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둥이 기자의 짧은 회고록 ⑦ 두 도시 이야기 - 金泳三의 부산, 金大中의 광주

  •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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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공수부대를 투입, 진압에 성공한 것이 광주의 비극을 불렀다!

국군을 신성한 존재로 믿던 시민들은 난생 처음으로 개머리판과 몽둥이로 사람을 개 패듯 하는 공수부대를 만났다.
정치군인의 등장이었다!
1979년 부마사태 당시 부산 광복동 시위. 상인들의 호응이 컸다. 사진=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 두 사람이 박정희(朴正熙)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할 수 있었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모든 정치는 지역에서 출발한다”는 말대로 두 사람은 부산과 광주(光州)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부마(釜馬)사태와 광주민주화운동은 두 사람의 두 도시에 대한 영향력과 관련 있다. 부마사태는 박정희 정권 붕괴로 직진했고, 광주사태는 전두환·노태우를 감옥으로 보냈다.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두 사건을 취재하여 여러 권의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폭풍 속으로 들어가 역사를 기록하면서 역사를 만들었고 나도 변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운명적 사건이 터지기 10여 일 전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미국 언론과 사대주의적 인터뷰를 했다’고 하여 국회에서 제명되었다. 부산시민들의 불만이 높아 가고 있었지만 유신(維新)체제의 장악력 또한 강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초 국민투표로 유신체제에 대한 재신임을 얻었고, 그해 4월 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민주화는 사치스러운 이야기’라는 안보 분위기가 깔렸다. 박 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 일체의 반대 목소리를 잠재웠다. 그 뒤 4년간 정권은 안정되었고 민주화운동은 위축되었으며 중화학공업 건설은 본궤도에 올랐다.
 
  그런데 위기는 중동(中東)에서 왔다.
 
 
  호메이니 혁명
 
  1979년이 열렸을 때 이란 혁명이 터졌다. 호메이니에 의하여 팔레비 왕이 쫓겨나고 중동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기름값이 폭등하였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 직후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 감산(減産)과 수출 통제로 제1차 석유파동을 일으켜 기름값이 6개월 사이에 네 배로 뛰었을 때 박정희 정부는 기민하게 대응하였다. 막 시작한 중화학공업 건설을 그대로 밀어붙이면서 돈이 몰리는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 외화를 벌기 시작하였다.
 
  1972~79년의 유신체제와 겹치는 우람한 역사의 전진, 즉 새마을운동, 의료보험 시작, 중동 진출, 중화학공업 건설, 4대강(江) 10개 댐 건설, 아파트 붐, 마이카 시대의 개막, 중산층의 성장은 그러나 정치적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가능하였다.
 
  경제적 성공과 정치적 불만의 균형에 변화의 제1차 충격을 준 것이 1979년의 제2차 석유파동이었다. 물가 상승, 실업률 증가,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한 상인들의 불만, 여기에 장기집권에 대한 싫증에 불을 댕긴 것은 김영삼의 도전이었다.
 
 
  한국 현대사 30년을 결정한 사건
 
  그해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강경 투쟁 노선의 김영삼 의원이 박정희 정권의 공작을 돌파하고 김대중의 도움도 받아 온건 노선의 이철승(李哲承)을 누르고 총재에 당선되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나는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로 김영삼의 지역구를 관할하는 서부경찰서를 출입하고 있었는데,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된 다음 날 정보과 형사가 “간밤에 막걸리와 소주가 많이 팔렸다”고 귀띔했다.
 
  김영삼의 저돌적인 대여(對與) 투쟁에 4년 동안 잠자던 민주화운동 세력이 합세하는 가운데, 박정희와 미국 카터 대통령의 불화(不和)는 계속된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카터는 1976년 미국 대선에서 박정희가 인권을 탄압한다면서 이에 대한 응징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 당선 직후부터 한미 관계가 나빠진다. 카터의 인권 외교는 박정희의 경멸과 반발을 샀고 철군(撤軍) 계획은 미국 군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79년 6월 카터의 방한(訪韓)은 한미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계기가 되지 못하였다.
 
  미국이 박정희를 좋게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야당과 민주화 세력은 고무되었고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의 변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직한 성격의 정치적 무능자인 김재규를 정치공작의 사령탑에 앉히고 과도한 임무를 안겨 스트레스를 준 것이 박정희의 실수였고 이것이 10·26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물가 폭등, 정치 동요, 외교 마찰,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김영삼 제명, 그리고 부산대 시위였다. 부마사태에서 10·26까지 11일간은 한국 현대사의 30년을 결정한 함성과 총성의 시간대였다. 부산 시위 현장을 관찰하고 돌아간 김재규가 8일 뒤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심수봉이 ‘사랑해 당신을’을 부를 때 ‘야수의 심장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을 때 18년간의 박정희 시대가 끝나고, 12·12 변란을 거쳐 12년간의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부마사태는 ‘지도 세력이 없는 자발적 민중 봉기’로 평가되는데, 그렇다고 산불처럼 저절로 일어났다고 보면 오해다. 이 사태 직후 그 열기(熱氣)가 남아 있을 때 누구보다도 빨리 깊게 들여다본 나의 소감은 오히려 ‘필연적 우연’ 쪽이다. 나는 이란 혁명이나 한미 관계의 악화와 같은 국제환경의 변화, 물가 폭등, 부가가치세에 대한 저항, 김영삼의 거센 투쟁, 민주화 투쟁 세력의 저항, 이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강경 대응, 그리고 부산의 특수성(행동적 시민의식과 조직된 운동권과 선행사건들), 이런 여러 조건들이 한 개인(정광민)과 한 조직(부산대 경제학과 2학년)을 매개로 폭발, 역사적 대사건으로 변하는 과정을 추적, 여러 건의 기사와 여러 권의 책으로 남겼다.
 
  이 사건들의 전개를 밀어붙인 동력은 간단했다. 부산 사람들의 정의감과 분노의 폭발이었다. 내가 ‘욱하는 성격’이라고 이름 붙인 이 현상은 1985년 2·12 총선에선 ‘선명 야당’ 돌풍을 일으켰다. 1987년 6월 18일의 부산 대시위에선 전두환 정권이 비상계엄령 선포를 준비하게 만들었다가 6·29선언으로 대선회하도록 하는 힘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부산이 움직이면 역사가 움직인다’는 말은 맞다.
 
 
  뛰어든 불덩어리
 
  내가 입체적 취재로 재구성한 부마사태의 발화(發火) 순간은 다음과 같다.
 
  1979년 화창한 가을 날씨, 10월 16일 오전 9시 10분 정광민은 부산대 상대(商大) 앞 벤치에 앉았다. 준석이와 만날 시간이었다. 마침 벤치 앞으로 동급생인 박병근과 박희곤이 지나가고 있었다. 정광민은 그들을 불러 세워 “조금 있다가 교실로 뛰어들 테니 분위기를 좀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준석이는 2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정광민은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인문사회관 206호 강의실로 뛰어 올라갔다. 1교시 수업이 끝나고 2교시를 기다리고 있던 경영학과 2학년생들 가운데 그는 낯익은 얼굴을 찾아냈다. 1학년 때 친하게 지냈던 엄태언에게 선언문 마흔 장쯤을 슬며시 건네주면서 빨리 나눠 주라고 눈짓을 했다. 복도에서 정광민은 또 무역학과 2학년 이성식을 만나 선언문 석 장을 주었다.
 
  “무역과를 부탁한다.”
 
  “한번 해볼게.”
 
  306호 강의실에선 정광민이 속한 경제학과 2학년생 마흔 명쯤이 1교시 화폐금융론 강의가 일찍 끝나 앉은 채 중간고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광민은 뒷문을 통해 뛰어 들어왔다. 희곤과 병근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광민이 들어오는 것과 때맞춰 “우~”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다른 학생들도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다. 정광민은 가방에서 선언문을 꺼내 책상들을 돌면서 나눠 주었다.
 

  그는 이제 흥분 상태에 빠졌다. 나중에 자신이 교실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 내지 못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성모는 광민이 강단으로 뛰어올라 두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치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여러분! 때가 왔습니다. 다른 곳과 연락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뛰어 나갑시다!”
 
  “나가자!”
 
  마흔 명의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 나갔다. 주저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순간적 동조가 이뤄졌는가? 그 비밀을 밝힌 것이 나의 부마사태 기록이다. 경제학과 2학년들의 즉시 가담이 없었더라면 부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역사를 바꾸는 대사건의 폭발은 필연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다.
 
 
  “우리의 소원은 자유”
 
  나는 1987년에 펴낸 《有故!》에서 이들을 집단행동으로 몰고 간 힘을 시대정신과 분노의 축적으로 보았다.
 
  〈1970년대를 살아온 젊은이들의 가슴마다에 쌓여 있었던 분노와 증오심, 1979년에 터져 자빠진 독재권력의 갖가지 말기 증상, 그것이 조성한 발화 환경, 하루 전 이진걸의 실패가 가져온 안타까움, 이런 것들이 뒤엉켜 인화(引火)물질을 이루었고, 그 한복판으로 정광민이란 불덩이가 뛰어든 것이었다. 분노의 응어리는 폭발했다.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선에 광민은 바늘을 찌른 셈이었다. 그 에너지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사태는 자연법칙에 따라 물리적 운동으로 전개될 것이었다.〉
 
  2학년생들은 누군가가 불을 댕겨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경제학과뿐 아니라 상대가, 공대가, 부산대학교 전체가 그런 분위기였다. 경제학과 2학년생들은 경영학과 학생들이 있는 206호실을 지나치며 합류를 호소했다. 경영학과 학생들도 엄태언으로부터 선언문을 받아 책상 위에 놓고 지휘자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뛰쳐나왔다. 무역학과, 회계학과 학생들도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 바깥으로 나왔다가 한 덩어리가 됐다. 306호, 206호 강의실이 있는 인문사회관 건물 앞에서는 100명쯤의 사람 덩어리가 뭉쳐졌다.
 
  광민은 선언문 뒷면에 검은 사인펜으로 ‘자유’라고 휘갈겨 썼다. 속이 텅 빈 가방은 하창우에게 맡기고 이 ‘자유’를 두 손으로 높이 쳐들고 앞장을 섰다. 여성모의 눈에 광민이 고고를 추는 것 같았다. 흥에 겨워 어깨까지 흔들어 가면서 광민은 빠른 걸음으로 학생들을 상대 앞까지 이끌어 갔다. 이곳에서 노래가 터져 나왔다. 부산 시위의 주제가가 된 ‘우리의 소원은 자유’를 목이 터져라 불러 댔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에서 ‘통일’을 ‘자유’로 바꿔 부른 것이다.
 
  상대에서 미라보 다리를 지나 그들은 도서관으로 나갔다. 앞장선 광민을 하창우와 안병민은 호위하듯 양쪽에서 끼고 수시로 도움말을 해 주었다. 앞뜰의 잔디와 벤치에도 200명쯤이 흩어져 있었다. 데모대는 계단을 올라가 도서관 잔디밭에 들어갔다.
 
  “모두 일어나자!”
 
  간간이 이런 고함 소리가 데모대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선구자’, 교가, 애국가를 계속 불렀다.
 
  박기채 총장, 이중걸 학생처장, 신태곤 상대 학장, 오종석 상대 교무과장이 학생들을 제지하려고 달려온 것은 이때였다. 총장은 정광민의 어깨를 툭툭 치며 타이르듯 “이제 그만 내려가라”고 했다. 오 교수는 광민의 허리띠를 붙들고 뒤로 끌어냈다. 큰 나무 밑으로 데리고 간 오 교수는 “이것까지는 내가 책임진다. 학장실로 가자.”
 
  광민은 말을 바로 받았다.
 
  “이젠 어쩔 수 없습니다. 2, 3년 살 각오를 하겠습니다. 끝까지 하겠습니다.”
 
 
  경찰의 진압이 휘발유를 붓다
 
1979년 부마사태 당시 동래경찰서 앞에서 벌어진 부산대학생들의 데모. 사진=조선DB

  스무 명의 잠복 형사들은 사태가 너무 빠르게 전개돼 가는 바람에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르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학생 데모는 초동 단계에서 깬다는 것이 원칙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깨고 들어갈 만한 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몇몇 형사들은 학생들의 팔을 잡아당기며 “학생! 이러면 안 돼”라고 말려 보았으나 막무가내였다. 서면 근방의 소매치기 소탕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30세의 이성희 형사는 김성수 형사의 팔을 툭 치며 “이제 깨어 버리자”고 속삭였다.
 
  그때 정광민은 준석으로부터 선언문을 한 장 받아들고 도서관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열람실을 돌아다니며 아직도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우리 일어납시다!”라고 소리쳤다. 광민이 다시 잔디밭으로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두 형사는 학생들을 헤집고 광민을 향해 뛰쳐 들어갔다.
 
  목표 지점에 도착하여 이 형사가 광민의 멱살을 잡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은 학생들에게 둘러싸였다. 김창수는 이 형사의 뒷덜미를 붙들고 늘어졌다. 누군가가 면도칼이 아니면 만년필촉 같은 날카로운 쇠붙이로 이 형사의 손바닥을 그었다. 학생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욕설을 퍼부으며 두 형사를 발로 차고 밟았다. 잔디밭 가장자리로 몰린 두 형사는 그만 높이 3m의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하창우는 두 형사와 뒤엉켜 같이 굴렀다. 이 바람에 엉덩이를 다쳤다.
 
  두 형사가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자 한 이 체포 시도는 노래만 부르고 있던 학생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꺼져 가던 열기에 휘발유를 부은 꼴이 됐다. 두 형사의 행동으로 자극 받은 구경꾼 학생들도 한꺼번에 데모 대열에 끼어들었다. 도서관 안에서도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형사의 기습은 시위 대열을 300명에서 1000명으로 불어나게 했다. 저절로 다섯 줄의 어깨동무 대열이 이뤄졌다. 대열은 계단을 내려가 상대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꿈틀꿈틀하는 용의 몸뚱아리처럼 대열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뒤늦게 달려온 학생들이 잇따라 이 흐름에 말려들어 갔다. 여학생들도 끼어들었다. 데모엔 소극적이게 마련인 복학생과 4학년 학생, 대학원생들까지 합류했다.
 
 
  “유신 철폐!”
 
부마사태 당시 광복동에 등장한 최루가스차. 사진=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데모 대열은 이젠 2000명쯤으로 불었다.
 
  “유신 철폐!”
 
  처음으로 구호가 터져 나왔다. 시위 대열은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군사훈련을 받고 있던 ROTC 학생들이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데모 대열은 신정문으로 향해 나갔다.
 
  오전 11시 15분, 동래경찰서장은 진압 부대의 캠퍼스 진입을 명령했다. ‘블랙 마리아’라고 불리는 검은 지프차가 최루가스를 뿌리면서 앞장섰다. 경찰은 최루탄도 던졌다. 학생들은 돌을 던졌다. 학생들은 잠시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담을 넘고 사잇문을 지나 바깥세상으로 나갔다. “부산역으로 모이자”는 출처 불명의 지시에 따라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하는 이들도 있었고 출동한 다른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때까지도 어느 한 사람 지도자 역할을 하지 않았다. 10월 16~18일의 부마사태는 철저하게 리더 없는 자발적 봉기였다. 정광민이란 점화자는 있지만, 사태 중에 중심적인 지도부가 생긴 적이 없다. 그만큼 순수한 분노의 폭발이었다고 할까.
 
  부산사태를 주도한 것은 작용과 반작용의 역사(役事)였다. 경찰은 부산대학생들이 부산역에 모인다는 소문을 믿고 버스를 서지 못 하게 했다. 학생들을 광복동으로 몰아넣은 셈이 되었다. 광주의 금남로처럼 부산사태의 무대가 된 광복동이 시위의 패턴을 만들었다. 광복동에 몰린 상점들과 골목이 시위대를 도왔다. 박정희의 장기 집권, 김영삼 핍박, 그리고 부가가치세에 대한 상인들의 반감이 학생들에 대한 응원으로 나타났고 골목은 게릴라식 시위를 수월하게 했다. 10월 18일 밤 부산의 시위 현장을 시찰한 김재규가 “이건 민란(民亂)이다”라고 판단한 것은 시민과 학생들의 연합 구도를 파악한 때문이다. 박정희 집권 18년 역사에서 그런 시위는 부마사태가 유일하고 마지막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핵심에는 경상도 출신 군인들이 많았지만 경상도 사람들이 들고일어나고 경상도 사람(김재규)이 총을 쏴 유신체제를 끝낸 점도 특이하다. 지역주의를 뛰어넘은 정의감과 사명감의 발로일 것이다.
 
  박정희가 경찰이 진압할 수 있는 규모의 시위임에도 비상계엄령으로 과잉 대응한 것도 급소를 찔린 데 대한 본능적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는 16년 전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라고 했던 사람이다. 이런 그를 중학생 때부터 지지했던 나이기도 했다. 대학생으로선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시위를 반대하였던 나였지만 9년 차 사회부 기자로 시위 현장을 뛰고 있던 순간의 나는 달라져 있었다.
 
 
  기다리는 군중
 
  나는 부산 시위 둘째 날인 10월 17일 밤 8시 다시 광복동으로 나갔다. 거리는 젊은이들로 메워져 있었다. 책가방을 낀 교련복 차림의 대학생들, 더벅머리 재수생들, 근처 상점이나 술집의 종업원으로 보이는 청년들, 멋쩍은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다 보는 대학 교수들, 데모 주모자를 잡겠다는 사복 형사들이 뒤섞여 있었다. 군중의 숫자에 견주어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초조하고 안타까운 표정의 사람들.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은 점포 주인들에겐 문을 닫도록, 시민들에겐 집으로 돌아가도록 마이크로 권하고 돌아다녔다. 자리를 뜨는 시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뛰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앞장을 서고 나설 만한 용기를 그들은 갖지 못했다. 불을 댕길 사람만 나타나면 스스로 불쏘시개가 되겠다는 마음들이었다.
 
  군중은 이런 팽팽한 긴장감을 깨뜨리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보였다. 로얄호텔에서 모임을 끝낸 사람들이 몰려나오자 아무런 까닭 없이 그쪽으로 밀려갔다. 사람이 사람을 모았다. 어떤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그 사람들을 구경하려고 또 사람들이 모였다. 무슨 일이 터지기를 기다리는 청년들은 사람들이 많은 곳만 따라다니며 불을 붙여 줄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밤 9시 30분부터 군중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휘파람 소리, 야유인지 환호성인지 모를 부르짖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면서 군중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50명쯤의 청년들이 길 복판으로 나섰다. 어깨동무를 하더니 시청을 향해 나아갔다. 어느새 군중이 그들 뒤를 구름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손뼉을 치며 구호를 외치면서 기세를 돋구었다. 100미터 앞에는 경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아수라장
 
  한 30m 접근했을 때였다. 경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퍼포그를 뿌리면서 지프차가 어슬렁어슬렁 굴러오는 것이었다. 그 뒤로 경찰이 따라왔다. 그러면서 사과탄을 던졌다. 데모대의 선두는 흰 연기와 폭발음에 휩싸였다. 시위대는 무너져 내렸다. 선두부터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골목으로 달아났다. 무엇에 차여 넘어졌다. 뒤따라 달아나던 사람들이 잇따라 내 위를 덮치며 넘어졌다.
 
  나는 부리나케 일어나 근처 여관으로 뛰어들었다. 뒤따라 서너 명의 시민들이 숨어들자 여관 주인은 현관문을 잠그고 안으로 사라졌다. 이때였다. 페퍼포그 분사기를 짊어진 두 경찰관이 현관문을 박차고 뛰어들며 현관과 복도에서 서성대는 손님들의 코앞에 바로 가스를 뿜어 댔다. 그들이 파리약을 뿌리는 사람들 같다고 생각했다.
 
  닫힌 여관 속은 안개 같은 가스에 휩싸였다. 기침, 눈물, 아우성, 잠옷 바람으로, 더러운 속옷 바람으로 투숙객들이 콜록대면서 뛰쳐나왔다. 그들은 변소 옆에 붙은 세면장으로 달려갔다. 우선 눈을 물로 씻어 내야 통증이 가실 것 같았다. 세면장은 만원이었다. 나는 하얀 가스를 피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을 꼭 닫았으나 가스는 문틈 사이로 스며들어 왔다.
 
  나는 불길 사이를 지나는 기분으로 후다닥 여관 밖으로 달아났다. 여관 바깥에선 흩어졌던 청년들이 군데군데 다시 모이고 있었다. 부산남교회 앞에는 대학생, 재수생, 접객업소 종업원들이 뒤섞인 50명쯤의 군중이 한창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 복수를 하자.”
 
  “안 된다. 폭력을 써선 안 된다.”
 
  “폭력엔 폭력으로 맞서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결국 강경론이 이겼다. 그들은 모두 빈 맥주병을 머리 위로 휘두르면서 골목을 지나 큰길 쪽 경찰 진압 부대를 향해 나아갔다.
 
 
  끝내 셔터를 못 누른 사진기자
 
  부마사태 시위 현장의 사진이 적은 것은 시위대의 적대적 태도에 겁을 먹은 기자들이 셔터를 누를 찬스를 놓쳤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박문두 사진기자는 시위 둘째 날엔 시위대 속에서 같이 다녔지만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밤 12시 무렵 시위대 안에서 “서부서로 가자”는 소리가 나왔다. 1000명쯤이나 되는 데모대는 서부경찰서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박 기자는 “됐다!”고 무릎을 쳤다. 그는 데모대를 앞질러 서부서 앞에 먼저 도착했다. 취재차를 달아나기 쉽게 뒤로 돌려놓고 시동을 걸어 놓은 채 그는 데모대를 기다렸다. 이윽고 너비 12m쯤 되는 비탈길을 꽉 메운 시위대가 저 아래 모퉁이를 돌아 우르르 몰려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앞장선 젊은이들은 각목과 유리병을 휘두르고 있었다. 박 기자는 차에서 내려 차를 방탄벽처럼 싸고돌며 기회를 기다렸다. 카메라 렌즈에 눈을 갖다 댄 그는 데모대의 일부가 서구청에 돌을 던지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박 기자는 적어도 시위대가 10m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시위대는 질서도 없이 어깨동무도 하지 않고 마구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길 양쪽 가장자리에 붙은 사람들은 몸을 가릴 곳이 있다는 방어 심리에서 길 가운데 대열보다도 앞질러 뛰어 올라왔다. 박 기자는 오목렌즈처럼 굽어진 선두 대열의 속에 들게 됐다. 박 기자는 셔터를 눌러 사진이 나올 수 있는 최근접 거리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하나, 둘, 셋…. 박 기자는 셔터를 누르려다가 말고 후다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렌즈를 꽉 메우며 들이닥친 것은 군중이었다. 박 기자는 데모대가 이렇게 빨리 접근할 줄은 미처 계산하지 못했던 것이다. 데모대가 확- 몰려오자 박 기자의 행동은 머리의 명령을 받지 않고 반사신경의 지시를 받았다. 그는 시동 걸린 차 속으로 뛰어들었으나 차가 비탈길을 느린 속도로 올라가자 겁이 덜컥 나 차에서 뛰어내려 서부경찰서로 달려가 몸을 피했다.
 
 
  구경꾼이 된 기자들
 
  뒤돌아보니 30명쯤의 경찰관들이 방패를 앞세우고 고함을 지르며 데모대를 향해 정면으로 쳐들어가고 있었다. 숫자에서 절대 불리한 경찰은 ‘공격이 가장 좋은 방어’라는 교훈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경찰은 쳐들어가면서 사과탄을 있는 대로 다 던졌다. 그리곤 곤봉으로 닥치는 대로 데모대를 두들겨 팼다. 폭발음과 고함 소리와 비명, 자욱한 최루탄 연기, 그리고 조용해졌다. 데모대는 오던 길로 물러났다.
 
  박 기자는 경찰 상황실로 올라갔다. 경찰관들이 뒤따라 올라오더니 “사과탄이 동났다”고 사색(死色)이 되어 발을 굴렀다. 상황실에선 산하 파출소에 사과탄을 있는 대로 거두어 서부서로 가져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박 기자는 상황실에서 비로소 비상계엄령이 내려졌다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큰 사건이 돼 버렸구나. 그런데 나는 사진 한 장 못 찍었다. 이게 뭐야. 사진기자로서 현장을 보고 셔터를 못 누른 것은 말도 안 된다. 나는 사진기자의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가. 나이 탓인가. 아니다, 용기가 없는 탓이다. 그때 셔터를 누르고 데모대에 맞아 죽었어야 했다. 왜 그렇게 못 했나. 다섯 해 전 현대조선 폭동사건 때는 경찰관들의 곤봉 세례 속에서도 사진을 찍고 카메라를 부둥켜안은 채 쓰러져 짓밟히지 않았던가….’
 
  사실 박 기자와 다른 대부분의 기자들은 부산 데모를 취재하라는 회사의 지시를 받지 않고 있었다. 긴급조치 아래에서는 이런 기사나 사진은 실을 수 없다는 자기검열, 그것은 취재를 포기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많은 기자들이 그날 현장에 나왔으나 기록자로서가 아니라 구경꾼으로 행동했다.
 
 
  “기자면 다냐”
 
부마사태 당시 부산교대 앞 시위. 사진=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국제신문》 사진부 김탁돈 기자는 17일 밤 카메라를 가방 속에 감추고 데모 현장으로 나갔다. 밤 10시에 그는 광복동 동양관광호텔 앞에서 데모대가 경찰과 충돌하는 것을 목격했다. 경찰관 세 명이 한 시민을 붙들어 몽둥이로 머리·허리·어깨를 사정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김 기자는 경찰 버스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버스 뒤에 숨어 이 폭행 장면에 렌즈를 조준하는 순간 그는 뒤로부터 습격을 당했다. 전투경찰관 세 명이 건장한 김 기자의 허리를 끌고가더니 발길질을 했다.
 
  “《국제신문》 사진부 기잡니다.”
 
  “기자면 다냐.”
 
  “죽여 버려!”
 
  몽둥이·주먹·발길질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는 카메라 가방을 안은 채 쪼그리고 앉았다. 한 경찰관이 가방과 카메라를 빼앗아 갔다. 플래시와 필름은 빼앗기지 않았다. 김 기자는 재빨리 플래시를 윗옷 호주머니에, 필름은 오른발 양말 속에 감추었다. 그는 곧 ‘닭장차’에 옮겨 태워졌다. 여기서도 한 차례 타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엔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스물여덟 명의 시민들이 타고 있었다. 한 부산대 학생의 가방에선 돌멩이가 수십 개 쏟아져 나왔다. 전경들은 이 학생이 뻗을 때까지 갈겼다.
 
  이 닭장차는 남포파출소로 가서 그곳에 있던 전경 서른 명을 또 태웠다. 붙들린 동아대 학생 다섯 명도 탔다. 전경들은 머리를 드는 시민들을 겨냥하여 몽둥이질을 또 해 댔다. 한 동아대 학생은 발길질을 입으로 받았다. 앞니 세 개가 부러졌다.
 
 
  계속되는 몽둥이 세례
 
  닭장차는 서대신동 쪽으로 달렸다. 경찰관들은 김 기자를 비롯한 연행자들에게 머리를 두 다리 사이에 박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이 차가 데모대를 잡아가는 줄 눈치채이면 돌세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파출소 근처에는 지친 기동대 경찰관들이 퍼져 앉아 쉬고 있었다. 그들은 데모 피의자들이 내리는 것을 보자 파출소 앞에 양쪽으로 늘어섰다.
 
  이 인간 터널 속을 지나가야 했다. 주먹·발길·몽둥이 세례. 김 기자는 여기서 신문기자라고 해 봤자 소용이 없겠다고 판단하여 입을 꽉 다물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길이 30m 가량의 터널을 빠져나갔다. 가슴을 걷어차여 한 번 넘어졌으나 벌떡 일어나 걸었다. 대학생들은 더 많이 얻어맞았다. 파출소 안에서 경찰관은 몽둥이로 머리를 때려 가면서 이들을 헤아렸다.
 
  파출소에선 서부경찰서로 전화를 해 보더니 이들을 모두 서부서로 보내도록 지시했다. 다시 닭장차에 올라타게 된 그들은 두 번째로 인간 터널을 지나가야 했다.
 
  김 기자 일행은 서부서 즉결심판자 대기실에 수용됐다. 빽빽이 피의자들이 들어차 경찰관들은 어깨를 밟고 다니며 숫자를 헤아리고 있었다.
 
  젊은 전경이 보호실까지 따라 들어와 몽둥이질을 하고 그것을 한 시민이 피하려다가 유리창을 박살 냈다.
 
  “대원들은 나가라”고 서부서 직원이 언짢은 듯 소리쳤다. 김 기자가 가만히 보니 그 직원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신 경사요. 접니다.”
 
  “어? 어떻게 된 거요?”
 
  “정말 이럴 수 있소?”
 
  “어서 나오시오.”
 
  이렇게 해서 김 기자는 두 시간 만에 풀려났다. 그는 얻어맞은 분노보다도 사진을 놓친 것이 안타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사망자가 없었다
 
  17일 밤 중부서에서 조사를 받은 시위 피의자는 91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학생은 25명, 나머지 66명은 일반 시민들이었다. 학생들이 앞장을 서고 시민들이 뒤를 미는 연합전선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큰 생산기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거의 데모에 가담하지 않았다. 식품접객업소·양복점·가구점 종사자들과 구두닦이, 자유노동자, 운전사들이 더 많이 가담했다.
 
  이들의 가세로 10월 17일 밤의 데모가 거칠어졌으나 데모대는 민간인들의 점포나 기물을 부수지는 않았다. 혼란을 틈탄 도둑질도 없었다. 경찰관을 납치하지도 않았고 총칼과 같은 치명적인 흉기도 쓰지 않았다. 쉽게 만들 수 있는 화염병도 나타나지 않았다. 파출소를 점거해도 무기고엔 손대지 않았다.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때려 부술지언정 빼앗아 몰고 다니지는 않았다.
 
  계획적이고 범죄적인 난동은 없었다. 모두가 우발적이고 폭발적인 행동을 했을 뿐이었다. 시위대의 숫자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고 이를 막는 경찰관은 3000명이나 됐으며 사흘간이나 야간 데모가 벌어졌는데도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데모대의 자제력을 보여 준다.
 
  데모 현장이 16일의 광복동·남포동에서 17일 밤의 국제시장과 서구 및 동구로 옮겨짐에 따라 시민 호응의 양상도 조금은 바뀌었다. 영세 상인·노점상·행상들이 적극적으로 데모대를 응원한 데 비해 광복동·남포동의 부유한 상인들은 16일 밤의 열광적인 응원에서 돌아서서 조금 냉담해졌다.
 
 
  공수부대에 도전하다
 
부마사태 이후 부산시청 앞에 진주한 계엄군 탱크와 장갑차. 사진=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부산에서 3일간 시위 참여자나 막는 사람들이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사태가 급속도로 진행된 것은 식자(識者)들이 흔히 말하는 역사의 맥박과 숨결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연적인 것 같은 사건들은 한 줄로 꿰어져 뚜렷한 방향성을 지닌 큰 흐름을 갖게 되었다. 참여자들은 “그 순간에 저절로 그렇게 행동하게 되더라”고 얘기했다. 역사(歷史)에 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무의식을 통해 역사(役事)한 것이리라.
 
  사람들을 또 놀라게 한 것은 18일의 밤 데모였다.
 
  18일 0시를 기하여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펴지고 나서도 시위가 있었다. 정예 공수부대 군인들이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M-16 소총을 겨눈 채 시내 요소요소를 경비하고 있는 속에서 또다시 데모가 터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날은 궂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시민들은 두 시간이나 앞당겨진 통금 시간에 맞추어 귀가하는 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버스 및 택시 정류장이 몰려 있는 남포동 부근 인도에선 수천 명의 시민들이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 7시 55분 누군가가 “야!” 하는 고함을 지르며 찻길로 나섰다. 순식간에 300명쯤 되는 군중이 그를 따라나섰다.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그들은 “왓샤! 왓샤!” 남포파출소 쪽으로 행진했다. 그들은 파출소에다가 돌세례를 퍼부어 유리창을 박살 내고 시청 쪽으로 치달았다.
 
  시청 주변엔 200명쯤의 공수부대 병력이 배치돼 있었다. 그들은 파출소가 부서지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데모대와 공수부대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군인들은 데모대를 향해 돌격했다. 사과탄이 데모대를 향하여 날아갔다. 데모대는 흩어져 광복동, 남포동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합동통신 부산지사 양원 기자는 18일 밤 8시께 계엄령하의 시청 앞에서 데모가 또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엄령이 내렸는데 데모를 해?’
 
  그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노외찬 기자와 함께 취재차를 타고 광복동으로 달렸다.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앞당겨진 통금 시간에 맞추려고 시민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시민들을 시내버스와 영업용 택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차 타기를 단념한 시민들은 걷기 시작했다. 인도는 행인들로 빽빽이 메워졌다. 인파는 묵묵히 흩어졌다.
 
 
  “야! 이 새끼들아! 보도 똑똑히 해”
 
  취재차가 부영극장 앞에 이르렀을 때 그곳은 한바탕 데모 바람이 지나간 뒤였다. 눈을 찌르는 가스만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틀 동안 시위대의 함성 속에 파묻혔던 부영극장 앞 광장 주위는 스산하기만 했다.
 
  회사로 돌아가려고 취재차를 남포동 동명극장 쪽으로 몰았다. 극장 앞 지하도 입구에서 앞서가던 택시가 손님을 태우려고 멈췄다. 취재차도 멈췄다. 이때 길 건너편 남포동 입구 골목에서 “와!” 하는 함성과 함께 300명쯤의 시위대가 우르르 몰려나왔다. 경찰과 군인들에게 쫓기는 데모대가 분명했다. 이들은 찻길을 가로질러 취재차까지 다가왔다. 지휘자인 듯한 청년이 맨 앞에서 언론기관의 취재차임을 알아냈다.
 
  “어! 합동통신 차다. 조져!”
 
  청년의 손짓에 따라 데모대는 이 포니차를 덮쳤다.
 
  “우당탕탕!”
 
  돌멩이와 유리병이 소나기처럼 날아왔다. 가로수 버팀목을 뽑아 든 군중은 이 차에 몽둥이질을 했다. 양원은 ‘이제 죽는구나’고 생각했다. 책가방을 낀 한 고등학생이 창 쪽으로 다가오더니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야! 이 새끼들아! 보도 똑똑히 해.”
 
  “알았다.”
 
  노 기자가 말했다. 그 학생은 더 크게 소리 질렀다.
 
  “똑똑히 하란 말이다, 새끼들아!”
 
  “알았습니다.”
 
  겁에 질린 양 기자의 입에선 절로 존댓말이 나왔다. 한 청년이 운전석 창문으로 몽둥이를 쑤셔 박으며 운전사를 찔러 댔다. 운전사는 문을 열고 혼자 달아났다. 다른 청년이 창을 통해 운전석 뒷자리에 앉은 양원을 겨냥하여 우산대를 찔렀다. 배에 박히는 순간 “억!” 하면서 몸무게 80kg의 그는 우산대를 잡아당겼다. 우산대를 빼앗은 순간 이번엔 노외찬에게 위협이 다가왔다. 한 청년이 창문을 열려고 했다. 노 기자는 급히 자물대를 눌렀다. 그 청년은 이번엔 앞 창문으로 손을 내밀어 자물대를 뽑아 올렸다. 노 기자는 옆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후다닥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차 안에 홀로 남은 양원은 노 기자가 데모대 속에서 맞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양 기자는 이틀 전에 바로 이 장소에서 있었던 작전차 방화 장면을 퍼뜩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누가 기름통에 성냥불을 그어 대지 않나 뒤돌아보는데 옆 창문이 열리더니 수많은 손들이 양원을 붙잡아 끌어내는 게 아닌가.
 
 
  공수부대, 구경꾼들 두들겨 패
 
부마사태 당시 경찰 시설이나 차량, 언론사 차량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사진은 시위대의 방화로 불에 탄 마산 산호파출소. 사진=조선DB

  “퍽!”
 
  발길질이 그의 입에 와 닿았다. 땅바닥에 쓰러진 그는 꽝, 꽝, 사과탄이 바로 옆에서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군중이 흩어져 달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양 기자는 그대로 남포파출소를 향해 뛰었다.
 
  이번 데모에서 세 번이나 습격을 받았던 이 파출소엔 약 50명의 병력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100m쯤 앞에서 취재차가 데모대에 동네북처럼 얻어맞는 것을 보고도 손쓸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다만 사과탄을 데모대에 던져 위협을 주었을 뿐이었다.
 
  양 기자는 파출소를 향해 뛰면서 뒤돌아보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데모대는 차를 모로 세우고 있었다.
 
  ‘기름이 흐를 것이다. 누가 불을 지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데모대가 시청 쪽에서 행진해 들어오는 공수부대 병력을 발견, 쫙 흩어져 버렸다. 공수부대는 찻길로 나와 있던 데모 구경꾼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다. 한 청년이 쓰러지자 그의 연인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이 사람은 학생이 아니에요!”라고 소리치며 짝을 부둥켜안았다. 파출소로 뛰어든 양원은 “뭘 하러 이곳에 왔느냐”는 경찰관들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나는 부산사태에서 처음으로 국군에 대한 반감을 느꼈다. 그런 불신감이 보통 사람들 속으로 퍼져 가는 것을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했다. 나는 공군에 지원 입대,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복무 기간이 4개월 연장되어 3년 4개월 뒤 제대하는 바람에 대학 복학을 포기하고 신문사에 들어왔지만 한번도 후회하거나 불평한 적이 없었다.
 
  1960년 4·19 때 계엄군이 정권 편에 서지 않고 사실상 시위대 편에 섰던 것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 정부 시절에도 국군을 정권보다 높은 신성한 존재로 인식하면서 믿음을 주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1963년 6월에 서울에 비상계엄령을 선포,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진압하고 1972년 10월 17일엔 유신 선포를 위하여 계염령을 내리고 군대를 동원했으나 국민과 국군의 정면충돌은 한번도 없었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이 금기(禁忌)가 깨졌다. 시민들이 계엄군에 저항하고 공수부대는 가혹하게, 단시간에 진압했다.
 
  군은 여기서 중요한 오판(誤判)을 했다. 공수부대가 출동하니 과격 시위도 간단하게 누를 수 있다는 성공 사례로 여긴 것이다. 부산에서 공수부대가 저지른 폭력적 진압을 모르고 내린 결론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언론이 이를 보도하지 않았고 행정기관에서도 무시했으므로 공론이 형성되지 않았다. 부산사태에서 내가 느낀 일부 국군 장교단에 대한 의구심은 12·12사건을 통하여 깊어졌고, 광주 취재를 통하여 확인되었으며 1980년대를 관통하는 나의 취재 주제가 되었다.
 
 
  파리 잡는 데 도끼 휘두른 꼴
 
1979년 10월 17일 대학에는 휴업령이 내렸고, 이날 밤 계엄 선포 후 공수부대가 진주했다. 부산 동아대 앞. 사진=조선DB

  정부가 계엄령 선포 직후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공수단과 해병대를 긴급 투입한 것은 부산사태를 철저하게 진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잉 대응이었다. 파리를 잡는 데 도끼를 휘두른 꼴이었다. 현지의 군 지휘관은 위수령(衛戍令)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았고, 경찰 병력만으로도 사태 장악이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비상계엄령에다가 특수부대 투입이란 고단위의 진통제가 투여된 것이었다.
 
  특수부대는 적과의 싸움에서도 가장 위험성이 높은 특수한 전투 목적에 쓰여야 할 부대이고 훈련도 그런 식으로 받아 왔다. 이런 부대가 비무장의 민간인을 상대하는 임무를 받은 것이 애당초 잘못된 것이었다. 부대의 성격상 과격한 진압은 예정된 것이었고, 이로 인한 민간과 군대 사이의 감정은 대한민국 존립의 절대명제인 국가안보를 위해서도 나쁜 것이었다.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충돌에서 비롯된 광주사태의 원인은 부마사태 때부터 배태(胚胎)됐다고 볼 수 있다.
 
  계엄령이 내려진 18일의 밤 데모는 군인들을 자극했다. 그들은 ‘군복에 대항하는 것은 국가에 대적(對敵)하는 것이며 따라서 적으로 간주하라’는 평소 생각에 따라 행동했다.
 
  동래구 동상동 신희철(회사원·당시 37세)은 18일 밤 8시 50분 서구 충무동 상륙다방 앞에서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끌려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머리를 크게 다쳤다. 뇌좌상과 뇌경막 손상을 당한 그는 봉생신경외과에서 뇌수술까지 받았다.
 
  동래구 장전동에 사는 김재룡은 기동대 경찰관들에게 남도학원 앞에서 뭇매를 맞고 두부 파열 및 전신 타박상을 입었다.
 
  부산진구 당감동에 사는 금은방 종업원인 전병진(당시 32세)은 계엄령 첫날인 10월 18일 밤 9시 30분 서면 태화극장 앞 택시 타는 곳에서 택시를 먼저 잡으려고 찻길로 조금 나가 서 있었다. 앞당겨진 통행금지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아 시민들은 서로 먼저 타려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이때 공수부대 한 소대 병력이 찻길을 따라 남쪽으로 행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앞에 걸리는 사람들을 청소하듯 해 버렸다.
 
 
  공수부대, 신분증 제시한 경찰도 구타
 
  술에 조금 취해 있었던 전병진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당했다.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몇 대나 맞았는지, 군화발로 얼마나 차였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정차한 택시 꽁무니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다. 군인 네 명이 다시 그를 끌어내 발길질과 개머리판으로 녹초를 만들었다. 그는 쓰러졌다. 군인들이 다 지나갔을 때 그는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지하도를 건너서 한독병원을 찾았다. 한독병원에서는 간단한 응급처치만 시켜 주고 자가용에 태워 당감동 한태일신경외과로 옮겨다 주었다. 진단을 해 보니 앞니 다섯 개가 부러졌고 오른쪽 귀 위의 머리뼈에 분쇄골절이 생겼음이 드러났다. 수술을 받았다. 그는 분쇄골절된 부분을 잘라 내는 수술과 그 자리에 플라스틱을 대신 끼우는 수술을 두 차례 받았다.
 
  동부경찰서 ㄱ 경위는 두 형사와 함께 남포동에 나왔다가 공수부대 군인 두 명이 한 시민을 개머리판과 발길질로 심하게 때리는 것을 보았다. ㄱ 경위는 불끈 화가 치밀었다. 몇째 동생 나이밖에 안 되는 그 군인들에게 “이러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넌 뭐야?”
 
  “경찰관이다.”
 
  ㄱ 경위는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이때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오더니 버럭 고함을 질렀다.
 
  “경찰 같은 것 쓸데없어. 이 새끼들 조져!”
 
  명령이 떨어지자 근처에 배치돼 있던 공수부대 사병들 10여 명이 몰려와 세 경찰관을 으슥한 골목으로 끌고갔다. 주먹과 발길이 어지럽게 오갔다. ㄱ 경위는 전치 2주의 상처를 입었고 형사 한 명은 고막을 다쳤다. 그들은 어디 항의할 데도 없어 꾹 참기만 했다.
 
  이런 행동에서 유추(類推)할 수 있는 것은, 공수부대 장교들도 자신들이 정권 수호자로서 특권적 위치에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국민의 군대가 아닌 정권의 사냥개 같은 군대의 출현이었다.
 
 
  私製 폭탄 공장 소동
 
  10월 20일 밤 9시 서면. 부산시민들을 마구 패는 군인들에 대해 다방의 주방장 김석만(18)은 순진하게 그 불만을 표현했다. 포항 출신인 이 소년은 밤 8시 50분 서면의 부산진세무서 앞길에서 계엄군 옆으로 지나가다가 아무 까닭도 없이 불려가 얻어맞았다. 김군은 서면 로터리의 동국빌딩 앞길을 지날 때 이번엔 민간인 두 명이 군인에게 얻어맞는 것을 보았다. 두 민간인은 택시를 서로 먼저 타려고 다투다가 군인들에게 붙들려 가 폭행을 당했다.
 
  김석만은 화가 치밀었다. 동국빌딩 계단을 올라가 5층 옥상에 있던 음료수 공병 3개를 집어 길바닥으로 던졌다. 누구를 겨냥하여 던진 것이 아니라 화를 풀려고 아무 데나 던진 것이었다.
 
  공병 깨지는 소리를 듣고 공수부대 소령이 즉시 근처의 경비부대 40명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리고는 이 ‘불순 건물’ 안으로 쳐들어갔다. 5층 건물 안엔 사무실이 많이 있었다. 한 사무실 안에선 여섯 명의 아가씨들이 계엄군 위문 바자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이런저런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사무실 안에 있던 24명의 시민들을 모두 지하실로 몰아넣고 무릎을 꿇리고 두 손을 머리 뒤로 붙이게 했다.
 
  이 젊은 소령은 부산진경찰서 수사과장과 형사계 형사들을 호출했다. 그는 아버지뻘 되는 서동백 수사과장을 이끌고 건물 내부를 샅샅이 뒤졌다. 플라스크, 비커, 약품병 따위 실험 기구가 많은 공해 대책 회사 사무실이 하나 있었다. 소령은 여기서 흥분하고 말았다. “사제(私製) 폭탄을 만드는 비밀 공장을 드디어 발견했다”고 기고만장했다.
 

  30년 동안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서 과장은 ‘이 장교가 돌았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소령은 ‘비밀 폭탄 공장’을 샅샅이 수색케 했다. 자신의 추리를 뒷받침할 아무 단서도 발견하지 못하자 지하실로 몰아넣은 민간인들을 족쳤다. 김석만은 자기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다 못 견뎌 “내가 했다”고 나섰다.
 
  소령은 부산진서 상황실에 있던 여단 임시지휘본부로 달려가 이 사실을 여단장에게 보고했다. 여단장은 소령의 흥분된 보고를 차분히 듣더니 싱긋 웃으며 “그것은 경찰에 넘겨 조사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서 과장은 소령과 준장은 역시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경찰서로 넘겨지자 24명의 민간인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은 이들 중 김석만과 김광호라는 대학생만 붙들어 두고 나머지는 풀어 주었다. 경찰은 김석만에 대해 야간주거침입 및 상해미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형사들도 소년에게 동정을 했지만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그렇게 했다. 은근히 기각될 것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형사와 기자들은 다 같이 혀를 찼다.
 
 
  “전라도 군인들이 구타” 소문 돌기도
 
  계엄군의 마구잡이 폭행은 데모대가 모일 수 있는 틈을 아예 주지 않으려는 작전으로 풀이됐다. 이른바 위력 시위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의 행동은 아무 목적도 없는 가혹행위로 변질됐다. 군인들은 데모 군중도 아니고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는 양민들을 주로 머리를 때렸다. 군인들에게 맞아 다친 시민들의 80% 이상이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1980년 5월 이른바 시민군이 장악한 광주로 들어가 수습된 시신(屍身)을 들여다보니 머리가 깨진 이들이 상당수였다. 나는 광주사태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대낮에 공수부대원들이 거리에서 시민들을 타살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 사람들의 동물적 분노의 폭발이라고 본다.
 
  부산에서는 구타의 강도(强度)와 피해자의 머릿수를 생각할 때 사망자가 없었다는 것이 하나의 기적이었다. 내가 수집한 다친 시민들의 진단 병명(病名)을 읽어 내려가면 군인들이 어떻게 몽둥이와 개머리판을 사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창자 파열(남부민2동 김종열), 뇌좌상, 뇌진탕, 전두부 파열상, 후두부 열창, 안면 열창, 안면부 내부 열창, 전신 타박, 뇌경막 손상….
 
  언론기관과 시청 및 계엄사령부 민원실엔 군인들의 폭행 사태를 고발하고 항의하는 시민들의 전화가 빗발치듯 걸려 왔다. 이런 전화를 받는 기자들은 시민들을 도울 방법이 없다는 무력감(無力感)과 굴욕감에 빠졌다. 신문사에 전화를 거는 사람들도 매스컴이 이를 보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 울분을 그런 식으로라도 하소연해야 마음이 조금이라도 누그러지는 모양이었다.
 
  광주사태 때는 경상도 군인들이 와서 살상을 한다는 말이 퍼졌는데, 부마사태 때는 전라도 군인들이 구타에 동원되었다는 말이 시중에 퍼졌다.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가혹행위를 시민들은 그런 식으로라도 설명하지 않고는 답답하여 죽을 지경이었던 모양이다.
 
 
  민정수석, 계엄군의 시민 구타 보고
 
 
부마사태 당시 합동수사단장 권정달 대령.
부산시는 마침내 군인들에게 얻어맞아 다친 시민들을 무상 치료해 주기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 사실을 매스컴을 통해 알릴 수도 없었다. 반상회나 통·반 조직을 통해 부상자를 조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에선 데모 하다 다친 사람들도 신고를 하면 아무런 처벌을 않고 무료로 치료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거의 모든 시민들은 이것이 데모 가담자를 찾아내려는 방법이라고 오해하여 신고를 꺼렸다.
 
  10월 26일 김계원(金桂元) 대통령 비서실장은 박승규(朴升圭) 민정수석으로부터 부산·마산을 다녀온 보고를 들었다. 박 수석은 계엄군의 시민 구타 문제를 제기했다. 김 실장은 “내일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 차지철 경호실장의 월권도 같이 지적하라”고 했다.
 
  부산 지역 비상계엄 때 합동수사단장은 권정달(權正達) 부산지역 보안부대장(대령)이었다. 그는 1980년에 들어 신군부 집권 시나리오를 쓰게 되는데, 1996년 검찰 조사에서 중요한 진술을 했다.
 
 
  권정달의 증언
 
  “광주사태의 근본 원인은 공수여단이라는 과격한 부대를 시위 현장에 투입해 강경 진압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감히 타격하라, 끝까지 추적 검거하라, 분할 점령하라’는 공수여단의 시위 진압 지침이 실행될 것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부마사태 당시 저는 부산지역 보안부대장으로 재직 중이었기에 진압 과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시위 초동 단계에서 군 병력이 투입되지 않아 시위가 확산되었습니다. 그 후 제3공수여단과 해병 1사단 1개 연대 병력을 투입, 강경 진압함으로써 평정이 되었습니다. 부마사태 진압작전 평가회의에서 시위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초동 단계부터 공수부대를 투입, 강경 진압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반성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교훈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이후 발생이 예상되는 시위 진압작전의 기본 방침을 공수부대에 의한 초기 강경 진압으로 설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광주사태 진압 직후 계엄사가 발표한 시민 측 사망자 144명 가운데 18%인 26명의 사인(死因)이 타박상, 두부 손상, 자상(刺傷)이었다. 26명이 중인 환시(衆人環視) 속에서 맞아 죽고 찔려 죽었다는 이야기다. 광주의 비극은 부산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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