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과 기술

미쓰비시 전기차 수탁 생산하는 애플 파트너 홍하이

설계-제조 분리, 전기차산업의 수평 분업화 추구

  • 글 : 박정규 KA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겸직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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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닛산의 3인자 세키 준 영입… 올 3월에는 닛산 인수說 돌아
⊙ 궈타이밍의 홍하이(폭스콘), TV 다이얼 회사로 출발해 변신 거듭하며 성장
⊙ CEO 류양웨이, 엔비디아 CEO 젠슨 황과 각별한 사이
⊙ “닛산 인수보다 자본 참여해 파트너십 구축 희망”

朴正圭
1968년생. 한양대 기계공학과 졸업, 한국과학기술원 기계공학과 석사, 일본 교토대 정밀공학과 박사, 미국 미시간대 방문학자 / 기아자동차 중앙기술연구소 연구원, 日 교토대 정밀공학과 조교수, LG전자 생산기술원, 현대자동차 자동차산업연구소·해외공장지원실 근무, 한양대 미래자동차공학과 겸임교수 역임 / 번역서 《반도체초진화론》 《실천 모듈러 설계》 《모노즈쿠리》
2022년 10월 18일 대만 타이베이 난강전시센터에서 열린 ‘2022 홍하이 테크데이(HHTD 22)’에서 홍하이 창립자 궈타이밍(오른쪽)과 현 회장 류양웨이가 모델 C 전기차 앞에 섰다. 사진=AP/뉴시스
지난 3월 20일, ‘미쓰비시자동차, 홍하이(鴻海)에 전기차 생산 위탁’이라는 헤드라인의 짧은 기사가 주목을 받았다. 기사 제목 그대로, 미쓰비시자동차(이하 미쓰비시)가 호주와 뉴질랜드 시장을 겨냥한 전기차(EV)를 홍하이에 위탁해 생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업을 언제부터 시작할지, 얼마나 생산할지 모두 구체적이지 않다. 하지만 미쓰비시가 홍하이 전기차 사업의 첫 주요 고객이 되었음을 알리는 이 뉴스에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대만이 전자제품을 넘어 자동차산업의 새로운 플레이어로 등장했다는 점, 둘째 일본 기업과 대만 기업이 반도체에 이어 자동차 분야에서까지 연합전선을 구축했다는 점, 셋째 ‘CDMS’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들고 나왔다는 점이다.
 
  CDMS는 ‘수탁설계·제조 서비스(Contact Design and Manufacturing Services)’를 의미한다. 홍하이가 만든 용어다. 즉, 홍하이는 전기차 분야에서 단순히 수탁 생산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 개념까지 포함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추구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하겠다.
 
  우리는 전자산업과 반도체산업에서 설계와 제조의 분업화, 모듈화 등으로 산업 구조 자체가 변화하는 것을 보아 왔다. 특히 대만 기업은 이런 비즈니스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성장했다. 전기차를 계기로 자동차산업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까? 비록 짧은 기사이지만, 이 기사가 함축하는 의미는 크다.
 
  한편 대만은 우리의 이웃 국가이자 주요 경쟁국임에도 불구하고, 대만 제조업과 기업에 대한 우리의 정보는 무관심에 가까울 정도로 적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먼저 홍하이의 발전 과정을 대만 산업 전문가인 아사모토 데루오(朝元照雄) 교수가 제시한 시대 구분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출처: 《홍하이 발전의 수수께끼를 풀다》, 대만정보지(臺灣情報誌) 2013]. 그리고 자동차산업이 변화하고 있는 지금 홍하이가 노리고 있는 새로운 비즈니스가 무엇이며 이로 인해 앞으로 자동차산업이 어떻게 변화할지도 살펴보기로 한다.
 
 
  초기에는 TV용 플라스틱 부품 회사
 
  홍하이를 창업한 궈타이밍(郭台銘)은 1950년 대만의 경찰관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중국 산시(山西)성 출신으로 1949년에 대만으로 이주한 외성인(外省人)이다. 외성인이란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한 국민당 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이주한 대륙 출신 중국인이다. 당시는 대만에 살면서 일본 통치 50년을 겪은 ‘본성인(本省人)’과 중국 본토에서 온 외성인 간의 문화적 충돌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궈타이밍은 학창 시절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는 1966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선원을 양성하는 중국해사전문학교(현 대만 해양기술학원) 항운관리과(航運管理科)에 진학했다. 일본 저널리스트 야스다 미네토시(安田峯俊)가 쓴 궈타이밍 전기 《야심》에 따르면 이 학교는 당시 ‘불량배 학교’라고 불릴 정도였다.
 
  1974년, 23세의 궈타이밍은 해운회사에서 수출 화물의 선박 운항 일정을 조율하는 업무를 했다. 그는 이 일을 하면서 물건을 만들어 수출하는 데 비즈니스 기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친구 두 명과 자본금 30만 대만달러로 ‘홍하이플라스틱기업유한회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는 15명의 직원과 25평 공장에서 플라스틱으로 된 ‘흑백 TV용 조절 다이얼’을 만들었다. 하지만 당시 제1차 오일 쇼크로 경기가 좋지 않아 회사는 적자를 면치 못했고, 공동 창업자들은 회사를 떠난다. 궈타이밍은 처가에서 자금을 빌려 동업자들의 지분을 사들인 뒤 1976년 회사명을 ‘홍하이공업유한회사’로 바꾸었다. 그리고 흑백 TV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성형(成形)가공 부품을 계속 만들었다. ‘플라스틱 성형가공’이란 만들고자 하는 부품의 형상을 형틀(금형·金型)에 새겨 놓고 플라스틱을 녹여서 금형에 부어 넣은 뒤 이것을 식혀서 제품(부품)을 만드는 가공 방법이다. 이때 금형을 잘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977년 궈타이밍은 부품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금형회사를 직접 설립했다. 이것이 향후 홍하이가 발전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일본의 대기업-하청업체 관계에서 영감
 
  그는 당시 원자재 구매부터 생산 관리, 자금 운영까지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했다고 한다. 매일 밤 1시, 2시에 귀가하고 아침 5시, 6시에 집을 나서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홍하이는 점차 대만의 여러 기업으로부터 주문을 받으면서 사업 기반을 형성한다. 홍하이에게 이 시기는 새롭게 사업을 모색하고 부족한 경험을 축적한 시기였다.
 
  30살을 맞은 1980년, 궈타이밍에게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온다. 2003년 4월, 궈타이밍은 대만의 비즈니스 잡지 《상업주간(商業週刊)》과의 인터뷰에서 그날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 30번째 생일은 일본의 마쓰시타전기(현 파나소닉)에서 보냈어. 일본에 간 것이 처음이었는데, 우리 회사에 부품 제작을 발주해 달라고 부탁하러 갔었지. 그날 밤 일본인들이 엄청나게 술을 권하더라고. 완전히 취했어. 나는 숙소에 돌아와서 침대에 누운 채로 계속 생각했어. 왜 일본에서는 비록 작은 동네 공장이라도 이렇게 훌륭한 부품을 공급할 수 있을까? 그건 바로, 일본에 훌륭한 발주처가 있었기 때문이었어.”
 

  궈타이밍은 하청(下請)업체를 동반자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육성하려는 일본 대기업의 자세에 큰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일류 기업과 거래를 해야 자기 회사가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일본에서 귀국한 궈타이밍은 고객을 선정하는 기준을 변경했다.
 
  그리고 해야 할 개혁 작업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가전(家電)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부품을 만드는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당시 대만 경제는 고도성장 궤도에 올라 있었지만, 노동집약형 제조업을 지속하는 데는 한계에 부딪혔다. 특히 TV, 라디오 같은 가전 시장의 성장이 정체(停滯)되고 있었다.
 
 
  ‘폭스콘’의 탄생
 
  궈타이밍은 시장 조사를 거쳐 PC에 들어가는 커넥터에 주목하게 된다. 1981년 IBM이 최초로 PC를 발매한 이후 PC는 비즈니스맨들의 주목을 받으며 새로운 성장 분야로 떠오르고 있었다. 홍하이는 커넥터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능력을 구축했다. 그리고 1982년, 회사명을 홍하이정밀공업(鴻海精密工業)으로 변경하고 미국 시장을 본격적으로 개척한다. 홍하이에 호의적인 대만 언론에 따르면 당시 궈타이밍은 미국 출장 시 모텔을 전전했고, 하루에 햄버거 두 개만 먹는 등 극도로 돈을 아꼈다고 한다.
 
  그는 1985년부터 ‘폭스콘(Foxconn)’이라는 영어 사명(社名)을 자회사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폭스콘’은 고객의 요구에 민첩하게 대응한다는 의미에서 ‘여우(fox)’와 당시 주력 제품인 ‘커넥터(connector)’를 합성해 만든 이름이다. 홍하이의 중국 내 등록상표는 ‘푸스캉(富士康)’으로 ‘폭스콘’과 발음이 비슷하다. 이후 본격적으로 미국·홍콩 등에 해외 지사를 설립했고, 홍콩 자회사를 통해 1988년 중국 선전(深圳)시 룽화(龍華)구에 거대한 규모의 토지를 확보했다.
 
  1991년 6월, 홍하이는 대만 증권거래소에 상장되면서 성장의 새로운 발판을 마련했다. 마침 이때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가속화하며 외국 자본 유치를 적극 장려했고, 대만 정부 또한 중국 투자를 용인했다.
 
  홍하이는 이러한 환경을 활용해 그동안 부품을 단품으로 제조하는 회사에서 EMS(전자제품 위탁 생산) 회사로 변신한다. 그 계기가 된 것은 미국 컴팩(Compaq)으로부터의 수주이다.
 
 
  ‘미국에서 주문받아 중국에서 만든다’
 
  1996년 홍하이는 PC 케이스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PC 케이스는 한 대당 50~60개의 금형이 필요하다. 홍하이는 이미 1970년대부터 금형 설계와 제조 기술을 축적해 온 덕분에 이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 PC 사업이 성장하자, 홍하이는 1999년에 데스크톱 PC 완제품 전체를 조립하는 EMS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홍하이는 상하이 부근의 쿤산(昆山)시와 선전시 룽화구에 대규모 제조 기반을 구축한다.[출처: 아카바네 준(赤羽淳), ‘아시아발 기업의 테이크오버형 캐치업’, 《아시아 연구》 2022년]
 
  공장에서 아무리 물건을 잘 만들어도 팔리지 않는다면 더 이상 공장을 운영할 수 없다. 홍하이는 해외 대기업으로부터 주문을 받기 위해 미국(1993년), 영국(1994년) 등에 개발 거점을 만든다. 즉, 홍하이는 ‘미국에서 주문받아 중국에서 만드는’ 대만 상인의 전형(典型)이 되었다. 2002년에 홍하이는 중국에서 가장 많이 수출하는 기업이 되었고, 2004년에는 세계 최대의 EMS 기업이 된다.
 
  하지만 이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EMS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대규모로 저임금 노동력을 확보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2000년 기준으로 선전시 룽화 공장에는 4만 명의 종업원이 일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인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홍하이는 강압적인 관리 기법을 도입했다.
 
  열악한 근무 환경으로 인해 2010년 1월부터 5월까지 룽화 공장에서 근무하는 17~25세의 중국인 종업원 13명이 자살했다. 종업원 자살에 대한 홍하이의 대응책은 세 가지였다. 첫째, 자살할 가능성이 있는 종업원을 즉시 해고했다. 둘째, 그물을 쳐서 사람이 떨어져도 죽지 않게 했다. 셋째, 1일 연장근무 시간을 3시간 이내로 줄였다. 이런 대책으로 실제로 이후 5년간 자살이 20건 이하로 줄었다고 한다. 궈타이밍의 홍하이의 기업 성장을 향한 집념은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다.[출처: 《야심, 궈타이밍전(野心, 郭台銘傳》, 2016년]
 
 
  애플의 핵심 파트너가 되다
 

  2000년대 초 홍하이는 다시 휴대폰, 통신 등으로 사업 다각화를 본격화하면서 하이테크 기업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2003년에는 노키아와 모토로라의 핸드폰 위탁 생산을 수주하고, 이후 애플의 아이폰과 아이패드 위탁 생산을 수주하면서 애플의 핵심 파트너로 떠올랐다. 2010년대 초반 중국 정저우(鄭州)에 ‘아이폰 시티’로 불리는 세계 최대 아이폰 생산기지를 설립해 아이폰을 제조했다.
 
  2010년 제이슨 데드릭 미 캘리포니아대(어바인 캠퍼스) 교수의 연구논문에 따르면, iPod 5세대의 가격은 대당 299달러이고 부품 가격을 다 합치면 140.7달러인데 가공비는 7.36달러에 불과하다. 전자제품을 단순 조립하는 EMS 사업이 얼마나 박리다매(薄利多賣) 사업인지 알 수 있다. 이에 2000년대 말부터 홍하이는 탈(脫)EMS화를 시도한다. 필요하면 기술이 있는 외국 기업을 인수하고, 고급 인력을 확보했다.
 
  2014년 궈타이밍은 《닛케이 일렉트로닉스》와의 인터뷰에서 “홍하이는 더이상 단순한 EMS 업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캐나다의 휴대폰 기업 블랙베리(BlackBerry)와의 거래 관계에서, 블랙베리가 휴대폰 개발을 기획하고 운영체제(OS)를 만드는 등 핵심 업무를 담당했고, 홍하이(폭스콘)는 스마트폰의 상세 설계를 맡았다. 애플과의 관계도 단순히 주문받은 제품을 조립만 해주는 초기 단계를 벗어났다. 궈타이밍은 인터뷰에서 “애플과의 거래 관계는 애플의 지도 하에 상세 설계 이후부터 수탁하는 단계”라고 밝혔다.
 
  〈도표 1〉은 홍하이가 제공하는 다양한 서비스를 단계별로 표시한 것이다. 단순히 부품을 조립하는 OEM(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에서부터 상품 기획 이후의 모든 과정(설계·생산 등)을 처리하는 IIDM까지 제공하는 비즈니스 모델이 다양하다. 홍하이를 단순한 조립 회사로만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日 샤프를 손에 넣다
 
  궈타이밍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시대 변화에 따라 사업 아이템을 바꾸는 사람이다. 그는 정보시대(Information Age)를 ‘정보를 얻기 위해 눈으로 뭔가를 계속 보는 시대’라고 파악했다. 즉, ‘정보시대는 인간의 시각(視覺)에 의존하는 시대’라고 정의 내린 것이다.
 
  ‘아이볼(Eyeball)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디스플레이와 터치패널 사업을 본격화한 것도 이러한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2003년 이노룩스[Innolux·중국명 췬촹광전(群創光電)]라는 회사를 만들어 액정 패널 사업에 진출한다. 당시 홍하이의 경영층은 ‘패널은 장치산업이기에 기존 조립산업과 너무 다르다’며 반대했지만, 궈타이밍은 LCD 사업을 밀어붙였다.
 
  2010년에는 대만의 다른 LCD 회사인 치메이전자(Chi Mei Optoelectronics·奇美電子)를 인수 합병했다. 그리고 2012년부터 자금난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일본 샤프와 자본 제휴 등의 교섭을 시작하여 결국 2016년에 샤프를 완전 자회사화했다. 1980년 30살의 나이에 처음 일본에 가서 밤새워 술 마시며 영업 활동을 한 궈타이밍이 36년이 지난 66살에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회사를 인수한 것이다.
 
  홍하이의 경영은 2019년 6월 궈타이밍이 대만 총통 선거 출마를 위해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전기를 맞는다. 그의 후임으로 류양웨이(劉揚偉·Young Liu)가 홍하이의 회장 겸 CEO가 된다.
 
  류양웨이는 1956년 대만에서 태어났다. 대만 국립교통대학교 전자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에서 전자공학 및 컴퓨터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 3개의 회사를 직접 창업했는데 그중 하나가 영 마이크로 시스템스(Young Micro Systems)라는, 컴퓨터 머더보드를 만드는 회사였다. 1994년 홍하이가 이 회사를 인수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류양웨이는 2007년에 궈타이밍의 특별비서로 홍하이에 합류한다. 이후 류양웨이는 홍하이의 반도체사업부를 직접 이끌었다. 류양웨이는 홍하이의 CEO가 되고 나서는 회사 경영 체제를 과거 궈타이밍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던 체제에서 각 부문별 대표가 집단지도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럼, 지금의 홍하이를 살펴보자. 홍하이의 제품별 매출액 비중을 살펴보면, 스마트폰을 포함한 소비자용 제품이 46%, 서버/네트워크 기기가 30%, PC/태블릿PC가 18%, 기타가 6%를 차지한다. 특히 서버/네트워크 비중이 23년 22%에서 24년 30%를 차지할 정도로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2024년 12월 매출액은 약 300조원(6.8억 대만달러)로 삼성전자와 비슷한 수준이다. 종업원 수는 83만 명으로 월마트, 아마존에 이어 세계 3위다. 두 회사가 유통업인 것을 감안하면 제조업을 하는 기업 중에서는 홍하이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업원을 가진 회사다.
 
  문제는 영업이익률이다. EMS 사업의 숙명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나름 열심히 탈(脫)EMS를 시도하고, 애플·아마존·소니 등 세상에서 가장 잘나가는 기업만을 고객으로 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업이익률이 겨우 2.9%이다.
 
 
  중국 탈출
 
2018년 6월 28일 궈타이밍 홍하이 회장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위스콘신주에 건설할 디스플레이 공장에 대해 설명했다. 사진=AP/뉴시스
  이런 홍하이에게 새로운 리스크가 생겼다. 미중(美中) 패권전쟁과 미국의 관세정책이다. 중국 중심의 생산 거점을 재편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 있다.
 
  ‘탄광의 카나리아’란 말이 있다. 광부들이 갱도에 들어갈 때, 탄광에서 나오는 유독 가스에 죽거나 다치는 일을 피하고자 유독 가스에 민감한 카나리아를 새장에 넣어서 들고 가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카나리아를 보고 탄광에서 빠져나가야 할지를 판단하는 것처럼, 지금 많은 글로벌 기업은 대만 기업을 보면서 중국에서 빠져나갈지를 판단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만 기업이 중국의 정보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중국 전역에 공장을 가진 홍하이가 아마도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2022년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보고서에 따르면, 대만 기업의 25.7%가 이미 중국에서 철수했으며, 33.2%가 철수를 고려 중이라고 한다. 이는 미중 갈등, 중국의 인건비 상승, ‘대만 유사시’ 우려 등으로 중국 의존 모델의 리스크가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2023년 7월 중국이 ‘반(反)스파이법’을 개정하고 적용을 강화하면서 외국인과 중국인 모두 자의적(恣意的) 체포 대상이 되었다. 요컨대 대(對)중국 투자 리스크가 더욱 높아졌다.
 
  한편으로는 애플과 같은 미국의 고객 기업이 리스크 회피를 위해 생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그 결과 대만의 대중국 투자 비율도 38%(2019년)에서 8%(24년 1~10월)로 격감했다. 대만의 대중국(홍콩 포함) 수출 비중도 44%(2020년)에서 31%(2024년 1~10월) 감소했다. 홍하이도 중국에서 생산하는 서버를 대만으로 이전해 생산하는 등 생산망 재편을 가속화하고 있다.
 
 
  홍하이와 BYD
 
  이와 함께 홍하이는 자동차를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다. 사실 창업자 궈타이밍이 자동차산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이다. 당시 그는 대만의 차량용 부품회사를 인수하고, 포드·아이신 등 자동차 관련 회사에 근무하는 대만 사람을 스카우트했다. 그리고 테슬라가 전기차를 발매하자, 본격적으로 전기차에 대한 야심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홍하이는 전기차산업도 스마트폰과 같은 수평적 분업 모델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궈타이밍은 테슬라를 스마트폰에 비유하며, 홍하이는 “EV업계의 안드로이드가 되겠다”고 공언했다. 2010년에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를 초청해 공장도 보여 주면서 테슬라 차량 수탁 생산을 제안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비슷한 시기인 2014년은 테슬라가 ‘모델 S’를 중국에 출시한 해이다. 스마트폰 제조업체 샤오미의 창업자 레이쥔(雷軍)이 모델 S를 여러 대 구매해 벤처 동료들에게 선물했다. 테슬라에 큰 자극을 받은 중국의 IT 기업가들은 경쟁적으로 전기차 업체를 설립하며 중국의 전기차 전환의 원동력이 되었다(《월간조선》 2025년 1월호, ‘중국 자동차산업의 폭풍 성장 비밀’). 중국의 BYD는 이미 2003년에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었다. 일반적으로 BYD를 배터리를 만들다가 자동차도 만드는 회사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BYD는 세계 유수의 EMS 사업을 전개하는 회사다. 휴대폰 배터리를 만들다가 휴대폰까지 직접 조립하는 비즈니스로 확장한 것이다. 즉, BYD는 EMS 사업에서 홍하이의 강력한 경쟁자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BYD는 1년에 3000만 대 수준으로 차량이 팔리는 중국 회사이고, 홍하이는 1년에 45만 대 정도의 내수(內需) 시장을 가지고 있는 대만 회사다. 그래서 전기차 사업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르다.
 
 
  애플도 자동차 사업 포기
 
   〈도표 2〉는 홍하이의 주력 제품의 변화를 표시한 것이다. 궈타이밍은 정말 타이밍 좋게 홍하이의 주력 제품을 바꿔 나갔다. 다른 대만 기업처럼 자사(自社) 브랜드를 갖지 않고 다른 기업의 요청을 받아 전기차를 위탁 생산하는 비즈니스를 택한 것이다.
 
  전기차가 내연기관보다 간단하다며 많은 기업들이 도전했지만, 그래도 역시 자동차는 자동차다. 전기차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많은 신생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거나 사업을 접었다. 피스커(Fisker)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반도체산업처럼 전기차를 설계만 하고 생산은 위탁하는 팹리스(fabless) 회사를 지향했지만, 2024년 6월에 파산 신청을 냈다. 2024년 애플도 10년 동안 준비해 왔던 자동차 사업을 포기했다.
 
  홍하이의 전기차 사업도 지지부진하다. 홍하이는 2020년 EV 개발 컨소시엄 ‘MIH(Mobility in Harmony)’를 설립하며 자동차산업에 본격 진출했다. MIH는 단순한 위탁 생산을 넘어 기획·설계·제조까지 아우르는 플랫폼으로, 대만의 자동차 시장을 넘어 글로벌 시장을 겨냥했다.(출처: 《동양경제》 2024년 12월 25일, ‘홍하이 EV 사업에 드리운 먹구름’)
 
  하지만 홍하이에 자동차 생산을 위탁해 줄 만한 기업이 없다. 대만의 자동차 기업은 대부분 한국·일본·미국 등의 자동차 메이커로부터 부품을 공급받아 조립 생산한다. 소위 녹다운(knock down) 방식이다. 그중 위룽기차(裕隆汽車)라는 회사가 있는데, 홍하이는 위룽기차와 폭스트론(FOXTRON)이라는 전기차 합작사를 만들었다. 수탁 생산을 하는 것이 목표이지만, 주문하는 회사가 없어서 아직은 자사 브랜드의 차량을 몇천 대 만들어 판매하는 수준이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스키모토 류코(杉本柳子)의 취재에 의하면 홍하이의 자동차 부문 매출액은 이 회사 매출액 300조원 중 1000억원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동안 노력한 것에 비하면 매출이 너무 적다.
 
  홍하이 입장에서는 자동차 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해서 갖춰야 할 능력이 있다. 자동차산업이란 것이 각 국가별로 법규와 규정이 다르고 인증 법규를 다 통과해야 한다. 홍하이가 아무리 자체적으로 전기차 플랫폼을 만들었다고 해도 고객의 요구에 따라 설계를 변경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홍하이가 표방한 비즈니스 모델, 즉 개발, 공급망 관리, 생산을 다 해주는 CDMS라는 비즈니스를 하려면 경험이 풍부한 엔지니어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홍하이는 일본 기업과 손을 잡고 싶어 한다.
 
  마침 혼다와 닛산의 경영 상황이 좋지 않다. 2023년 기준으로 혼다의 판매 대수는 398만 대, 닛산은 337만 대인데, 그 4년 전에 비해 각각 100만 대 이상 판매 대수가 축소되었다. 미쓰비시는 90만 대가 안 되는 수준이다. 2023년 1월 홍하이는 닛산의 넘버 3인 부(副)COO(최고집행책임자) 세키 준(關潤)을 스카우트해 홍하이 전기차의 최고전략책임자(CSO) 자리를 맡겼다. 비록 닛산의 경영 상황이 좋지 않지만, 닛산은 전 세계에 거점이 있고 품질을 관리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다. 홍하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닛산이란 브랜드가 아니라 닛산의 기술자들이다. 그래서 올해 2월 홍하이 회장 류양웨이는 닛산을 인수할 것이라는 추측에 대해 “닛산을 인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본 참여를 해서 파트너십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월간조선》 2025년 3월호, ‘혼다-닛산 합병 결렬 내막’)
 
 
  미쓰비시가 홍하이에 위탁 생산하는 이유
 
  이런 상황에서 미쓰비시가 홍하이에 차량 위탁 생산을 요청한 것이다. 과거 홍하이가 애플로부터 아이폰 주문을 처음 받았을 때, 기술은 애플이 가지고 있었다. 홍하이는 애플이 요구하는 다소 무리한 납기(納期)와 품질 등의 요구를 사력(死力)을 다해 만족시켰다. 그렇게 하면서 실력을 쌓아 지금까지 왔다. 이제 홍하이는 자동차 분야에서 처음으로 전력(全力)을 다해서 일할 찬스가 생긴 것이다.
 

  미쓰비시 입장에서는 차량 판매 대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환경 규제를 만족시켜 가며 특정 국가에서 전기차를 팔아야 한다. 전기차의 경우 차량 전체에서 배터리가 차지하는 원가 비중이 높기 때문에 차를 팔려면 배터리 이외의 부품에서 코스트를 대폭 낮춰야 한다. 만약 미쓰비시가 스스로 차량을 개발해서 생산하는 것보다 더 싸게 홍하이가 만들어 준다면 서로 간에 비즈니스가 가능하다.
 
 
  엔비디아는 홍하이의 가장 믿음직한 友軍
 
2023년 10월 18일 대만 타이베이 난강전시센터에서 열린 홍하이 테크데이(HHTD 23)에서 만난 류양웨이 홍하이 회장(오른쪽)과 젠슨 황 엔비디아 회장. 두 사람은 각별한 사이다. 사진=AP/뉴시스
  대만 기업 홍하이는 전기차 분야에서 큰 장점이 하나 있다. 바로 홍하이의 CEO 류양웨이가 엔비디아(NVIDIA) CEO 젠슨 황과 각별한 관계라는 점이다. 2023년 10월 홍하이 테크데이(HHTD)에 젠슨 황이 직접 참석해, 폭스트론이 만든 전기차 ‘모델 B’를 ‘아름다운 차량’이라고 칭찬했다. 홍하이는 매년 운동회를 하는데, 2025년 1월 타이베이 돔에서 직원 및 가족 3만5000명이 참가한 이 행사에 젠슨 황이 온라인을 통해 메인 게스트로 참가해서 “홍하이가 AI 서버 생산 능력을 잘 보여 주고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두 기업이 얼마나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향후 전기차가 자율주행차량과 같이 스마트화가 진전될 때, 엔비디아는 홍하이의 가장 믿음직한 우군(友軍)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아직 홍하이의 전기차 사업은 걸음마 수준이다. 하지만 이 회사의 과거 성장 경로와 저력(底力)에 비추어 보건대 쉽게 전기차 사업을 포기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일정 정도 규모를 확보하지 못한 자동차 메이커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미쓰비시처럼 홍하이에 위탁 생산을 요청할 수 있다.
 
  지난 4월 초 일본 도쿄를 방문한 홍하이의 전기차 부문 담당 세키 준은 홍하이의 전기차 사업 계획을 발표하고 여러 일본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세키 준은 인터뷰에서 “EV 설계와 생산을 수탁하는 CDMS 사업을 일본에서 추진한다”고 밝히며, 혼다·닛산·미쓰비시와의 연계에 지속적으로 주목하고 닛산과의 관계 구축 가능성도 시사(示唆)했다. 특히 “홍하이가 원하는 비즈니스는 어디까지나 CDMS이며, 닛산이 원한다면 자본 출자(出資)를 할 수도 있고 공장 및 설비를 인수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일본 기업의 높은 신뢰성과 홍하이의 유연성이 합쳐지면 상당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세키 준, “홍하이, CDMS 원해”
 
2019년 12월 2일 일본 닛산의 부COO 시절의 세키 준(오른쪽)과 우치다 마코토 닛산 CEO.
  그동안 전기차가 과연 자동차산업에서 ‘파괴적 혁신’을 만들어 낼 것인지 주목받았다. 2008년 인도에서 타타라는 회사가 나노(nano)라는 차량을 출시했다. ‘세상에서 가장 저렴한 자동차’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이 차는 가격이 당시 한국 돈으로 250만원 정도였다. 나노는 한때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훙광 미니EV’라는 저가 차량(약 500만원)이 팔리고 있고 나름의 인기가 있지만 기존 자동차산업을 파괴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전자산업과 달리 자동차산업에서 ‘파괴적 혁신’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안전이라는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국 기업들 사이에선 로엔드(low-end) 제품, 즉 그럭저럭 탈 만한 차량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경쟁이 지속되고 있다. 지금은 저가로 자율주행을 제공하는 경쟁이 중국에서 펼쳐지고 있다.
 
  대만 기업 홍하이는 ‘설계와 제조의 분리’라는 관점에서 전기차산업의 수평 분업을 노리고 있다. 한국 기업은 산업 구조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홍하이와 일본 기업과의 거래 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黑子’ 홍하이
 
  일본에서는 홍하이와 같은 수탁 생산 회사를 ‘흑자(黑子)’라고 부른다. 일본 전통 가부키(歌舞伎)극에서 나온 말로, 검은색 옷을 입고 무대 위 소품을 옮기는 사람이다. 검은색 옷을 입었기에 연극에서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 간주한다. 눈이 나쁘면 잘 보이지 않는다.
 
  지금 한국은 ‘흑자’인 홍하이가 산업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최근 소니가 과거 전자회사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기업으로 전환했다면서 소니의 성공적인 사업 전환을 배워야 한다는 방송과 언론 기사가 많다. 하지만 소니는 ‘흑자’ 홍하이를 철저히 이용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2009년 소니는 멕시코의 액정 TV 공장을 홍하이에 싼값에 매각하고 생산을 다 위탁해 버렸다. 그렇게 자기 몸집을 가볍게 해나갔다. 몸이 가벼워졌기에 쉽게 사업 전환이 가능했던 것이다.
 
  연극을 보는 관객은 흑자의 존재를 알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배우와 연출가 등 연극과 무대 전체를 책임지는 사람이라면 흑자의 역할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연극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한국 기업은 지금의 산업 변화를 연극 관람하듯 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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