아요. 땅의 기운이 그만큼 좋아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진보니 보수니, 국민의힘이니 민주당이니 하며 싸워요. 우리나라가 기운이 있으니 서로 다투고 열을 내지, 사그라드는 기운 같으면 활활 싸우지도 않아요. 이것 또한 지나갑니다. 멀리 보면 그 뒤에 반드시 희망이 숨어 있어요. 모든 국민이 긍정적으로 보고 희망을 안 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근심 뒤에 숨은 희망을 찾아야”
― 그 말씀 들으니 불안이 좀 사그라드는 것 같습니다.
“걱정 근심으로 해결된다면 모든 성인(聖人) 들이 시간만 나면 걱정 근심하라고 가르쳤을 겁니다. 근심으론 결코 해결할 수 없어요. 근심 뒤에 숨은 내 본연의 희망을 찾아야지요. 봄을 이겨 낸 겨울은 없어요. 가을을 이겨 낸 더위가 없듯이요.”
시간은 흐르고 창틀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이제 죽을 준비를 하는 오후 햇살이 인사를 하러 선방 깊숙이 들어온다. 오늘의 대화도 이제 곧 전생이 된다. 헤어지기 전 스님에게 물었다.
― 만약 다른 행자가 스님처럼 연비를 한다 하면 말리실 건가요?
“그게 반반이라. 해놓고 빌빌댈 바에는 하지 말라 합니다.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화기가 들면 몸도 안 좋아집니다. 그 노력으로 공부를 하면 됩니다. 저는 어머니 생각이 일어도 손을 내려다봤어요. ‘이러려고 손 태웠나.’ 저에겐 이게 죽비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