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쓴 김문수 약전 | 잊힐 수 없는 시대의 삶을 살다

보일러공에서 노조위원장, 국회의원에서 장관, 그리고…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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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보다 김문수 후보의 전과 숫자가 더 많다?
⊙ 요시찰 대상이 된 뒤 일기 쓰기 중단해…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아
⊙ 경북고 3학년 때 3선 개헌(改憲) 반대하다 무기정학
⊙ 아내 설난영에게 “갈 데 없으면 나한테 시집오는 게 어떻겠소”
⊙ 전기고문, 고춧가루 물고문, 몽둥이찜질 등 야만적인 고문 수없이 받아
⊙ 43세(1993년) 되어 서울대 경영학과 복학해… 24년 6개월 만에 졸업
⊙ “좌석에 앉혀놓고 고함지르며 ‘다 일어서서 사죄하라’ 하면 유치원생도 안 한다”
5·3 인천사태 배후 조종혐의로 구속됐다 풀려난 김문수 후보가 1988년 10월 15일 서울 종로성당에서 민가협 주최로 열린 ‘10·3 석방인사 환영대회’에서 양심수 전원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김문수 캠프
기자는 15년 전 김문수(金文洙) 경기도지사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GTX로 정책 콘텐츠 키우는 김문수〉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기까지 우리는 꽤 긴 시간을 마주 앉았다. 2011년 5월로 기억한다.
 
  그는 한나라당에 대해 “표범이 자기 등에 올라타기 직전인데도 풀 뜯기에 바쁘다”고 쓴소리를 하더니 “(나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듣기 싫은 소리도 하고 그랬다”고 했다. 난파 직전 지금의 국민의힘과 비교하자면 오히려 그 시절이 호시절(好時節)인지 모른다. 김 지사와 이런 문답도 주고받았다.
 
  〈— 살다 보면, 생각은 바뀌기 마련이죠?
 
  “그게 잘 안 바뀝니다. 생각 바꾸는 것은 습관 바꾸기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바꾸었는데, 사고 체계를 바꾸니 처음에는 너무나 허전하고, 살아온 것이 다 부정된 것 같고, 굉장한 ‘연옥(煉獄)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념 체계가 있거든요. 국가와 민족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어떻게 하고, 사회 변혁의 수단은 무엇이며… 그게 이념 체계인데 쉽게 바꾸긴 어렵죠. 예수 믿는 사람이 갑자기 부처님 믿는 게 이상하듯이 말이에요.”
 
  — 어떻게 신념 체계를 바꾸었나요.
 
  “세계관 자체를 많이 바꾼 것이죠. 저는 급진적인 방법으로 사회의 기존 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했어요. 우리 역사와 대한민국 역사 자체를, 그 정통성마저 부정했지요. 이승만 대통령도 잘못했고, 박정희 대통령도 잘못했고, 전두환 대통령은 죽일놈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 맞거든요. 당시 저는 19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대한민국이 무너진다고 생각했어요. 독재와 착취로 신음하던 민중이 항쟁으로 정권을 넘어뜨린다고 봤지요. 그런데 안 넘어지더군요. 오히려 잘만 살더라고요.”〉

 
  당시 기자는 ‘연옥의 고통’이라는 표현에 순간 자세를 고쳐 앉았던 기억이 난다. 대선 후보로서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연옥과도 같은 시간을 오랜 시간 견뎌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쇠락한 가문의 전형
 
  지난 4월 24일 열린 국민의힘 대선 후보 ‘일대일 맞수 토론’에서 검사 출신의 한동훈 후보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보다 김문수 후보의 전과(前科) 숫자가 더 많다”며 김 후보를 공격했다. 한 후보는 다음 날 “말하면서도 ‘여기까지 얘기하지는 말아야 했는데’ 하며 조금 후회했다”고 사과했지만 김문수가 걸어온 길을 아는 이들은 한동훈에게 분개했다. 굴곡 많았던 그의 삶이 새삼 오버랩되었다.
 
  김문수는 1951년 8월 27일 경북 영천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남자 형제 중에서는 셋째로 태어났다. 태어난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는 그의 14대조 때부터 대대로 살아오던 경주 김씨 부락이다. 80여 가구 마을에서 타성(他姓)받이라고는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데릴사위로 왔다든가 머슴 살던 사람뿐이었다. 양반이라고는 하지만 구한말(舊韓末) 때 약간 벼슬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내내 쇠퇴의 길을 밟은 집안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교육을 거부하고 봉건적 사고방식을 고집했다고 할까. 어린 김문수가 대구에서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방학마다 고향에 내려가 서당에 다니는 일은 집안의 오랜 관례처럼 굳어 있었다.
 

  아버지는 해방 전 면서기를 하다 부면장이 되었다. 해방 후에는 어찌어찌하다 정미소를 운영하다가 다시 교육행정 공무원(농고 서무과장)으로 일했다. 이런 중 아버지가 친척의 보증을 잘못 섰다가 월급까지 차압되고 판잣집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국민학교 다닐 때 가장 싫어했던 것은 선생님의 가정 방문이었다고 한다. 단칸방에서 산다는 사실을 아무한테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년 문수는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왔으며, 그 습관은 대학 2학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대학 시절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받고 가택수색까지 겪은 일을 계기로, 일기 쓰기를 과감히 중단했다.
 
 
  일기장과 동정기록부
 
  뿐만 아니라 이전에 썼던 일기마저 모두 없애버렸다. 혹시나 일기에 누군가의 이름이 나오면, 이로 인해 원하지 않게 피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김문수는 어떤 일이라도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최선(最善)’의 노력을 다했다. 글도 쓰지 않고 사진도 찍지 않았다. 그래서 남겨진 사진이 별로 없다. 물론 그만 유난스레 그런 게 아니다. 군사독재 시대의 주류를 거슬러 살아온 투사들이라면 누구나 예외가 없던 일이었다.
 
  자신에 대한 기록이 그에게는 없고 아이러니하게도 정보기관에서 더 많이, 더 정확하게 챙기고 있는 그러한 시대를 살아왔다.
 
  놀랍게도 그가 수사기관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을 때 담당 형사들이 들여다보는 기록이 적지 않았다. 그에게 물어보는 정보가 어찌나 정확하고 상세한지 스스로 경탄을 금치 못할 노릇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의식 깊은 곳까지 들어와 파헤치는 것이 정보기관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엄습하기도 했다.
 
  수사망을 피해 숨어 있을 때도,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에도 그는 요시찰(要視察) 대상자였다. 교도관들이 한 시간에 한 번은 반드시 시찰통으로 방안의 생활이나 이상 여부를 확인하여 ‘동정기록부’에 기록했다. 반면에 그는 소송기록을 쓸 때나 가족에게 편지 쓸 때를 제외하고는 집필 허가가 나지 않았다. 당시 그의 삶은 기록할 수 없는 삶이었다. 그는 사연을 머릿속에만 담아두거나, 머문 자취 없이 스쳐가는 시간 속에 깊이 묻어두어야 했다.
 
 
  ‘신식으로’ 商大를 택하다
 
  학창 시절 김문수는 공부할 여건도 되지 않았는데 당시 영천군에서 3명만이 합격한 명문 경북중학교에 합격했다. 헌책방에 가서 《사상계》 잡지를 구해 보기도 하고 경북고에서 고취하는 엘리트 의식에 영향을 많이 받아 “나라가 우리 어깨에 달려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다 경북고 3학년 때 처음으로 사회적 행동에 가담했다. 즉 ‘데모’를 했다.
 
  1969년 3선 개헌(改憲) 반대가 한창일 때 친구가 어딜 가자기에 따라갔더니 데모를 모의하는 자리였다. 그때 모인 친구들은 그보다 훨씬 사회의식이 깨어 있었다. 그는 이런 정의로운 행위는 옳다고 생각해 데모에 적극 참가했다. 경북고 교사(대봉동 137-3)에서 2·28 기념탑(대구 달서구 두류동 산154)까지 20분간 전교생이 뛰어가 성명서를 읽고는 곧 해산하는, 당시 대구에서 처음 일어난 3선 개헌 반대 시위였다.
 
  김문수는 주동자로 지목돼 친구 4명과 같이 무기정학을 당했다. 다행히 대학입시를 앞두고 무기정학이 풀려 대입 학력고사는 치를 수가 있었다. 그가 무기정학을 받자 김씨 문중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그는 반성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제가 옳다고 확신했고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해야 하는 것이 제 윤리(倫理)였습니다. 저는 제 행동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한 친구가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연세대 상대로 지원하는 모습을 보고, 김문수는 큰 자극을 받아 서울대 경영학과에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또한 고3 때 작은아버지 댁에서 자취를 했는데 4촌형이 당시 영남대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 형도 경영학과를 권해서 ‘신식으로’ 법대가 아닌 상대를 택했다. 그때가 1970년이었다.
 
  1970년 4월, 그가 참여한 서클(후진국사회연구회) 선배와 친구 몇이서 서울 용두동의 허름한 판잣집을 얻었다.
 
  서울이라 해도 영천과 대구 등지에서 살던 판잣집보다 훨씬 궁색한 판잣집이 지천이었다. 냇물 따라 배설물이 둥둥 떠내려가질 않나,여자들이 볼일을 보는데 엉덩이가 보일 정도의 허술한 공동변소이질 않나,아침이면 줄을 서서 한참이나 기다려야 하지 않나, 정도를 넘어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클 선배들의 지도와 토론학습을 통해 그는 가난에 대한 개인적 열등감을 비로소 사회적 의식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그러다 농민운동을 해보기로 마음먹고 고향으로 내려가 1972년 9월까지 야학을 하고 4H도 해보았다. 워낙 봉건적인 시골인데다 21세의 나이로는 도무지 말발이 서질 않았다. 시골에서 상록수(常綠樹)가 되기로 마음먹고,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지내고 있는데,어느 날 집 대문 앞으로 사복 입은 두 사람이 오더니 조사할 게 있다며 김문수를 지프에 태웠다.
 
  목적지는 생전 처음 보는 영천 ‘태백공사’였다. 태백공사란 보안사령부의 위장 명칭. 다시 차에 실려,대구 보안사를 거쳐 서울의 ‘빙고호텔’(보안사 분실) 지하 취조실로 끌려갔다. 바닥에 무릎을 꿇려 취조하는 내용이 “‘타도(打倒)’라는 불온 유인물을 만들었느냐?”는 것이었다. 처음 듣는 생소한 것이었기에 모른다고 했더니,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즈음, 그들은 차비 몇 푼을 쥐여주었고, 그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청계천 피복공장에 들어가다
 
  지하조직 활동으로 제적(除籍)과 복교(復校)를 거듭했고 그에게 학교 다니는 재미는 남의 일이었다. 기술을 배우기로 작정하고 자동차 정비학원에 다니기도 했는데 그 무렵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알게 됐다. 그는 그제야 “내가 가야 할 곳은 노동 현장”이라는 확신이 들게 됐다고 한다.
 
  그러다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이 터져 다시 수배자 신세가 됐다. 그 무렵 어머니가 암에 걸려 길어야 6개월밖에 더 못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잡혀가든 말든 에라 모르겠다 하고 고향으로 달려갔다. 위암에 좋다는 온갖 약초를 캐러 다니기도 하고,낡은 초가에 사는 굼벵이가 특효라는 말을 듣고 그놈을 여기저기서 잡아다가 볶아 밥상 위에 올렸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훗날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어머님은 앙상하게 되신 채로 제 품에 안겨 숨을 거두셨습니다. 생살을 찢는 듯한 그때의 슬픔과 아픔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문을 받으면서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습니다. 지금도 어머님 생각을 하면 눈물이 올라오곤 합니다.”
 
  장례식을 치르고 1975년 초 다시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으로 향했다.
 
  청계천 신평화시장 꼭대기에 있는 신평화복장학원에서 재단을 배우기도 했고 벽제의 제지공장 등지에서도 일했다. 그날 벌어 그날 살아가는 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월급 5만원을 주는 도루코 면도날과 지퍼(AAA작크)를 만드는 회사(한일도루코)의 보일러실 조수로 일했다. 그때가 1976년 2월이었다.
 
  당시에는 뛰어난 실력이 아니면 취득하기 어려운 자격증으로 알려진 공해관리기사 2급, 안전관리기사 2급, 열관리기능사, 환경관리기사 2급을 따면서 회사에서 신망을 얻게 되었고 그 무렵 재결성된 노조의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다 1979년 10·26과 12·12를 거치며 ‘서울의 봄’이 막 달아오르기 직전인 1980년 2월에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앞서 70명의 서울대 출신 선배들이 이미 조사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줄곧 “사회주의자냐? 아니냐?”는 추궁을 받았다. “아니라고 하자 무조건 두들겨 패는데 얼마나 맞았는지 49일이 지나 나올 때까지 엉덩이가 시퍼랬다”고 한다.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후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노조 테두리에서 벗어나 점점 지역지부 산하 노조의 활동 지원에 밤낮없이 매달렸다. “1980년 민주화의 열기를 어떻게 최대한으로 노동운동에 유리하게 만드느냐는 것이 당시 노동운동의 최대 관심사였다”고 한다.
 
 
  “유신 시절은 5공에 비하면 堯舜 시대”
 
김문수·설난영 부부의 결혼식 모습. 신부는 웨딩드레스 대신 원피스를 입었다. 당시 불법 집회가 아닌지 감시하러 온 전경이 하객보다 더 많았다는 말이 있다. 사진=김문수 후보 측
  1981년 9월, 김문수는 서른 살이 되던 해, 스물여덟 살 설난영(薛蘭寧)과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는 순천 사람으로 구로공단 세진전자 노조분회장과 금속노조 남서울지역지구 여성부장을 하던 중 그와 만나게 되었다. 서슬 퍼런 5공화국 초기 그가 계엄 당국에 쫓기고 있을 때 아내의 자취방에 피신을 하게 된 인연으로 둘은 가까워졌다. 김문수 후보의 말이다.
 
  “우리 둘의 결혼식은 좀 독특한 구석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청첩장을 한 장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국에서는 우리가 위장결혼식을 하면서 무슨 시위를 벌이지 않을까 염려하여 결혼식장 가까이 전경차를 대기시키는 소란을 떨었습니다.”
 
  신부는 웨딩드레스를 입지 않고 수수한 연분홍색 원피스 차림으로 식을 올렸다. 그 당시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지만, 웨딩드레스를 입으면 사치스러워 보일까 봐 우려했던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예식장도 봉천동 사거리 책방 바로 밑에 있던 봉천중앙교회 교육관으로 하고, 신랑신부가 함께 손을 잡고 식장에 입장했다. 설난영 여사의 말이다.
 
  “언젠가 커피 한 잔 시켜놓고 ‘갈 데 없으면 나한테 시집오는 게 어떻겠소’ 하는 거예요. 그게 프러포즈입니다. 속으로 그냥… 정말 밥맛이었어요. 요즘 애들 같으면 왕싸가지, 왕재수라고 했을 거예요. 두세 번 거절했지만 그러다가 여차저차해서 결혼했답니다.”
 
  여사가 툭 던진 ‘여차저차’라는 말에는, 평범하지 않은 남편을 둔 아내로서 결혼 이후에도 겪어야 했던 다사다난하고 굴곡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두 사람은 영아와 유아들을 위한 탁아 사업을 하기도 하고 책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해고 노동자들이 모여 노동자복지협의회를 결성하자,이 단체의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민주노동》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고 서슬 퍼런 노동 탄압을 뚫고 조금씩 목소리를 냈다.
 
  당시 노조 만들기는 유신 시절보다 백배는 어려웠다고 한다. 김문수는 “유신 시절은 5공에 비하면 요순(堯舜)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기억했다. 이 와중에 구로공단의 주요 공장에서 노조가 속속 결성되어 세력을 형성하게 됐다. 그는 신규 노조를 지원하는 데 몰두하다가 1985년 초에는 청계피복노조와 함께 있던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부모님께 바친 졸업장
 
  1985년 8월 25일 청계피복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결성하고, 지도위원이란 직함을 갖게 된다. 사무실은 사무국장으로 있던 전태일기념사업회. 서노련은 당시 군사독재 반대투쟁을 주요 활동 목표로 내걸었기 때문에 형사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서노련 위원장은 구속되고 김문수는 보안사에 끌려가 글자 그대로 개처럼 맞았다. 열흘 동안 전기고문, 고춧가루 물고문, 몽둥이찜질 등 야만적인 고문을 수없이 받고 구속됐다. “개보다 질긴 것이 사람 목숨”이라 생각했단다.
 
  올림픽이 끝난 1988년 10월 3일 특별사면으로 2년 5개월 만에 풀려났다. 서울구치소, 안양교도소, 목포교도소, 광주교도소에서 석방의 기쁨을 맞았는데 감옥에 있는 동안 사기꾼, 필로폰 제조업자, 경제사범, 서진 룸살롱 살인자들, 청송보호감호소에 수감됐던 자 등 ‘간 큰’ 별의별 남자를 다 만났다. 노동 세상 밖의 요지경을 체험한 셈이었다.
 
  1990년에 그는 장기표(張琪杓·1945~2024년)와 함께 합법 정당 결성에 나섰다. 전국노동자추진위원장을 맡아 민중당 설립에 합류, 울산 현대자동차, 거제 대우조선 등지에서 민중당 지지자를 끌어오기 위해 땀을 흘렸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고 여러 가지 개혁 조치가 나왔는데 그중 하나가 대학 제적자들에 대한 복교였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 등에 연루돼 1971년과 1974년 두 번 제적을 당했었다. 결국, 43세가 되어 1993년 2학기에 서울대 경영학과로 복학했다. 그러고 복학 1년 만이요, 입학한 지 24년 6개월 만인 94년 8월에 드디어 정식으로 대학을 졸업하는 기쁨을 맛봤다. 아내와 딸 동주와 지구당 간부, 이웃들이 모두 졸업을 축복해 주었다. 당시 이런 말을 했다.
 
  “누구보다도 돌아가신 부모님께 졸업장을 바치고 싶습니다. 두 분 다 제가 졸업하기를 유언처럼 신신당부하셨거든요.”
 
 
  “혁명의 시대는 지나갔다”
 
  7년간 공장 노동자로 살고 2년 6개월 동안 투옥됐던 그는 이후 약 1년간 택시기사로 일하다가 1994년 “혁명의 시대는 지나갔다”며 민주자유당에 입당했다.
 
  앞서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중당 후보(전국구)로 나섰지만 당선권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한때 극좌 진영에서 활동했던 그는 이후 보수 우파로 정치적 방향을 선회했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해, 유력 정치인이던 민주당 박지원 의원을 꺾는 이변을 연출하며 정치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고 16·17대 총선까지 내리 3선을 했다. 2006년에는 경기도지사에 당선됐고 4년 뒤인 2010년에는 도민들의 선택을 다시 한 번 받아 재선에 성공했다.
 
  경기도지사 시절 국내 투자를 망설이는 삼성전자를 찾아가 간곡히 설득해 ‘120만 평(397만㎡)의 세계 최대 규모 평택 반도체 공장’을 유치했고 광교·판교·다산 신도시 개발, GTX(수도권광역급행철도) 사업 최초 추진으로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다. 그의 말이다.
 
  “이재명 후보가 개발한 대장동은 30만 평이 안 되는데, 제가 경기지사 때 개발한 판교 신도시는 400만 평 가까이 됩니다. 도지사 때 경기도 평택에 유치한 삼성 반도체 단지는 120만 평이지만 아무런 (부패) 문제가 없었죠. 이재명은 본인이 소년공 출신이라고 하는데, 저도 공장 생활을 7년 동안 했어요. 노동자와 국민을 위해 뜨겁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 여정에서 지금까지 회자되는 씁쓸한 장면이 (또는 녹음이) 남기도 했다. 2011년 12월 19일 경기도 남양주소방서 119상황실에 전화해 전화 응대에 소홀한 근무자 2명을 전보 조치해 논란이 일었다. 당시 ‘관등성명’을 요구했던 녹음 파일이 공개됐는데 이를 두고 ‘복수왕 김문수’라는 패러디까지 등장했다.
 
  2012년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대선 후보 경선에서 죽기 살기로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
 
  경선룰을 완전국민참여경선제(오픈 프라이머리)로 바꿔달라고 요구했으나 ‘친박’ 의원들이 포진한 지도부는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다. 낙담한 그의 측근들이 ‘이번에는 포기하고 차기를 노리자’는 말을 했지만, 단호하게 거부했다. 오히려 “박근혜보다 못한 게 뭐가 있냐”며 전당대회에서 최태민·최순실 일가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결국 박근혜는 분노했고 이후 그는 정치적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서울에 무슨 연고나 뿌리가 있느냐”
 
  2016년 20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구에 출마해 민주당 김부겸 후보에게 큰 표차로 낙선했다. 당에서는 험지(險地)에 출마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김문수는 학창 시절을 보냈던 고향 인근 대구로 내려갔다.
 
  2018년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민주당 박원순 후보에게 두 배 가까운 격차로 지고 말았다. 사실 서울시장 출마는 갑작스럽고 무모한 결정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당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서울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인천상륙작전 하듯 기습적으로 출마하게” 됐다.
 
  출마 당시 “서울에 무슨 연고나 뿌리가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서울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열린 곳입니다. 그게 수도입니다. 제 삶도 서울과 관련이 깊어요. 대학을 24년 6개월 만에 졸업할 정도로 서울에서 청춘을 보냈죠. 서울에서 결혼해 아이 낳고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봉제공 보조로 시작해 개봉동 면도날 공장에서 보일러공으로 7년간 노동자 생활을 했어요. 해고도 두 번이나 당했습니다. 제 삶의 꿈과 아픈 추억이 녹아 있는 곳이 서울입니다.”
 
  이후 오래 몸담았던 당을 떠나 재야를 떠돌다 전광훈 목사와 함께 자유통일당을 창당한 일도 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 2022년 9월 노사정(勞使政) 대표가 모여 노동 정책과 노사 관계 등을 논의하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다.
 
 
  꼿꼿문수
 
  한때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혔던 그가 보수 진영의 핵심 인물로 다시 떠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몇몇 극적인 장면이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2024년 8월 26일 고용노동부 장관 청문회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선조의 국적이 어디냐’는 야당의 공세가 거셌다. 당시 김문수는 “일제 시대 때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한국) 국적이 있느냐”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이때부터 국민의힘 당원과 지지자들은 당당한 그의 태도에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직후 국회에서 민주당 서영교 의원이 “국무위원들 일어나 고개 숙여 사과하세요”라고 요구하자 국무위원 중 유일하게 일어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던 점도 보수 유권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때부터 ‘꼿꼿문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국무위원들도 인격이 있는데 아무리 국회지만 국회의원의 갑질이 도를 넘었다”며 “좌석에 앉혀놓고 고함지르며 ‘다 일어서서 사죄하라’ 하면 유치원생도 안 한다”고 했다. 야당 공세에 지리멸렬한 윤석열 정부의 국무위원 중 위축되지 않은 이는 김문수가 유일했다.
 
  시대가 김문수를 만들었을까. 김문수가 시대를 타고났을까. 그는 “내 나름대로 정성을 다하여 한 시대를 살아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의 결혼도, 청춘도 시대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투사이자 요시찰 대상자였고, 국회의원과 도지사, 장관까지 지낸 그는 파란만장한 세월을 온몸으로 겪어낸 인물이다. 그처럼 뜨겁고 치열하게 살아낸 이가 또 있을까. 이제 그는 지탱의 힘이 미약해진 국민의힘이라는 도약대 위에서 다시 한 번 비상의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과연 그는 어디까지 날아오를 것인가. 그리고 무너져가는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켜 세울 21대 대통령이라는 월계관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이제 남은 것은, 유권자의 최종 선택뿐이다. 그의 비상은 영광의 서곡이 될 수도, 혹은 추락의 전주곡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의 자세는 꼿꼿하리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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