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英 상선 로드 애머스트호 타고 1832년 7월부터 1개월간 황해도, 보령 도서에 머물러
⊙ 최초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 최초로 서양에 체계적이고 학술적으로 한글 소개
⊙ 감자가 자랄 수 있는 가장 유리한 땅 골라 100개 이상 심어
⊙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한국순례길’ 만들고, 그 출발점을 ‘십자가의 도시’ 보령으로”
⊙ “‘인간 귀츨라프’에게만 관심 갖는 우상화 경계해야”
⊙ 최초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 최초로 서양에 체계적이고 학술적으로 한글 소개
⊙ 감자가 자랄 수 있는 가장 유리한 땅 골라 100개 이상 심어
⊙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한국순례길’ 만들고, 그 출발점을 ‘십자가의 도시’ 보령으로”
⊙ “‘인간 귀츨라프’에게만 관심 갖는 우상화 경계해야”

- 충남 보령 고대도에 위치한 귀츨라프 기념공원. 멀리 고대도 앞바다가 보인다. 사진=대구 동일교회
![]() |
| 중국옷 차림의 프로이센 출신 선교사 카를 귀츨라프. |
“귀츨라프의 인간적 순수함과 신앙적 거룩함, 그와 함께 조선 땅을 바람처럼 스쳐 간 선원들의 발자국을 재현하려고 애썼다”는 이 교수 서문에 이끌려 보령 땅을 둘러볼 결심을 했다.
독일(당시 프로이센) 루터교 목사인 카를 귀츨라프(Karl Friedrick August Gützlaff·1803~1851년)는 1803년 7월 8일 독일 프로이센 왕국에서 태어났다. 1821년 베를린 선교학교에서 공부했고, 이후 네덜란드 선교회에서 훈련을 받아 1826년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이후 중국 선교사로 활동했다.
귀츨라프는 대형 상선 로드 애머스트(Lord Amherst)호를 타고 1831~33년까지 3차에 걸쳐 중국, 조선, 일본의 연안을 돌며 선교활동을 했다. 당시 통역 및 의사 자격으로 승선했다고 한다. 조선에는 1832년 약 1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황해도를 거쳐 충남 보령 도서(島嶼)에 7월 21일부터 8월 12일까지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 일행은 조선 순조(純祖·재위 1800~1834년)에게 통상(通商) 청원서와 예물을 보낸 뒤 답을 기다리는 동안 보령 여러 지역을 찾아 전도 책자 및 성경을 나누는 전도활동, 감자 재배법 보급, 의료활동, 한글로 주기도문을 번역하는 일 등을 하였다는 기록이 일기에 남아 있다.
그러나 루터교 목사인 귀츨라프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인정을 받지는 못한 상태다. 한국사 교과서에는 최초 복음을 전한 선교사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년)와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1858~1902년)를 꼽는다. 두 사람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인천 제물포항에 함께 도착했는데 그날이 한국에 기독교 복음이 공식적으로 전파된 첫날로 기록돼 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그리고 귀츨라프
한국 기독교 복음 역사에서 그보다 19년 전 또 한 명의 인물이 거론된다. 장로교 계통의 선교사인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년)는 공식 선교사로 인정받진 않지만, 한국 땅에 최초로 성경을 전한 인물로 평가된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때 통역 겸 선교사로 배에 승선했는데 영어와 한문 성경을 다량 휴대하여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관헌과의 충돌 끝에 제너럴 셔먼호는 평양 대동강에서 불타 침몰했고 토머스는 평양에서 순교했다.
서울 영등포역에서 보령 대천행 열차를 탔다. 홍성에 기차가 멈췄을 때 소설 《귀츨라프》를 쓴 이재인 교수가 합류했다. 이 교수는 현재 한서대 석좌교수로 여전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충남 서산과 태안에 캠퍼스가 있는 한서대는 항공·해양·보건 분야 특성화 사립대학이다.
덜컹거리는 ‘서해금빛열차’ 안에서 우리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다음은 이재인 교수의 《귀츨라프》에 나오는 대목이다.
〈70여 명의 선원 가운데 귀츨라프처럼 조선은 물론 동양 역사를 섭렵한 지식인은 없었다. 귀츨라프는 동양 여러 국가의 문자, 경제, 사회, 민속, 관직의 직제에 이르기까지 각국 서적을 통달했다. 그는 말하자면 탁월한 당대 지식인이었다.〉
― 귀츨라프란 인물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1832년 여름 로드 애머스트호에 승선하여 조선에 온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황해도, 충청도를 방문하고 제주도 해안을 지나갔다는 기록이 있어요. 저도 기독교 신자지만 분명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입니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외아들로 태어나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26세에 결혼했으나 14개월 후에 아내를 잃었고, 31세에 재혼했으나 15년 후 46세에 사별했고, 이듬해 세 번째 결혼을 했으나 1년 후 48세가 되던 해에 귀츨라프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재인 교수에 따르면 귀츨라프는 1831년 6월 태국 방콕에서 중국 선교사로 부임하는 과정에서 1차 여행으로 약 6개월간 배를 타고 중국 톈진까지 갔다가 마카오로 돌아왔다고 한다. 1832년 2월부터 9월까지 2차 여행을 떠나 중국 해안, 조선, 일본 오키나와를 돌았고, 1832년 10월부터 1833년 4월까지 3차 여행으로 중국 해안 일대를 둘러봤다.
귀츨라프의 생애
― 그가 조선을 포함해 어느 곳에서 선교를 했나요?
“인도네시아로, 태국, 중국, 조선, 일본으로 열정적 선교 여정과 활동들이 알려졌지만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리라 봅니다. 물론 통역과 의사의 자격으로 로드 애머스트호에 동행했으나 전도 문서, 한문 성경 등을 준비했으니 처음부터 선교가 목적이었을 겁니다.”
이 교수는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보다 53년이나 앞선 그의 선교 행적을 조명하고 살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귀츨라프가 언어적 능력이 있었을까요? 소설 《귀츨라프》에는 말레이어, 베트남어, 청나라 말을 익혔다고 나와 있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2개 국어를 구사하고 6개 국어로 책을 낼 정도로 언어의 귀재였다고 하더군요. 인도네시아, 태국 선교사를 거쳐 중국 선교사로 일생을 바쳤습니다. 묘지도 홍콩에 있어요. 독일인이지만 영어로 된 이름이 있고, 중국식 이름이 30여 개(郭士立·郭實獵·吳士利 등)나 된다는 기록이 있어요. 우리나라 《순조실록》에는 ‘갑리(甲利)’로 적혀 있죠. 중국 선교 목적이겠지만 중국식 옷을 입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을 붙인 지명이 홍콩과 상하이에 남아 있죠.”
홍콩에서는 ‘귀츨라프가’를 ‘갓시랍가이(吉士笠街·길사립가)’라고 쓴다. 1883년 상하이에 건립된 항로 신호용 탑인 ‘궈스례(郭實獵·곽실엽) 신호탑’의 영어명이 귀츨라프 시그널 타워(Gutzlaff Signal Tower)다.
― 항로 신호탑에 왜 귀츨라프라는 이름을 넣었을까요?
“아마도 중국 연안을 따라 선교와 탐험을 수행한 최초의 서양인 중 하나였고, 그의 활동이 서양 항해도(航海圖) 제작과 해상 측량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가 자주 기항했던 지점들이 ‘Gutzlaff Reef’ ‘Gutzlaff Island’ ‘Gutzlaff Channel’ 등으로 명명되었다고 알고 있어요.”
― 조선에도 들렀다면 관련 기록이 국제 항로 지도에 남았을 텐데요.
“제가 알기로 귀츨라프가 조선 관련 보고서를 영국에 제출했지만, 그 내용이 국제 항로 지도(nautical chart)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해요. 결국 조선 관련 지명으로 남을 제도적 경로가 없었던 것입니다.”
귀츨라프는 홍주(지금의 보령시) 원산도와 고대도 등지에 18박 19일 동안 머물면서 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감기 환자들에게 약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외국 채소를 도입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반대하는 주민들을 “혁신이 있어야 수익이 생긴다”고 설득하여 감자를 심고 기르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 소설에는 귀츨라프가 전해 준 감자 이야기가 있던데, 그렇다면 보령 감자가 귀츨라프가 전해 준 것인가요?
“귀츨라프 감자인지는 유전학적으로 따져 봐야 되겠지요. 아직 우리 문헌에 공식 기록은 없습니다.”
이 교수 소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최고의 맛, 서해 바다 바람을 먹고 자란 신령스럽고 아름다운 원산도 토종으로 자부심이 샘솟는 감자는 족보가 있습니다. (중략) 많이 먹고, 자시고, 원산도 하면 감자와 복음을 전해 준 귀츨라프를 생각하며….〉
“‘한국순례길’의 첫 출발지로”
![]() |
| 귀츨라프가 심은 감자를 기념하는 고대도 마을 벽화 앞에서 이재인 교수(왼쪽), 안세환 목사가 포즈를 취했다. |
목사실 벽 한켠에 안 목사가 읽은 책이 가득했는데 철학 서적이 많았다. 그는 “보령이 단순히 섬이 있고 바다가 있어 좋은 곳이 아니라 선교의 관문이 보령에서 시작되고, 보령에서 기독교 문화를 맛볼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귀츨라프가 다녀간 흔적을 통해 보령을 기독교 문화의 첫 관문으로 어떻게 재조명할 수 있을까? 안 목사의 말을 들어 보자.
안 목사는 “귀츨라프 일행이 행한 역사(役事)가 기록으로 남아 있고 그 기록에 의거해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태안에는 〈토끼전〉의 거북이 전설을 따라 별주부 마을을 만들었어요. 오천의 ‘도미부인’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설이죠. 전설을 갖고도 문화를 만들 수 있는데, 193년 전 살아 있는 역사를 오늘의 문화로 만드는 일은 지금 해야 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막연하지만 원대한 포부 같은 사명감이 느껴졌다. 머지않아 보령에 귀츨라프 이름을 붙인 공원과 거리, 멋진 선교기념관이 들어설지 모른다.
“보령 고대도는 육지와 연결이 되지 않아 쉽게 갈 수 없는 곳이죠. 보령과 지하터널로 연결된 원산도에서 태안을 거쳐 동해안까지 이어지는 순례길을 사단법인 한국순례길에서 준비하고 있어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한국순례길을 만들고 그 출발점을 십자가의 도시 보령, 그중에서 원산도로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안세환 목사의 승용차를 타고 원산도로 향했다.
보령에서 원산도를 잇는 보령해저터널은 충남 서해안 교통의 지형을 바꾼 대한민국 최장 해저터널이다. 왕복 2차로, 콘크리트 구조물로 길이는 약 6.93km에 이른다. 해저 약 80m에 길이 생겨 보령에서 배를 타고 원산도까지 약 1시간 걸리던 것이 10여 분으로 단축됐다. 이재인 교수는 “보령시에서 원산도까지 대략 메밀부침 석 장 정도 구울 수 있는 시간인 17분가량 거리”라고 했다. 오랜 연구로 이 바다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쓴 작가답게, 거리도 삶의 언어로 번역하니 정겹게 들렸다.
원산도와 고대도
![]() |
| 보령 오천면 원산도리 802번지에 위치한 ‘선교 원년 기념비’. 기념비 한켠에 ‘최초 선교사 칼 귀츨라프’라고 적었다. 왼쪽부터 안세환 목사, 이재인 한서대 석좌교수. |
안 목사는 “원산도가 ‘보령 앞바다의 섬’에서 ‘육지와 이어진 관광섬’으로 변모했다”고 말했다. 보령은 머드축제의 도시만이 아니라 원산도라는 ‘새로운 육지’를 갖게 됐다. 여기다 귀츨라프라는 영적 자산까지 확보한 상태다.
승용차가 ‘선교 원년(元年) 기념비’ 앞에 멈춰 섰다. 커다란 기념비에는 ‘최초 선교사 칼 귀츨라프 1832년 7월 25일 원산도 도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 뒤로 폐교가 된 원의중학교 교정(校庭)이 보였다. 교사(校舍)는 없고 운동장엔 초등학생 키만큼 자라난 풀들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학교에서 지었다는 교회가 나무에 가려 보일락 말락 했다. 2016년 5월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교회도 자연스레 문을 닫은 것일까.
안 목사는 “저 교회는 미션스쿨이던 원의중학교의 설립자(재단법인 송죽학원)인 김옥선 장로가 지역 복음화와 학생 예배공동체를 위해 세운 교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마을 이장에게 물어보니 학생 시절, 돌을 이고 지고 하며 교회를 지었다더라”고 귀띔했다.
김옥선(金玉仙·1934년~) 장로란 3선(7대, 9대, 12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옥선 전 의원이다. 김 전 의원은 정치활동과 공적 무대에서 전통적인 여성복 대신 남성 양복을 주로 착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군사정부 시절 여성 정치인의 남장은 부득이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차를 몰아 원산도해수욕장을 찾았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선교사 카알 귀츨라프 기념비’가 있었는데 1982년 7월 17일에 세웠다고 적혀 있었다. 귀츨라프가 1832년에 원산도를 찾았으니 정확히 150년 뒤에 이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안세환 목사의 말이다.
“귀츨라프가 1832년 7월 17일 보령에 도착하지는 않았어요. 그날은 황해도 몽금포에 도착한 날이죠. 그러니까 비문에 7월 17일이라고 쓴 것은 한국에 최초 도착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보령 외연도에 7월 21일 처음 도착했고 원산도에는 25일쯤 온 것으로 저는 보고 있어요.”
원산도해수욕장 주변은 상전벽해 그 자체가 돼가고 있었다. 곳곳에 땅을 높이 다지고 있었고 공사 차량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안 목사 말로는 수백억원의 국비가 투입돼 해양레저 관광거점 조성사업이 진행되고 있단다. 원산도를 중심으로 인근 효자도, 삽시도, 고대도, 장고도 등 다섯 섬을 아우르는 섬별 특화개발전략이 완성되면 보령이 글로벌 해양레저 관광도시가 될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귀츨라프 선양(宣揚) 사업도 활기를 띨 게 틀림없다.
| 귀츨라프 처음 알린 대구 오현기 목사 귀츨라프가 보령 도서에서 선교활동을 한 사실이 알려진 것은 대구 동일교회 오현기 목사를 통해서다. 오현기 목사는 베를린 유학 시절 귀츨라프의 존재를 알게 되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다. 지난 2004년 귀츨라프 연구를 시작한 이래 20년 넘게 자료를 모았다. 귀국 후 직접 고대도를 방문해 이곳에서 학술발표회를 개최하고 ‘귀츨라프 선교센터’ 건립에 앞장서면서 다양한 활동을 펴왔다. 오 목사는 고대도를 ‘God愛島’라 명명하며 “하나님이 사랑하신 섬 고대도는 우리에게 주신 또 하나의 선물”이라고 강조한다. ‘고대도-God애도’, 지적인 언어 유희가 신앙고백이 되고, 그 안에 섬을 향한 깊은 애정이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카를 귀츨라프가 고대도에 정박한 7월에 맞춰 벌써 12년째 축제가 열리고 있다. 올해는 지난 7월 19일부터 23일까지 ‘제4회 귀츨라프 의료선교’ ‘제12회 칼 귀츨라프의 날’ 행사, ‘제4회 귀츨라프 국제영화제’를 잇달아 열어 귀츨라프를 기렸다. |
한국에는 기독교를, 세계에는 한글을 알려
귀츨라프원산도교회 홍판열 목사와 만나 점심을 먹었다. 서해가 보이는 곳에서 윙윙 날아다니는 파리와 함께 잔치국수를 먹었다. 국수를 먹으며 서해를 보았다. 서해 바람이 낮게 흐르고 하늘은 느린 짐승처럼 구름의 길을 더듬고 있었다.
홍 목사는 조만간 원산도에 새로운 교회를 지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가 꿈꾸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생각해 보았다. 귀츨라프가 전한 신앙이 새롭게 원산도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귀츨라프는 일기에서 황해도와 보령에 있는 동안 세 차례나 목 베는 시늉을 하는 관리, 경비 군인, 민간인 등을 만난 기록을 남겼다. 로드 애머스트호의 함장 린지(Hugh Hamilton Lindsay·1802~1881년) 역시 별도 보고서를 남겼다. 그 문헌에도 ‘목 베는 조선 관료’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832년 이전인 1827년까지 6차례나 이어진 천주교 박해로 교인들이 참수형을 받다 보니 백성들은 물론이고 관리들조차 두려움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귀츨라프도 천주교 박해와 교인 수천 명이 처형됐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을까.
보령의 갈매못(오천면 영보리)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때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자리다. 1866년 병인박해 때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조카 황석두 루카, 천주교 신자 수십 명이 갈매못 해안가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3명의 외국인 신부와 여러 조선 신자들이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諡聖·canonization)되었다.
홍 목사는 귀츨라프 일행이 보령 도서에 도착해 전도 책자를 나눠 주고 문서 선교에 힘썼다고 했다. 순조임금에게 한문으로 된 성경 《신천성경(神天聖經)》을 예물로 전했고,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해 유럽에 한글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귀츨라프는 그해 7월 27일 ‘양이(Yang-yih)’라는 조선 하급 관리로 하여금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게 하였다. 귀츨라프가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쓰면 양이가 한글로 번역하였다. 양이는 손으로 목 자르는 표시를 반복하면서, 만약 고관들이 이 사실을 알면 자신의 목이 달아날 것이라고 암시했다고 한다. 한글로 쓴 주기도문을 없애 달라고 양이가 간청하자 귀츨라프는 그의 염려를 알아차렸다. 그 종이를 상자 속에 넣고 잠가 누구도 볼 수 없도록 확인시켜 주었다. 이날 귀츨라프는 여러 한자에 해당하는 한글을 익힐 수 있었다.
홍 목사는 “1832년 11월, 귀츨라프는 자신이 발표한 한글 연구 논문에서 닿소리(자음)와 홀소리(모음)의 결합으로 168가지 음절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공개했다”며 “귀츨라프는 한글 구조를 두고 ‘조형 원리가 단순하면서도 발상이 뛰어나며, 언어 표현의 폭이 놀라울 만큼 넓다’고 감탄했다”고 강조했다. 영문으로 써서 중국 잡지에 발표한 논문 〈조선어에 대한 소견〉에서 그는 한글의 기원과 체계, 자모의 음성학적 분류, 로마자 표기 방식, 한국어의 어법과 문법 구조, 지역별 방언의 차이, 그리고 조선인의 문화적 성숙도까지 상세히 다루었다. 귀츨라프는 한국에는 기독교를, 세계에는 한글을 알린 셈이다.
귀츨라프 감자
![]() |
| 귀츨라프는 감자가 잘 자랄 수 있는 가장 유리한 땅을 선택해 감자 100개 이상을 심었다. 그림은 귀츨라프가 감자를 심는 장면이다. |
감자의 우리나라 전래에 관한 두 가지 설은 학계 논의에서 다소 복합적이고 모호한 부분이 있다.
첫째,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순조 24~25년(1824~1825년)에 관북(關北) 즉 함경도 지역에서 처음 감자가 들어왔다”라고 기록하고 이후 헌종 13년(1847년)에 경기도·충청도·강원도 지방까지 보급되었다는 기록도 덧붙인다. 이 북방설의 약점은 《오주연문장전산고》가 1850년대 초반에 쓰인 후대의 문헌으로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또 “관북에서 처음 도입되었다”는 진술이 실제 씨감자의 유입 경로나 경로를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둘째, 김창한의 《원저보(圓藷譜)》에는 감자가 “북방으로부터 들어온 지 7~8년 되는 해인 순조 32년(1832)” 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일부 사가(史家)들은 이것이 귀츨라프가 인근 해안 지역에 씨감자를 전해 준 증거라고 강조한다. 다만, 귀츨라프 관련 기록은 주로 선교사 전승이나 후대 해석에 기반한 것으로, 조선 측 공식 사료에서 직접적으로 “귀츨라프가 감자를 가져와 심었다”는 명확한 문건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로드 애머스트호의 함장인 린지도 자신의 보고서에서 조선에 감자를 보급한 데 대한 글을 남겼다. 훗날 린지는 영국 의회의 의원이 되었고 사업가로도 활동했다.
〈저녁 식사 후 우리는 감자를 심기 위해 상륙했다. 귀츨라프는 감자를 재배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서를 자세히 썼다. 우리는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땅을 골라 감자를 백 개 이상 심었다. 수백 명의 주민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재배법을 쓴 설명서는 땅 주인에게 주고, 잘 돌보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귀츨라프가 쓴 1832년 7월 30일 자 일기에서도 감자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오늘 오후에 우리는 감자를 심기 위해 해안으로 올라갔고, 그들이 감자를 잘 재배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재배법을 서면으로 써주었다. 이런 좋은 행동조차도 그들은 처음에 대단히 반대했다. 외국산 채소를 들여오는 것은 국가의 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반대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들이 묵묵히 양보할 때까지 그러한 혁신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이익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였다.〉
고대도 귀츨라프 기념공원
![]() |
| 고대도의 귀츨라프 기념공원. 이재인 교수(왼쪽)와 안세환 목사는 “귀츨라프 선교사가 한문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고 60여 명의 노인들이 먹을 만큼의 충분한 감기약을 나눠 주었다”고 했다. |
이 교수, 안 목사와 대화를 나누며 고대도에 조성된 귀츨라프 기념공원을 둘러봤다. 해안 둘레길을 걷는 내내 가을빛, 섬, 바람, 구름이 선물처럼 펼쳐졌다. 우리는 그 모든 선물을 온전히 누렸다.
섬에서 귀츨라프의 체류는 짧았으나, 이 땅에 복음의 첫 씨앗을 심은 발걸음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바다와 파도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기념공원은 그 짧은 시간의 흔적을 품고 있는 듯했다. 산책길을 따라 걸으니 햇빛에 반사된 바다가 눈부시게 펼쳐졌다. 고대도의 바람은 그 길 위에서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빛은 한번 건너오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바다는 그 문장을 따라 잔잔히 출렁였다. 귀츨라프 동상은 바다를 등지고 서있었다. 그의 눈빛은 항해하는 사람처럼 여전히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 앞에 서니 파도는 기도처럼 낮고 느리게 다가왔다. 섬의 나무들은 오래된 신앙의 그림자처럼 고요히 서서 하늘과 바다 사이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 |
| 고대도의 귀츨라프 해양역사문화기념관. ‘그가 우리를 깨웠고, 이젠 우리가 그를 깨운다’는 글이 인상적이다. |
‘그가 우리를 깨웠고, 이젠 우리가 그를 깨운다.’
이튿날 아침, 이재인 교수와 함께 대천중앙교회 김봉한 원로장로를 만났다. 김 장로와 대화를 나누자마자 대단한 열정을 지닌 분인줄 알게 됐다. 그는 우리를 영보정(永保亭)으로 안내했다. 영보정은 충청수영성(水營城) 안에 있는 정자로 1504년에 지은 우리나라 최고 절경의 정자다.
영보정에서 내려다본 원산도
![]() |
| 충청수영의 영보정에서 이재인 교수(왼쪽)와 김봉한 장로가 멀리 귀츨라프가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산도를 가리키고 있다. |
문득 193년 전 오천항 앞바다에 이양선(異樣船) 로드 애머스트호가 왔을 때 영보정을 지키는 수군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다.
이재인 교수는 “역사적으로 이곳은 중요한 요충지였고 호남 곡창 지대에서 산출된 미곡(米穀)을 경도(京都)로 운반하는 조운선이 통과하던 중간 지점이었다”고 했다. 조선시대 서해안 수군 사령부가 들어설 만큼 규모가 커서 140여 척의 군선에 병력이 8400여 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김봉한 장로는 “백제 때는 회이포(回伊浦)라고 불렸고 때로 당나라와 교역하는 항구 구실을 했다”고 덧붙였다.
이곳 충청수영은 병인박해 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역사적인 장소다. 특히 1866년 3월 30일 갈매못 순교성지에서 순교한 5명의 성인인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주기 요셉, 황석두 루카와 연관이 깊은 곳이다
순교자 후손의 이야기
김봉한 장로의 차를 타고 보령 일대를 돌아보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머니가 살아온 생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평생 소원”이라는 김 장로의 말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순교한 외삼촌 성승군과 어머니 성창순 이야기를 듣게 됐다. 김 장로의 말이다.
“외삼촌은 1919년 충북 단양군 영춘면 용진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한학에 밝은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어려서부터 새벽마다 사도신경을 외우며 신앙의 씨앗을 받으셨어요. 전쟁과 가난 속에서도 예배를 지키고, 공산군의 위협에도 주저하지 않았죠. 1951년 1월, 6·25전쟁의 막바지에 인민군이 영춘 일대를 점령했어요. 교인들이 피신하라 했지만 외삼촌은 ‘하나님이 지키신다’며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러나 산길에서 인민군에게 붙잡혀, 억류된 자리에서도 ‘예수를 믿고 서로 화목하게 살아야 한다’고 담대히 전도하셨다고 해요. 결국 외삼촌은 ‘악질 예수쟁이’라는 죄목으로 끌려가 손이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옆구리가 찔린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됐어요. 동짓달의 혹한 속에서 피가 얼어붙은 시신은, 예수님과 같은 33세의 나이에 순교한 증거가 됐습니다.
외삼촌의 죽음은 가족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지만, 어머니는 ‘오빠는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은 사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외삼촌의 피 묻은 신앙이 우리 가정과 교회의 믿음을 붙들었죠.”
김 장로는 “어머니가 사시던 시골 마을에 건립된 조그마한 교회가 순교의 피와 기도 덕택에 지금은 3곳으로 늘어났다”고 했다. 그가 말한 3곳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있는 용진교회, 평화감리교회, 한사랑교회다. 그의 외삼촌 고(故) 성승군 순교자는 2006년에 감리교회에서 순교자 추인을 받았다고 한다.
짧은 시간에 귀츨라프를 만나고 또 여러 사람을 만나고 유서 깊은 곳을 둘러보고 서울로 돌아왔다. 19세기 이양선 출현이 ‘은둔의 나라’ 조선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줄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귀츨라프가 남긴 거대한 흔적이 점점 현실로 드러나고 있음이 놀랍기만 했다.
취재 중 만난 정승호 목사(대천 신흥교회), 이혁의 목사(보령 밀알교회), 이정열 목사(원산도교회)가 “바다 위에서 귀츨라프와 조선인의 우연한 만남과 교류는 조선 사회가 직면한 문명 충돌의 상징적 장면이었다”며 “오늘날 신앙, 문화, 농업, 민족의식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와 발전을 이뤄 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200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섬 비엔날레, 귀츨라프 선교길, 이양선 선교기념관, 서해 선교사 순례길 등 보령 곳곳에서 펼쳐질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새로운 변화를 예고한다. 그 변화는 머지않아 보령의 정체성을 더욱 뚜렷한 색채로 드러내게 될 것이다.
“개인 우상화 경계해야”
기사를 마무리하는 즈음에 고대도교회 박노문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미국에서 26년간 목회를 하다 남은 사역을 선교지에서 하고 싶은 열망으로 2017년 6월 29일 고대도에 들어왔다고 했다. 박 목사에게 긴 문자를 받았는데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일부만 소개한다.
“귀츨라프 행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셨는가 하는 선교적 관점은 없고, 오로지 귀츨라프라는 인간이 우상이 되는 현장이 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귀츨라프를 사용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 귀츨라프에게만 맞추니 인간을 우상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기독교문화해설사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객관적 역사적 자료를 가지고 잘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는 자로서 그 내면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의 모습을 함께 담아 전달했으면 좋겠다고요.”
그의 말 속에는 역사와 신앙을 바라보는 균형 감각, 그리고 신중한 믿음의 온도를 지켜 내려는 태도가 담겨 있다. 귀츨라프가 태어난 독일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한다. ‘나무가 너무 많아 숲을 보지 못한다.’ 본질을 잃지 않고 전체를 바라보는 일, 그것이 어쩌면 오늘 우리가 귀츨라프를 통해 다시 초대받은 길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