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은 지금껏 이어지는 기자로서 나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 신기록이나 금메달을 시시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운동을 할 수 없듯이 특종에 가슴이 뛰지 않는 이는 기자를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지금도 놓지 않고 있다.
⊙ 천마총 발굴 현장에서 한국인의 原型을 만나다
⊙ 尹必鏞 사건은 10·26과 12·12로 가는 길을 연 박정희 시대 최대의 사건
⊙ 어린이 유괴 살인을 즐긴 ‘후하하’ 범인
⊙ 세계적 특종을 노리면서 해저 석유 취재에 뛰어들었다가…
⊙ 천마총 발굴 현장에서 한국인의 原型을 만나다
⊙ 尹必鏞 사건은 10·26과 12·12로 가는 길을 연 박정희 시대 최대의 사건
⊙ 어린이 유괴 살인을 즐긴 ‘후하하’ 범인
⊙ 세계적 특종을 노리면서 해저 석유 취재에 뛰어들었다가…

- 부산 연쇄 어린이 유괴 살해 사건의 범인이 배준일군을 살해한 후 복부에 쓴 글.
“명문(名文) 쓸 생각을 버려라. 기사문은 짧고 쉽고 정확하게 쓰면 된다.”
“기자는 부산시장을 대하는 태도와 시청 수위를 대하는 태도가 같아야 한다.”
수습 기간이 여섯 달이었는데 이 부서 저 부서 돌아다니면서 기사를 썼다. 1960년대에 쌓아 올린 권투·야구 지식이 도움이 되었다. 1971년 3월 8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무하마드 알리-조 프레이저 헤비급 통합 챔피언 결정전은 ‘세기의 대결’로 불렸는데 내가 좋아하는 알리가 15회에 프레이저로부터 다운을 당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밥맛을 잃었다. 권투 붐을 타고 나는 신문에 ‘헤비급 챔피언 열전’을 연재했다.
수습을 끝내고 정식으로 배치된 곳은 문화부였다. 문화부는 조용한 부서로 알려져 있었지만 나는 시끄럽게 취재하고 다녔다. 젊은 층에 퍼지는 환각제 문제를 취재하다가 음악실에서 만난 고교생으로부터 대마초를 파는 노점상을 알아냈다. 마침 부산진역 앞 부산동부경찰서 옆 골목이었다. 내가 봉지에 담긴 대마초를 사는 뒷모습을 사진기자가 찍어 사회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최초의 특종(特種)이었다. 특종의 쾌감은 달콤했다. 이런 쾌감은 중독성이 있어 55년째인 지금도 특종을 꿈꾼다. 문화부 기자가 경찰 출입 기자가 써야 할 기사를 썼지만 ‘나와바리’(취재영역) 침범을 따지는 사람은 없고 격려만 해주었다.
‘특종’은 지금껏 이어지는 나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 신기록이나 금메달을 시시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운동을 할 수 없듯이 특종에 가슴이 뛰지 않는 이는 기자를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지금도 놓지 않고 있다. 나는 특종을 한 주제(主題)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데 마약 문제는 그 뒤 나의 전공이 되었다. 히로뽕 관련 글과 책을 많이 썼고 《코리언 커넥션》은 일본에서 번역되었는데 야쿠자들이 많이 사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80년대 후반 신성일씨가 감독과 주연을 하여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천마총 출토품이 준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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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가 특종 보도한 155호 천마총 출토품. |
신라 고분에선 글자가 나오지 않아 축조 연대와 피장자(被葬者)를 알 수 없다는 특징이 있었다. 원자력연구소가 155호 고분의 목관 파편을 가져가 탄소연대 측정을 했는데 내가 그 결과를 알아냈다. 서기 340년 전후(前後) 70년이었다. 즉 서기 270~410년 사이였다. 이는 나무의 나이이고, 실제로 조성된 연도는 약 100년 후로 추정되는데 묻힌 이는 지증왕(智證王)이란 주장이 강하다. 순장(殉葬)을 폐지하고 북방 초원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호칭인 마립간(麻立干)을 왕(王)으로 바꾸고 특히 국호를 신라(新羅)로 결정한 개혁 군주, 그의 품격에 어울리는 찬란한 부장품(副葬品)은 문화적 충격이었다.
1973년 여름 발굴단(단장 金正基)이 천마총 출토품을 기자들에게 공개했을 때 실내(室內)가 황금색으로 환했다. 금관, 금모(金帽), 금제관식(金製冠飾), 금귀걸이, 금 허리띠, 그리고 칼과 마구(馬具)와 서양식 유리잔들. 북방 기마(騎馬)민족의 야성(野性)이 거기에 있었다. 조선조적(朝鮮朝的) 문약성(文弱性)에 너무 익숙해 있었던 내가 한국인의 원형(原型)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금관총 금관의 모습이 달라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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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관총 금관(왼쪽)은 천마총 발굴 이후 모양을 달리하여 전시되고 있다(오른쪽). |
천마총 발굴을 계기로 그 유명한 금관총 금관(金冠)의 모습이 달라진 것을 아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일제(日帝) 때인 1921년 졸속으로 발굴된 금관총 금관은 금관, 금모, 새 날개 모양의 금제관식을 한 세트로 조립한 형태여서 호화롭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론 저걸 과연 쓸 수 있었을까 의문도 들었다. 금관총 발굴은 서둘러 하다 보니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면이 있었다.
천마총 발굴 때 금관, 금모, 금제관식은 따로 떨어진 채로 발견되었다. 나는 이를 근거로 하여 금관총 금관이 별개로 있어야 할 3종을 하나로 조립한 것은 오류라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요사이 AI로 검색을 했더니 나의 이 주장이 계기가 되어 금관총 금관을 천마총 금관과 일치시켰음을 알게 되었다.
‘석유 발견’이란 세계적 특종을 상상하면서
1970년대의 부산은 사건 사고가 많이 나는 곳이라 기자로서는 행운이었다. 4·19의 단초가 되었던 3·15 마산의거를 현장에서 취재한 기자들은 그 19년 뒤에 일어나는 부마사태도 취재하게 된다. 부산 교두보 시절부터 세계를 향하여, 다른 지방을 향하여 열려 있었던 부산은 박정희(朴正熙) 정부 등장 이후엔 수출 전진(前進)기지로 역동적이었다. 특히 신발공장이 많았다. 나도 “포항 석유는 경제성 없음”이란 글을 썼다가 해직된 이후 한 10개월간 세계 최대의 신발공장 국제상사 사상공장 기획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부산의 사회·경제적 격변은 1979년 10월 이곳 출신 김영삼(金泳三) 총재 제명 직후 터진 부마사태의 배경이 되고, 이게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된다. 나는 이 사태의 기록자를 자임하다가 신군부에 의하여 잘린 다음엔 서울로 직장을 옮긴다. 역사의 흐름과 인생 항로(航路)가 동행한 것이다.
1973년부터 나는 해저 석유 시추 취재에 매달렸다. 이게 문화부 기자의 영역이 되는지는 해석하기 나름인데 나는 과학 기사를 쓴다는 이유를 내세워 달려들었지만 내심 세계적인 특종이 꿈이었다. 부산에서 할 수 있는 최대 특종이 ‘석유 발견’ 아니겠는가? 마침 로열 더치 쉘이 동해 제6광구에서 시추에 들어갔고 그 보급기지가 부산 감만동에 있었다. 나는 이곳을 출입하는 유일한 기자가 된 것이다. 영어(英語)와 일어(日語)가 되니 해양 석유 개발 관련 책을 읽은 실력으로 쉘 기술자들과 대화가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분야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설치는 험한 업종으로서 종사자들을 러프넥(Roughneck)이라고 부른다.
해저 시추선에서 부산 기지로 전송하는 문서 중 핵심은 검층(檢層) 보고서였다. 전문용어로 가득했지만 해독이 가능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여기서 ‘oil show(油徵)’란 말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했으나 천연가스는 검출되는데 석유는 보이지 않아 세계적 특종은 신기루였다.
중금속 오염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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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8월 16일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제7회 한국기자상 취재 부문 수상자 조갑제 기자(맨 오른쪽). 사진 부문 수상자 최영호 기자(왼쪽에서 두 번째). |
나의 중금속 오염 문제 보도는 1974년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제7회 한국기자상 취재보도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기자들에게 주는 상이 많지 않을 때이고, 스물아홉 살의 4년 차 기자가 상을 받게 되니 알아주는 사람이 많아졌다. 서울로 상을 받으러 가는 날이 하필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문세광이 쏜 총탄으로 별세한 8월 15일 그날이었다.
기자협회는 그때 《기자협회보》를 내고 있었는데 편집실장이 나중에 한국 언론사 연구학자로 대성하는 정진석(鄭晉錫·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선생이었다. 이 작은 신문이 1974~75년에 걸쳐 터져 나온 언론 자유 수호 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나도 《국제신문》 기자협회 분회의 요원이 되어 등사판 사내 신문 제작에 참여, 언론 자유 운동에 가담했다.
이런 언론계의 민주화 운동은 신민당 김영삼 의원이 육영수 여사가 별세한 그달에 총재로 뽑힌 것과 연동되어 활발해졌다.
유신 선포에 “느닷없다”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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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돌연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사진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노재현 육군참모총장. 사진=조선DB |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성명에서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나의 중대한 결심을 밝힌다”면서 그해 7·4 성명 이후 전개된 남북대화에 따른 새로운 정세의 조성을 비상조치의 이유로 삼았다. 지금 읽어봐도 설득력이 없는데 당시는 공허하기만 했다. 그는 유신 선포의 진짜 이유를 그답지 않게 애매하게 설명했다.
“새로운 체제로의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 하는데 대통령으로서 나에게 부과된 역사적 사명에 충실하기 위하여 부득이 정상적 방법이 아닌 비상조치로써 우리 실정에 맞는 체제 개혁을 단행하여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마지막 호소는 예언적이었다.
“나 개인은 조국 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祭壇) 위에 이미 모든 것을 바친 지 오래입니다.”
그때 외국에 나가 있던 김대중(金大中)은 측근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자 귀국을 포기, 미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반(反)정부 운동을 하다가 친북(親北) 세력과 엮이게 되는데 김영삼은 일본을 거쳐 귀국한다. 귀국 하루 전날 밤 도쿄 호텔에서 그와 만났던 한 도쿄 특파원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삼은 밤새 폭음을 하면서 박정희를 저주하다가 아침에 공항으로 갔다고 한다. 이렇게 김대중과 김영삼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유신 체제는 ‘국력의 조직화’와 ‘능률의 극대화’를 내걸었다. 박정희는 세계 최고의 효율적 행정기구를 만들어 이병철(李秉喆)·정주영(鄭周永) 같은 야생마 같은 기업인을 부리면서 70년대를 질주하는데 그 줄기는 ‘중화학 공업 건설’이었다. 김종필(金鍾泌)은 정계를 은퇴한 뒤인 2005년 나와 인터뷰하면서 “살고 보니 정치는 허업(虛業)이고 기업이 실업(實業)이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돌아보니 박 대통령은 결국 중화학 공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유신 선포를 한 것이다”고 정리했다.
尹必鏞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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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필용 사건 재판 모습. 맨 오른쪽이 윤필용 수경사령관. 윤 사령관 옆이 손영길 준장, 두 사람 건너가 권익현 대령이고 뒷줄 오른쪽이 신재기 대령. |
언론은 독자적 취재 없이 판결문과 국방부 장관 담화문을 근거로 이들의 부정부패적 사생활과 군내 사조직 운영을 중점 부각했다. 판결문은 법률적 판단을 한 내용이 아니라 ‘치부와 엽색 행각에 치달음으로써 반(反)유신적 죄악을 자행했다’는 식의 인신공격적인 규탄문이었다. 《대한일보》 사장 김연준(金連俊)씨의 수재의연금 횡령 사건에 대한 수사를 윤 장군이 압력을 넣어 중단시켰다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그 직후 김씨는 횡령 혐의로 구속되고(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음) 《대한일보》는 폐간되었다.
이날 징역 15년에서 2년까지의 유죄(有罪) 선고를 받은 사람은 윤필용(징역 15년),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 준장(육사 11기, 징역 15년), 육군본부 진급인사실 보좌관 김성배(金成培) 준장, 육군범죄수사단장 지성한(池成漢) 대령, 26사단 연대장 권익현(權翊鉉) 대령(나중에 무죄 확정, 육사 11기, 뒤에 민정당 대표), 육본 진급인사실 신재기(辛再基) 대령(육사 13기, 뒤에 민자당 의원) 등이었다. 기소는 되지 않았으나 윤필용 계열로 알려진 장교 30여 명이 전역당했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냈던 안교덕(安敎德, 육사 11기), 정동철(鄭東喆, 육사 12기, 506보안대장), 배명국(裵命國, 육사 14기,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파견, 뒤에 민자당 의원), 박정기(朴正基, 육사 14기, 뒤에 한전 사장), 김상구(金相球, 육사 15기, 뒤에 민자당 의원), 정봉화(鄭奉和, 육사 18기, 수경사령관 비서실장)도 포함되었다. 이때 숙청되었던 군인 중 상당수가 제5공화국 때 중용(重用)된 점이 이 사건의 정치적 의미를 드러낸다.
‘박정희 시대 최대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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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10월호 《월간조선》은 윤필용 사건의 진상을 처음으로 보도했다. |
일반 독자처럼 이 사건을 기사로만 파악했던 내가 윤필용씨를 처음으로 만나 이 사건을 역사적 맥락에서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로부터 14년이 흐른 1987년 가을이었다(《월간조선》 10월호, 〈진상·윤필용 사건〉). 박정희 시대 비화를 추적하던 월간지 기자들 사이에서 ‘최후의 비화(秘話)’로 불렸던 사건이었다. 나는 이 사건의 열쇠를 쥔 3인, 즉 윤필용, 신범식 전 《서울신문》 사장, 강창성(姜昌成) 전 육군보안사령관을 모두 인터뷰하여 입체적 구성을 할 수 있었는데 역사의 흐름을 바꾼 점에서 박정희 시대 최대의 사건이란 느낌이 왔다.
이 사건으로 군부 내 육사 출신 장교들의 판도가 달라졌다. 정규 1기이기도 한 11기 장교 중 진급에서 늘 선두주자였던 이들은 전두환(全斗煥), 손영길, 김복동(金復東), 최성택(崔性澤)이었다. 이 사건으로 손영길 준장이 거세됨으로써 전두환이 10·26 사건의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길이 마련되었다. 그가 이끈 하나회는 형식상 해산되었으나 그 인맥은 그대로 남아 12·12 뒤엔 정권의 핵심에 자리 잡는다.
연쇄 작용
한편, 이 사건을 수사했던 강창성 육군보안사령관은 몇 달 뒤 관구 사령관이란 한직으로 가게 된다. 1973년 8월 어느 날 박 대통령이 충남도청을 방문하기 위하여 대전에 왔다. 물론 강 소장도 충남의 기관장 중 한 사람으로서 대통령을 환영 나갔다. 그날 밤 집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이었다. “각하가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묵고 있는 호텔로 갔더니 그는 정장을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박 실장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대통령은 강 장군을 곁으로 부르더니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었다.
“그자가 김대중이를 데려오고 있어. 어떻게 하면 좋지? 어제 그자를 불러 혼을 냈어.”
그때의 감으로는 박 대통령이 지시하지도 않은 일을 이후락 정보부장이 한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한다. 강 장군은 이 부장을 잘라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이후락 부장이 윤필용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될 뻔했다가 신임을 회복하기 위하여(그리고 김대중의 해외 활동에 대한 대통령의 신경질적 반응에 기인한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지령했다는 게 정설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1973년 12월엔 이후락 부장마저 날아갔고, 납치 사건을 KCIA(중앙정보부)가 저질렀다고 하여 일본에서 반한(反韓) 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민단(民團) 청년 문세광이 북한 공작에 포섭된다. 이듬해 8월 15일 문세광의 저격에 의한 육영수 여사의 죽음은 인간 박정희의 내면에 큰 영향을 주었고, 그의 최후를 앞당긴 면이 있다. 육영수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박종규 경호실장마저 물러나고 차지철(車智撤)이 등장한다. 윤필용 사건 이후 1년여 사이에 이후락·박종규·윤필용·강창성 등 네 핵심 측근이 사라진 대신 김재규(金載圭)와 차지철, 그리고 전두환이 권력 핵심부에 진입하는 길이 트여 한국 현대사의 30년을 결정하는 10·26 저녁과 12·12 밤중의 총성, 그 무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10·26과 12·12로 가는 길
1987년 이틀에 걸쳐 6시간 인터뷰를 한 윤필용씨는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증언자였다. 특히 박정희와 자신을 객관화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의 해석은 이러했다. 박 대통령이 자신을 친 것은 역적모의를 했다고 해서가 아니고 김일성을 만나고 와서 인기가 높아지던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이었다.
“저는 박 대통령이 사람을 쓸 때 그 사람됨을 훤히 알고 일정 기간 쓰신 다음엔 버리신다는 것을 잘 알고 또 각오도 하고 있었습니다. 박정희란 보호막이 무너진다면 제일 먼저 희생되는 것은 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대통령은 실수 없는 분입니다. 내가 모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실 분이 아니에요. 김종필은 탄압해서 다스렸고, 이후락은 그저 잔재주 피우는 것을 받아주면서 다루었죠. 이 부장이 김일성 만나고 와서 우쭐대는 것 같으니까 모델케이스로 나를 치면서 ‘너희도 똑바로 해’라는 경고를 보낸 것이지요. 내가 잡혀 들어간 뒤 김형욱(金炯旭) 전 정보부장이 도망가고, 이후락도 부장에서 해임된 뒤 장기간 외국으로 피해 있다가 보장을 받고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당한 뒤로는 측근들 사이에 누구와 누가 친하다는 말이 없어졌어요. 친JP니 반JP니 하는 말도 사라졌어요.”
박 대통령은 친자식처럼 아끼던 윤필용을 희생양으로 삼아 권력 핵심부를 정리정돈했다는 이야기다. 박 대통령은 1971년 10월의 항명(抗命) 파동 때 여당 내의 독자 세력(4인방)을 숙청한 데 이어 자신의 권력 측근 안에서도 독자 세력을 이룰 만한 소지를 없애버렸다는 이야기다. 친위 쿠데타 성격의 유신 선포는, 국력의 조직화와 능률의 극대화에 방해물이 될 만한 여권 내 정치 세력을 정리해 버린 셈이다. 일견 대통령이 국정에 전념할 수 있는 정지(整地) 작업을 완료한 듯했으나 여기에 또 다른 함정이 생기고 있었다.
변사 사건
1975년 나는 문화부에서 사회부로 옮겨 영도경찰서와 환경 분야를 맡게 되었다. 그해 여름 엽기적 사건이 터졌다. 1975년 8월 21일은 목요일이었다. 더위는 마지막 고비를 넘고 있었다.
부산시 중구 중앙동 중부경찰서, 동광동 언덕 밑에 보이는 우중충한 시멘트 건물. 그 안에서 기자들은 경찰관들보다 두 시간 먼저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다. 2층 상황실, 1층의 경범자 보호실엔 별 기삿거리가 없었다. 전언(電言) 통신문을 뒤져도 기사가 안 되는 ‘물피(物被)’ 사고 따위만 눈에 띄었다. 1층 형사 당직실엔 뭔가 있긴 했다. 변사(變死) 보고서, 걸인풍의 열 살가량 되는 여자아이 시신(屍身)이 21일 오전 6시 용두산공원 남쪽 계단 숲속에서 발견되었는데 맨발이었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으나 외상(外傷)이 없었다고 적혀 있었다. 출입 기자들은 수첩에 이것을 옮겨 적었다. 아무도 흥분하지 않았다. 당직 형사가 기자들 앞에 이런 보고서를 내놓는 것 자체가 ‘별것 아닌 사안이다’는 것을 공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액(多額) 절도 사건이나 자그마한 강도 사건만 되어도 보고서를 감추기 바쁜 그들이 아닌가.
그래서 사회부장에게 ‘우리 서(署)엔 별일이 없었습니다’고 했다가 ‘뭐? 조용해? 택강(택시강도)이 있어! 택강이, 그것도 연쇄로’라는 식으로 창피를 당하기 일쑤인 경찰 기자들이었다. 경찰은 범죄 사건이 나면 다른 경찰서로 전통(電通)을 때려 범인 수배를 내린다. 사건 발생지인 관할 경찰서 형사들은 그 사건을 기자들에게 숨기지만 수배령을 받은 다른 경찰서 형사들이야 자기 경찰서의 일처럼 보안에 성의를 보일 리가 없다.
그러니 인접 경찰서를 출입하는 동료 기자가 사건을 먼저 알고 사회부 데스크에 보고해 놓으면 멋도 모르고 ‘간밤에 조용했다’고 보고해 오는 해당 기자는 물을 먹게 된다. ‘사인(死因)이 애매한데?’ 어느 기자가 메모를 하면서 말했다. ‘식중독이겠지, 이 더위에…’ 형사가 받았다. ‘아무리 거지 아이라도 맨발이라…, 요새 신발 못 사 신는 사람도 있나?’ 《국제신문》 박몽계(朴夢桂) 기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여섯 명의 출입 기자들은 현장으로 갔다. 부산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용두산공원엔 비둘기들만 한가롭게 날고 있었다. 시신은 당감동 부검실로 보내지고 없었다. 기자들은 공원 초소로 갔다. 형사계장, 주임, 그리고 형사 몇 명이 있었다. ‘단순 변사 사건에 형사계장이 현장에 와?’ 기자 생활 6년째의 박몽계 기자는 속으로 새겼다. 타살(他殺) 혐의가 없는 변사 현장에는 형사주임과 그 지역반 형사만 나가는 게 통례였다. 형사계장이 아침에 조금 늦게 나온다든지, 형사 출동차가 안 보인다든지, 며칠 동안 눈에 안 띄는 형사가 있다든지, 이런 작디작은 기미에서 심상치 않은 사건의 태동을 눈치채는 데 이력이 난 박 기자였다.
“이런 것가지고 뭣하러 여기까지 옵니까?”
형사들은 농담으로 기자들을 맞았다. 형사계장은 ‘타살 혐의는 없다’고 했다. 기자들이 꼬치꼬치 따지고 드니 ‘내 목을 내놓고 맹세한다’고 했다. 시신이 부검실로 가고 없으니 달리 더 알아볼 방법도 없었다. 기자들은 형사들을 믿기로 하고 광복동 쪽 계단으로 다시 우르르 내려갔다. 《동아일보》의 박문두 기자는 혼자 뒤에 처졌다가 평소 친밀한 형사계장에게서 다짐을 받았다. 계장은 ‘나를 믿고 안심하고 내려가라’며 웃었다.
박몽계 기자는 내려와서도 ‘맨발’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는 적당히 구실을 만들어 동료 기자들을 따돌리고 혼자서 다시 용두산공원으로 올라갔다. 이번엔 공원의 사진사, 상인, 산책객들을 상대로 탐문(探問) 취재를 펼치기 시작했다.
“배 위에 사인펜으로 글이 쓰여 있던데요.”
“손발이 끈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셔츠를 찢어 만든 끈 같았습니다.”
박 기자는 한 시간쯤의 취재로 결론을 내렸다. 벌써 가판(街版)이 윤전기에서 쏟아지고 있을 정오 무렵. 그는 전화로 기사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철호 사회부장은 ‘자신 있느냐?’고 몇 번이나 다그쳤다. 박 기자는 완강하게 특종임을 강조했다.
“좋다, 밀고 나간다.”
경찰, 단순 변사라고 주장
유명한 사건기자 출신인 이 부장은 결단을 내렸다. 《국제신문》 배달판에서 ‘소녀 살해 유기’ 기사는 사회면 옆구리에 커트 제목으로 박혔다. 상대지 《부산일보》 사회면엔 ‘걸인풍의 여아가 외상 없는 변사체로 발견됐는데 식중독으로 죽은 것 같다’는 기사가 1단에 실렸다. 《부산일보》의 그 기자는 중부경찰서를 체크한 뒤 용두산으로 가지 않고 영도 고지대 불량 주택 철거 현장에 취재를 나가 있었다. 오후 3시 이철호 부장에게 이정수 시경 수사과장이 전화를 걸었다. 이 부장은 경찰 출입 기자 시절부터 말단 형사였던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이 과장은 ‘우리 사이에 뭘 숨기겠느냐’면서 ‘그것은 단순 변사다. 부검하면 곧 알게 되겠지만 뺑소니 운전사가 유기(遺棄)한 것 같다’고 잘라 말했다.
이 부장은 ‘시신을 직접 보았느냐?’고 물었다.
“보고만 받았다. 그러나 중부서 간부들이 장난할 사람들이 아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시신을 못 봤다. 그러나 우리 기자를 믿겠다. 우리 서로 부하들을 한번 믿어보자.”
그렇게 전화를 끊었지만 이 부장은 불안했다. 얼마 뒤 유흥수(柳興洙, 치안본부장·국회의원·주일대사 역임) 부산 시경국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유 국장은 이 부장의 경남고교 후배다. 얘기는 앞서와 같았다. 후배와 친구의 항의 전화는 이 부장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뒤늦게 《국제신문》 기사를 본 중부서 출입 기자들은 이날 오후 경찰서로 모여들었다.
기자들은 서장과 수사과장을 몰아세웠다. 경찰은 살해 유기설을 일축, 《국제신문》 기사를 오보(誤報)로 몰아세웠다.
이날 오후 2시쯤 영도구 남항동 1가 210번지에 사는 김석경씨(당시 29세)가 변사 사건을 전하는 라디오 뉴스를 듣고 용두산공원 경비 초소에 나타났다.
“어제 저녁 8시쯤 내 딸 현정이가 저녁도 안 먹고 집 바깥에서 놀다가 행방불명입니다. 그 죽은 아이가 혹시….”
경찰은 김씨를 당감동 화장장 부검실로 데리고 갔다. 부검실에 안치된 아이를 보자 김씨는 ‘툭~’ 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들통난 경찰의 은폐 공작
중부서는 이날 아침 이 사건을 단순 변사로 상부에 보고한 뒤 오전 11시에 부산 시경 관내 각 경찰서로 변사자의 신원 수배 전통을 보냈었다. 신원이 밝혀지자 중부서는 갑자기 ‘단순 변사’를 ‘교통사고 유기’로 바꾸고 수사본부를 설치했다.
변사자의 신원이 밝혀지자 기자들은 김석경씨 집으로 달려갔다. 《국제신문》 사회부는 이날 저녁 반신반의의 긴장된 분위기에 휩싸였다. 경찰이 계속 ‘살해 유기’를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검은 법의(法醫) 정병호씨의 집도로 이루어졌다. 사인(死因)이 밝혀졌다. 직접 사인은 ‘목눌림’이었다. 교살(絞殺)당한 것이다. 오른쪽 귀 뒤에는 둔기로 심하게 맞은 상처도 있었다. 박 기자의 특종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또한 중부서 형사 간부들의 몰락을 뜻했다. 중부서의 수사과장, 형사계장, 형사주임 등이 이 사건을 은폐, 날조하려고 꾀했음이 곧 명백해졌다. 기자들에게 사건 발생 사실을 숨기고 뒤에서 내밀히 수사를 하는 그런 행동과는 판이했다. 그들은 시경 수사과장과 시경국장에게도 허위 보고를 한 것이었다. 둔기로 맞은 외상 흔적, 배 위에 쓰인 글, 목의 상처… 삼척동자가 보아도 타살이었다. 그들은 명백한 타살을 단순 변사로 바꾸기 위해 ‘외상과 글’을 보고서에서 생략해 버렸던 것이었다.
현정양(8세)의 배 위에 범인이 쓴 글은 ‘범천동 이××이 대신공원에서 죽었다’였다. 삐뚤빼뚤 못 쓴 글씨였다. 기자들은 이 글을 해석하는 데 곤욕을 치렀다. 이××은 누구인가? 범인이 죽인 아이는 김현정이다. ××과 ‘현정’의 발음은 서로 비슷하다. 범인은 그러면 김을 이로 착각한 모양이다. ‘대신공원에서 죽었다’는 건 현정이를 그곳에서 ‘죽이고’ 그 시신을 용두산공원으로 몰래 갖고 와 버렸다는 뜻이라고 그들은 해석했다. 왜 이런 낙서를 했을까? 필적을 남기면 증거를 남기는 건데? ‘엉뚱한 녀석이다’라고만 기자들은 결론을 내렸다.
두 번째 희생… ‘후하하 죽였다’
사건 발생 나흘 뒤인 8월 25일, 월요일이었다. 충무동 로터리에서 송도(松島) 아랫길을 따라 송도해수욕장으로 뻗은 왕복 4차선 차도(車道)의 왼쪽 해안. 그곳 매립지엔 늘 청과물 상자, 생선 상자들이 어지럽게 쌓이고 흩어져 있었다. 아침 6시 수산센터 남쪽 매립지의 상자 야적장. 그곳에서 부산시 동구 좌천동 551번지 배석재(당시 38세)씨의 막내아들 준일(5세)군이 시신으로 발견됐다. 준일군은 엎드린 채 죽어 있었다. 손발 또한 묶여 있었다. 끈은 이 아이가 입고 있던 메리야스를 찢은 것. 입엔 신문지 뭉치가 쑤셔 박혀 있었다. 재갈 물림. 오른쪽 이마에 둔기로 맞은 듯한 상처 두 곳, 목은 노끈으로 세 바퀴 감겨 있었다. 배에는 또 낙서, ‘후하하 죽였다’… 파란 볼펜으로 쓰여 있었다. 경찰은 필적과 범행 수법으로 미루어 현정양을 죽인 그 범인의 짓으로 결론지었다. 닷새 사이에 두 어린이가 당한 것이었다.
후하하, 후하하, 후하하… 어린이의 보드라운 살갗을 빌려 장난기까지 서린 낙서를 한 범인은 도대체 어떤 인간일까? 아무리 사소한 범행에도 동기가 있는 법이다. 하물며 사람을 죽이는 데서…. 그것도 두 목숨이나….
나는 남구 대연동의 정신과 전문의 김태홍씨를 찾아가 취재를 했다. 진료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파출소장이 들어왔다. 김 원장은 안면이 있는 듯 반갑게 맞았다.
“최근에 이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달아난 환자가 없습니까?”
“없는데요. 그 사건 때문이시군요.”
“혹시 진료하신 환자 가운데 코 옆에 점이 있던 환자는….”
“그런 것까지 눈여겨볼 수 있습니까?”
나의 촉각이 이때 곤두섰다.
“범인이 점박이인지 어떻게 압니까?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
파출소장은 나를 힐끗 내려다보면서 “살아온 아이가 있단 말…”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조심조심 물었다.
“실례지만 뭐 하시는 분이죠?”
“아, 저의 고등학교 후배올시다.”
김 원장이 눈치 빠르게 받아넘겼다. 파출소장은 무엇을 더 말하려는 듯 머뭇머뭇하다가 나가버렸다. 나는 이철호 부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생존자나 범인 목격자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전했다.
배 위에 쓴 낙서의 수수께끼가 풀리다
이날 저녁 《국제신문》의 시경 출입 기자가 비슷한 정보를 물고 왔다. 시경 수사 간부로부터 은밀한 귀띔을 받았다는 것이다. 범천동에 사는 한 소녀가 끌려가 목졸림을 당한 뒤 어떤 경로로 살아 돌아왔으나 치료를 받다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범인의 인상은 이 소녀가 병상에서 남긴 증언에 따른 것이라 했다. 그러나 이 소녀의 주소, 이름 등 더 상세한 정보는 주지 않더란 것이었다.
“그 아이가 바로 이××양이구나.”
사회부 기자들 입에서 거의 동시에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범천동 이××이 대신공원에서 죽었다.”
현정양의 배 위에 쓰인 이 낙서의 미스터리가 풀린 것이었다. 범인은 김현정양을 이××양으로 잘못 쓴 것이 아니었다. 그 메시지는 진짜였음을 기자들은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범천동 이××양의 실재(實在)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경찰이 흘린 정보를 액면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이양의 존재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기사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경 출입 기자 김영민씨가 취재 지시를 하기 시작했다.
“먼저 범천동과 그 주변 동, 가야, 범일, 좌천동을 상대로 조사합시다. 구청에 가서 사망 신고서를 전부 챙기고 동사무소에 가선 매장 신고서 대장을 체크합시다. 그리고 그 부근 국민학교도 뒤져야 합니다. 분담을 합시다. 오늘 밤 뛰고 내일 새벽 여섯 시에 저한테 결과 보고하세요.”
“죽긴 누가 죽어요. 지금 부모 품에 돌아가 있는데…”
밤새워 뛴 소득은 하나도 없었다. 경찰과 검사는 딱 잡아뗐다. 구청, 동사무소, 화장장, 국민학교에서도 이××은 확인되지 않았다. 네 군데의 동사무소를 돌면서 숙직 직원들을 깨워 놓고 빈손으로 내가 신문사에 돌아온 시각은 새벽 다섯 시. 편집국 구석구석에 부원들이 뻗어 있었다. 소파 위, 의자를 여러 개 모아 놓은 간이침대, 책상 위,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그들은 패잔병들처럼 누워 있었다. 경찰 기자들의 확인 작업은 실패로 끝났지만 검찰 출입 김병호 기자가 중대한 진전을 기록했다. 그는 이 사건 담당 검사를 찾아갔다.
“이양도 죽었다면서요?”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넘겨 치기를 한 김 기자에게 검사는 중요한 확인을 해준 셈이었다. 이양이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 죽었다는 가정 아래서 밤새 동사무소와 화장장을 돌아다녔으니 일의 진척이 있을 리 없었다. 《국제신문》 사회부는 이양의 소재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불명확한 상황에서라도 이 특종감을 기사화하기로 결정했다. 확실하게 다듬는다고 시간을 끌다가 낙종(落種)해 버리는 수가 있기에 ‘낙종보다는 오보가 낫다’는 생각이었다.
사회부는 정보의 파편들을 끼워 맞추어 기사를 만들었다. ‘지난 7일 집 근처에서 유괴되었던 이××양이 대신공원으로 끌려가 목이 졸려 가사 상태에 빠졌다가 등산객에게 발견, 구조되어 살아났다’고 이 기사는 전했다. ‘대신공원서도 살해 미수 있었다’… 이것은 사회면의 두 번째 큰 기사로 실렸다. 이양이 유괴된 날짜는 뒤에 18일로 밝혀졌다. 이것만 빼면 이양을 만나지 않고, 경찰의 협조도 없이 쓴 이 추리 기사의 내용은 거의 정확했다. 사회부는 현정양 살해 사건에 있어 두 번째의 큰 특종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양의 소재는 밝혀지지 않았다. 경찰은 기사가 난 뒤에도 주소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열여섯 번째 병원
나는 영도경찰서와 함께 보사(保社) 분야를 맡고 있었다. 나는 한 가지 추리를 했다. 이양이 살아 있다면 일단 치료는 받았을 것이다. 그 병원을 찾자. 나는 전화번호부를 꺼내 놓고 범천동 주변의 병·의원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번번이 허탕이었다. 병·의원 앞에 표를 해가며 전화를 걸었는데 몇 군데 남지 않았다. 나는 밑천이 바닥나고 있는 노름꾼처럼 불안해졌다. 열여섯 번째 병원.
내 소개를 하고, “선생님께서 며칠 전 이××양을 치료하셨다죠? 수사본부에서 들었습니다만”이라고 넘겨짚었다.
“그런데요?”라고 의사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범인을 잡는 데 꼭 필요합니다. 범(汎)시민적인 협조로만 잡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좀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처음 치료하실 때의 상태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공손히, 그러나 위엄을 갖춰 말했다. 의사는 진료 차트를 가져오겠다면서 잠시 통화를 끊었다.
“지난 18일에 입원했다가 다음 날 퇴원했군요.”
의사는 또박또박 대답을 했다. 환자 상태, 인적 사항, 환자가 말한 유괴 상황 등 나는 의사가 갖고 있는 모든 자료와 기억들을 빼내려 했다. 이양을 확인하기까지의 죽을 고생에 견주면 취재는 너무나 수월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도 기자를 이처럼 순수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 부장도 침을 삼키며 나의 통화를 지켜봤다. 내가 갈겨쓴 메모를 훑기도 하고 메모 용지가 떨어지면 당장에 가져다주었다. 통화가 끝난 나에게 이철호 부장은 말했다. “취재 교범이다. 사회부 기자의 교과서에 한 대목 넣어야겠다.”
두 아이를 죽이고 첫 번째 아이도 유괴하여 목 졸라 공원 숲속에 버려놓은 채 가버렸는데 이 아이가 살아서 발견된 것이었다.
“대교파출소지요? 수사 잘해 보이소”
나는 영도경찰서의 수사본부가 설치된 대교파출소를 맡았다. 피살된 현정양의 집이 이 파출소 관내에 있었다. 어느 날 나는 파출소 순경으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현정양의 시신이 발견된 이틀 뒤인 8월 23일 밤 11시 파출소로 전화가 걸려 왔더란 것이다. 당직 방범대원이 전화를 받았다.
- 괴남자 : 용두산공원 현정양 피살 사건을 아는가?
- 방범대원 : 안다.
- 괴남자 : 내가 대양공고와 대양중학교 사이에서 죽였다.
- 방범대원 : 지금 전화 거는 곳이 어딘가?
- 괴남자 : 7698이다. (전화 끊음)
20분쯤 뒤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 괴남자 : 대교파출소지요? 수사 잘해 보이소.
- 방범대원 : 그곳이 어디요?
- 괴남자 : 7698이다. 복창해 보시오.
- 방범대원 : 7698….
- 괴남자 : (전화 끊음)
경찰은 국(局) 번호를 영도 지역으로 추리, 그 전화번호를 가진 여관을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대양공고 주변에서도 실마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은 장난전화로 단정, 잊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등 뒤에 찬바람이 도는 전율을 느꼈다. 그 번호는 바로 이양의 집 전화번호가 아닌가?
‘후하하 사건’으로 기억된 이 연쇄 유괴 살해는 영구미제 사건이 되었다. 범인을 잡아도 공소시효가 끝나 처벌할 수가 없다. 자신의 범행을 자랑하고 싶어 했던 이 범인이 살아 있다면 아마도 내 나이와 비슷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