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권 쥔 장제스, 상하이 학살 후 당내 숙청 통해 정권 장악
⊙ 장제스의 북벌에 앞서 우페이푸·장쭤린·펑위샹 등 군벌끼리 싸우면서 세력 약화
⊙ 쑨원, 코민테른의 중재로 제1차 국공합작
⊙ 장제스, 상하이 학살 후 성명 통해 공산당의 12개 반역 행위 고발
⊙ 장제스, 국민혁명군을 학살에 동원하지 않으려 청방과 손잡아
송재윤
1969년생. 고려대 철학과 졸업,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 중국사 전공 박사 / 미국 테네시주립대 교수, 現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 저서 《슬픈 중국》 3부작
⊙ 장제스의 북벌에 앞서 우페이푸·장쭤린·펑위샹 등 군벌끼리 싸우면서 세력 약화
⊙ 쑨원, 코민테른의 중재로 제1차 국공합작
⊙ 장제스, 상하이 학살 후 성명 통해 공산당의 12개 반역 행위 고발
⊙ 장제스, 국민혁명군을 학살에 동원하지 않으려 청방과 손잡아
송재윤
1969년생. 고려대 철학과 졸업,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 중국사 전공 박사 / 미국 테네시주립대 교수, 現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 저서 《슬픈 중국》 3부작

- 1930년대 초 ‘공비(共匪)’를 소탕하는 위초전(圍剿戰)을 전개할 당시 국민혁명군 장병들을 사열하는 장제스.
1927년 4월 12일 상하이(上海)에서 청당(淸黨)의 명분 아래 공산당원과 노조원들에 대한 몰살 명령을 내린 바로 다음 날이었다.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는 〈중국국민당 동지에게 고하는 서신〉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에서 장제스는 공산당 숙청의 필요성을 길게 상술한 후 새로운 국민정부를 난징에 수립하겠다고 선언했다. 1912년 1월 1일 쑨원(孫文)이 신해혁명(辛亥革命)의 기세를 몰아 난징에 세웠던 바로 그 중화민국 정부를 되살리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1926년 전해 쌍십절(雙十節·10월 10일)에 맞춰 우한(武漢)을 점령한 국민혁명군은 이미 중화민국 정부를 세우고 국민당 원로들로 정부 내각을 채운 상태였으나 스스로 쑨원의 적통(嫡統)을 계승했다고 자부하는 장제스로선 그 정부를 인정할 이유가 없었다. 쑨원은 오매불망 북벌(北伐)을 외치다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2년 전 베이징(北京) 방문 중에 간암으로 별세했다. 쑨원의 유지를 받들려면 중화민국의 본래 수도를 탈환해 그곳에서 정부를 재건한 후 천하통일의 대업을 실현해야 했다. 중화민국은 난징에 새로 세운 국민의 나라였다. 만주족이 지배해 온 베이징은 절대로 중화민국의 수도가 될 수 없었다. 이후 장제스가 베이징을 베이핑(北平)이라 바꿔 불렀던 이유도 난징 이외의 그 어떤 도시에도 수도 ‘京(경)’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군사·전략적 고려만은 아니었다. 1913년 ‘제2의 혁명’을 외쳤던 쑨원의 눈으로 보면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년)가 탈취하여 베이징에 옮겨 세운 중화민국은 그를 주군으로 섬겼던 북양(北洋) 군벌(軍閥)의 괴뢰 정부에 불과했다. 베이징은 중국을 정복한 몽골족과 만주족의 수도였다. 주원장(朱元璋)이 몽골족을 몰아내고 창건한 명(明)나라의 원래 수도는 난징이었다. 게다가 광저우(廣州) 부근 어촌 출신 쑨원, 닝보(寧波) 염상(鹽商) 아들 장제스뿐만 아니라 국민당 영수들 대개가 남방 출신이었다. 반만(反滿) 의식이 강한 남방 사람들인 그들 모두에게 위안스카이의 근거지였던 베이징보다 쑨원이 수도로 삼았던 난징이 중화민국의 수도로서 더 적합해 보였음은 물론이었다.
“역도미멸(逆徒未滅) 열강미평(列强未平)”
이런 이유에서 장제스는 새로운 국민정부를 난징에 수립했다. 장강(長江) 이남의 세력 기반을 탄탄히 굳힌 후에 한숨 돌려 제2의 북벌을 감행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이에 더더욱 자신의 무훈(武勳)을 드러내고, 난징의 정치적 상징성을 부각해야 했다. 난징 정복이 곧 수도 탈환이며, 수도 탈환은 국가 재건이라는 논리였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 명분을 내걸고 장제스는 1927년 4월 18일 난징에서 공식적으로 국민정부를 재건했다. 공화혁명의 선봉장으로서 자신이 쑨원의 후계자임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제스처였다.
장제스는 전장(戰場)에서 군벌 병력을 소탕하며 영토를 수복해 온 총사령관이었다. 그가 보기에 우한을 수도로 삼은 채 코민테른의 조언을 들으며 공산당과 손을 잡고 그에게 북상을 요구하는 국민당 원로 집단은 양복쟁이 민간인들에 지나지 않았다. 국민혁명이란 이론을 다투는 탁상 회의가 아니라 수만 병력의 꽃다운 목숨을 희생시키며 군벌의 점령지를 빼앗아 국가를 건설하는 군사 작전이었다.
그로선 당연한 처사였다. 대군을 이끌고 수도를 탈환한 어느 무장이 그 혁혁한 무공에 준하는 포상을 요구하지 않겠는가? 천하가 갈가리 찢긴 혼란기에는 강력한 군대가 없인 그 어떤 숭고한 이상도 실현될 수 없다. 쑨원조차도 군벌의 포격을 받고 도망쳐야 하는 반역의 시대였다. 장제스는 날마다 “역도미멸(逆徒未滅) 열강미평(列强未平)” 여덟 자를 일기에 적으며 자신의 책무를 다짐하고 있었다. “멸하지 못한 역도”란 군벌과 공산당을 가리키고, “평정하지 못한 열강”은 중국을 잠식하고 있는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을 의미했다.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천하 통일과 부국(富國) 건설이 급선무였다. 스스로 제세(濟世) 영웅이 되어 반역의 시대를 끝내겠다는 야심 찬 포부였다.
당시 장제스의 나이는 막 불혹(不惑)을 내다볼 때였다. 서른네 살에 대프랑스 제국 황제가 되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1769~1821년)에 비하면 다섯 해나 늦었지만, 대명(大明·1368~1644년) 제국을 창건할 때의 주원장과는 얼추 비슷한 나이였다. 1917년 볼셰비키 10월 혁명으로 소련을 건설할 때의 레닌보다는 일곱 살 밑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장제스의 북벌보다 더 신속한 군사적 대성공의 전례가 있었을까? 1926년 7월 초 광둥에서 북벌을 개시한 이해 장제스가 총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은 우선 광시(廣西) 군벌 리쭝런(李宗仁·1891~1969년)과 바이충시(白崇禧·1893~1966년)를 포섭하여 국민혁명군에 동참시킨 후, 곧바로 북상하여 9월까지 후난(湖南)을 거침없이 삼키고는 곧바로 여세를 몰아 바로 다음 달 10일 신해혁명의 발상지 우한을 탈환했다. 11월엔 치열한 전투 끝에 장시(江西)를 점령, 12월엔 푸젠(福建)까지 손에 넣었다. 두어 달 숨을 고르며 전열을 가다듬은 장제스는 이듬해 3월 장강 이남의 최대 도시 항저우(杭州)와 난징, 상하이까지 차례로 접수했다.
광둥까지 포함하면 9개 성(省)에서 저항하는 군벌 세력을 파죽지세로 제압, 140만~150만㎢의 광활한 영토가 그의 지배력하에 놓였다. 일본 열도의 대략 4배나 되는 넓은 땅이었다. 한마디로 장제스가 난징을 점령, 수도 재건을 천명한 후 반대급부로 최고 권력을 요구해도 거부할 명분이 없을 만한 큰 성취였다. 과연 장제스 북벌의 승리 비결은 무엇이었나?
천중밍의 반란
천중밍쑨원이 베이징의 북양 정권을 치고 천하를 통일하겠노라며 공공연히 북양 군벌 정부를 향해 북벌을 선포한 시점은 1922년 9월 무렵이었다. 한데 불과 석 달 전인 6월 16일 광둥 군벌 천중밍(陳炯明·1878~1933년)이 쑨원의 관저에 포격을 가하는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천중밍은 중국의 각 성이 제각기 독립 정부를 세운 후 연방제 국가를 이루자는 취지의 ‘연성자치(聯省自治)’를 주장해 온 인물이었다. 삼민주의(三民主義)에 의한 천하통일을 부르짖는 쑨원과는 정치적 지향점이 달랐다.
쑨원은 목숨만 간신히 부지한 채 혁명의 근거지를 잃고 상하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에겐 군대도, 영토도, 자금도, 국제적 지원도 없었다. 이런 그가 대체 무엇을 믿고 감히 북방 군벌에게 선전포고할 수 있었을까? “북벌!”이라는 쑨원의 절규는 결국 ‘공화혁명의 국부(國父)’인 자신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모아 달라는 양광(兩廣·광둥 및 광시)의 군벌을 향한 정치적 호소였다. 정치적 위기에서 터져 나온 외침이었기에 간절한 메아리가 퍼졌지만, 정작 그를 돕고 나선 세력은 군벌이 아니라 소련의 공산당이었다. 이 배경을 설명하자면 대략 5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복벽
돤치루이는 군대를 동원해 장쉰의 복벽을 좌절시켰다.1917년 7월 1일이었다. 변수(辮帥·변발한 군벌) 장쉰(張勳·1854~ 1923년)이 캉유웨이(康有爲·1858~ 1927년) 등 지식분자를 나팔수로 내세워 5년 전 여섯 살의 나이에 퇴위한 청(淸) 제국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1906~1967년)를 다시 옹립해 황위에 앉히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1차 세계대전 참전을 두고 북양정부가 당파 싸움에 휩싸였을 때, 복벽파(復辟派)가 제정(帝政)의 부활을 노리고 정권을 탈취한 순간이었다.
열이틀 만에 베이징의 ‘중화민국’ 국무총리 돤치루이(段祺瑞·1865~ 1936년)가 안후이(安徽)파 군대를 동원해 장쉰의 병력을 몰아내고 푸이를 다시 퇴위시켰다. 절묘한 재기의 기회를 잡은 쑨원은 이미 ‘호법(護法) 전쟁’을 개시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공화혁명의 국부’ 쑨원이 1912년 임시헌법을 수호하자고 외치자, 양광의 군벌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1917년 9월 10일 쑨원은 광저우에서 비상 국회를 열고 군사 정권을 세운 다음 대원수(大元帥)로 선출되는 기민함을 발휘했다.
1917년 그가 광저우에서 군사 정권을 세우고 대원수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베이징 북양정부가 황당무계한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그의 호법 전쟁 선포는 호소력을 발휘했지만, 다음 순간 군벌 세력은 그를 외면했다. 자체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혁명가의 위상이 언제든 몽상가의 허명(虛名)으로 뒤바뀔 수 있는 세상이었다.
국공합작
아돌프 요페우선 양측은 반(反)제국주의 투쟁의 중요성에 동의했다. 나아가 쑨원은 자신의 민생(民生)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이 연결될 수 있음을 인정했고, 코민테른 요원들은 쑨원의 국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 전 단계의 부르주아 민주혁명이라 평가했다. 쑨원으로서는 극적으로 정치적 재기의 출로를 찾은 셈이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등은 줄곧 베이징의 북양정부를 사실상의 중화민국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1917년 8월 중국을 대표하여 연합국의 편에 서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한 정부도 바로 베이징의 중화민국이었다. 쑨원은 이 정부를 ‘북양정부’라 폄훼했지만, 서구 열강과 일본은 이 정부를 외교적으로 승인하고, 쑨원에 대해선 모든 지원을 끊은 상태였다.
오직 소련공산당만이 고립무원의 쑨원을 인정했다. 신생 사회주의 국가 소련과 인구 4억의 중국은 7000km의 국경을 맞댄 이웃 나라였다. 중국공산당이 창당될 때부터 소련은 코민테른 요원들을 파견하여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중국에선 아직 사회주의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한 코민테른은 부르주아 민주혁명의 구심점으로 쑨원을 발견했고, 혁명 자금과 군사 무기 지원을 약속하며 그에게 접근했다.
1923년 1월 26일 쑨원과 코민테른 요원 아돌프 요페(Adolf Joffee· 1883~1927년)는 공동선언문을 채택하고 발표한다. 코민테른은 쑨원의 국민정부를 정통의 중화민국으로 승인하고, 반제국주의 노선 아래 중국의 독립과 통일을 추구하며, 국민당에 군사적·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사회주의 혁명을 보류한 채 이제 막 출범한 중국공산당의 당원들이 각자 개별적으로 국민당에 들어간다는 조건으로 국공합작(國共合作)의 첫 단추를 끼웠다. 모당(母黨)인 국민당의 우위를 명문화했는데, 이는 코민테른과 공산당의 음험한 결탁과 공산당의 독자적 조직 활동을 예방하려는 쑨원의 정치적 장치였다.
직·봉 전쟁
《타임》 표지를 장식한 우페이푸. 1924년 9월 8일 자.직계의 영수는 이 당시 중국 최고의 군사 전략가로 꼽히던 우페이푸(吳佩孚·1874~1939년)였다. 봉계의 영수는 비적(匪賊) 출신으로 철도, 광산 등 만주 지역 일본의 산업 시설을 이용해 군사력을 키워온 장쭤린(張作霖·1875~1928년)이었다. 1922년과 1924년 이 두 사람이 벌인 숙명적인 두 차례의 군사 대결은 베이징에 본부를 둔 북방 체제에 큰 균열을 만들었다. 특히 1924년 9월 15일부터 11월 3일까지 벌어진 제2차 직·봉 전쟁은 중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비트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중원의 대부분을 이미 점령하고 있는 우페이푸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이러한 전망 위에서 당시 서방의 유수 언론들은 우페이푸의 일거수일투족에 큰 관심을 가졌다.
우페이푸는 육·해·공 전 병력을 총동원한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입체전을 펼쳤지만, 북방을 통째로 잃고 말았다. 결정적 순간 그를 지지해 온 산시(陝西)의 ‘기독교인 장수’ 펑위샹(馮玉祥·1882~1948년)이 등을 돌려 장쭤린과 결탁하고는 휘하의 ‘국민군(國民軍)’을 몰고 베이징으로 진격하여 1924년 10월 23일 마침내 북양정부를 통째로 접수했기 때문이었다. 북방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베이징 정변(政變)’이었다. 우페이푸는 톈진에서 군함을 타고 남방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붕괴한 북방 체제
‘기독교 장수’ 펑위샹.베이징의 북방 체제를 사실상 무너뜨린 펑위샹은 북양 군벌 집단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 세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베이징 입성 후 열흘도 채 안 돼 그는 전국 통일과 공화국 재건을 논의하자며 ‘공화혁명의 국부’ 쑨원을 베이징으로 초빙했다. 쑨원은 곧바로 그 제안을 수락하고 상하이와 일본을 거쳐 12월 4일 베이징에 도착해 몇 주에 걸쳐 정치적 회담을 이어갔으나 개인적 사정이 발생해 생산적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 이듬해 초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결국 1925년 3월 12일 쑨원은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8세였다.
다음 해 7월 북벌을 개시한 장제스가 파죽지세로 남방을 휩쓸고 2년 반 만에 만주까지 포함해 사실상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 중엔 1922년부터 1924년에 걸친 파괴적인 군벌 전쟁의 결과 북방 체제가 스스로 무너졌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 점에 대해선 제2차 북벌 과정을 다룰 때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다시 1927년 4월 13일 난징에서 장제스가 국민정부 수립을 선포하던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1929년 6월 난징의 묘역으로 이장(移葬)되는 쑨원의 유골.앞에서 언급했듯 1927년 4월 13일 난징의 국민혁명군 본부에서 장제스는 〈중국국민당 동지에게 고하는 서신〉을 발표했다. 장제스 특유의 고문체(古文體)로 작성된 200자 원고지 25장 분량의 포고였다. 북벌을 대성공으로 이끌고 청당 대숙청을 감행한 국민혁명군 총사령의 사자후(獅子吼)는 이렇게 시작한다.
“북벌을 맹세한 이래 중정(中正·장제스의 아호)은 목숨을 내버려 둔 채 오직 쑨원 총리의 유훈을 따라 중국의 자유·평등을 쟁취하고 전 국민의 고통을 해제하여 국민혁명의 목적을 온전히 이루고자 했다. 우리 동지의 노력과 장병의 분투에 힘입어 제일 먼저 후난과 후베이(湖北)를 정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장시와 푸젠을 제압했으며 저장(浙江), 안후이(安徽), 장쑤(江蘇)로 진격하여 급기야 상하이와 닝보를 점령하고 장강 일대를 모두 평정할 수 있었다. 국민혁명의 성공은 이미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으나 전선(前線)에는 여전히 대적(大敵)이 발호하고 있는 지금, 후방에선 간특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 이에 중정은 눈으로 직접 보고 몸소 겪은바 간담 서늘한 진상을 당원 동지들 앞에 폭로하려 한다.”
장제스의 공산당 고발
이어 장제스는 쑨원의 국공합작 원칙에 따라 국민당에 개별적으로 입당한 공산당원들이 혁명군을 엄호한다며 암암리에 비밀조직을 결성해 국민당을 내부에서 붕괴시키는 반역적 음모를 꾸며왔다며 다음 열두 가지를 그 증거로 들이댔다.
첫째, 북벌군이 장시와 푸젠에서 혈전을 펼칠 때 공산당은 국민혁명에 동참하기는커녕 후난과 후베이에서 자당(自黨)의 기반만 닦고 있었다.
둘째, 공산당은 우한에서 자체적으로 연석회의를 거행하여 국민당 중앙까지 위협하는 불법적 활동을 감행했다.
셋째, 우한으로 옮겨간 국민당이 중앙대회를 개최할 때 공산당원들은 무력 협박과 폭도 시위를 주도하며 공포 국면을 조성했다.
넷째, 공산당은 우한에 들어선 국민정부 보위의 중책을 맡은 국민혁명군 제11군 군장 천밍슈(陳銘樞·1889~1965년)를 겁박했고, 그로 하여금 최초의 명령을 거역하며 중앙집행위원을 체포하게 하는 해당(害黨) 역모를 서슴지 않았다.
다섯째, 공산당원들은 혁명군 장병을 감금하고 살육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산당의 압박에 못 이겨 강물에 투신하는 장병도 있었다.
여섯째, 공산당원들은 우창(武昌) 군사 정치 분교와 학병단 1000여 명을 구속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일곱째, 공산당은 국민당 중앙이 장시에 있을 때, 연석회의를 이용해 중앙의 모든 결의를 부인했으며, 국민당 중앙이 우한의 한커우(漢口)로 들어가자 표변하여 중앙을 떠받드는 정치적 술수를 부렸다.
여덟째, 국민당 군대를 갈라 쳐 천신만고를 감내하는 혁명군 장병(將兵)들이 혁명에 나서지 않는다고 모함하며, 반혁명 세력으로 몰아가는 교활한 선동전을 펼쳤다.
아홉째, 공산당원들은 슬그머니 국민당 내부에 침투하여 당무를 장악한 후 당의 여러 부서를 해체하고 파괴하는 반당 활동을 전개했다.
열째,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를 선동해 외국 조계(租界)에서 대규모 파업을 일으켜 생산 활동을 마비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국민당 진성 당원들은 배제되고 소외당했다.
열한째, 공산당은 국민당의 교육 활동을 훼방하면서 “독서는 혁명 활동이 아니며, 혁명 활동이 아니면 곧 반혁명 활동(讀書即不革命, 不革命即反革命)”이라는 반지성적·반문명적 구호까지 들고나왔다.
열두째, 공산당원들은 국민당의 통일적 외교 노선을 방해하고 파괴했다.
세 가지 오류
이상 열두 가지 이유를 들어 공산당을 하늘을 함께 일 수 없는 반역 세력으로 규정한 장제스는 공산당원이 펼치는 교묘한 선전술에 현혹당해 잘못된 생각에 빠진 국민당원이 적지 않다며 세 가지 오류를 지적했다.
첫째, 어떤 이는 국민당이 이미 민중의 이익을 위해 일어났으므로 혁명이 성공한 후엔 절대로 민중이 우리 당을 버릴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선 진정 우리 당이 제대로 된 민중 조직을 결성하여 올바르게 민중을 인도해 왔는가를 따져 제대로 판단해야만 한다.
둘째, 쑨원 선생의 ‘민생주의는 공산주의’라는 문구만을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공산주의 옹호론으로 둔갑시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쑨원 총장께서 “우리가 말하는 공산주의는 먼 미래에 실현될 공산주의이지 당장 현재에 구현될 공산주의가 절대로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망각하고 있다.
셋째, 또 어떤 이는 입버릇처럼 눈앞의 큰 적을 마주 대하는 이때 국민당과 공산당이 타협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공산당은 전술적으로 국민당과 제휴하려 들지만, 정치적 타협이란 번지르르한 언변이 아니라 확고부동한 사실에 기반해야 함을 직시해야 한다.
국민당 내부의 용공 세력과 좌익 분자를 공격한 장제스는 국민당원들에게 거당적 철통 단결과 적대 세력 소탕이라는 행동강령을 제시했다. 또한 그는 국민당 중앙감찰위원회를 향해 우한정부의 매당 행위, 매국(賣國) 노선, 불법 의결 활동을 전면 조사한 후 상하이와 난징에서 정식으로 회의를 열고 조사 결과를 폭로하라고 촉구했다.
마지막으로 장제스는 비장한 어조로 중앙집행위원회 상무회의가 난징에서 직권을 행사할 계획이라며 난징에 국민정부가 수립됐음을 선언했다.
“국민정부의 중추(中樞)가 이미 난징에 확정되었다. 당원 동지들은 모두 따르라! 나 중정은 국민당원을 위해서 스스로 삼민주의를 실행하고 큰 사명감에 따라 중국을 구하는 대업을 감당하려 한다. 당이 존재하는 한 국가가 존재하고, 나 중정도 존재한다. 당이 망하면 국가도 망하고 나 중정도 망한다. 바라건대 우리 진정한 국민당 동지들은 순수한 삼민주의의 신도로서 함께 분투하여 본당의 재건과 구국의 대업을 감당하자!”
이렇게 장제스는 공산당의 음모를 폭로하며, 우한정부의 정책 오류와 이념 혼선을 지적했고, 난징 국민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상하이 암흑가의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무차별 대학살을 자행한 다음 날 청당의 대의와 대학살의 불가피성을 밝힌 셈이었다.
‘글의 쓸개’, 문담
장제스의 ‘문담’ 천부레이.중국인들은 권력자의 대필 작가를 문담(文膽)이라 부른다. ‘글의 쓸개’라는 뜻이다. 사람 몸에서 쓸개란 용기와 결단력을 샘솟게 하는 장기다. 장제스의 문담은 누구였을까? 아마도 1927년 2월 장제스가 발탁한 천부레이(陳布雷·1890~1948년)로 추정된다. 이후 21년의 세월 동안 장제스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문담의 역할을 담당했던 천부레이는 이후 총통부 국책 고문과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비서장 대리를 역임했는데, 1948년 11월 13일 수면제를 과다복용해 자살했다. 그의 일기는 1935년부터 1948년까지 매일같이 13년 이상 지속됐다. 장제스 정권의 내막을 보여주는 집념의 기록물이다.
장제스뿐만 아니라 마오쩌둥(毛澤東)도 여러 명의 문담을 거느리고 있었다. 문담이 대신 썼다지만, 장제스 명의의 문장에선 장제스의 숨소리가 느껴지고, 마오쩌둥 명의의 문장에선 마오쩌둥의 살냄새가 난다. 문담이란 주군의 생각을 직접 들으며 받아 적는 대필자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문장은 개성(個性)의 터”라 할 수 있다. 장제스의 문장은 문학적 미사여구나 정치적 완곡어법이 끼어들 틈이 없는 비장하고 웅혼한 강건체의 직설이다. 기발한 시상(詩想)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오쩌둥의 문장과는 얼음과 불만큼이나 달랐다. 장제스의 문장이 공성전(攻城戰) 지휘관의 명령처럼 엄숙하고 저돌적이라면, 마오쩌둥의 문장은 게릴라 전사(戰士)의 구호처럼 기민하고 유혹적이었다.
장제스의 문장, 마오쩌둥의 문장
일례로 1930년대 장제스는 포위망을 좁혀가며 적비(赤匪·붉은 비적 떼)를 토벌하는 위초전(圍剿戰)의 시대적 사명을 이렇게 설명한다.
“역사상 토비(土匪)는 언제나 존재했고, 그들의 성세 역시 오늘날 적비만큼이나 흉악했다. 그런데 왜 어떤 경우엔 토비를 평정하여 국가가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었으나 어떤 경우엔 국가가 망해버려야만 했는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적비에 관해 다시 묻거늘 우리는 왜 이토록 많은 위초전을 펼치면서도 그들을 토벌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내가 총괄하여 답하자면, 과거든 현재든 토비 소탕의 성패(成敗)는 오직 그 당시 고급 장령과 통수권자의 정신, 곧 기개, 학문, 능력, 수양과 인격에 달려 있다.”(蔣介石, 〈剿匪成敗與國家存亡〉)
비슷한 시기 장제스에게 추격당하며 존망의 기로에 선 채 공산당 홍군(紅軍)을 이끌었던 마오쩌둥은 거만한 적의 대군을 무찌를 수 있는 소수정예의 유격전을 16자 비결(秘決)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적진아퇴(敵進我退·적군이 다가오면 아군은 물러나고)
적주아요(敵駐我擾·적군이 진주하면 아군은 괴롭히고)
적피아타(敵疲我打·적군이 지칠 때면 아군이 공격하고)
적퇴아추(敵退我追·적군이 후퇴할 땐, 아군이 추격한다).”
문장 속에 드러난 두 사람의 상반되는 개성은 1927년 이래 22년간 전개된 두 사람의 숙명적 대결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일 수 있다.
천하통일의 대망을 품었던 장제스는 진정 왜 상하이 대학살을 자행해야만 했을까? 상하이 자본가들을 끌어안고 우한 국민정부를 곤경에 몰아넣은 전술로 보인다. 다음 회에 살펴보겠지만, 상하이 자본가들은 공산당 숙청을 요구하며 장제스에게 군자금을 제공했고, 장제스는 이후 계속 상하이 재계를 압박해서 천문학적 군비를 확충했다. 장제스가 난징정부를 세운 후 공산당 토벌을 계속하자 불과 석 달쯤 지나서 우한정부도 공산당 숙청에 동참했다. 결국 장제스의 의도대로 두 개의 국민정부가 난징으로 일원화(一元化)되는 정치적 수순(手順)이었다.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실제로 학살을 자행한 집단은 국민당 정규군이 아니라 상하이 암흑가의 범죄조직 청방의 행동대원들이었기 때문이다. 국민혁명군 총사령 장제스는 왜 굳이 암흑가 폭력배를 동원해 대학살을 자행해야만 했을까?
영국에서 활약했던 상하이 출신 화교 작가 판링(潘翎·1945~ 2024년)은 《늙은 상하이, 천국의 갱단(Old Shanghai: Gangsters in Paradise)》에서 바로 이 질문을 제기하고선 상하이 사정에 밝은 청방 조직원들은 민간인들이라서 정규 군인들과는 달리 프랑스 조계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정규 군대가 프랑스 조계에 들어가면 조계 관련 중외 협정에 위반되는 군사적 침략이 돼버리기에 부득이 청방에 기댔다는 설명이다.
상하이와 톈안먼
분명 이런 면도 없진 않았겠지만, 고작 이 정도 이유만으로 장제스가 암흑가 갱단의 완력을 빌려야만 했을까? 북벌군의 조계 출입이 문제가 됐다면 상하이 지리에 밝은 몇 명 군인을 길잡이로 당연히 사복조를 짜 은밀히 투입해도 됐다. 게다가 이미 프랑스 경찰국 중국인 최고 형사이자 청방 두목 황진룽(黃金榮·1868~1953년)이 조계 당국에 귀띔해 암암리에 승인을 받아놓은 상황이었다. 장제스가 군병력을 어렵지 않게 투입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장제스가 청방을 동원한 진짜 이유는 그날의 작전이 북벌군의 정규 병력을 써선 제대로 실행될 수 없는 대민(對民) 학살이라는 점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만약 국민혁명군을 직접 동원하여 공산당원과 노조원들을 학살한다면 밖으로는 양민 학살을 자행한 군대라는 오명을 벗을 수가 없으며, 안으로는 군대의 사기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 또한 정규군이 대민 학살의 임무를 빈틈없이 신속하게 수행할 수 없다는 점도 고려했을 듯하다. 학살 명령을 받고 투입된 병력이 오히려 광장에서 공산당원들과 결합할 가능성도 있었다. 1989년 6월 4일 톈안먼(天安門) 대학살 발발 두 주 전, 베이징 시내에 투입됐던 최초 병력은 실제로 시위 진압은커녕 시민들에게 둘러싸인 채 속수무책으로 입에 넣어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며 설교만 듣다가 퇴각해야만 했다. ‘인민해방군’이 인민 학살을 쉽게 수행할 수 없었던 만큼, 국민혁명군도 국민 학살을 자행할 순 없었을 듯하다.
장제스의 연설, 눌변의 힘
북벌 당시(1927년 추정)의 청년 장군 장제스.황푸군관학교의 총장 장제스의 훈화를 읽어보면, 그가 사관생도들의 가슴에 뜨거운 애국심과 강렬한 사명감을 불어넣기 위해 날마다 목청을 높였음이 보인다. 말수가 적고 엄격한 성격의 장제스는 열병한 사관생도 앞에서 연설할 때면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미간을 찌푸리며 찢어지는 목소리로 고함치듯 짧은 문장을 토막토막 뱉어내곤 했다. 가령 1934년 황푸군관학교 10주년을 맞아 장제스가 연설하는 동영상을 보면, 지독한 눌변(訥辯)이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진정 어린 외침임을 알 수가 있다. 장제스의 연설은 청중의 폐부를 찌르는 감화력을 발휘하기도 했는데, 그 8할은 간결과 압축의 힘이었다. 장제스의 연설은 아무리 길어도 10분을 넘기지 않았다. 황푸군관학교 교장 시절 그의 연설문은 대부분 200자 원고지 다섯 매를 넘지 않았다. 물론 이따금 원고지 30매 이상 되는 장문의 훈화도 없진 않았지만, 극히 예외적이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을 극구 꺼리는 유교 문화에선 더듬듯 힘겹게 내뱉는 간략한 눌변이 청산유수로 읊어대는 장황한 달변(達辯)보다 더 큰 신뢰와 존경을 얻기도 한다. 장제스의 훈화가 그러했다.
장제스는 국민혁명군의 사기를 진작하고 군기를 강화하기 위해 틈만 나면 목소리 높여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와 ‘공화혁명’의 당위를 부르짖었다. 혁명군 한 명 한 명의 심장에 이런 사명감과 자긍심이 있었기에 9개월 만에 난징과 상하이를 점령하는 역사적인 무공을 달성할 수 있었다.
만약 장제스가 정규 병력을 동원하여 대민 학살을 자행했다면 그날로 국민정부의 정규군은 사악하고 비루한 학살부대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큰 공 들여 정성스럽게 길러낸 정규군은 군벌을 치는 정의로운 전쟁을 수행하는 ‘국민혁명군’이었다.
청당위원장 천췬
‘청당위원장’ 천췬.당시 사진을 보면, 군경이 뒤에 서서 수수방관할 때, 일군의 사복조가 머리 위에 반역 분자의 팻말을 달고 등 뒤로 손이 묶인 채 무릎 꿇린 공산당원들의 뒤통수에 권총 사격을 가하고 있다. 이 생생한 장면은 학살 주체가 청방의 수족들이었음을 말해준다. 정규군은 이 과정을 관리만 했을 뿐 직접 학살을 수행하진 않았다.
장제스는 청당위원회를 조직하고 천췬(陳群·1890~1945년)을 위원장으로 앉혀 1927년 4월 말까지 대숙청을 이어나갔다. 지난 회 언급했는데 천췬은 청방 두목 두웨성(杜月笙·1888~1951년)과 긴밀히 연결된 청방의 조직원이었다. 장제스와 이미 비밀리에 합의한 두웨성은 천췬에게 계속 청방 인력을 제공했다. 고귀한 국민혁명의 과업은 정규군에 맡기고, 잔악한 학살의 죄업은 범죄 조직에게 떠넘겼다 할 수 있다.
장제스의 두 얼굴
장제스의 군사 작전은 이렇게 숭고하고 위대한 대의명분과 저열한 권모술수가 결합되어 있었다. 정치 권력을 쟁취하려는 자는 환하고 아름다운 세상과 어둡고 지저분한 세상을 교묘하게 아울러서 대중의 마음을 훔치는 후흑(厚黑)의 술수를 체득해야만 한다.
장제스는 과연 언제, 어떻게 이러한 술수를 터득하게 되었을까? 그의 일생을 파헤친 다종의 전기를 살펴보면, 협객(俠客)과 선비의 기질을 동시에 가진 장제스는 젊은 시절부터 인간 세상의 청탁(淸濁)을 익히 깨닫고 빛과 어둠의 세계를 두루 섭렵했던 듯하다. 장제스는 중년 이후에는 금욕적(禁慾的)이고 절제 있는 삶을 살았지만, 청년기 장제스는 유가 경전을 낭송하며 수신(修身)에 힘쓰는 도학자적(道學者的) 자세와 도쿄(東京)와 상하이의 유곽을 드나들며 여색(女色)을 탐했던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동서고금 어디서나 진정 정치 권력에 뜻을 둔 자는 맑은 우물물뿐만 아니라 시궁창 구정물도 들이켤 수 있어야 하는가? 그 구정물을 들이켜고도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일급 배우가 되어야만 할까?
국민혁명군 총사령 장제스에게 국민혁명이란 대규모 군사 작전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전쟁의 과정이었다. 1926년 11월 초 장시의 전장에서 군벌 쑨촨팡(孫傳芳·1885~1935년) 병력을 물리치고 난창(南昌)을 점령할 때 장제스는 무려 1만5000명의 꽃다운 병사들이 포탄에 휩싸여 갈가리 찢기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장제스는 이렇게 혈전을 치르고 가까스로 난창을 점령했건만, 모든 영광은 우한에 들어선 국민정부로 돌아갔다. 전장에서 장병을 향해 “돌격, 앞으로!”를 명령하며 직접 전쟁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선 후방의 안전지대에서 입으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는 다변(多辯)의 정치가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쑨원과 같이 절대 권위를 갖는 혁명의 지도자라 해도 강력한 카리스마로 군부 장성들의 자발적 충성을 유도하지 못한다면 산산이 갈라진 내전(內戰)의 혼란 속에서 민간 정부가 유지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스스로 쑨원의 삼민주의를 계승한다고 자부했던 장제스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쑨원에게 발탁되어 쑨원의 삼민주의와 공화혁명에 헌신한 장군이었다. 이런 장제스가 쑨원 밑에서 어깨를 견주며 경쟁했던 정적(政敵)들에게 충성을 바칠 리 만무했다.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 이래 한고조 유방(漢高祖 劉邦·재위 기원전 202~기원전 195년), 수문제 양견(隋文帝 楊堅·재위 581~604년), 당고조 이연(唐高祖 李淵·재위 618~626년), 송태조 조광윤(宋太祖 趙匡胤·재위 960~976년), 원세조 쿠빌라이 칸(元世祖 忽必烈·재위 1260~1294년), 명태조 주원장(재위 1368~1398), 청태종 홍타이지(淸太宗 皇太極·재위 1626~1643년)까지….
장구한 중국사에서 조대(朝代)를 바꿔 새로운 제국을 세운 모든 창업(創業) 군주는 붓을 놀려 글을 짓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 아니라 창칼을 휘둘러 적을 무찌른 무장호걸(武將豪傑)이었다. 장제스가 우한의 국민정부에 대항하여 난징에 새롭게 국민정부를 세울 수 있었던 심적 배경엔 병권을 쥔 자가 결국 정권을 갖는다는 중국사 2000여 년의 불문율이 작용하고 있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북벌에 성공한 국민혁명군 장교들(1929년 추정).장제스가 상하이에서 청당의 기치를 내걸고 공산당 숙청에 나섰던 동기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는 쑨원의 유지를 저버리고 국공합작을 파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국민당 조직에 파고들어 자당 세력을 확장하고, 나아가 코민테른을 등에 업고 우한의 국민정부를 삼키려 했던 공산당의 배신과 음모 때문이라고 밝혔다. 장제스는 쑨원의 삼민주의를 내세워 쑨원과 코민테른이 뜻을 모아 일궈냈던 국공합작을 파기했다. 이제 공은 당연히 코민테른과 밀착 관계에 있던 우한 국민정부의 좌파 세력에게로 넘어갔다.
당시 상황에서 장제스의 총구가 우한 국민정부를 겨누고 있음을 모를 국민당원은 없었을 듯하다. 장제스가 이미 공산당원을 제거하는 사실상의 군사 작전을 전개하고 있는데, 장제스와 갈라서지 않고선 코민테른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전을 각오하지 않고선 국민혁명군 총사령 장제스의 조치를 군사재판에 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북벌의 대성공 결과 우한과 난징에는 각기 다른 두 개의 국민정부가 들어섰다. 군사력을 장악한 장제스는 여유만만했다.
1927년 8월 7일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비상대책회의에서 “정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후 너무나 자주 인용되어 마오쩌둥의 상표(商標)처럼 되어버린 이 문구는 과연 어떤 배경에서 나왔을까? 중국공산당은 바로 6일 전인 8월 1일 난창에서 최초의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잠시 도시를 장악했다가 곧 들이닥친 국민당 병력을 피해 도주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공산당은 무장 세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당시 서른여섯 살의 마오쩌둥은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거치거나 실전의 경험을 쌓지 못했다.
이런 마오쩌둥인데 어떻게 이처럼 인상적인 발언을 남길 수 있었을까? 물론 타고난 그의 시인 기질 덕분이겠지만, 당시 중국 상황을 보면 마오쩌둥이 이 말을 했을 때 누구든 무릎을 쳤을 듯하다. 1927년 여름, 장제스가 “정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전 중국 인민의 눈앞에서 체현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 장제스에게 배웠나
1976년 9월 임종을 며칠 앞둔 마오쩌둥은 측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살면서 내가 한 일은 장제스와의 전쟁과 문화혁명이었는데, 전자(前者)의 공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겠지만 후자(後者)에 대해선 이견(異見)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단다. 마오쩌둥은 그렇게 장제스라는 불세출의 장수와 싸워 이겼다는 자부심을 품고서 세상을 떠났다. 장제스의 전략과 전술을 학습하고 흉내 내어 역으로 이용하는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병법이 완성됐다면 과언일까.
국민혁명군 총사령으로서 북벌을 대성공으로 이끈 장제스는 끝내 국민정부의 주석 자리에 올라 정치 권력을 독점했다. 인민해방군을 이끌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마오쩌둥도 다르지 않았다. 1927년부터 ‘난징 10년’ 천하를 호령했던 장제스나 22년 후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이겨 절대권력을 쟁취한 마오쩌둥이나 모두 “병권을 쥔 자가 정권을 잡는다”는 역사의 진리를 몸소 증명했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