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백신연구소 韓 유치와 셀트리온 창업까지, 생명과학 산업화 이끈 주역
⊙ 韓 자체 기술 세계 특허 B형 간염 백신 확보… 10% 보균율 1% 미만으로
⊙ “대한민국은 바이오시밀러 강국… 선두 지키려면 세금·노사 문제 등 지원 필수”
⊙ 세계 최초로 ‘누드 마우스’ 활용 방법론 도입… 암 치료제 연구의 기본으로 자리 잡아
⊙ “‘백신 음모론’ 기초한 美 국가정책, 큰 재앙 될 것”
⊙ 北 일본뇌염 시달릴 때 2년간 200만 어린이 백신 접종 지원
辛承一
1938년 강원도 원주 출생. 서울대 문리과대학 화학과 중퇴(2017 명예졸업장 수여), 美 브랜다이스대 화학 학사, 생화학·세포생물학 박사 / 바젤 면역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앨버트아인스타인 의대 유전학과 교수, 유엔개발계획(UNDP) 상임수석보건전문위원, 국제백신연구소(IVI) 창립총괄·초대 소장, 삼성 美 현지법인 유진텍인터내셔널 대표, 셀트리온 설립 기획·총괄·사외이사 겸 과학기술위원회 의장,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대표이사 역임. 現 미국 세계전염병백신연구원(GSID) 이사
⊙ 韓 자체 기술 세계 특허 B형 간염 백신 확보… 10% 보균율 1% 미만으로
⊙ “대한민국은 바이오시밀러 강국… 선두 지키려면 세금·노사 문제 등 지원 필수”
⊙ 세계 최초로 ‘누드 마우스’ 활용 방법론 도입… 암 치료제 연구의 기본으로 자리 잡아
⊙ “‘백신 음모론’ 기초한 美 국가정책, 큰 재앙 될 것”
⊙ 北 일본뇌염 시달릴 때 2년간 200만 어린이 백신 접종 지원
辛承一
1938년 강원도 원주 출생. 서울대 문리과대학 화학과 중퇴(2017 명예졸업장 수여), 美 브랜다이스대 화학 학사, 생화학·세포생물학 박사 / 바젤 면역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앨버트아인스타인 의대 유전학과 교수, 유엔개발계획(UNDP) 상임수석보건전문위원, 국제백신연구소(IVI) 창립총괄·초대 소장, 삼성 美 현지법인 유진텍인터내셔널 대표, 셀트리온 설립 기획·총괄·사외이사 겸 과학기술위원회 의장,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대표이사 역임. 現 미국 세계전염병백신연구원(GSID) 이사

- 이하 사진=신승일
한국은 백신 개발, 생산, 유통에서 강점을 가진 나라다. 지금은 ‘백신 5대 강국’을 넘보고 있다. 그 토대 뒤에 숨은 주역이 있다. 신승일(辛承一·87) 박사다.
‘백신 5대 강국’의 숨은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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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브랜다이스대 대학원 시절의 신승일 박사. |
1957년 서울대 화학과에 입학한 신승일 박사는 3년 만에 중퇴하고 196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브랜다이스대에 다시 입학해 1968년 생화학·세포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네덜란드 국립 라이덴 대학교 유전학연구소, 영국 국립 의학연구소, 스위스 바젤 면역학연구소 등 세계적인 연구기관에서 활동했다. 1972년부터는 미국 뉴욕 앨버트아인스타인 의대에서 유전학 교수로 재직했다. 이 시기 암세포 변화를 연구하며 ‘누드마우스(nude mouse·실험용 쥐의 일종)’를 활용하는 방법론을 세계 최초로 도입했다. 이는 오늘날 암 치료제 연구의 기본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업적만큼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스스로 스포트라이트를 피했기 때문이다. 이번 인터뷰 제안에도 신 박사는 “할 말이 많지 않다”며 손사래를 쳤다. 여러 차례 설득 끝에 지난 9월 4일 서울 잠실에서 그를 만났다.
― 코로나19가 재유행 중입니다. 일각에서는 백신에 대한 의심과 불신, 부작용 우려가 여전히 존재하는데요.
“몇몇 부작용 사례만 보고 ‘백신 맞으면 안 된다’고 하는 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백신은 원래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고, 효과도 100%는 아닙니다. 바이러스가 변이하면 효능이 떨어지기도 하죠. 또 사람마다 DNA가 달라 반응도 다르기 때문에 일부 부작용은 불가피합니다. 아주 드물게 RNA 성분이나 안정화제(劑)에 반응해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수천 명 중 한 명꼴에 불과해요. 그것도 정말 백신 때문인지 명확히 확인하기 어렵고요.”
백신의 안전성
― 미국에서는 ‘백신 음모론’에 기초한 보건정책 전환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9월 1일(현지시각) 소셜미디어에 화이자 등 제약사들이 코로나19 백신의 효과를 입증할 데이터를 CDC(미 질병통제예방센터)와 대중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는데요.
“지금까지 세계 보건·과학을 이끌어 온 미국이 그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 있다는 비관론이 커지고 있어요. 지난 2월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취임한 뒤, CDC 예방접종 자문위원 17명을 전부 해임했습니다. 미국 의학계는 크게 반발했고, 전직 CDC 국장들까지 나서서 ‘국민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조치’라고 비판했죠.
사실 소아마비, 홍역, 볼거리 같은 전염병이 거의 사라진 건 백신 덕분입니다. 코로나 때 상용화된 mRNA 백신도 과학적 성과가 입증돼 연구자들이 노벨상까지 받았잖아요. 그런데 근거 없는 불신이나 집단적 거부가 확산되면 피해는 결국 일반 시민,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돌아옵니다. 큰 재앙이 될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미국은 WHO 탈퇴를 선언하고 예산까지 삭감하면서 국제 보건원조도 대폭 줄였습니다. 그 여파로 전 세계 백신 공급과 질병 퇴치 사업이 위축됐고, 2030년까지 1400만 명이 추가로 사망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 애초에 백신 음모론은 왜 생겨난 겁니까?
“극단주의자들은 어디에나 있지만, 백신 문제와 연결된 배경은 명확하진 않아요. 다만 미국에는 메노나이트(Mennonite), 아미시(Amish) 같은 근본주의 기독교 종파가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하나님이 주신 몸에 약을 넣는 건 성경에 어긋난다’는 신념으로 자녀에게도 백신을 맞히지 않죠. 이런 집단적 거부가 전염병 확산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또 하나는 자폐증 논란입니다. 1998년 영국 의사 웨이크필드가 MMR 백신과 자폐증이 관련 있다고 주장했지만, 전 세계 연구 결과 인과관계가 전혀 없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논문은 철회됐고 웨이크필드의 의사 면허도 박탈됐지만, 여전히 이를 믿는 사람들이 있어요. 케네디 주니어도 자폐증 증가를 환경 탓으로 돌리지만 과학적 근거는 없습니다. 실제 자폐증 환자 증가의 가장 큰 원인은 진단 기준 확대예요.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경계선발달장애까지 자폐 스펙트럼에 포함되면서 환자가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거죠. 실제로는 백신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감염병 발생 주기
― 기후변화, 환경 파괴 등으로 코로나, 사스, 메르스 같은 감염병 발생 주기가 종전 5년에서 3년 이내로 점점 짧아질 거라는 우려도 제기됩니다.
“크게 신경 쓸 말은 아닙니다. 코로나19만 봐도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게 백신이 개발됐고, 값도 저렴해 많은 나라에서 무료 접종이 이뤄졌습니다. 접종자의 80~90%가 면역을 얻어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죠. 코로나 같은 RNA 바이러스는 변이가 잦아 2~3년 주기로 새 유행이 생길 수 있지만, 그건 바이러스의 특성일 뿐입니다. 반대로 B형 간염이나 소아마비 같은 DNA 바이러스는 변이가 드물어 백신 효과가 오래갑니다. 소아마비는 백신과 국제 접종운동 덕분에 거의 사라졌어요. 다만 최근 여러 나라에서 전쟁이 번지면서 백신 접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자 다시 확산세를 띠고 있습니다.”
―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국제 보건지원 예산을 줄인 거군요.
“요즘은 비행기로 전 세계를 다닐 수 있다 보니 위험이 더 커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일부 작은 마을에 소아마비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하면, 그 지역에서 감염된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병이 퍼질 수 있죠. 홍역도 비슷합니다. 미국 내에서 한동안 홍역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는데, 최근 다시 발생했어요. 특히 텍사스 같은 지역의 백신과 의료행위를 거부하는 집단 사이에 남아 있던 홍역이 외부로 번지면서 지금은 미국 5개주에서 수백 명이 걸린 상태예요. 사실상 비상상황인 겁니다.
한국도 안전지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개인 차원의 백신 반대가 있을 뿐, 국가정책 차원에서는 백신 접종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과는 상황이 다르죠.”
우리나라가 백신을 안정적으로 접종할 수 있게 된 데는 신승일 박사의 공로가 크다. 그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 앨버트아인스타인 의과대학 교수로 임용된 뒤, 1980년을 기점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걸음마 단계에 있던 한국 바이오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뜻을 품으면서였다.
한국 바이오의 태동
1970년대 말, 미국에서 제넨텍, 암젠 등 바이오 벤처가 두각을 나타내자 한국에서도 산업 육성 움직임이 일었다. 1983년 유전공학촉진법이 제정됐고, 국제상사·제일제당 등 국내 기업들은 미국 내 과학자들과 협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삼성그룹은 미국 현지에 ‘유진텍인터내셔널’을 세웠고, 신 박사는 1984년 이 회사 대표로 부임했다. 그는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을 미국에서 훈련시키며 차세대 인력을 길러 냈고, 유진텍은 제일제당과 함께 의약품 연구개발(R&D)에도 나섰다. 그 결과 세계에서 세 번째로 B형 간염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신 박사는 수십 달러에 판매되던 백신 가격을 3달러 수준으로 낮춰 보급했고, 한국은 국내 접종은 물론 개발도상국 지원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 유전공학 기술이 산업적으로 국내에 뿌리내렸고, 이는 훗날 국제백신연구소(IVI) 유치로 이어졌다. 한국 바이오 산업이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 당시 B형 간염 백신 개발에 집중한 이유가 있습니까?
“1980년대 한국의 가장 큰 보건 문제 중 하나가 B형 간염이었습니다. 국민의 8~10%가 보균자였고, 그로 인해 간경화, 간암 사망자가 많았죠. 무엇보다 심각한 건 신생아 감염이었어요. 산모가 보균자면 아이가 감염될 확률이 높았고, 결국 간염에서 간경화, 간암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미국에서 새로 개발된 백신은 있었지만 가격이 지나치게 비쌌습니다. 우리는 값싼 백신을 만들어 국내 보급은 물론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에도 나누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뉴욕 혈액센터에서 일생을 B형 간염 연구에 헌신한 앨프리드 프린스 박사의 도움으로 한국이 자체 기술로 세계 특허를 가진 B형 간염 백신을 생산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실제로 도스(dose·1회 접종량)당 50달러 하던 B형 간염 백신을 3달러 수준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됐죠. 이 백신을 기반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중반부터 신생아의 의무 접종이 시작됐고, 20년 뒤에는 청년층의 보균율이 1% 미만으로 떨어졌습니다.”
국제백신연구소 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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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승일 박사는 국제백신연구소(IVI)의 서울 유치에 큰 기여를 했다. 사진은 지난 1997년 국제백신연구소 이사회 제1차 회의.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 째가 신승일 박사. |
“유엔 산하에 WHO, 세계은행, 유니세프, 유네스코 등 여러 기구가 있었지만, 실제 추진력을 가진 곳은 UNDP였습니다. 당시 UNDP 대표 역시 국제백신연구소 설립 필요성에 공감했고, 저는 1992년 ‘상임수석보건전문위원’ 자격으로 유엔에서 근무하며 연구소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습니다. 후보지는 중국·일본·한국·태국·싱가포르·홍콩 등 8곳이었는데, 1차 심사 후 태국·중국·한국이 최종 후보로 남았습니다. 유엔은 캐나다 보건부 장관을 단장으로 미국·영국·인도·에티오피아 등에서 전문가 6명을 파견해 방콕·베이징·서울을 직접 실사했습니다. 백신 제조 경험과 정부의 지원 의지, 부지 제공, 재정 약속 등이 주요 기준이었고, 결국 한국이 최종 낙점됐습니다.”
― 유치전이 치열했겠는데요. 한국의 강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정부의 확실한 지원 의지와 안정적인 인프라, 학계의 적극성이 컸습니다. 서울대 총장과 교육부 장관을 지낸 조완규 교수를 중심으로 ‘국제백신연구소 한국유치위원회’가 꾸려졌고, 학계 전체가 힘을 모았죠. 당시 서울대 총장이던 김종운 교수가 ‘연구공원 부지를 내주겠다’고 나섰고, 주 유엔 대사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유엔 연설에서 한국 정부가 전폭 지원하겠다고 공식 선언했고요.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지면서 연구소가 서울대 연구공원 부지에 들어오게 된 겁니다.”
신 박사는 1995년 초대 국제백신연구소장을 맡았다. 초기 운영은 순탄치 않았다. IMF 직전의 재정난과 행정 혼선이 맞물렸기 때문이다. 주무 부처를 두고 과학기술처와 교육부 간 혼선이 있었고, 예산 지원을 두고도 정부 내 이견이 적지 않았다. 여기에 각국의 조약 비준 절차가 겹치면서 출범까지 시간이 지연됐다. 연구소는 결국 1997년이 돼서야 국제기구로 공식 출범했고 1999년 본부 건설에 착공할 수 있었다. 그는 “2000년대 들어 게이츠재단 등 글로벌 지원이 확대되면서 2003년이 돼서야 실험실까지 제대로 갖추게 됐다”면서 “이후 연구 인력 다국적화와 실험실 확충을 이뤘고, 현재는 세계적 백신 연구기관으로 자리 잡았다”고 했다.
셀트리온 창업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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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승일 박사(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국내 바이오 벤처의 신화인 셀트리온의 설립을 기획·총괄했다. 사진은 지난 2001년 10월 송도 셀트리온 공장 부지 현장 조사단의 모습. 왼쪽에서 두번째가 서정진 회장. |
― 최근 맥킨지 보고서는 중국이 5년 내 세계 3대 혁신 신약(新藥) 시장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전망하더군요.
“중국은 우리보다 과학의 역사가 훨씬 깊습니다. 19세기부터 자연과학 전통이 있었고 백신 생산 경험도 한국보다 많았습니다. 하지만 공산혁명과 문화혁명을 거치며 기반이 무너졌어요. 실사 당시인 1990년대 초엔 전통은 남아 있었지만 현대적 역량이 부족한 상태였죠. 한편 한국은 아직 바이오 산업이 본격화되진 않았었지만 제조업 기반과 공공시설이 국제 규격에 어느 정도 맞춰져 있었고요. 만일 지금 새롭게 대결한다면 한국이 밀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혁신 신약 시장의 성장 배경으로는 12곳이 넘는 바이오 혁신 허브가 꼽힌다. 우리나라에도 송도에 바이오 클러스터가 조성돼 있다. 2000년대 초 셀트리온을 시작으로 삼성·롯데·SK 등 대형 바이오 기업이 잇따라 둥지를 틀면서 송도는 대표적인 바이오 단지로 자리 잡았다.
국내 대표 바이오 기업 셀트리온의 탄생에도 신 박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90년대 말, 제넨텍의 자회사 백스젠은 에이즈 백신 개발을 추진하면서 생산 원가를 낮추기 위해 해외 연구·생산 시설을 모색하고 있었다. 당시 백스젠 수석자문위원이던 신 박사는 한국을 최적지로 추천했다. 마침 바이오 사업 진출을 구상하던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과 뜻이 맞아떨어졌다. 제넨텍으로부터 기술 이전과 협업을 이끌어 내고, 에이즈 백신 개발을 위한 한미 합작회사를 한국에 세우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회사가 바로 셀트리온이다.
― 서정진 회장과는 어떻게 연이 닿은 겁니까?
“국제백신연구소 일을 마친 뒤 미국으로 돌아가 국제 에이즈백신개발 추진위원회 과학자문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때 친하게 지내던 저명한 바이러스 학자인 도널드 프랜시스 박사가 ‘제넨텍과 함께 에이즈 백신을 개발하자’고 제안했어요. 저는 국제백신연구소 경험을 살려 ‘성공 후 생산과 보급’을 맡았는데, 제넨텍은 자체 생산에 소극적이더군요. 에이즈 환자의 대부분이 가난한 나라에 몰려 있어 수익성이 낮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개발은 미국에서 하더라도 제조는 아시아에서 저렴하게 하자는 제안을 제가 한 겁니다.
당시 싱가포르에서는 부총리까지 나서며 합작회사 유치에 적극적이었지만, 제 마음은 한국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삼성·현대·LG·대우·한화 등 대기업을 찾아갔지만 IMF 직후라 모두 여력이 없었죠. 5만 리터급 발효조(槽)가 필요했는데, 최소 2억~3억 달러가 드는 투자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겁니다. 결국 싱가포르로 가야 하나 고민하던 때, 자주 만나고 있던 배리 블룸버그 박사를 통해 우연히 서정진 회장을 소개받았습니다. 블룸버그 박사는 B형 간염 바이러스를 발견해 노벨상을 받은 분인데, 서 회장이 그에게 조언을 구하다가 저와 연결된 거였습니다. 제 얘기를 들은 서 회장이 ‘함께 해보자’며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바이오시밀러 강국
셀트리온은 애초에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에이즈 백신 생산을 목표로 설립됐으나 결국 상업화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실패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성공이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선진 바이오 의약품 제조 시스템과 노하우를 한국에 이식했기 때문이다.
“제가 그 일을 추진한 이유는 단순히 에이즈 백신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에 바이오 산업 기반을 심고 싶었던 겁니다. 백신도 결국 약품이고, 약품을 만들려면 철저한 품질 관리가 필요합니다. 말로는 ‘퀄리티 컨트롤’이지만 실제로는 복잡한 제조 시스템과 긴 훈련이 요구됩니다. 제넨텍은 20년간 그런 시스템을 다듬어 온 회사였고, 그 기술을 한국으로 들여오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한 일 중 가장 어려웠던 것도 제넨텍을 설득해 ‘한국으로 가자’고 이끈 일이었습니다.”
셀트리온은 이후 바이오시밀러로 방향을 틀어 세계 최초 항체 바이오시밀러를 개발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 미국, 유럽과 비교했을 때 한국이 차별화할 수 있는 바이오 분야가 있습니까?
“한국의 강점은 바이오시밀러(biosimilar·동등생물의약품. 특허가 만료된 생물의약품에 대한 복제약)입니다. 시작은 셀트리온이었죠. 단순해 보이지만 막대한 비용과 기술이 필요한 분야인데, 당시 서정진 회장의 아이디어가 결정적이었죠. 마침 브리스톨마이어스라는 미국 기업이 관절염 치료제를 개발했는데, 생산 시설이 부족해 셀트리온에 주문을 맡긴 겁니다. 세계적으로 그런 위탁생산이 가능한 곳은 세 군데뿐이었고, 셀트리온만 여력이 있었죠. 이 OEM 생산을 계기로 공장이 본격 가동됐고, 이어 바이오시밀러 개발에 도전했습니다. 특허가 끝나는 바이오 약품을 자체 개발해서 효과는 같지만 더 저렴한 새로운 의약품을 만드는 것인데, 어려운 문제가 있었지만 결국 세계 최초로 선두에 설 수 있었습니다. 시장 진입에 성공해 가능성을 보여 주자 삼성이 뒤따라 들어왔고, 삼성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훨씬 큰 공장을 세웠어요. 그 결과 지금은 셀트리온과 삼성이 함께 바이오시밀러 시장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 그 선두 자리를 지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부 정책이 중요합니다. 세금, 노사 문제 등에서 지원이 필요합니다. 규제만 늘릴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도와줘야죠.”
주목할 미래 기술
― 요즘 유전자 편집 등 여러 차세대 기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향후 어떤 기술이 바이오 시장의 게임 체인저가 될 거라 봅니까?
“앞으로는 개인 맞춤형 의료(personalized medicine)에 주목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사람마다 DNA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병이라도 진행과 반응이 제각각입니다. 그래서 치료 역시 개인 유전자에 맞춰야 합니다. 이 분야는 대규모 공장보다 기술 집약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죠.”
― 그 분야에서 주목할 회사가 있다면요?
“저의 분야가 아니라서 조심스러운데, 한 예로 제가 아는 회사 중에 로킷헬스케어(ROKIT Healthcare)라는 회사가 있어요. 셀트리온 출신이 창업했는데, 3D 바이오프린팅으로 조직 재생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흑색종 같은 피부암을 제거하면 피부 결손이 생기는데, 지금까지는 다른 부위 피부를 떼어 붙이는 수밖에 없었어요. 흉터가 크고 회복도 느리죠. 이 회사는 환자 본인의 줄기세포를 배양해 필요한 조직을 3D 프린팅으로 만들어 이식하는 방식을 연구합니다.
또 하나는 당뇨발 치료입니다. 당뇨가 심하면 발끝이 괴사하죠. 지금까지는 절단밖에 방법이 없었는데, 환자의 줄기세포를 배양해 괴사 부위에 이식하는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자기 세포이니 면역 거부반응이 없고, 절단을 피할 가능성도 커지죠.”
― 우리나라에서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유능한 젊은 연구자들이 많지만, 노벨상은 타기 전까지 아무도 모릅니다. 제 주변에도 수상자들이 많았는데, 상을 받기 전엔 누가 될지 예측할 수 없었어요.”
북한에 백신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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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0년 6월 북한 어린이 뇌염백신 접종사업 차 강원도 통천군 의약품관리소를 방문한 국제 전문가 참관단. 왼쪽에서 두 번째가 신승일 박사. |
“국제백신연구소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며 세계 어린이 백신 관련 문제로 국제기관과 연락을 자주 했는데, 2008년 중국을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 북한에 일본뇌염 환자가 증가하고 있으니 백신 보급을 도와달라는 요청이었죠.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 이후 거의 사라진 병입니다. 당시 북한의 연간 신생아 수가 40만 정도였고, 접종 대상은 1~5세 아동 약 200만 명이었어요.
몇 차례 회의 끝에 2009~10년 두 해 동안 각각 100만 명분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중국산 생(生)백신을 쓰되, 조건을 달았습니다. 국제 전문가 참관단을 두고 평양뿐 아니라 지방 지역까지 참관단의 접종 현장 접근을 허락하고, 백신은 반드시 냉장 하에 보관·운송하며, 접종 후 30분간 참관단이 아이들을 직접 관찰할 것 등이었죠. 드물지만 쇼크 반응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위해 태스크포스가 게이트재단 등 국제기관에서 확보한 지원금은 200만 명 접종에 필요한 백신과 주사기, 그리고 물자를 평양까지 운송할 운송비가 전부였다. 신 박사는 ‘북한어린이 백신후원회’를 결성해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국내 소아과 의사들과 어린이재단이 참여했다. 그러나 자금은 여전히 부족했고, 결국 미국 기독교 단체들의 지원을 받아 해결했다.
― 당시 성인까지 포함해 북한의 일본뇌염 감염자 수는 어느 정도로 파악됐습니까?
“접종을 위해 필요한 정보라 북한 측에 몇 차례 물었지만 국가기밀이라 알려 줄 수 없다는 답만 돌아왔습니다.”
― 백신은 평양이 아닌 곳까지 골고루 배분됐습니까?
“현지 확인을 위해 ‘인터내셔널 모니터링 그룹’을 조직했는데, 영국·미국·중국·태국 전문가, 그리고 게이츠재단 인사까지 6명이 참여했습니다. 다 같이 평양 국가의약품보급소를 방문한 뒤 평양의 보육원, 유치원 등 접종 현장을 먼저 돌아보고, 세 사람은 평양 북쪽으로, 저와 미국·영국 친구는 함께 강원도로 향했습니다.
먼저 원산은 강원도의 중심 도시라 백신 운반과 온도 유지가 잘되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방문한 통천군은 사정이 달랐어요. 백신은 도착해 있었지만 거긴 냉장고 하나 없는 시골이었어요. 다행히 하루이틀 정도는 상온에 있어도 무리가 없어서 접종은 진행할 수 있었지만, 2010년에 냉장 시설 하나 없다는 것이 새삼 놀랍더군요. 생활 수준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양에서 원산까지 가는 약 200km의 거리 동안 휴게소 하나 없고, 고속도로라고 해도 포장이 제대로 안 돼있었습니다. 도로 위에는 군용 지프차들이 다녔는데, 휘발유 아닌 목탄차도 보이더군요.”
“가치 있는 일은 남을 돕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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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7년 서울대학교 암곡학술상 제1회 시상식에서 성낙인 당시 서울대 총장(왼쪽)과 함께한 신승일 박사. |
“너무 눈앞만 보지 말라”
― 삶을 돌이켜보셨을 때 가장 잘한 일 한 가지를 꼽는다면요?
“셀트리온 창립 당시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때 다행히 돈이 좀 생겼습니다. 그걸로 장학금을 만든 게 제일 잘한 일이에요.
저는 운 좋게 대학 등록금을 낸 적이 없습니다. 특히 미국 브랜다이스대에서는 장학금에 등록금, 기숙사비, 식비, 용돈, 책값까지 포함됐어요. 음악회 티켓도 나왔죠. 1960년대였는데, 그 학교에서 서양사상사, 음악사, 독일 문학, 서양과학사 같은 교양 수업을 처음 접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게 ‘대학 교육이란 건 전공만이 아니라 교양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거였어요. 전공은 나중에도 배울 수 있지만, 교양은 대학 시절에 제대로 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 경험이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줬죠.
그래서 장학금을 기부할 때도 조건을 달았어요. ‘과학자도 인문학을 알아야 하고, 인문학자도 과학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융합하는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학자들에게 암곡학술상을 주고, 암곡학술상 특별강연의 내용을 책으로 내도록 지원하는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너무 눈앞만 보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당장 취직이나 돈 버는 데만 신경을 쓰는 것 아닌가 합니다. 인공지능(AI)과 같은 새로운 기술이 세상을 바꾸고 있고, 인류가 어디로 가는지, 어떤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해요. 역사, 문학, 철학, 예술 같은 걸 두루 공부해야 합니다. 시험을 위한 공부 말고요. 그래야 세상이 바뀌어도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 돈은 먹고살 만큼이면 충분해요. 오래 해도 질리지 않을 가치 있는 일은 남을 돕는 거예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