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연구

우리가 몰랐던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

‘친절한 덕수씨’의 無色 부총리, ‘딱총’(딱 알맞은 총리)에서 ‘철벽 총리’로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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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汎여권 지지자 일부, ‘反明 빅텐트’ 참여 촉구… ‘마지막 봉사’ 어디까지?
⊙ 通商 전문 관료로 성장… 새벽 5시 기상, 일요일 출근하는 ‘워커홀릭’
⊙ 박정희·전두환에서 시작, 노무현·이명박 정부 거치며 ‘무역 대국 대한민국’ 견인
⊙ 트럼프 행정부와 관세 협상 성과에 따라 대선 변수… 공직 사퇴 시한은 5월 3일

韓悳洙
1949년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 석·박사 / 제8회 행정고시 합격(1970년), 경제기획원 정책조정국 과장, 상공부 산업정책국장, 특허청장, 통상산업부 차관,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청와대 경제수석,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한국무역협회장, 제38대 국무총리. 現 제49대 국무총리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4월 1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범(汎)여권 대선 후보 적합도 조사에서 한덕수(韓悳洙·75)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선두를 차지했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여론조사공정㈜이 펜앤마이크의 의뢰로 4월 13~14일 이틀간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15일 발표한 결과다. 한 권한대행은 13.5%의 적합도로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13.1%),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10.5%), 유승민 전 의원(10.2%), 홍준표 전 대구시장(6.0%), 나경원 의원(5.3%), 안철수 의원(4.3%)을 모두 앞섰다. 지역별로 보면 한 권한대행은 서울(15%), 광주·전남북(10.5%), 부산·울산·경남(20.4%)에서 다른 후보보다 지지율이 높았다.
 
 
  韓, ‘마지막 소명’이란?
 
  지난 4월 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처음으로 한덕수 권한대행과 28분가량 비공개 통화를 하던 중 대선 출마 의향을 직접 물었다는 내용이 흘러나오면서 ‘한덕수 대망론’에 불길이 확 일었다. 한 권한대행이 국민의힘 경선에 나설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국민의힘 지지자들 상당수는 그가 범여권 단일 후보 경선에 참여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4월 15일 “한 대행은 국민의힘 경선에 출마하지 않는다”면서도 ‘대선 출마 가능성까지 닫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건 제가 언급할 사항은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한 권한대행 스스로도 대선 출마 여부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그는 앞서 4월 14일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들과 함께 저에게 부여된 ‘마지막 소명’을 다하겠다”고 말을 아꼈다. 그가 말하는 ‘마지막 소명’이 어떤 모습으로, 어느 선까지 펼쳐질지는 아직 가늠할 수 없다.
 
  현재 한덕수 권한대행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와 관세 협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국가적 대응 능력이 시험대에 오르는 측면이 강하지만, 한 대행 개인으로 본다면 대권 도전의 시금석(試金石)이 될 수도 있다. 공직 사퇴 시한인 5월 3일 이전까지 가시적인 협상 성과가 나올 경우 그의 대선 경쟁력이 커지고, ‘반명(反明) 빅텐트’론(論)도 풍성해질 수 있다. 여권 일각에선 “한 대행이 당장 방미(訪美)해 트럼프와 만나, 안정을 바라는 중산층 표심을 자극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내놓고 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4월 15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정부의 대미(對美) 관세 협상과 관련해 “상대방이 있는 것이라, 국익 차원에서 (지금) 최대한 협상하고 나머지 부분은 새 정부가 출범하면 마무리하는 게 어떨까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한 대행이 미국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담판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한 대행도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 유예에 따른 대미 협상과 관련해 “필요한 경우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직접 소통을 통해서 해결점을 만들어 나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관세 협상을 어느 정도 매듭짓지 못하거나 불리한 상황에서 나설 경우 역풍 가능성도 있다.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안인 만큼 두 달 뒤 대선 결과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는 이미 첫 관세 협상 대상국으로 일본·영국·호주·인도와 함께 한국을 지목했다. 최근 ‘원스톱 협상’을 언급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에 대해 “안보와 경제 문제를 패키지로 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 대행과 통화 뒤 한국의 방위비 문제를 콕 집어 언급한 바 있어, 최우선 협상국이 된 한국과의 협상엔 방위비 문제도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박지원 “옛날의 한덕수로 돌아가세요”
 
  국민의힘 상당수 의원과 당협위원장,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반대했던 보수 성향 지지자들이 한덕수 권한대행의 출마를 기대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간 대정부질문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무차별 공세에 홀로 분전(奮戰)하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이다. ‘호통 총리’ ‘철벽 총리’라는 말이 나올 만큼, 속사포 같은 말발로 그 기세등등한 민주당 의원들을 압도해 버렸다. 그와 오래 인연을 이어온 박지원 민주당 의원이 “옛날에는 좋은 한덕수였는데 지금은 나쁜 한덕수”라고 말했을 정도다.
 
  다음은 작년 9월 9일 박지원 의원과의 대정부질문 일문일답이다. 김대중(DJ) 정부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박 의원과 한 대행 간의 오랜 인연이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한 대행은 정권을 가리지 않고 승승장구했지만 무엇보다 DJ 때 가장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
 
  박지원 의원=총리, 그 순한 한덕수 총리가 요즘 대통령이 싸우라고 하니까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저돌적으로 반항을 하고 있어요.
 
  국무총리 한덕수=죄송합니다.
 
  박지원=청문회에 나온 사람들도 다 국회의원하고 싸우자는 거야. 대통령께서 총선 패배하고 뭐라고 그랬습니까? “모두 내 잘못이다. 나부터 잘하겠다” 했는데 여당 당선자들 모아 놓고 예산권·거부권이 있으니까 싸워라?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들에게 싸우라고 하고, 어떤 대통령이 여당 국회의원들에게 야당과 싸우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한덕수=김대중 대통령께서 저한테 싸우라고 하셨을 때 제가 싸우던가요? 저 안 싸웁니다.
 
  박지원=김대중 대통령이 싸우라고 한 것은 정의를 위해서 했어요.
 
  한덕수=맞습니다. 국정을 위해서 싸우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하도 가짜뉴스와 선동이 판을 치니까….
 
  박지원=그 순한 한덕수 총리가 그렇게 변했기 때문에 대통령실과 내각과 국회가 충돌하고 있는 거예요. 제발 옛날의 한덕수로 돌아가세요. (중략)
 
  한덕수=저 의원님 존경하고요, 의원님하고 말레이시아에 가서 외환위기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변합니까? 왜 변해야 됩니까?
 
  박지원=옛날에는 좋은 한덕수였는데 지금은 나쁜 한덕수예요.〉

 

  ‘나쁜 한덕수’로 변하기 전 옛날의 ‘좋은 한덕수’는 어떤 모습일까?
 
  2007년 노무현 정부의 총리(2007년 4월~2008년 2월 재임) 시절 한덕수의 별명은 ‘얼굴마담’ ‘관운(官運)의 사나이’ ‘덕수 CEO’ ‘친절한 덕수씨’ ‘미스터 개방(주의자)’ ‘딱총(딱 맞는 총리)’이었다. 심지어 그 2년 전인 2005년 3월 15일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부임한 뒤 첫 일성(一聲)은 “정책 일관성을 위해 (나는) 색깔 없는 부총리가 될 것이다”였다. 꼭 20년 뒤 보수 정권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과감히, 화려하게,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는 걸 보면 ‘옛날의 한덕수’와 ‘지금의 한덕수’는 동일인이라 보기 불가능할 정도로 180도 달라진 셈이다. 돌아갈 수도 없어 보인다. 그 간극(間隙)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때린 야당이 울고 간 철벽 총리’
 
한덕수 권한대행은 2007년 4월~2008년 2월 노무현 정권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다. 사진=조선DB
  한덕수 없는 윤석열 정부는 상상하기 어렵다. 오죽하면 언론에서 ‘때린 야당이 울고 간 철벽 총리’라고 묘사했을까. 국무총리 한덕수가 없었다면 윤석열 정부는 관료 사회의 동요로 초장(初場)에 무너졌거나, 윤 전 대통령이 민주당 압박에 일찌감치 백기투항(白旗投降)했을지 모른다. 관가에선 “50년 넘는 그의 공직 생활에서 볼 수 없었던, 한덕수의 재발견”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새로운 선택의 길로 나서길 국민의힘 지지층은 염원하고 있다. 적어도 공직 사퇴 시한까지 그런 바람은 이어질 수 있다.
 
  75세의 나이에도 새벽 5시면 업무를 시작하고,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일 중독자’ 총리. 지난 부산 엑스포 유치전 당시 아프리카 순방을 3박 7일로 다녀오고도 공항에서 정부청사로 바로 출근한 그였다. 180cm 호리호리한 장신(長身)에 수영으로 체력을 다진 그는 된장찌개, 삼겹살 등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그의 한국영화 사랑은 지인들 사이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주말이면 부인과 단둘이나 가까운 친구 부부와 동반해 한국 영화를 감상하곤 했다. 애창곡은 조용필의 ‘친구여’. 조용필 노래를 따라 부르기는 여간 어렵지 않지만 이 노래는 보통사람들도 따라 부를 만한 음역이기에 좋아한다(몇 년 전의 정보이기에 지금은 또 다른 노래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오랫동안 《이코노미스트》와 《파이낸셜타임스》를 구독해 왔으며 영국 대처, 미국 레이건과 오바마 연설을 듣는 것도 즐겨 하는 그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한국 경제의 현장을 속속들이 경험한 관료다. 1인당 국민소득 254달러에 불과했던 1970년에 경제 관료로 공직을 시작해 경제부총리와 국무총리로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여는 과정까지 최일선을 지킨 인물이다.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기적을 관료로서 모두 지켜보았다. 무엇보다 그는 통상(通商) 전문가다. 한국 무역의 신화(神話)와 성장(成長)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이끌며 기적을 선(先)체험했다. 공직 아닌 ‘외도’조차 산업연구원장(2003~04년), 한국무역협회장(2012~15년)이 고작이다.
 
 
  ‘通商 관료 한덕수’의 저력과 도전과 땀
 
《월간조선》 1991년 4월호에 한덕수 상공부 산업정책국장의 인터뷰가 실렸다.
  상공부 산업정책국장이던 42세 한덕수는 《월간조선》 1991년 4월호와 인터뷰를 가졌다(〈한덕수 상공부 산업정책국장 인터뷰 ‘우리는 다시 뛸 수 있다’〉). 한덕수 국장은 ‘현재 한국 경제에 대해 비관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고 운을 뗀 기자와 일문일답을 했다.
 
  〈― 현재 한국 경제에 대해선 비관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습니다. 노사 관계 악화, 물가 앙등, 수출 경쟁력 약화 등 모든 것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특히 60년대부터 ‘수출 신화’에 젖어 있던 국민들은 수출마저 타격을 받고 있다는 데 큰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 경제가 2000년대에 경쟁력을 확보하고 생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십니까.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될 경우 한국 경제는 건실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기업, 근로자, 정부가 최선을 다한다는 조건에서 말입니다. 70년대 초반 일본의 상황은 현재의 우리와 유사했습니다. 60~70년대의 호황기를 지난 후 제1차 오일 쇼크를 계기로 맞은 위기 상황에서 일본은 자동화, 생(省)에너지화(에너지 절약-편집자 註), 정보화에 박차를 가했고 합리적인 노사관계를 정립, 그 후 다시 경쟁력을 확보하고 오히려 종전보다 더 강해진 면모를 보였습니다.
 
  현 시점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60년대 초반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했던 시기보다는 훨씬 나은 편입니다. 그동안 어느 정도 자본을 축적했고 산업 기반을 조성했기 때문에 이제부터의 과제는 소유(小有)에서 대유(大有)를 만들어 내는 과정일 뿐입니다. 때문에 한국은 70년대의 일본처럼 위기 극복 과정을 거쳐 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 상공부의 보고 자료는 한국 주요 산업의 위상이 2000년대에 상당히 높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같은 목표가 실현 가능한 것인지요.
 
  “목표와 실천은 별개일 수 있습니다. 목표는 추진력과 실천 의지가 뒷받침돼야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정부가 설정한 2000년대 한국 산업의 위상은 세계 경제 동향, 국내 산업의 저력, 앞으로의 변수 등을 고려한 합리적인 수치입니다.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우선 긍정적인 요인은 역시 우수한 기능 인력을 들 수 있습니다. 그동안 임금이 급격히 상승했다고는 하나 아직 선진국과는 충분히 겨룰 수 있는 수준입니다. 올해부터는 노사간에 서로의 선을 설정하는 등 안정 분위기로 접어들고 있어 근로자들의 성취동기도 예전 수준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같은 노사관계의 변화와 함께 고도성장을 이루며 쌓아 온 한국 산업의 자본과 노하우도 기여 요인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인식하지 못하는 중에 적지 않은 저력을 쌓아 놓았습니다. (하략)〉

 
  그의 예언처럼 한국 경제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경쟁력을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1994년 세계화 선언, 1995년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 1996년 유통시장 개방,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자본시장 개방 등 개방과 경쟁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면서 21세기 한국 경제는 누가 뭐래도 G7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됐다. 경제력 분야에서 한국의 2022년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이 미국(2위·8.4%), 독일(3위·6.7%), 일본(5위·3.0%)에 이어 2.8%로 6위를 차지했다. 수입시장 점유율은 2.9%로 8위였다. 한국은 7년 전인 2018년 이미 1인당 국민총소득(GNI) 3만 달러를 돌파해 G7 국가들만이 포함돼 있는 30-50클럽에 세계 7번째로 진입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의 바탕에 무역과 통상 분야를 이끌어 온 ‘공직자 한덕수’의 역량과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그가 흘린 땀이 자리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서울商大 수석졸업, 재학 중 行試 합격
 
  ‘친절한 덕수씨’에서 ‘호통 총리’에 이르기까지, 한덕수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최대한의 성과를 끌어낸 인물이다. 한 전직 경제 관료는 “한덕수는 정권과 ‘코드’를 맞추는 EQ(감성지수)보다, IQ(지능지수)를 맞추어 왔다”고 말할 정도로 정통 관료로서 대한민국의 성장과 더불어 능력과 운에 바탕해 이룰 수 있는 최대치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성공이 개인의 출세를 넘어 통상 전문 관료로 세계 10대 경제 대국의 성공을 묵묵히 견인해 온 것이란 점에서 다른 공직자와 결이 다르다.
 
  《조선일보》 1971년 2월 26일자 사회면에 ‘한덕수’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서울대 졸업식에서 상대(商大) 수석졸업자로 대법원장상(賞)을 받았다. 참고로 그해 법대 수석졸업이 이영애 전 의원(18대·자유선진당)이다. 그의 이름 앞에 4차례나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는데, 사법시험 수석합격, 법원장, 고법 부장판사, 사법연수원 교수 등이다. 덧붙여 한 대행과 ‘경제 투톱’인 최상목 경제부총리도 1986년 2월 서울대 졸업식에서 법대(法大) 수석졸업자로 국회의장상을 받았다.
 
  한덕수는 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 때인 1970년 6월 제8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의 길을 걷는다. 관세청을 거쳐 1974년 무렵 경제기획원 예산국 사무관으로 경제 부서에 발을 들였고, 1981년 상공부로 옮긴 뒤 줄곧 통상 관료로 성장했다. 통상 관료 시절 별명은 ‘통상의 귀재’ ‘무역통(通)’ ‘미스터 개방’ 등이었다.
 
  그의 이름이 언론에 다시 등장한 것은 1984년 무렵. 휴직을 하고 미국 유학을 떠나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한 그해 7월 12일 상공부 아주(亞洲)통상과장에 복귀하면서 신문 인사(人事)란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산업정책과장이 되었다.
 
  1989년 불혹(不惑)이 되자마자 상공부 중소기업국장으로 승진한 그는 다시 2년 만인 1991년 상공부의 노른자위 자리인 산업정책국장에 올랐다. 그때 《월간조선》 4월호와 인터뷰한 것이다.
 
 
  ‘金政 라인’ 아닌 통상 무역 관료로 성장
 
한덕수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1999년 12월 1일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사실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경제 관료는 대개 ‘모피아(Mofia)’ 출신들이다. 모피아는 옛 재무국 이재국(理財局) 및 그 후신인 재정경제원과 기획재정부(재정경제부) 금융정책실(국) 출신 관료를 일컫는 은어(隱語)다. 옛 재무부의 영문 약자인 MOF(Ministry of Finance)와 마피아(Mafia)의 합성어다. 모피아 가운데 핵심은 ‘금정(금융정책) 라인’이다. 대개 경제부총리와 장관은 금정 라인에서 나왔다. 서로 끌어 주고 밀어 주는 것이 부정적인 의미에서 마피아를 연상시킨다. 한덕수는 ‘금정’이 아니라 통상 전문가라는 점에서 결이 달랐다. 소위 ‘일은 많고 승진은 없다’는 대외 통상 및 교섭 라인의 불문율을 허물었다.
 
  1996년 한덕수가 통상산업부(現 산업자원부) 통상무역실장으로 있을 때 얘기다. 한덕수 실장은 당시 일본으로부터의 제품 수입을 막는 장치였던 ‘수입선(先) 다변화’ 제도의 적용 폭을 과감하게 줄였다. 국내 경제연구소들과 재계에선 ‘일본 전자제품이 물밀듯이 들어와 국내 전자업계가 전멸할 것’이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개방주의자 한덕수 실장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이라도 경쟁을 해야 우리 전자산업의 경쟁력이 제고(提高)된다”는 논리로 밀어붙였다. 결국 수입선 다변화 정책은 폐기됐고, 살아남기 위해 글로벌 시장을 적극 개척한 삼성전자는 일본 소니를 꺾고 세계적 기업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1998년 3월~2001년 2월 재임) 시절에는 당시 영화인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쿼터제(국내 영화 의무 상영 일수)를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대외 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고, 나아가 영화시장이 개방되더라도 한국 영화의 제작 수준 등을 감안할 때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게 당시 ‘미스터 개방’ 한덕수의 소신이었다.
 
  심지어 수입차(車) 개방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관용차를 수입차로 바꿨는데, 당시 장관급 관료가 외제 관용차를 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차량 모델은 배기량 2300cc의 스웨덴 사브(SAAB)였다.
 
 
  DJ 정부 初代 통상산업본부장
 
작년 9월 9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덕수 총리와 민주당 박지원 의원이 열띤 공방을 벌여 화제를 모았다. 사진=채널A 캡처
  2024년 9월 9일 박지원 의원과의 대정부질문 일문일답을 조금 더 보자.
 
  국무총리 한덕수=(박지원 의원님도 대통령) 비서실장님 하셨잖아요.
 
  박지원 의원=제가 비서실장 했잖아요. 제가 추천해서 (청와대 수석으로) 오셨잖아요. 우리가 김대중 대통령 모시면서 IMF 외환위기도 극복해 봤고, (한 총리가) 경제수석 때 스크린 쿼터 얼마나 소신 있게 반대했어요. 왜 지금은 말씀 못 하십니까?〉

 
《조선일보》 1996년 12월 25일 자 기사에 실린 한덕수 특허청장 프로필.
  한덕수 대행은 행시 8회 중 호남 출신의 대표 주자로, 영남을 대표하는 강만수(姜萬洙) 전 기획재정부 장관과 엎치락뒤치락 선두 자리를 이어 왔다. 1996년 12월 강만수 관세청장이 통상산업부 차관이 됐을 때 한덕수 상공부 통상무역실장은 특허청장이 됐고, 3개월 만에 강 차관의 자리인 통상산업부 차관으로 영전했다. 그 자리에 있던 강만수 차관은 재정경제원 차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한국무역협회 상근부회장으로 물러나 있다가 영남 출신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자 다시 기재부 장관으로 컴백할 수 있었다. 반면 전북 전주가 고향인 한덕수 대행은 호남 정권인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더욱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의 초대 외교통상부 장관을 맡은 박정수 전 장관(작고)이 신설 통상산업본부장(장·차관의 중간급)으로 경기고 후배로 눈여겨본 한덕수를 강하게 추천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DJ 정권 초기 인선 검증을 맡았던 박주선 당시 법무비서관이 40대라는 점에 난색을 표했으나, 한덕수의 경기고 9년 선배인 선준영 당시 주(駐) 제네바 대표부 대사가 본부장 아래 차관으로 밀려날 정도로 ‘한덕수 카드’는 DJ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DJ 집권 직후 다른 차관들은 모두 옷을 벗었지만 그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특히 외교부를 외교‘통상’부로 개편하면서(기존 통상산업부는 통상·교섭 업무를 외교통상부로 넘겨주고 산업자원부로 개칭) 1998년 3월 초대 통상산업본부장에 한덕수가 임명되자 당시 외교부 출신 국장과 심의관들이 연일 소주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반면 외교통상부에 파견된 산자부 직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는 일화 역시 관가에 전설처럼 퍼지기도 했다.
 
  한덕수 본부장은 2001년 2월 주 OECD 대사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가 2001년 11월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이듬해 1월 경제수석이 되었다.
 
  공직 사회에서 강만수와 한덕수는 성격 면에서도 차이가 났다고 한다. 강만수는 해박한 지식과 현란한 화술로 상대방을 사로잡는다면, 한덕수는 성품이 차분하고 말수가 적고 대인관계가 부드럽다는 평가를 받았다.
 
 
  좌·우 안 가리는 실무형 경제 관료
 
2007년 10월 2일 제11회 노인의 날 기념식에서 한덕수 총리가 기념품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총리연설문집
  줄곧 잘나가던 그였지만, DJ 정권 말기엔 ‘삐끗’한 일도 있었다. 청와대 경제수석 시절 한중(韓中) 마늘 협상이 있었는데, 협상 당시 한국과 중국이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 연장 불가’에 합의하고도 발표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경제 부처 간부들 사이에서 책임 공방이 벌어졌고 그 여파로 한덕수 경제수석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다음은 《한겨레》 2024년 12월 31일자 칼럼 〈한덕수 ‘미스터리’〉의 일부다.
 
  “한덕수 수석은 2002년 7월 마늘 협상 파동의 책임을 지고 경제수석을 그만둔다. 청와대에서 일했던 인사는 ‘그때 한 수석은 무슨 일만 나면 직을 걸겠다고 말했다.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형식이었지만 내부에선 나가고 싶어 하니 내보내자는 기류가 강했다’고 말했다.”
 
  한덕수 수석이 자청해 물러났으나 공백(空白)은 짧았다. 김&장법률사무소 고문으로 8개월 남짓 있다가 노무현 정부 들어 산업연구원장을 거쳐 국무총리 국무조정실장으로 부활했다. 발탁 배경에는 당시 정권 막강 실세였던 이해찬 총리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서울경제》 2022년 4월 3일 기사 〈[한덕수는 누구] 좌·우 안 가리는 실무형 경제 관료〉 중 일부다.
 
  “(한덕수는) 노무현 정부에서는 국책연구기관장인 산업연구원 원장을 거쳐 국무조정실장을 지냈다. 경질 1년 7개월 만에 고위 관료로 재기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때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을 보좌하며 위기 상황을 넘겼다. 이해찬 총리 체제에서는 당정 간 정책 조율을 맡아 ‘책임 실장’ 역할을 했다. 또 이라크 파병, 행정수도 관련 업무 등을 지원했다.”
 

  2004년 2월 총리실 국무조정실장으로 부임했다가 1년도 안 돼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됐고, 2007년 4월 국무총리가 됐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 수장(首長)에 오르는 데도 역시 이해찬 전 총리의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가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그는 국무조정실장에서 물러나면서 이런 이임사(2005년 3월 3일)을 남겼다.
 
  〈작년(2004년) 7월부터 분권형 국정 운영을 시작한 이래 총리, 국무조정실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었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업무 로드(load)에 직면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탁월한 능력과 인내로 모든 어려운 일들을 차분하게 처리해 나감으로써 대통령으로부터도 “분권형 국정 운영은 성공적이었다. 청와대 정책실과 총리실 국무조정실이 힘을 합치고 협력해서 일을 잘해 주었다. 나는 일상 운영은 총리에게 맡기고, 신문에 나면 총리가 결단을 해주었구나 하고 생각하고, 궁금하면 보고서 한번 보내 보라고 해서 보고, 그렇게 해왔다”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3년 전 총리 되며 ‘마지막 봉사’
 
윤석열 전 대통령은 2022년 4월 10일 한덕수 전 총리를 윤 정부의 총리로 지명했다. 사진=조선DB
  한덕수 대행을 잘 아는 후임 경제 관료는 그에게 보고할 때 3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첫 번째 “문제가 뭐냐”, 두 번째 “어떻게 할 거냐”, 세 번째로 “그래서 뭐가 좋아지냐”였다. 지극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며 효율적인 이 질문에 통과한 직원은 중용(重用)되지만,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일감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했다(《월간조선》 2005년 4월호, 〈한덕수: 신임 경제부총리에 임명된 통상 전문가〉 참조).
 
  한덕수는 첫 번째 총리 취임 100일을 맞아 2007년 7월 10일 YTN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00일의 하루하루가 저한테는 매일 특별한 날이었다고 생각하고요. 제가 참여정부 초기부터 참여정부의 정책을 만드는 데 참여를 했습니다. 국무조정실장으로 참여했고, 경제부총리로 참여했습니다. 이제 총리로서 아마 참여정부를 마무리 짓는 역할을 하게 됐다. 이것이 또 저에게는 굉장히 가슴이 벅차기도 하고 무거운 책임감으로 어깨를 짓누르기도 했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덕수 전 총리는 주미 대사로 발탁되었다. 전 정부의 마지막 총리가 새 정부의 주미 대사가 된 사례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 관가에서는 “노무현 정부 당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노무현-이명박 정부 양쪽 간의 연결을 이루는 데 적임자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한덕수 총리가 2022년 8월 28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취임 100일 자필 소감문.
  그런 그가 다시 2022년 윤석열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발탁돼 놀라움을 주었다. 우리 정부 역사상 국무총리를 두 번 지낸 인물은 한덕수 전까지 4명(장면, 백두진, 김종필, 고건)뿐이었다. 한덕수 총리는 2022년 8월 28일 취임 100일을 맞아 소셜 미디어에 올린 자필 소감문을 통해 “새 정부가 가야 할 큰 방향을 잡는 기간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국민 여러분 보시기에 미흡한 점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더욱 열심히 뛰겠습니다. 국무총리 취임 후 첫 민생 행보 현장이었던 새벽 인력시장이 생각납니다.
 
  고단해도 열심히 살아가는 국민 여러분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습니다. 100일 전 국민 여러분께 약속드린 것처럼 지금 이 자리가 국민을 위한 마지막 봉사라는 초심을 늘 잊지 않겠습니다.
 
  2022년 8월 28일 한덕수〉

 
 
  ‘마지막 봉사’와 ‘초심’
 
  한덕수 권한대행이 3년 전 말한 ‘마지막 봉사라는 초심’은 현재진행형이다. 여권과 국민의힘 대선 흐름에 따라 ‘마지막 봉사’와 ‘초심’은 결연해질 수 있다. 당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땀을 흘렸던 한미FTA 협상을 재가동시켜 국가 경제를 제 궤도에 올려야 한다. 또 권력의 정점(頂點)을 향한 대권 도전에 뛰어들어야 할지도 모르는 운명과도 맞닥뜨려야 한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어떤 선택을 받을지 현재로선 오리무중이다.
 
  무대는 이미 마련됐고, 조명도 켜졌다. 카메라 수십 대가 돌아가고 있다. 드럼 소리에 고무된 수많은 청중이 그를 바라보며 다음 동작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몸은 무척 신중하고 무겁다. 누군가는 신경질을 내며 기다리다 콘서트장을 나갈 기세다. 마이크에는 태극 마크가 붙어 있다. 스포트라이트가 그의 입에 비친다. 청중을 바라보는 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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