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개항 150주년, 근대화를 다시 생각한다

개항의 충격과 ‘한국 사람’ 만들기

중화문명권에서 벗어나 근대 국가의 국민으로

  • 글 :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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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오군란 후 중국이 조선에 대한 통제 강화하면서 친중위정척사파 등장
⊙ 갑신정변·갑오경장 거치며 좌절한 친일개화파, 친미기독교파로 전향
⊙ ‘독립문’의 독립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의미
⊙ 기독교 전래로 주자성리학에서 탈피, ‘문명 교체’ 경험
⊙ 친미기독교파, 한글을 재발견하면서 ‘국문’을 가진 ‘국민’ 만들기에 나서
⊙ 대한민국,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가치와 제도를 적극 도입하면서 자주적 근대화

咸在鳳
1958년생. 미국 칼턴대 경제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정치학 석·박사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유네스코본부 사회과학국장, 미국 랜드(RAND)연구소 선임연구원, 아산정책연구원 원장·이사장,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 민간위원, 現 한국학술연구원장 / 저서 《유교, 자본주의, 민주주의》 《한국의 보수를 논한다》 《한국 사람 만들기》(1~6)
중국으로부터의 독립과 근대화 의지를 상징하는 독립문. 사진=조선DB
“조약이라고 하는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1876년 2월 11일 강화도에서 조선의 접견대신 신헌(申憲)이 일본 측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1840~1900년) 전권대신을 만나 던진 질문이다. 쇄국(鎖國)을 고집하는 조선을 개국시키기 위해 일본의 메이지(明治) 정부는 대규모 함대와 함께 ‘구로다 사절단’을 파견하여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도록 한다. 조선 조정은 어쩔 수 없이 판중추부사 신헌을 ‘접견대신’에 임명하여 협상에 임하도록 한다. 《고종실록》에 실린 당시의 대화다.
 
  구로다: 이번에 귀국과 종전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실로 두 나라에 있어 다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신의와 친목을 강구하는 데서 특별히 상의해서 결정할 한 가지 문제가 있으니 초록(抄錄)한 13개 조목의 조약을 모름지기 상세히 열람하고 귀 대신이 직접 조정에 나가 임금을 뵙고 품처(稟處)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헌: 조약이라고 하는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구로다: 귀국 지방에 관(館)을 열고 함께 통상(通商)하자는 것입니다.〉

 
  그러자 신헌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리나라는 바다 동쪽에 치우쳐 있어 갈대만 무성하고 척박한 땅으로서 단 한 곳도 물품이 집결되는 곳이 없습니다. 토산물로 말하더라도 곡식과 무명뿐이며 금·은·진주·옥 같은 보물이나 능라(綾羅)나 금수(錦繡) 같은 사치품은 전혀 없습니다. 나라의 풍속이 검박하여 옛 습관에 푹 빠져 있고 새로운 법령을 귀찮아하니 설사 조정에서 강제로 명령을 내려 실행하도록 하더라도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귀국에는 별로 이로울 것이 없고, 우리나라에는 손해가 클 것입니다.”
 
 
  조약이 무엇인지 몰라
 
  2월 17일, 고종은 청(淸)의 칙사들을 접견한다. 고종은 영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1814~1888년)을 청에 보내 이홍장(李鴻章·1823~1901년)과 만나 일본과의 조약 체결에 어떻게 대응할지 자문을 구한 바 있다. 청의 칙사들은 이에 대한 답방이었다. 고종은 일본이 군사들을 보내와 조약을 맺자고 하는데 총리아문이 자문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청의 칙사들은 그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다면서 조선이 일본과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청의 칙사들은 이틀 후 귀국길에 오른다. 같은 날 조정은 일본과의 조약을 결정한다. 일주일 후인 1876년 2월 27 일, 조선과 일본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강화도조약’을 맺는다.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 조약이다. 조선이 ‘만국공법(萬國公法)’이라 불리던 근대 국제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개항(開港)’하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된 사건이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조약’이 무엇인지 몰랐다. ‘통상’이 왜 필요한지 몰랐다. ‘개항’의 의미를 알았을 리 없다. 일본이 무력(武力)을 동원했고 ‘종주국(宗主國)’이던 중국이 허락을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체결한 조약이었다. 조선의 근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위정척사파의 반대
 
  일본의 강요와 청의 종용하에 어쩔 수 없이 ‘개항’은 하였지만, 곧 위정척사(衛正斥邪)파의 거센 비판에 봉착한다. 강화도조약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인 1월 22일,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1834~1907년)은 그 유명한 ‘도끼 상소’를 올려 개항이 가져올 5가지 폐단을 들어 일본과의 조약 체결을 반대한다.
 

  〈첫째, 조선이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강화 조약을 맺는다면 이를 아는 일본이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하나라도 거절하면 그것을 구실로 침략해 올 것이기 때문에,
 
  둘째 조선에서 일본과 서구의 상품들이 팔리기 시작한다면 백성들이 사치품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곡식과 포목 등 생필품을 팔아서 사치를 하기 시작할 것이고, 이렇게 된다면 경제적으로 파탄이 나는 것은 물론 근검절약의 정신도 사라지면서 정신적·도덕적으로 타락할 것이기 때문에,
 
  셋째 일본이 서양의 앞잡이이고 따라서 일본에 나라를 열면 인륜을 저버린 사학(邪學)인 천주교가 더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조선 사람들은 모두 금수(禽獸)로 변할 것이기 때문에,
 
  넷째 나라를 열면 외국인들이 국내에 거주하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이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부녀자들을 겁탈하여 사회 질서가 무너질 것이기 때문에,
 
  다섯째 일본과 서양은 기본적인 인륜(人倫)이 없는 진정한 금수이기 때문에 청나라의 오랑캐만도 못하기 때문에.〉

 
 
  근대화 필요성 못 느낀 조선 지도층
 
 
수신사 김기수.
그러나 강화도조약은 일본이 기대한 만큼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조선과 일본은 정식 국교(國交)를 맺은 것도 아니었고, 조약으로 인해 조선의 개혁·개방이 촉발된 것도 아니었다.
 
  제1차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파견된 김기수(金綺秀·1832~?)는 철저한 주자성리학자였다. 그는 일본의 근대화를 직접 목격하고도 일본이 겉치레만 화려한 서양 오랑캐의 문물에 눈이 멀어 서양의 모든 것을 흉내 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일본 측의 간절한 요청에도 근대 문물을 시찰하는 것을 모두 거부한다. 전보나 가로등,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목격하고 놀라기도 했지만, 그는 메이지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이해할 의지도, 식견도 없었다.
 
  김기수는 방일(訪日) 중 문부성의 구키 류이치(九鬼隆一·1852~1931년)를 만난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년)의 제자이며 훗날 주미 일본 대사를 역임하게 되는 구키는 김기수에게 “귀국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朱子)만 숭상합니까? 아니면 다른 학문도 숭상하는 것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김기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리나라의 학문은 500년 동안 주자만 숭상하였을 뿐입니다. 주자를 어기는 사람은 바로 난적(亂賊)이란 죄목으로 처단하였으며, 과거(科擧) 보는 문자까지도 불가(佛家)·도가(道家)의 말을 쓰는 사람은 귀양 보내어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국법(國法)이 매우 엄중했던 까닭으로 상하와 귀천(貴賤)이 다만 주자만 숭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군주는 군주의 도리(道理)대로, 신하는 신하의 도리대로,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리대로, 아들은 아들의 도리대로, 형은 형의 도리대로, 아우는 아우의 도리대로, 남편은 남편의 도리대로, 아내는 아내의 도리대로 하여, 한결같이 공자·맹자의 도리만 따랐으니, 다른 갈림길이 엇갈릴 수도 없으며, 다른 술수(術數)가 현혹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조선의 지도층은 근대화에 대해 아무런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조약의 후속으로 1876년 ‘조일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이때도 조선은 일본 측이 가져온 조약 초본을 아무런 수정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국제 통상에 무지했던 조선 측은 처음 몇 년간은 조선과 일본 간의 무역에 관세를 부과하지 말자는 일본 측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조일통상조약’이 다른 어떤 조약보다도 불평등 조약이 된 이유다.
 
 
  친일개화파의 출현
 
  친중(親中)위정척사파와 흥선대원군, 조선의 왕실은 모두 근대 문명을 금수와 같은 서양 오랑캐의 것으로 치부하고 거부하면서 그 내용을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조선이 상국(上國)으로 모시던 청은 왕조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중국의 유교 문명이 우월하다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을 견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이 근대 문명을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는 ‘문명개화(文明開化)’의 이름으로 급속한 근대화를 이루고 있던 일본이었다. 이 비좁은 통로를 이용하여 문명개화의 당위성을 배우고 근대 문명을 조선에도 이식하고자 한 사람들이 친일(親日)개화파다.
 
  친일개화파는 일본으로부터 근대 산업·군사·교육·법뿐만 아니라 ‘독립(獨立)’의 개념까지 배웠다. 이들은 메이지 일본이 ‘만국공법’이라 불리는 근대 국제법을 익히고 불평등 조약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보면서 ‘민족국가’라는 독립 단위로 구성되어 있는 근대 국제 질서를 배운다. 친일개화파는 메이지 일본을 통하여 조선과 청 간의 사대(事大) 관계가 근대 국제 질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용납할 수 없는 치욕적인 종속(從屬) 관계라는 사실을 처음 깨닫는다.
 
  조선 사람의 가슴과 뇌리에 깊이 뿌리내린 반일(反日) 감정과 ‘왜(倭)’에 대한 문화적 우월 의식, 피해 의식, 강력한 쇄국 정책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에 이르면 일본을 새로운 문명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친일개화파가 출현한다. 놀라운 인식의 전환이었다. 늘 중국을 문명의 원천으로 간주해 온 조선 사람들이 중화(中華) 질서의 가장 변방이었던 일본을 새로운 문명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개화승 이동인
 
  이러한 인식의 대전환은 두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
 
  첫 단계는 ‘북학파(北學派)’의 부상(浮上)이었다. 북학파는 ‘숭명반청(崇明反淸)’ 사상이 조선 후기의 주류 사상으로 자리를 잡은 후에 ‘연행사(燕行使)’로 청을 다녀온 관료, 학자들과 이들을 수행하였던 역관 등 중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쇄국 정책을 고수하면서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어 가던 조선에서 그나마 바깥세상을 구경할 수 있던 사람들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쇄국 정책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를 감지하고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면서 일본을 배우기 시작한 극소수 인사들의 출현이었다. 당시 조선 주류 사회는 일본을 접할 기회도, 의지도 없었다.
 
  일본과 첫 접촉을 시도한 이들은 조선 사회에서 천대받던 불교승(佛敎僧)들이었다. 일본은 조선과는 달리 불교 국가였다. 이런 일본이 급속한 근대화를 이루고 있었다. 조선의 불교 승려들은 당연히 일본에 관심을 갖게 된다.
 
  마침 당시 강화도조약으로 개항된 부산에는 일본 상인들의 대규모 거주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이들을 위한 일본 불교 사찰이 세워지고 일본 승려들이 부산에 거주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불교승 이동인(李東仁·?~1881년)과 탁정식(卓挺埴·?~1884년)은 부산의 일본 승려와 접촉하면서 일본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은 불교에 심취하고 있던 김옥균(金玉均·1851~1894년), 그리고 그의 친구였던 박영효(朴泳孝·1861~1939년), 서재필(徐載弼·1864~1951년) 등을 만나 일본의 놀라운 변화를 알린다.
 
  급격히 근대화하고 있는 일본에 직접 건너가 보고 배우기 시작한 최초의 조선 사람은 불교 승려 이동인이었다. 1879년 김옥균과 박영효의 부탁과 후원으로 처음 도일(渡日)한 이동인은 1년간 일본 말과 문화를 익히면서 일본의 정치인, 지식인, 기업인은 물론 일본에 상주하고 있던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친일개화파와 일본의 교량 역할을 한다. 이후 1880년 제2차 수신사 파견, 1881년 1월 11일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파견, 그리고 세 차례에 걸친 김옥균의 방일과 장기 체류를 통하여 조선의 개화파는 일본의 개화 사상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귀국하여 조선의 개화를 기획한다.
 
 
  청, 서구 열강과의 조약 체결 중재
 
  그러나 친일개화파는 두 개의 장애물을 만난다.
 
  첫째는 친중위정척사파였다. 대원군의 개혁을 ‘패도(覇道) 정치’로 몰아 대원군을 실각시킨 위정척사파였지만 고종이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적극 배우려고 하자 이번에는 대원군과 손을 잡고 이에 격렬히 맞선다. 임오군란(壬午軍亂·1882년)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이 함께 친일개화파의 개항 시도에 반대하여 일으킨 정변이었다. 그러나 임오군란은 역설적으로 청이 조선의 내치(內治)와 외교를 완전히 장악하는 결과를 낳는다.
 
  청은 메이지 유신을 추진하면서 국력을 키우는 일본이 조선에 진출하는 것을 막고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1860년 베이징(北京)조약을 통하여 청으로부터 연해주(沿海州)를 할양받고 블라디보스토크(동양의 정복자)를 건설한 러시아가 만주와 한반도에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편전쟁과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겪으면서 국력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청은 일본과 러시아를 상대로 정면 승부를 하기에는 실력이 부족하였다.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교였다.
 
  당시 청의 외교를 맡은 이홍장은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조선과 서구(西歐) 열강과의 조약 체결을 적극 주선한다. 조선이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하면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에 대한 야욕을 섣불리 표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홍장이 조미수호통상조약(1882년), 조영수호통상조약(1883년), 조독수호통상조약(1883년) 등을 직접 중재한 이유다.
 
  그러나 임오군란으로 쇄국주의자였던 대원군과 위정척사파가 다시 득세하자 이홍장은 군대를 보내 대원군과 위정척사파를 제거한다. 이홍장은 청의 황제가 책봉한 고종을 상대로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대원군을 벌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으로 군대를 급파하여 군란을 평정하고, 대원군을 납치하여 톈진으로 압송한다. 외세를 배격하겠다고 일으킨 임오군란은 오히려 외세가 조선 내정에 전례 없이 깊이 간여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청은 병자호란 이후 처음으로 조선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직접 챙긴다. 전통적인 사대 관계에서는 중국이 속방(屬邦)의 내정이나 외교에 직접적으로 간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빌미로 청은 조선과의 관계를 전통적인 사대 관계에서 근대적인 제국주의 식민지 체제로 전환시키고 원세개(袁世凱·1859~1916년)를 보내 조선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다.
 
  임오군란이 불러온 청의 군사 개입과 정치 간섭의 가장 큰 수혜자는 여흥 민씨(驪興 閔氏) 척족(戚族)이었다. 1874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민씨 척족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톈진으로 납치되자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청 역시 민씨 척족의 이용 가치를 간파하여 이들과 적극 손을 잡는다. 친일개화파의 두 번째 장애물인 ‘친청파(親淸派)’는 이렇게 형성된다.
 
 
  갑신정변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그러나 일본을 통하여 근대 국가와 근대 국제 질서의 성격을 이해하기 시작한 개화파에게 조·청 간의 조공 관계는 굴욕적이었다. 중국은 더 이상 문명의 기준도, 따라야 할 이상도 아닌 오직 극복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런 중국에 의존하여 권력을 유지하면서 조선의 독립과 개화를 모두 가로막고 있는 민씨 척족 주도의 친청파는 타도의 대상이었다. 급격한 근대화의 길을 가고 있는 일본을 따라가도 모자라는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청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자 다급해진 친일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다.
 
  그러나 역사는 친일개화파에게 가혹했다. 조선은 메이지 유신과 같은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 정치 세력도, 사회적·이념적 여건도 갖추지 못했다. 청과 정면 대결을 하기에는 아직 실력이 부족했던 일본도 친일개화파를 돕지 않는다. 원세개가 청군을 이끌고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결국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난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 대한 중국의 직접 통치는 더욱 강화된다. 조선은 근대화에 앞서가고 있는 일본을 따라가기는커녕, ‘동양의 병자(病者)’로 낙인찍힌 채 서양 열강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고 있던 청의 통치를 받게 된다. 한편, 개화파는 역적으로 몰려 미국, 일본 등지로 망명을 떠났고 조선에 남은 그들의 가족은 연좌제(緣坐制)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 혁명은 실패한다.
 
 
  청일 전쟁과 조선의 독립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조선은 ‘독립’을 얻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갑신정변으로부터 10년 후인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한다. 전 세계 모든 전문가의 예측과 달리 일본이 압승을 거둔다. 1895년 청일 전쟁 종결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년)와 이홍장이 체결한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의 제1조는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자주독립을 훼손하는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전례(典禮) 등은 장래에 완전히 폐지한다”라고 규정했다. 이로써 원(元)과 고려, 조선과 명(明), 조선과 청이 맺은 조공(朝貢) 관계는 해체되고 수세기 이어온 ‘중화 질서’는 무너진다. 그리고 조선은 ‘독립국’이 된다.
 
  조선이 드디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였음을 전해 들은 서재필은 갑신정변 실패 이후 10년을 이어온 오랜 미국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하여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문’을 세운다. 이때 ‘독립’이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했다.
 
  오늘날 많은 한국 사람은 서대문의 ‘독립문’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문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 바로 뒤에 서대문형무소의 옛 자리가 있어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독립문’은 중국의 칙사가 무악재를 넘어서 조선에 당도하면 조선의 왕이 직접 나가 그를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慕華館), 즉 ‘중국을 사모하는 건물’을 허문 자리에 세웠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독립문’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문이었다면 1897년에 지어진 독립문을 일제(日帝)가 일제 시대 내내 그대로 두었을 리 만무하다. 독립문은 오히려 일본이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켜 줬음을 상기시켜 주는 상징물이었기에 일제가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친일개화파의 좌절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갑신정변 이후 일본과 미국 등지를 유랑하면서 망명 생활을 이어가던 친일개화파들을 조선으로 귀국시켜 일본을 모델로 하는 조선의 근대화 개혁을 다시 한 번 추진하게 한다. 제2차 수신사로 파견되어 개화파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홍집과 오랜 일본 망명 생활에서 돌아온 박영효 등이 주도하는 갑오경장(甲午更張·갑오개혁)이었다. 10년 전 갑신정변 때 정강(政綱)을 거의 그대로 따른 개혁이었다.
 
  그러나 이도 잠시, 개혁을 시작한 지 채 1년도 되기 전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감행하면서 친일개화파 주도의 근대화의 노력은 다시 한 번 수포로 돌아간다. 친일개화파들은 재차 정치적 유랑 생활을 시작하고 조선은 망국(亡國)의 길로 치닫는다.
 
  결국 또 10년이 흐른 1904년,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친일개화파들은 다시 한 번 귀국길에 오른다. 그러나 일본은 친일개화파들에게 조선의 정국(政局)을 맡기는 대신 조선을 합병하면서 직접 통치에 나선다. 수구(守舊) 세력의 끊임없는 저항과 반동은 결국 모든 근대화 개혁을 좌절시켰고, 결과적으로 일본에 국권(國權)을 내주는 상황에 이른다.
 
 
  친미기독교파의 등장
 
  이때 수많은 친일개화파가 기독교로 개종(改宗)하면서 친미(親美)기독교파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윤치호(尹致昊·1865~1945년)는 갑신정변 이후 망명 중이던 상해(上海)에서 1887년 기독교로 개종한다. 서재필과 서광범(徐光範·1859~1897년)은 갑신정변 이후 망명 중이던 미국에서 기독교로 개종한다.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던 유길준(兪吉濬·1856~1914년)과 이상재(李商在·1850~1927년)는 1904년 기독교로 개종한다. 일본으로부터 문명개화 사상의 세례를 받고 메이지 유신식 급진 근대 개혁을 꿈꾸며 정변을 일으켰던 친일개화파들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탈이 노골화되면서 친미기독교파로 전향하기 시작한다.
 
  조선은 미국으로부터 기독교(개신교)와 민주주의를 배운다. 매개는 1884년 갑신정변을 전후로 조선에 정착하기 시작한 미국의 선교사들이었다. 미국의 선교사들이 도착할 즈음의 조선은 주자성리학에 기반하는 봉건 질서의 이념적·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모순이 극에 달하면서 몰락하고 있었다. 이념적으로는 명-청 교체기를 겪으면서 수립한 ‘소중화(小中華)’ ‘숭명반청’ 사상이 쇄국 정책과 함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사유(思惟) 체계 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원-명-청을 통하여 수립되었던 중화 질서가 구미(歐美) 열강의 도래와 일본의 근대화로 문명사적 대전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모든 권력은 당시 32세였던 고종, 33세였던 민 중전, 32세였던 민영준[閔泳駿·후에 민영휘(閔泳徽)로 개명·1852~1935년], 그리고 24세였던 민영익(閔泳翊·1860~1914년) 등이 장악한다. 이후 청일 전쟁이 발발하는 1894년까지 10년 동안 고종과 민비, 민씨 척족의 폭정하에 조선은 무너진다. 경제와 외교, 국방은 물론 교육과 의료 등 정부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마저 방기한 채 국가로서의 면모를 잃는다.
 
  과거 제도가 타락하고 매관매직이 절정에 달하면서 전통적 유교 교육은 유명무실해진다. 민씨 척족이 주요 관직을 독식하고 그들에게 아부하는 일부 관료만 출세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서당과 서원, 성균관 등을 통한 전통적인 사교육과 공교육은 무너진다. 경제는 수십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무너졌지만 조선의 지도층은 경제를 개혁할 지식도, 의지도 없었다.
 
  조선의 친중위정척사파들은 여전히 상업을 죄악시하면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농본(農本) 사회를 바탕으로 한 왕도(王道) 정치의 이상을 고집하였다. 왕도 정치에서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관개수리(灌漑水利) 시설의 유지와 확장이었지만 19세기 말의 조선 정부는 이 의무마저 방기한다. 백성들은 흉작과 기근, 전염병과 도적떼에게 시달리지만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경제가 무너지는 가운데 정부의 세수(稅收)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백성에 대한 수탈뿐이었다. 정부에 의한 노골적인 수탈이 이어지면서 노동생산성과 노동 윤리는 땅에 떨어진다. 생존 자체가 위협당하면서 조선 사회는 기강과 윤리 도덕이 무너진 적나라한 강자존(强者存),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원리만 횡행하는 ‘자연의 상태’로 전락한다.
 
 
  문명 교체
 
  칼뱅주의 신학과 제도, 그리고 복음주의로 무장한 채 조선으로 건너온 개신교(改新敎) 선교사들은 추상적인 신학(神學)을 가르치지 않고 조선의 일상을 개혁하는 데 뛰어든다. 이들은 유교가 악(惡)이고 이단(異端)이라고 설파하면서 조선의 국교인 주자성리학과의 타협을 불허한다. 고려 말에 도입된 주자성리학이 1000년 ‘국교(國敎)’였던 불교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듯이 조선 말에 도입된 개신교는 조선의 국교인 주자성리학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세종과 같은 조선의 군주들이 주자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종법(宗法) 제도를 도입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한 제사를 밀어붙였다면 조선 말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주자성리학적 질서의 주축이었던 제사를 우상 숭배로 간주하고 금지한다. ‘문명 충돌’과 ‘문명 교체’였다.
 
  선교사들은 조선 사회의 봉건적 신분 질서를 공격한다. 신분,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 같은 장소에서 설교를 듣고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고, 간증과 토론을 하도록 한다. 예배 시작하기 전 양반 출신 교인들은 회중 앞에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모두 평등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자신이 특권(特權)을 누려온 신분제를 비판하여야 했다. 그리고 신분과 상관없이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불러야 했다.
 
  전교(傳敎) 초기 개신교로 개종한 조선 사람들은 대부분 상민이나 백정, 기생, 갖바치, 사공, 노비와 같은 천민(賤民)들이었다. 이들에게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개신교로 개종해도 이들은 잃을 것이 없었다.
 
  반면, 양반이 개신교로 개종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성리학 질서를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신분과 특권, 정체성(正體性)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개신교 선교사들은 일상 속에서 금욕적인 삶, 근면, 절제, 청결, 기강을 요구함으로써 봉건 사회의 나태함과 무질서, 미신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의 방식과 틀을 제공했다. 개신교는 혁명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
 
 
  한글의 재발견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선에 기독교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씨앗도 뿌린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개화파조차도 그저 어렴풋이 일본의 지식인들이나 서적을 통해 들어봤을 뿐 아무도 이해하지도, 받아들일 생각조차도 하지 않던 사상과 체제였다. 그러나 개신교회가 세워지고 개신교도들이 늘어나면서 조선 사람들은 미국 기독교가 체화(體化)하고 있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자유주의를 자연스레 습득한다.
 
  조선 역사상 최초의 선거는 장로(長老)교회에서 일반 교인들이 장로를 선출하는 선거였다. 철저한 1인 1표제였기 때문에 교인 중 숫자가 많은 천민 출신이 장로로 선출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민주주의의 산실(産室)이었다.
 
  또한 남녀 차별 없이 세례를 주고 남녀가 함께 같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함으로써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차별적 사고를 극복하고 남녀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실질적인 계기를 마련한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용도 폐기되었던 한글도 재발견한다. 성서를 어느 언어로 번역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선교사들은 한글이라는 놀라운 글자를 발견하고 선교 초기부터 한글 성서 번역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비록 400년 전에 발명되었지만 조선의 지식층과 지도층에 의해 외면당하면서 아무런 체계도 갖추지 못하고 있던 한글이 문법과 띄어쓰기 체계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한글 성경과 교리 공부를 위한 책들을 배포하면서 한글 교육에 전념한다. 조선의 상민과 천민들이 처음으로 글을 체계적으로 배운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배재, 이화, 숭실, 연희 등 근대 학교들을 설립하면서 최초로 한글을 이용한 근대 교육을 펼친다.
 
  칼뱅주의가 유럽이 봉건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사상적 분수령이었다면 조선에서는 성리학적 봉건주의에서 근대주의로 넘어가는 촉매 역할을 한다.
 
 
  독립 아닌 독립
 
  조선 사람이 아닌 근대 한국인은 청일 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한국 사람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첫 번째는 조선이 중국의 ‘속방’ 지위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조선 사람들이 중화문명의 일원이라는 자아(自我) 의식, 즉 ‘소중화’ 의식과 사대주의를 버리고 ‘독립 민족국가(independent nation-state)’의 ‘국민(national)’ ‘인민(people)’ ‘시민(citizen)’이라는 근대적(modern)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조건은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충족됐다. 청일 전쟁의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선포했다.
 
  그러나 조선이 국제법상으로는 독립국의 지위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 백성들은 독립이 무엇인지 몰랐고 원하지도 않았다. 중국에 대한 사대는 변함이 없었다. 근대 국제 질서가 무엇인지, 근대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국민’이 무엇인지, ‘인민’이 무엇인지, ‘시민’이 무엇인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조선 사람이 한국 사람이 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이 충족되는 것은 요원해 보였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칩거 중이고 러시아와 일본은 동북아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을 때 조선 사람을 봉건 체제로부터 끌어내 근대 한국 사람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한 주인공은 친미기독교파다. 조선의 독립과 부국강병을 꿈꾸며 1884년에는 갑신정변을, 1894~1895년에는 갑오경장을 주도한 친일개화파가 몰락하자 조선에서 근대 국가 건설의 당위와 시급성을 절감하고 있던 세력은 서재필과 윤치호, 주상호[주시경(周時經)·1876~1914년], 이상재, 남궁억(南宮檍·1863~1939년), 이승만(李承晚·1875~1965년) 등의 친미기독교파뿐이었다.
 
 
  친미기독교파의 근대화 운동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통해 근대 시민을 양성하려 한 서재필.
구성원이 특정 계층에 국한되었던 친일개화파와 달리 친미기독교파는 다양한 계층과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형성됐다. 만주에서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였던 로스, 매킨타이어 목사 등이 1878년부터 의주와 만주를 오가는 조선 행상들을 개종시키고 언문성경 번역의 대역사를 시작한다. 서북 지방에 기독교가 가장 먼저 뿌리내리기 시작하는 이유다. 한양에서는 1884년 입국한 알렌, 1895년 입국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등의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을 통해 의료, 교육 선교가 시작되고 언문성경 번역 작업이 시작된다. 조선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의 전교가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서재필과 윤치호 등은 미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난다.
 
  서재필과 윤치호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물론 미국 최고의 고등 교육을 받는 동시에 미국 사회를 밑바닥부터 체험하면서 미국의 이상과 현실, 이념과 제도, 가치관과 풍습, 정치와 사회, 문화를 체득(體得)한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전교로 국내에서 기독교에 귀의하고 미국 문명을 익힌 계층과 미국에서 장기간 체류하면서 기독교에 귀의하고 미국 문명을 익힌 인사들이 만나는 계기는 청일 전쟁으로 마련된다.
 

  1895년, 미국으로 망명을 떠난 지 12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은 귀국 직후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서 강연을 한다. 이때 서재필의 강연에 감명받은 배재학당 학생 이승만, 양홍묵(梁興默·1891~1950년), 주상호(주시경) 등은 협성회(協誠會)를 결성하고 《협성회보》를 출간하는 한편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신문》 제작과 독립협회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윤치호는 1897년 서재필이 해고되고 다시 미국으로 떠나면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떠맡으며 친미기독교파를 이끈다.
 
 
  ‘국문’을 가진 ‘국민’
 
 
한글의 재발견에 앞장선 주시경.
갑오경장은 실패하고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은 아관파천으로 귀결되고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만들고자 하는 고종의 시도가 노골화되자 친미기독교파는 조선의 진정한 독립은 정변으로도, 전쟁으로도, 국제법으로도, 제도 개혁으로도 쟁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이들은 조선이 독립국가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주자성리학 체제하에서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조선 사람들의 중화주의, 사대주의, 전근대적 자아 의식, 봉건적 정체성을 근대 민족 국가의 국민, 인민, 민족으로서의 자아 의식과 정체성으로 개조하는 길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친미기독교파는 조선 사람들의 중화주의를 폐기하고 독립정신을 불어넣기 위해 네 가지 전략을 구사한다.
 
  첫째는 조선 체제를 떠받치고 있던 중화사상, 즉 주자성리학의 격하였다. 친미기독교파는 조선 중화주의와 사대주의의 토대인 유교를 봉건적인, 시대착오적인 이념으로 비판하면서 주자성리학 질서를 떠받치고 있던 제사, 신분 제도, 남녀차별 제도의 철폐에 주력한다.
 
  둘째는 중화문명과 주자성리학을 대체할 새 문명의 제시였다. 친미기독교파는 사대주의와 소중화 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유교를 대신하여 조선 사람들의 독립정신과 시민정신을 고취시키고 민주주의와 의회 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 국가 건설을 촉진시킬 수 있는 종교와 사상은 개신교뿐이라고 믿고 전교에 진력한다.
 
  셋째는 문체(文體) 혁명이었다. 친미기독교파는 중화문명과 주자성리학, 사대부들의 문자인 한문을 폐기하고 기독교 선교사들이 재발견하고 재창제한 ‘언문(諺文)’을 ‘국문(國文)’으로 격상시키고 보급하면서 조선 사람들을 고유의 글인 ‘국문’을 보유한 ‘국민’으로 재규정한다.
 
 
  ‘국민’ 만들기
 
  넷째는 새 나라의 주인이 될 ‘국민’ ‘인민’ 만들기였다.
 
  중화 질서와 주자성리학 체제의 주인은 문반 사대부였다. 조선은 신분차별, 성차별, 지역차별의 구도 위에 구축된 체제였다.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들은 조선을 분열 통치하였다. 동질성보다는 차이를, 평등보다는 서열을 본질로 간주하는 유교의 신분 제도와 예법을 통하여 위계 질서와 차별을 제도화시키고 심화시킴으로써 왕실과 사대부의 권력과 특권을 지켰다. 같은 ‘민족’의 절반을 노예로 사고팔고 나머지도 ‘상놈’으로, ‘천한 놈’으로 간주하는 나라에 ‘민족’이나 ‘국민’ ‘인민’이란 개념은 뿌리내릴 수 없었다. 친미기독교파는 유교 이념과 체제하에서 갈릴 대로 갈린 조선 사람들을 근대 국가의 주인인 국민, 인민, 민족으로 개조하기 시작한다.
 
  이 네 가지 전략들을 구사하기 위해 친미기독교파가 동원한 것이 《독립신문》과 《협성회보》 《매일신문》 《제국신문》 《조선기독교인회보》 등 조선 최초의 독립언론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 조선 최초의 ‘시민 단체’였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전례 없는 전제(專制) 왕권을 장악한 고종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이 견제 세력마저 제거되자 고종과 측근들의 전횡은 극에 달한다.
 
  그러나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실패로 돌아간 후에도 기독교는 계속해서 수많은 학교와 병원, 교회, 부속 단체들을 설립하여 조선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치료하고 개종시키면서 근대 사회의 이념과 청사진을 제공한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고 기독교 사상을 공유했던 윤치호, 서재필, 주시경, 이상재, 이승만, 유성준(兪星濬·1860~1934년), 남궁억, 안창호(安昌浩·1878~1938년), 길선주(吉善宙·1869~1935년) 등 수많은 인재는 민족지도자로서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하여 매진한다.
 
 
  개항 150주년
 
  2026년은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지 150년이 되는 해다. 개항이 무엇인지, 통상이 무엇인지, 조약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체결한 조약이었다. 이후로도 일본의 개화사상, 미국의 기독교의 세례를 받은 세력이 근대화를 위하여 악전고투하지만 조선의 지배 계층은 모든 근대화 시도를 무산시키면서 국권을 일본 제국에 넘긴다.
 
  자주적인 근대화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建國)을 기다려야 했다. 대한민국은 자주독립,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국제통상 등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가치와 제도를 적극 도입하면서 자유주의 국제 질서에 적극 편승한다. 친일개화파와 친미기독교파가 그토록 염원하고 도입하고자 했던 가치관과 제도, 체제와 사상을 드디어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역시 숱한 도전과 위기가 있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면 오늘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다. 근대의 문턱에서 실패한 국가로 전락했던 조선이 세계 6대 교역국인 대한민국으로 변신한 것은 기적이다. 근대화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조선에서 출발하여 근대 국가의 총아인 대한민국으로 변신하는 과정, 그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기적이라 하지만 여하튼 한국 사람들이 일군 기적이다. 치열했고 드라마틱했던 그 역사를 탐구하면서 이 기적을 이어 나아갈 지혜를 모색하는 것이 강화도조약 150주년, 개항 15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도리이자 역사적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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