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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한국판 뉴딜정책’ 속에 숨은 정치적 속내

“뉴딜은 경제적 면에서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정치적 면에서는 이겨”(애미티 슐래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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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스벨트, 뉴딜정책 통해 지지세력 결집… 공화당 우위의 ‘1896년 체제’ 붕괴시키고 50년간 ‘리버럴 우위의 시대’ 열어
⊙ ‘뉴딜연합’의 핵심 4대 축은 노동자(주로 북부의 노조원), 중산층 자유주의자(리버럴), 남부 백인 농민, 흑인 등 소수 인종
⊙ “뉴딜은 정치전략이자 기획… 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존 갈등을 노동·복지 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경제적 갈등으로 대체”(이철희)
⊙ 親노동정책, 기업 때리기, 적폐수사, 계층 간 갈등 조장, 방송 통한 이미지 메이킹, 사법부 장악 등에서 루스벨트와 문재인 흡사
루스벨트와 ‘잊힌 사람’의 악수를 그린 1930년대의 카툰. 뉴딜연합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문재인 정권이 ‘한국판 뉴딜(New Deal)’을 들고 나섰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22일 비상경제회의에서 “정부가 나서서 5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해 국민에게 제공하겠다”며 “고용창출 효과가 큰 대규모 국가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단지 일자리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혁신성장을 견지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부처에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로서 이른바 한국판 뉴딜을 추진할 기획단을 신속히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10일 취임 3주년 대국민연설에서도 “정부는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국민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겠다”며 “한국판 뉴딜은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하는 미래 선점투자”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의료·교육·유통 등 비대면 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도시와 산업단지, 도로와 교통망, 노후 SOC(사회간접자본) 등 국가기반시설에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을 결합해 스마트화하는 대규모 일자리 창출 사업도 적극 전개하겠다”고 했다.
 
  ‘한국판 뉴딜정책’ 얘기가 나오자 《조선일보》(지난 5월 6일)는 “여권이 추진하는 ‘한국판 뉴딜’이 뉴딜 정책을 계기로 장기집권 토대를 마련했던 미국 민주당의 ‘뉴딜동맹’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뉴딜의 정치적 본질
 
  현 집권세력은 ‘뉴딜동맹(혹은 뉴딜연합)’에 대해 진작부터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 예(例)가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제20대 국회, 비례대표)이 2019년 펴낸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라는 책이다. ‘미국의 뉴딜연합(1928~1936)’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이 책은 미국의 정치학자인 크리스티 앤더슨 시러큐스대학교 맥스웰스쿨 명예교수의 《The Creation of a Democratic Majority, 1928~1936》을 번역한 책이다.
 
  이 책에서 이철희 의원은 “뉴딜은 진보를 표방한 정치세력이 다수 연합을 형성하는 데 성공하고, 그 결과 큰 변화를 이루어낸 정치전략이자 기획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집권한 진보가 해야 할 일은 권력과 예산으로 뒷받침되는 정책을 통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삶을 개선하고, 그들이 진보의 정치적 기반이 될 수 있도록 결속하는 한편, 새로운 갈등・균열 또는 프레임을 설정해 정치・사회적 질서를 재편함으로써 다수 연합을 구축하는 것”이라면서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실업자를 구제하는 것으로 뉴딜을 받아들이는 수준의 이해로는 결코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럼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어떻게 ‘뉴딜연합’을 만들어냈을까? 당시 미국과 오늘날의 한국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를까?
 
 
  ‘잊힌 사람’
 
  “Yes, You Remembered Me(네, 당신은 저를 기억해주셨습니다).”
 
  청바지 작업복 차림의 사내가 한 손으로는 곡괭이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안경을 쓴 사내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내의 바지에는 ‘The forgotten Man’, 즉 ‘잊힌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안경을 쓴 사내의 가슴에는 ‘F.D.R’이라고 적혀 있다. F.D.R은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의 약자(略字)다. F.D.R은 뉴딜 관련 공약 내지 법령이 적혀 있을 법한 종이를 손에 들고 있다.
 
  이상은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카툰이다. 이 카툰은 뉴딜연합의 요체(要諦)를 잘 보여준다. 흔히 뉴딜연합의 핵심 4대 축(軸)으로 노동자(주로 북부의 노조원), 중산층 자유주의자(리버럴・Liberal), 남부 백인 농민, 흑인 등 소수(少數) 인종을 꼽는다. 사진 속의 ‘잊힌 사람’은 루스벨트가 포섭하려고 하는 노동자 내지 농민 등 소외계층들을 상징한다. 말끔한 신사복 차림의 F.D.R은 루스벨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중산층 이상의 리버럴 지식인을 상징하기도 한다. ‘잊힌 사람’이 흑인 노동자나 농민이 아니라 백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도 흥미롭다. 이는 루스벨트 시기의 미국 민주당은 자신들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남부를 의식해 흑인 등 소수 인종을 아직 뉴딜연합의 주력군(主力軍)까지 끌어올리지는 않았던 사정을 시사(示唆)한다. 물론 이 시기는 아직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기 전이기도 하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만들어낸 뉴딜연합이라는 정치지형이 완전히 흔들리고, 미국의 정치지형이 다시 한 번 근본적인 변혁을 겪은 것은 1980년 로널드 레이건에 이르러서였다. 흔히 뉴딜연합이 30년을 갔다고 얘기하지만, 사실 반(半)세기 가까이 유지된 것이다.
 
  사실 루스벨트는 미국의 정치학자 프레드 그린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노동자, 노동조합 및 소수민족들의 강력한 연합의 리더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부계(父系)로는 18세기 초, 모계(母系)로는 17세기 초 미국의 모태(母胎)가 되는 플리머스 식민지 개척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명문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대지주이자 철도 회사 경영자였다. 12촌 아저씨는 제26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 미국판 귀족집안인 셈이다. 루스벨트는 명문 사립고등학교와 하버드대학을 나와 변호사로 일하다 해군차관, 민주당 부통령 후보, 뉴욕 주지사를 거쳐 1932년 제32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뉴딜의 등장
 
뉴딜정책의 대표적 사업 중 하나인 공공사업청의 공공근로는 지속적인 ‘좋은 일자리’는 아니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루스벨트가 1932년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잘 알려진 것처럼 1929년 10월 29일 미국 월스트리트의 주가(株價) 폭락으로 촉발된 경제대공황 때문이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1932년 11월 대선에서 미국 국민들은 당시 뉴욕 주지사던 루스벨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루스벨트는 투표율 기준으로 57%, 선거인단 투표 기준으로는 89%(48개 주 중 42개 주에서 승리)의 압승을 거두었다. 정부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이탈 투표’의 전형이었다. 1997년 외환(外換)위기의 충격 속에서 김대중(金大中) 후보가 당선된 것과 흡사했다.
 
  루스벨트는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후 후보수락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러분에게 미국 시민들을 위한 뉴딜을 약속합니다. … 저를 도와주십시오. 단지 표를 더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를 주인에게 돌려주는 개혁에 승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뉴딜’은 정치적 수사(修辭)에 가까운 것이었지, 구체적인 정책 콘텐츠를 갖고 있지는 못했다. 다만 후일 그가 대통령이 된 후 실시한 일련의 뉴딜정책들은 흔히 ‘3R’로 요약된다. ‘구호(Relief・실업자 및 빈곤층에 대한 구호)’ ‘회복(Recovery・재정 지출과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한 경제회복)’ ‘개혁(Reform・시장에 대한 정부 규제의 강화, 친노조 정책, 사회보장제도의 확충 등)’이 그것이다.
 
  1933년 3월 취임한 루스벨트는 바로 의회에 특별회기 개최를 요청했다. 이후 100일 동안 미국 의회는 대공황 극복과 관련된 일련의 법률안들을 통과시켰다. 민주당 의원들은 법안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통과!”를 외쳐댔다. 그중 ‘뉴딜연합’의 형성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정책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일자리 창출 등과 관련된 정책들이 있다.
 
  전국산업부흥법(NRA)을 제정하고, 이 법에 따라 공공사업청(PWA)을 만들어 연방정부 주도의 대규모 SOC사업 등을 벌였다. 문재인 정부가 ‘한국판 뉴딜’을 통해 대규모 SOC사업을 예고하는 것과 유사하다. 전국산업부흥법에 따라 연방긴급구호청(FERA)도 설립되어 실업자・극빈자에 대한 구호도 실시했다.
 
  민간자원보존단(CCC)을 설립해 17~25세 청소년들을 준(準)군대식으로 편성해 재조림(再造林)・치수(治水)사업 등에 투입해 일자리를 제공했다. 문재인 정부가 실시하는 청년일자리 사업, 거리 청소 등 노인일자리 사업 등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농민들을 겨냥한 정책도 잊지 않았다. 정부 재정으로 농민들의 유휴(遊休) 농지와 잉여 농축산물을 매입해 농축산물 가격을 끌어올리는 사업을 담당하는 농업조정국(AAA)을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테네시 계곡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해 전력(電力) 및 비료 생산, 국민휴양지 조성 등을 담당하는 테네시밸리개발공사(TVA), 농민들의 대출(모기지)을 지원하는 농장모기지자금지원법 등도 농민층, 특히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자들인 남부 농민들의 지지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주택소유자자금대부공사(HOLC)는 예금 및 주택저당권을 보호함으로써 서민층의 지지를 끌어냈다.
 
 
  루스벨트의 ‘소주성’
 
  미국의 역사가인 케네스 데이비스는 “뉴딜정책은 1776년(독립혁명)과 1860년(남북전쟁)의 경우처럼 미국에 일대 전환기를 마련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방정부의 혁명적 변환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제까지는 미국의 보통 사람들에게만 그 영향력이 국한되었던 정부가 이제는 누구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기관이 된 것이다”라고 했다.
 
  물론 부작용도 있었다. 뉴딜정책으로 만들어낸 일자리들은 ‘좋은 일자리’는 아니었다. 《잊혀진 사람》의 저자 애미티 슐래스는 “뉴딜정책으로 만들어진 비상 일자리들은 몇 년이 아니라 몇 달 동안만 지속되는 단기적인 일자리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일자리에 정착할 수 없었다는 점도 문제였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자리들은 어떤 정치인의 관심이 지속되는 동안, 즉 몇 달 동안만 존재했다”고 비판한다. 그는 또 뉴딜정책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대규모 SOC사업들에 대해서도 “사실 인프라 지출이란 우리가 선심성 정부보조금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더 그럴듯한 이름인 경우가 많다”고 꼬집는다.
 
  뉴딜정책의 대표적 산물 중 하나인 전국산업부흥법은 공공사업 외에도 생산, 유통, 최저임금, 최저 근로시간 등 경제 전반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가능하게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을 감당할 수 없는 사업주들은 해고로 대응했다. 인디애나주의 한 여성은 ‘최저임금 인상 때문에 7년5개월 동안 일하던 직장에서 해고됐다’고 하소연하는 편지를 루스벨트에게 보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연구원들은 “‘명목임금을 전반적으로 올려서’ 국가 소득을 증가시키려는 생각, 다시 말해 진정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비판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소득주도성장(소주성)’ 정책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이 이미 1930년대 미국에서 나타난 셈이다.
 
 
  와그너법
 
1935년 8월 14일 루스벨트는 사회보장법에 서명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하지만 뉴딜정책에도 불구하고 경제 회복은 지지부진했다. 《잊혀진 사람》의 저자 애미티 슐래스는 “루스벨트는 경제적 측면에서 일을 추진했지만 효과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경제학을 포기하고 자신이 더 잘 아는 분야인 정치에 집중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대통령은 승부수를 띄웠다. 만약 자신의 정치적 본능에 따라 특정 유권자 집단을 위해 몇몇 임시법안을 영구적인 법으로 단호히 전환시킨다면 재선에서 승리할 것 같았다. 그는 농부, 대규모 노조, 연금 수령자, 참전군인, 그리고 아마도 여성과 흑인에게 초점을 맞췄다.”
 
  1935년 공공사업청(PWA)보다 작은 규모의 공공사업을 담당하는 공공사업추진청(WPA)이라는 기관이 신설됐다. 공공사업청은 2만5000달러 이상, 공공사업추진청은 그 이하의 사업을 담당했다. 공공사업추진청에서는 실직 상태인 작가, 기자, 사진작가, 극작가, 배우 등을 고용해 뉴딜정책의 추진 과정을 기록・홍보하는 역할을 맡겼다. 이는 지식인, 문화예술인 등을 정부가 포섭하는 계기가 됐다. 뉴딜 시대의 참상을 전하는 유명한 사진 가운데 상당수는 이때 공공사업청의 발주를 받은 사진작가들이 남긴 것이다. 특히 연극인들은 지방을 순회하면서 뉴딜정책으로 새 희망을 얻게 된 노동자・농민・서민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뉴딜정책에 비판적인 야당인 공화당과 ‘기득권 세력’을 ‘적폐(積弊)’로 모는 연극을 많이 공연했다. 마치 오늘날 영화진흥위원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은 한국 영화인과 문화예술인들이 좌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많이 생산하는 것과 비슷하다.
 
  같은 해 뉴딜정책 가운데 뉴딜연합의 형성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전국노동관계법(와그너법)이 제정됐다. 와그너법은 노동자들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하는 것을 넘어 클로즈드숍(closed shop・노동자의 노조 가입을 고용조건으로 하는 노사 간의 협정)을 규정하고 있었다. 이 법이 노조에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부여한 것은 물론이다. 연합광산노조 위원장 존 L. 루이스는 이 사실을 재빨리 깨닫고 보수적인 미국노동총연맹(AFL)을 떠나 산업별노조협의회(CIO)를 창설했다. 와그너법은 노동자를 뉴딜연합으로 유인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루스벨트 정권의 친노동정책은 문재인 정권이 온갖 불법과 떼쓰기, 폭력에도 불구하고 민노총에 유화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과 흡사하다.
 
 
  “이것은 사회주의 맛만 보는 것 아닙니까?”
 
앤드루 멜런.
  사회보장제도의 확충 역시 중요했다. 의회에서 사회보장법안이 논의될 때 상원의원 토머스 고어는 프랜시스 퍼킨스 노동장관(미국 최초의 여성 각료)에게 “이것은 사회주의 아닙니까”라고 따졌다. 퍼킨스는 이렇게 대꾸했다.
 
  “이것은 사회주의 맛만 보는 것 아닙니까?”
 
  1936년 가을, 수백만명의 미국인들은 신설된 사회보장위원회로부터 ‘ISC-9’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이 통지서는 노동자와 사용자가 연간 3000달러 한도 내에서 매달 1달러당 3센트씩을 사회보장계좌에 적립하게 될 것이라고 알렸다. 이 통지서는 말미에 “여러분은 늙어 은퇴할 때부터 평생 매달 정부의 수표를 받게 됩니다. 이 수표는 여러분이 누릴 권리입니다”라고 선언했다.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마치 문재인 정부가 총선을 앞두고 코로나19 지원금 살포를 약속해 사실상 노인 등의 표를 매수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연합’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편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적(敵)’도 만들어내야 했다. 여기서 ‘적’은 당연히 ‘가진 자’들이고 기업이었다. 자신이 부호의 아들이면서도 루스벨트 대통령은 “46명의 백만장자가 부당한 초과 이윤을 향유해서 미국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예전에는 받아들여지던 사악한 짓이 이제는 쉽게 묵과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동했다.
 
  대표적인 ‘적폐’로 지목된 사람은 전 재무부 장관 앤드루 멜런이었다. 앤드루 멜런은 재무부 장관으로 일하기 전 철강・조선(造船)・철도 사업 등에 투자해 돈을 번 당대 최고의 부호 중 하나였다. 루스벨트 정부는 출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멜런을 탈세(脫稅) 혐의로 기소했다. 멜런의 후임인 헨리 모겐소 재무장관은 “이번 소송은 멜런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특권층 부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는 자리”라면서 멜런에 대한 기소를 독려했다. 멜런은 결국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전직 국가정보원장, 국방부 장관 등이 줄줄이 감옥으로 가고, 문재인 정부의 보훈처가 박근혜 정부의 보훈처장을 고발한 것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애미티 슐래스는 이런 ‘적폐 재판’이 경제적・도덕적으로 뉴딜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수사’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소위 ‘촛불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함인 것과 비슷하다.
 
  멜론을 비롯한 부자들에 대한 세무조사와 재판은 뉴딜정책으로 비어가는 국고(國庫)를 채우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루스벨트 대통령도 1937년에 납세신고서를 작성하면서 재무부가 기소한 부자들과 흡사한 방식으로 불성실한 납세신고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헨리 모겐소 재무장관은 ‘기업 때리기’에도 앞장섰다. 경기회복이 지연되면서 세수(稅收)가 부족해지자 그는 기업들로부터 돈을 쥐어짜 내기 위해 ‘내부유보세(undistributed profits tax)’라는 것을 고안해냈다. 세금을 내든지, 아니면 배당금이나 투자의 형태로 돈을 풀라고 기업을 압박한 것이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나 좌파 시민단체들이 걸핏하면 거론하는 사내유보금에 대한 초과내부유보세와 같은 발상이다.
 
 
  노변담화
 
1944년 12월 24일 대국민 방송을 하는 루스벨트. 루스벨트는 라디오라는 매체를 능숙하게 활용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1936년 11월 대선에서 루스벨트는 공화당의 알프레드 랭던을 상대로 득표율에서는 60.8%대 36.5%,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523명대 8명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1932년 대선에서 루스벨트가 이긴 것은 경제대공황 때문에 뜻하지 않은 타격을 받은 유권자들이 후버 정권을 심판했기 때문이다. 이런 유의 투표를 ‘이탈 투표’라고 한다. 하지만 1936년 대선에서 경제회복이 지지부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가 승리한 것은 언급한 뉴딜정책의 결과 뉴딜연합이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루스벨트의 인간적인 매력, 특히 그의 탁월한 소통 능력이 큰 도움이 됐다. 루스벨트는 취임 초부터 ‘노변담화(爐邊談話)’라고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주요 이슈들을 국민들에게 설명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소통 방법이었다.
 
  애미티 슐래스는 “루스벨트와 다른 사람들은 라디오라는 매체가 구(舊)정치 현실과는 분리된 정말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유권자들이 예상보다 경제회복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현실 대신 루스벨트의 음성과 메시지에 집중한다면 선거에서 민주당이 선전(善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반면에 공화당 정치인들은 새로운 매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방송에서, 유세장에서, 공화당 정치인들은 기왕에 해오던 것처럼 웅변조의 장광설을 토해냈다. 국민들은 라디오에서 조곤조곤하게 현안을 설명하는 루스벨트와 비교하면서 공화당 정치인들은 낡았고, 과격하고,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중파 방송에서 ‘국민과의 대화’류의 프로그램, 유튜브, 소셜미디어(SNS) 등을 적당히 섞어가면서 미소 띤 얼굴로 ‘소통’하는 데 반해, 미래통합당 정치인들은 성난 얼굴로 외쳐대고, ‘태극기 부대’는 군복 입고 군가를 꽝꽝 틀어대서 ‘틀딱’ 소리를 들으며 외면받는 현실과 흡사하다.
 
  애미티 슐래스는 이를 두고 “뉴딜은 경제적인 면에서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정치적인 면에서는 이기고 있었다”고 말한다.
 
  루스벨트는 운(運)도 좋았다. 1934년과 1935년에 미국을 덮친 가뭄은 위기사태하에서는 역시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강하게 심어주었다. 루스벨트는 1940년, 대통령 임기는 2기(期) 8년에 한(限)한다는 국부(國父) 조지 워싱턴 이래의 불문율을 깨고 3선에 출마했다. 이미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시점이었다. 미국으로 전운(戰雲)이 다가오고 있는 위기상황에서 국민들은 다시 한 번 루스벨트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루스벨트는 전쟁 중이던 1944년에도 어렵지 않게 4선 고지를 점령했다. 마치 4・15 총선을 앞두고 코로나19(우한폐렴)가 발생하는 바람에 국민들이 문재인 정부의 ‘위기관리능력’에 의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코로나19 지원금이라는 명목으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마음 놓고 돈을 뿌릴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한 것과 비슷하다.
 
 
  사법개혁안
 
  뉴딜정책에 대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보수적인 연방대법원은 1935년 5월 뉴딜정책의 핵심인 전국산업부흥법에 대해 위헌(違憲)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특별한 상황에서는 특별한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헌법에 준거(準據)한 권한 외의 조치를 정당화시키려고 시도하면 안 된다. 특별한 상황 때문에 새로운 헌법상의 권한이 생기거나 기존 권한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연방대법원은 모두 11건의 뉴딜 관련법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여기에 화가 난 루스벨트는 연방대법원을 물갈이하기 위해 ‘사법(司法)개혁’을 들고나왔다. 연방대법관을 9명에서 최대 15명까지 늘리고, 70세가 넘은 대법관의 수만큼 새 법관을 추가로 임명하자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장기인 노변담화를 통해 “미국의 정부 형태는 헌법에 정해진바 삼두(三頭)체제”라면서 “이제 말 한 마리(연방대법원)가 협력하지 않고 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국민들은 연방대법원이라는 말이 다시금 협력하게 만들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루스벨트 지지자들 내부에서조차 비판이 쏟아져나왔다. 상원 사법위원회는 민주당 소속 의원이 반수를 넘고 있었음에도 루스벨트의 법원개혁법안을 거부했다. 상원 사법위원회는 “매우 단호하게 거부하므로 이와 유사한 법안은 미국의 자유로운 시민들이 뽑은 자유로운 의회에 다시는 상정되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법원개혁법안의 좌절은 루스벨트 임기 중 거의 유일한 정치적 패배였다.
 
 
  ‘1896년 체제’
 
  이렇게 해서 형성된 뉴딜연합은 미국 정치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그 이전까지 미국 정치를 지배해온 구조는 ‘1896년 체제’였다.
 
  남북전쟁 이후인 1870~1890년대에 미국은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번영의 시대를 구가(謳歌)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도금시대(鍍金時代・The Gilded Age)라고 비아냥거리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졸부(猝富)들이 득세하는 천민(賤民)자본주의의 시대이기도 했다. 번영에서 소외된 가난한 농민들은 인민당을 결성해 개혁을 요구했다. 이 당의 지지자들을 포퓰리스트(populist)라고 했다. 인민당은 1892년 대선에서 100만 표를 획득할 정도로 한때 기세를 떨쳤다.
 
  이에 대해 공화당・민주당 같은 기성(旣成)정당이 지역주의로 맞서면서 산업화된 동북부 지역은 공화당이,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남부는 민주당이 양분(兩分)하는 정치구도가 형성됐다. 사실 이런 구도는 남북전쟁 직전부터 이어져온 것이었는데, 1896년에 이르러 완전히 고착화된 것이다.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돼가고 있던 상황에서 ‘1896년 체제’는 공화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체제였다. 공화당은 성장해가는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구할 수 있었다. 반면에 민주당은 쇠락해가는 농업에 바탕을 둔 남부라는 협소한 지역적 기반에 의지해야 했다. 마치 1987년 이후 민주당(민주당의 전신이던 정당들 포함)이 오랫동안 낙후한 농업 지역인 호남의 지지에만 의지하는 지역당으로 고착한 상황과 흡사하다.
 
  1896년 체제하에서 민주당이 대선에서 승리한 것은 1912~1920년 우드로 윌슨 집권 기간이 유일했다. 그나마도 1912년 대선에서 공화당이 윌리엄 태프트의 공화당과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진보당으로 분열한 어부지리(漁父之利) 덕분이었다. 마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가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것은 보수세력이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로 분열한 덕분인 것과 유사하다.
 
 
  뉴딜연합의 출현
 
《잊혀진 사람》의 저자 애미티 슐래스.
  ‘1896년 체제’ 아래서 만년 야당이었던 미국 민주당은 1920년대부터 이러한 구도를 깨기 위한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남부를 기반으로 하되, 급속히 늘어가고 있는 노동자와 이민자 등 도시빈민들을 포섭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32년 대공황이라는 우연한 사변(事變)을 계기로 정권을 잡았을 때만 해도 민주당은 정권운영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됐다. 뉴딜정책은 일관된 체계를 가진 종합전략이 아니었다. 미국의 역사가 케네스 데이비스는 “루스벨트의 생각은 ‘한 가지 방안을 만들어 해보고 안 되면 또 다른 방안을 찾자’는 것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일련의 정책들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정치지형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철희 민주당 의원은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었는가》에서 “미국 민주당은 이 우연한 승리(1932년 대선 승리)를 다수파 형성의 계기로 잘 활용했다. 다시 말해, 공화당에 대한 혐오감에 편승해 윌슨 시기처럼 잠깐 집권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사회・경제적 노선으로 정치질서를 재편하는 데 성공했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존 갈등을 노동・복지 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경제적 갈등으로 대체한 덕분이다”라고 설명한다.
 
  애미티 슐래스는 《잊혀진 사람》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노동자, 고령자, 농부, 노조원 등 많은 유권자층이 포함되도록 이익집단 정치를 좀 더 포괄적으로 체계화했다. 루스벨트가 예전에는 시민 개개인이나 고립된 일부 그룹의 형태로 존재하던 유권자들을 이익단체화하고 그 이익단체들을 위해주자, 그들은 루스벨트에게 투표했다”고 설명한다.
 
  이런 ‘잊힌 사람’들만 뉴딜연합에 가담한 것은 아니다. 대도시의 젊은 중산층 엘리트와 지식인들도 자신들의 ‘진보적’ 이상(理想)을 실현해보려 뉴딜연합에 참여했다. 이들을 흔히 ‘뉴딜 보이(New Deal Boy)’라고 한다. 미국의 ‘리버럴’이 탄생한 것이다.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산업계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노동집약적인 면방직 산업 같은 낡은 산업계는 공화당을 계속 지지했지만, 자본집약적・대외지향적인 석유・투자・해운・자동차 산업 등 신흥산업 분야에서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성향이 높았다. 이들은 최저임금 인상 등을 감내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고, 정부의 지원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중화학공업을 비롯한 대기업 부문 기업가들은 보수적인 데 비해 투자금융・벤처 종사자들은 민주당 지지 성향인 것과 흡사하다.
 
  이철희 민주당 의원은 “진보가 다수파가 되려면 기업가, 재계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며 이렇게 주장한다.
 
  “이는 기존 경제질서를 이끄는 기득 기업가들의 이해를 보장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시대 흐름에 맞춰 새롭게 등장하는 신생 기업・산업들의 등장과 성장을 독려함으로써 미래를 선도하고, 공정한 경제 시스템을 통해 경제적 과실이 고루 나눠지도록 함으로써 성장을 일궈내는 포용체제를 구축해야 한다.”(《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중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판 뉴딜’을 주창하면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혁신성장’ ‘디지털 인프라 구축’ ‘의료·교육·유통 등 비대면 산업 집중 육성’ 등을 강조하는 것도 이철희 의원이 주장하는 ‘새롭게 등장하는 신생 기업・산업들의 등장과 성장을 독려’와 맥(脈)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레이건 혁명’
 
  루스벨트는 네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5년 3월 세상을 떠났지만, 뉴딜연합은 죽지 않았다. 민주당은 뉴딜연합에 힘입어 1932~1968년 10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7번 승리했다. 이 기간 내내 민주당은 의회에서 다수파였다.
 
  공화당이 대선에서 승리한 것은 1952년, 1956년, 1968년 세 번이었다. 앞의 두 번의 승리는 공화당이 아니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라는 ‘전쟁 영웅’의 승리였다. 아이젠하워는 딱히 공화당 성향은 아니었지만, 한 정당이 장기 집권하는 것은 미국 민주주의에 해(害)가 된다는 생각에서 공화당을 선택했다. 1968년 리처드 닉슨이 승리한 것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환멸 덕분이었다. 아이젠하워와 닉슨 시대는 간판만 공화당이었지, 경제·사회 정책의 큰 흐름은 리버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꾼 사람이 1980년 대선에서 승리한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그는 루스벨트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잊힌 사람’들을 발견해서 새로운 연합을 구축(構築)했다. 그들은 바로 리버럴 시대에 소외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뉴딜 이후 계속 정부의 역할이 확장되는 바람에 과중한 세금 부담을 지면서도 그 혜택은 받지 못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 리버럴 정권 때문에 미국의 전통적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자들, 연방정부보다는 주(州)정부의 권한을 우선시하는 전통이 강한데다가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 이후 민주당이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남부의 백인들이 바로 레이건의 ‘잊힌 사람들’이었다.
 
  ‘레이건 혁명’ 이후 40년 동안 공화당은 대선에서 6번, 민주당은 4번 승리했다. 그리 큰 차이는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시대의 큰 조류(潮流)는 보수주의・신자유주의가 지배했다.
 
  2016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는 레이건의 연장선상에서 또 다른 ‘잊힌 사람들’을 발견했다. 힐빌리(hillbilly), 즉 쇠락한 공업지대(rust belt)에 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백인 하층민이 바로 그들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자 놀란 미국의 리버럴들은 “미국에도 파시즘이 도래했다”고 법석을 떨었다.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의 《폭정》,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의 《파시즘》 등이 대표적이다.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트럼프의 재선 가도(街道)에 먹구름이 끼었다고는 하지만, 설사 트럼프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트럼피즘(Trumpism)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뉴딜연합 출현 당시와 흡사
 
  앞에서도 틈틈이 언급하기는 했지만 지금의 한국은 1930년대 미국에서 뉴딜연합이 만들어질 때와 여러 가지로 흡사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최순실 사태, 박근혜 탄핵이라는 우연한 상황에서 집권한 것은 루스벨트가 대공황이라는 상황에 힘입어 당선된 것과 비슷하다.
 
  한국은 70년 역사에서 12년(1997~ 2007년, 2017년~)을 제외하면 보수 우위였는데, 이는 루스벨트 집권 이전 30년간 공화당 우위가 계속됐던 것과 흡사하다. 이 기간 중 한국과 미국의 민주당 모두 ‘불임(不姙)정당’ 취급을 받았던 것도 비슷하다. 더불어민주당은 전통적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낙후된 호남을, 미래통합당은 공업화된 영남을 기반으로 해온 것도, 미국 민주당은 남부, 공화당은 북부를 기반으로 했던 것과 비슷하다.
 
  2017년 이후 상황을 보면 뉴딜연합이 출현하던 무렵의 상황과 더욱 흡사하다. ▲더불어민주당과 민노총, 시민단체들과의 동맹 ▲‘적폐청산’을 앞세운 갈등 조장 ▲사법부 및 검찰 장악 ▲소셜미디어나 방송을 통한 대통령의 이미지 메이킹 ▲경제위기 극복을 핑계로 한 퍼주기 복지 ▲정부 예산으로 지식인・문화예술인 포섭 ▲벤처・투자금융 등 첨단산업 종사자들의 좌편향 등이 그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
 
  물론 다른 점도 많다. 첫째, 미국에는 오랜 ‘리버럴의 시대’를 거치면서도 국민들의 의식 저변에는 앵글로색슨 특유의 자유정신, 개척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레이건은 그 부분을 호소력 있게 건드림으로써 정치지형에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그런 자유의 전통이 없다.
 
  둘째, 제2차 세계대전 후 ‘리버럴 전성시대’에는 경제적으로 미국에 도전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미국은 세계의 공장이었다. 이런 경제력 덕분에 미국은 복지 확대가 가능했다. 지난 수십 년간 경제적으로 많이 쇠락했다고는 하지만 미국은 달러 패권(覇權)으로 여전히 세계경제를 좌우하고 있다.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돈을 찍어낼 수 있는 나라다. 반면에 지금 한국은 박정희 정권 시절 건설한 기간(基幹)산업들이 한계에 도달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은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돈은 글자 그대로 해외에 나가면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복지에 대한 요구는 커지고 있지만, 돈이 나올 곳이 없다.
 
  셋째, 미국 정치인들은 민주당 정치인들까지 루스벨트의 대법원 장악 기도에 저항할 정도의 양식(良識)이 있었다. 한국의 현 집권세력과 그 지지자들에게 그런 양식이 없다는 것은 조국(曺國)사태, 방송・사법부・선거관리위원회 장악 등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미국의 뉴딜세력에게는 미국의 민주공화정, 헌법질서 자체를 파괴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집권세력 가운데 상당수는 대한민국에 적대적인 주사파(主思派) 출신이기 때문이다.
 
  넷째, 국제적으로 미국에는 냉전(冷戰) 시대 소련 외에는 위협세력이 없었다. 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캐나다나 멕시코는 미국에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하는 나라였다. 반면에 한국 주변에는 우리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전체주의 국가인 북한과 중국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한국판 뉴딜’을 앞세워 삶이 고단하고 힘든 유권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면서 ‘주류(主流)세력 교체’에 나서고 있다. 이에 대해 방어선을 쳐야 할 보수 정당은 지리멸렬 상태고, 우파 시민사회는 이런저런 이유로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 있다.
 
 
  진짜 ‘잊힌 사람’
 
윌리엄 섬너.
  뉴딜연합 출현에서부터 ‘레이건 혁명’까지는 거의 5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그 기간에 ‘리버럴 시대’에 대한 피로감이 축적되고, 그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보수 이념을 정비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보수운동이 전개됐다. 역사는 대한민국에 그만한 시간을 허락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잊힌 사람(the forgotten man)’을 생각하게 된다. 원래 잊힌 사람은 대공황이 시작되기 50년 전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라는 예일대학교 철학 교수가 만들어낸 개념이었다.
 
  “A라는 사람이 D가 고통받고 있는 어떤 잘못된 일을 발견하자마자, B와 여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A와 B는 이러한 잘못된 상황을 고치고 D를 돕기 위해 법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 법은 항상… A와 B, 그리고 C가 D를 위해 무슨 일을 할지 명시한다.”
 
  하지만 C의 경우는 어떻게 되었나? A와 B가 D를 돕기로 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잘못된 것은 C를 개입시킨 법이다. C는 잊힌 사람이고, 비용을 부담하는 사람이며, ‘절대 고려 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A의 자리에 더불어민주당, B의 자리에 정부, D의 자리에 노동자, 농민, 실업자 등을, 그리고 C의 자리에 유리지갑을 가진 평범한 납세자인 자신을 대입시켜 보면 이해가 바로 될 것이다. 즉 루스벨트는 원래의 ‘잊힌 사람’의 개념을 완전히 왜곡해버린 것이다. 섬너가 말한 ‘잊힌 사람’은 C였지만 루스벨트의 ‘잊힌 사람’은 D로 둔갑해버렸다.
 
  《잊혀진 사람》의 저자 애미티 슐래스는 “루스벨트 버전의 ‘잊힌 사람’들을 위한 루스벨트의 정치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다. ‘잊힌 사람’에게 구호의 손길을 제공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권은 희생양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업인들과 기업계가 표적이 되었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잊힌 사람, 즉 유권자 D는 섬너의 원래 잊힌 사람 C와 영원히 싸우게 되었다”고 말한다.
 
  ‘한국판 뉴딜연합’ 아래서 죽어나는 것은 C, 즉 유리지갑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 될 것이다. ‘한국판 뉴딜연합’이 지배하는 세상은 C가 A, B, D에게 영원히 착취당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진짜 잊힌 사람’을 각성시키고 조직화하는 것이야말로 ‘한국형 뉴딜연합’에 대한 유일하고도 확실한 방파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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