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뷔 50년 맞아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발표
⊙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에서 제목
⊙ “〈하보우만의 약속〉은 내겐 또 하나의 데뷔작… 미래 이끌어 갈 2030 세대가 많이 봐줬으면”
⊙ “좌파 영화인들은 영화를 예술이 아닌 정치 선전의 도구로 보는 경우 많아”
李長鎬
1945년생. 홍익대학교 건축미술학과 중퇴 / 〈별들의 고향〉(1974년)으로 감독 데뷔, 제13회 대종상영화제 신인상, 제19회·21회 대종상영화제 감독상 등 수상, ‘제1회 함께하는 NFF 독립영화제’ 심사위원, 서울락스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역임 / 現 영화 제작사 ‘하보우만’ 대표
⊙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에서 제목
⊙ “〈하보우만의 약속〉은 내겐 또 하나의 데뷔작… 미래 이끌어 갈 2030 세대가 많이 봐줬으면”
⊙ “좌파 영화인들은 영화를 예술이 아닌 정치 선전의 도구로 보는 경우 많아”
李長鎬
1945년생. 홍익대학교 건축미술학과 중퇴 / 〈별들의 고향〉(1974년)으로 감독 데뷔, 제13회 대종상영화제 신인상, 제19회·21회 대종상영화제 감독상 등 수상, ‘제1회 함께하는 NFF 독립영화제’ 심사위원, 서울락스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역임 / 現 영화 제작사 ‘하보우만’ 대표

- 2025년 4월 9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이장호 감독과 만났다. 사진=고기정 기자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영화관 안, 유일하게 빛나고 있는 스크린과 함께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1963년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 취임식 연설이었다. 연설이 끝나자 관객들은 일제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박정희 대통령 만세! 대한민국 만세!”
박 대통령의 이름을 외치며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영화 시사회치고는 다소 엄숙하게 진행됐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또 한 번 박수 소리가 영화관을 가득 채웠다.
이들이 흘린 눈물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시절’ 청춘에 대한 그리움일까, 아니면 대한민국을 재건한 두 남자 이승만(李承晩)·박정희 전 대통령의 삶을 마주한 깊은 감동일까?
데뷔 50주년을 맞은 거장(巨匠) 이장호(李長鎬·79) 감독이 처음으로 선보이는 다큐멘터리 영화 〈하보우만의 약속〉이 4월 16일 정식 개봉을 앞두고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4월 9일과 14일 두 차례에 걸쳐 VIP 시사회 및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영화를 연출한 이장호 감독을 9일 본행사에 앞서 만나 봤다.
“박근혜 탄핵 이후 역사에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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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4월 16일 개봉하는 〈하보우만의 약속〉 메인 포스터. 사진=영화의온도 |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번 영화는 제가 데뷔한 지 50주년에 만든 작품이에요. 기록영화는 처음이라 어려운 점이 참 많았고요,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제겐 또 하나의 데뷔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나이 80에 공개하는 데뷔작.”
이장호 감독은 담담한 어조로 새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스스로 ‘신인(新人)’처럼 다시 시작하는 마음가짐이라 말하는 그의 태도에서 긴장과 설렘이 느껴졌다.
— 〈하보우만의 약속〉은 어떤 영화인가요?
“‘하보우만’은 ‘애국가’ 1절의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에서 따온 말입니다. 역사에 관심이 없던 제가 처음 역사에 눈을 뜬 건 박근혜(朴槿惠) 대통령 탄핵 때였어요. 그 사건을 보면서, 단순히 박근혜 대통령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 역사를 다시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사(建國史), 박정희 대통령의 부국사(富國史)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죠.”
〈하보우만의 약속〉 영화 소개에 따르면, 이 감독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이승만 대통령은 ‘기회주의자’,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자’로만 알고 살아 왔다고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한다. “그런 역사 인식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 과거 《월간조선》 인터뷰에서도 ‘잘못된 역사 교육을 받았다’고 언급하셨던데.
“해방 직후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이승만 대통령 혼자 주장하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주변에는 좌우합작운동 등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흐름이 강했고, 주류에서 밀려난 정치인들이 북쪽에서 흘러나오는 모함을 사실처럼 전했어요. 그렇게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이자 독재자라는 인식이 일반화됐죠.
하지만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 행적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일제하에서 관료나 군경으로 일한 분들을 일부 기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친일 인사를 등용했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겁니다.”
박정희 시대 영화인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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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기념 테이프를 끊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 여사. 사진=영화의온도 |
“3선까지 하고 4선째에 부정선거가 문제가 됐는데, 그건 사실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개입한 게 아니라 당시 자유당이 부통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벌인 일이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무투표 당선이었거든요. 문제는 그 부정선거를 두고 내무장관과 국방장관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이라고 주장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그 말을 담화문에 반영하면서 상황이 더 악화됐죠. ‘사회 불안을 조장하지 말라’는 담화가 오히려 분노를 키웠고, 결국 4·19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 언제 ‘내가 잘못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나요?
“어릴 땐 그냥 주변에서 하는 말, 학교에서 배우는 대로 이승만은 독재자고 친일파라고 생각했어요. 깊이 있는 역사 공부를 할 나이도 아니었고요.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제가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 정지를 당했는데 그게 제 안에 상처처럼 남았고….
당시 문화예술계, 특히 문학·미술·음악 쪽에서는 박정희 정권에 항거하는 움직임이 많았지만, 영화계는 좀 달랐어요. 에로물이나 흥행 위주의 영화가 대부분이었죠. 그래서 영화인으로서 부끄러움이 있었고, ‘왜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까’ 하는 고민이 컸습니다. 그래서 ‘리얼리즘을 회복하자’는 의지로 사회 현실을 담은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후배 감독들이 그 바람을 이어 가기도 했죠. 저도 그런 작업을 하다가 한편으론 ‘블랙리스트’처럼 취급되기도 하고, 현실에 적응하느라 흥행 영화로 선회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세월이 흘러 어느새 역사에 대한 관심은 놓쳐 버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계기로 ‘이게 과연 박근혜 한 사람의 문제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때부터 진지하게 대한민국 역사를 공부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역사를 다시 바라보게 되면서 이 영화도 나오게 된 겁니다.”
“하나님이 젊은 세대 정치에 눈뜨게 해”
— 많은 대통령 중에 왜 하필 이승만과 박정희였나요?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건국한 초대 대통령입니다. 해방 직후 정국은 지금 못지않게 이념적으로 혼란스러웠어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했는데, 당시엔 소련도 중국도 모두 공산주의 국가였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분들이 많았죠.
그런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만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확고히 가졌습니다. 미군정도 처음엔 좌우합작 정부를 원했지만, 1948년 여론조사를 보면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이 70%, 공산주의는 7%, 자본주의는 14%였어요. 그런 분위기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운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죠.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공산주의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갖고 국민들을 설득했고,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처럼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태어났다고 봅니다.”
— 감독님의 역사관은 기독교 신앙과도 맞물려 있나 보군요.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이 하나님의 첫 번째 기적이었다면, 두 번째는 한국전쟁에서의 승리입니다. 남한은 전쟁 준비가 전혀 돼있지 않았는데, 북한의 남침으로 순식간에 부산까지 위협받던 상황에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고 유엔군과 함께 북진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죠.
4·19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이후에도 혼란은 이어졌습니다. 학생들이 앞장서 연방제 통일을 외치고,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하며 시위가 벌어졌죠. 당시 여론도 확고한 역사관 없이 쉽게 휘둘리던 상황이었어요.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혁명을 일으켰고, 반공을 제1의 국시(國是)로 삼으며 흐트러진 정신을 다잡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또 하나의 ‘하나님의 기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나쁜 대통령이 누군지는 알아야”
— 당시 상황이 지금의 혼란스러운 대내외 상황과 비슷하다고 봅니까?
“지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을 놓고 찬반이 갈리고, 시국이 매우 시끄럽잖아요. 건국 당시처럼 지금도 이념적 대립이 극심해요. 그러나 저는 지금 이 상황에도 하나님께서 역사를 바르게 이끌어 가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최근 젊은 세대가 정치에 대해 점점 눈을 뜨고 있고, 전교조의 영향력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다소 불안해 보일지 몰라도, 대한민국은 결국 다시 정리될 겁니다. 과거 전쟁에서 기적처럼 승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우리 국민은 혼란을 이겨 낼 수 있다고 믿어요.”
— 6·3 조기 대선을 앞두고 이 영화를 보며 ‘이런 대통령을 뽑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풍향계의 역할을 할 수도 있겠군요.
“적어도 나쁜 대통령이 누군지는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누가 정말 나라를 위하는 사람인지, 누가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사람인지는 판단할 수 있어야 해요. 대통령 후보를 볼 때 그 기준만 가지고도 많은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비 9억원 모아
〈하보우만의 약속〉은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제작됐다. 전통적인 투자 방식이 아닌, ‘텀블벅’의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일반 시민들의 참여로 탄생한 작품이다. 크라우드펀딩은 영화나 도서 등 제작에 앞서 구매 의사를 밝힌 사람들로부터 일정 금액을 약속받아 진행하는 일종의 ‘예비 제작 계약’ 같은 형태다. 목표 금액을 설정하고, 정해진 기간 안에 목표액 모금을 달성해야만 제작이 가능하다. 〈하보우만의 약속〉은 목표액을 조기에 달성하며 참여 시민들의 높은 관심 속에 제작에 들어갔다.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트루스코리아(Truth Korea)’의 정부영 회장님이 ‘그럼 내가 펀딩을 한번 해보겠다’고 먼저 제안했어요. 그래서 크라우드펀딩 모금을 시작했더니 단숨에 영화 제작비가 다 모였어요.”
— 가장 많이 낸 분은 얼마를 냈나요?
“최소 참여 금액은 100만원이었고, 3000만원 넘게 낸 분도 있어요. 원래는 20명 이상만 참여해도 본전을 건질 수준으로 목표액을 잡았죠. 그런데 반응이 너무 좋아서 최종적으로 9억원 정도가 모였습니다. 덕분에 잘 준비해서 잘 찍을 수 있었습니다.”
— 완성하고 개봉을 앞둔 소감은? 후속작 구상도 있으면 소개 바랍니다.
“다큐멘터리는 일반 극영화처럼 배우를 써서 의도대로 연출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잖아요. 이미 기록된 영상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처음엔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았어요. 우선 영상 자료를 찾는 것부터가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하지만 몇몇 중요한 장면들을 발견했고, 그걸 뼈대로 제 생각을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영화를 더 만들어 보려는데…. 나이가 많다 보니 앞으로 몇 편이나 더 만들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죠.”
“봉준호, 후배지만 존경하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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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12월 3일 미국 대통령 당선인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한 아이젠하워(오른쪽)와 함께한 이승만 대통령. 사진=영화의온도 |
“저는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확신하게 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이 두 분 외에는 나라를 정말 진심으로 지킨 지도자는 없었다는 걸요. 그 이후의 정치인들은 대부분 권력 욕심에 흔들렸고, 국가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했죠. 하지만 두 분은 달랐습니다. 국민을 사랑했고, 국가의 미래를 위한 비전을 갖고 나라를 위해 헌신했어요. 저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그런 진심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아, 이승만과 박정희는 정말 이 나라를 위해 살았던 사람이구나’ 하고요. 그걸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진보적인 젊은 감독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분들의 작품도 챙겨 보나요?
“제가 영화 제작을 워낙 오래 해왔잖아요. 그래서 웬만큼 화제가 되지 않으면 잘 안 보게 되더라고요. 가장 최근에 본 건 〈오징어 게임〉이고요. 봉준호 감독 작품은 다 챙겨 봤습니다. 후배지만 제가 정말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인문학적인 소양도 깊고 생각의 폭도 넓고, 무엇보다 영화적 재능이 탁월한 감독이에요. 〈기생충〉은 정말 훌륭했죠. 존경할 만한 감독입니다.”
— 영화계 원로로서 후배 감독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본인이 스스로 깨닫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생이란 게 무엇인지, 나라와 역사란 게 어떤 의미인지 본인이 직접 느껴야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영화도 정치처럼 권력에 기생하는 작품들이 많아요. 좌파 성향의 영화인들은 영화를 예술이 아닌 정치 선전의 도구로 보는 경우가 많죠. 그쪽은 훨씬 일찍부터 영화를 그렇게 ‘활용’해 왔고요. 그래서 보수보다 영화적 접근이 상대적으로 더 활발한 겁니다. 지금 젊은 세대는 전교조 교육이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흐름을 받아들이게 된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깨어 있는 국민’이란 무엇인지 더욱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나라가 잘되려면 국민이 바로 서야 하잖아요. 역사에 대한 바른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영화’
— 특별히 〈하보우만의 약속〉을 꼭 봐줬으면 하고 기대하는 타깃 관객층이 있나요?
“저는 1945년생, 해방둥이입니다. 그동안 너무 겉핥기로 살아왔다는 반성이 들어요. 이 영화는 국민들로 하여금 애국심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2030 세대, 그리고 10대 청소년들입니다.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대한민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고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2001년생인 기자는 이장호 감독의 전성기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 “〈별들의 고향〉으로 데뷔하신 1974년에 제 어머니가 태어나셨다”는 기자의 말에 노(老)거장은 조용히 웃었다. 1980년대 한국 영화계를 이끌던 그의 이름은 지금 젊은 세대에게 낯설 수 있다. 그러나 ‘리즈 시절’을 들먹이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 갈 새로운 커리어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감독 이장호’의 진심이 인터뷰 내내 그대로 전해졌다.
“물론 제가 과거에 만든 영화들이 흥행도 잘됐고 덕분에 이름 석 자도 많이 알렸지만, 사실은 부끄러운 마음도 있었어요. 그때는 인간의 욕망이나 육체적 쾌락에 집중한 영화들이 많았죠. 그런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죠. 〈하보우만의 약속〉은 그 변화의 첫걸음입니다. 말초적인 즐거움을 주는 영화가 아니라, 마음과 영혼에 말을 거는 영화를 앞으로도 만들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