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사노위 위원장 시절 모임에 지하철 타고 와… “근무시간이 아니니 당연히 그래야”
⊙ 매일 아침 수행비서 태우러 오던 국회의원 후보자… 수행비서 와이셔츠 다려준 설난영 여사
⊙ “‘알아서 하되, 잘못되면 책임을 져라’… 인사권도 부지사에게 넘기고 관여치 않아”
⊙ “‘나, 도지사인데…’ 사건은 매뉴얼 지켜지는지 직접 확인한 것… 부지사가 해당 소방관 좌천시킨 것 알고 복귀시켜”
⊙ “3선 개헌 반대 데모 후에도 반성문 안 써… 국회 본회의장 혼자 앉은 모습을 보니 ‘그 성격이 어디 가겠나’ 싶더라”
⊙ 매일 아침 수행비서 태우러 오던 국회의원 후보자… 수행비서 와이셔츠 다려준 설난영 여사
⊙ “‘알아서 하되, 잘못되면 책임을 져라’… 인사권도 부지사에게 넘기고 관여치 않아”
⊙ “‘나, 도지사인데…’ 사건은 매뉴얼 지켜지는지 직접 확인한 것… 부지사가 해당 소방관 좌천시킨 것 알고 복귀시켜”
⊙ “3선 개헌 반대 데모 후에도 반성문 안 써… 국회 본회의장 혼자 앉은 모습을 보니 ‘그 성격이 어디 가겠나’ 싶더라”

- 지난 2025년 5월 13일 오후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부산 수영구 국민의힘 부산시당에서 열린 선대위 출정식 및 임명장 수여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우리 아버지 어디 있습니까?”
지난 2016년 초, 대구 수성구의 한 선거사무실. 서른여 명의 낯선 얼굴들이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예정에 없던 방문객들이었다. 이 중 가장 연장자(年長者)가 던진 물음. 질문을 받은 당시 선거대책본부장은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김문수(金文洙)의 대구 출마를 응원하러 온 사람들이었어요. 경기도서부터 관광버스를 타고 왔대요. 김 후보는 선거 유세를 나간 터라 자리에 없었죠. 그런데 찾아온 이들의 모습이 다소 생소했습니다. 한센인들이었어요. 그때 저는 김 후보가 경기도지사 시절 한센인 정착촌을 자주 찾았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본인 입으로 얘길 안 했으니까요. 이분들이 아버지를 왜 여기 와서 찾으시나 했는데, 그게 김문수였던 겁니다.”
강영욱 전 계명대 석좌교수의 말이다. 강 교수는 김문수 후보와 경북중·고등학교 동창이다. 서울대도 함께 다녔다. 그 인연으로 강 교수의 말마따나 ‘코가 꿰여’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었다.
“놀라움인지 울림인지, 좌우지간 충격에 가까운 장면이었죠. 그날 이후 찾아보니 김문수가 소록도도 여러 차례 갔더군요. 잠깐 몇 시간 있는 게 아니라 일주일씩 머물며 그들의 머리를 감겨주고, 변기 청소도 해주고…. 중·고등학교 때야 서로 아무것도 몰랐죠. 나이 들어가면서 이 친구 면면(面面)을 새로이 알게 된 거예요. 참, 친구지만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낮은 곳에서, 더 뜨겁게.’ 경기도지사 시절 김 후보가 내건 구호(口號)다. 이 문구처럼 그는 도내 11곳 한센인 마을을 일일이 방문해 주민들의 손을 잡아줬다. 각종 지원 사업도 추진했다. 정착촌마다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교육 시설도 구축했다. 그리고 약속했다. ‘대통령 후보가 되면 다시 찾겠다’고.
혼자 반성문 안 쓰던 학생
![]() |
| 지난 2025년 5월 4일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첫 지역 일정으로 경기 포천 장자마을(한센인 마을)을 방문해 주민이 준비한 꽃다발을 받고 있다. 사진=조선DB |
“약자(弱者)에게 약한 게 천성(天性)인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심성 자체가 매우 착했어요. 학창 시절에도 힘없는 학우를 도왔냐고요? 그땐 아마 그럴 새가 없었을 거예요. 자기가 젤 약했거든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거대한 권력에 맞서던 학생.’ 서지원 전 유엔대표부 대변인은 김문수를 이렇게 기억했다. 서 전 대변인은 김 후보의 고교 동창이자 서울대 70학번 동기다.
“문수네 집이 많이 가난했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모여서 밥 사 먹거나 그런 것도 잘 못 했어요. 사내자식이 돼놔서, 자기 입으로 말은 안 했는데, 우리는 다 알았어요. 이런 중 1969년, 우리가 고3 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3선 개헌(改憲)을 단행했어요. 학생들의 개헌 반대 시위로 학교는 1년 내내 카오스(Chaos·혼돈)였죠. 그해 서울대 입시 범위가 종전 5과목에서 전(全) 과목으로 확대돼 안 그래도 혼란스러웠는데, 수험생들이 모두 데모하러 뛰쳐나간 거예요. 아이들 가방엔 책 대신 선언문(宣言文)이 들어 있었고요.”
경북고는 대구에서 유일하게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나선 고등학교였다. 그리고 김문수는 이를 주도한 학생이었다. 고3 때 같은 반이었던 강영욱 교수의 회상이다.
“시험 기간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시위를 최소화하려고 학년별로 시험 기간을 따로 잡았습니다. 시험 후 한꺼번에 몰려갈까 봐요. 여러 방편을 구상했지만 결국 시위를 막진 못했어요. 학교 측에서는 고3이니 처벌하기도 곤란했을 겁니다. 강구(講究)를 했는지, 반성문을 쓰면 훈방 조치해 주겠다고 했어요. 다들 시키는 대로 써 냈습니다. 그런데 전교에서 단 한 명만이 끝까지 연필을 들지 않았죠. 지난해 국회 본회의장에서 혼자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그 성격이 어디 가겠나’ 싶더라고요.”
무기정학과 제적
![]() |
| 지난 2024년 12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국회 본회의가 열리면서 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들이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호통에 국민들께 사과하고 있다. 김문수 당시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를 무시하고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다. 사진=조선DB |
“요즘 ‘꼿꼿문수’라고 하더군요. 꼭 맞는 말입니다. 아직도 생생해요. ‘선생님은 우리에게 항상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3선 개헌은 분명 정의롭지 않은 일 아닙니까. 저는 반성문을 쓸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했었죠.”
결국 김 후보는 무기정학(無期停學)을 당했다고 한다. 서지원 전 대변인의 말이다.
“돌이켜보면 선생님들이 문수를 아꼈던 것 같아요. 서울대 보내야 하는 놈인데, 자꾸 애들 모아서 데모하니까 ‘출석한 걸로 칠 테니 시골에 내려가 있으라’고 회유하기도 했어요. 저도 서울대를 나왔고, 당시 경북고에서 매년 150명 정도가 서울대를 갔기 때문에 문수가 특별히 공부를 잘했다고 말하긴 그렇고요, 어찌 보면 서울대를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게 맞을 거예요. 학비가 쌌으니까요.”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
서지원 전 대변인은 서울대에 들어가 김문수와 같은 운동권 서클에서 활동했다. ‘후진국사회연구회(후사연)’다. 김 후보는 서클 활동을 하며 목격한 철거민촌 빈민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치기로 다짐했다. 그해 11월 13일 발생한 전태일 분신자살(焚身自殺) 사건은 그의 투쟁 의지에 불을 지폈다.
“저는 문리대(정치학과)였고, 문수는 상대(경영학과)여서 서로 잘 못 봤는데, 서클에 가입하고 보니까 문수가 있더라고요. 가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들이 그러더군요. ‘너희 고등학교 때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나갔다며?’ 그 소문이 어떻게 서울까지 났나, 싶었어요. 2학년 올라가서 저는 후사연 부회장을 맡았는데, 그해 4월 27일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3연임에 성공했습니다. 선거를 전후해 문수와 ‘공부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현장에 나가서 싸워야 한다’고 의기투합했고, 잡혀가기도 참 많이 잡혀갔죠. 그러다 2학기 들어서부터 학교에서 문수가 잘 안 보이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공단에 위장취업(僞裝就業)을 한 거였습니다. 이후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등에 연루돼 수배와 제적(除籍)도 당했고요. 한동안 ‘누가 김문수를 봤다더라’ 하는 전언(傳言)으로만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레닌’
![]() |
| 지난 2012년 5월 21일 김문수 당시 경기지사가 전남 소록도에서 거동이 불편한 한센인의 식사를 돕는 모습. 사진=조선DB |
“군사정권 아래 노동자들의 삶을 머리로 이해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은 거예요.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 노동운동 조직을 만들기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학생 입장에서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죠. 문수는 책 밖에 더 큰 세상, 더 큰 뜻이 있다고 봤던 것 같아요. 몸으로 부딪쳐 배우겠다는 사고(思考)인 거죠.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옳다고 생각하면 밀어붙이는 성격은 그대로입니다.”
김 후보의 서울대 8년 후배인 차명진 전 국민의힘 국회의원은 “김문수는 한국의 레닌이었다”고 했다. 차 전 의원은 지난 2012년 6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썼다.
“당시 운동권은 공장에 취직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육체 노동자의 생활도 힘들었지만 명문대학 졸업장이 보장하는 미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상상조차 안 되는 일이었다. (중략) 어느 날 우연히 운동권 잡지에서 김문수를 발견했다. 학생 출신으로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가 되는 데 성공했고 노동조합장까지 되어 다수 노동자의 지지 속에서 자본가와의 결연한 투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 그는 한국의 레닌이었다.”
1980년 들어 김 후보는 단순한 민주화 주장을 넘어 민중민주주의(PD)를 지향하는 급진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부위원장,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지도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노동운동계의 거물급 지도자로 성장했다. 1985년에는 5·3 인천사태로 구속돼 2년 6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보부, 보안사, 남영동을 드나들면서 갖은 고문도 받았다. 당시 그와 노동운동을 함께 했던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는 방송 등에서 “동지로 지내던 시절의 김문수는 전설이었다. 운동권의 황태자이자 하늘 같은 선배였다”고 했다.
1988년 출소 후 1990년에는 민중당을 창당하며 제도권 진입을 도모했다. 하지만 이 무렵 소련 및 동구(東歐)권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보고 노선을 보수로 전향(轉向)했다. 김 후보는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사상(思想)을 바꾸는 건 연옥(煉獄)과 같은 고통이었다”고 했다. 이후 1994년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권유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했다.
이화장 다녀온 뒤 펑펑 울어
당시 《문화일보》 기자였던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전 《조선일보》 문화부장)의 말이다.
“사회주의의 붕괴를 받아들인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이 무렵 전향한 PD 계열 인사들은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를 고민했어요. 1993년인가 김문수가 YS계 젊은 인사들과 어울릴 때, 그와 팔당댐에서 식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제가 물었죠. ‘사회주의 청산은 다 했냐’고. 이렇게 답하더군요. ‘학교 다닐 때 어머니 말씀만 잘 새겨들어도 세상 바르게 사는 데 아무 문제없는데, 내가 허튼짓했다’고요. 그 말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어요.”
장원재 성남FC 대표이사 또한 김문수 후보의 사상 변화와 관련한 일화를 들려줬다. 그는 김문수 후보가 경기도지사이던 2011~2012년 무렵 함께 이화장(梨花莊)에 방문한 일이 있다고 했다. 장 대표는 그때 경기도 산하 기관이었던 파주 영어마을의 사무총장이었다.
“이화장에 들어서자마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동상 앞에서 존경의 뜻을 담아 90도로 인사를 하셨어요. 그러고 이인수 박사, 조혜자 여사와 간단히 차를 마신 뒤 경기도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탔습니다. 손 흔드는 이인수 박사 내외(內外)와 인사를 하고 창문을 올리자마자, 펑펑 우시더군요. 나중에 여쭤봤어요. 왜 우셨냐고. 이인수 박사께서 ‘이름난 정치인 중 4·19 이후 이화장을 찾은 건 김문수가 처음’이라고 했답니다. 이승만 대통령께 형언할 수 없이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어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김문수 후보는 1996년 처음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변절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치른 그해 선거에서 그는 ‘절대 열세(劣勢)’라는 예상을 엎고 ‘DJ의 오른팔’인 박지원 의원을 꺾었다. 지역구는 부천시 소사구였다. 거기서 내리 3선을 했다. 강영욱 교수는 “그때 선거는 이번 대선보다 훨씬 드라마틱했다”고 했다.
“서민들이 가장 많이 타는 차를 타겠다”
허숭 안산도시공사장은 이 무렵 김문수 후보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서울대 87학번인 허 사장은 김 후보와 민중당 시절 인연을 맺은 후 1994년부터 김문수의 수행비서 역할을 했다.
“당시 제 자취방이 소사지구당과 김 후보님 댁 중간쯤에 있었어요. 매일 새벽 6시, 일과가 시작되면 제가 모시러 가는 게 아니라 본인이 차를 몰고 저희 집 앞까지 오셨습니다. 그러면 제가 거기서부터 운전대를 잡는 거예요. 일정은 보통 자정쯤 끝났고, 늦으면 새벽 2~3시까지도 일했어요. 일과가 끝나고도 저희 집부터 들렀습니다. 제가 ‘다 왔습니다’ 하면 ‘수고했다’면서 제 자취방부터 후보님 댁까지 직접 운전해서 가셨어요. 그때 살던 자취방이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6만원이었는데, 본인도 어려운 형편인데도 보증금을 보태주셨죠.”
당시 김 후보가 타던 차는 콩코드였다.
“김 후보 친구분이 타던 차를 받은 거였습니다. 그때 20대였던 저는 운전이 미숙해 크고 작은 접촉 사고를 많이 냈는데, 김 후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찌그러지고 긁힌 문짝을 대충 수리해 차와 문짝 색이 달라도 아무렇지 않게 타고 다녔어요. 결국 폐차 지경까지 간 뒤에야 새 차를 구입했습니다. 1996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였어요. 차를 사기 전 저에게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타는 차의 통계를 가져오라’고 하더군요. 알아보니 아반떼였어요. 주변에서는 ‘의원님, 쏘나타 정도는 타야 한다’고 했지만 ‘서민들이 가장 많이 타는 차를 타겠다’며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아반떼를 타고 다니다가 국회 정문에서 검문도 자주 당했다고 한다.
“김문수, 정치공학적 계산이 없다”
그러나 이 차는 곧 폐차됐다.
“2001년이었을 거예요. 충청도에서 열린 당 대회에 가는 길에 1톤 화물차와 추돌 사고가 생긴 겁니다. 그 길로 차는 폐차 수순을 밟았고, 운전기사 등 앞 좌석에 앉아 있던 두 분은 병원에 실려갔죠. 후보님은 저한테 ‘괜찮냐’고 묻더니, 제가 ‘이상 없습니다’ 하니까, ‘그럼 행사장으로 가자’고 하더군요. 그렇게 그날 저희는 지나가던 고속버스를 손 흔들어 세워 타고 행사장으로 갔습니다.”
허숭 사장은 “하루하루 치열했지만 그 시절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후보님이랑 목욕탕도 같이 가고, 출장 가면 한 이불 덮고 자기도 했어요. 초선 선거 준비하던 중에 제가 결혼을 해서 자취방을 나와 대방동에 신혼집을 차렸는데, 부천과 거리가 멀어져 후보님 댁에 한 달간 들어가 산 적도 있습니다. 그때 설난영 여사께서 제 와이셔츠까지 꼼꼼히 다려주셨어요. 제겐 좋은 추억이지만, 신혼이었던 제 아내는 생각이 다르겠죠. 허허.”
그는 “김문수 후보와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배운 건 ‘소신과 원칙’”이라고 했다.
“김 후보는 정치공학적인 계산이 없습니다. 본인이 가고자 하는 길을 온 마음을 다해 갈 뿐이에요. ‘적당히 타협도 하면서 일단 되고 봐야지’ 하는 생각을 안 합니다. 그에게 정치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에요.
한편으로 안쓰러운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 고집스러움이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어요. 이번 경선 과정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다른 정치인이었다면 ‘나를 도와주세요’ ‘나랑 같이 갑시다’라며 정치 세력을 잡았을 텐데, 김 후보는 벼랑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원칙을 고수했죠. 그것이 결국 반전을 일으킨 동력이 되긴 했지만요.”
‘교도소 담벼락 걷는 자세’
![]() |
| 2025년 5월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연설 도중 큰절을 올리고 있다. 사진=조선DB |
강일원 성공회대 초빙교수는 이 무렵 김문수의 지역구인 부천에서 시의원 생활을 했다.
“사실 공천을 받은 시·도의원과 국회의원 사이는 부정한 자금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 구조입니다. 김 후보님은 그런 부정을 일절 용납하지 않았어요. 감사의 뜻으로 명절 때 사과 한 박스를 드리려 해도, 극구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지역구 시민들에게 잘 하는 게 나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강조했죠. 실제로 지역구 잘 챙기기로 유명했습니다. 작은 민원이라도 수첩에 꼼꼼히 기록해 두고, 해결됐는지 반드시 확인하셨어요.”
김 후보는 강일원 교수에게 “강 교수 같은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지금은 정치권을 떠난 강 교수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검정고시로 고교 졸업 후 법학박사 학위를 따 지금은 학생들에게 법학을 가르친다.
“지난 5월 11일 의원총회에서 큰절을 했지 않습니까. 혹자는 그걸 연출이라고 하던데, 아니에요. 몸에 밴 거예요. 소사구에서도 시시때때로 했던 겁니다. 그렇게 자신을 낮추는 분이에요. 시의원이던 제게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공직자는 항상 교도소 담벼락을 걷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요. 살짝만 삐끗해도 교도소로 떨어질 수 있다는 의미였어요. 늘 가슴에 새기던 말이었습니다. 저는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지만 김문수는 지금까지도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청렴결백하면서도 유능한 사람”
![]() |
| 경기도지사 시절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35주기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는 모습. 사진=조선DB |
“김 후보가 경기도지사로 부임하기 전 경기도의 청렴도는 전국 광역자치단체 중 최하위권(16위)이었어요. 그가 부임한 후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 동안 청렴도 평가에서 전국 1위를 달성했죠. 김 후보는 당시 ‘청렴영생 부패즉사(淸廉永生 腐敗卽死)’를 원칙으로 내세웠고, 이 글귀를 화장실 소변기 앞에까지 붙여놓았습니다.”
특히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공직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자리지, 누리는 자리가 아니다.’
“도지사실에 앉아서 지시하고, 보고받는 게 아니라 ‘현장에 답이 있다’며 늘 발로 뛰었습니다. 나머지는 실국장(室局長)에게 일임했어요. ‘알아서 하되, 잘못되면 책임을 지라’는 식이었죠. 인사권도 부지사에게 넘기고 관여치 않았습니다. 자율적으로 일하면서 성과를 내면 되니까 자연히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가 형성됐죠. 일을 맡길 줄 아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재임 기간 동안 평택 삼성 반도체 단지 유치, GTX 사업 추진 등을 이뤄냈다. 비교적 덜 알려진 성과도 있다. 이국종 국군대전병원 병원장은 자신의 저서인 《골든아워》 2024년 개정판에서 “김문수가 경기도지사 시절 야당 의원들을 설득하는 등 아주대 중증외상센터를 세계적 수준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다”면서 “그 결과 경기도 내 중증외상 환자들의 회복률이 높아졌다”고 했다.
“군부대에 도서관 지어줘”
정택진 대변인은 “미래 세대를 위한 지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연아 선수를 포함한 경기도 내 피겨 유망주들에게 장학금, 빙상장 이용 등 실질적 지원을 제공하고, 피겨스케이팅 저변 확대와 인프라 구축에 적극 나서기도 했죠. 또한 경기도 내 여러 부대에 겨울철 난방을 지원하고 파주 1사단 공병대대 등 부대 스무 곳 이상에 작은 도서관도 지어줬습니다. 제대하면 바로 취업해야 하는데, 내무반은 공부하기 여의치 않다며 내린 결정이었어요.”
경기도지사 시절 김 후보를 보좌했던 A씨도 “김 후보는 특히 미래 세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경기문화재단과 함께 고 이어령 교수님을 모시고 ‘이어령의 창조학교’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가난, 학력 등 환경 때문에 창조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창의적 사유(思惟)의 기회를 준다는 취지였습니다. 약 50명의 저명 인문학·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동참했고 연사(演士)들의 강연을 온라인에 올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게 했죠. 창의 교육에 앞장선 건 지자체 중에서는 처음이었습니다.”
A씨는 김 후보를 “고리타분해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유연하고, 추진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했다.
“부하 직원을 항상 열린 자세로 대했습니다. 함께 일하던 청년 보좌진의 이야기도 늘 경청했고, 의견을 묻기도 하셨죠. 좋은 생각이다 싶으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언젠가 중국 베이징(北京) 출장을 함께 간 일이 있습니다. 제가 일정 중 ‘따산즈(大山子) 798 예술구(區)’를 돌아보길 제안했어요. 1950년대에 군수공장이었는데, 1990년 쇠락 후 빈 건물이 늘자 규제를 풀고 예술가들에게 임대해 주기 시작해 예술단지가 된 곳입니다. 검토 후 수용하셨고, 현지에서 이곳을 둘러본 뒤 ‘중국 공산당도 이렇게 규제를 푸는데, 왜 경기도는 규제를 풀지 않느냐,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남양주소방서 119 상황실 통화 사건(?)’의 진실
정택진 대변인은 “이런 김 후보의 모습이 대중에게는 다소 왜곡돼 비친 것 같다”고 했다. 대표적으로 그는 ‘남양주소방서 119 상황실 통화 사건(?)’을 꼽았다. 당시 정 대변인은 경기도 언론특보였다.
“김 후보가 전화를 걸기 2년 전 남양주에서 한 노인이 동사(凍死)한 일이 있었어요. 노인은 당시 두 차례 119에 구조 요청을 했지만, 소방서 측은 장난전화로 받아들였죠. 응급전화 대응 매뉴얼에 따르면 상황실 근무자는 119 전화 신고 접수 시 먼저 자신의 관등성명을 밝히고, 신고 내용을 성실히 응대해야 합니다. 특히 장난전화 여부를 임의로 판단해 응대하는 것을 금기시했어요. 동사 사건 발생 이후 소방본부로부터 매일같이 ‘대응 매뉴얼을 잘 지키고 있다’는 보고만 받다가 김 후보께서 직접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본 겁니다. 그런데 관등성명도 대지 않고, ‘여보세요’라고 받는 등 매뉴얼을 전혀 지키지 않은 거죠. 사실 확인 전화하는 건 부하직원 시켜도 되는 건데, 굳이 본인이 직접 하셔가지고….
그리고 전화받은 소방관을 인사 조치한 건 부지사였어요. 좌천(左遷) 사실을 나중에 안 김 후보께서는 그를 즉시 다시 복직시켰습니다. 경기도에 있던 직원들은 내막을 아니까, 다들 안타까워했는데 정작 본인은 별말씀이 없었죠.”
허숭 사장은 “김문수에 대해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이런 점”이라고 했다.
“김 후보가 3선 국회의원을 지내고 나서 저는 그가 정치적 지도자로 더 성장하길 바랐습니다. 3선 의원 정도 했으면 국가의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는 리더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김 후보는 ‘국회의원은 벼슬이 아닌 국민의 머슴’이라는 기조를 끝까지 고수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도 김문수 후보의 가장 부족한 점이 이 점이라고 생각해요. 선공후사(先公後私) 정신이 ‘너무’ 투철한 거예요. 이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향한 그의 진정성은 분명하다고 믿고, 이러한 삶의 태도를 부인할 수는 없기에, 여전히 그를 응원하는 거죠.”
“북한 인권에 관심 기울여 온 유일한 대선 후보”
![]() |
| 지난 2019년 9월 17일 오전 서울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에 반대하며 삭발을 하는 모습. 사진=조선DB |
그 시절 김문수의 옆에는 최창근 전 경사노위 자문위원이 있었다. 최 위원은 2016년 대구 출마 때의 인연을 시작으로 2018년 서울시장 선거 때도 김 후보의 수행실장을 맡았다.
“김 후보는 한마디로 ‘갈기 있는 사자(獅子)’ 같은 사람입니다. 선거에서 지더라도 실의(失意)에 빠지는 법이 없었어요. 덤덤하게 ‘그동안 수고했다’며 악수를 건넬 뿐이에요. 그때 손을 꽉 쥐는데, 이게 김 후보의 애정 표현이죠.”
2018년 이후부터 김문수는 주로 아스팔트 위에서 활동했다. 문재인 정권에 대항하는 집회에 참석하거나, 삭발 투쟁을 했다. 특히 북한 인권 문제에 목소리를 높였다. 최민경 북한감금피해자가족회 대표의 말이다.
“2019년 탈북 모자(母子) 아사(餓死) 사건 발생 후 시위 현장에서 김 후보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그때 하신 말씀이 잊히지 않아요. ‘매일 2500톤의 음식물 쓰레기가 버려지는 서울 땅에서 굶어 죽었다’며 무척 마음 아파했죠. 이후 탈북어민 강제 북송(北送) 당시에도 누구보다 강하게 규탄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최 대표는 “김 후보는 국회의원 시절 북한인권법을 발의하고, 경기도지사 때는 도내 임대주택의 50%를 탈북민에게 우선 배정하는 등 꾸준히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온 유일한 대선 후보”라면서 “이후 고용노동부 장관이 돼서도 북한 인권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했다”고 했다.
경사노위원장 임명 비화
![]() |
| 지난 2022년 10월 4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취임식에서 발언 중인 모습. 사진=조선DB |
“김 후보가 노동운동을 할 때는 노동자가 을(乙)이었지만, 지금 대기업 노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귀족노조로 불리죠. 김 후보는 위원장 재임 당시 ‘정작 보호를 받아야 할 노동자들, 가령 택배라이더나 5인 미만의 사업장 종사자들은 노조 조직이 안 되는 형국이니, 이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게 급선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니까 대형 노동조합에서는 그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죠.”
강일원 성공회대 교수는 “김 후보는 동시에 규제 완화 등을 통해 기업을 살려야 일자리가 늘어나고 민생(民生)이 해결된다는 확고한 철학도 갖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김 후보의 이번 대선 1호 공약은 ‘기업 하기 좋은 나라’다. 그는 법인세·상속세 최고세율 인하, 근로시간 유연화와 같은 규제 완화뿐 아니라 기업 담당 민원 수석 신설 등 기업 지원책도 약속했다.
서지원 전 대변인은 “노동자로 시작해 작업장(長)을 거친 뒤 정치권에서도 다양한 경험을 쌓은 김 후보는 기업 의사 결정의 흐름을 꿰뚫고 있다”면서 “우리 사회에 이런 유형의 리더는 흔치 않다”고 했다.
‘그 아버지에 그 딸’
![]() |
| 지난 5월 3일 국민의힘 대선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나란히 선 김문수 후보와 설난영 여사. 사진=조선DB |
“경사노위원장이 되고 고교 친구들이 축하파티를 해준다고 서울에서 모인 일이 있습니다. 돼지족발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김 후보가 혼자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더군요. 양복 차림에다 배낭 하나를 덜렁 메고요. ‘뭐 타고 왔노?’ 하니까 지하철 타고 왔대요. 한 친구가 ‘장관급 인사가 혼자 지하철을 타고 다니냐’고 했더니, 근무시간이 아니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왜 김문수를 좋아하는지 아세요? 겉과 속이 똑같아서예요. 살면서 여직 이 친구처럼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은 못 봤습니다. 생활 자체에 가식이 없어요. 친하다고 뭐 해주는 것도 없어요. 그래선지 옆에 사람이 잘 안 붙죠. 받아먹을 콩고물이 없으니까요. 허허.
기본적으로 따뜻한 사람이기도 해요. 김 후보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양아들쯤 되는 거 아시죠? 경기도지사 임기 첫날 아침 이 여사를 집무실로 초대해 이랬다고 하잖아요. ‘이 의자에 저는 아직 앉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먼저 앉아보세요.’
그 친구가 늘 팍팍하게 살았는데, 대구에서 출마했을 때 형편이 제일 어려웠습니다. 요즘은 아니지만, 국회의원 연금법 때문에 연금도 못 받던 때예요. ‘니 요즘 뭐 먹고 사노?’ 했더니, 한 달에 국민연금 42만원 받는 게 전부라고 하더군요. 제가 ‘설난영 여사니까 너랑 살지, 아니었으면 벌써 이혼했을 것’이라고 뭐라고 하기도 했어요.”
부인 설난영 여사와 김 후보는 노동운동 과정에서 만났다. 김 후보가 한국노총 금속노조 남서울지부 청년부장 시절 설 여사는 남서울지부 여성부장이자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이었다. 1981년 결혼해 슬하에 딸 동주씨를 뒀다. 동주씨는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를 나와 사회복지사로 일하다가 2011년 같은 직업을 가진 대학 동문과 결혼했다. 강 교수는 “그때가 경기도지사 시절이었으니까 들어오는 혼담(婚談)이 많았을 텐데, 딸에게 ‘사랑하면 결혼하라’며 단번에 승낙했다”고 했다. 주변에서는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말을 했다.
“밥 지으면 머슴 먼저 먹여”
대대로 집안 분위기 자체가 그랬다. 경북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 김 후보의 고향이다. 경주 김씨 집성촌. 그의 아버지는 공민학교 교사였다. 그러다가 김 후보가 태어날 때쯤 정미소를 운영했는데,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판잣집 단칸방으로 나앉게 됐다. 김 후보의 종친인 김영석 박사의 말이다. 그는 여섯 살 터울의 김 후보를 어릴 때부터 ‘아재비’라 불렀다고 한다.
“아재 집은 그야말로 양반집이었어요. 경주 최씨처럼 부자는 아니었지만 베푸는 가풍(家風)이 있었습니다. 보증 서기 전까진 머슴도 두고 살았어요. 그 무렵 가뭄이 되게 심했을 때가 있었어요. 이듬해 봄에 뿌릴 쌀과 벼가 없어 보리 씨앗을 가지고 보리죽을 쒔는데, 항상 머슴 먼저 먹였습니다. 그러고 나면 정작 가족은 먹을 게 없었는데도 그랬어요. 집안 내력이 그렇습니다. 임고면에 큰 강 두 개가 있는데, 그중 한 강을 끼고 우리 마을이 있었어요. 그 면(面)에 살았던 누구한테 물어도 다 알아요. 아재 집안이 어떤지.”
“그렇게 큰 사람이지만, 약자에겐 한없이 약하죠”
김영석 박사는 “집에서는 늘 중용(中庸)을 가르쳤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욕심을 부리지 않았어요. 3선 국회의원에다 도지사 두 번 했으면 재산을 불릴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소박한 아파트에 살잖아요. 수억원에 달하는 민주화운동 보상금도 거부했고요. 국가를 위한 행동에 대해 금전적 보상을 받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게 아재의 철학이죠.”
그는 김 후보를 ‘소[牛]’에 비유했다.
“그냥 소가 아니라, 여름날 풀밭에 나와 있는 소 있죠? 파리들이 등에 와서 붙어도 꼬리로 가끔 툭툭 치고 마는. 문수 아재를 비유하면 딱 그 소 같아요. 자기를 공격하거나 칼 꽂고 갔던 사람들도 다 품고 말거든요. 그렇게 하고 떠났는데도 돌아오면 안아줘요. 주변에서 ‘왜 그렇게까지 다 받아주냐’고 하면 그 특유의 씩 웃는 표정 있죠? 그거 한 번 짓고 맙니다. 작은 데에 연연하지 않는 거예요. 아마 언론에서 본인에게 불리한 내용을 보도한다고 해도 웬만하면 반응을 안 할 겁니다. 안 믿기면 골탕 먹이는 기사 한 번 써보세요. 그렇게 큰 사람이지만, 약자에겐 한없이 약하죠. 한센인 마을 같은 감동은 사실 차고 넘쳐요. 그걸 일일이 말하자면 제가 많이 울어야 하기 때문에….”
김 박사는 이 대목에서 잠깐 목이 메었다.
“김 후보의 꿈은 대통령이 되는 게 아닙니다. 나라가 워낙 혼란스러우니까 원칙을 세워야겠다 싶어 사명감(使命感)에서 나선 것이지,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게 목표가 아니에요. 그렇게 보면 엄청나게 자존심 상해할걸요. 이 시대의 고통과 어려움은 자기가 받은 걸로 끝내고 싶은 것, 이게 김문수가 진짜 이루고자 하는 겁니다.”⊙
| “김문수는 풍류(風流)를 아는 사람” 애창곡은 ‘찔레꽃’ ‘내 마음 별과 같이’ ‘내 나이가 어때서’ 김문수 후보는 노래를 즐긴다고 한다. 술은 마실 줄 알지만 마시지 않는다고. 이 밖에 취미로는 등산과 턱걸이를 즐긴다는 전언이다. 김 후보의 자서전인 《난세의 영웅 김문수(2025)》를 공저(共著)한 김용복 《미래세종일보》 논설위원은 “최근까지도 턱걸이를 매일같이 스무 개씩 하고, 등산을 한 사진을 지인들과 공유했다”고 했다. 김 후보는 아귀힘이 센 걸로 유명하다. 김 후보와 친척 관계인 김영석 박사는 김 후보를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잖아요? 유머감각도 있고, 노래도 잘합니다. 찔레꽃, 내 마음 별과 같이, 내 나이가 어때서, 젤 좋아하는 노래예요.” 다만 김문수 후보가 ‘노래를 잘한다’는 것에는 이견(異見)이 존재했다. 장원재 성남FC 대표이사의 말이다. “도지사 시절 김 후보께서 한 공중파 방송의 명사 노래자랑 프로그램에 나가려고 준비한 적이 있어요. 제가 영국에서 성악가로 데뷔한 적이 있어서 노래를 좀 가르쳐드렸는데, 글쎄요…. ‘노래를 잘한다’는 건 본인 주장일 수 있습니다.” 당시 김 후보는 장 대표에게 ‘방송에 나가 수화(手話)로 노래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제가 만류했습니다. 뜻은 좋지만, 지사님 이것이 무슨 공익 프로그램이면 모르겠는데, 대중을 상대로 한 노래자랑에서 수화로 노래할 경우 사람들이 조금 어색해할 우려가 있다고요. 그래서 결국 ‘찔레꽃’을 부르셨고, 수화 노래는 그 후 설난영 여사님과 함께 다른 프로그램에서 선보였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