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물탐구

삼전도비문 지은 이경석

‘영혼 없는 관료’ 시대에 책임 있는 공직자의 모습 보여 줘

  • 글 : 박종인 《조선일보》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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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淸, 삼전도비 건립 압박… 당대의 문장가들은 칭병하거나 글을 졸렬하게 써 내 회피
⊙ 이경석, 영의정 때 청이 효종의 북벌 계획 추궁하자 자기 책임이라며 위리안치 자처
⊙ 송시열, 이경석을 금나라에 아부하면서 오래 산 宋나라 손적에 비유
서울 잠실에 있는 삼전도비.
국가 혹은 정부의 목표는 국민의 행복이고 행복을 위한 도구는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이다. 개인 혹은 가족과 조직 그 어떤 단어를 저 ‘국가’에 갈아 끼워도 결론은 똑같다. 정부는 국가 구성원인 국민이 생명과 재산을 보전하고 성장하도록 국가를 운영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실행하는 조직원은 공무원이다.
 
  한때 공무원은 영혼이 없는 사람이라는 자조적(自嘲的)인 말이 있었다. 2008년 1월 3일 이명박 정권 출범 준비 당시 전임 노무현 정부 국정홍보처 간부가 처음 공개석상에서 이 말을 꺼낸 이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재미 혹은 변명을 위해 인용되는 표현이다. 한마디로 “까라면 까야지” 하는 자조적인 변명이다. 사실 이 말은 막스 베버가 뿌리다. 그런데 맥락이 전혀 다르다. 공무원이 시스템과 껍데기에 몰입하면서 ‘영혼(혹은 정신)이 사라진 말종 전문가(Fachmenschen ohne Geist)’가 됐다는 부정적 시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이 표현은 한쪽에서는 자조적으로, 그러면서도 책임 회피적인 변명 도구로 널리 쓰인다. 대한민국에서 이 표현은 생명력이 질겨서, 지난해 7월에는 더불어민주당 양부남 의원이 유튜브 방송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 출연해 각종 개혁 진행 과정에서 “공무원은 영혼 없는 도구이므로 전혀 걱정할 것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소명의식 없는 공직자들
 
  물 건너 대한민국에서 베버가 참 고생이 많다. 영혼이 빠져나간 비겁한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네에게 편한 측면만 본다. 직업공무원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소명(召命)의식에는 눈을 가리고 탈(脫)영혼적 근대성에 자기 무책임을 밀어 버린다. 직업공무원이 넋 빠진 전문가로 추락하지 않으려면 당연히 양심과 책임이 필요하다. 그 두 가지 가치를 사람들은 소명의식이라고 부른다.
 
  무안공항 사고에 대해서는 지역 연고가 있는 정부-여당 그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 반드시 해결돼야 할 과제임이 분명한데 그렇다. 대한민국 고질병인 진영(陣營)논리와 함께, 내가 나서서 매를 맞을 필요 없다는 탈영혼적 무책임이 이 침묵 속에 숨어 있다.
 
  2024년 12월 3일 야밤에 터진 계엄은 더하다. 당시 대통령을 포함해 그 누구도 자기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 “쟤가 하래서” “쟤가 내 말을 안 들어서”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냐” 같은 초등학생 수준의 변명밖에 보이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건은 존재하는데, 사건 당사자가 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찾지 않은 것이다. 찾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미루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패턴이 반복된다. 발전하는 역사는 용수철처럼 진행하지만 멎어 있는 역사는 평면에서 원을 그린다. 등장인물만 바뀌고 패턴은 똑같다.
 
 
  “글 쓰는 법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
 
 
청 태종 홍타이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난 지 39년 뒤에 조선에 전쟁 같지도 않은 전쟁이 터졌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개전일(開戰日)은 음력으로 1636년 12월 병자년이지만 양력으로는 1637년 1월이다. 두 달도 못 간 전쟁에서 조선은 무기력하게 항복했다. 만인이 퍼붓는 손가락질 속에 최명길(崔鳴吉)은 항복을 택했다. 나라가 거덜나고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仁祖)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었다. 전쟁 불사(不辭)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최명길이 열어 준 산성 문을 빠져나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문득, 조정에서 영혼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해 11월 27일 예문관 부제학 이경석(李景奭·1595~1671년)이 글을 적어 내린다. 한강 건너 삼전도(三田渡)에 있는 비석에 쓸 글이다. 글은 이리 시작하였다.
 
  “대청(大淸) 숭덕(崇德) 원년 겨울 12월에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께서 진노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오셨다. 우리 임금은 두려워하기를 마치 봄날에 얼음을 밟고 햇빛을 기다리는 듯이 하였다.”(‘대청황제공덕비’, 속칭 ‘삼전도비’)
 
  어명(御名)을 받은 이경석은 이틀에 걸쳐 글을 끝내고 인조 앞에 바쳤다. 청나라 황실이 내건 강화(講和) 조건 중 둘이 처녀 조공과 비문 제작이었는데 그 치욕적인 비문을 맡은 이가 이경석이었다. 이경석 글은 청 황실의 교정을 거쳐 비문으로 확정됐다. 훗날 이경석이 맏형 이석문에게 편지를 썼다.
 
  “글 쓰는 법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有悔學文字之語).”(《백헌집》 부록 1 연보)
 
  이 글은 최명길보다 더 거친 손가락질 세례를 받으며 영혼을 지켰던 관료 이경석과, 그에게 손가락을 날려 댄 영혼 없는 좀비들에 관한 이야기다.
 
 
  인조, 삼전도비 비문 작성 보류 지시
 
  삼전도비는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조선 정부가 청에 항복한 자리인 삼전도에 세운 비석이다. 관온인성황제는 홍타이지, 즉 청 태종을 뜻한다. 항복 직후 청은 조선 정부에 항복을 기념한 비석을 세우라고 조건을 걸었다. 항복 의식을 치른 삼전도에 비석을 세우고 비석을 보호할 비각도 함께 세우라고 요구했다.
 
  그해 6월 비석을 만들 원석과 비석을 세울 단소(壇所)는 준비가 끝났다. 하지만 인조를 포함한 관료들에게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전투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항복한 전쟁이었고 조정 관료 절대다수가 결사항전(決死抗戰)을 외치던 전쟁이 아니었던가. 붓과 명분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던 관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인조는 3월부터 “비문 작성은 보류”라고 거듭 지시한 터였다.(《승정원일기》 1637년 3월 15일, 6월 26일 등)
 
  그런데 그해 11월 조선을 찾은 청나라 칙사(勅使)들이 최후통첩을 한 것이다. 다음은 1637년 11월 25일 《승정원일기》 기록을 간추린 것이다.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달(馬赴達)·대운(戴雲) 세 칙사가 창덕궁 인정전에서 인조에게 말했다.
 
  “삼전도 비각이 그리 정밀하지 않소이다. 그리고 비문(碑文)은 우리가 귀국하기 전에 보여 주시오. 황제의 명이올시다.”
 
  인조는 “우리나라에 문재(文才)가 없어 함부로 적을 수 없다”고 답했다.
 
  용골대가 말했다. “전쟁 후 조선에서 보낸 글들을 황제가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소이다. 걱정 말고 그들에게 비문을 맡기시오.”
 
  언젠가 올 일이 닥치고 말았다. 칙사들이 보는 앞에서 인조가 도승지 윤휘에게 명했다. “대신에게 말하여 지을 만한 사람을 얻어서 제때에 짓도록 하라.”
 
  흡족한 칙사들은 인조가 연 술자리에 참석해 여러 잔 술을 들었다. 동부승지 김광욱은 몰래 술 대신 꿀물을 마셨다가 적발돼 혼쭐이 나기도 했다. 낮술 잔치는 오후 5시 무렵 끝났다.
 
 
  비문 작성을 회피한 문신들
 
 
장유
인조는 취하지 않았다. 취할 수가 없었다. 술자리가 파하고 인조가 급히 신하들을 불렀다.
 
  “비문 지을 자를 정밀하게 골라서 급히 짓도록 하라.”
 
  꿀물을 들이켰던 김광욱이 답했다. “글솜씨로 유명한 자가 그리 많지 않나이다. 하여 벼슬에서 물러난 자들까지 포함해 후보를 올리나이다.”
 
  비변사(備邊司)를 통해 급히 선정한 비문 작성 후보자가 장유(張維·1588~1638년), 이경전(李慶全·1567~1644년), 조희일(趙希逸·1575~1638년), 이경석 4명이었다. 장유는 전직 판서, 이경전은 현직 형조판서, 조희일 전직 참판, 이경석은 현직 부제학이었다. 네 사람 모두 조선에서 알아주는 명문장가로, 그중 누가 비문을 써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 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네 사람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上·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다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인조실록》1637년 11월 25일)
 
  최하 차관급인 전·현직 대신들이 하나같이 거부한 것이다. 한 사람은 고의로 글을 조잡하게 썼고 한 사람은 병을 핑계로 아예 작문을 거부했다. 뒤에 밝혀지지만 또 한 사람 장유는 문장 곳곳에 오·탈자를 박아 넣어서 자기 글이 채택되지 않도록 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21세기 대한민국 정부로 치면 대통령실에서 지시한 항복조약 조문 작성을 이러저러한 수단으로 거부했다는 뜻이다. 편지나 시문(詩文)이 아니라 절대적 승전국 청나라 칙사가 청 황제의 명으로 요구한 외교문서였다. 이들 고위 관료들은 영혼, 정확하게는 직업관료로서 가져야 할 소명을 팽개치고 비좁은 성리학적 이기주의에 스스로를 가둬 버렸다.
 
  오직 한 사람, 이경석은 달랐다. 이제 그 며칠 동안 벌어진 탈영혼의 풍경을 구경해 보자.
 
 
  “喪中에 있는 사람이 어찌…”(장유)
 
  하명(下命)이 있은 다음 날 전직 판서 장유가 상소문을 올렸다. 장유는 그때 모친상(母親喪) 중이라 벼슬에서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장유는 이런 정황을 세세히 들어 후보에서 제외해 달라고 청했다.
 
  “질병이 고질이 되어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 있으며 조석에 목숨이 다하기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입니다. 게다가 옛날 문자를 100글자 가운데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지경이오니 있는 힘을 다 짜내도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가 먼저 내세운 거부 사유는 질병과 기억력이었다. 여기에 장유는 한 가지 사유를 더 들이밀었다. 현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글을 새길 때에는 으레 지은 사람 성명을 기록하니 상중에 있는 사람이 어찌 그 사이에 이름을 기재하여 대국(大國)에서 괴이하게 여기게 하겠습니까.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장유는 천하에 소문난 문장가였다. 성리학 일색인 조선 학풍을 맵게 비판할 정도로 학식이 높은 학자이기도 했다.
 
  “책을 끼고 다니며 글을 읽는 자들을 보면 모두가 정주(程朱·정자와 주자)만을 칭송할 뿐 다른 학문에 종사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조선에 학자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장유는 그런 학자들을 “그저 정주학(程朱學·성리학)을 세상이 귀중하게 여긴다는 말을 얻어듣고선 겉으로만 높이는 척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장유, 《계곡만필》 1권, ‘아국학풍경직(我國學風硬直)’]
 
  그런 장유가 문서 작성을 거부했다. 학덕이 있고 지식이 있고 매서운 눈초리가 있었지만 정작 성리학에서 배운 그 명분이 자기 입신(立身)에 배치되자 입신을 택해 버렸다.
 
  그런 행위는 뒤에 또 반복됐다. 장유가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있을 때 강화도가 함락됐다. 강화도에 피란 중이던 며느리가 포로가 되어 청나라로 끌려갔다. 1년 뒤 며느리가 우여곡절 끝에 돌아왔다. 장유는 인조에게 “며느리와 함께 제사를 지낼 수 없으니 (아들의) 이혼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좌의정 최명길은 “몸을 더럽혔다는 증거가 없다”며 불가(不可)를 주장했다.(《인조실록》 1638년 3월 11일)
 
  인조가 장유 며느리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이후 사대부집 자제는 환향녀(還鄕女)와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
 
  다시 비문 짓던 풍경으로. 구구절절 애절한 상소문에 인조가 답했다.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이것은 시부(詩賦)가 아니니 경은 구애받지 말고 속히 지어서 들이라.”
 
  이틀 뒤 장유가 비문을 작성해 인조에게 바쳤다. 글을 읽던 인조가 비변사에 물었다.
 
  “어찌하여 비문(非文)이 있는가? 어찌하여 글에 관직명과 이름이 없는가?”(《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28일)
 
  꼼수를 부린 것이다. 천하제일 문장가가 문장 같지 않은 문장을 써서 탈락을 노렸음은 물론 아예 관명과 이름을 비워서 미필적(未畢的)인 책임 회피까지 노린 것이다.
 
  꼼수는 먹히지 않았다. 인조는 “일단 글을 받아서 정서(正書)해서 칙사에게 보내라”고 명했다.
 
 
  “상을 당하여 실성하였나이다”(이경전)
 
  “놀랍고 의아한 마음을 금할 수 없나이다.”
 
  현직 형조판서 이경전도 마찬가지였다. 하명이 있고 이틀이 지난 11월 27일 이경전이 상소문을 올렸다. 놀랍고 의아하다고 한탄을 한 뒤 이경전이 이렇게 읍소했다.
 
  “신(臣)은 나이가 여든으로 정신이 혼몽하여 시골 사람이 낙양(洛陽)에 들어와 동서 방향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나이다(則有如鄕人入洛 不識東西).”
 
  그리고 이경전은 “나랏일을 중히 하고 여론을 따르시려면 신의 이름을 후보에서 삭제하시기 바란다”고 글을 올렸다.(《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27일)
 
  상소문 자체가 명문장이다. 한시가 급한 인조는 상소를 배척하고 속히 글을 올리라고 명했다.
 
  이경전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 날 이경전은 다시 한 번 상소문을 올렸다. 역시 명문이었다. 이번에는 ‘병(病)’이었다.
 
  “신은 본래 제멋대로 하고 어리석은 데다가 중년에 상(喪)을 당하여 실성하였나이다. 술이 병이 되어 바삐 다니기만 하고 만사를 내버려 두고 있으니 물건이나 다름없고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나이다.”
 
  칭병(稱病)은 동서고금에 애용되는 핑계다. 그리고 문장가라는 이유로 후보에 올랐으니 이경전은 자기가 문장가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이경전이 이렇게 주장한다.
 
  “막힌 길과 버려 둔 우물은 이치상 급히 열기 어렵습니다. 비문 짓는 일을 어찌 경솔하게 엮어서 채워 넣을 수 있겠습니까. 밤새 고민해서 지금 간이 마르고 입술이 타는 듯하지만 끝내 한 자도 쓰지 못했나이다. 어찌 감히 속이겠나이까. 감당해 낼 수 있다면 길에서 넘어지더라도 사양하지 않겠으나, 이 일은 불가능합니다.”
 
  노대신(老大臣)이 스스로 병들고 실성했다고 탄식하면서 명문을 써서 자기가 명문이 아니라고 거듭 주장했다. 인조는 결국 상소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비변사에서 급하게 추려 낸 당대 조선 4대 문장가 가운데 한 명은 그렇게 항복 기념 문서 작성 의무를 면제받았다.
 
 
  ‘조적벽’ 조희일의 태업
 
  장유와 이경전은 상소문을 통해 자기가 비문을 쓰지 못하는 이유를 밝혔다. 그런데 전직 참판이자 경상도관찰사였던 조희일은 달랐다. 쓰겠다는 말도 쓰지 않겠다는 말도 없이 그냥 썼다. 그런데 그가 쓴 비문은 채택되지 않았다. 아니, 채택될 수가 없으리만치 조잡했다. 어찌나 고약하게 조잡하게 썼는지, 나중에 그가 올린 비문을 읽어 본 인조가 “조희일이 지은 것은 청나라에 보내지 말라”고 화를 낼 정도였다.
 
  정말 그는 글솜씨가 졸렬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아버지와 아들까지 3대에 걸쳐 장원급제한 문장가 집안이었다. 〈적벽부(赤壁賦)〉를 쓴 송(宋)나라 문장가 소동파(蘇東坡)만큼 잘 쓴다고 해서 ‘조적벽(趙赤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경전 케이스처럼 상소문을 올리면 글솜씨가 탄로 날까 싶어 그저 본문을 조잡하게 썼을 뿐이다. 실록에는 조희일이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故澁其辭) 채택되지 않기를 바랐다”고 적혀 있다.(《인조실록》 1637년 11월 25일)
 
  직무를 고의로 유기한 행위. 이런 케이스를 누가 어떻게 평가했을까?
 
 
  영혼 있는 관료, 부제학 이경석
 
경기도 성남에 있는 이경석 묘. 이경석은 지금으로 치면 항복문서에 해당하는 삼전도비 비문 작성을 맡아 군말 없이 임무를 수행했다.

  결국 비문 작성 업무는 부제학 이경석에게 돌아갔다. 이경석 또한 처음부터 기꺼이 임무를 수용하지는 않았다. 후보에 오른 다음 날 상소문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전일에 대략 사율(詞律)을 익혔습니다만, 그래도 능하지 못하므로 지금은 이미 포기해 버렸습니다. 문장은 더욱 장기가 아니니, 신하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이러한 술작(述作)은 구상하여 이루어 취사(取捨)에 대비하기가 결단코 어렵습니다.”(《승정원일기》 1637년 11월 26일)
 
  병이 나지도 않았다. 실성하지도 않았다. 그저 문장이 예전만 못하고 준비할 시간이 없으므로 사양케 해 달라는 상소였다. 인조는 이경석을 직접 불러 설득했다. “지금은 다만 저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어야지 혹시라도 격노를 사서는 안 된다. 사양하지 말고 속히 지어 오라.”(박세당, 《서계집》 12, ‘영의정 백헌 이공 신도비명’)
 
  그래서 이경석이 썼다. 누군가는 써야 했고, 명분은 뚜렷했다. 조선 앞에 놓인 운명을 가를, 청과 순탄한 전후(戰後)문제 처리를 위해서였다.
 
  비문 작성 명이 떨어지고 사흘이 지났다. 의도적으로 오·탈자를 집어넣은 장유의 글과 이경석의 글이 들어왔다. 역시 의도적으로 조잡하게 쓴 문장가 조희일도 글을 지어 보냈다. 이들 가운데 비변사에서 이경석과 조희일의 글을 최종 후보로 골라 인조에게 결재를 청했다.
 
  영혼 없는 자들은 책임을 면했다. 오랑캐 수괴(首魁)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글은 이경석 붓에서 나왔다. 그 글 끝은 이러했다.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었고 얼어붙은 뿌리가 봄을 찾았네. 커다란 강머리에 솟은 빗돌 우뚝하니 만년토록 삼한은 황제의 은혜로다(枯骨再肉 塞荄復春 有石巍然 大江之頭 萬載三韓 皇帝之休).”
 
  끝까지 영혼을 지킨 관료 이경석은 이 글을 쓰면서 넋이 나가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경석이 큰형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글 쓰는 법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 날 칙사가 가져간 이경석의 글은 청 황실 교정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년 뒤 삼전도에 준비해 둔 비석에 글을 새기는 작업이 시작됐다.
 
  글을 새기려면 글씨를 쓸 사람과 그 글씨를 새겨 넣을 사람이 필요하다. 1639년 6월 25일 인조가 2년 전 벌어진 책임 회피 소동을 떠올리며 이렇게 명했다.
 
  “또 서로 미루고 핑계를 달면 안 된다. 비석 본문 글씨는 형조참판 오준(吳竣·1587~1666년)이 쓰고, 비석의 전문(篆文·전서체) 제목은 신익성(申翊聖·1588~1644년)으로 하여금 쓰게 하라.”(《인조실록》 1639년 6월 25일)
 
  신익성은 대표적인 척화파(斥和派)였다. 척화파 가운데 선두주자요, 진영을 이끄는 지도자였다. 훗날 심양(瀋陽)으로 끌려가 억류 생활을 하기도 했다. 전서에 능하다는 이유로 인조는 그런 교조주의 명필가를 선정한 것이다.
 
  신익성이 다음 날 보고서를 올린다. 이러했다.
 
  “신은 오른팔이 마비되어 음식을 먹을 때 수저를 못 든 지가 이미 반년이 되었나이다. 또 다리에는 예전에 앓았던 종기가 막 터지기 시작해 종기가 박만 하게 커졌나이다. 게다가 학질까지 걸려 날마다 오한과 발열을 반복하나이다.”(《승정원일기》 1639년 6월 26일)
 
  병도 그런 종합병원이 없었다. 글씨 쓸 사람이 손이 마비됐고 다리는 종기투성이고 학질까지 앓고 있으니! 보고서 말미에 신익성은 본심을 이렇게 드러내놓았다.
 
  “임금이 욕을 당한 날에 죽지 못하여 항상 통한을 품고 있나이다.”
 
 
  비문 글씨 쓴 여이징과 오준
 
  인조의 걱정이 맞아떨어졌다. 결국 전문은 예조참판 여이징(呂爾徵·1588~1656년)이 썼다. 여이징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란한 아내 한씨가 강화해협을 건넌 청군 앞에서 자결한 사내였다. 청이라면 이를 갈고도 남을 사내였다. 하지만 관료 여이징은 하명대로 ‘대청황제 공덕비’라고 전서를 썼으니 그 또한 이경석 못지 않게 강건한 영혼을 가진 관료라 하겠다.
 
  그해 11월 17일 5개월 동안 돌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던 형조참판 오준이 느닷없이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는 “내가 글씨를 맡았다는 사실을 어제 저녁에 알았다”로 시작했다. 몰랐다는 것이다. 내용은 구차했다.
 
  “서예로 이름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오니 미천한 신의 마음을 굽어 살피시어… 운운.”(《승정원일기》 1639년 11월 17일)
 

  숱하게 당해 본 일이었다. 인조가 분을 삭이며 이리 답했다.
 
  “잘 알겠으니 사양은 하지 말라.”
 
  그리하여 11월 20일 저녁 개시된 비석 각자(刻字) 작업은 석공 24명이 24시간 투입돼 11월 24일 완료됐고 12월 7일 붉은 안료를 입혀 비석이 완공됐다. 청나라 사신단은 그 탁본(拓本)을 챙겨 본국으로 떠났다.(《승정원일기》 1639년 11월 29일, 12월 5일, 12월 9일) 책임과 무책임으로 얼룩진 항복 기념비 작업일지였다.
 
  그리고 이경석의 영혼은 탈탈 털리기 시작했다.
 
 
  “장수하고 또 건강하여(壽而康)”
 
이경석 궤장 및 사궤장 연회도 화첩(경기도박물관). 이경석은 대청 외교를 슬기롭게 수행해 현종으로부터 문신 최고 영예인 궤장(의자와 지팡이)을 하사받았다. 송시열은 그 축하문에 비난의 암호문을 적어 넣었다.

  이경석은 송시열(宋時烈·1607~ 1689년)과 친했다. 같은 서인(西人) 영수(領袖)로서, 이경석이 열두 살 연상에 출사(出仕)도 먼저였다. 송시열의 자질을 알아본 이경석은 틈이 날 때마다 송시열을 왕에게 추천해 중용을 권했다.(《인조실록》 1645년 10월 9일)
 
  1650년 효종(孝宗)의 북벌(北伐) 계획이 청나라에 알려졌다. 청 황실이 왕까지 언급하며 진상 조사를 요구하자 영의정이던 이경석은 자기가 벌을 받겠다고 자청해 백마산성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기도 했다.(박세당, ‘신도비명’)
 
  1668년 11월 이경석의 나이가 73세가 됐다. 청나라와 외교관계를 무리없이 잘 수습한 노대신에게 나라에서는 궤장연(几杖宴)을 베풀었다. 궤는 팔걸이가 있는 의자고 장은 지팡이다. 왕이 내리는 궤장은 문관에게 최고 명예다. 이경석이 친한 후배인 송시열에게 축문을 요청했다. 송시열은 “궤장까지 주는 것은 과하지 않은가” 하고 말꼬리를 달면서도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생사를 가리지 않고 꿋꿋하게 소신을 수행해 나라가 무사하게 되었다. 하늘의 도움을 받아 장수하고 또 건강하여(壽而康·수이강) 우리 성상에게 융숭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송시열, 《송자대전》 137권, ‘영부사 이공 궤장연서(領府事李公几杖宴序)’]
 
  자기의 출사를 격려해 주고 외교관계를 원만히 해결해 준 선배 노관료를 축복하는 글이었다.
 
 
  어떤 졸렬한 영혼
 
 
송시열
1669년 3월 현종(顯宗)이 온양온천으로 행차했다. 무슨 연유인지 한 달 넘는 기간 그 지역 관리들이 단 한 명도 온천에 나타나지 않았다. 4월 3일 영부사(영돈녕부사) 이경석이 왕에게 보고서를 올렸는데, 이런 문장이 들어 있었다.
 
  “행궁(行宮)에 달려가 문안하는 신하가 하나도 없으니 기강과 의리가 무너졌다.”(《현종실록》 1669년 4월 3일)
 
  인근 회덕 사람 송시열이 보고서에 나온 ‘신하’를 자기라고 착각하고 뜨끔했다. 자기도 행궁에 가지 않았던 것이다. 송시열이 즉각 왕에게 상소했다.
 
  “병 때문에 행궁으로 가는 길을 지체했다가 출발하는데, 신을 비난하는 문서를 보고 깜짝 놀랐나이다.”
 
  그러니 이경석이 보낸 보고서는 사실과 다르다며 억울하다고 했다. 송시열의 상소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금(金)나라에 항복문서를 바친 송나라 역적 손적(孫覿)처럼 장수하고 건강한(壽而康) 사람이 신을 비난했나이다.”(《현종실록》 1669년 4월 14일)
 
  5개월 전 이경석 궤장연 축하문 속 표현, 그 ‘장수하고 건강한(壽而康) 사람’이 다름 아닌 역적이라는 뜻이 아닌가. 송시열은 비겁한 암호를 축하문에 심어 놓았고, 자기가 살기 위해 그 암호를 스스로 공개해 버렸다. 연유를 묻는 제자에게 송시열이 이렇게 답했다.
 
  “그 사람이 워낙 아첨을 잘하는 자로, 오랑캐 세력을 끼고 평생 몸을 보전하니 개도 그가 남긴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則狗不食其餘).”(《송자대전》 70, ‘송도원에게 답함’)
 
  송시열은 이경석이 백마산성에 구금됐다가 생환한 사실을 두고 “그때에 죽지 않았던 것도 삼전도비 글을 잘 썼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라고까지 했다.
 
  영혼의 유무는 이렇게 사소한 글에서도 드러난다. 어이없는 비난에 이경석은 “송시열은 내 보고서 명단에 없으니 그가 오해했다”고 짤막하게 답했다.
 
 
  영혼들의 흔적
 
이경석 묘 앞에 있는 신도비. 왼쪽에 있는 원 신도비는 세월 풍파 속에 글씨가 사라졌다. 혹자는 이를 이경석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고의로 훼손했다고 주장한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50-7.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안양판교로 도로 건너 산속에 무덤이 여럿 있다. 조선시대 무덤이다. 그 가운데 ‘이경석 선생 묘’ 표지판을 따라가면 왼편에 작은 공터가 나온다. 그 옆 언덕에 비석이 보인다. 이경석 신도비(神道碑)다. 언덕에는 신도비가 두 개 있다. 하나는 1754년(영조 30년)에 세운 원래 신도비고 하나는 1979년에 다시 세운 비석이다. 옛 신도비는 새긴 글자가 다 깎여 나간 백비(白碑)다. 돌이 풍파에 약한 탓도 있겠고, 육안으로는 의도적으로 쪼아 낸 흔적도 드문드문 보인다. 후손들은 텅 빈 옛 비석을 버리지 않고 새 비석과 함께 세워 놓았다.
 
 
이경석 묘 앞에 있는 신도비 비문 부분. 이경석을 헐뜯은 송시열을 올빼미에 비유했다. 비문은 박세당이 썼다.
신도비문은 1703년 박세당(朴世堂·1629~1703년)이 썼다.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고 송시열이 이끄는 노론에 맞서 소론 영수가 된 인물이다.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거짓됨과 방자함과 허망함으로 세상에 알려진 자가 있다. 올빼미와 봉황은 애당초 다른 새인데 (올빼미는) 화를 내고 까불어 댄다. 선하지 않은 자가 미워한들 군자가 콧방귀를 뀌랴(姿僞肆誕 世有聞人 梟鳳殊性 載怒載嗔 不善者惡 君子何病).”
 
  여기서 봉황은 이경석을 일컫고 올빼미는 송시열을 가리킨다.
 
  영혼을 간직했던 관료는 당대에 수습하지 못할 욕을 참고 견디다 죽었다. 언제 침몰할지 모를 조선을 폭풍에서 건져 내고 수모를 겪었다. 항복 기념문 작성을 거부했던 명문장가 조희일은 1638년 죽었다. 신도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공은 삼전도비문 지으라는 일을 사양하며 면하게 해 달라고 했다. 그가 지키려 한 명분이 얼마나 확고했는지 새삼 알 수 있다(其辭免某文字 又見其所守之確 可以有辭矣).”[《죽음선생집부록(竹陰先生集附錄)》 ‘신도비명 병서’)
 
  국가 보위가 소명이어야 할 고위 관료가 저지른 직무유기를 ‘명분을 지킨 행위’로 둔갑시켜 놓았다. 이 비문을 지은 사람은 그 치욕의 날 군소리 없이 산성 문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갔던 젊은 관리 송시열이다.
 
  이경석, 장유, 이경전, 조희일, 그리고 희한한 송시열. 대한민국 전·현직 고위 관료들은 이 다섯 부류 어디에 속할까 자문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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