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대 국회의원 중 고대 출신은 76명… 학부 출신 32명, 대학원(특수·전문 포함) 출신 44명
⊙ 고대 동문들이 끈끈한 이유…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중 탄압당하며 결속력 강해져”
⊙ 국내 대학 중 국제화 순위 1위… 재학생 5명 중 1명은 외국인
⊙ 기숙사엔 무슬림 기도실, 학생식당엔 할랄푸드
⊙ 고대 동문들이 끈끈한 이유…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중 탄압당하며 결속력 강해져”
⊙ 국내 대학 중 국제화 순위 1위… 재학생 5명 중 1명은 외국인
⊙ 기숙사엔 무슬림 기도실, 학생식당엔 할랄푸드

- 사진=고려대
〈민족(民族)의 힘으로 민족(民族)의 꿈을 가꾸어 온 민족(民族)의 보람찬 대학(大學)이 있어 / 너 항상(恒常) 여기에 자유(自由)의 불을 밝히고 정의(正義)의 길을 달리고 진리(眞理)의 샘을 지키느니 / 지축(地軸)을 박차고 포효(咆哮)하거라 / 너 불타는 야망(野望) 젊은 의욕(意慾)의 상징(象徵)아 / 우주(宇宙)를 향한 너의 부르짖음이 민족(民族)의 소리 되어 메아리치는 곳에 / 너의 기개(氣槪) 너의 지조(志操) 너의 예지(叡智)는 조국(祖國)의 영원(永遠)한 고동(鼓動)이 되리라〉
바로 ‘호상비문’,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지낸 조지훈 선생의 글이다. 고대의 이념인 ‘자유 정의 진리’를 유려한 문장으로 형상화해 고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그려냈다. 고려대 생이라면 이 비문과 친숙하다. 탁본 형태로 캠퍼스와 그 근방 식당 여기저기에 걸려 있어서다. 고려대 응원곡 중 가장 유명한 노래인 ‘민족의 아리아’는 호상비문을 가사화했다.
호상비문의 첫 문장 그대로 고려대는 민족의 힘으로 탄생한 민족의 대학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120년 전인 1905년, 당시 탁지부 대신이자 내장원경이었던 이용익(李容翊·1854~1907년) 선생은 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전해에 일본군에 의해 ‘만유(漫遊)’란 명목으로 강제로 일본을 둘러본 후 결심했다. 학교의 이름은 ‘보성전문학교’, 민간의 힘으로 세워진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다. 고종이 직접 내려준 이름 ‘보성(普成)’은 논어에 등장하는 말로 ‘널리 사람다움을 열어 이루게 한다’는 뜻이다.
1905년 보성전문 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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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성전문학교 신축 공사 현장을 돌아보고 있는 인촌 김성수 선생. 사진=조선DB |
일제 탄압이 심해지자 보전엔 황실 지원금마저 끊기고 재정난을 겪어야 했다. 결국 1910년부터는 민족 종교 천도교의 교주 손병희 선생, 1932년부터는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헌신적인 경영이 이어져 살아남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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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시상대에서 월계수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린 채 서 있는 손기정 선수. 베를린올림픽이 끝난 직후 일본의 국제정보사가 발간한 월간지 《세계화보》 10월호 표지 게재분으로 광주북구의회 정상진 의장이 공개했다. 사진=조선DB |
4·19 이끈 고대의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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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자 시절인 2008년 1월 4일 고려대학교 교우회 신년 교례회에 참석한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조선DB |
이날 고대생들은 인촌 김성수 동상 앞에 집결했다. 3·15부정선거와 김주열 피살에 항의하며 태평로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했다. 재선거 요구 시위,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들고일어나기로는 최초였다. 이들은 시위를 마치고 교정으로 돌아가던 중 정치깡패들에게 피습을 당한다. 많은 학생이 부상을 입었다. 피를 흘리며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고대생들의 모습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학생운동의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 1987년 6월항쟁에서 고려대는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이후에도 고대인들은 정계, 재계, 법조계, 문화계 등 사회 곳곳에서 한국의 민주화와 산업화, 선진화를 견인했다. 정계를 보자면 역시 이명박 전 대통령(경영 61)을 꼽을 수 있다. 이 전 대통령은 당선 직후인 2008년 1월 고대 교우회 신년교례회에서 “고대 출신 대통령이 잘했다는 소리를 듣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5개 그룹 총수가 고대 출신

고대 출신 주요 정치인으로는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법학 45), 이기택 전 민주당 대표(상학 57), 임채정 전 국회의장(법학 60), 정세균 전 국무총리(법학 71) 등이 있다. 22대 국회의원 중 고대 출신은 76명. 학부 출신이 32명, 대학원(특수·전문대학원 포함) 출신이 44명이다.
여권에는 맹성규(행정 81), 김홍걸(불문 82), 신정훈(신방 82), 김의겸(법학 82), 김경진(법학 83), 권칠승(경제 84), 이인영(국문 84), 백혜련(사회 87),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국교 94) 등이 있다. 야권에선 추경호(경영 79), 권영진(영문 80), 성일종(경영 81), 이헌승(사회 81), 강승규(정외 83), 박정하(농경 85), 이양수(불문 87) 등을 들 수 있다. 개혁신당의 천하람 의원(법학 04)도 고대 출신이다. 지자체장 중엔 박형준 부산시장(사회 78), 오세훈 서울시장(법학 79) 등이 있다.
재계에도 고대 출신이 다수 포진해 있다. 재계 순위 20위권 기업 중 5개 기업의 총수가 고대 출신이다. 최태원 SK 회장(물리 79),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경영 89), 허태수 GS그룹 회장(법학 76), 이재현 CJ그룹 회장(법학 80),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경영 81) 등이다. 이 외 권오섭 메디힐 회장(지질 78), 정몽규 HDC 회장(경영 80), 김한국 젠틀몬스터 대표(신방 99) 등도 고대 출신 기업인이다.
고대 출신들은 문화, 스포츠계에서도 두각을 드러내 왔다. 여운계(국문 58), 신신애(간호 70),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사학 81), 이상인(경영 90), SES 유진(불문 00), 성시경(사회 00), 이소은(영문 01), 이제훈(생명정보공학 03) 등이 있다. 방송인 샘 해밍턴은 고대 국제어학원 출신이다.
스포츠 각 분야에도 퍼져 있다. 박한(행정 65), 조오련(경영 72), 차범근(체교 72), 허구연(법학 72), 선동열(경영 81), 홍명보(체교 87), 황영조(체교 92), 차두리(신방 99), 장미란(체교 05), 김연아(체교 09), 리디아 고(심리 15) 등이 있다. 허구연 KBO 총재는 1971년 고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했다가 다시 시험 봐 법학과로 들어간 경우다. 지난 2001년 일본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다 숨진 의인 이수현(무역 93)도 고대인이다. 이 외에도 학계와 관계 등 각계각층에서 수많은 고대인이 활약하고 있다.
한국 3대 마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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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고려대 교가를 작사한 조지훈 선생. 사진=국가기록사진 |
〈북악산 기슭에 우뚝 솟은 집을 보라 / 안암의 언덕에 퍼져 나는 빛을 보라 / 겨레의 보람이요 정성이 뭉쳐 드높이 쌓아 올린 / 공든 탑 자유-정의 진리의 전당이 있다 /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마음의 고향 /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영원히 빛난다〉
조지훈 작사, 윤이상 작곡의 이 노래를 웬만한 고대 졸업생이라면 모두 외우고 있다. 공식 행사뿐 아니라 선후배 술자리가 끝난 후에도 불러서다. 안암동에 가면 학생들이 술집 앞에 동그랗게 모여 서서 교가를 부르는 풍경을 종종 볼 수 있다. 교가를 전교생이 외다시피 하는 대학교는 아마 고려대뿐일 것 같다.
이런 문화 때문일까. 고려대는 동문 사이의 끈끈함으로 유명하다. 요즘은 잘 안 쓰이지만 2010년경까지만 해도 ‘한국 3대 마피아’란 표현을 자주 썼다. 호남향우회, 고려대 교우회, 해병대 전우회를 가리킨다. 여기서 마피아는 사회악이라는 뜻이 아니라 결속이 강하다는 의미다.
고대생들은 왜 결속력이 강할까. 김동원 고려대 총장은 그 이유 중 하나로 고려대의 역사를 들었다.
“일제 강점기 고대는 교육구국을 위해 설립됐습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민족의 힘으로 만들어졌죠. 독립을 염원하는 분들이 보성전문으로 모여들었고, 그러니 일제의 탄압을 많이 받았습니다. 학교는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고요. 이 과정에서 서로 단결하는 끈끈한 문화가 형성된 겁니다.”
듣고 보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김 총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독립 후 민주화 시기에도 이런 전통이 이어졌어요. 학생들이 민주화 투쟁하다 잡혀도 우리 학교는 학생들을 퇴학시키지 않고 버티다 총장이 사퇴해 버린 경우도 있었어요. 김준엽 총장이 그런 경우였죠. 탄압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더 단결하게 된 겁니다.”
임채정 전 국회의장은 “학교에 유독 지방 출신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민족학교라는 자부심이 학생들 의식 밑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서울보다 지방 출신들이 많았고요. 개인주의적인 성향보다는 집단, 대의를 중시하는 성향이 강했지요. 정치계로 나와서도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할까요. 정당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정치계지만, 고려대 출신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친밀감이 더 느껴지더군요.”
여전히 내려오는 전통
선후배 사이 끈끈함은 어느 정도일까.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의 영향권에서 대학을 다닌 고대 정경대학 출신 99학번 A씨의 말이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전반적으로 사회 분위기가 좀 침체되어 있었어요. 구제금융 여파로 취업 시장의 상황도 이전보다 안 좋았고요. 회사를 다니고 있는 졸업생 선배들을 찾아가 밥을 얻어먹고 용돈을 받아 썼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나도 후배들에게 똑같이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선배가 후배를 챙기는 전통은 여전히 변함없이 내려오고 있는 듯하다. 대학백과 등 대학 평가 사이트를 보면 교우 관계를 자랑스러워하는 고대 교우들의 후기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확실히 교우 파워가 크다’(산업경영공학부 11), ‘해외로 교환학생을 나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현지 교우회에서 파티에 참석하라는 메일을 먼저 보내더군요. 사회에 나가면 선배님들께서 잘 챙겨주십니다’(경영 15), ‘어느 분야든 고대 선배들이 진출해 있는 게 든든하다’(경제 18), ‘선배들이 주는 장학금이 많다, 타대에 비해 서로 챙겨주는 경향이 강해서 사회에 나갈 때 든든하다’(바이오시스템의과학부 19), ‘사회에 나가서도 이어지는 교우 관계가 엄청난 강점’(바이오시스템의과학부 19) 같은 식이다.
축제 기간이면 고대 근방 음식점과 술집들 곳곳은 무료 주점으로 변한다. 학과 교우회나 학번 동기회, 동아리 OB 모임 등에서 후배들을 위해 미리 식대를 결제해 놓는다. 다른 대학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다.
입시 결과 사립대 중 최고
2025년은 고려대가 개교 120주년을 맞은 해다. 고대의 현주소는 어떨까. 일단 입시 결과에서 사립대학 중 최고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일례로 70% 컷 점수를 들 수 있다. 70% 컷은 해당 대학에 최종 합격해 등록한 학생들의 성적을 1등부터 순서대로 나열했을 때 70번째(100명 중 70등) 학생의 성적을 의미한다. 보통 수험생들이 해당 학교에 자신이 합격할 수 있는지 판단할 때 이용하는 지표다.
대학입학정보 포털 ‘대학어디가’ 공시 자료를 보면, 고려대는 2025학년도 정시 모집에서 인문 계열(광역 포함) 평균 70% 컷 93.16을 기록했다. 자연 계열(의학 계열 제외)은 93.80이다. 연세대(인문 92.20, 자연 93.11)를 포함한 사립대 중 가장 높은 수치다.
이런 흐름은 2022년부터 이어져왔다. 인문·공통 계열 수능 70% 컷 기준, 2022학년도 93.33에서 2023학년도 94.16, 2024학년도 94.21, 2025학년도 93.16으로 꾸준히 우위를 차지했다. 연세대는 같은 기간 89.66 → 91.14 → 91.33 → 92.20이다. 자연 계열(의학 계열 제외)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난다. 고려대는 2022학년도 93.85에서 2023학년도 94.92, 2024학년도 94.95, 2025학년도 93.8이었다. 연세대는 93.47 → 94.29 → 93.83 → 93.11로 고대보다 약간 뒤처져 있다. 우수한 학생들이 고대로 몰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대는 입시 평가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위해 여러 제도를 시행 중이다. 매년 입학설명회와 입학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전년도 입시 결과, 서류 평가 및 면접 평가 방식 등을 공개한다. 평가 요소와 기준, 실제 사례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수시 전형도 확대·다변화하고 있다. 다양한 배경의 학생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2025학년도부터 논술 전형과 2026학년도에 다문화 전형이 신설됐다. 정시에서도 수능과 교과를 함께 반영하는 교과우수 전형을 도입했다. 평가에 학업 성취도와 함께 내신도 반영한다. 다양한 전형은 수험생의 선택권을 넓히고, 대학의 인재풀을 확대하는 데 기여한다. 단순히 높은 성적뿐만이 아닌, 가능성을 가진 인재에게 문을 열고 있다.
고등고시와 CPA 시험 석권
고대는 예전부터 ‘고시 명문’이었다.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등 고등고시에 유독 강했다. 이런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고대는 합격자 수 기준으로 2024년 외무고시(10명)와 기술고시(19명)에서 전국 1위, 행정고시와 입법고시에서는 사립대 1위를 기록했다.
공인회계사(CPA) 시험에서는 압도적으로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고 있다. 2016년부터 10년째 이어진 최다 합격자 배출 기록이다(▲2016년 118명 ▲2017년 97명 ▲2018년 114명 ▲2019년 109명 ▲2020년 127명 ▲2021년 152명 ▲2022년 175명). 2023년부터는 통계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 회계법인 및 각 대학 집계에 따르면, 고려대는 올해 치러진 제60회 시험에서도 약 170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역시 대학 중 최다 배출이다. 올해 시험에서는 수석 합격자와 최연소 합격자 모두 고대 출신이었다. 매년 2위권 대학과 40~50명 이상의 격차를 보이며 압도적인 1위를 지켜왔으며, 누적 합격자 수 역시 1400여 명을 넘어 타 대학을 크게 앞서고 있다.
‘고시 명문’ 뒤엔 학교의 체계적인 지원 제도와 프로그램이 있다. 2023년 8월엔 ‘국가고시지원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더욱 체계화됐다. 행정, 외교, 입법, 기술 등 9개 분야에 걸친 국가고시 고시반(실)을 운영하고 있다. 각 고시반(실)에는 주임교수가 임명되어 특강 관리, 강사 섭외뿐 아니라 고시생들을 지도하고 상담까지 해준다.
또한 국가고시 준비생만을 위한 전용 열람실과 스터디룸을 상시 운영 중이다. 최근엔 금전적 지원도 확대됐다. 기존에는 고시반 총무에게만 장학금을 지원했는데, 국가고시 2차 시험 성적을 보유한 학부생을 위한 생활비 지원형 장학금을 신설했다.
고시 관련 학과(행정학과, 정치외교학과, 경제학과 등)의 경우, 국가고시와의 접점을 고려해 실무 중심의 커리큘럼을 운영하며 고시 합격 선배들이 참여하는 ‘합격생 멘토링 프로그램’도 활발히 운영 중이다.
공인회계사(CPA) 최다 배출 기록 뒤에는 경영대학의 CPA 시험 준비반 ‘정진초(精進礎)’가 있다. 2023학년도부터는 경영학과뿐 아니라 타 학과 학생들도 정진초에서 공부할 수 있다. 정진초에 들어가면 안정된 학습 공간에서 강의 수강료를 지원받으며, 함께 모의고사도 볼 수 있다.
3000억원 기부금 유치
고려대는 최근 또 하나의 기록을 세웠다. 김동원 총장 취임 이래 2년 반 동안 3000여억원의 기부금을 유치했다. 익명의 거액 기부들이 눈에 띈다. 고대는 지난 2023년에도 630억원의 익명 기부를 받았다. 한국 대학 단일 기부액 역사상 최고액이다. 개교 120주년을 맞은 올해도 익명 기부가 이어졌다. 2025년 초에 각각 125억원, 200억원을 기부받았다. 4월에는 익명의 후원자 두 명이 각각 30억, 70억을 기부해 총 425억원이 익명 기부로 모였다.
3000여억원 모금에는 기부 캠페인도 큰 역할을 했다. 예를 들면 ‘중앙광장 벤치 네이밍 캠페인’과 ‘KU Circle for Miracle’이다. 중앙광장 벤치 네이밍 캠페인은 고대 캠퍼스 중앙광장에 있는 벤치에 기부자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을 부착하는 식이다. ‘KU Circle for Miracle’은 학과나 학번, 동아리, 직장, 지역별로 함께 기부하는 방법이다.
기부금은 대학의 지원 역량 강화로 직결된다. 고대는 올해 5월 5일 열린 개교 120주년 기념식에서 비전 2040을 발표했다. 바로 ‘Next Intelligence’, 세계를 바꾸는 글로벌 연구 중심 대학이라는 의미다. 구체적으로는, 연구 경쟁력 세계 20위권 진입을 위해 인공지능(AI), Bio-Tech, 환경, 차세대 반도체, 배터리, 양자컴퓨팅 등의 분야에 우수한 교수와 연구진을 영입하고 연구비를 지원한다.
기금 교수제도 도입했다. 기업의 후원을 받아, 이론적 지식과 실무적 감각을 갖춘 현장형 우수 교원을 채용하는 제도다. 고려대는 2023년부터 AI, 수소에너지, 양자물리, 뉴미디어, 디자인 조형 분야에서 기금 교수를 선발했다. 40명분 이상의 기금 교수 재원을 확보했고 앞으로 더 늘릴 예정이다.
장학금도 확대됐다. 지난 5월 고려대는 개교 120주년을 맞아 다문화 인재 장학 제도를 신설했다. 2030년까지 총 4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120명의 다문화 장학생을 선발한다. 다양한 배경과 문화를 가진 이들이 모여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 가는 공동체를 만들어달라는 기부자들의 뜻이 담긴 장학금이다.
자연계 중앙광장·인문관 신축
기부금이 모이면서 캠퍼스 풍경도 바뀌고 있다. 고려대 캠퍼스 곳곳에선 건물 신축과 리모델링이 진행 중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자연계 중앙광장과 인문관 신축이다.
자연계 중앙광장은 애기능 능선과 인접 건물을 하나로 아우르는 유기적인 공간으로, 지하 3층, 지상 1층, 연면적 약 3만7563㎡에 달하는 규모로 지어진다. 소요예산 약 1200억원, 국내 대학의 건물 신축 역사상 가장 큰 규모다. 이 중 기부금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2023년의 익명 기부액 630억원에 또 다른 익명 기부 225억원 등이다. 완공되면 고대 캠퍼스의 또 하나의 랜드마크가 될 예정이다.
인문관도 새로 지어진다. 고려대의 비전 ‘넥스트 인텔리전스(Next Intelligence)’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과 인간지능(Human Intelligence)을 모두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를 육성한다는 의미다. 인문학의 터전인 인문관 신축이 필수적인 이유다. 지하 2층, 지상 3층, 연면적 약 6947㎡ 규모로 지어진다.
재학생 5명 중 1명은 외국인
개교 120주년을 기점으로 고대는 ‘민족 고대’를 넘어 ‘인류 고대’로 나아가고 있다. 해외 대학과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를 구축해 기후변화, 감염병 확산, 사회경제 양극화, 고령화, 식량 문제 등 인류 문명의 미래를 좌우할 주요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케이클럽(K-CLUB)이 대표적이다.
K-CLUB(Korea University Collaboration Hub)은 고려대가 주도하는 글로벌 연구 협력 네트워크다. 개교 120주년을 맞은 올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올해 7월 고려대 서울캠퍼스에서 ‘제1회 K-CLUB World Conference’가 열렸는데, 전 세계 38개국, 75개 연구기관에서 약 83명의 선도적 연구자들이 모여 학제 간 국제 공동 연구와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협력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같은 달 역시 고려대 서울캠퍼스에서 세계 각국 대학과 함께하는 첫 공식 기후 행동 네트워크 프로그램인 ‘Climate Corps Summer School’(기후행동단 여름학교)도 함께 열렸다. 기록적인 폭염 속에 글로벌 기후 위기 대응을 모색하기 위해 열었는데,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6대륙 35개 대학에서 온 석학과 학생 130여 명이 참가했다.
이 밖에도 고려대-싱가포르대-푸단대가 함께하는 3S 지속가능성포럼(3S Sustainability Forum), 스웨덴과 함께하는 Korea-Sweden Research Workshop, 노벨 수상자를 초대해 강연을 듣는 NIF(Next Intelligence Forum) 등 다양한 국제 포럼 및 콘퍼런스가 진행 중이다.
고려대 캠퍼스엔 무슬림 기도실도 있다. 기숙사 중 한 곳인 CJ인터내셔널하우스에 이슬람 학생 및 교원 등을 위한 기도실(The Prayer Room)이 있다. 아침 메뉴에는 무슬림을 위한 할랄 식단도 포함되어 있다. 해외 대학과의 교류를 넘어 캠퍼스 자체가 국제화되고 있단 얘기다.
고려대 캠퍼스를 돌아다녀보면 외국인 유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2024년 기준 외국인 재학생 수는 6240명(재학생 대비 22.8%)에 달한다. 재학생 5명 중 1명은 외국인이란 얘기다. 고대의 국제화 노력의 산물이다. 고려대는 ‘2026 코리아타임스 국제화 우수대학 평가’에서 종합평가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서울대는 2위, 연세대가 3위로 뒤를 이었다.
김동원 총장 취임 후 고대는 연구·교육·행정 전반의 국제화를 추진해 왔다. 온라인 공지, 안내문 등에 국·영문을 병기하고, 교내 표지판 및 행정 시스템도 외국인 친화적으로 개편했다. AI 번역 툴을 적극 활용 중이다. 2025년 봄 학기부터는 한국어 강의 실시간 다국어 자막 시스템을 시범 도입했다.
국제화 우수대학 1위
단지 외국인 학생들을 유치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국제화 캠퍼스 위원회’를 설치해 외국인 학생과 교원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정책에 반영한다. 동아리 활동 참여를 장려하기 위해 총학생회·동아리연합회와 협력해 영문 동아리 안내서를 제작, 외국인 유학생 방송 동아리를 지원하고 있다. 이들은 수업은 물론 교내 행사에도 적극 참여한다. 그래서인지 고려대 축제에 가면 외국인 학생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우수한 외국인 교수진도 적극 초빙 중이다. 2025년 현재 83명인 외국인 전임교원을 2030년까지 146명으로 늘려 전체 교원의 10% 수준으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주거 지원, 항공료, 이사비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며, 국내·교내 적응을 돕는 생활 지원 조교(International Faculty Assistant) 제도도 운영한다.
120은 특별한 숫자다. 《주역(周易)》은 숫자의 이치를 통해 우주의 변화를 설명한다. 64괘로 변화와 순환의 철학을 설명하는데 이 중 시간과 관련된 괘에서는 ‘12’라는 숫자가 중시된다. 하루는 12지신으로 나뉘고, 1년은 12달로 구성되어 있다. 12는 곧 ‘완전한 주기’를 상징한다.
120년은 이 12주기가 10번 반복된 시간, 즉 완전한 주기가 10번 반복된 큰 순환의 마침표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주역》은 끝을 곧 새로운 시작으로 본다. 고려대 개교 120년을 《주역》의 원리로 풀자면, 고대가 그동안 여러 번의 큰 변화와 난관을 극복하고,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이제 다가올 120년을 향한 다음 단계의 씨앗을 뿌릴 때다. 개교 240주년에 고대엔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을지 궁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