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명의 중심부였던 중국과 그 주변부였던 조선은 전통 이념과 사회 질서의 벽을 넘지 못해
⊙ 문명의 중심과 거리가 있었던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 사상적 다원성 등장
⊙ 일본, 여러 전통 사상을 선택적으로 조합, 근대화에 추진력을 제공할 수 있는 독자적인 문화와 이념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
⊙ 조선의 실패, 일본의 성공뿐 아니라 중국, 중동, 동남아의 ‘개항기 역사’ 또한 들여다봐야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 문명의 중심과 거리가 있었던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 사상적 다원성 등장
⊙ 일본, 여러 전통 사상을 선택적으로 조합, 근대화에 추진력을 제공할 수 있는 독자적인 문화와 이념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
⊙ 조선의 실패, 일본의 성공뿐 아니라 중국, 중동, 동남아의 ‘개항기 역사’ 또한 들여다봐야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 1853년 일본 에도만에 나타난 미국 페리 제독의 함선.
하지만 이런 격랑의 시기가 전대미문인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우리 역사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겪는 변화를 능가하는 문명사적 충격에 직면했었기 때문이다. 1875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일본 정부는 조선에 개항(開港)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선박 운요호(雲揚號)가 조선 영해에서 무단으로 측량하다 조선군과 교전하는 ‘운요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삼아 일본 정부는 1876년 조선을 압박하여 훗날 강화도조약으로 알려질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밀어붙였다.
‘세계사적 사건으로서 개항’
강화도조약과 함께 시작된 개항은 한반도에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가장 큰 전환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는 단지 일본 제국주의의 도래와 민족의 응전(應戰)이라는 주제만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거대한 변화였다. 인류 문명사 차원에서 가장 심원한 변화인 근대 산업 문명이 대서양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대륙 반대편인 유라시아 극동에 도달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약 2000년 전에 들어온 중국식 농경 문명의 절대적 권위에 금이 갔다. 이와 동시에 서유럽, 미국, 러시아, 일본을 통한 근대 문명의 여러 모델이 조선의 미래를 둘러싼 경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개화기 조선이 겪은 모든 좌충우돌은 세계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전환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강화도조약 이후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족수난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적 사건으로서 개항’을 더 넓은 시각에서 인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개항은 일본 의지의 강요라는 폭력적인 사건으로 시작됐다. 물론 개항 이전의 조선이 ‘우리 민족끼리’ 오순도순 살던 유토피아는 결코 아니었다. 19세기가 되었을 때 조선에서는 인구 증가, 몰락 양반의 불만, 자연재해 등이 맞물리며 민란(民亂)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외래 종교인 천주교와 동학을 비롯한 신흥 종교가 사회 불안의 틈새에서 자라나 주자학의 사상 독점을 흔들고 있었고, 이에 조선 조정은 신경질적으로 대응했다. 분명 ‘왕조 말기 증상’을 숨길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취약한 상황은 더 우월한 군사력과 국가 조직, 상업 자본을 가진 일본의 개항 요구와 본질적으로 관련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서양에서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과거 신라·고려와 마찬가지로 무너져 내리고 혼란을 거듭한 끝에 새로운 왕조에 자리를 넘겨주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개항을 요구한 일본이 습득한 ‘근대성’은 역사를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근대의 탄생
근대성은 18세기 말에 대서양 연안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6세기 이래로 전 세계로 팽창하기 시작한 유럽의 상업은 유라시아 문명의 변방 지대였던 대서양을 새로운 자원과 지식이 넘쳐나는 혁신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화약의 도입으로 촉발된 유럽 소국들의 끝없는 경쟁은 국가 기구를 더 정교하게 가다듬고, 과세 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상공인 계층, 나아가 대중의 동의를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관료제, 조세 제도, 상비군 체계가 발전을 거듭하는 근대 국가가 등장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의식의 혁명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세계를 고대(古代) 그리스 선현(先賢)들과 성경 말씀으로는 해석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인쇄술의 발전과 유럽의 다원적 정치 환경은 ‘신성모독’으로 간주될 수 있는 과학적 실험과 주장을 학자들이 얼마든지 교류하고 토론할 수 있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보장해 주었다. 이 사상의 자유시장 속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 권리가 정치 질서의 조직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군(一群)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출현했다. 마침내 상업, 국가, 사상과 지식 영역에서 촉발된 혁신은 영국에서 석탄을 동력원으로 삼아 기계를 작동시키는 대혁신으로 이어졌다. 산업혁명이었다.
근대의 본고장인 유럽 각국은 근대성을 훨씬 더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게다가 유럽의 국가 경쟁 구도는 각국이 전통 세력을 누르고 근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존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근대를 향한 경주를 시작한 유럽 각국은 곧이어 헌법, 과학, 기관총을 갖추지 못한 비서구 세계를 자신들의 발아래에 두고자 뛰쳐나왔다.
유럽 근대의 확산
유럽과의 지리적 거리와 비서구 각 지역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유럽 근대성이라는 채찍을 누가 먼저 맞는지는 다소 달라졌다. 첫 시작은 인도였다.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무굴 제국에 혼란기가 찾아오며 인도 연안에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영국은 인도를 자국 산업혁명에 필요한 필수적 자원인 면화의 공급처로 삼았고, 값싼 노동력으로 오랜 면직물 산업 전통을 가지고 있던 인도는 영국산 면직물의 공세를 버텨내지 못했다. 장인들은 거리로 나앉았고 농촌 질서는 영국이 새롭게 부과한 조세 제도의 통제하에 놓였다.
중동의 이슬람 제국들은 그다음 차례였다. 한때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오스만 제국은 유럽과의 경쟁에서 따라가기는커녕 오히려 과거보다도 약체가 된 상태였다. 유럽에 인접해 있는 이 지역들에 유럽의 군사력과 상업력이 신속히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일반적으로 중동 역사에서 근대의 시작은 1798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이집트 원정으로 꼽힌다. 오스만 제국의 강역인 이집트는 인도를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오랜 경쟁 과정에서 그저 얼마든지 침투하고 정복할 수 있는 땅으로 전락했다.
태평양에 면한 극동은 유럽 근대의 침투가 가장 늦게 이루어진 곳이었다. 지리적으로 유럽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음은 물론이고, 극동 국가들은 19세기까지도 상당한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문명 창안에 따른 자신감이 넘치는 유럽 세력은 극동의 드넓은 시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조지 매카트니가 이끄는 영국 사절단은 1791년 청(淸) 제국을 방문해 건륭제(乾隆帝)를 알현하고 영국과의 통상 확대를 요청했다. 하지만 청은 천하의 물산이 넘쳐나는 황제의 나라가 영국과 새로 통상할 것은 없다며 통상 요구를 일축했다. 매카트니 사절단은 굴욕감을 곱씹으며 중국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일본의 개항
아편전쟁 당시 영국 증기선 네메시스는 중국 정크선들을 가차 없이 격파했다.도쿠가와 막부가 다스리고 있던 일본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본은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를 네덜란드와의 제한적 교역 창구로만 열어주고, 강력한 쇄국(鎖國) 정책을 견지하며 추가적인 개항 압력을 모두 거절했다. 여전히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대군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유럽 세력이 인도나 오스만을 대할 때처럼 쉽사리 무력을 동원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완숙해 가고 유럽의 군사 기술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며 극동을 보호해 주는 장벽들은 하나씩 의미를 잃어갔다. 1839년에 일어난 아편전쟁에서 증기선 네메시스를 필두로 한 영국 해군은 청의 목조 전함을 손쉽게 격침하며 압도적인 무력을 과시했다. 승기를 잡은 영국은 1842년 청과 난징조약을 체결하며 청으로부터 홍콩을 할양받고 추가적인 개항지를 얻어냈다. 청은 난징조약으로 영국 세력을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이는 이후 중국이 겪을 거대한 혼란과 수모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일본 역시 개항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물론 일본은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과 교류하며 외부 세계의 사정을 꽤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태평양에 도달한 러시아의 존재감도 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200년을 넘긴 에도(江戶) 시대의 평화를 구태여 깰 문제는 아니라는 인식이 당연했다.
이런 일본의 문을 연 국가는 인도양을 건너온 유럽 세력이 아니라, 북미 대륙을 장악하고 태평양 세력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미국이었다.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는 1853년 에도 앞바다의 우라가에 도착하여 개항을 요구했고, 1854년에는 미일화친조약을 맺으며 기나긴 쇄국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 지리적으로 청과 일본보다 접근이 어려웠고, 잠재적인 통상 이득이 불명확했던 조선만이 20년은 더 쇄국을 유지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1854년부터 1868년까지 일어난 정치적 소용돌이 끝에, 바로 지척인 일본에서 근대화를 추구하는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서며 마침내 조선도 개항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19세기 세계화의 충격
이처럼 개항은 인도, 오스만, 페르시아, 중국, 일본, 조선까지 연쇄적으로 이루어졌던 ‘아시아적 사건’이었다. 개항이 만들어낸 충격과 변화 역시 이런 점에서 기본적인 구도는 국가를 가리지 않고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가장 커다란 충격은 농촌 질서의 변동이었다. 유럽 상업 세력은 최대한 많은 시장 지배력을 위해 아시아 국가들의 관세 주권을 거의 인정하지 않는 불평등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석탄과 기계의 힘까지 자유자재로 쓰는 유럽 세력과 무역에서 경쟁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이런 교역이 일방적인 수탈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차, 비단, 도자기, 면화 등 유럽은 아시아 상품에 대한 많은 수요가 있었고, 개항은 유럽으로 가는 수출길에서 기회를 포착한 새로운 아시아 자본가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문제는 수세기 동안 근대화에 노출되며 상업 및 화폐 경제에 상대적으로 친숙했던 유럽과 달리 아시아의 향촌(鄕村) 사회는 그 충격이 급작스러웠다는 데 있었다. 소규모 농촌 공동체의 전통적 삶은 이제 전 지구적인 상품 교역망과 연동되었다. 일평생 알 길이 없는 머나먼 지역에서 훨씬 싼 가격으로 들어온 상품은 향촌의 생산 질서를 완전히 교란시켰고, 각 지역은 세계 시장에서 더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상품에 특화하여 생산 품목을 재편해야 했다.
무역 거점인 항구 인근에서 시작되었던 이러한 변화는 19세기 후반에 철도와 증기선이 확산되면서 대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내륙까지 휩쓸었다. 이제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벌어진 사건의 영향이 특정 작물 가격을 폭락시켜 경상도에서 농촌 불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세계화 경제의 특징으로 오늘날에 주로 언급되는 ‘동시성’과 ‘변동성’은 이미 19세기 후반 개항기의 농민들이 맞닥뜨려야만 했던 근본적인 변화였다.
아시아 최초의 근대인 ‘매판’
그러나 이 세계사적 격변에서 기회를 잡은 이들도 많았다. 전근대 종교와 귀족 질서하에서 대체로 통제의 대상이었던 상인들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내륙의 농촌과 유럽인들의 세계 시장을 중개하며 자본을 축적했고, 유럽 근대성을 누구보다 먼저 수용해 나가기 시작했다. 자녀들을 유럽식 학교에 보내거나, 아예 유럽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전기가 들어오는 유럽식 석조 건물이 세워졌고, 선박이 오가는 번창하는 개항장을 바쁘게 오갔다. 때로는 유럽의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까지 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요코하마, 상하이, 인천, 이즈미르, 콜카타를 막론하고 개항장에는 유럽식 근대와 아시아 전통문화가 뒤섞인 특유의 문화가 꽃을 피웠다.
하지만 국가를 막론하고 개항장의 근대적 상인 계층은 좋은 평가를 듣기가 어려웠다. 전례 없는 농촌 불안정화의 책임이 상인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떠도는 농민들은 상인들이 자신을 착취하고 유럽인들에게 팔아넘겼다며 분노를 표했다. 농민들을 다스리는 전통 지주층도 자신들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두려워하여 상인들이 주도하는 근대적 개혁 조치들에 불만을 표했다. 여기에 이념을 공급해 준 것은 제국의 수도부터 향촌 사회까지 포진해 있던 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신, 혹은 선현들이 제공한 도덕적 삶의 지침이 유럽의 상업주의 문화로 인하여 타락하고 있다고 경고하며 근대화의 시계를 뒤로 돌려야 한다는 여러 반란의 선구자가 되었다. 20세기까지도 아시아 사회 최초의 근대인들은 ‘매판(買辦)’이라는 비난을 들으며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공격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이슬람 세계와 중국의 근대 수용
중국은 양무운동 결과 서양식 무기와 기기를 만들어냈지만, 전반적인 서구화로 나아가지는 못했다.결국 아시아 각국의 개항기 정치는, 유럽 제국주의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유럽의 사상과 제도를 어떻게, 또 얼마나 수용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힘겨루기로 수렴되었다.
아시아 지식인들의 백가쟁명(百家爭鳴) 시대에 그 범위는 전면적 수용부터 전면적 부정, 혹은 전통과 근대의 조화 실험 추구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아랍을 포괄하는 이슬람 세계에서 벌어진 논쟁은 우리네 개항기의 ‘수구파’와 ‘개화파’ 논쟁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 주로 소수민족이 많았던 상인층과 유럽 유학파들은 전면적인 ‘개화’를 주장했지만, 보수적인 이슬람 성직자들과 농민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질서가 무너지는 것에 경계심을 표하며 서구화 조치에 끝없이 저항했다. 19세기 후반이 되었을 때는 ‘이슬람과 근대는 조화가 가능하다’는 절충안이 그나마 일정 부분 합의를 얻는 것처럼 보였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 압둘하미드 2세는 헌정의 도입이 제국의 분열을 가속화할 것을 두려워하여 헌정을 중단하고, 자신을 ‘이슬람 계몽군주’로 위치시켰다. 페르시아의 지식인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는 중동을 주유하며 이슬람 세계가 유럽의 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이되 이슬람의 도덕 가치를 기반으로 반격을 꾀해야 한다는 혁명 사상을 퍼트렸다.
같은 시기 동아시아에서도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이와 같은 수렴을 추구하는 실험이 ‘정답’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아편전쟁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청은 세계 시장과 연결된 중국 농민들의 불안정이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으로 폭발하며 천하를 휩쓸고, 혼란의 틈을 타 유럽 세력의 침투가 가속화되자 실질적 조치의 필요성을 강구했다.
그렇게 1861년 동치제(同治帝) 시기에 중국에서는 양무(洋務)운동이라고 알려진 청의 근대화 실험인 ‘동치중흥’이 시작되었다. 황제 전제정과 과거제, 유교 이념과 같은 국가의 핵심 정체성은 바꾸지 않되 서구의 기술과 무기는 도입하겠다는 노선이었다.
압둘하미드의 오스만과 마찬가지로 동치중흥 시기 중국 역시 물질적 근대성의 도입에서는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제국 모두 제국 관료와 귀족부터 농촌의 촌부(村夫)까지 굳건히 믿고 있는 전통 이념과 사회 질서의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상대적으로 일찍 개화를 시작한 오스만과 청이 이러했을진대, 가장 늦게 개화를 시작하고 상업 세력의 존재감은 더더욱 미약했으며, 이념적으로도 가장 고착화되어 있던 고종의 조선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이유
이쯤에서 의문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신속한 근대화를 이루었던 것일까.
사실 우리는 ‘왜 일본은 성공했는데 한국은 실패했는가’라는 질문에 익숙하지만, 애초부터 이 질문은 적절치 못한 감이 있다. 당대 일본은 아시아 전체의 유일한 성공 사례였다. 조선은 근대에 유별나게 적응하지 못했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라고 사정이 조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더 적절한 질문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근대화 과정에서 겪었던 저항을 일본은 어떻게 혼자서만 극복할 수 있었는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은 먼저 두 가지 면에서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사정이 좋았다.
첫 번째는 에도 시대에 축적된 기반이다. 2세기 넘게 이루어진 도시화와 상업 발전, 국가 제도 정비는 일본이 서양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신속하게 토착 자본을 육성하고,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근대 인프라에 투자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는 자급자족형 농경 촌락을 이상시한 조선에 대비했을 때 일본이 가지고 있던 결정적 차이였다.
물론 이는 일본이 오스만이나 중국과 대비해서 성공을 거둔 이유까지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두 제국은 조선과 달리 오랜 상업 전통을 가진 상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번째 경쟁력으로서 민족 구성의 동질성이 등장한다. 오스만은 기독교 소수민족, 중국은 만주족과 한족의 갈등, 무슬림 반란 등 폭발하는 원심력에 대처해야만 했다. 일본 역시 지방의 여러 번을 새로운 국체하에서 통합해야만 하는 과제가 있었지만, 어쨌든 일본의 거주민 대다수는 같은 언어와 종교를 공유하는 동질적 인구 집단이었기 때문에 근대적 민족 국가로 전환하는 데 훨씬 더 수월했다.
‘문명의 변방’ 일본의 성공
그리고 일본만 가지고 있었던 독특한 특성도 중요했다. 바로 ‘문명의 변방’이었기에 가능했던 창조적인 문화 실험이었다.
흔히들 메이지 일본은 ‘전면적 서구화’를 통해서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한다.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과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와는 달랐다는 것이다. 물론 일본이 중국, 조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심도로 서구화 개혁을 추진한 것은 맞지만 이는 반쪽짜리 설명이다. 메이지 일본 역시 ‘화혼양재(和魂洋才)’를 내걸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근대화가 일본의 전통과 어긋나지 않음을 끝없이 증명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부담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적었던 것도 분명 사실이다.
일본의 지식인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동아시아 문명에서 중국을 중심, 조선을 주변, 일본을 아주변(亞周邊)이라고 강조했다. 문명의 표준을 만든 중국은 중심이었고, 그 중심의 표준을 그대로 수용한 조선은 주변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완전히 중심에 편입되기에는 거리가 있었고, 자체적인 중심이 되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아주변, 혹은 준(準)주변이 일본의 특징이 되었다.
바로 여기서 에도 시대에 꽃을 피웠던 사상적 다원성이 등장했다. 신토(神道), 불교와 같은 종교에 더해 중국에서 전래된 주자학, 일본 토착 유학인 소라이(徂徠)학과 진사이(仁齋)학, 일본 전통에 천착하자는 국학(國學), 국학과 주자학의 습합(習合)을 추구한 미토(水戶)학 등 다양한 사상이 논쟁을 펼치고 있었다. 유신 시기에는 천황 중심이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가치만 공유하면 어떤 아이디어와 사상도 실험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그렇게 일본은 여러 전통 사상을 선택적으로 조합해 서구화와 근대화에 추진력을 제공할 수 있는 독자적인 문화와 이념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일본도 근대화 과정에서 막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어느새 그 반발도 ‘화혼양재’의 틀로 수렴되며 근대적인 대중 운동과 정치 이념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
국민들에게 새로 도입된 라틴 문자를 가르치는 아타튀르크. 튀르키예의 케말주의는 메이지 사상의 후배 격이라고 할 수 있다.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개항의 시대’에 발생한 긴장을 끝내 관리하지 못하고 국가 기구의 내파(內破)를 거친 뒤에야 전면적 근대화에 나설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 청 제국, 조선 왕조는 유라시아 전통 문명의 표준을 ‘너무나 잘 받아들였기에’ 자체적인 개혁을 통해서 그 절대적 권위를 해체하는 일은 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 왕조가 멸망한 뒤에야 이 국가들에서 이슬람이나 유교는 그 절대적인 권위를 상실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지식인과 민중은 여전히 전통 사상의 막대한 영향력하에서 살아가며, 그 틀 속에서 근대 사상을 추구했다.
1920년대 중국의 신문화운동·신생활운동이나 튀르키예의 케말주의는 이런 면에서 ‘메이지 사상’의 후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흐름을 형성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개항기와 제1차 세계대전기에 발생한 엄청난 혼란과 폭력을 값으로 치른 뒤에야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다시 개항 150주년을 맞은 오늘날로 돌아와 보자. 개항기의 역사를 오늘날에 대입(代入)하는 것은 역사를 무리하게 유비(類比)에 동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흡사한 점이 없지도 않다. 영국의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정보 혁명, 인공지능 혁명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게다가 청, 오스만, 무굴 제국 같은 대제국들이 스러지는 것처럼, 산업 시대의 종주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독일 같은 국가들이 대내외적 위기에 혼미를 겪고 있기도 하다. 개항기의 농민들을 혼란하게 했던 세계 시장의 변동성과 일자리 상실로 인한 불안정은 이제는 인터넷 케이블을 타고 훨씬 더 크고 넓게,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다. 농경 시대에 철칙으로 믿었던 종교와 신분 질서가 개항기의 충격에 흔들렸듯이, 산업 시대의 표준들, 연금 제도나 정당 정치도 마찬가지로 위기에 처해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영토 병합과 미국의 묵인은 개항기 시대의 세력권 정치가 다시 귀환하고 있다는 불길한 인상을 준다. 따라서 개항기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일은 여전히 놀랍도록 현재적인 학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타국의 개항기 역사도 보아야
하지만 개항기를 바라보는 시선은 15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양극단을 오가는 느낌이 강하다.
주류적인 해석에서는 ‘피해자로서 우리 민족’과 ‘침략자로서 일본 제국주의’를 대비하는 선악관이 지배적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유럽 산업 근대성의 도래라는 세계사적 변화와 그것이 창출한 기회는 배제되고, 무능력했던 조선 왕조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이상화되곤 한다.
반대편 시각은 처참했던 조선 왕조의 상황을 돌아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기회를 안타까워하는 데 중점을 둔다. 전자보다는 사실에 가깝지만, 여전히 ‘세계사적 시야’가 결여되어 있다는 데서 아쉬움도 남는다. 우리와 대비되는 일본의 사례는 구조적 조건과 수없이 많은 운이 결합된 세계사의 유례없는 성공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일본의 성공과 우리의 실패만큼이나 청, 오스만, 페르시아,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의 ‘개항기 역사’ 역시 면밀히 따져보아야만 한다. 바로 그 위치 감각 속에서 우리의 위치가 더 잘 드러나고, 우리가 개항기에 정말로 할 수 있었으나 할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인지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나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진동했던 아시아 각국의 좌충우돌은, 근대성의 위기와 전통으로의 회귀가 가시화되는 오늘날의 시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개항 150주년을 맞이하여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리고”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르는” 이중의 과제를 성공한다면 한국 역시 개항기의 메이지 일본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적 모범을 제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름대로 안정적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 달리, 이제는 우리가 여전히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번민하는 ‘아주변’이 되었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빛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지나친 낙관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