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화제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의 CEO 이순신론(論)

“이순신, 소통 즐기면서 다음을 생각하는 리더”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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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수군 턱밑에서 견제한 고하도, 고금도의 수국(水國) 경영
⊙ 윤동한 회장, 충무공 이순신의 ‘지리(地理) 경영론’으로 박사 학위 받아
⊙ 이순신의 승리 전략… 지리·수리 환경 활용해 불리함은 숨기고, 유리함은 극대화
⊙ 철저한 지리·수리 정보를 얻은 후에 비로소 수군 움직여

尹東漢
1947년생. 영남대 경영학과, 서울대 경영대학원 수료, 수원대·대구가톨릭대 경영학·문학 박사, 세종대 명예 이학박사 / 농협중앙회, 대웅제약 부사장(1974~1990년),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역임. 現 한국콜마 회장, 서울여해재단 이사장, 석오문화재단 이사장
서울 광화문 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 선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이하 사진=조선DB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년)의 480번째 탄생일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거북선을 건조하여 옥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앞바다와 부산, 명량, 고금도 등 해전에서 왜적을 물리쳐 겨레를 구한 민족의 영웅이다.
 
  기자가 만난 윤동한(尹東漢) 한국콜마 회장은 이순신 장군의 이상과 업적을 ‘CEO 이순신론(論)’ ‘충무공 경영학’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체계화한 인물이다.
 
  윤 회장은 1990년 단 3명의 직원과 함께 화장품 제조업체 한국콜마를 창업해 연간 3조원 매출의 K-뷰티 신화를 이끌었다. 그의 충무공 사랑은 지극하다. 윤 회장 경영철학의 뿌리이자 삶의 지표와 같다. 〈난중일기〉 〈장계〉 등 《이충무공전서》의 한글 번역 사업을 총괄했으며, 심지어 작년에는 〈고하도·고금도의 지리적(地理的) 이점을 활용한 이순신의 승리 전략 연구〉 논문으로 대구가톨릭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구가톨릭대 대학원에 이순신 과정을 개설하는 데 적극 관여하고 지원해 이순신학을 정론(正論)으로 공부할 수 있게 틀을 마련한 이가 바로 윤 회장, 아니 윤 박사다.
 
  기자는 일찌감치 이 논문을 입수했지만 소개하지 못하다가 충무공 탄생일을 맞아 소개한다. 윤 회장에게 직접 박사 학위 논문을 받았고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무너진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 발판 마련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통제영으로 삼은 고하도와 고금도.
  전남 고하도, 고금도는 이순신이 백의종군 후 무너진 조선 수군을 재건하고 경영하는 데 발판이 된 장소다.
 
  조선 수군은 원균이 지휘한 칠천량 해전(1597년 8월 27일)의 패배로 와해 위기에 처했었다. 이순신은 백의종군 이후 궤멸한 조선 수군을 수습해 13척의 전선(戰船)으로 명량에서 기적적인 승리(1597년 10월 26일)를 거두었다.
 
  그러나 13척의 전선만으로는 장기전을 치르기에 도전이 되었기에 이순신은 일본 수군과의 전투에 대비하고자 진영을 고하도와 고금도로 옮기며 수군 재건에 힘쓴다.
 
  1597년 10월 말 이순신은 목포의 고하도로 수군진을 이진(移陣)하여 임시 통제영을 건설한다. 그러고 이듬해 2월 다시 고금도로 이진한다.
 
  고하도, 고금도를 바탕으로 통제영 경영에 집중한 이순신은 전선을 건조하고 군수물자를 생산 및 보급하며 군사들을 훈련하는 위업을 이루어냈다. 이 결과 이순신은 정유재란(1597년 8월~1598년 12월까지 지속된 전쟁) 시기 조명(朝明)연합 수군의 합동 작전에 나서 노량에서 순국(殉國)할 때까지 무난히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은 칠천량 해전의 대패 이후 수군을 재건해 낸 상황에서 이순신의 수국(水國) 경영에 미친 요인으로 ‘지리(地理)’에 주목했다.
 
  “무신 출신의 이순신은 이미 지도에 대해 상당히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순신은 이미 현장을 순시하며 여러 번 보아서 익숙하고 연안을 항해해 보았기에 지도를 직접 그리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을 재건하고 고하도, 고금도로 통제영을 이진하면서 지리적 요인을 활용했다. 철저하게 조선 수군에 유리한 지리적 요인들을 이용하고 적의 상황을 계산하여 전장(戰場)에 임했다.
 
  고하도는 면적 2997㎢, 해안선이 15.2km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섬이다. 목포 앞바다를 지나 강진이나 완도 고금도를 거쳐 여수로 가는 뱃길에서 고하도는 대단히 중요한 바닷길목이다. 내륙의 길목도 중요하지만 이곳은 서쪽 앞바다를 지나가는 적선이나 조세운반선을 감시할 수 있는 요충지다. 고하도가 적의 수중에 빠지면 목포와 내륙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열리는 셈이 되어 호남 곡창지대가 순식간에 위태로워진다. 특히 영산강으로 침투하는 일본 수군의 빠른 진격을 막을 방법이 없다. 이런 면에서 이순신 역시 이 섬의 지정학적 가치를 매우 중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하도, 용머리, 천연 요새
 
윤동한 회장의 박사 학위 논문.
  이순신은 1597년 10월 말부터 이듬해인 1598년 2월 17일에 이르러 완도 고금도로 진을 옮기기까지 108일간 주둔하며 무너진 조선 수군의 전력을 새로 정비했다. 전선의 위치를 드러내지 않은 채 서해안 항로를 은밀히 방어할 수 있었다.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의 고하도 진성(鎭城) 관련 조사 기록은, 이순신이 왜 수군기지를 고하도 깊숙이 숨기고 겨울 동안 수군을 재건할 최적의 거점으로 삼았는지를 잘 드러낸다.
 
  이 진성은 고하도 중앙부에 위치하는 큰덕골 골짜기를 둘러싸고 있는데, 각각 산 정상(63.1m)과 75.3m, 64.7m, 80.6m, 63.5m 높이 봉우리 능선의 바깥쪽 사면부를 따라 축조되어 있었다.
 
  윤 회장은 “고하도 진성은 기본적으로 큰덕골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산성 형태의 수군 진성으로, 기왕에 알려진 수군 진성의 입지, 구조와는 다른 특이한 성곽 양식을 보여준다”고 풀이한다.
 
  목포 사람들은 고하도를 용섬이라 부른다. 목포해양대 부근이나 신안비치호텔(목포시 죽교동)에서 보면 섬의 옆면을 제대로 볼 수가 있다. 산의 형상이 솟거나 낮아지기를 반복하다가 용머리 부분이 굵게 변해 풍수지리설의 용뱀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윤 회장의 설명이다.
 
  “지금도 고하도에는 진의 성터가 일부 남아 있는데 석성을 쌓았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석성터와 토성 흔적이 조금 남아 있어 발굴조사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동쪽 유달산을 바라보는 방향으로는 산등성이가 가파르고 서쪽 바다 쪽으로는 완만하여 조선소와 무기고 등을 배치할 수 있는 구조다. 성곽을 쌓았어도 서쪽으로는 열린 구조였을 것이다.”
 
  고하도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섬 가운데 큰 산에서 서북방면 해안을 따라 절벽이 형성되어 자연 요새로 적합하다는 사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병풍처럼 서 있다 해서 병풍바위, 병풍바위 끝자락을 용머리라고 불렀다. 절벽과 산이 둘러싸고 있고 물을 건너 유달산과 마주하는 곳은 아주 가팔라 적이 들어와도 쉽게 침범하기 어렵다.
 
 
  가장 조류가 강한 진도 수역에 버금가
 
작년 8월 22일 윤동한 회장이 대구가톨릭대 학위수여식에서 이순신학(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성한기 총장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한국콜마
  지리적 요인만이 아니라 수리적(水利的)으로도 고하도는 이순신의 치밀한 전략적 사고가 반영된 공간이었다. 목포 앞바다와 고하도의 조류도 방어적인 요새 구축 요소로 손색이 없다. 도쿄대 해양연구소 추효상 박사의 〈목포 고하도 주변의 조류 특성〉(2001)에 따르면 영산강 하굿둑에서 목포항에 이르는 해역은 지형적으로 여건상 흐름이 정체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조류가 강한 진도 수역에 버금간다고 한다.
 
  한국 서해 남부 주변 해역은 일반적으로 반일주조(半日週潮·하루에 두 차례 만조와 간조가 일어나는 조석 현상. 약 12시간25분의 주기다)가 활발하다.
 
  규칙적인 1일 2회의 창조류(漲潮流·저조에서 고조로 해면이 상승할 때 흐르는 조류), 낙조류(落潮流·고조에서 저조로 해면이 낮아질 때 해안이나 하구로부터 멀어지면서 흐르는 조류)가 일어난다. 조류 특성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이 무작정 전선을 투입해 들어왔다가는 조류에 쓸려 낭패를 당하기 일쑤다. 윤 회장의 말이다.
 
  “주변 수심은 하사도와 고하도 북단을 연결하는 해역이 10m 이상으로 좁은 수로를 형성하고 조사해역 중 수심이 가장 깊은 해역은 하사도 서쪽 해역으로 20~23m 정도다. 이 역시 일본 수군의 전선이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은 수심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조류 상황에서도 일본 수군이 서남해를 쉽게 드나든 것은 조선의 뱃사람들이 협조했기 때문이라는 추론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순신이 고하도에서 부역자 처벌에 적극 나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으로 윤 회장은 추정한다.
 
 
  고하도에서 고금도로
 
  1598년(선조 31년) 2월 17일에 이순신은 고하도에서 고금도로 진을 옮겨 본격적으로 고금도 통제영 시대를 열었다.
 
  고금도는 전남 서부 남해안 지역의 섬들 가운데 비교적 큰 섬이다. 풍부한 해산물과 함께 비옥하고 넓은 농토에서 산출되는 곡물이 적지 않아 외부로부터의 고립에 대비하는 데에도 유리한 곳이다. 또한 연안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조운로(漕運路·배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해로)를 장악할 수 있는 전략상의 이점을 가진 섬이다.
 
  단연코 고금도의 가장 큰 강점은 교통이다. 고금도의 북쪽 해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조운선과 무역선이 다니는 길목으로 이용되었다. 연안 항해를 하는 뱃사람들은 풍랑이 적고 잔잔한 북쪽 해로를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또 남쪽 해로는 왜구가 서남해안 지역으로 침입하는 길목이라 이곳을 지키면 고금도뿐만 아니라 내륙 방어에도 유리했다. 당시 조선은 이 해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육지부에는 회령포진, 강진 마도진 등을 설치하여 운영했다고 한다.
 
 
  고금도 수군기지 통해 조선 수군의 기반 회복
 
  윤 회장은 “이 시기에 조선 수군의 군사력을 본격적으로 회복하고 조선을 침략한 일본 수군과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고하도 통제영도 물론 나름 큰 의미를 갖는다. 지리멸렬하다시피 줄어든 조선 수군을 재건할 토대를 마련했고 흩어진 장수와 병사들을 불러 모았으며 수군 재건의 가능성을 제공한 점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병력도 전선도 규모 면에선 너무나 빈약하고 고하도 자체가 서쪽으로 치우쳐 있어 순천을 비롯한 남해에 있는 일본군에 대한 공략이나 견제는 감당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와 비교해 고금도 통제영의 진정한 가치는 한산도 수군통제영이 철저히 파괴당하고 무너져버린 후에 고금도 수군기지를 통해 조선 수군의 기반을 회복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윤 회장의 부연설명이다.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임란 초기 옥포, 부산포, 한산해전을 치러낸 강군 조선 수군의 면모를 어느 정도 회복, 일본 수군의 서남해 통과 야욕을 무너뜨려 동아시아 국제 전쟁의 판도를 다시 뒤집을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 것이 가장 큰 의미라 생각한다.”
 
  고금도는 어촌이 아니라 농촌의 느낌이 강하다. 야트막한 산과 평지가 어우러진 농촌 풍경이다. 고금도는 어촌과 농촌이 공존하는 곳으로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도 많다. 유자, 매생이, 굴 등이 특산품이고 봄과 여름에는 남해성 어족이 산란하기 위해 고금도 근처로 몰려와 어로 작업이 성황을 이룬다. 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결론적으로 이순신은 고금도 통제영 건설을 통해 서해와 남해를 잇는 지리적 요충지에 방대한 해상기지를 세웠다. 몰려든 수많은 피란민과 함께 민관군의 협력을 통해 조선 수군과 명나라 군사들이 연합함대를 구성할 수 있는 거대한 해상기지를 건설한 것이다.”
 
  이순신은 1598년 2월 17일부터 9월 14일까지 펼쳐진 고흥 절이도 해전에서 일본 수군의 야욕을 대차게 꺾어버린다. 일본군을 순천에 묶어놓는 데 성공한 것은 물론 명나라로부터 조선 수군을 인정받는 계기를 만들었다.
 
 
  고금도의 지리적 이점
 
  고금도진 설치에 대한 배경을 자세히 밝혀놓은 기록은 많지만 내용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2001년에 발행한 《고금면지》에서는 “비록 도서이나 풍랑의 격심이 없는 고로 연화부수(蓮花浮水) 격이요, 산세는 금수(錦繡)요, 토지는 옥야(沃野)라 곡물이 많고, 어염시초(漁鹽柴草)의 부족함이 없으며, 육지와의 교통은 강진의 마량을 통하므로 임의대로 왕래할 수 없으니, 이 모두가 사람이 살 만한 곳”이라 밝히고 있다.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생김새에 산세는 비단에 수를 놓은 모습이고 토지와 들판이 넓고 기름져 소출(所出)이 많으며, 서민 생활의 필수품인 생선(어업)과 소금(제염), 땔감이 부족함이 없다는 말인데, 한마디로 고금도가 물산과 소출이 풍성하고 지키기 편한 곳이라는 말이다.
 
  주변 도서로 동쪽에 약산도(옛 이름 조약도)가 있고 서쪽에 완도군 군외면과 접해 있다. 군외면은 완도 북쪽과 닿아 있다. 남쪽으로 완도 신지도, 북쪽으로는 강진군 도암면, 대구면과 마주해 있다. 육지와 인접해 있는 지정학적인 조건으로 교통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해역의 깊이는 1.1~23m다. 북쪽의 간석지가 넓게 발달한 연안역에서는 깊이가 얕은 반면 남쪽의 완도나 고금도의 협수로 부근에서는 조류의 흐름도 빠르고 수심이 상당히 깊은 지역이 형성되어 있다.
 
  윤동한 회장은 “이곳 해역을 잘 아는 뱃사람은 이곳을 무난히 지나쳐갈 수 있겠지만 지역 뱃사람이나 지역 수군이 아니면 입출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했다. 따라서 마량과 고금도 사이, 고금도와 완도 사이 및 완도 북쪽 협수로 등에서는 보통의 조류에 비해 강한 흐름이 존재한다. 남쪽의 완도나 고금도의 협수로 부근의 정보가 없으면 위험해질 수 있었다. 윤 회장은 “조류를 모르면 낭패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 이순신이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진을 잡은 것임을 보여준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러나 당시 이순신이 모든 조류를 다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분명 연해민들의 조언을 듣고 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한산도 운주당에서 고하를 막론하고 소통을 즐겼던 이순신은 조류 전문가인 연해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 남해의 길목 해로를 틀어질 수 있는 고금도에 수군기지를 건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윤 회장이 현지 주민들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고금도 내해는 호수처럼 조용하고 남해 쪽 외해는 상당히 거칠고 변화가 심해 이순신이 영을 두었던 고금 덕동리 해안은 큰 풍랑이 치면 주변 배들이 피난을 올 정도로 좋은 위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편 풍속도 서북풍이 거셌던 고하도에 비하면 아주 약한 편이라는 것도 고금도 이진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을 것으로 윤 회장은 파악한다.
 
 
  고하를 막론하고 소통을 즐기다
 
전남 완도군 고금도과 강진군 마량면을 연결하는 연륙교인 ‘고금대교’. 지난 2007년 6월 29일 개통됐다.
  1971년부터 30년간 겨울철 풍속 자료를 평균 계산해 본 결과 신기하게도 고금도의 풍속이 남해 도서 중에서 가장 낮았다. 당연히 수온은 가장 높아 수군진을 꾸려가기에 수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성락이 쓴 〈완도, 고금도진 발굴조사 종합보고서〉(2011)에 따르면 지금은 고금도가 강진군 마량면과 고금대교로 연결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고금도진이 위치하고 있는 덕동리를 중심으로 인근의 도서 지역과 완도읍을 비롯하여 강진·장흥군의 해안지대와 바닷길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까지의 고금도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전라 좌·우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남해로 진출하는 중간 지대를 점하고 있었다. 고금도는 내해에 위치하면서 고금도와 북쪽의 강진군 마량면의 육지부와의 사이에는 마도수로가, 남쪽의 신지도와의 사이에는 장직수로가 형성되어 있기에 예부터 해상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따라서 고금도진은 이러한 해상교통의 안쪽에 위치해 있었기에 주변으로 들어오는 해상교통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리적 위치와 특성을 종합적으로, 전략적으로 고려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순신은 지리 정보와 수리(水利) 정보 그리고 지도 정보의 전문가였다. 윤동한 회장은 “이순신의 수국 경영의 특징을 보면 ‘불리함을 숨기며, 유리함은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정보전과 병참의 승리
 
목포 부속 고하도에 있는 이순신 기념 유적 ‘모충각’. 사진=박종인
  명량해전을 완벽하게 승리한 이순신은 불과 13척밖에 없는 조선 수군을 이끌고 발음도(안편도)에서 고하도, 고금도까지 유랑극단처럼 떠돌며 가장 숨기에 유리하고 가장 겨울을 나기 좋으며 군량 보급과 병력 확충에 보탬이 될 곳을 골라 찾아다녔다.
 
  이순신은 고하도, 고금도 수군기지 결정에서 “첩보→수색→정보 분석과 행동 결정→현장 점검→이동→정착”이라는 원칙을 따랐다. 특히 고하도의 경우 직접 현장을 점검했다. 고금도의 경우도 남아 있는 기록은 없지만 이순신이 탐문과 지리 정보를 점검한 후 직접 둘러보고 결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윤 회장은 “이순신의 현장 경영은 이처럼 철저한 지리와 수리에 대한 정보를 얻은 후에 이를 완벽하게 해석하고 유비무환의 자세로 준비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수군을 움직였다”고 했다.
 
  “물령망동 정중여산(勿令妄動 靜重如山)-가볍게 움직이지 마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운 행동을 취하라!”
 
  옥포해전(1592년 5월) 당시 그가 부하들에게 내린 명령으로 이 뒤에는 철저한 지리와 수리 정보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즉 그의 정보를 다루고 지배하는 능력이야말로 결정적인 승리의 핵심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은 전술적인 측면에서도 정보전의 중요성 못지않게 원활한 군수 보급이 승리의 원천임을 깊이 깨닫고 이를 최전선의 현장마다 철저히 적용했다. 고하도, 고금도 통제영의 경영은 다분히 병참과 보급의 문제를 신경 쓴 이순신의 조처였다고 볼 수 있다.
 
 
  고하도와 고금도 통제영에 구축한 자급자족의 환경
 
다도해가 시작되는 목포 앞바다 고하도. 이순신 장군의 얼이 새겨진 이 섬에 목포대교가 연결돼 승용차로도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이순신은 군인들을 먹이는 문제를 깊이 살폈다. 당시 수군 장수들은 조정 지원이 사실상 전무했다. 병사를 모으고 먹이는 일부터 진지를 수리하고 함대를 정비하며 병장기, 화약을 조달하는 일까지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는데, 때문에 조정에서 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백성들로부터 물자와 식량을 빼앗을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고리가 일반적이었다.
 
  이순신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조정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산업을 일으키고 한산도 진영을 거대한 하나의 군수기지로 변모시켰으며, 칠천량 패전 이후 고하도, 고금도 통제영 건설 때에도 국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주·자립하는 통솔력을 발휘했다. 훗날 영조 임금은 이 점을 높이 평가해 기록으로 남겼다.
 
  해변에 버려진 수많은 땅을 개간하고 광범위한 둔전(屯田)을 개발하도록 한 것이 그 예다. 보급물자는 전쟁 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다. 먹이고 입히고 무기를 대줘야 전쟁이 가능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윤 회장은 “이순신이 절이도 해전에서 승리하고 노량대첩에서 적군을 말살할 수 있었던 밑거름은 바로 고하도와 고금도 통제영에 구축한 자급자족의 환경”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특히 해로통행첩(관리하에 있는 바다를 지나가는 배들에 통행첩을 발행하고 그 대가로 쌀을 받았던 제도)을 비롯해 이순신이 수행한 조치들이 그 바탕이 되어 군량미 걱정을 던 것은 가장 큰 과제를 해결한 것이었다. 윤 회장은 “이순신의 지리, 수리 경영은 승리를 뒷받침하는 병참과 보급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경영의 요체를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POST-WIN, 다음을 생각하는 경영자
 
  이순신은 어떻게 지리와 천시에 통달하게 됐을까.
 
  이순신은 한 가지 결정을 내릴 때 깊은 숙고를 통해 그 결정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늘 고민하는 리더였다. 윤 회장은 “이순신의 정책적 결정과 선택이 늘 옳았던 것은 그가 눈앞의 이득보다 앞날을 위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결정에 늘 경제적인 개념이 자리했다. 윤 회장은 그것을 ‘셈’ ‘헤아림’이라고 말했다. 경영에서 헤아림은 기본이다. 득이 될지 손해가 될지를 미리 헤아려보는 것이다. 고금도를 비롯한 수군진의 둔전 개발은 바로 이순신의 깊은 경영적 헤아림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둔전이란 군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한 토지를 말한다. 이순신은 고금도 둔전을 통해 군량미의 자체 조달을 가능케 했다. 그곳에서 산출하는 양식을 통해 물물교환 형식으로 막대한 전비 조달 또한 가능케 만들었다. 바다와 육지의 산물을 대대적으로 찾아내 전비를 충당토록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산도 통제영 시절부터 과메기를 비롯한 청어, 미역, 김, 파래, 다시마 등을 식량화, 또는 육지 농산물과 교환하니 군사와 백성의 굶주림이 해결되었다. 본디 조선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이전에 왜구가 출몰하는 이유로 섬을 비워두는 공도(空島)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윤 회장은 “(이순신은) 조정에 건의해 200년간 계속해 온 공도 정책을 바꾸어 돌산도, 흥양 도양목장, 강진 고금도, 해남 황원곶 등을 둔전으로 개발하는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었다”고 했다.
 
  또한 고하도, 고금도를 지나는 선박에 대해 해로통행첩을 실시하고 여기다 염전 경영, 전선 건조, 총통 제작, 무기류 제조 등의 성과를 거두었던 점은 통제영의 미래를 지속 성장케 하는 데 일조했다. 윤 회장의 말이다.
 
  “‘이순신’ 하면 명량·한산·노량해전 등 전투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사실 이 모든 전투의 승리는 그가 경제 경영의 관점에서 군수물자의 보급전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거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금도 시절은 비록 1년도 못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새로운 수국 환경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해로통행첩과 둔전을 통해 거둬들이는 군량미가 막대했다. 군선을 건조하는 데 무리가 없었고 백성들이 몰려들면서 생업에 걱정이 없어지자 물류와 경제가 살아났다. 삼도수군통제영이 하삼도(경상·전라·충청)의 실질적인 경제 유통의 중심지가 된 셈이었고 해상왕국의 기지가 되었다.
 
 
  소통의 DNA
 
2025년 3월 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정호텔에서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이 ‘이순신 어머니 초계 변씨의 삼천지교’ 강의를 하고 있다.
  이순신 백전불패의 원천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윤 회장은 “이순신에게는 어떤 장수보다도 많은 소통의 DNA가 내재해 있었다”고 말한다.
 
  고하도, 고금도 통제영의 기획, 설계에서부터 실행과 이진까지 과정에서 이순신은 부하 장졸들과 연해민, 표류인, 피란민, 심지어 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과 소통하며 많은 정보를 얻어내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함께 전쟁에 임할 수가 있었다.
 
  피하고 도망 다니는 관료 장수들은 꾸짖고 다가오는 피란민과 자원해 들어오는 의병과 관병들에게는 관대히 문을 열어주고 그들과 함께하니 백성들은 모여들고 군사들이 찾아오며 저절로 통제영의 수요가 채워진 것이다. 《난중일기》 1597년 8월 6일의 기록이다.
 
  〈옥과에 머물렀다. 초경(初更)(오후 7~9시)에 송대립(宋大立)이 적정을 탐지하고 왔다. 아침 식후에 길을 떠나 옥과 지경에 이르니 순천과 낙안의 피란민들로 길이 가득 찼으며, 남자 여자가 서로 부축하고 가는 참상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울면서 “사또[使相]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 우리는 살았다”라고 말하였다.〉
 
  피란민들이 이순신의 복귀에 감격하며 “이제 우리는 살았다”고 외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위민(爲民) 소통 방식이 백성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결국 문제는 소통 방식에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윤동한 회장은 “이순신의 소통 리더십이 위기를 타개할 묘책이었다”고 판단한다.
 
  제승당은 이순신이 한산도에 진을 친 후에 한산도 지휘부의 브레인 스토밍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순신은 전란에 임할 때 늘 이곳에 머물면서 아래 참모와 장졸들을 모아 작전계획을 의논했다. 원래 이곳은 이순신의 집무실이자 작전사령부 역할을 하던 곳으로 운주당으로 불리었다. ‘운주(運籌)’란 ‘지혜로 계책을 세운다’는 뜻이다.
 
  《난중일기》에는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웠다(同論畫計)’ ‘온갖 방책을 의논했다(百爾籌策)’ ‘밤낮으로 의논하고 약속했다(日夜謀約)’라고 기록돼 있다.
 
  윤동한 회장은 “다른 리더들 같으면 말 붙이기도 어려울 통제사 앞에서 계급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이 정보를 공유하고 생각을 나누었다”며 “이 소통의 모델은 고하도는 물론 고금도에서도 빛났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손수 자원해
 
  이순신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승리 방정식은 ‘자기희생적’ 사고방식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이 없는 일들을 손수 자원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일을 만들어가며 처리했다.
 
  윤 회장은 “이러한 ‘자원’은 생색도 나지 않고 자칫 화를 부를 수도 있는 일”이라며 “그러나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리더라면 절대 하지 않는 이순신 삶의 성공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런 힘든 일들을 기꺼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손수 나서서 처리하고 다녔다.
 

  고하도에서의 병참 확대도 비슷한 사례에 속한다.
 
  〈대체로 이 섬(고하도)은 남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바다의 길목에 위치하여 오른편으로는 영남에 연하고, 왼편으로는 서울로 연결된다. 가깝게는 군사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있어 승리를 기약함이요 멀리는 행재소(行在所)에 곡식을 제공하는 데 궁색하지 않음이라.〉(고하도 이충무공유허비 중에서)
 
  고하도는 서남해 도서 지역의 해산물과 나주 등 내륙 지역의 농산물을 교환하기에 적합한 요충지였다. 이순신이 이곳에 영(營)을 설치한 것은 피란민은 물론 멀리 행재소에 있던 임금의 식량난까지 생각한 것이다.
 
 
  이순신의 경영철학이 오늘날에도 유효해
 
  이순신이 고금도로 이진한 것도, 굳이 순천왜성 턱밑에까지 가서 수군기지를 설치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그는 통제영을 설치하고 일본군을 견제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피하면서 굳이 가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이러한 충무공의 정신은 정유재란의 종결, 노량해전에서도 빛났다.
 
  이 같은 삶의 방식은 고하도, 고금도에서 더욱 빛났고 칠천량 패전 이후 쇠락해 가던 조선 수군을 기적같이 부활시켜 곧 다가올 노량해전의 대미를 장식하게 될 기초를 완성한 것이었다. 윤동한 회장의 말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경영철학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특히 그의 경영적 가치관은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어떤 불이익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이를 감수하고 주인의식을 가지고 더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서는 자세를 보여준 데서 드러난다. 오늘날 사회에서 이충무공의 수국 경영이 보여준 희생정신과 주인의식은 더욱 그 가치를 발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이순신의 통솔력과 애민사상의 가치가 소중하게 여겨지는 현시점에서, 그의 정신은 체스터턴(G. K. Chesterton)이 말한 내용과도 오버랩된다. “진정한 군인은 눈앞의 적을 미워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뒤에 있는 사람들(조국과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싸운다(The true soldier fights not because he hates what is in front of him, but because he loves what is behind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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