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연료 국산화와 한국 표준 원자로,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 개발 이끈 한국 원자력의 살아 있는 역사
⊙ 핵연료 연구 부품도 청계천 공구상가에서 조달… “청계천에 조국 근대화 기념비 세워야”
⊙ “‘엽전이 무슨 표준 원자로냐’… 반대 이기고 국산화 성공”
⊙ “한국 원자력이 세계적인 수준에 오른 것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 집중적인 R&D 투자 덕분”
⊙ “문재인, 원자력 기술자들 앞에서 탈원전 선언… 가슴에 비수를 꽂아”
⊙ 퇴임 후 어린이 도서관 만들어 출근… 요즘도 하루에 책 1권씩 읽어
張仁順
1940년생. 고려대 화학과 졸업(1964), 同 대학원 석사, 캐나다 웨스턴 온타리오대 박사, 미국 아이오와대 화학과 박사, 해외 한국인과학자 유치 프로젝트로 귀국(1979) /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핵연료주식회사 핵연료 생산본부장, IAEA 원자력에너지자문위원, 원자력국제협력재단 이사장 역임. 現 세종시 전의마을도서관 관장 / 《상상력은 우주를 품고도 남는다》 《여든의 서재》 출간
⊙ 핵연료 연구 부품도 청계천 공구상가에서 조달… “청계천에 조국 근대화 기념비 세워야”
⊙ “‘엽전이 무슨 표준 원자로냐’… 반대 이기고 국산화 성공”
⊙ “한국 원자력이 세계적인 수준에 오른 것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 집중적인 R&D 투자 덕분”
⊙ “문재인, 원자력 기술자들 앞에서 탈원전 선언… 가슴에 비수를 꽂아”
⊙ 퇴임 후 어린이 도서관 만들어 출근… 요즘도 하루에 책 1권씩 읽어
張仁順
1940년생. 고려대 화학과 졸업(1964), 同 대학원 석사, 캐나다 웨스턴 온타리오대 박사, 미국 아이오와대 화학과 박사, 해외 한국인과학자 유치 프로젝트로 귀국(1979) /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핵연료주식회사 핵연료 생산본부장, IAEA 원자력에너지자문위원, 원자력국제협력재단 이사장 역임. 現 세종시 전의마을도서관 관장 / 《상상력은 우주를 품고도 남는다》 《여든의 서재》 출간
지난 8월 7일 세종시 전의면으로 장인순 전 소장을 만나러 갔다. 그는 한국 원자력의 살아 있는 역사다. 1979년부터 27년간 원자력연구소에서 일하며 핵연료 국산화를 성공시키고, 한국 표준형 원전 개발을 이뤄냈다.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지내면서 해수담수화 일체형 원자로(SMART), 양성자가속기 사업 등 굵직한 원자력 대형 기술 개발을 지휘하며 완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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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의마을도서관 풍경. 책상도 장 전 소장이 직접 디자인했다. |
박정희 정부 요청으로 귀국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고려대 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1969년 캐나다 웨스턴 온타리오대로 유학을 떠났다. 1978년 아이오와대학에서 연구 중인 그에게 고국에서 요청이 왔다. 서울에서 세미나를 해달라는 거였다. 재미과학자 100명이 그해 여름 한국을 찾았다. 그는 불소화학을 전공했다. 핵무기 제조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분야다. 세미나에서 발표를 마치고 나왔다. 그러자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귀국할 수 있겠나. 당신이 필요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프랑스에서 핵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기로 계약까지 했다가 파기된 적이 있을 정도로 핵 무장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장 전 소장은 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1979년 3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그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됐다.
― 박 대통령이 그리 되고 핵을 연구하던 그룹은 어떻게 됐나요.
“50여 명이었는데 다 흩어졌어요. 일부만 원자력연구소에 남았습니다. 원자력연구소라는 이름도 없어졌습니다. 국내외의 압력 때문이었지요. 에너지연구소로 ‘창씨개명’을 해야 했어요. 전두환 대통령 취임 후 한필순 소장이 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원자력발전소를 만들기로 했지요. 원전 건설은 두 가지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설계와 핵연료지요. 저는 핵연료 쪽 책임자를 맡았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핵연료 국산화였어요.”
이후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1989년 연구소는 정부에 요청해 ‘원자력연구소’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 당시 연구 환경은 어땠나요.
“새로 지은 건물이었는데, 안에 시설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저와 함께 일할 연구원들이 6명 배정됐는데, 6명이 쓸 1년 연구비가 980만원이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하더라고. 이들과 이틀 동안 토론을 했어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그 젊은이들 눈빛에서 희망을 봤습니다. ‘이 친구들과 함께라면 할 수 있겠다.’”
― 환경은 열악했지만 의욕이 있었군요.
“제가 부탁했어요. 없는 걸 탓하지 말자. 필요한 것은 우리가 몸으로 때우자. 사과 궤짝 위에 비닐을 깔고 실험을 했어요. 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주 80시간씩 일했으니까요. 매일 아침 7시 반에 출근해 밤 11시에 퇴근했어요. 주말에도 일했습니다. 장비가 있었으면 일이 훨씬 쉬웠을 겁니다. 장비가 없으니 몸으로 때워야 하는 겁니다. 한번은 어떤 연구를 하며 40일간 쉬지 않고 데이터를 관찰해야 하는 일이 있었어요.”
― 40일간 계속 옆에서 누가 지켜봐야 하는 거네요.
“완전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 40일간 하는 걸 세 번 하기로 했어요. 처음엔 직원들이 12시간씩 교대근무를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24시간씩 교대근무를 했습니다. 원래는 크리스마스 전에 끝나도록 스케줄을 짰는데 글쎄 세 번째 시운전 중 고장이 난 겁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했어요. 직원 부인들한테 제가 전화를 걸었지요. ‘크리스마스를 반납해 주십시오.’”
부친 제사도 안 가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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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12월 14일 미국 코네티컷주 소도시 윈저로 떠나는 원자력연구소 연구진. |
“이제 와서 아내에게 미안한 게 아내가 혼자 밥 먹는 시간이 너무 길었어요. 저는 30년간 휴가를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직원 한 명이 내일 조카 결혼식이 있으니 휴가를 달라는 겁니다. 안 된다고 했지요. ‘부인이 가면 되지 당신까지 갈 필요가 있겠나’ 그랬더니 그 말이 돌고 돌아 제 아내 귀에까지 들어간 겁니다. ‘조카 결혼식에도 못 가게 하는 나쁜 사람’이라고요.”
― 어떻게 됐나요.
“아내가 왜 그렇게 욕을 얻어먹고 사냐고 화를 내는 겁니다. 제가 그랬어요. ‘내가 10년 만에 귀국했더니 여수 사는 형님이 전화를 걸어오셨다. 아버지 제사니까 내려오라고. 근데 내가 바빠서 못 간다고 했다. 내가 아버지 제사 가면서 직원은 조카 결혼식 못 가게 했으면 내가 나쁜 사람이다. 10년 만에 와서 어떻게 아버지 제사도 안 오냐고 형님이 화를 냈다. 그래서 형님에게 그랬다. 형님, 제가 군대에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 형님도 그때는 이해를 못 했군요.
“1986년에 제가 목련장 훈장을 받았어요. 훈장 받는 걸 보고 그때야 형님이 7년 만에 오해를 풀었어요. ‘자네가 이런 거 하느라 그랬구먼….’ 연구소 전체가 그랬습니다. 설계팀이 기술을 배우러 미국에 가면서 다짐을 했어요. ‘실패하면 돌아오지 말고 태평양에 빠져 죽자.’”
― 그렇게 기술 자립에 성공한 거군요.
“연구비가 부족하니 청계천 공구상가를 헤매면서 싸구려 중고 부품을 사 왔어요. 정부에 정식으로 주문하면 부품 하나 오는 데 3개월이 걸렸어요. 가격도 10배가 비쌌고요. 당시엔 중소기업이 전부 부품을 청계천에서 구했어요. 대학생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난한 대학생들은 청계천에서 헌책을 사다 공부했어요. 청계천에 조국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엽전이 무슨 원자로’
― 연구 여건 외의 어려운 점은 어떤 게 있었나요.
“이런 얘기를 해도 될진 모르겠네요. 핵연료 국산화에 반대하는 이들이 일부 있었어요. 핵연료를 사려고 해외 출장을 가면 그 국가에서 어마어마한 대접을 받았거든요. 비리·부패가 많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엽전이 무슨 한국 표준 원자로를 개발하나? 일본 같은 선진국도 표준 원자로가 없는데 한국이 무슨 표준 원자로야?’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이랬으니 2009년 UAE에 원전을 수출하는 걸 보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한이 풀리더군요.”
원자력 자립엔 국가 지도자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다. 일본의 경우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수상, 프랑스는 샤를 드골 대통령, 인도는 자와할랄 네루 수상이 국가의 핵 운명을 좌우한 지도자로 꼽힌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세 분의 지도자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씨를 뿌려, 박정희 대통령이 키웠고, 전두환 대통령이 세계 수준으로 성장시켰어요. 이승만 대통령의 그 혜안이 참 대단해요. 인구 2000만, 국민소득 60달러 시대에 원자력 연구를 시작한 겁니다. 1959년에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잖아요.”
― 전후 복구에 정신없었을 그 시절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1956년에 워커 시슬러(Walker Cisler)가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왔어요. 그때 이승만 대통령에게 원자력 발전을 권하며 에너지 박스에서 우라늄 핵연료봉을 꺼내 보여주며 이걸로 같은 무게의 석탄 수백만 배의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한 겁니다. 이 대통령이 물었죠. ‘우린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원자력 발전을 하나.’ 그러자 시슬러가 이랬답니다. ‘지금부터 하십시오. 20년 정도 걸릴 겁니다.’”
50년대에 원자력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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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7월 14일 서울 홍릉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TRIGA MARK -Ⅱ)’ 기공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첫 삽을 뜨고 있다. 왼쪽이 범산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장. |
“1971년 3월 고리 1호기를 짓기 시작했어요. 고리 1호기 사업비는 약 1560억원이었습니다. 1971년 우리나라 국가 예산(5242억원)의 1/3이었어요. 그때 아무도 원전 건설에 동의하지 않았어요. 1978년에 고리 1호기가 상업 운전을 시작했지요. 시슬러의 말대로 이 대통령이 씨앗을 심은 지 20년 만에 원자력발전소가 가동되기 시작한 겁니다.”
이어진 그의 말이다.
“원자력 역사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역대 대통령 중 원자력 R&D에 가장 큰 힘을 보탠 대통령이에요.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시절에 전 대통령이 원자력연구소를 찾아왔어요.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보좌관, 군인들과 함께였죠. 당시 월성 원자로를 위한 핵연료를 개발하고 있었어요. 월성 원자로는 중수로였고 나머지 원전은 다 경수로였어요. 경수로와 중수로는 핵연료가 다릅니다. 중수로는 1년을 태우는데, 경수로는 3년 이상 태워요.”
― 경수로용 핵연료는 중수로보다 제조하기 더 까다롭겠네요.
“그렇지요. 그런데 회의 중에 전 대통령이 이러는 겁니다. ‘왜 경수로가 많은데 중수로 핵연료만 개발하냐, 경수로 핵연료는 왜 개발 안 하냐.’ 어디서 이런 말을 들었을까, 깜짝 놀랐어요. 대통령이 돌아간 후 회의를 했어요. ‘경수로 핵연료를 개발할 것인가.’ 다 반대했어요. ‘우리 능력으로 경수로는 못 합니다.’ 고민을 하다 해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경수로 핵연료 개발이 시작됐어요. 이게 성공하면서 한국 표준형 원자로 개발까지 이어진 겁니다.”
소장 6년 끝에 고혈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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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대통령이 1982년 10월 13일 영부인 이순자 여사와 함께 울진원자력발전소 9·10호기 기공식에 참석하여 관계자들과 함께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에 있다 돌아온 후 제가 연구소로 초청을 했어요. 그 후에 전 대통령이 저를 연희동 자택으로 초청했어요. 검소한 살림에 너무 놀랐습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요. 묘지도 못 잡고 있잖아요. 대한민국 원자력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전 대통령이 가장 크게 공헌했습니다.”
그는 1999년 원자력연구소 소장에 취임한다. 한 차례 연임해 2005년까지 6년간 소장을 맡았다. 원자력연구소 소장이 연임되는 경우는 한필순 소장 이래 그가 유일하다.
“제가 연구소 소장 6년을 하면서 얻은 병이 뭔지 압니까. 고혈압입니다. 형제 칠 남매 중 아무도 고혈압이 없는데 저만 있어요. 지나고 보니 힘든 일이 참 많았습니다. 하루는 반핵 단체들이 연구소로 찾아왔어요. 소장실에 들어와 책상에 걸터앉아서 시비 걸듯이 하는 겁니다.”
― 어떻게 대응하셨나요.
“제가 그랬어요. ‘여기에서 2000명이 일을 한다. 우리도 생명을 아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생명이 하나밖에 없고 다들 가족이 있다. 여기가 당신들 생각만큼 위험하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일을 하겠는가.’ 이 말을 하자 큰소리를 더는 못 내고 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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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부터) 박정희 대통령 ‘새 時代의 動力’, 전두환 대통령 ‘原子力은 國力’, 김영삼 대통령 ‘하나로’, 이명박 대통령 ‘선진 한국의 힘 원자력’. 사진=장인순 |
우라늄 농축 사건의 진실
이후 2004년 그 일이 일어났다. 그해 한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안전조치협정 추가 의정서(Additional Protocol)’를 비준했다. 원자력 관련 활동의 보고 범위를 넓히는 의정서였다. 과거에는 보고할 의무가 없었던 핵 활동도 보고하도록 상황이 바뀌었다. 한국은 자진해서 2000년 12월 한국원자력연구소(KAERI)에서 진행된 우라늄 농축 실험을 보고했다. 이후 약 1년간 논란이 들끓었다. 장 전 소장의 설명이다.
“당시 이종민 박사 그룹이 지르코늄을 레이저로 농축하는 실험을 했어요. 그게 성공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 박사에게 얘기했어요. ‘우라늄 농축 실험 한번 해보자.’ 사실 원자력 연구를 하는 사람은 농축 실험해 보는 게 꿈이라면 꿈이거든요. 그만큼 이게 진짜 어려운 기술이에요.”
그는 한참 기자에게 우라늄 농축 기술에 대해 설명했다. 여차저차해서 고농축 우라늄을 0.2g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실험장비와 실험자료를 폐기하고 실험실을 폐쇄했다. 이 사실을 한국 정부는 자발적으로 IAEA에 보고했고 이례적으로 일주일 안에 조사단이 연구소로 들이닥쳤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한국을 회부하자는 얘기까지 거론됐다. 그에게는 24시간 경호 인력까지 붙었다.
“당시 과학기술부 장관이 오명 장관이었어요. 오 장관과 우리 연구소 부소장이 유엔에 갔더니 유엔에 주재해 있는 한국인들이 ‘왜 장 소장을 해임하지 않느냐’고 했나 봐요. 오 장관이 귀국하자 제가 사표를 들고 갔습니다. 안 받는 겁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필요할 때가 있을 테니 서랍에 넣어두라’고 했지만 끝끝내 받지 않았어요. 저 하나 희생시켰으면 됐는데, 끝까지 저를 보호해 준 겁니다. 과학자로서의 양심, 실험 정신을 믿어준 거죠.”
우라늄 농축 논란은 한국의 기술 수준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도 됐다.
“해외에서 공동 연구하자는 제의도 많이 왔어요. 우라늄 농축뿐만 아니라 레이저 분야에서 엄청난 기술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요.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전직 장관이 연구소를 방문해 이런 얘기를 하며 저를 격려하더군요. ‘국제사회에서 논란은 일어났지만, 대한민국의 능력을 세계에 알린 거다. 우리가 얻은 것도 많다.’”
文 정부의 탈원전 선언
그는 소장으로 재임하며 해수담수화 소형 원자로 ‘스마트’ 개발도 이끌었다. 스마트는 원자력잠수함에서 동력원으로 사용된다. 소음이 없고 연료용 산소가 필요 없어 잠수함이 장기간 바닷속 깊숙이 들어가 머물 수 있다. 정읍엔 첨단방사선연구소, 경주엔 양성자가속연구단을 지었다. 그의 말이다.
“양성자 가속기 건설을 추진할 때 일입니다. 기획예산처(지금의 기획재정부) 과장을 만나러 갔어요. 딱 한 페이지짜리 설명자료를 들고 가서 이랬어요. ‘1395억원을 만들어 주십시오. 당신은 내가 이걸 설명해도 잘 모를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진국이 되려면 해야 합니다.’ 이 한마디에 그 과장이 오케이 했어요. 그때 예산처 과장이라고 하면, 어마어마한 힘이 있을 때거든요. 예산에 0을 하나 넣다 뺐다 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이렇게 멋진 공무원도 있구나’ 생각했지요.”
2006년 그는 연구소에서 퇴임했다. 그러고 2009년 UAE 원전 수출 뉴스를 보며 감격에 젖었다. 30년 세월이 한순간에 보상받는 듯했다.
8년 후,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2017년 5월에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탈원전·탈핵’을 선언한다. 문 대통령은 2017년 6월 19일 부산 기장군 한국수력원자력 고리원자력본부에서 열린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신규 원전 건설을 전면 백지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대목에서 장 전 소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가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 줄 아세요? 어떻게 탈원전 선포를 원자력발전소에서 원자력 기술자를 모아놓고 할 수 있나요? 다른 곳에서 해도 되잖아요. 어떻게 원자력 기술자들 가슴에 그렇게 비수를 꽂습니까? 이것에 대해 한마디도 미안하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그 원자력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땀을 흘렸습니까. 30년 동안 휴가 한 번 안 가고 이룬 기술자들입니다.”
“탈원전은 핵 잠재력 제거”
이어진 그의 말이다.
“문 대통령이 UAE 바라카 원전에 간다고 하기에, 저는 가서 보면 문 대통령의 마음이 바뀔 줄 알았어요. ‘와,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이걸 해냈구나, 이걸 더 키워야겠구나’ 생각할 줄 알았어요. 말로 듣는 것과 실제 원자로를 보는 건 완전히 달라요. 원전 돔 높이가 85m입니다. 원자로 한 개의 무게가 750t이에요. 이걸 한국에서 만들어서 바지선으로 수송했잖아요. 이런 걸 할 수 있는 나라가 전 세계에 거의 없어요. 그런데 문 대통령은 현장을 보고 오더니 탈원전을 더 밀어붙였어요.
탈원전이라는 게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 줄 압니까? 탈원전을 하는 나라가 어떻게 원전을 수출합니까. 어떤 국가가 탈원전하는 나라의 원전을 사겠어요? 원전을 만들면 이후 끝까지 우리가 핵연료를 공급해 줘야 해요. 유지·보수도 해줘야 합니다. 탈원전하면 이 모든 인프라가 무너지잖아요. 이런 나라 원전을 누가 사겠습니까. 거기에 궁극적으로 탈원전은 우리의 핵 잠재력을 스스로 제거하는 걸 의미합니다.”
― 탈원전을 외치던 나라들도 원전 건설로 돌아섰지요. 미국은 원전 300개를 짓는다고 하고요.
“원자력 강국이었던 독일도 탈원전 하고 지금 후회하고 있잖아요. 전력량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어요. 프랑스에서 전기를 수입하잖아요.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1979), 체르노빌 원전 사고(1986)가 나면서 전 세계가 원자력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미국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E), 웨스팅하우스가 우리에게 싼값으로 기술 이전을 해준 겁니다. 그런데 한국 원자력 기술이 이렇게 빨리 발전할 거라 생각을 못 한 겁니다. 체코에 한국 원전이 들어가는 걸 보고 유럽 사람들이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거예요. 만약 우리가 탈원전 정책을 안 했다면 더 많은 원전을 수출했을 겁니다.”
“월성 1호기도 가동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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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최초 상업용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1호기. 오른쪽부터 고리 1·2·3·4호기이다. 사진=조선DB |
“지금 원자로 수명을 연장 안 하고 없애려 하잖아요. 월성 1호기도 살리면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 미국은 80년을 써요. 우리는 40년 쓰고 닫으려는 겁니다. 게다가 한국의 원전 유지·보수 능력이 세계에서 가장 좋아요. 경수로는 1년에 한 번씩 셧다운하고 핵연료를 바꿉니다. 그러면 보통 3개월씩 걸리는데 우리는 한 달 닫아요. 우리나라 사람들 손재주가 좋잖아요. 유지·보수 기간이 워낙 짧으니 원자력 이용률이 세계에서 제일 높아요. 아랍에미리트가 한국 표준 원자로를 선택한 이유가 뭔 줄 아세요?”
― 유지·보수 기간이 짧아서인가요.
“그 사람들이 세계적인 전문가들과 함께 전 세계를 순회했어요. 한국 울진에 와서 3·4호기를 보고 결정지은 거예요. 전문가들은 시스템 운영 일지를 보면 금방 알아요. 원자로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아닌지. 와서 보니 세계 최고 원전이거든. 요르단에 수출한 연구용 원자로도 지금까지 잘 가동되고 있잖아요.”
후쿠시마 괴담
― 탈원전을 외치는 세력은 후쿠시마 등 원전 사고 가능성을 거론하는데요.
“원자력발전소는 갈수록 안전해집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이런 것들이 발전하며 원자로를 더 안전하게 운영하게 되는 겁니다. 옛날에는 원자로에 들어가 보면 컨트롤 룸에 사람이 굉장히 많았어요. 지금은 컨트롤 룸에 몇 사람 없어요. 소프트웨어가 다 하니까요. 그만큼 원자로가 안전해진 겁니다. 후쿠시마의 경우, 사고 직후 잘못 대응했어요. 사고가 나면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대처법을 가장 잘 압니다. 그 사람들한테 즉시 맡겼으면 해결됐을 걸 그러지 않았잖아요.”
― 후쿠시마 원전에서 ‘오염수’가 방류됐다는 오염수 괴담도 돌았지요.
“후쿠시마는 태평양 옆에 있어요. 태평양에서 물이 한국까지 오려면 태평양을 한 바퀴 돌아야 합니다. 후쿠시마에서 수백만 t을 방류해도 표시도 안 나요. 저는 과학자의 양심을 믿습니다. 일본의 원자력인들이 그 물을 거기에 버리면 일본인들에게 해가 되는데 과연 버릴까요? 이게 한국에 피해가 조금이라도 된다면 제가 앞장서서 막았을 겁니다. 과학을 과학으로 봐야지 정치 논리로 풀면 안 됩니다.”
― 제2의 광우병 괴담인 건가요.
“초등학교에 가 강의를 하면서 제가 물었어요. 후쿠시마가 동해안을 향해 있을까, 태평양을 향해 있을까. 아이들이 동해안 쪽에 있는 줄 알더라고요. 태평양 쪽에 있다고 하니까 그 어린아이들이 이럽디다. ‘그러면 문제없네요.’ 방사선이 조금만 검출돼도 난리가 나잖아요. 아마 제가 대한민국에서 방사능 물질을 가장 많이 만지고 산 사람일 겁니다. 그들 주장이 맞다면 저는 벌써 죽었어야지요.”
실험 중 폭발로 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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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파카(PARKER) 만년필 |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적이 있습니다. 어렵게 마련한 100달러를 들고 떠나는 유학길, 어머니는 말없이 태극기 한 장을 건네주셨어요.”
그는 불소화학을 전공했다. 박사 논문을 위해 실험을 하는데, 폭발 사고가 났다. 안전 유리 덕에 다행히 얼굴은 안 다쳤지만 양쪽 팔과 배에 화상을 입었다. 특히 오른쪽 팔은 용매(溶媒) 때문에 불이 붙어 3도 화상을 입었다. 대학병원에 입원해 피부 이식을 두 번이나 받아야 했다. 그의 말이다.
“허벅지에서 살점을 세 덩이를 떼어 팔에 이식을 했어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도 의사 앞에서 한 번도 아프단 말을 안 했습니다. 제가 그 고통을 참은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첫째, 어머니가 주신 태극기로 저를 붙들었어요. 둘째, 백인 의료진 앞에서 동양인이 엄살떠는 걸로 보이는 게 싫었습니다. 의사가 나중에 저에게 존경한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그의 책상 앞 창가에도 작은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퇴원한 그는 지도교수의 만류에도 다시 같은 실험에 도전해서 해냈다. 실험하는 것 자체가 트라우마로 남을까 봐 일부러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팔에는 아직도 화상 흉터가 남아 있다.
“제 딸 둘이 다 공과대학을 나와서 미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애들이 유학 갈 때도 가방에 태극기를 하나씩 넣어서 보냈어요. 나중에 가보니 방에 걸어 놓았더라고요. 젊은 과학인들 가슴에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있을 겁니다.”
하루에 1권 독서
그의 사무실엔 책이 가득했다. 퇴임 후 그는 하루에 1권꼴로 책을 읽어왔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을 하고 책을 읽습니다. 그래야 생활이 안 흐트러져요. 책을 읽다가 좋은 글을 만나면 꼭 메모를 합니다. 거기에 제 생각을 더해 글을 만들어 컴퓨터로 입력합니다. ‘글 모음’이라 불러요. 이게 지금까지 약 900페이지가량 됩니다. 그 절반을 갖고 《여든의 서재》라는 책을 냈어요. 책 4500여 권을 읽고 한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 도서관을 만든 이유가 뭔가요.
“우리는 자원이 없잖아요. LNG로 발전하면 연료값이 90%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10%밖에 없어요. 원자력은 연료값이 5%밖에 안 돼요. 95%는 인간의 머리로 채우는 겁니다. 그러니 원자력은 인간의 머리가 만드는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오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고 수학 공부하라고 하는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