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일국교정상화 60주년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 관계

2011년 이후 기본조약에 근거한 법적 기반 흔들리기 시작

  • 글 : 조진구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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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사회당·공산당, “한일기본조약은 미국 주도의 반공 군사동맹 결성 시도”라며 반대
⊙ 2011년 헌재의 위안부 결정, 2012년 대법원의 징용공 판결 이후 한일 갈등 심화
⊙ 일본 정부·사법부, 과거사 문제에 대해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 통해 해결”

趙眞九
1967년생.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일본 시즈오카현립대학 대학원 국제관계학 석사, 도쿄대 대학원 법학박사(국제정치 전공) / 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同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역임. 現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 《북한의 핵문제와 대외관계 변화》(공저), 《새로운 한일 관계를 향하여-한국인이 알아야 할 문제들》(공저)
2019년 7월 대법원의 징용공 판결에 맞서 아베 정권이 단행한 ‘한국에 대한 수출관리제도의 엄격한 운용’ 조치 이후 한국 내에서는 반일 시위들이 벌어졌다. 사진=조선DB
1965년 6월 22일, 한국과 일본은 13년 8개월에 걸쳐 900회가 넘는 공식·비공식의 크고 작은 회담에 종지부를 찍고 국교 정상화에 필요한 문서에 정식으로 조인했다. 조인에 앞서 정일권 국무총리는 “불행했던 과거의 관계를 청산하고 주권의 상호존중과 호혜에 기초를 둔 새로운 역사적 출발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라면서 “구원(舊怨)에만 집착하지 말고 관용과 아량으로 맞아야 할 것”이라고 호소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조인 다음 날 저녁 박정희 대통령은 방송을 통해 발표한 특별담화에서 일본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이라 아니할 수 없지만… 각박한 국제사회의 경쟁 속에서 지난날의 감정에만 집착해 있을 수는 없으며… 국제공산주의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누구하고라도 손을 잡아야 한다”고 이해를 구했다. 일본 국민에 대해서도 “정식 조인이 이루어진 이 순간에 침통한 표정과 착잡한 심정으로 과거의 구원을 억지로 누르고 다시 손을 잡는 한국 국민들의 심정”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아 넘기거나 결코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환기했다.
 
  한국에서는 야당이 ‘매국적(賣國的)인 한일회담 조인의 즉각 철회와 비준 결사 저지’를 선언하고 때마침 한국군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 비준안이 국회에 상정되면서 한일기본조약과 부속협정 비준안(批准案)은 제대로 된 심의 없이 8월 14일 여당 단독으로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일본사회당과 일본공산당이 “한일기본조약은 남북의 통일을 방해하고 미국 주도의 반공 군사동맹을 결성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하면서 비준 저지 운동을 주도했다. 먼저 비준안이 통과된 한국과의 조문 해석을 둘러싼 해석상의 차이에도 초점이 맞춰졌다.
 
 
  한국 정부의 유일합법성 문제
 
  하나는 기본조약 제2조에 관한 것으로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無效)임을 확인”했는데, 무효의 시점이 명확하지 않았다.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는 1965년 11월 5일 중의원에서 강제병합조약은 “대등한 입장에서 자유의사로 체결”된 것이라고 답변했다. 11월 25일 참의원에서 후지사키 마사토(藤崎萬里) 외무성 조약국장도 “합법적으로 체결된 유효한 조약이며, 1948년 대한민국 수립으로 사실상 실효(失效)”했다는 견해를 밝혔다.
 
  다른 하나는 한국 정부가 유엔총회 결의안 제195호(Ⅲ)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기본조약 제3조에 관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한국이 한반도 전 지역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했으나 유엔총회 결의안은 ‘한국 정부의 관할권은 유엔 한국 임시위원회가 감시하고 협의할 수 있었으며, 대다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자유선거로 의사 표현이 이루어졌던’ 38선 이남으로 국한했다. 국제법 전공의 서울대 배재식(裵載湜) 교수는 한국의 관할권 범위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조항을 통해 일본은 “북괴를 승인할 수 없고 또한 하지 않겠다는 의사는 명시”되어 있다고 해석했다(《조선일보》, 1965년 6월 24일). 10월 29일 중의원에서 사토 총리는 한반도에 두 개의 실질적인 정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일본은 유엔총회 결의안을 존중해 “북한과는 외교 관계를 갖지 않는다”고 말해, 북한과의 관계가 백지(白紙) 상태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봉인된 역사 문제
 
  한일 본회담이 시작된 직후인 1952년 2월 16일 일본 측은 한일 간의 우호조약 초안을 제시했으나 식민지 지배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3월 5일 한일 간의 기본조약안을 일본 측에 전달하면서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체결한 모든 조약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일본 측은 이 조항의 삭제를 요구하는 대신 대한제국과 일본국이 체결한 조약과 협정이 현재의 한일 관계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다는 수정안을 제시했다. 한국 측은 1910년에 체결된 조약은 불법적인 침략 행위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무효’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체결 당시에는 합법적이며 유효했다는 일본 측과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이미(already)’라는 부사를 넣어 무효의 시점을 서로 편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식민지 지배로 인한 피해 배상과 보상이라는 말은 기본조약이나 부속협정 어디에도 들어가 있지 않았으며, 식민지 지배 반성과 사죄의 표명도 없었다. 한일 청구권 협정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은 양국 및 양국 국민 간의 재산과 청구권 문제의 해결과 경제 협력의 증진을 위해 일본이 10년에 걸쳐 무상(無償) 3억 달러, 유상(有償) 2억 달러를 제공함으로써 양국 정부와 국민 간의 재산 및 청구권 문제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를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과 함께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미 무효’라는 표현으로 구(舊) 조약의 무효 시점을 모호하게 하고 한일 양국의 청구권 상호 포기와 한국에 대한 일본의 경제 협력 제공이라는 불완전한 형태의 한일 국교 정상화는 식민지 지배에 기인한 역사 문제를 봉인한 채로 실현된 것이다. 역사 문제를 두고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외교적 타협이 아니었더라면 국교 정상화는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일본의 경제 협력은 한국 경제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으며, 인적 교류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해 왔다. 1965년 연간 1만 명에 지나지 않았던 양국 국민의 상호 방문자 수는 2015년에는 584만 명에 달했으며, 2019년에는 처음으로 1000만 명을 넘어섰다.
 
 
  김대중, “戰前 일본과 戰後 일본은 극명하게 대조 이뤄”
 
  그렇지만 냉전(冷戰) 종식이라는 국제정세의 변화 등을 배경으로 1990년대에 들어와 역사 문제가 양국 관계를 악화시키는 현안으로 부상(浮上)하게 된다.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는 1995년 8월 15일 전후 50년에 즈음하여 발표한 담화를 통해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국가에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것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표명했지만, 10월 5일 참의원에서 “한국 병합조약은…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되어 실시된 것이라는 인식”을 표명했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에게 보낸 11월 15일 자 무라야마 총리 친서, 나아가 한일 관계를 한 단계 격상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1998년 10월의 김대중(金大中)-오부치(小渕恵三) 공동선언도 무라야마 담화를 넘지 못했다. 즉 10월 8일 정상회담에서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총리의 역사 인식 표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평가하는 동시에…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 협력에 입각한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고 화답했다.
 
  10월 7일 열린 궁중 만찬에서 아키히토(明仁) 천황이 식민지 지배로 일본이 한국인에게 ‘커다란 고통’을 준 것을 ‘깊은 슬픔’이라고 표현하면서 항상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과거 역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양국이 서로 존중하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진정한 동반자 관계’로 나아갈 것을 제창했다. 다음 날 국회 연설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전전(戰前)의 일본과 전후(戰後)의 일본은 참으로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면서 “전후의 일본 국민과 지도자들이 쏟은 피땀 어린 노력에 대해 깊은 경의”를 표명했다.
 
  한국의 대통령이 전후 일본이 걸어온 길을 높이 평가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이러한 김대중의 언행은 한국에 대한 일본 국민의 이미지를 바꿔놓았을 뿐만 아니라 ‘미래 지향의 한일 관계’가 양국 사이의 화두로 자리 잡게 된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한일 관계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 국회 연설에서 “과거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반성하는 도덕적 용기를 지닌 수많은 일본의 민주시민들”을 상찬했던 것과 정반대의 움직임이 일본 국내에서 나타났다.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을 ‘자학사관(自虐史觀)’이라고 비판하면서 일본 국민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세력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보수적(保守的)인 역사학자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만든 중학교 역사 교과서가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하자 2001년 4월 한국 정부는 주일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2001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일본이 저지른 전쟁을 ‘자존자위(自尊自衛)의 전쟁’으로 미화하면서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참배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가 총리에 취임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또한 사회과 교과서, 학습지도요령과 해설서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교육하도록 하는 내용이 수록되면서 양국 갈등은 매년 반복되었는데, 2005년 3월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하면서 영토 문제가 역사 문제와 결부되면서 한일 관계를 급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2008년 2월 이명박(李明博) 정부 등장 이후 중단된 정상 간 셔틀 외교가 재개되고 2009년 8월의 총선거에서 역사 문제에서 자민당보다 전향적인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서 한일 관계는 개선되기 시작했다. 특히 한일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2010년 8월 10일 각의결정을 거쳐 발표된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의 담화는 강제병합조약의 불법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한국만을 대상으로 한 담화를 통해 “정치적·군사적 배경하에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한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밝히면서 궁내청이 보관하고 있던 《조선왕실의궤》를 한국 정부에 돌려줬다.
 
 
  흔들리는 한일 관계의 법적 기반
 
  그러나 2011년과 2012년 한국 사법부가 잇달아 내놓은 판결이 한일 관계를 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갔다. 2011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한국 정부의 행위를 ‘부작위(不作爲) 위헌(違憲)’으로 결정하자 한국 정부는 9월 15일과 11월 15일 청구권 협정상의 분쟁 해결 절차를 규정한 청구권 협정 제3조에 따라 양자 협의의 개시를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는 거절했다.
 
  또한 2012년 5월 24일 일본에 강제 동원된 한국인 피해자가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대법원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면서 사건을 하급심으로 돌려보냈다.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역사적인 판결이었지만, 이것은 한국 정부 입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2005년 8월 26일 한일회담 관련 문서를 공개하면서 한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의 국가 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反人道的) 불법 행위와 사할린 잔류 한국인이나 원폭(原爆) 피해자 문제는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했으나 청구권 협정으로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달러에는 보험·예금 등의 개인재산권과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과 더불어 강제 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이 포함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결에 불복한 일본 기업은 2013년 하반기에 대법원에 재상고(再上告)를 했는데, 약 5년 뒤인 2018년 10월과 11월 대법원은 불법적인 식민지 지배 및 침략 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 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 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한일 청구권 협정 교섭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강제 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도 근본적으로 부정했는데, 한국인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 국내에서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일본 사법부도 강제성이나 인권 침해의 실상을 인정하면서도 이 문제는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을 통해 해결되었다면서 보상 청구를 모두 기각한 바 있다.
 
 
  아베, “한국 대법 판결은 ‘있을 수 없는 판단’”
 
  2018년 10월 30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대법원 판결은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판단”이라면서 “의연하게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으며, 고노 다로(河野太郎) 외상도 대법원 판결은 1965년 국교 수립 이후 한일 간의 “우호협력 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본부터 뒤엎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는 1965년의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국제재판을 포함하여 모든 선택지를 시야에 넣고 의연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2017년 5월에 출범한 문재인(文在寅) 정부는 사법부의 판단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며 사법부의 판단은 정부 간 외교의 사안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일본 정부는 2019년 1월 9일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에 따라 외교 당국 간 협의를 요청했으나 한국 정부는 응하지 않았다. 일본은 5월 20일에는 한일 양국과 제3국으로 구성된 중재위원회의 설치를 다시 요구했지만, 한국 정부가 이에도 응하지 않자 7월 19일 제3국만으로 구성되는 중재위원회 설치를 요구하면서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특히 7월 1일 경제산업성은 한국에 대한 수출관리제도의 엄격한 운용 방침을 발표했는데, 한국 정부는 이를 역사 문제를 통상 문제와 결부시킨 부당한 정치적 보복으로 규정했다. 한국에서는 일본제품 불매운동과 일본 가지 않기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한국 정부는 군사 정보의 교류·협력의 절차를 규정한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의 종료를 결정했다. 한·미·일의 협력을 중시했던 미국의 중재 노력으로 지소미아 종료 통보의 효력 정지와 수출관리 당국 간의 정책 대화 재개를 통해 한일 관계가 파국으로 가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尹 정권, 한일 관계 복원
 
  문재인 정부는 2015년 12월 28일의 한일 외교장관 사이의 위안부 합의가 절차와 내용 면에서 ‘중대한 흠결’이 있으나 정부 간의 공식적인 약속이기 때문에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지만,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더구나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원칙을 제시하면서 합의 이행을 위해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의 해산을 결정했다.
 
  일본 정부는 이것은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며 불가역적(不可逆的) 해결’을 확인한 위안부 합의에 반하기 때문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포함하여 한일 간의 재산·청구권 문제는 1965년의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책임을 지고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지배의 합법·불법 여부나 법을 통한 피해자 구제 가능성에 관해 한일 양국 정부와 사법부의 견해가 상반된 상황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당시 역사 문제에서 출발한 한일의 갈등은 경제와 안보 문제로까지 확대되면서 전후 최악이라 불리었지만, 윤석열(尹錫悅) 정부가 2023년 3월 강제 동원 문제와 관련해 제3자 변제안(辨濟案)을 제시하면서 상황은 급반전했다. 즉 대법원 확정판결 원고만이 아니라 계류 중인 소송이 원고 승소로 확정될 경우에도 일본 기업 대신 한국 정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한다는 것이 핵심인데, 일본 정부는 “대법원 판결로 매우 엄중한 상태에 있던 한일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기 위한 것으로 평가”했다.
 
  2023년 3월과 5월 한일 정상의 상호 방문이 12년 만에 이뤄져 셔틀 외교가 복원되면서 안보·경제·사회·문화와 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일 정부 간 대화와 협력이 긴밀해졌으며, 2023년 8월 18일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는 ‘한·미·일 파트너십의 신(新)시대’가 선언되었다. 2023년 12월 한·미·일 국방장관 회의에서는 ‘전례가 없는 깊이와 규모, 범위’의 한·미·일 안보 협력을 “한반도를 포함한 인도태평양과 그 너머 지역의 평화와 안정 확보”를 위한 것으로 규정했다. 나아가, 2024년 7월의 한·미·일 국방장관 회의에서 채택된 한·미·일 안보 협력 프레임워크 협력 각서에는 한·미·일 안보 협력을 제도화하는 데 필요한 기본방향과 정책지침을 제공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日, 계엄 이후에도 한일 관계 중요성 강조
 
  2024년 10월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정권 출범 이후에도 한일 및 한·미·일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그 배경에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의 고도화에 더해 2024년 6월의 북·러 정상회담과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 체결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의 북한군 파병 등을 통한 북·러 군사 협력의 강화 등이 있었다. 2024년 11월 15일 발표된 한·미·일 정상회의 공동성명에서 한·미·일 사무국의 설립에 합의한 데 이어 11월 20일 서울에서 열린 사무국 출범 회의에서는 안보·경제·첨단기술·인적 교류 등의 협력을 통해 한·미·일 협력을 제도화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봤다.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에 의한 비상계엄 선포 이후 한국 정치 상황이 유동화하는 가운데서도 이시바 총리는 현재의 전략 환경을 고려하면 “일한(한일) 관계의 중요성은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2025년 1월 24일 국회 시정방침연설). 특히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한 직후에도 이시바 총리는 “어떠한 정권이 되어도 일한의 협력은 매우 중요”하며 안전 보장 면만이 아니라 일본의 “독립과 평화,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매우 중요”함으로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삼아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한일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4월 4일 중의원 내각위원회).
 
  6월 3일 치러진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 이재명(李在明) 후보가 당선되었다. 선거 과정에서 한미동맹을 토대로 한 국익(國益) 중심의 실용외교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던 이재명 대통령은 ① 경제·안보·인적 교류 등 미래 지향적 한일 협력 관계 지속 ② 한미동맹, 한·미·일 협력의 유지·발전을 위해 한일 간 협의·협력 긴밀화 ③ 과거사 문제 등 민감한 현안 해결 노력 지속 등을 통해 한일 관계의 미래 지향적 발전을 도모하겠다고 밝혔다(《제21대 대통령 선거 더불어민주당 정책공약집》, 73쪽).
 
  과거 일본을 ‘적성(敵性) 국가’로 부르고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일 정책을 ‘굴욕외교’라고 비판했던 이재명 대통령이 일본을 ‘중요한 협력 파트너’로 부르면서 “일관되고 견고한 한일 관계의 토대를 다지겠다”는 마치 전 정권의 정책을 답습이라도 하는 듯한 대변신에 일본 측은 반신반의하고 있는 듯하다.
 
 
  이시바, 정상회담 개최에 의욕
 
2015년 6월 22일 주한일본대사관 주최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조선호텔 앞에서는 ‘한일협정 폐기’를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사진=조선DB
  이시바 총리는 6월 4일 주한일본대사관을 통해 대통령 취임 축하 메시지를 전하면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 국제사회의 다양한 과제에 파트너로서 협력해야 할 중요한 이웃 국가”라면서 한일 관계와 한·미·일 협력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또한 이시바 총리는 ‘가능한 한 빨리’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6월 5일 일본 주요 신문도 사설을 통해 국제회의 등을 이용한 조기 정상회담과 정상 간의 셔틀 외교를 통한 신뢰 구축을 주문했다.
 
  6월 중순과 하순 캐나다와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G7과 NATO 정상회의는 이재명 대통령의 국제외교 데뷔 무대가 될 가능성이 크며 한일, 한미, 나아가 한·미·일 정상회의도 열릴 수 있지만, 짧은 시간에 심도 있는 논의를 할 여유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트럼프 정권이 동맹보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 대국(大國)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상황에서 한일의 협력 공간과 기회, 필요성은 증가했으나, 이시바 총리의 정치 기반은 취약하다. 6월 22일 통상국회 폐막에 맞춰 야당이 내각불신임안을 제출하고 단결하면 통과될 가능성도 있고 이에 대항하여 이시바 총리가 중의원을 해산하면 7월 참의원 선거와 동시에 치러질 수도 있다. 《마이니치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시바 정권 출범 직후인 10월 46%였던 내각 지지율은 중의원 선거에서 소수(少數) 여당으로 전락한 뒤인 11월에는 31%로 급락했으며 2025년 들어와서는 지지율이 20%대 초반에 그치고 있다. 중의원에 이어 참의원에서도 과반수를 유지하지 못하면 이시바 총리가 사퇴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지만, 반대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과반수 획득 시 당분간 국정 선거가 없어 이시바 정권이 장기화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 없는 한일 협력’도 구상해야
 
  돌이켜보면, 아베 정권 시절 일본 측은 볼이 한국 쪽에 있다면서 한일 관계가 최악에 빠진 책임을 한국 쪽에 전가하려 했다. 참의원 선거를 앞둔 2019년 7월 대법원 판결에 대한 문재인 정권의 미온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대한(對韓) 수출 규제 강화로 보복하는 악수를 뒀다.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며 불가역적 해결’을 확인한 위안부 합의에서 일본이 한 약속은 한국 측 재단에 10억 엔을 거출하는 것뿐인 것처럼 여론을 호도(糊塗)했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다.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양국 정부가 협력해서 실시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일본 정부 예산으로 10억 엔을 거출하기로 한 것이다.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서도 재산·청구권 문제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을 확인한 청구권 협정을 위반한 것이라는 것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내세웠을 뿐 강제 동원 피해자와 유족들, 나아가 한국 국민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모습은 부족하다.
 
  2007년 4월 일본 최고재판소가 1972년 9월의 일본과 국교 정상화 당시 중국이 전쟁배상 청구를 포기한 것을 근거로 중국 정부와 국민이 일본 정부와 국민, 법인을 상대로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결하면서도 중국인 피해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고려하여 당사자 간의 자발적 해결을 권고하면서 가해 기업과 피해자와 유족 사이에 ‘화해’가 성립했던 사례를 참고로 해결을 모색할 수는 없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2025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년이지만, 우리에게는 광복 80년, 일본에는 전후 80년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이시바 총리는 각의(閣議) 결정이 필요한 담화 대신 전쟁에 이른 경위를 검증하는 전문가 회의를 설치하고 총리 개인 견해를 담은 메시지를 발표할 것이라는 보도도 있는데, 내용에 따라 역사 문제가 한일 간의 현안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있다. 국제정세의 역사적 전환점에서 안정적인 한일 관계가 일본의 안전과 국익에 중요하다면, 이를 위해 일본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한국과 협의해야 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공통의 동맹국 ‘미국 없는’ 한일 협력도 새롭게 구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총리의 리더십에 기대를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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