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특집

외국 대형사고 생존자들의 증언

PTSD(정신적 外傷後 스트레스 장애) 극복 위해 모두 힘 모아야

  • 정리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woosuk@chosun.com
  • 글 : 류오상 월간조선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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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앞에서 선생님 사망…, 피해자 트라우마 극복 위해서는 언론의 취재 자제 필요”
    (콜럼바인 총기 사건 생존자 Kathy Carlston)
⊙ “생존자들에게 자기만 빠져나온 것도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격려해 줘야”
    (9·11 당시 응급구조요원 Scott Lead)
⊙ “사고 후에도 (정신적으로) 큰 異常 못 느끼다가 여러 해 뒤에 PTSD 시달려,
    당장 이상 없더라도 심리치료 필요” (2004년 태국 쓰나미 생존자 Danny Skoog)

[편집자 주]
300명이 넘는 사망·실종자를 낸 세월호 참사. 무슨 말이나 무슨 행동인들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에 조그마한 위로라도 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月刊朝鮮》은 이와 관련해, 외국 대형사고 생존자들의 경험담을 받았다. 위로는 못 될지언정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을 듯싶어 실었다. 1999년 미국 콜로라도주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 2001년 9·11 테러, 2004년 태국 쓰나미 당시 생존자로부터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해 들려줄 수 있는 얘기를 모았다.
콜럼바인 총기난사사건의 생존자 Kathy Carlston(30·女)
 
  “묻기보다 들어주는 자세가 중요”
 
  15년 전인 1999년 저는 미국 콜로라도(Colorado) 주 제퍼슨 카운티(Jefferson County)의 콜럼바인(Columbine)에 있는 콜럼바인 고등학교(Columbine High School) 1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4월 20일 오전 11시30분 즈음. 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체육교사인 데이브 샌더스(Dave Sanders)가 급히 식당으로 달려오더니 누군가 총을 갖고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식사 중인 학생 모두가 놀라서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저는 도망치기 위해 식당 위층에 있는 실험실로 갔습니다. 샌더스 선생님은 한 학생과 복도를 통해 도주했는데 그때 총기를 난사하던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레볼드가 나타났습니다. 샌더스와 학생은 반대방향으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하였지만 샌더스 선생님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학생은 제가 숨어 있는 실험실로 들어왔고, 곧이어 샌더스 선생님이 총상을 입은 채로 실험실로 기어서 왔습니다. 그는 “문 앞에 바짝 엎드리라”고 했습니다. 실험실에 있던 과학교사와 학생들은 교실 창문에 ‘1명 과다출혈로 사망위기’라고 쓴 팻말을 내걸었습니다. 학생들은 입고 있던 셔츠를 이용해 출혈을 멈추게 하기 위해 애썼고, 교사는 경찰과 전화통화로 연락을 유지했습니다. 경찰특공대가 사건을 진압, 저를 비롯해 실험실로 피신한 학생들은 모두 구출됐습니다. 하지만 총상을 입었던 샌더스 선생님은 과다출혈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당시 사건으로 교사 중에서는 유일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건 당시 학교 CCTV에 잡힌 현장 사진.
  현재 미국에서 이날의 총기난사 사건은 1927년 배스 학교 사건(Bath School disaster)과 2007년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Virginia Tech massacre), 1966년 텍사스 대학 총기난사 사건(University of Texas massacre)에 이어 미국 역사상 4번째로 피해 규모가 큰 교내 총기난사 사건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사건으로 12명의 학생과 1명의 교사가 살해됐는데 저는 사건 이후 몇 년간 생존자로서의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 받았습니다. 저를 살렸던 샌더스 선생님이 눈앞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죄책감에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몇 년 전 제가 이런 경우에 대비한 응급조치법을 담은 책을 쓴 것도 샌더스 선생님에 대한 사죄의 표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나아지긴 하겠지만
 
콜럼바인 총기사건의 생존자 Kathy Carlston.
  현재 저는 영화의 특수효과를 담당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지난 기억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나름 트라우마에서 많이 벗어난 것이죠. 하지만 뉴스나 신문에 나오는 사고 소식을 접할 때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무겁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한국의 사고 소식을 알게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고를 당한 분들의 나이가 당시 저와 비슷한 터라 더욱 마음이 쓰이더군요. 저의 경우 마음의 상처가 아주 천천히 회복됐습니다. 많은 사람의 도움이 컸습니다. 특히 가족들이 저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줬습니다. 제가 피해자들을 위해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언론의 취재 자제’입니다. 생존자나 피해자에게는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저는 “당시에 무서웠습니까?”라는 질문에 답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언론으로부터 그런 질문을 들으면 잊으려 했던 악몽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당시 기억이 되살아나면 너무 괴롭습니다. 사건 이후 저는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왠지 고기를 보면 당시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생존자들과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입니다.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묻기보다는 친구처럼 들어 주고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정말 오래 걸리는 작업이긴 하지만 생존자들에게 이제 안전하다는 의식도 심어 줘야 합니다.“
 
  세월호 피해자와 생존자를 생각하면 울컥합니다. 모두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9·11 테러 당시 응급구조요원 Scott Lead(51·男)
 
  강압적인 치료 아무 도움 안돼”
 
  인류 역사상 최악의 테러 참사로 기억되는 지난 2001년 9·11 테러 당시 저는 뉴욕시 응급구조요원으로 구조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이날 오전 8시48분께 제1무역센터에 대한 첫 테러공격(민항기 한 대가 110층짜리 제1무역센터 94~99층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 뒤 수 분 만에 현장에 도착한 저는 제2무역센터 구조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제2무역센터도 공격을 당한 상태였습니다.(제1무역센터 테러가 발생한 지 정확히 16분28초 뒤인 9시2분59초, 다른 민항기 한 대가 제2무역센터 77~85층 사이를 들이박음)
 
  제가 맡은 임무는 제2무역센터 건물 지하철역 구조활동이었습니다. 그 역에는 뉴욕과 뉴저지를 연결하는 교통수단인 패스(PATH) 트레인이 다녔습니다.
 
  저는 우선 다치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피하라고 소리를 지른 뒤 환자들을 역 밖으로 옮겼습니다. 생지옥 같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습니다.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습니다. 이곳 상황을 마무리한 뒤 뉴욕소방서 소방관들을 도우려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들은 오전 9시3분께 테러 공격을 당한 제2무역센터 건물 진입 여부를 두고 논쟁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들어가기로 결정했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저는 밖에서 부상당한 어떤 여성을 치료했습니다. 치료 중에 “대형 건물잔해가 떨어지는 등 붕괴 조짐을 보인다”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저는 무의식중에 현장 지휘본부 관계자에게 “어서 (소방관들에게) 알려”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통신이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건물 내에서 통신신호를 증폭시켜야 할 장치가 작동하지 않음으로써 소방관들의 무전기가 무용지물이 됐기 때문입니다. ‘주여, 제발’ 마음속으로 그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찰나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2무역센터 건물이 무너진 것입니다.(제2무역센터는 오전 9시59분 무너졌으며, 그로부터 29분 뒤인 10시28분에 제1무역센터가 붕괴됐다.)
 
  불타는 무역센터 빌딩 안에서 구조활동을 벌이던 소방관들의 피해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졌겠지만 당시 현장에서 산화(散花)한 소방관은 343명이나 됩니다.
 
  2동 건물이 무너진 이후 ‘나도 당연히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평소 했던 훈련이나 재난대처 계획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했던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경악스러운 장면들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저는 다 내려놨습니다. 그냥 죽는 순간까지 해야 할 일(인명구조)을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많은 죽음을 목격해서인지 제가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섭거나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목숨이 붙어 있더군요.
 
 
  9·11 테러 이후 은퇴
 
9·11 1주기 행사에 참석한 생존자 Scott Lead.
  9·11 테러 이후 저는 응급구조요원 직을 그만뒀습니다. 그 사건 이후 항상 불안했습니다. 응급구조요원 마크를 가슴에 달고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꿈에 테러 당시 잃은 동료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매일 나만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시멘트 냄새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매일 콧속을 맴돌았죠. 미칠 것 같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진통제를 맞았고, 현재는 진통제 중독 진단을 받은 상태입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9·11 테러 현장에서 구조활동을 벌인 동료들 다수는 각종 오염물질로 인해 심각한 건강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만성 기침과 천식 증세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이지요. 혈액암에 걸린 동료도 있습니다.
 
  한 동료는 저에게 구조활동 한 달 뒤부터 운동을 하거나 사다리를 오르는 것이 어려운 것을 보니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하소연한 적이 있는데, 저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 건물 잔해가 120만t이나 되는 테러 현장에서는 엄청난 양의 먼지와 함께 석면과 벤젠, 다이옥신, 폴리크로리네이티드비페닐(PCB) 등 각종 발암물질이 다량 배출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테러 이후 뉴욕시 보건당국은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 구조와 피해 복구에 참여한 사람들, 인근 주민을 A그룹으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일반 뉴욕 시민을 B그룹으로 나누고 심리치료에 들어갔습니다. 저희 집에도 정말 많은 수의 심리치료사들이 방문, 심리치료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상담사들이 많이 찾아오긴 했지만 그들은 항상 뻔한 이야기만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해당 심리치료사가 상부에 “업무에 복귀할 준비가 안 돼 있다”고 보고해서 제 직무를 정지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강압적인 치료가 어디 있습니까. 제가 겪어 보니 심리적인 치료도 중요하지만 충분한 휴식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치료를 하려면 조기에 해야 합니다. 9·11 테러 직후 경찰관, 소방관, 응급구호요원에게 지급한 치료제는 진통제가 전부였습니다. 사건 후 몇 주간은 도시 전체에 진통제가 널렸었지요. 응급실 의사들은 돌아다니면서 진통제를 나눠줬습니다. 그중에는 모르핀(morphine)이나 데모롤(demerol) 같은 마약성 진통제도 다수 있었습니다. 특히 강력 진통제인 데모롤은 정말 쉽게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여기저기 뿌려졌었습니다. 저도 구조작업 내내 그 진통제를 복용했습니다.
 
 
  인간 對 인간으로 접근해야
 
  지금 한국에서도 슬픈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떠한 위로의 말도 소용없을 것이라는 점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 한 가지만 꼭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정부는 이런 대형 참사가 발생할 경우 법안을 만들고, 예산을 확대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부는 인간 대 인간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피해자를 지원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생존자들은 저처럼 죄책감에 시달릴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저도 흔히 이야기하는 ‘생존자 증후군(survivor's syndrome·천재지변이나 대형사고에서 목숨을 건진 이들이 겪는 복합적인 감정으로, 1개월 이상 지속되면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간주)’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자연재해보다 인재(人災)로 인한 재난에서 생존한 경우 희생자들에 대해 잘못했다는 느낌을 받기 쉽다고 합니다. 이런 때일수록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줘야 합니다. 재난 현장에서의 생존은 엄청난 신체적·정신적 집중을 해야 가능한 일이므로 자신의 몸만 빠져나온 것도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고 격려해 줘야 합니다. 타국의 어린 학생들이 저처럼 고통받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2004년 태국 쓰나미 생존자 Danny Skoog(25·男)
 
  “악몽 꿀 때마다 이건 꿈일 뿐이라고 되뇌길”
 
생존자가 직접 촬영한 쓰나미 직후의 태국 거리 모습.
  안녕하십니까. 저는 스웨덴에 살고 있는 대니 스쿠그(Danny Skoog)라고 합니다. 억울하게 사고를 당한 한국의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에게 조그마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용기를 냈습니다.
 
  저와 가족들은 2004년 크리스마스를 태국의 카오락 리조트에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전에 한 번 방문했었던 카오락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죠. 푸껫에서 북쪽으로 약 1시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카오락은 저와 같은 유럽 관광객들이 매우 사랑하는 지역입니다. 푸껫보다 덜 알려진 탓에 조용하고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지요. 말 그대로 신(神)으로부터 축복받은 땅입니다. 과거에 느꼈던 에메랄드 빛 바다와 하얀 백사장, 그리고 은은한 빛을 뿜어 내는 밤하늘의 별을 떠올리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설렘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2004년 12월 25일 태국의 푸껫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곧바로 예약한 호텔로 갔고, 가족들은 피곤해서인지 곧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26일 오전 8시쯤 호텔이 흔들린다는 느낌에 눈을 떴습니다. 그 진동을 가족들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저희 일행은 아침을 먹고 해변으로 향했습니다. 신났는지 동생은 해변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해변에 있던 구조요원이 사람들에게 해변에서 떨어지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해변에서 선탠을 즐기던 사람들도 무서운 파도가 밀려온다고 울부짖으며 무작정 파도가 밀려오는 반대방향으로 뛰었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어머니가 “너부터 빨리 도망가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멀리서 거대한 파도의 벽이 내게로 다가오는 게 보였습니다. 영화에서나 보던 그것이었습니다. 어머니께 “같이 가자”고 했지만 어머니는 먼저 해변으로 달려간 동생을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는 친척 한 명과 함께 시내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대로에 들어섰는데 모든 사람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습니다. 저도 그들을 따라 같이 뛰었는데 뒤에서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5m는 족히 넘어 보이는 파도가 사람들 쪽으로 덮쳐 오고 있었습니다. 혼신을 다해 죽어라 뛰었고 그 사이 옆에 있던 친척과 떨어졌습니다. 찾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아무래도 놀라서 마비가 온 듯했습니다. 뇌는 ‘도와야 한다’고 했지만, 몸은 그저 앞으로 달려 나가기만 했습니다.
 
  얼마만큼 뛰었을까요. 파도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아 안심하고 뒤를 바라봤는데 아직도 파도는 건물을 휩쓸고 있었습니다. 계속 달리는 일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계속 도망치다 보니 높은 담장이 막고 있는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협동해 높은 담장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담장을 넘고 보니 도망치는 사람들의 무리가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한 무리는 사원(寺院) 쪽으로, 다른 한 무리는 숲으로 향했습니다. 지금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관광객들은 사원으로, 지역 주민들은 숲으로 향한 것 같습니다.
 
 
  구호소에서 어머니와 재회
 
  저는 숲으로 갔습니다. 10분 정도를 뛰자 사람들이 걷기 시작했습니다. 구조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구조대 트럭을 타고 구호소로 가는데 그때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참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가게들은 박살이 나 버렸고 가게를 부수고 들어가 있는 자동차들, 창문 여기저기 박혀 있는 나무들이 폭격을 받은 전쟁터를 연상하게 했습니다. 피로 범벅이 된 시체도 많았습니다. 유령도시가 따로 없었습니다.
 
  구호소에 도착한 저는 부모님부터 찾았습니다. 계시지 않았습니다. 절망했습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습니다. 구호소 관계자는 구호소에 있던 사람들을 후방에 있는 더 규모가 큰 구호소로 옮겼습니다. 하늘이 도왔을까요. 이곳에서 형과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를 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밤이 됐습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물도 나오지 않아 나누어 준 초로 불을 밝히며 공포를 이겨 내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태국 정부 관계자가 구호소를 찾았습니다. 생존자들을 어느 병원으로 후송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희는 트럭을 타고 병원으로 옮겨졌고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전부 생존해 있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렸는지 저는 곧바로 곯아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있었던 일들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사고 다음 날인 27일 저희는 푸껫 국제공항으로 향했습니다. 5시간에 걸쳐 도착한 공항은 예상대로 전쟁터 같았습니다. 공항에는 쓰나미로 인해 몸만 건졌거나, 다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희 가족도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이었습니다. 몇 시간을 기다려 군용비행기를 타고 스웨덴행 비행기가 있는 내륙으로 이동했습니다. 멍했습니다. 아무런 힘도, 생각도 없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고국인 스웨덴에 도착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공항에 도착한 사람들을 위해 스웨덴 공항에는 특별 이민국 창구가 마련돼 있었습니다. 반바지 차림으로 덜덜 떨며 나가자 생존자들을 취재하기 위해 기다리는 방송국, 신문사 기자들이 보였습니다. 우리 가족만 살아남은 것 같아 아무 말도 하기 싫었습니다. 당시 저는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惡夢을 이겨 내는 법
 
  사고 직후 따로 상담을 받거나 치료를 받진 않았습니다. 가끔 꿈에 쓰나미 당시 도망치면서 봤던 파란색 꽃무늬가 그려져 있는 분홍색 슬리퍼가 나오긴 했지만 큰 이상(異常)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브라질에 가면서 터졌습니다. 저는 직업 때문에 브라질로 갈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과 함께 그곳에 갔는데 그 이후부터 갑자기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힘들어졌습니다. 가끔 밖에 나갈 때면 무작정 뛰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는 정신과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치료를 받았다고는 하나 아직도 엄청난 크기의 파도에 휩쓸리거나 피해 도망가는 악몽을 꾸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깨기가 일쑤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건 꿈일 뿐이다, 현실이 아니다’고 되뇝니다. 처음에는 너무 무서웠는데 이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니 좀 나아지더군요.
 
  아마 한국의 세월호 생존자들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할 것입니다. 지금은 힘들겠지만 사고 생각에만 얽매이지 않고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극복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당부한다면 당장 이상이 없다고 가만히 있지 말고 치료를 받았으면 합니다. 적절한 치료가 이뤄지지 않으면 저와 같이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전쟁, 사고, 자연재앙, 폭력 등 생명을 위협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보거나 직접 겪은 후에 나타나는 불안장애)를 겪을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의 본질은 죽음을 목전에서 경험한 사람에게 화인(火印)처럼 새겨지는 ‘죽음 각인’입니다. 죽음에 대한 생생한 실감은 인간의 어떤 경험보다 강렬해서 그 기억은 일생 동안 집요하게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치유되지 않으면 그 기억에서 도망치려고 사투를 벌이거나 죽은 이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일생이 다 소모될 수 있습니다. 부디 피해자들이 제대로 치료받아 평생 고통 속에 살지 않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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