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보고

5일간의 이집트 민주화운동 현장 리포트

“꺼져! 미국 하수인 주제에…” (1월 30일 시위현장)

  • 글 : 문종성 자유기고가·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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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8일 만해도 평화롭게 시위, 초기에는 찻집에서 잡담 나누는 것으로 시작
⊙ 시위대, 경찰에게 음식 나누어 줘, 피자가게에서는 경찰과 시위대가 함께 어울려
⊙ 가게 약탈당한 주인, “시위대는 폭도일 뿐!”
⊙ 귀국 후 무바라크 퇴진 소식 들어

文鐘星
⊙ 30세.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6년간 약 80여 개국을 자전거로 여행하기로 마음먹고 2007년 5월 미국 뉴욕에서부터
    자전거 세계일주를 시작. 북미와 중남미를 거쳐 현재 아프리카를 자전거로 여행 중.
⊙ 저서 : 《비전청년의 세계일주 - 자전거 타고 쿠바여행》 《라이딩 in 아메리카》.
군용 차량에 올라타 시위를 벌이는 군중. 시위대는 환호하며 군대는 자신들의 편이 되어줄 것을 호소했다.
2011년 1월 28일
 
  평화롭게 시작된 시위
 
  “노 프레지던트(No President), 무바라크 물러가라!”
 
  “우리에겐 새로운 이집트가 필요하다!”
 
  1월 28일 오후 1시. 인파가 운집한 타흐리르 광장(Midaan it-Tahriir)과 주변 지역은 새 시대를 갈망하는 민중의 소리로 요동쳤다. 좁은 골목과 대로 등을 제법 채운 시위대는 그러나 매우 희망찬 표정 속에 질서를 잃지 않았다.
 
  “앗 쌀라무 알라이 쿰.”
 
  “웰컴 투 이집트!”
 
  시위대들은 여행자들에게 밝은 모습으로 손을 흔들고 같이 사진도 찍었다. 잔뜩 흥이 난 일부는 포즈 중에 어깨동무를 하거나 V자도 서슴지 않는다. 여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차도르(chador) 속에 진한 화장과 선글라스로 대변되는 개방적인 젊은 이집트 여성들은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외국 여행자와도 스스럼없이 대화한다. 또한 악수나 포옹 등 가벼운 신체접촉에 대한 거부반응도 없다. 다양한 문화가 혼재하는 관광 수도(首都) 카이로에선 아랍인들의 엄격한 무슬림 문화가 생각만큼 먹히지 않는다.
 
  나는 고고학박물관이 위치한 시내 중심가와 전철 한 정거장 거리인 나세르(Nasser)역 주변에 잠시 머물 거처를 마련했다. 일본 여행자들의 낙원이라는 술탄호텔이 있기 때문이다. 이 빌딩에는 3개의 게스트 하우스가 있는데 대부분 일본 여행자들이 묵고 있었다. 하루에 우리 돈 약 4000원인 20이집트 파운드만 내면 숙소는 물론 인터넷도 무제한 무료다. 게다가 일본 친구들이 남기고 간 수천 권의 책과 만화책 때문에 장기간 머무는 여행자 수가 많다.
 
 
  “사나흘 전만 해도 시위는 안 하고 커피 마셔”
 
이집트 국기를 땅에 펼쳐놓고 민주화를 외치는 군중.
  그중에 독일에서 온 조지라는 친구와 친해지게 되었다. 그 역시 자전거 여행 중으로 독일에서 출발해 8개월 만에 동(東)유럽과 중동(中東)을 지나 이집트 종주까지 마쳤단다. 일본인들 틈에서 우리는 유일하게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룸메이트였으므로 식사나 산책을 같이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완자처럼 튀긴 콩 재료와 야채로 속을 채운 1파운드짜리 팔라펠이라는 서민 음식과 사탕수수 주스를 양손에 쥔 채 끼니를 때우며 시위대의 힘찬 행진을 구경하고 있었다. 조지의 말이다.
 
  “이틀 전에 카이로에 도착했는데 그때부터 사람들이 전투적이 되더군. 웬일인가 했더니 정부에 항거하는 민심이 심상찮대. 그런데 다른 방 여행자들은 한밤중에 도로에 집결해 질서를 잡으려는 경찰들과 함께 사진도 찍었더군. 아직은 평화로운 거지. 그네들 말로는 불과 사나흘 전만 해도 시민들은 시위라면서 시위는 안 하고 그냥 모여서 커피 마시면서 웃고 떠들고 잡담하고 있더래. 그야말로 탁상공론(卓上空論)이지 뭐야. 단지 몇 명만 흥분해 있었어. 근데 오늘은 제법 모였군.”
 
  그간 쌓인 독재정부에 대한 불만과 서민들의 경제적 위기로 인해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권 국가들의 반(反)정부항쟁 시위는 현지 뉴스에서 들어서 익히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나 같은 여행자에겐 피부에 와닿는 것이 아니어서 그리 심각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수많은 다른 시위처럼 일시적 유행을 타고 한때 지나가는 이슈로 지레짐작했다.
 
  조지는 상당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군중의 행동을 주시했다. 내게는 첫 광경이었지만 그는 변화의 물결을 감지한 듯 보였다.
 
  일본 여행자들은 시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요케와 사이토는 새벽에 몰래 피라미드에 올라갔다 왔다며 사진 자랑뿐이다. 나머지는 침대에 딱 드러누워 하는 일 없이 만화책만 붙잡고 있다.
 
  우리는 점심식사 이후 숙소로 돌아왔다. 여행자들은 어떻게 해야 보다 알차게 이집트 여행을 할 수 있는지 정보공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현지인 숙소임에도 온통 일본어로 깨알같이 정보가 적혀 있는 책과 벽면을 보며 과연 여행에 관한 한 가장 치밀한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전(全) 세계 여행자 중 이만큼 꼼꼼하게 여행 정보와 기록을 남겨 응집력을 과시하는 민족이 또 어디 있을까.
 
 
  거리로 나서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군중이 생업도 제쳐 둔 채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문, 뭐해? 다시 나가야지!”
 
  “응, 또? 왜?”
 
  “본격적인 하이라이트의 시작은 바로 지금부터야. 가능하면 입 막을 수건이나 버프(자전거용 얼굴 가리개)를 챙겨. 날이 저물면 시위가 한층 격렬해지거든.”
 
  조지를 비롯한 다른 여행자들의 눈이 나를 다그치는 분위기다.
 
  하루 전부터 오후에 벌이는 시위가 꽤 스릴 있단다. 본디 평화시위기는 하지만 국지적(局地的)으로 시위대와 경찰들이 격렬하게 부딪히기도 한단다. 모여서 다니면 그리 위험하지는 않으니 같이 가자고 종용하는 것이다. 모두 얼굴을 가릴 수건과 함께 한 손엔 카메라를 챙겼다. 거절할 타이밍을 놓친 나도 엉겁결에 뒤따라 나섰다.
 
  오후 3시 무렵, 나와 독일인 조지, 그리고 일본인 사이토와 영국에서 온 윌리엄이 한데 뭉쳤다. 시내 주요 도로인 람세스 거리에서 꺾으면 작은 골목들이 갈라지는 이곳 나세르시장(市場)은 특히 먹을거리가 풍성한 곳으로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우리는 숙소 앞 수크 타우피케야 거리(Suuq it-tawfiqiiya)부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불과 몇 걸음을 뗄 무렵이었다.
 
  “빨리 치워! 물건 다 들여!”
 
  각목을 든 남자들이 다소 흥분한 채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통행에 거치적거리는 물건들을 각목으로 툭툭 치면서 어서 치우라는 것이다. 그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장 상인들은 잽싸게 움직였다.
 
  “깡패? 시위대?”
 
  “아니, 사복(私服) 입은 경찰들. 시위할 때 시민들이 도로 곳곳에 간이 펜스를 설치하거든. 조악하긴 하지만 나름 효과가 있어. 그걸 미리 제지하는 거야.”
 
  건물 옥상에서 몇몇이 야유를 보내고 있었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여성이 시위 주도
 
  시장의 다른 한편에선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 이슬람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오늘은 금요일, 무슬림들에겐 주일(主日)인 셈이다. 따로 모스크가 없기에 그들은 길 한가운데 자리를 펴고 알라에 형식을 갖춰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분위기는 엄숙했다. 나라의 명운(命運)을 걸고 전장(戰場)에 나가는 장수들의 세리머니 같았다. 다른 한편에선 경찰 복장을 한 이들이 따로 모여 예배를 보고 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같은 신(神)에 각기 다른 자신들의 소원을 빌고 있는 모습이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 따로 없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또 희한한 광경이 펼쳐진다. 수십 명의 시위대를 이끄는 리더가 여성인 것이다.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눈앞의 광경이 어색하다는 표정이다. 아무리 봐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20대 여성이 시위를 주도하고 있었다. 앞에서 여성이 시위대를 이끌며 선창(先唱)하면 대다수가 남자인 시민들이 따라가며 복창(復唱)하고 있었다. 무엇이 여성들로 하여금 두려움 없는 발걸음으로 뜨겁게 목울대를 세우게 하는 것일까. 남성 우월적인 이슬람문화에서 여성이 시위 전면에 나섰는데도 무엇이 남성들이 순종하며 따라가게 만들었을까. 시위가 익숙해질수록 익숙하지 않은 장면들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이봐요, 우리나라 상황을 당신네 나라에 좀 알려주시오!”
 
  오후 5시 무렵, 시위대는 카메라를 든 외국 여행자들 앞에서 자신들의 요구가 담긴 피켓이나 깃발을 들며 포즈를 취했다. 분위기는 푸근했다. 꼭 관광지 마스코트와 함께 사진 찍는 기분이다. 누가 봐도 평화시위였다. 경찰들은 뭘 하든지 사고만 터지지 않으면 간섭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상부 지시가 없어서인지 다들 잡담을 나누며 딴청이었다. 경찰 차량들이 도로에 세워져 있지만 엄포용 그 이상 아니다.
 
 
  두 시위대의 합류
 
시타 우 아슈린 요리요 거리(Shaari' Sitta wi 'Ashriin Yoliyo)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시위대. 경찰은 시위대에 최루탄을 발포했고 순식간에 시위대는 여러 골목으로 해산되었다. 이때 가스를 마신 시위대가 다시 집결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20분이다.
  “이집트 어때요? 좋죠? 여행 잘하시오.”
 
  사실 이집트에 와서 몇 차례 소소한 사기를 당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고대(古代) 역사와 다채로운 먹을거리가 어우러진 여행은 꽤 만족스러웠다.
 
  “무바라크 독재 정권 물러가라! 알라의 은총이 이집트에 임하기를!”
 
  시위대 목소리가 차츰 커져 갔다. 상황을 인식한 경찰들도 복장을 착용하고 열을 갖추니 긴장감이 고조된다. 우리는 계속 잡담을 나누며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때였다. 점점 격해지던 군중의 소리가 별안간 폭발하듯 일제히 함성으로 변했다. 무슨 영문인가 시선을 돌려보니 우리가 서 있던 탈라아트 하르브 광장(Midaan Tala'at Harb)의 시위대와 바로 옆 무스타파 카밀 광장(Midaan Mustafa Kaamil)의 시위대가 길 한복판에서 서로를 알아본 것이다.
 
  차라리 한 편의 영화를 찍는다고 표현해야 할 장면이다. 우린 이 ‘장엄한’ 광경을 목도하며 약속이나 한 듯 모두 굳어버렸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동지를 만난 것이다. 불과 수십 명으로 시작한 시위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거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아군(我軍)을 만났으니 거칠 게 없었다. 시위대의 포효가 군중의 가슴까지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삽시간에 이렇게 많이 모이다니. 잘못하면 사고가 터지겠는걸….”
 
  안경을 고쳐 쓴 조지가 나지막이 내뱉었다. 좀 더 다이내믹한 체험을 원했던 사이토와 윌리엄은 군중에 휩쓸려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는 누구도 시위가 이토록 격화될 거란 예상을 하지 못했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을 비롯한 시장 상인 등 현지인들도 하루나 이틀, 아니 길어도 사나흘 후엔 잠잠하게 될 거라고 했다.
 
  정부에 대항하긴 하지만 오랜 독재체제가 쉽게 무너질 리 없으며 경찰에 비해 조직화되지 않은 시위대의 결속력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많았다. 때문에 이때까지만 해도 이것은 마치 멕시코 농민들의 토르티야 시위처럼 하나의 의례적인 이벤트이자 퍼포먼스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거리에서는 소수의 기자만이 상황을 취재하고 있었다.
 
  람세스 거리를 위시한 시타 우 아슈린 요리요 거리(Shaari' Sitta wi 'Ashriin Yoliyo)와 무하마드 파리드 거리(Shaari' Muhammad Fariidl) 등 주요 도로에는 재빨리 경찰들이 배치되었다. 군중의 구호는 훨씬 거세졌지만 특별한 명령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인간 방어벽을 구축한 경찰들은 쉬어야 할 저녁 시간에 상부에서 시킨 일이라 괜히 나와 힘들고 따분하다는 듯 무심한 표정 일색이다.
 
  시위가 시작된 지 약 한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시위대와 경찰의 간극은 불과 10여 미터로 좁혀졌다. 경찰 간부와 시위대 일부가 중간 지점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다. 대치상황에서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그때 묘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시위대 중 일부가 경찰에게 음식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음식을 받아 든 경찰도 웃으며 고맙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나는 그만 웃음이 터져나왔다.
 
 
  “저들도 우리랑 같은 마음일지도”
 
  “우리 무슬림들은 평화를 원하니까요. 정부에 불만이 있는 거지 경찰과 다툴 이유는 없지요. 아마 저들도 우리랑 같은 마음일지 몰라요.”
 
  옆에서 한 남자가 상황을 설명해 준다. 생각해 보면 경찰이나 시위대 모두 서로 친인척이나 친구로 얽힌 관계일 터. 서로 대치한 이 상황이 마뜩잖을 것이다. 그 사이 헐레벌떡 뛰어온 사이토와 윌리엄이 최신 속보를 전해왔다.
 
  “타흐리르 광장 쪽은 난리가 났어! 시위대와 경찰이 극심하게 충돌하고 있어. 차가 불타고, 최루탄이 터지고 있다니깐. 시위대가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고 있어. 상황이 위험해 우리도 빠져나왔지 뭐야.”
 
  불과 200여m 떨어진 곳의 일이다. 시타 우 아슈린 요리요 거리는 그곳과는 다르게 너무도 평화롭기만 하다. 날이 어둑해지자 구호는 잠잠해지고, 양측 모두 피로가 몰려들었는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또다시 시위대 쪽에서 경찰에게 물을 건네주었다. 사이토와 윌리엄은 얼굴을 감싼 수건을 벗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대관절 여긴 왜 이래?’라는 표정이다.
 
  사태를 주시하던 조지의 예상은 적중했다. 많은 군중이 몰려 사고가 터질까 우려하던 차에 아니나 다를까 곧 이상징후가 포착되었다. 저녁 6시경이었다. 광장 일대를 가득 메운 시위대 중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일부가 도발을 감행하는 모션을 취하는 것이다. 게다가 타흐리르 광장 쪽에서 흘러들어온 일부 시위대가 느슨한 분위기를 자극했다. 경찰도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다. 불과 10여m를 사이에 두고 양측은 다시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나는 상점에서 반쯤 문을 내린 채 구경하던 무리에 섞였다. 일부는 아파트에서, 또 일부는 건물 옥상에서 독자적인 시위를 감행했다. 함성 소리가 스테레오가 되었다. 건질 만한 사진과 취재거리를 위해 미국에서 온 여기자 둘도 내 옆에서 대기 중이다. 건너편엔 프랑스 언론에서 온 카메라맨과 기자가 경찰을 등지고 시위대를 촬영 중이었다. 다시금 고조된 긴장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시위대가 요동하기 시작했다.
 
 
  시위 현장에 꽃핀 인정
 
곳곳에 최루탄이 발사되자 한 부자가 가스 노출 방지용으로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사람이 쓰러졌다!”
 
  이 한마디에 일대가 혼란에 빠졌다. 한 여성이 들것에 실려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에선가 돌들이 날아왔다. 머리 위로 날아드는 돌은 꽤 위협적이었다. 순식간에 양측의 간극이 벌어지더니 이에 질세라 경찰들도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정신이 없었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T-가스(Tear gas·최루탄)군. 어서 피해!”
 
  조지와 나, 사이토와 윌리엄은 모두 대열을 이탈해 사방으로 흩어져 몸을 피했다. 경찰은 주요 도로 일대를 모두 막고서 방어망을 구축했다. 그 안에서 미처 최루탄을 피하지 못한 시민들은 곤욕을 치렀다. 나 역시 군대 시절 화생방(火生放) 훈련 때의 고통이 근 10년 만에 찾아왔다.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시위대는 곧장 물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특히 눈을 뜰 수 없는 따끔하고 숨 막히는 고통에 약한 여성들과 아이들의 고초가 심했다.
 
  길에는 시위대를 위해 누군가 곳곳에 물통을 설치해 놨고 이곳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재빨리 흐르는 물에 얼굴을 씻고, 화끈한 통증을 다스렸다. 간이상점엔 콜라와 우유를 사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이뤘다. 시위대 말로는 최루탄을 마신 사람의 회복에는 콜라와 우유만 한 게 없단다. 예방을 위해 양파나 파를 눈에 문지르는 이들도 제법 많았다. 그들만의 노하우다.
 
  “이보시오, 여기 우유 있소. 자, 여기 화장지도 함께.”
 
  “어이, 자네, 괜찮은 건가? 콜라 한 모금 마시게.”
 
  “이봐! 여기 외국인이 쓰러져 있네. 물 좀 갖다줘.”
 
  기침과 함께 숨이 막혔다. 정신을 못 차리던 나는 그만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최루탄이 바로 근처에 떨어졌을 때 나름 연기를 의식하며 사진 찍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빨리 바람을 타고 가스에 노출된 것이다. 다들 정신없는 이때 자신도 가스에 노출된 몇 명이서 급히 다가와 나를 보살펴준다. 자신들의 시위에 애꿎은 외국인이 당해서 미안하다는 투다.
 
  제대로 눈물 콧물 다 쏟아낸 나는 급히 인근의 보석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반쯤 셔터를 내리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시위 때 만난 미국 여기자 둘은 이 안에서도 시민들과 인터뷰를 하며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차분히 흥분을 가라앉히며 뉴스를 보고 있는데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공식적으로 이미 18명이 사망했다는 속보가 뜬다.
 
  그때 돌연 화면이 꺼졌다.
 
  “망할 놈들, 뉴스를 차단시켰군.”
 
  정부에서 뉴스채널을 막아버렸단다. 주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리모컨을 집어 들더니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랍어 방송이 나오긴 했지만 그는 나와 여기자들을 위해 BBC 속보로 화면을 고정시켰다. BBC는 특보를 통해 하늘에서 내려다본 카이로 화면을 틀어주며 상황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경찰, 소방대 향해서도 최루탄 발사
 
아파트 진화를 위해 소방차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최루탄을 발포한 경찰. 때문에 소방관들도 난데없는 상황에 몹시 당황해 했고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시 밖으로 나왔다. 한쪽에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소방차 2대가 들어왔다. 아파트에서 불이 난 것이다. 위치를 보니 좀 전에 격렬하게 경찰에게 항거하던 곳이다. 불길은 세차게 번져 올랐다. 이미 전소된 층 위로도 걷잡을 수 없이 화염이 번져 갔다. 고층 입주자들이 호스로 물을 뿌려보지만 역부족이다.
 
  “경찰이 발포(發砲)했어요!”
 
  사람들은 일제히 경찰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경찰이 무고한 시민의 보금자리에 화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소방차가 급히 진화에 나섰다. 시위는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상황을 심각하게 의심해야 할 사건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졌다. 경찰이 소방차를 향해 최루탄을 쏜 것이다. 연달아 3발이 날아들었다. 소방관들도 불 끄랴, 최루탄 가스 피하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방차만 믿고 경찰에게 돌을 투척하는 시위대에 본때를 보여주려는 심산 같았다. 소방차 주위는 이내 짙은 운무(雲霧)에 싸인 것처럼 혼탁해지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흩어졌다. 경찰의 일시 진압이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동료인 소방대원들이 있는데도 의식하지 않고 최루탄을 쏘다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나는 다시 최루가스에 노출되어 눈물, 콧물을 쏟아가며 골목 안으로 대피했다. 그리고 보석상점을 대피소 삼아 들어오고 나가고를 반복했다. 한참 동안 서로 밀고 밀리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따금 경찰은 전차를 가지고 시위대 사이를 맹렬히 질주하며 위협을 가했다. 행여 교통사고라도 나면 즉사할 정도의 속력이다. 돌진하는 전차도 꽤 위협적이어서 경찰 편에서 보면 시위대 진영을 흐트러트리는 데 적잖이 기여하고 있었다. 군중이 제아무리 돌을 던져보지만 맞아봐야 티도 안 나는 전차다.
 
  밤이 내리고, 밖의 소리는 더욱 요란해진 채 멀어졌다. 주위가 잠잠해지자 다시 밖으로 나왔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아찔한 상황을 여행자들에게 얘기했다. 다들 뉴스를 통해 알고 있다는 눈치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해졌어. 이보게, 미스터 문, 인터넷과 전화 모두 끊겼네. 정부에서 막았다고 하더군. 지금부터 인터넷과 관련된 모든 업무가 정지되니 뭐, 알아서 하는 수밖에. 나도 내일 현금 인출할 생각이었는데 큰일 났어.”
 
  숙소 주인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볼멘소리를 내뱉는다. 밤이 깊어질수록 수위가 높아지고 있었다. 숙소가 비교적 시내 중심에 위치한 까닭에 총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일부는 여행계획을 취소하거나 변경했으며, 또 다른 일부는 비자 기간도 넉넉하니 시위가 잠잠해질 때까지 외출을 자제하고 숙소에 머물겠다는 입장이다. 앞으로의 향방을 놓고 각기 다른 의견이 오갔다. 밤 10시가 넘어서자 이따금 들리던 총성이 멈추고, 비로소 시위대의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1월 29일
 
  “시위대는 폭도일 뿐”
 
  오전 9시경, 지난밤 나와 떨어져 타흐리르 광장으로 갔던 조지가 아연실색하며 돌아왔다.
 
  “맙소사, 탱크가 있지 뭐야! 군대가 출동했어!”
 
  TV를 통해 보긴 했지만 바로 앞에 탱크가 진을 치고 있다니… 상황은 점점 예측 불가능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최루탄 가스를 마신 건 나뿐이 아니었다. 혼란 중에 헤어진 룸메이트 모두 최루액에 노출돼 눈물, 콧물 다 쏟아냈단다. 내가 머문 지역보다도 다른 쪽이 한층 시위가 격렬했다고 한다.
 
  조지는 아침 일찍부터 나에게 타흐리르 광장에 가자고 권유한다.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8시까지 통행금지가 내려진 상태다. 그래서 오전 8시가 넘어서야 거리로 나올 수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었지만 거리는 하루 만에 황폐화되었다. 폭격을 맞은 듯한 황량함 그 자체였다.
 
  “세상에!”
 
  길을 가던 우리는 불과 수 시간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상황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대로변 상점들이 습격을 받고 폐허가 되어 있었다. 몇몇 레스토랑은 내부에 방화로 보이는 화재까지 발생했고, 간이 상점의 보석점은 한쪽 벽면이 뚫려 있었다.
 
  “망할 녀석들! 시위대는 폭도일 뿐이야!”
 
  주인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자기는 이 시위를 반대한다고 했다. 시위를 구실로 약탈과 방화를 일삼아 힘없는 동료 시민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에 비분강개하고 있었다.
 
 
  약탈의 흔적들
 
흥분한 시위대의 습격을 받은 대로변 식당. 주인은 누구를 위한 시위냐며 망연자실해 했다.
  여기저기에서 허탈해 하는 표정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정도를 넘었다는 표정이다. 자동차 역시 여러 대가 불타 차체만 앙상하게 남은 채 흉물스럽게 버려져 있었다. 경찰차도 서너 대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밤 시위대를 압박하며 돌진하던 전차도 두 대가 전소(全燒)되었다. 군중이 얼마나 성났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성(理性)을 잃고 성난 코뿔소가 되어 일단 밀고 보는 시위대를 경찰은 물론 같은 동료들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와중에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고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은 과일가게들 뿐이었다. 건물 앞 골목에다 두고 파는 과일들이지만 누구 하나 건드리지 않은 게 이상하다. 이슬람사회의 휴일인 금요일이어서 은행은 물론 일반 자영업자들도 모두 문을 닫은 상태다. 차가운 회색빛이 감도는 도심(都心)은 그야말로 을씨년스러웠다. 심지어 거리의 ATM기를 부수려 시도한 흔적마저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시위대가 어리석은 행동을 했군. 이건 악수(惡手)야! 보라고, 이런 자충수(自充手)를 두면 누구에게 유리할 것 같아?”
 
  조지는 고개를 저으며 냉엄하게 시위대를 꾸짖었다.
 
  “그럼 경찰 편이야?”
 
  “물론 아니지.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어쨌거나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거야. 절대! 다만 시위대가 초반엔 평화로웠는데 갈수록 도를 넘는단 생각이 들어 유감인 거야. 좀 더 지혜롭게 대처할 수는 없었는지….”
 
  타흐리르 광장으로 나와 보니 과연 탱크가 전방위로 포진해 있었다. 아침부터 모여든 군중은 지난밤 민주화 시위 열기를 되살리려는 듯 목청을 드높였다.
 
  “문, 저것 좀 봐.”
 
 
  여당 당사에서 치솟는 불길
 
탱크에 올라가 민주화 시위를 벌이는 카이로 시민. 그러나 군은 구경만 하며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조지가 가리키는 쪽을 봤다. 경악의 연속이었다. 투탕카멘 왕의 보물과 람세스 2세 미라 전시로 너무나 유명한 이집트 고고학박물관 뒤편의 수십 층짜리 건물이 완전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무바라크 편인 국민민주당(NDP) 청사야. 아마 화난 시위대가 불을 질렀나 봐.”
 
  하염없이 불길이 치솟는 상황인데도 소방차는 올 생각이 없었다. 군중은 아침부터 타흐리르 광장 곳곳에서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명이 무리를 이뤄 민주화 시위를 계속해 나갔다. 군인들은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경찰이 사라졌다.
 
  “조지, 경찰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한 명도 보이지 않아.”
 
  “그러게, 다 군대로 대체되었네. 이제부터 군(軍)에서 치안을 담당하는가 보군. 그런데 사태를 보니 제대로 통제가 이루어질지 모르겠어.”
 
  전날보다 취재를 위해 모여든 기자가 더 많아졌다. 시위대는 탱크에 올라타 심드렁한 표정의 군인 옆에서 구호를 외치고 일부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기념사진 찍는 모습도 자주 연출되었다.
 
  지난밤의 소요와 아침부터 시작된 시위에도 불구하고 도심은 비교적 차분한 편이었다. 흥미롭게도 오늘 아침 또다시 시위대 중 일부가 이번엔 군인들에게 먹을 것과 물을 갖다주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그걸 또 고맙다고 받아먹는 군인의 모습이 어색하기만 하다. 시위를 하면 적으로 변할 상대방에게 하는 행위치고는 상당히 특이한 현상이다. 물론 대다수는 군용(軍用) 트럭에 올라타서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독재 정부에 대한 항쟁을 멈추지 않는다.
 
  1시경 카이로 주재 대한항공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몰라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문을 닫았단다. 게다가 경비(經費)가 거의 떨어졌다. 인출 및 환전(換錢)이 필요했다. 하지만 은행 역시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시내 유수 호텔 역시 보안 검사를 강화하고 투숙객만 들여보냈다. 겨우 허락을 받고 들어가도 그들이 도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방을 내주는 것 외에는. 골목길 몇 곳을 제외한 대로변의 대다수 식당 및 인터넷 가게, 잡화점 등도 문을 닫았다.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가 무척 바쁜 인상이었지만 그 와중에 친절하게 응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사관도 작금의 사태에 대해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인터넷이 마비되는 바람에 그들도 일을 처리하는 데 상당한 애로를 겪고 있었다. 이미 이집트 내 한국인 여행자들은 일정을 포기하고 카이로로 모여들고 있었다. 대사관 측에선 “대한항공 측과 연락하고 있으니 가능하다면 빨리 이집트를 빠져나가라”고 권고하고 있었다. 민박집 역시 밀려드는 손님을 감당하느라 진을 빼고 있었기에 나는 계속 술탄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저렴한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고 숙소에서 머무는 것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시 기능이 마비되자 하루 만에 슬슬 지쳐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일본 친구들은 방 안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대사관에서 자국민(自國民)들에게 연락도 없고, 자신들도 그럴 필요를 별로 못 느낀단다. 어찌 보면 너무나 천하태평 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안식이자 나라 밖에서 위기를 대처하는 자세였다.
 
 
  “친구가 죽었어요”
 
시위대가 건넨 신문을 받아 든 군인이 다시 돌려주고 있다. 군중은 종종 먹을 것과 물 등을 군인들에게 전달하기도 했으며 탱크에 올라가 군인들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오후부터 불붙은 민주화 시위가 저녁이 되자 어김없이 소요사태로 확산되었다. 사망자 소식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조지와 함께 있을 때였다. 우리와 대화하던 한 남자가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곤 말을 잇지 못했다.
 
  “오… 안 돼! 이런, 맙소사. 제 친구가 시위 도중 죽었답니다. 죄송합니다. 얼른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우리는 무어라 할 말 없이 얼른 가보라는 것으로 위로를 갈음했다. 급작스레 걸려온 전화에 당황한 남자는 방금 전까지 우리에게 무바라크 정권의 부당성과 시위의 정당성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뉴스보다 소문이 더 빨랐다. 이미 이날 사망자 수가 50명을 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소문에 따르면 경찰이 총을 쏘았다고 했다. 설마 했다.
 
  저녁이 되자 또다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숙소 내부에서 조리해 먹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아 요리재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그간 일본인 친구들이 라면과 빵, 세제 등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신세만 질 수도 없는 일이다. 그들도 조금씩 어려워지고 있었다.
 
 
  피자가게의 휴전
 
  호텔 바로 앞 작은 피자가게로 들어갔다. 큰길에서 작은 골목으로 들어오는 길이라 비교적 시위로부터 안전한 곳이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이 시간에 문을 연 피자가게는 밀려드는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하나에 1.5파운드, 우리 돈 300원이면 먹는 미니 피자가 이들의 한 끼 식사가 될 터였다. 값도 싸고, 맛도 좋고, 양도 넉넉하니, 길거리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인기 만점이다. 여기저기에서 동료들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수십 개를 주문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제법 의미 있는 장면이 발견되었다. 음식을 사려고 모여든 인파 속에 경찰이 섞여 있는 것이다. 사라진 경찰들을 허름한 피자가게 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다행히 먹을 것 앞에 두고 싸우는 치졸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심 놀랐다. 말하자면 이 피자가게는 시위대나 경찰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휴전 성격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누구도 경찰이라고, 시위대라고 서로 언성을 높이거나 투쟁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배고픔 앞에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다. 골목을 따라 불과 수십여 미터를 두고 몇몇 경찰과 몸을 숨긴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주문한 미니 피자를 베어 물으며 한창 허기를 달래고 있을 때 대로변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이봐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 사람이 피 흘리고 있어요, 어서 도와주세요!”
 
  누군가 피가 낭자한 채 쓰러져 있다는 것이다. 일순 사람들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일제히 몰려갔다. 나 역시 따라갈까 고민하다 현장 사진을 찍을 카메라도 없고 행여 뿔 난 민심에 애꿎은 희생자가 될까 싶어 호텔로 돌아왔다.
 
  조지는 내 놀란 토끼눈을 보더니 연유를 묻는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맥이 풀려 소파에 앉는데 문득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조지,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무슨 날인데? 설마 민주화가 성립이라도 되었나?”
 
  피곤한 채 때 이른 저녁잠을 즐기고 나온 조지가 기분 좋은 기지개를 켜면서 대꾸한다.
 
  “그럼 뭐 더 좋은 거지. 근데 오늘이, 풋, 내 생일이거든.”
 
  “뭐라고? 세상에 이럴 수가. 이렇게 좋은 날에 이런 상황을 맞고 있다니! 친구, 널 위해 내가 케이크를 사올게, 잠깐만 기다려.”
 
  “문 닫은 걸 벌써 잊은 거야, 조지?”
 
  “아차, 그렇지. 그래도 네 생일인데 축하해야지. 좋아, 뭐로 할까? 파스타 해줄까?”
 
  “됐어, 고마워. 여행 시작한 뒤로 생일 챙기는 거야 늘 언감생심이지 뭐.”
 
  정확히 만 서른 번째 생일이었다. 더 이상 20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진짜 서른, 누구 말대로 잔치가 시작된 것이다. 내가 바라는 서른의 생일 선물, 이 상황에서 개인의 유익을 추구한다면 눈치 없는 속물일까? 그 욕심 잠시 감추고 어서 이집트에 평화가 오길 간절히 바랐다. 우울한 생일 밤은 조지와의 싱거운 여행 수다 속에 그렇게 깊어갔다.
 
 
  1월 30일
 
  한국의 동생과 통화
 
  계속되는 민주화 시위 속에 상권은 물론 시민들의 삶도 위축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빵집 앞에는 시민들이 길게 열을 지어 서 있었다. 일부 식품들은 사재기 기미가 보일 정도였다. 외환거래는 정지되어 달러당 이집트 파운드 가치는 부르는 게 값이다. 그마저도 없어서 못 구할 판이었다. 가게들이 문을 열지 않아 일부 소모성 제품들은 품귀 현상을 보였다.
 
  대한항공에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무응답이다. 대사관에 다시 연락했다. 교민과 여행자 및 주재원, 봉사자 등을 챙기느라 정신없이 바쁜 듯 보였다. 여전히 묘안은 없었다. 다만 대한항공 전세기가 두 차례에 걸쳐 오니 가능하면 그 편에 빠져나가는 게 좋겠다는 확인된 입장이었다.
 
  도움을 위해 한국에 전화를 걸었다. 시위가 장기화되고 인터넷이 계속 차단되며 공항이 폐쇄라도 된다면 자칫 고립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전히 인터넷은 연결되지 않았지만 다행히 전화는 다시 연결되었다. 동생에게 부탁해 표를 알아보니 2월 6일이 가장 빠른 시간이란다. 우선 표 예약을 부탁했다. 비행기가 뜨고 안 뜨고는 차후 일이다. 이후 타흐리르 광장에 위치한 대한항공 사무실을 찾았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다른 항공사도 마찬가지였다.
 
  숙소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기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여행자 사이에서는 공항을 이용할 수 있는지와 비행기가 정시에 이륙하는지가 최대 관심이었다. ‘모든 비행기 이착륙이 통제되고, 결항되었다’, ‘공항은 시위와 상관없는 곳이라 정상 운영되고 있다’, ‘지금 공항 가서 기다리면 표는 구할 수 있다, 없다’ 등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이 떠돌았다. 각국 대사관마저 답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해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 전화카드가 왜 15파운드란 말이오?”
 
  “그럼, 사지 마시오. 상황이 이런데 남아 있는 건 이게 전부니까.”
 
  이집트 유심카드를 사용하는 나는 여기저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전화카드가 꼭 필요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은 까닭에 단 한 군데 문을 연 상인에게 전화카드를 구매하려다 난처한 상황을 맞이했다. 정가 10파운드짜리를 15파운드에 팔겠다며 횡포를 부리는 것이다. 누가 봐도 파는 사람이 우위인 건 맞지만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는 수 없이 요구한 대로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현지인들은 비교적 덜하지만 숙소에 머물고 있는 여행자들 사이에선 벌써 이집트인들에 대한 호감이 사라지고 상인들에 대해 비아냥이 나오기 시작했다. 터무니없이 가격을 높이거나 불안한 상황을 이용해 사기를 치는 경우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공항까지 태워주는 택시비가 불과 어제까지 40~ 50파운드 하던 것이 하루 만에 무려 100파운드로 오른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거기에 원래 택시 요금에 포함된 공항 입장세는 별도란다. 한시라도 빨리 탈출해야 하는 여행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돈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시위대 점점 예민해져
 
경찰이 발포한 최루탄을 들어 보이는 한 남자. 가뜩이나 독재 정권의 뒤를 봐준다는 불편한 루머가 돌던 오바마 정권이었는데 최루탄이 미제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군중이 정부에 대해 더욱 분개하게 되었다.
  더욱이 민심은 이제 외국인들에게도 점점 등을 돌리고 있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나?”
 
  “한국에서 왔는데요.”
 
  “당장 너희 나라로 돌아가! 꺼져! 미국 하수인 주제에….”
 
  미국 오바마 정권이 민주화 시위에 침묵하고 현 이집트 정부를 비호한다는 인식 때문에 군중 사이에 미국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해 있었다. 타흐리르 광장에는 연일 시위대가 모여들었고, 군대 파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는 점점 급증해 갔다.
 
  여행자들 가운데 오랫동안 독재정권에 시달려온 이집트 국민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약탈 및 방화 등의 사건 사고 소식이 전해지면서 숙소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시위대가 너무 멀리 나갔어. 자체적으로 질서가 잡히지 않으니 마음대로 행동하는 거야. 이런 식이라면 아무리 민주화를 열망한다 해도 정당성을 얻기가 쉽지 않아.”
 
  “글쎄, 내가 들은 바로는 사복 입은 경찰들이라던데. 그들이 민심을 동요시키기 위해 저지른 계획된 범행이라는 거지.”
 
  “무바라크가 죄수들을 풀어줬다는데 그들 짓인지도 몰라. 되레 애꿎은 시위대가 욕을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한인교회 예배 취소
 
  언론도 추이를 예측하기 어려운 시점이었다. 하물며 정보가 차단된 숙소 여행자들이 각자가 취합한 정보만을 가지고서 섣불리 판단하기란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하나 시위대가 계속해서 희생되고 있다는 소식엔 하나같이 공분을 감추지 못했다. 명명백백한 이집트 정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이에 대한 책임을 지어야 한다는 모범답안 같은 얘기에는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모두가 TV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조용한 분위기를 틈타 한마디 내뱉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을 지키려는 자와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유를 찾으려는 자와의 싸움이군요. 어느 쪽이든 패배한다면 후유증이 막심하겠지요. 그런데 말이죠, 역사적인 이 상황을 직접 경험하고 또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나는 뭐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별안간 궁금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은 막연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 숙소에 갓 들어온 중년(中年)의 일본인 남자가 어설픈 영어로 대답했다.
 
  “여기에서 당신이 무얼 애써 하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리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겁니다. 대신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약자(弱者)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세요. 그리고 도와주세요. 나는 ‘민주주의란 가장 밑바닥 인생도 존중받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BBC는 생중계로 계속 시위 현장을 띄우며 전문가 의견을 내보냈다. 자극적인 장면을 내보내는 화면상으로만 보면 카이로는 마치 내전(內戰)을 치르고 있는 듯 보였다. 언제쯤 이 사태가 잠잠해질지 깊은 밤 온통 이집트 민주화 시위에 대한 예상과 분석으로 토론이 이어졌다.
 
  오늘 예정되어 있던 한인교회 주일 예배도 모두 취소되었다. 나는 대사관을 통해 남은 여행을 취소하고 카이로로 복귀하는 한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과 주재원들을 비롯한 교민들이 한국으로 서둘러 빠져나간다는 소식만 전해들었다. 내게도 보다 확실한 대책이 요구되었다.
 
 
  1월 31일
 
  KOICA 철수 소식
 
  수단을 통해 이집트에 도착한 후 룩소르의 한 관광대학에서 현지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소속의 윤슬기 단원을 알게 되었다. 룩소르에서 만나 한국어를 배우는 현지인들과 함께 식사한 인연이 있는 그녀는 불과 며칠 전 휴가를 받아 카이로에 와 있는 상태였다. 대사관 외에 이집트 내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한인 정보통이었다. 나는 한인 중에 혼자였으므로 그녀에게 실시간으로 새로 업데이트되는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카이로의 모(某) 건물로 코이카 단원들이 단체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시민들이 조직한 자율방범대가 지키는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다. 그러다 오전 10시경 그녀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전해들었다.
 
  “코이카 본부에서 단원들의 한국 철수 명령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2월 1일 비행기를 시작으로 전 단원이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봉사하며 국위(國威)를 선양하는 예순 명 남짓의 봉사자 모두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한단다.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또 다른 신호다. 다행히 우리 정부에서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슬기 단원은 룩소르를 먼저 떠나왔기에 짐을 모두 남겨둔 채 몸만 챙겨 한국으로 가야 할 형편이었다. 어찌 보면 불행 중 다행이다. 아직 룩소르엔 빠져나오지 못한 다른 단원들이 더 있었다. 국내선이 결항되었단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대사관에서는 한국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비행기 스케줄을 알아봐 주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이집트에 남은 한국인들을 모두 보낸 다음 마지막에 자신들이 피신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다행히 나 역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가까스로 잡았다. 한국에서 동생이 열심히 알아봐 주고 운도 조금 따른 덕이다.
 
  숙소에서는 여행자들이 다른 국가로 떠날 것인가, 여기에 남아 상황을 주시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공항행(行)을 택했다. 오후 4시경이었다. 한 일본인 친구도 유럽 어디든지 표가 남으면 가겠다는 일념으로 따라나섰다. 반면 다른 일본인 친구는 이미 케냐행 티켓을 구입했음에도 떠나는 걸 포기했다. 공항 상황에 대한 염려에서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시위대들의 검문검색이 과도할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부 택시들은 위험하다면서 공항행을 거부하기도 했다. 시위대는 각목을 들고 차량들을 감시, 수색했다. 때문에 일부 여행자들은 10분 거리를 한 시간씩 걸려 오기도 했다. 특히 타흐리르 광장 주변은 오후 4시 이후 차량 출입이 완전 봉쇄되었으므로 이집트 사태 때문에 이 나라를 떠나기 위해 급히 카이로로 모인 여행자들은 공포 분위기에 질리기도 했다.
 
  카이로국제공항은 피란민의 행렬로 북새통이었다. 공항 밖까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앉아 있었다. 내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숨이 탁 막히는 광경이다. 방학을 맞아 이집트 여행 왔다는 한 한국인 여행자는 벌써 이틀째 공항에서 체류중이며 터키로 가는 표라도 구해서 다행이란다. 또 다른 모녀는 공항에서 잠을 자고 꼬박 하루를 기다려 그리스로 가는 티켓을 구했단다.
 
  사람들의 모습은 영화 <터미널>의 주인공인 톰 행크스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화장실에서 세면을 하고, 의자나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고, 식사는 미리 준비해 온 도시락과 공항 내 편의시설을 이용해 해결한다. 이틀 정도면 충분히 견딜 수 있겠다 싶었다. 나도 미리 준비한 식사로 공항의 긴긴밤을 보낼 작정이었으나 뜻밖에 만난 다른 한국인들과 합석해 외롭지 않게 되었다.
 
  쫓기듯 공항에 나와 길고 지루한 밤을 보내는 모습은 다양했다. 무료함을 달래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카드게임을 하거나 다운로드한 영화를 감상한다. 수다를 떠는 무리도 있었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여행자도 많았다. 소수긴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업무를 보는 부지런한 비즈니스맨도 보였다.
 
 
  2월 1일
 
  조지와의 마지막 통화
 
공항에서 잠을 청하는 여행자들. 비행기 티켓을 구하지 못한 여행자들과 아예 출발 하루나 이틀 일찍 공항으로 피신한 여행자들이 공항에서 노숙을 하며 출국을 기다리고 있다.
  “문, 티켓 구한 거야? 와우, 정말 축하해!”
 
  “고마워. 그런데 조지, 거기 상황은 어때?”
 
  “똑같지 뭐. 방송 봤어? 오늘 타흐리르 광장 주변으로 100만명이 운집할 거야. 아무래도 고비가 될 것 같아.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강해서 분위기가 넘어가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일단 정부는 버티고 있네. 무바라크가 시위대와 야권을 피해 후르가다(Hurghada, 홍해에 위치한 휴양지)로 도피했다는 얘기도 있어.
 
  그리고 이건 유감인데, 사망자가 공식적으로 100명이 넘었어. 갈수록 시위가 격해지나 봐.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경비를 서고 있는데도 치안은 불안하고, 계속 사상자는 늘어가고, 인터넷은 여전히 먹통이고, 곳곳에서 상점이 약탈당하니 여기 있는 사람들도 불편해 해. 그래도 다들 민주화로 가는 성장통이라 여기는 분위기야.”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마지막 통화 내용 역시 개인사보단 주로 이집트 시위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이른 아침부터 표를 끊기 위한 극심한 혼잡을 뚫고 게이트로 빠져나왔다. 그제야 차 한 잔 마실 여유가 생겼다.
 
  출발 예정 시각을 훌쩍 넘긴 오랜 기다림 끝에 비로소 비행기는 시동을 걸었다. 이때가 오전 11시. 다들 카오스 상태의 이집트를 빠져나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을 놓는 분위기였다. 밤새 추위에 떨며 지쳐 있던 한국 교민들과 여행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새침한 ‘차도녀’ 이미지의 승무원들도 곰살궂게 대하며 승객들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한국으로!
 
  비행기가 이륙(離陸)하면서 저 아래 멀어지는 카이로 시내가 보였다. 여전히 찬란한 역사 도시 모습 그대로다. 멀리서 보니 저리도 고풍(古風)스러울 수가 없다. 그런 곳이 독재정권의 압제로 여태껏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던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순전히 국민들의 힘과 목소리로 새 시대, 새 역사를 창조하느냐에 대한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이 민주화를 향해 한 발짝 내딛으려는 것이 꼭 첫걸음을 떼는 아기같이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희망차 보인다.
 
  비행기가 하늘 가까이 닿고 나는 쏟아지는 잠에 기분 좋게 응했다. 남은 조지를 떠올리면서.
 
  “이거, 먼저 떠나서 정말 미안하군. 언젠가 자전거 타며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 연락할게. 잘 지내.”
 
  “걱정 마. 난 이곳에 남아 이집트의 역사적인 장면을 지켜볼 거야. 오히려 네가 더 아쉬운 선택을 했는지도 몰라. 이런 기회 흔치 않거든, 친구. 역사의 현장이 궁금하다면 언제든지 다시 돌아오라고. 인샬라!”
 
  “갓 블레스 유, 투!”
 
  그는 내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미 6월 16일 날짜로 이집트 카이로로 돌아가는 표를 구해두었다. 그런데 2월 12일 무바라크 하야 뉴스를 들었다. 비행기표를 바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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