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현대사

강재구 소령 순직 60주기

“결단력이 없는 것이 나의 단점”이라던 청년 장교의 살신성인

  • 글 :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libert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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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재구 정신은 한국군이 추구해야 할 변치 않는 가치”(심호섭 육사 교수)
⊙ 베트콩과 交戰 중 총상 입은 강재구 동기, “재구 뒤 따르기로 했는데, 이까짓 것으로 후송이냐?”
⊙ “수류탄 터지고 하늘로 검은 물체가 튕겨 올라… 가만 보니 강재구 소령님의 다리”(중대원 이범영)
⊙ “강재구는 순진, 순수했던 사람”(육사 1기 선배 민병돈 전 육사 교장)
⊙ “나는 항상 국가에 국민에게 채무자임을 잊지 말자”(강재구의 일기 중에서)
⊙ 재구대대 1진, 훈장만 52개(을지 5개, 충무 15개, 화랑 32개) 받아
⊙ 일기 쓰며 자기 수양한 강재구… 연애사부터 부하 걱정, 홀어머니에 대한 연민 등 고뇌
⊙ 수류탄 훈련장 아닌 논두렁에서 투척 훈련 중 사고… 현장 卽死 아닌 후송 중 순직
⊙ “당시의 나도, 2025년의 나도 강재구처럼 하진 못했을 것”(강재구 직속상관 박경석)
육사 생도 시절의 강재구.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강재구 소령 추모공원에 있는 강재구소령추모탑.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부하 사랑을 실천한 고 강재구(姜在求·1937~ 1965년·육사 16기) 소령(순직 당시 육군 대위). 강재구가 졸업한 서울고에는 그의 흉상이 있다. 기단(基壇)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 자리에 없어선 안 될 사람”
 
  1965년 10월 4일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성동리. 이날 오전 8시부터 맹호(猛虎)부대(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1연대 3대대 10중대(중대장 강재구 대위)는 베트남전 파병(10월 12일 출정식)을 앞두고 수류탄 투척 훈련을 했다. 현장에는 간부 4명과 병사 165명이 있었다. 당시 3대대장은 박경석(육사 생도 2기, 예비역 육군 준장) 중령이었다.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에 있는 강재구 소령 추모공원. 강재구가 몸을 던쳐 수류탄을 품은 지점이 표시되어 있다.
  오전 10시쯤 중대원 박해천 당시 이병이 수류탄을 던질 차례였다. 박 이병은 안전핀을 뽑고 안전 손잡이를 잡은 채 수류탄을 들어 올렸지만, 긴장한 탓에 놓쳤다. 손잡이가 풀린 수류탄은 중대원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튀어갔다. 이날 훈련한 곳은 땅이 고르지 않았다. 떨어진 수류탄을 발로 멀리 차버릴 수도 없었다. 수류탄은 안전 손잡이가 떨어지면 공이가 뇌관을 때려 불꽃을 만든다. 이어 지연 신관이 약 4초간 타들어간 뒤 폭발한다.
 
  떨군 수류탄을 본 강재구 대위는 바닥에 엎드려 자신을 보호하는 대신 몸을 던져 수류탄을 덮쳤다. 중대장의 살신성인으로 중대원 5명이 경상을 입는 데 그쳤지만, 당시 28세였던 청년 장교는 아내와 한 살배기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야 했다.
 
  현장에 있었던 중대원 이범영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제 옆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수류탄이 터지고 하늘로 검은 물체가 튕겨 올랐는데, 가만히 보니 강재구 소령님의 다리였어요. 그래도 사고 직후엔 살아계셨어요. 신음을 하고, 대원들이 달려가 지혈을 했지요. 그분은 부대원이 잘못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부대원들을 지키려 했어요.”
 
 
  “이 수류탄의 위력을 보라!”
 
  베트남전 참전용사이자 파독(派獨) 광부 출신인 이범영씨는 《월간조선》 2014년 6월호에 자신이 쓴 진중일기(陣中日記)를 기고했는데, 사고가 일어난 날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1965년 10월 4일 월요일 맑음
 
  오늘은 내 일생에 잊으려야 잊어버릴 수 없는 날이 되고 말았다.
 
  “이 수류탄의 위력을 보라!” 하고 쩌렁쩌렁 말하며 수류탄 투척 시범 훈련을 같이하던 강재구 중대장님이 불과 한순간에 불의의 수류탄 사고로 명을 달리하셨으니 나는 물론 전 중대원이 놀라움과 슬픔에 빠지고 말았다.
 
  당신이 지휘하고 사랑하는 부하를 살리기 위해 분대원이 잘못 던진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려다 그만 실패하자 스스로 그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옆에 있던 수많은 부하를 죽음으로부터 살린 숭고한 인간 강재구 대위….
 
  그는 너무나 훌륭하고 위대한 군인정신의 참 군인이다. 나는 그 위대한 군인정신을 우러러보지 않을 수가 없다. 난 한 사람의 실수가 얼마나 무섭고 큰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사단 신병중대 때부터 같이 근무하던 박○○이도 불의의 부상을 당하여 후송을 가는 바람에 그가 차던 탄띠를 힘없이 어깨에 둘러메고 막사로 귀대하니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이 갑갑해지는 것 같다. 그토록 인자하고 중대원에게 친절하던 강재구 중대장님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니, 운명이란 우리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나는 눈을 감고 고 강재구 대위님, 아니 우리 중대장님의 명복을 마음속 깊이 빌었다. 또한 우리 분대에서 부상당한 전우들의 완쾌를 빌었다. 그 이름 박○○ 일병과 박○○ 일병.〉

 
 
  팔 뒤로 젖히는 과정에서 수류탄 떨어뜨려
 
1965년 10월 8일 육군본부 광장(현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열린 강재구 소령 영결식. 사진=국가기록원
  군 공식 기록인 〈사망확인조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고조가 투척하자 그중 1명(이병 박해천)이 투척한 수류탄이 투척 방향과 달리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제자리에 떨어지자, 당시 옆에서 교육을 감독 확인하고 있던 중대장이 뛰어가 차버리려 하였으나 앞에 병력이 있어 차지 못하고 집어 던지려 하였으나 시간이 촉박하여 중대장이 중대원의 희생을 막을 목적으로 자신이 수류탄 위에 엎드리는 그 순간 폭발하여 중대장이 순직하였음.〉
 
  이 내용은 수도사단장 채명신 소장이 10월 4일에 작성한 〈고 진급추천사유서〉에도 동일하게 반영됐다.
 
  박 이병이 던지기 위해 팔을 뒤로 젖히는 과정에서 떨어뜨렸다고 볼 수 있다.
 
  강재구의 영결식은 1965년 10월 8일 오전 육군본부 광장(현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육군장(葬)으로 치러졌다. 부인 온영순(당시 27세)씨와 외아들 강병훈(생후 14개월)군, 맹호부대 1연대 3대대(재구대대·在求大隊) 10중대원, 육사생도들이 참석했다. 강재구는 1계급 특진과 ‘4등근무공로훈장’이 추서됐고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영결식장에서 육사 16기 동기생을 대표해 김영택 당시 대위는 이러한 추모사를 남겼다.
 
  “재구! 고이 잠드오. 편히 가오. 그대 불멸의 공(功)을 뒤 오는 사람에게 전하고 우리 모두의 아들 병훈에게는 ‘후손을 위한 창조적 희생의 귀감(龜鑑)이었다’고 그 장엄한 죽음을 이야기해 주리다.”
 
  1966년 5월에는 기존 ‘4등근무공로훈장’이 한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으로 조정됐다. 같은 해 육군은 장병 모금으로 육사에 왼손에 수류탄을 집어든 모형으로 강재구 동상을 세웠다. 강재구 정신을 기리고자 ‘재구상(賞)’을 제정해 매년 모범 중대장(14명)을 뽑아 시상하고 있다. 시인 이은상은 강재구 동상 아래 “산과 강과 조국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우뚝 선 의기(義氣)의 상징이여, 오오, 살아 있는 배달겨레의 참모습이여”라는 헌시를 남겼다.
 
 
  “기뻐 찬미하라. 자기를 버려 자기 완성”
 
  1965년 육사 동창회가 만든 《아사달》에는 아래 글이 실렸다.
 
  “그러나 유족들이여, 동창들이여, 겨레여, 너무 애석히 여기지 말라. 오히려 마음껏 찬양하라. 십년대한(十年大汗, 긴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이 기뻐 찬미하라. 그는 아주 간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를 버려 자기를 완성한 것이다. 방향 지워 용기의 실천자가 된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진정한 ‘히로’ 로 승화한 것이다. 그의 고결한 희생정신, 이 투철한 군인정신이야말로 우리 동창, 국군, 그리고 온 겨레에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
 
  강재구의 순직 소식을 듣고 당시 전방 소대장이었던 최승우(육사 21기, 예비역 소장) 소위는 “내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강재구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고민에 깊이 빠졌다. 그러나 그는 즉답할 수 없었으며 대신 “강재구의 그림자 정도라도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하며 강재구를 군 생활의 우상으로 삼았다.
 
 
  “강재구는 무엇이든 솔선수범했다”
 
강재구 소령의 1년 선배인 민병돈 전 육사 교장. 사진=조선DB
  강재구는 1937년 7월 26일 인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성전기(현 한국전력공사) 부평지사에서 일했다. 강재구는 창영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인천중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서울고등학교로 진학했는데, 고교 시절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강재구의 어머니가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강재구는 1956년 육군사관학교 16기로 입교했다. 군인을 선택한 배경에는 어려운 가정형편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육사 16기는 4811명이 지원해 216명이 선발됐다. 강재구는 178명 중 9등으로 육사를 졸업했다.
 
  육사 4학년 시절인 1959년 강재구는 생도대(生徒隊) 2중대였다. 중대를 대표하는 중대장 생도를 맡았다. 강재구 사후(死後) ‘육사 생도대 2중대’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재구중대’로 명명됐다. 육사는 8개 중대(1~4학년 약 140명)가 중대 단위로 생활한다.
 
  강재구의 2중대 1년 선배는 육사 교장을 했던 민병돈(육사 15기) 예비역 육군 중장이다. 강재구는 민병돈에 이어 중대장 생도를 했다. 민 예비역 중장은 강재구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군인답지 않은 모습을 보일 때면 내가 기합도 많이 줬지…. 강재구는 순진, 순수했던 사람이야.”
 
 
  홀어머니에게 월급 보내는 효자
 
  강재구와 서울고·육사 동기인 예비역 소령 한장희는 “강재구는 무엇이든 솔선수범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육사 생도들 중에서 모범생과 우등생이었으나 결코 성적에 얽매이는 옹졸한 장교 후보생은 아니었다. (육사 정식 입교를 앞두고) 기초군사훈련을 할 때였다. 뜀박질 훈련을 했는데 30여 명의 후보생이 완전무장으로 돌아올 때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때 강재구 생도는 동료들의 소총 3정을 혼자서 짊어졌다.”
 
  1960년 3월 소위로 임관한 강재구는 수도사단(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 전신) 제1연대 7중대 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박봉인 군인 월급 일부를 홀어머니에게 보내는 효자였다. 1963년 7월 온영순과 결혼했다. 1965년에는 대위로 진급했다.
 
  파병 훈련이 한창이던 강재구는 순직 한 달 전인 1965년 9월 홀어머니를 뇌출혈로 떠나보냈다. 당시 그는 장례를 치른 뒤 동생들에게 “내가 월남에 가서 돈을 보낼 테니 너무 염려 말고 잘 살아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강재구가 순직할 때 결혼한 지 2년을 갓 넘겼고 생후 14개월 외아들(강병훈)이 있었다.
 
  강재구 순직 다음 날인 1965년 10월 5일, 강재구가 속했던 3대대는 강재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재구대대(현 제1기계화보병여단 예하 제133기계화보병대대)’로 명명됐다.
 
  1966년 5월 12일에는 영화 〈소령 강재구〉가 개봉했다. 1973년에는 강재구의 이야기가 당시 국민학교 교과서(바른생활 6-1)에 〈아! 중대장님!〉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1973년에는 강재구가 몸을 던진 곳에 강재구공원이, 1987년에는 약 50m 떨어진 곳에 강재구기념관이 들어섰다. 시간이 흘러 베트남전이 점점 잊힐 무렵 살신성인의 표상 강재구도 대중에게서 점차 흐려져 갔다.
 
 
  현장 즉사 아닌 후송 중 순직
 
강재구의 부하이자 강재구의 마지막을 목격한 월남 참전용사 이범영씨.
  강재구에 대한 통념은 ‘현장에서 수류탄 폭발로 즉사(卽死)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는 사고 직후 병원 후송 중 생을 마감했다. 현장을 목격한 이범영씨는 “그래도 사고 직후엔 살아계셨다. 신음을 하고, 대원들이 달려가 지혈을 했다”고 했다.
 
  제2야전병원(현 국군홍천병원) 군의관이 작성한 〈사망진단서〉에 따르면 강재구가 병원으로 이송된 시각(오전 11시20분)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당시 후송은 홍천 훈련장에서 제2야전병원까지 차량(구급차)으로 이뤄졌고 소요 시간은 약 1시간이었다.
 
  제2야전병원이 최종 작성한 사망보고서에 따르면, 사인은 하퇴부 파손과 출혈이며 사망 시각은 사고 발생 약 35분 후였다. 〈사망확인조서〉와 〈사망진단서〉를 종합하면 사건 발생 시각은 오전 10시~오전 10시15분 사이이며 긴급 후송됐으나 10시50분경 후송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식 기록도 강재구의 사망 시각을 10시50분으로 명시했다.
 
  사고는 왜 일어났을까. 사고 경위를 정리한 기록으로는 공식 문서 이외에도 초대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의 회고록 《베트남 전쟁과 나》와 강재구의 직속상관인 박경석(초대 재구대대장)의 증언 등이 있다.
 
  지난 2월에는 육사 군사사학과 심호섭·정준아 교수가 논문 〈고 강재구 소령의 군인정신 고찰〉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도 사고 원인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이 논문은 강재구의 수양록(사관생도 시절 일기)과 진중일기(장교 시절 일기)를 분석했다. 그간 강재구의 ‘희생적 행위’만 주목받았는데, 해당 논문은 접근법을 달리해 ‘1차 사료(강재구 일기)’와 주변 증언을 바탕으로 강재구가 어떻게 군인정신을 형성했는지 밝혔다. 심호섭(육군 중령·육사 62기) 교수는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이 전문 분야다.
 
 
  논두렁에서 투척 훈련하다가 사고
 
육사 군사사학과 심호섭(육군 중령) 교수.
  위 논문에 따르면, 수류탄 투척 사고는 당시 수류탄 훈련장을 구하지 못한 강재구 중대(10중대)가 개방된 논두렁에서 투척 훈련을 하다가 벌어졌다. 강재구와 서울고·육사 동기인 용영일 예비역 육군 중장은 사고 당시 인접 중대인 9중대장을 맡고 있었다.
 
  심 교수는 2023년 11월 박경석 예비역 준장, 용영일 예비역 중장 등을 인터뷰한 뒤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사고 당일) 용영일 중대장은 ‘우리 소대는 아침 먹기 전에 한 명을 보내 (수류탄 훈련) 교장을 선점하게 했다. 그러자 강재구 중대 소속 소대장이 찾아와 불만을 표시했다’고 했다. 이는 당시 대대 내 각 중대는 개별적으로 훈련장을 배정받아 수류탄 훈련을 했으며, 강재구 중대는 공식 수류탄 훈련장이 아닌 개방된 논두렁에서 훈련을 진행했다. 강재구는 투척조 뒤쪽에서 훈련 전체를 지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고의 직접적 배경은 논두렁에서 투척 훈련을 했다는 점과 박 이병의 투척 실수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관계가 강재구가 보여준 행동의 숭고한 가치를 희석하거나 폄훼해서는 안 된다. 당시 훈련 여건과 강재구의 선택은 따로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 강재구 중대는 왜 논두렁에서 훈련했습니까.
 
  “공식 수류탄 훈련장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현지와 유사한 지형을 찾던 중 논두렁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파병을 앞둔 마지막 과정이었기에 실전과 가까운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 수류탄을 던지면 일단 엎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강 소령의 선택은 당시 군에서 정한 대응 방식과는 전혀 다른, 극도로 이례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통상 수류탄이 터질 것 같으면 즉각 몸을 낮춰 엎드리라고 가르칩니다.”
 
 
  “강재구는 내향적인 사람”
 
  — 엎드렸다면 부상은 입더라도 모두 살았을 텐데요.
 
  “수류탄을 덮친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평소 강재구는 ‘부하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고 봅니다. 수류탄이 중대원과 가까운 지점에서 터지면 아무리 엎드려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목숨보다 부하를 먼저 생각한 겁니다.”
 
  — 강재구 소령을 연구하게 된 배경이 있습니까.
 
  “추상적 가치를 막연하게 앞세우기보다는 강재구 같은 실존 인물을 소개하면 더 와닿을 듯해 연구하게 됐습니다. 세상이 변해도 변치 말아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강재구 정신(살신성인, 부하 사랑, 투철한 군인정신)은 우리 군이 추구해야 할 변치 않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 강재구 소령이 쓴 일기는 어떻습니까.
 
  “자기 고민을 진실하게 담아냈습니다. 사관생도·초급 간부 시절 겪은 어려움부터 가족 걱정, 연애 이야기 등 별의별 이야기가 다 있습니다. 일기를 접하며 ‘강재구는 타고난 사람이 아닌, 항상 자신과 싸우며 자기를 단련해 나간,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 인상적인 대목이 있습니까.
 
  “홀어머니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연민이었죠. 이 때문에 결혼도 비교적 일찍 했습니다.”
 
  — 일기를 통해 많은 걸 알았을 텐데 강재구는 어떤 사람입니까.
 
  “내향적인, 화가 나도 속으로 삭이는 사람이었습니다. MBTI로 치면 ‘I(Internal)’입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자신의 가치를 알자”
 
  강재구 일기 중 일부를 소개한다.
 
  “짧고 굵게 살자!”(1961년 3월 8일)
 
  “오늘 하루를 뜻깊게 살자. 내일이 오면 오늘은 영원한 과거이다.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자신의 가치를 알자. 후회되지 않는 그날을 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모른다. 신중을 기하여 하루의 보람을 느끼는 그 기쁨. 이것이 낙이리라. 행복이리라.”(1957년 9월 23일)
 
  “가을하늘 한없이 드높은데 뫼 끝에 올라 원경을 관망하니 사나이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인생은 유한인데 이 유한한 인생을 보람있게 살기 위해서는 적당히 그날 보내서는 안되겠다. 보람 있는 하루, 의의 있는 하루를 만들고 크나큰 이상을 향하여 끝없이 매진하자.”(1959년 11월 12일)
 
  “너무나도 흥분된 순간이었다. 또한 너무나도 무거운 짐을 지는 순간이었다. 이 임무는 자신 있게 완수할 수 있다고 장담은 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최대의 성실만을 의지하고 근무한다면 어느 정도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1959년 5월 8일, 육사 4학년 당시 2중대장 생도에 임명되고)
 
  “군인은 승리하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 고로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관학교 시절부터 모든 면에서 승리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진정 승리하기 위한 승리의 준비 단계임을 명심하면서…”(1959년 3월 2일)
 
  “결단력이 없는 것이 나의 단점이다. 때로는 너무 다정다감한 나머지 인정(人情)에 끌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필요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독하게 엄정해질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1959년 12월 18일)
 
  “아인슈타인 같은 분도 군인의 존재를 증오의 대상으로 보았다. 명령에 따른 영웅주의 무지한 폭행, 애국심이란 이름으로 인간을 사지(死地)에 모는 것 등.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기에 대한 반박을 하나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사지에 들어가야만 되는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1960년 1월 14일)
 
  “비록 부정(不正)이 잠시는 득세할지 몰라도 머지않아 정의가 이길 날이 올 것이다. 현재 어떠한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정의로서 참고 견디자.”(1961년 6월 24일)
 
  “야간 교육 4시간. 무던히 떨었다. 날씨는 잘도 추워지고, 나는 전방에서 점점 뒤떨어져만 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 이상(理想)도 땅에 떨어지려는 순간. 이 권태기를 무엇으로 메꿀까. 피나는 노력이 앞으로 요구된다.”(1961년 12월 6일)
 
  “나는 항상 국가에 국민에게 채무자임을 잊지 말자. 따라서 자신의 행동에 신중하여야 할 것은 물론 채권자인 국민에 대해서도 그 기대에 어그러지지 않는 행동을 하도록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1959년 1월 7일)
 
  “몸이 아프고 죽을 지경이다. 오전 교육을 하고 오후에는 3.5인치 Rocket 사격을 하다. [중략] 그대들의 피와 살이 하나하나 내 육체와 인격을 구성하고 있기에 나는 죽을 때까지 그대들과의 불가분의 처지임을 말해둔다.”(1961년 9월 4일)
 
  “중대(中隊)에 들어가 사랑스러운 부하(部下)를 만나니 기쁘기 한없다. 특히 선임하사가 나 없는 동안에 더욱 잘해 주었다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하다. ○○○ 하사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그 편지를 보니 부대가 그립고 소대원이 보고 싶다. 어서 귀대(歸隊)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1961년 2월 4일)
 
  “인생은 모험이요 산다는 것은 도박이다. 무엇이 주저할 것 있는가? 배짱 든든하게 가지고 한번 해볼 뿐이다. 그 결과는 하늘에 달린 것이다. 인간이 하여야 할 일을 계획하고 노력하는 것뿐이다.”(1961년 8월 23일)

 
 
  “구질구질하게 인생을 살 필요는 없다”
 
1965년 10월 12일 여의도 비행장(현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맹호부대 환송식. 사진=조선DB
  1965년 7월 2일 박정희(朴正熙)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자유 진영인 월남을 돕기 위해 전투병(1개 사단 규모) 파병을 의결했다. 수도사단이 파월 전투부대로 지정되자 당시 수도사단이 주둔하던 홍천 일대는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정부는 수도사단과 제2해병여단을 개편해 각각 맹호부대와 청룡부대로 재창설했다. 1965년 9월 25일 이 부대들을 통합 지휘할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했다. 사령관은 수도사단장인 채명신(蔡命新) 장군이 겸직했다.
 
  대규모 전투병 파병 소식이 전해지자 혈기 왕성한 간부들은 환호하며 파병 부대에 자원했다. 반면 대부분의 병사는 베트남 정글 속 전장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맹호부대로 재편된 수도사단은 같은 해 8월 23일부터 새로 선발된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이 전입해 부대를 재편하고 파병 준비를 했다. 강재구도 자원해 전입을 왔고 8월 27일 파월 맹호부대 10중대장으로 부임했다.
 
  앞서 강재구는 1961년 라오스 내전(1959~1975년, 정부군과 공산군 대립) 당시 한국군 파병이 논의되었을 때에도 지원의 의지를 밝혔었다. 1961년 1월 17일 그의 일기다.
 
  “라오스(Laos)에 의용군(義勇軍)을 파견한다고? 나는 불현듯 지원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서 하사에게 말했더니 그도 대찬성이다. 사람은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는 않는다. 구질구질하게 인생을 살 필요는 없다. 결단이 필요하고 모험이 필요하다.”
 
  한국은 1961년 라오스 정부군 지원을 위해 3개 사단 규모의 파병을 검토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강재구 희생으로 파병 관련 여론 바뀌어
 
졸업식에서 소위 계급장을 단 생도들은 강재구 동상으로 달려가 존경을 표하기 위해 꽃목걸이를 건다. 가장 먼저 꽃목걸이를 거는 이가 가장 먼저 장군으로 진급한다는 전설이 있다.
  파월을 앞둔 시점, 파월을 대기 중인 한국군 내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파월을 원치 않는 병사들이 두려운 나머지 탈영하는 것이었다. 채명신 사령관은 아침마다 탈영병 숫자를 보고받았는데 하루 10여 명, 많을 때는 20명이 넘기도 했다. 채 사령관은 베트남으로 출발도 하기 전에 병력이 모자라진 않을까 걱정했다.
 
  당시 여론은 엇갈렸다. 야당과 지식인층은 ▲미국의 용병화 ▲국군의 희생 ▲명분 부족을 이유로 전투병 파병에 반대했다. 반면 정부·여당·기성세대는 ▲반공 전선 강화 ▲한미동맹 공고화 ▲경제적 이익을 근거로 찬성했다.
 
  파병 반대 여론과 탈영병 증가로 부대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이런 와중에, 파병을 불과 9일 앞두고 강재구의 희생 소식이 전해졌다. 정부는 그의 죽음을 ‘부하를 구한 살신성인의 표본’이자 ‘국가를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부각했다. 여론은 급속히 바뀌었고 파병을 앞둔 장병들의 사기도 높아졌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베트남 파병을 둘러싼 반대 여론을 ‘강재구 영웅화’로 전환했다고 지적한다. 강재구를 곁에서 지켜본 이들은 “정권의 영웅 만들기와 강재구의 살신성인은 구분해야 한다”며 “정권이 추구한 명분과 강재구가 추구한 가치는 별개였다”고 했다.
 
  강재구의 직속상관이자 초대 재구 대대장을 지낸 박경석은 2025년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강재구였다면 수류탄이 날아왔을 때 그 당시 박경석도 지금 박경석도 강재구처럼 쫓아가서 부하를 살리기 위해 내 몸으로 수류탄을 막지 못했을 거야.”
 
  강재구를 가슴에 품은 맹호부대는 10월 12일 여의도 비행장(현 여의도공원)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관하에 맹호부대 1진 환송식을 가졌다. 다음 날 인천항을 떠나 15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하룻밤을 보낸 파월 장병은 16일 미군 수송함 제너럴 리로이 엘틴저(1만3000t급)를 타고 장도에 올랐다. 강재구의 부하였던 이범영씨는 그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정말 육중하고 거대한 함이 서서히 부두를 떠나고 있다. 부두를 가득 메운 시민과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멀어져 가는 우리 파월 맹호부대 장병들을 환송하고 있었다. 정말 고국을 떠나는구나. 점점 멀어져 가는 부산항. 마지막 작별하듯 아물아물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오륙도, 내가 태어나고 자란 우리 땅, 내 조국. 이제 나는 내 조상이 묻히고 내가 또 묻힐 나의 나라 내 땅을 떠나고 마는구나!〉
 
  맹호부대 1진은 10월 22일 비 오는 금요일 상륙장갑차(LVT)를 타고 퀴논항 근처 붉은 모래 해변에 상륙했다. 맹호부대는 열차로 갈아타 처음으로 미군 C-레이션(전투식량)을 먹었다. 이범영씨는 “부대원 중 누군가가 ‘야! 이렇게 한국에서 준다면 말뚝 박겠다’고 말하자 긴장 속에서도 웃음이 터졌다”고 했다.
 
 
  전장에서 이어진 ‘강재구 정신’
 
강재구 소령이 마지막으로 신었던 군화와 수류탄 안전핀.
  재구대대는 용감했다. 재구대대 1진 파월 장병들은 을지무공훈장 5개, 충무무공훈장 15개, 화랑무공훈장 32개를 받았다. 1진 장교 28명 중 11명이 장군(중장 4명, 소장 4명, 준장 3명)으로 진급했다. 강재구와 서울고·육사 동기인 이중형 예비역 소장은 재구대대 1진 작전장교·9중대장으로 참전했는데, 훗날 홍천 지역을 담당하는 11사단장이 돼 강재구기념관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베트남에선 제2, 제3의 강재구가 나왔다. 대표 사례가 ‘재구 2-2호(1966년 3월 26일)’ 작전이다. 맹호부대 재구대대(3대대) 11중대장 이재태(예비역 육군 소장, 육사 16기) 당시 대위는 베트콩과 교전 중 적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한 시간 반 동안 중대를 지휘해 전과를 거뒀다. 끝까지 임무를 완수한 이 대위는 본국 후송을 권유하는 의료진에게 후송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재구의 뒤를 따르기로 한 우리인데, 이까짓 것으로 후송이냐?”
 
  1연대 재구대대 10중대 2소대장 김무석 중위도 용맹하게 싸웠다. 꾸이년 북방 20km에 있는 빈안 지역 수색 작전 중 전사했다. 전투 중 다친 부하 4명을 안전한 곳으로 후송하기 위해 직접 업어 옮기는 과정에서 피격당했다. 김 중위가 구출한 김정부 일병은 “소대장님이 나를 구하려다 돌아가셨다”며 오열했다고 한다.
 

  맹호부대 26연대 김장웅 소위도 부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매복 작전에서 베트콩 5명을 소탕하고 시체를 확인하던 순간 살아남은 베트콩 한 명이 수류탄을 던졌다. 김 소위는 “엎드려”를 외치곤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베트콩을 덮쳐 수류탄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미 안전핀은 뽑힌 상태였고 폭발로 이어져 전사하고 말았다.
 
  해병대에서도 강재구 정신이 실천됐다. 해병여단 3대대 정보참모 이인호(해사 11기) 대위. 베트콩을 소탕하기 위해 동굴 수색 작전을 지휘하던 중 베트콩이 던진 수류탄이 부하들에게 날아오자 이를 집어 다시 던졌다. 그러나 곧이어 또 다른 수류탄이 대원들 사이에 떨어졌는데 이인호는 자기 몸을 던져 수류탄을 덮쳐 대원들을 살렸다. 이인호도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死後) 소령으로 추서됐고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병사가 놓친 수류탄 품은 차성도 소위
 
제60회 재구상 수상자인 박관호 대위.
  교육훈련 중 부하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례도 있다. 1970년 5월 13일 육군 27사단 소속 차성도(3사 1기) 소위. 소대 훈련 중 한 병사가 실수로 수류탄을 놓쳤다. 차 소위도 강재구처럼 자기 몸을 던져 수류탄을 품고는 추가 피해를 막았다. 육군3사관학교는 부하 사랑 정신을 실천한 차성도를 기리기 위해 매년 추모제를 열고 있다.
 
  지난 10월 24일 육사에서 제60회 재구상 시상식이 열렸다. 육군에서 가장 모범적인 전투부대 중대장(특급전사 자격 보유자) 14명을 선발해 시상한다. 재구상을 받는다고 모두 진급이 잘 되는 건 아니다. 수상자의 최종 계급은 대위부터 대장까지 다양하다. 가장 최근에 전역한 장성 중에는 강신철(육사 46기,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예비역 육군 대장이 있다.
 
정태영(육군 준장) 육사 교수부장(오른쪽)과 제60회 재구상 수상자인 박관호 대위.
  올해 재구상을 받은 5사단 박관호(육사 76기) 대위는 12사단 수색대대 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 가슴이 뛰어 육사에 진학했다. 생도 3~4학년을 재구중대(2중대)에서 보냈다. 이 때문에 재구상 수상이 자신에게 더욱 특별하고 의미 있다고 했다.
 
  “재구상을 받게 돼 명예롭고 감사합니다. 책임감도 느낍니다. 강재구 소령의 희생정신을 실천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육사 기초군사훈련(정식 입교 전 훈련 기간) 때 강재구 소령을 처음 알았습니다. 육사 정식 입교를 앞두고 ‘재구의식’을 합니다. 재구상 앞에서 촛불을 켜 500m쯤 되는 거리를 걸어 인헌관(생활관)까지 갑니다. 촛불을 꺼뜨리지 않고 가야 합니다. 생활관에 도착하면 조명을 끄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촛불에 의지해 수양록(일기)을 씁니다. 그때 ‘강재구와 같은 군인이 되도록 노력하자’고 적었습니다.”
 
  박 대위는 두 가지 지휘 철학을 갖고 명예를 잃지 않는 군 생활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 철학은 빈틈없는 임무 수행과 부하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소외되는 이가 없는 부대 만들기다.
 
육사 정식 입교를 앞두고 진행하는 재구의식. 사진=육사신보
 
  “저 님은 살아 있는 의기의 상징”
 
육사 생도대 재구중대(2중대) 훈육관 김용현 소령.
  육사에는 예복(禮服)을 입은 생도들이 주관하는 의식(儀式) 행사인 화랑(花郞)의식이 있다. 한 주간의 생활을 반성하고 다가오는 주의 결의를 다진다. 분열과 함께 퍼레이드를 하며 왼손에 수류탄을 든 재구상을 지나간다. 재구상을 통과할 때는 재구가(歌)를 부른다.
 
  “끝없이 타오르는 횃불을 보라. 동지들을 구하려고 제 몸 던졌네. 저님은 살아 있는 의기의 상징. 내 나라 내 겨레 위해서라면 재구처럼 이 목숨 아끼지 않으리.”
 
  강재구가 생도 시절을 보낸 재구중대를 찾아 김용현(육사 70기, 육군 소령) 훈육관과 한상우 중대장 생도(4학년, 82기)를 만났다. 육사에선 중대에서 매주 금요일 1시간씩 가치관 교육을 하는데 재구중대는 강재구 소령의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장교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김 훈육관이 만든 교육 자료에는 강재구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김 훈육관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군인을 좋아하게 됐다”며 “고등학교 3년 내내 공부만 해서 육사에 왔다”고 했다.
 
강재구의 후예인 육사 재구중대 중대장 한상우 생도(육사 82기).
  육사에는 중대(8개)마다 상징 인물이 있다. 1중대는 광개토, 3중대 을지, 4중대 진흥, 5중대 무열 등이다. 이 중 2중대만 현대 인물이다. 김 훈육관은 “2중대를 맡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부담감이 앞섰다”고 했다. 이 때문에 그는 복장에 부착물을 하나 달더라도 신경을 많이 쓴다고 했다. 김 훈육관의 사무실격인 훈육관 실도 인상적이었다. 여태껏 기자가 본 군인 사무실 중에서 가장 깔끔했다.
 
  김 훈육관은 “수류탄은 살상 반경인 15m 이내에서는 치명적일 수 있다. 아무리 몸을 납작 엎드린다고 해도 부하들이 다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강재구 소령은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었을 것”이라고 했다.
 
  중대를 대표하는 중대장 생도는 어떻게 임명할까. 생도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은 후보군(2~3명)을 모아 훈육관에게 보고하면 이를 바탕으로 훈육관이 지명한다.
 
  한상우 생도는 “솔선수범을 바탕으로 중대를 이끌려고 노력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화랑의식을 마치고 재구상을 지날 때면, ‘나도 그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강재구 소령님처럼 희생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섣불리 ‘나도 할 수 있다’는 답을 내리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떳떳하고 굳건한 군인, 소신과 신념을 지키는 군인이 돼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재구중대 소속 생도들이 강재구 소령에게 경례를 하고 있다.
 

 

 

 
  “사관생도들도 강재구처럼 희생할 것”
 
육사 학보사인 육사신보 기자생도가 강재구 동상을 배경으로 서 있다.
  김 훈육관에게 ‘생도들이 강재구 소령처럼 위급한 순간에 자기 몸을 던질 수 있다고 보느냐’고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생도 대부분이 강재구 소령처럼 희생하려고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도들이 겉으로는 ‘강재구 소령처럼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자신이 없다’고 말은 하지만 막상 때가 되면 기꺼이 자기 몸을 던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생도들은 그렇게 교육받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도들에게 항상 ‘양보하라’ ‘솔선수범하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우리 생도들이 가장 열심히 싸울 겁니다.”
 
  심호섭 교수는 강재구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우리 장병에게 남긴 유산을 이렇게 평가했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많이 했던 임무가 동굴 수색 작전입니다. 이 동굴이라는 게 입구가 큰 동굴이 아닙니다. 한두 명이 겨우 들어가는 크기의 은거지입니다. 수색하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여기에 누가 들어가려고 하겠어요? 그래도 누군가는 들어가야 했어요. 이때 ‘내가 하겠다’라고 나선 이들이 있었고 이들이 강재구 같은 사람에게 영향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베트남전은 한국군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군대가 전쟁과 전투를 치르면 ‘군 현대화’라는 유형적 측면뿐 아니라 ‘전투 경험’이라는 무형적 가치도 얻습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수행한 작전은 주로 전면전이 아닌 국지도발(대게릴라전) 대응과 같은 임무였습니다. 한국군이 평시(平時)에 수행하는 작전과 같은 내용입니다. 베트남전을 전후(前後)로 우리 휴전선(MDL) 일대가 모두 철조망으로 구분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이에 남북이 DMZ 일대에서 서로 침투하고 매복해 교전도 했습니다. 한국군은 베트남전에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전보다 더 과감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잊혀가는 ‘강재구 정신’
 
지난 10월 13일 인천광역시 대회의실에서 ‘제1회 강재구소령 순직 제60주기 학술세미나’. 사진=강재구소령선양사업회(이사장 이정린·회장 장순휘).
  한국군은 1964년 9월 비전투병을 시작으로 1973년 3월까지 연인원 32만 명을 파병했다. 최대 5만 명이 베트남에 주둔했다. 이 전쟁에서 한국군 약 5000명이 전사하고 1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시간이 흘러 베트남전은 잊힌 전쟁이 됐다. 베트남전 비전투병·전투병 파병 60주년을 맞았지만, 지난해와 올해 정부 차원 공식 행사는 없었다. 대신 반전(反戰), 평화, 양민 학살 같은 단어가 베트남전을 조명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심 교수는 “우리 군이 전문성을 강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군이 추구해야 할 본연의 가치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변화하는 가치만을 좇다 보면 정작 지켜야 할 가치를 잃을 수 있다. 한국군이 추구해야 할 불변의 핵심 가치가 바로 강재구 정신”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강재구를 알리려는 노력은 60년 만에 시작됐다. 지난 9월 12일에는 강재구 순직 60주기를 맞아 강재구소령선양사업회(이사장 이정린·회장 장순휘)가 출범했다. 지난 10월 13일에는 고인이 초·중학교를 다닌 인천광역시 대회의실에서 ‘제1회 강재구소령 순직 제60주기 학술세미나’도 열렸다.
 
  장순휘 회장은 “강재구 소령의 순직은 ‘굵고 짧게 살자’ ‘내일 죽어도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을 살자’는 강 소령의 평소 신념이 오롯이 담긴 ‘준비된 희생’이었다”면서 “강 소령의 희생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다시금 되새겨야 할 시대정신”이라고 했다.
 
  학술세미나 사회를 맡은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주은식(육사 36기, 예비역 육군 준장)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강재구의 죽음은 사고사가 아니었다. 의로운 선택, 책임 있는 행동, 국가와 전우를 향한 충성이 만들어낸 살신성인과 멸사봉공의 실천적 증거였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그는 명령받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고,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지켜야 할 가치를 행동으로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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