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과 일본 모두 어려운 문제는 덮어 두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타협 이뤄 내
⊙ 박규수, ‘먼저 침범하지 않는다’와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방침 내려
⊙ “스스로 금수를 제압하고 물리칠 힘이 없으면서 한갓 한 번의 꾸짖음으로 이를 당해 내려고 하니, 어떻게 그 발톱과 이빨을 막아 낼 수 있겠는가?”(강위)
金鍾學
1977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외교학 석·박사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국립외교원 조교수 겸 외교사연구센터 책임교수 역임. 現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 제43회 월봉저작상 수상. 저서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흥선대원군 평전》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역서)
⊙ 박규수, ‘먼저 침범하지 않는다’와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방침 내려
⊙ “스스로 금수를 제압하고 물리칠 힘이 없으면서 한갓 한 번의 꾸짖음으로 이를 당해 내려고 하니, 어떻게 그 발톱과 이빨을 막아 낼 수 있겠는가?”(강위)
金鍾學
1977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외교학 석·박사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국립외교원 조교수 겸 외교사연구센터 책임교수 역임. 現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 제43회 월봉저작상 수상. 저서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흥선대원군 평전》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역서)

- 강화도조약 당시의 모습을 담은 일본 측 삽화.
〈고종: 저들의 배가 모두 물러갔으니 실로 다행이다.
신헌: 처음에는 과연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바가 있었는데, 이제 물러갔으니 참으로 국가의 큰 복이옵니다.
고종: 문답한 장계를 보니, 실로 잘 응수하였다.(《승정원일기》 고종 13년 2월 6일)〉
고종은 강화도조약을 ‘실로 잘 응수한 조약’이라고 칭찬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도쿄에서는 일본 정부의 최고 권력자인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공부경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조선에서 길보(吉報)가 도착하자마자 바로 알려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뜻밖의 운(意外之運)으로 함께 경하해 마지않습니다”라는 내용의 서한을 쓰고 있었다.(《이토 히로부미 관계문서(伊藤博文關係文書)》 제3권)
일반적으로 강화도조약은 일본 측이 포함외교(砲艦外交·gunboat diplomacy)를 동원하여 강요한 불평등조약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로 잘 응수했다”는 고종의 치사나 ‘생각지도 못한 운’이라는 오쿠보의 환호는 이러한 역사적 평가를 무색하게 한다. 이들의 발언에서는 아슬아슬한 무력(武力) 충돌의 위기를 피해 협상이 무사히 타결된 것에 대한 깊은 안도가 느껴진다.
그렇다면 조선과 일본 두 나라는 왜 실제로는 전쟁이라는 파국을 원치 않으면서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강화도에 회담장을 마련해야 했던 것일까?
의외로 조선 측 의견 많이 반영
강화도조약의 조선 측 접견대관 신헌.신헌의 협상 일지 《심행일기(沁行日記)》를 검토해 보면, 조약의 성안(成案) 과정에서 의외로 조선 측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사실에 놀라게 된다. 예를 들어 일본 사절단이 제시한 원안(原案)은 이른바 ‘편무적(片務的) 최혜국 대우’ 조항까지 포함해서 총 13개 관(款)으로 구성돼 있었다. 하지만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이 득세하는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조선 정부는 강화도조약에 ‘중수구호(重修舊好)’, 즉 일본과 단절된 외교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제한적 의미만을 부여하고자 했다. 최혜국 대우 조항은 향후 제3국과의 또 다른 외교관계 수립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조선 측에선 그 삭제를 요청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결과 조약은 총 12개 조항으로 타결된 것이다.
흔히 강화도조약의 독소조항으로 일본의 조선 연해(沿海) 측량 및 해도(海圖) 제작(제7관), 편무적 영사재판권(제8, 10관), 민간 무역에 대한 관헌의 간섭 금지(제9관) 등이 유명하지만, 사실 조선 측에서 이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 정부는 현지에 “모두 들어줄 수 있다(俱可聽施)”라는 지시만 하달했을 뿐이다.
서계 문제와 정한론
그런데 이는 근대 국제법에 대한 무지의 소산도, 일본 측의 노골적 위협에 굴복한 결과도 아니었다. 그 원인은 조선 정부가 일본 측의 의도를 오판(誤判)한 데 있었다. 이보다 앞서 일본 정부는 부산에 ‘선보사(先報使)’라는 이름의 예비사절을 보내서, 강화도에 사절을 파견하는 이유는 운요호사건(1875년 9월 20~22일)의 책임 소재를 가리고, 이른바 ‘서계(書契) 문제’로 교착된 조일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있다고 성명했다. 이에 따라 조선 측에서는 일본인의 요구 사항에 대해선 우선 ‘유원지의(柔遠之義)’로 관대하게 수용하는 한편, 운요호사건과 서계 문제에 관해선 적극적으로 해명함으로써 당면한 전쟁의 위기를 모면하는 데 우선 주력한 것이다.
서계 문제란, 메이지유신(1868년) 직후 일본 정부가 천황의 친정(親政) 사실을 통고하는 서계(외교문서)를 조선 측에서 접수하지 않음으로써 이후 약 7년간 조일 간 외교관계가 사실상 단절된 사건을 말한다. 문제가 된 서계는 쓰시마 도주(島主)의 직함을 비롯해 문서 격식을 임의로 변경했을 뿐 아니라, ‘황(皇)’과 ‘칙(勅)’ 등 오직 천자국에서만 쓸 수 있는 글자를 쓰고, 또 조선을 가리키는 문자는 천황보다 한 칸 낮춰서 적는 등 ‘황국’이 된 일본이 청국의 ‘조공국’이자 ‘왕국’에 지나지 않는 조선보다 우월하다는 뜻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조선 측에서 보면 이는 수백 년 동안 준수해 온 교린(交隣) 질서를 일방적으로 변경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황국’을 자처하는 일본의 서계를 접수하는 경우 청과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조선 측의 접수 거부를 천황을 업신여긴 것으로 여겨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이 비등했는데, 이는 사쓰마번(蕃)과 조슈번 간의 권력 암투와 맞물려 마침내 ‘메이지 6년의 정변’(또는 ‘정한론 정변’·1873년)과 세이난전쟁(西南戰爭·1877년)이라는 중대한 정치 변동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서계 문제의 본질은 이제 명실상부한 황국이 된 일본과 ‘왕국’ 조선 간의 상대적 국격(國格) 또는 위계(位階)를 재설정하는 것이었다. 바꿔서 말하면, 그간 간과되어 온 강화도조약의 중대한 의의는 바로 이 문제의 타협안을 도출한 데 있었다.
조선과 일본의 타협
실제로 일본 사절단이 제출한 조약 원안에 대한 조선 정부의 수정안은 국격을 대등하게 맞추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예컨대 군주의 위호(位號)를 둘러싼 분쟁이 재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향후 외교의 주체를 천황이나 국왕이 아닌 ‘정부’로 한다거나, 조약문 상 국호를 ‘대조선국’과 ‘대일본국’으로 통일할 것, 사신을 접견하는 주체를 똑같이 병권대신(秉權大臣) 또는 외무성과 예조(禮曹)의 ‘고관(高官)’으로 격을 맞출 것 등이었다. 일본에서 파견할 사신의 등급은 대리공사(Chargé d’affaires)로 정했는데, 이 또한 대사(Ambassador)나 특명전권공사(Envoy Extraordinary and Minister Plenipotentiary)의 부임에 수반하는 자국 군주(천황)의 신임장을 주재국 군주(조선 국왕)에게 직접 봉정하는 절차를 피하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이후 일본은 공사의 등급을 일방적으로 승격시켰고, 그 결과 1880년 12월 27일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는 고종을 직접 알현하고 메이지 천황의 신임장을 봉정했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 단지 강화도조약을 강요된 불평등조약으로만 여긴다면, 이를 계기로 양국 관계가 근대적 외교관계로 재편되는 가운데 조선 정부에서 일본에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이라는 대규모 시찰단을 파견하고 또 일본인 군사교관을 초빙해서 왜별기(倭別技)라는 신식 군대를 창설하는 등 일본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도모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게 된다.
오쿠보 정권의 딜레마
강화도조약 당시 일본 정부의 실권자였던 오쿠보 도시미치.그런데 일본 또한 1875년 말에 이르면 조선 문제의 처리를 더 늦출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러시아와 체결한 사할린-쿠릴 교환 조약의 비준(1875년 8월 22일)에 따라 북방 영토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메이지 6년의 정변’ 당시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한 ‘내치파(內治派)’가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를 조선에 특사로 파견하고 이를 계기로 조선 정벌까지 획책한 ‘정한파’의 음모를 좌절시킨 명분 중 하나는 바로 러시아와의 갈등이 안보적으로 더 시급한 문제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와의 영토 분쟁이 봉합되자, 이제는 조선 문제의 처리를 더 미루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 내 복잡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한 정략(政略)으로서 조선 문제를 이용한 형적(形迹)이 있다. 정권이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한반도에서 위기를 조장함으로써 국내 여론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고 내부 결속을 다지는 것은 근대 이후 일본의 상투 수단이었다.
1875년 당시 오쿠보 도시미치 정권은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가 대표하는 보수파와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를 중심으로 하는 급진파로부터 협공을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운요호사건을 이유로 시마즈와 이타가키가 요구한 정치개혁안의 논의를 중단시킨 결과, 두 사람 모두 이에 반발하여 스스로 정부에서 사직하였다. 말하자면 조선 문제를 교묘하게 활용함으로써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권력을 공고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운요호사건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운요호사건의 실체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적지 않지만, 아마도 그 진상은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가 부산에 주재하면서 대(對) 조선 교섭의 실무를 맡고 있던 외무성 관리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의 사주를 받아 독단적으로 일으킨 위력 시위였을 것이다. 그런데 사건 발생 직후 일본 정부와 언론은 이를 조선 초병의 선제 발포로 인한 무력 충돌 사건으로 날조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에 정당한 배상을 요구하거나 응징을 가할 것을 주장하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오쿠보 도시미치나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극소수의 정부 요인(inner circle)들은 운요호사건의 계획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와 무관하게 어떻게든 그 선후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운요호사건의 배경
운요호사건 당시 영종진에 상륙하는 일본군 병사들.문제는 오쿠보 정권이 조선과 전쟁을 벌일 의도도 실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1875년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았던 때로,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조약 개정, 반정부 세력의 무마, 재정 안정, 식산흥업(殖産興業)의 추진과 같은 난제가 안팎으로 산적해 있었다. 게다가 조선과의 전쟁은 청의 군사적 개입이나 러시아의 간섭을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따라서 무모한 정한론자를 제외하고, 책임 있는 당국자라면 조선과의 개전(開戰)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오쿠보 정권이 고안한 해법은 어떤 의미에선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미국의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이 1853년 흑선(黑船)을 이끌고 우라가에 나타나 일본의 ‘개국(開國)’을 이끈 것처럼, 이번에는 일본인 자신들이 페리의 역할을 맡아 ‘미개한’ 조선인을 ‘개화(開化)’시키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이 일종의 ‘외교극(外交劇)’은 국내적으로는 메이지 정부가 채택한 서구화 정책(Westernization)의 빛나는 성취로 선전되어 반정부 여론을 호전시키는 한편, 국제적으로는 아시아의 문명국으로서 국제적 위신 제고에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황사(皇使)’가 강화도에서 접견을 거부당하거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경우, 그 후폭풍은 정부의 존립을 위협할 만큼 엄청날 것이었다. 이 때문에 강화도에 온 일본 사절단은 일견 무력을 앞세우면서도 이면에서는 온갖 회유와 기만을 자행한 것이다. 그 일례로, 일본 측은 강화도에 사절을 파견하는 이유로 운요호사건과 서계 문제만을 들었을 뿐, 사절단이 강화도에 입성할 때까지 조약 체결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는 조선 측에서 조약에 관해 충분히 대비하고 그 입장을 정립하는 경우 회담이 장기화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약은 무슨 일인가?”
강화도조약의 일본 측 전권변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신헌: 조약은 무슨 일인가?
구로다: 귀국 지방에 관(館)을 열고 함께 통상하려는 것이다.
신헌: 300년간 통상하지 않았던 때가 있는가? 그런데 이제 갑자기 이를 따로 요청하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다.(《심행일기》)〉
일본 측 문서에 따르면, 강화도 협상 당시 조선 정부 내에서 이를 지휘한 것은 영의정 이최응(李最應)과 이조판서 민규호(閔奎鎬), 그리고 전(前) 우의정 박규수(朴珪壽)였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박규수였다. 박규수는 조선 후기 저명한 실학자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 그의 사랑방에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김윤식(金允植), 유길준(俞吉濬) 등 개항기의 걸출한 개화파가 배출되었다고 하여 실학과 개화사상을 잇는 사상적 가교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따라서 강화도조약의 체결 과정에서 조선 측의 능동적 대응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박규수의 신(新)사상에 주목해 왔지만, 강화도 협상 당시 그의 실제 대일 인식이나 대응 방침은 그보다 현실적인 것에 가까웠다.
“속국을 침범하지 말라”
아래 인용문은 강화도 회담 당시 신헌의 수행원 추금(秋錦) 강위(姜瑋)가 쓴 〈신 대관(大官)을 대신해서 환재 박 상국(相國)에게 올린 글〉이라는 서한의 일부다. ‘신 대관’은 신헌, ‘박 상국’은 박규수를 가리킨다. 박규수가 신헌에게 내린 지시는 다음과 같았다.
〈일본 영사가 처음 중국에 들어가서 개관(開館)과 교시(交市), 조약 체결 등을 청할 때 “속국을 침범하지 말라”라는 한 조항을 두었다. 이제 저들이 중국에 사절을 보내서 ‘조선과의 수호’라고 한 것은 일찍이 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번 일이 수호를 위한 것임을 스스로 밝힌 것이니, 그 의도는 만일 여의치 않아서 군대를 움직이는 데 이른다면 또한 중국에 해명하기를 “조선이 먼저 실수했다. 그러므로 부득이 군대를 쓰는 데 이른 것이지, 일본이 중국에 대해 약조를 위반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려는 것이다. 그 의도는 필시 이와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저들이 비록 병선(兵船)으로 공갈하더라도 반드시 먼저 움직여서 공격하진 않을 것이다.〉
“‘속국을 침범하지 말라’라는 한 조항을 두었다”고 한 것은, 1871년 청일수호조규 제1관의 “양국의 소속 방토(邦土)는 서로 예(禮)로써 대해 조금이라도 침월(侵越)할 수 없으며 이로써 영원한 안정을 얻는다”라는 구절을 가리킨다.
박규수는 일본의 근본적 의도가 조선 침공에 있다고 믿었다. 단, 이를 결행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청과 ‘소속 방토’-‘속국’인 조선을 포함하는-를 서로 침범하지 않기로 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강화도에 사절과 군함을 파견한 것 또한 조선 측에서 먼저 실화(失和)하기를 기다렸다가, 이를 청에 조약 파기의 구실로 내세우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박규수의 대응 전략은 ‘먼저 침범하지 않는다(不先犯)’와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다(不啓釁)’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먼저 침범하지 않는다’
박규수그런데 박규수는 서계 문제로 인해 일본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무분별한 강경 정책이 초래할 파국을 우려하여 서계의 접수를 주장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1876년 1월에 이르러 마침내 일본 군함이 강화도에 출현하자, 그동안 큰 목소리로 반일(反日)을 외치던 조정의 중신(重臣)들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 채 아무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미 현직에서 물러난 박규수가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임을 떠맡게 된 것이다.
“어찌 반드시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따름입니다”(《맹자》 ‘양혜왕 上’)와 같은 유교적 명분론을 대외관계의 원칙으로 삼은 조선에서 대일 유화론(宥和論)은 설 자리가 없었다. 박규수는 강화도 협상을 지휘하느라 심력을 소진한 탓인지, 이듬해인 1877년 초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도 그가 서거했을 때 북촌의 양반들은 박규수가 강화(講和)한 죄를 물어서 그 관(棺)을 쪼개야 한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황현, 《매천야록》). 그런 점에서 박규수는, 메이지유신의 주역을 그 문하에서 배출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보다는, 차라리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여 종사(宗社)의 명맥을 간신히 이었지만 이로 인해 사후(死後)까지 비난을 면치 못한 최명길(崔鳴吉)에 닮아 있다.
양국 관계 재개 위한 최소한의 기반 마련
강화도 협상에 임하는 조일 양국의 목표를 돌이켜 보면, 조선 측에서는 운요호사건 및 서계 문제에 대한 일본인들의 오해를 풀고 그들을 무사히 돌려보냄으로써 임박한 전쟁 위기를 피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에 반해 일본 측은 조선과 근대적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한편, 그 문호의 개방이라는 외교적 성과를 통해 메이지유신 이후 오랜 난제였던 조선 문제를 일단락하고자 했다. 양측 모두 실제로 전쟁을 벌일 의도는 없었고, 강화도에서의 협상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달리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고종의 칭찬과 오쿠보의 안도는 양측 모두 그 결과에 만족했음을 말해 준다.
강화도조약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서계 문제로 인한 교착 국면을 타개하고 양국 관계의 재개를 위한 최소한의 기반을 마련한 사실에 있다. 강화도에서 만난 양국의 사절단은 조일 양국의 위계 설정이라는 지극히 어려운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모색하기보다는 이를 은닉하고 미뤄 두는 데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그 대표적 예로,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자주지방(自主之邦)’으로 규정한 제1조를 들 수 있다. 당시 ‘자주’라는 말은 서구의 ‘주권적 독립’의 의미뿐만 아니라, 중국의 ‘속국’(조공국)이 명분 상의 위계와 무관하게 누려 온 내정(內政)과 외치(外治)의 ‘자주적 권한’의 의미로도 통용되고 있었다. 즉, ‘자주’라는 말의 모호성으로 인해, 일본은 조선을 서구적 의미의 독립국으로, 조선은 청국과의 기존 조공 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일본과의 교린 관계를 복원한 것으로 각각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발생한 것이다.
“모든 허물은 약한 데 있을 뿐”
강위그러나 일본과 조선 사이에 서열을 설정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과제에 가까웠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 정부가 강화도조약을 통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조일 관계에 내재한 근본적 갈등 요인을 잠시 덮어 두고, 국력을 기를 때까지 잠시 숨 돌릴 여지를 확보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문제는 이후 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주어진 약 20년 동안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가에 있다.
신헌의 수행원으로서 강화도 협상 과정을 직접 목격한 강위는 약 1년 뒤에 《심행잡기(沁行雜記)》라는 회고록도 집필했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조선이 굴욕을 당한 것은 결국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뼈저린 자성(自省)이었다. 진정한 극일(克日)의 길은 공허한 구호나 정치적 선동이 아니라, 그 축적한 것이 ‘약함’인지 아니면 ‘강함’인지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근대적 외교 교섭을 최초로 경험한 조선인이 남긴 이 역사적 교훈은 1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서 강한 이웃의 대국 보기를 마치 못 본 것처럼 하며, 오랑캐로도 부족해서 금수(禽獸)로 여긴다. 스스로 금수를 제압하고 물리칠 힘이 없으면서 한갓 한 번의 꾸짖음으로 이를 당해 내려고 하니, 어떻게 그 발톱과 이빨을 막아 낼 수 있겠는가? (중략) 그러나 돌이켜서 따져 보면 모든 허물은 약한 데 있을 뿐이다. 약함이 축적되어 패망에 이르고 강함이 축적되어 승리를 취하니, 그 기틀은 나에게 있고 적에게 있지 않다. 다만 축적한 것이 무엇인지에 달렸을 뿐이다.〉(《심행잡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