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 후 장충동 외무부장관 공관에서 퇴거 거부, 3개월간 쿠데타軍과 同居
⊙ 1965년 병원에서 만난 張勉, “鄭一亨 외무장관이 崔慶祿 前 陸參총장과 손잡고 쿠데타한 것으로
생각”
⊙ 1978년 軍 출신 여당의원들의 청와대 술자리 합석, 朴正熙 대통령에게 “유신은 잘못”이라고 직언
鄭大哲
⊙ 69세. 서울대 법대 졸업. 美미주리대 정치학 박사.
⊙ 제9·10·13·14·16대 국회의원, 평화민주당 대변인·同정책위 의장, 국회 문공위원장, 민주당 최고위원,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同대표최고위원 역임.
現 민주당 상임고문.
⊙ 1965년 병원에서 만난 張勉, “鄭一亨 외무장관이 崔慶祿 前 陸參총장과 손잡고 쿠데타한 것으로
생각”
⊙ 1978년 軍 출신 여당의원들의 청와대 술자리 합석, 朴正熙 대통령에게 “유신은 잘못”이라고 직언
鄭大哲
⊙ 69세. 서울대 법대 졸업. 美미주리대 정치학 박사.
⊙ 제9·10·13·14·16대 국회의원, 평화민주당 대변인·同정책위 의장, 국회 문공위원장, 민주당 최고위원,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同대표최고위원 역임.
現 민주당 상임고문.
조선 말 중국과 무역을 하면서 재산을 모은 증조할아버지(鄭元模)는 진남포 앞바다에 있는 젯섬(猪島)에서 수백 명의 의병(義兵)을 양성했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는 뜻을 펴기도 전인 1905년 콜레라로 돌아가셨다. 이어 할아버지(鄭基贊)도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진남포로 이사했다. 할머니는 이곳에서 김용겸(金用謙·김일엽 스님의 아버지)이라는 분에게 개가(改嫁)했다. 이후 우리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 집안이 됐다.
아버지가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중학교)에 다닐 때에 3·1운동이 일어났다. 동료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아버지는 일주일 동안 유치장 신세를 졌다. 유치장에서 나온 아버지를 맞으며 할머니는 “장하다”면서 얼싸안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를 거쳐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35년 미국 드류대학교에서 철학박사(사회학 전공) 학위를 받고 귀국한 아버지는 연희전문학교의 교수직을 마다하고 평양에서 개척교회를 세웠다.
유난히 큰 배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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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봄 신혼 시절의 부모님. 왼쪽부터 할머니(한은총), 아버지(정일형), 어머니(이태영). |
이듬해 8월 아버지는 서울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시절 아버지는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선생의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잡혀가 고초를 겪은 것을 시작으로 일제(日帝)에 맞서기 시작했다. 이후 아버지는 창씨개명(創氏改名), 신사참배(神社參拜), 그리고 기독교의 친일화(親日化)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면서 수시로 감옥을 들락거렸다. 아버지는 감신대 교수 7년 동안 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 시절 어머니는 누비이불 행상이나 구멍가게를 하면서 아버지의 옥바라지와 생계를 꾸렸다.
1944년 동짓달 새벽 구멍가게로 향하던 어머니는 갑작스럽게 산통(産痛)을 느꼈다고 한다. 다행히 한 과부 할머니가 어머니를 발견하고 자기 집으로 옮겼다. 어머니는 그 집 온돌방에서 사흘 만에 나를 낳았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외숙모가 나를 받았는데, 가위가 없어 외숙모가 이로 탯줄을 끊었다고 한다. 때문에 내 배꼽은 유난히 크다.
광복(光復) 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소원을 묻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첫째, 잘 드는 가위를 갖고 싶어요. 지난 몇 년 동안 누비이불을 만들면서 손이 아플 때마다 잘 드는 가위가 그렇게 갖고 싶었어요. 둘째, 재봉틀을 갖고 싶어요. 남들은 드륵드륵 기계소리를 내며 단숨에 누비이불을 만드는데, 나는 손으로 해도해도 끝이 없는 누비질을 했어요.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소리가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였어요.
셋째, 늦었지만 법학 공부를 해보고 싶어요. 당신의 공판을 지켜보면서 해방된 우리나라에서 억울하게 법정에 서고 죄 없이 형(刑)을 사는 일만은 막아보고 싶어요.”
어머니의 한(恨)을 새삼 깨닫게 된 아버지는 그 후 외국에 나갈 때마다 좋은 가위를 기념품으로 사가지고 왔다. 또 기회가 될 때마다 재봉틀을 사 와서 좋은 재봉틀이 10여 개나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서울대 법대에 편입하고, 이어 고시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趙炳玉, “손~도~심~. 나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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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趙炳玉 前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
이어 1950년 5월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서울 중구에서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아버지는 중구에서 내리 8번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우리나라 헌정(憲政) 사상 한 지역구, 그것도 서울에서 내리 8번 당선된 분은 아버지뿐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나중에 나도 국회의원이 되어 선거를 여러 차례 치렀지만, 그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야당 의원이었던 아버지 덕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정치를 가까이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번은 국회 본회의를 방청했다. 당시 국회의사당은 태평로에 있었다(현 서울시의회).
자유당의 손도심 의원이 발언에 나섰다. 달변(達辯)이었던 그는 민주당 지도자인 조병옥(趙炳玉) 의원이 술만 먹고 여자나 쫓아다니는 형편없는 인물이라고 인신공격을 했다. 조병옥 의원을 보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니 조는 척하는 것 같았다. 손도심 의원의 발언이 끝났다. 2분여가 지나도록 졸고 있던(?) 조 의원은 기지개를 켜더니, 이기붕(李起鵬) 의장에게 “의장!”하면서 발언권을 요청했다. 키가 크고 마른 그는 휘청휘청하면서 단상에 올랐다. 그는 다시 2분 정도 가만히 있더니, 물을 한잔 따라 마셨다. 본회의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조마조마해했다. 조 의원은 손을 들어 손도심 의원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손~도~심~. 나쁜 놈!”
순간 폭소가 터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때는 그런 낭만이 있었다. 욕설과 고성이 난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걸핏하면 국회에서 벌어진 일을 갖고 고소·고발을 일삼는 것을 보면, 문득 그 옛날의 낭만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新派와 舊派
1960년 4·19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다. 내각책임제 개헌(改憲)이 있은 후, 그해 7월 29일 민의원(民議院) 선거가 실시됐다. 민주당은 전체 의석의 3분의 2를 넘는 160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처럼 절대 다수(多數)를 가지고도 민주당은 정국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신파(新派)와 구파(舊派)의 갈등 때문이었다.
민주당은 자유당 정권의 독재를 반대하는 여러 정치세력이 1954년 만들었다. 이때 1945년 한국민주당 이래 야당의 길을 걸어온 신익희(申翼熙)·조병옥·김도연(金度演)·윤보선(尹潽善) 등은 구파가 됐다. 원내(院內)자유당이나 무소속, 흥사단 출신인 장면(張勉)·오위영·김영선(金永善) 등은 신파가 됐다. 아버지는 신파에 속했다. 지역적으로 구파는 호남, 신파는 평안도 출신이 다수였다. 이력을 보면 구파는 지주(地主) 출신, 신파는 관료 출신이 많았다. 이런 차이점들은 자유당에 맞서 반(反)독재 투쟁을 하는 동안에는 잠복해 있었지만, 일단 정권을 잡자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왔다.
구파인 윤보선이 내각책임제하에서 명목상의 국가원수인 대통령, 신파인 장면이 실권을 갖는 국무총리가 되었다. 구파 의원 65명은 그해 11월 신민당을 창당해 민주당에서 떨어져 나갔다.
장면 정권에서 아버지는 수석국무위원인 외무부장관을 맡았다. 얼마 후 나의 자형(姊兄)이 된 김흥한(金興漢) 변호사는 장면 총리의 비서실장이 됐다. 또 부모님과 절친해서 내가 형님이라고 부르던 최경록(崔慶祿) 장군은 1960년 8월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최경록 장군은 이승만(李承晩) 정권 시절, 국민방위군사건, 서민호 의원 사건 등을 원칙대로 처리한 강직한 군인이었다. 장면 총리가 부통령 시절 암살 위협을 받는 등 위기에 처하자, 아버지의 부탁으로 비밀리에 장면 부통령을 경호해 주기도 했다.
장면 정권이 들어서면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최경록 장군은 군부(軍部) 내에서 나오고 있던 정군(整軍)운동에 호의적이었다. 반면에 주한미군과 미(美) 국방부 당국자들은 정군운동이 한국군의 안정을 흔든다는 이유로 최 장군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결국 최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지 6개월 만에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엉뚱하게도 ‘이기붕의 양자(養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자유당 정권과 밀착해 있던 장도영(張都暎) 장군이었다.
최경록 장군은 대구에 있는 2군 사령부로 내려갔다. 후일 최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을 그만둔 후 군복을 벗고 싶었다. 하지만 2군 부사령관 박정희(朴正熙) 소장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얘기가 있어 이를 막아보고자 2군 사령관 발령을 받아들였다”고 술회했다.
최경록 장군이 2군 사령관으로 있을 때, 나는 대구 2군 사령부로 놀러간 적이 있다. 그때 최 장군은 사령관실 옆 부사령관실에 있던 박정희 장군에게 나를 인사시켰다. 박정희 장군에 대해서는 부모님이 나누는 얘기를 통해 들은 적이 있었다.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되어 군복을 벗은 전력(前歷)이 있지만, 비교적 깨끗하고 유능한 장군이라는 얘기였다.
鄭一亨, 張勉 총리에 쿠데타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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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8월 19일 민의원 본회의에서 인준을 받은 장면 총리(오른쪽)가 경무대(현 청와대)로 윤보선 대통령을 예방했다. |
1961년 5월 13일, 큰누나가 김흥한 변호사와 결혼식을 올렸다. 김 변호사는 결혼을 앞두고 총리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결혼식 날 저녁식사 자리에는 최경록 장군도 참석했다. 자리를 떠나기 전, 최 장군은 아버지에게 “이 공관에 얼마쯤 더 계실 건가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를 쿠데타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받아들인 부모님은 장면 총리를 찾아가 위기를 경고했지만, 장 총리는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 난 어머니는 장 총리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앞으로 오는 사태에 대해 우리 부부는 절대로 책임지지 않겠어요. 전부 총리가 했고, 총리가 책임지겠다고 하세요!”
위기는 이미 눈앞에 닥쳐와 있었다. 큰누나의 결혼식 사흘 후인 5월 16일,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장면 총리는 숙소인 반도호텔에서 나와 혜화동 갈멜수녀원으로 몸을 피했다.
아버지는 장면 총리의 행방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나중에는 총리 다음가는 서열인 수석국무위원의 자격으로 쿠데타 진압명령을 내려보려 했다. 결국 아버지는 쿠데타군에게 체포되어 투옥(投獄)됐다. 쿠데타 소식에 피신했던 어머니와 가족들은 장충동 외무부장관 공관에서 퇴거(退去)하는 신세가 됐다.
“쿠데타를 한 놈들은 엉터리 군인들”
고(高)3이던 나는 화가 났다. 나는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쿠데타를 한 놈들은 엉터리 군인들이야! 그런 놈들에게 내가 왜 집을 내줘? 집(공관)은 내가 지킬 거야! 공부하기에도 여기가 좋을 거야.”
어머니와 누이들은 웃으면서 어이없어했다. 그렇다고 나를 말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 혼자 공관에 남게 됐다. 나는 공관 2층 아버지 침실에 묵으면서 대입(大入)시험 준비를 했다. 식사는 외무부가 고용한 가정부가 차려주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군인들도 나를 강제로 쫓아내지는 않았다.
쿠데타 세력은 외무부장관 공관에서 파티를 자주 열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2층에 틀어박혀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박정희 장군을 본 적이 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후일 내가 국회의원이 되어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박 대통령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5·16 직후 외무부장관 공관에서 나가지 않고 버티던 그 학생이 맞소?”라고 물었다. “예. 제가 바로 그 학생입니다”라고 하자, 박 대통령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박 대통령은 내가 최경록 장군을 만나러 대구 2군 사령부에 갔다가 그에게 인사를 드렸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나를 그대로 놔두라고 지시했던 것은 아닐까?
쿠데타군과의 동거(同居)는 3개월 만에 끝났다. 그냥 내 발로 공관에서 걸어나온 것이다. 쿠데타 직후의 분함도 어느 정도 가라앉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공관에서는 대입 준비에 전념하기 어려워서였다. 어쩌면 그때 공관에서 석 달을 버틴 것은 어떤 대의명분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사춘기(思春期) 소년의 반항이었을 것이다. 내가 공관을 나온 후, 장충동 공관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이 됐고, 육영수 여사와 가족이 입주했다.
부활절 엽서
이듬해 나는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연희전문 출신이었던 아버지는 평소 내가 연세대로 진학해서 신학(神學)을 공부하기를 원했다.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었다. 막상 내가 서울대로 진학하자 아버지는 무척 노여워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아버지는 “그건 네가 잘못한 거다”라고 말하곤 했다.
대학 시절은 내내 한일(韓日)회담을 반대하는 데모를 하며 보냈다. 현승일(玄勝一, 전 국민대 총장·제16대 국회의원), 이헌재(李憲宰,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정성철(전 정무제1장관 보좌관), 김중태, 김도현(金道鉉, 전 문화체육부 차관) 등이 그 시절의 동료들이었다. 다섯 번의 무기·유기정학을 받았다. 나중에는 내가 데모를 주동하지도 않았는데, 당연히 데모의 수괴(首魁)로 지목되어 정학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폐병에 걸렸다. 폐병3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나는 이 사실을 감추었다. 계속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절에 들어가 고시공부도 계속했다. 1965년 12월, 대학 마지막 시험을 보러가던 중 나는 심하게 객혈(喀血)을 했다. 친구들이 쓰러진 나를 업고 명동성모병원으로 달려갔다. 그 길로 나는 결핵병동에 입원했다.
이듬해 1월, 장면 전 총리가 명동성모병원에 입원했다. 그의 병은 간경화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봄이 되면서 내 병세는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장 전 총리의 병실을 자주 찾았다. 그해 4월 부활절 아침, 장 전 총리는 엽서를 한 장 내게 보내주었다. “부활의 기쁨을…. 귀군(貴君)의 쾌유를 빕니다.”
張勉이 수녀원에 숨은 이유는?
당신도 병마(病魔)에 시달리면서, 내게 보내준 그 배려가 너무나 고마웠다. 그날 정오쯤 나는 장면 전 총리의 병실을 찾아가 감사인사를 드렸다. 그도 무척 반가워했다.
장면 전 총리가 입을 열었다.
“내가 정군한테 말해둘 게 있어.”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그는 한동안 망설이는 듯하더니, 5·16 당시 자신의 처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쿠데타가 터지고, 내가 수녀원에 있을 때, 여러 곳에서 내 행방을 수소문하는 연락이 왔어. 자네 부친 정 박사로부터도 연락이 왔었지. 나는 그 연락을 받지 않았고, 내 쪽에서 연락하지도 않았어. 그 이유가…. 내가 고백할 게 있는데….”
장면 전 총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결심한 듯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그때 박정희 장군 뒤에는 최경록 장군이 있고, 그 뒤에는 정일형 박사가 있는 걸로 알고 있었어. 그래서 무척 당황했고,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잘 몰랐어. 이런 상황에 나가봐야 소용없겠다는 생각도 들고…. 왜 그랬는지, 내가 참 그런 망령이 들었었어.”
장면 전 총리가 왜 쿠데타 후 이틀 동안 외부와 연락을 단절한 채 수녀원에 꼭꼭 숨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두 궁금해하고 있었다. 장 전 총리의 얘기를 듣고 보니, 그 이유가 짐작이 갔다.
그날 저녁 부모님과 자형 김흥한 변호사가 문병을 왔다. 나는 장면 전 총리에게 들은 얘기를 전했다. 세 분 모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어머니가 말했다.
“아, 그랬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알겠다.” 아버지도 말했다. “내가 당시에 권력 실세들로부터 모략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심한 줄은 몰랐었다. 어쩐지, 실각(失脚) 후에 찾아뵈었더니, ‘나를 안 찾아올 줄 알았는데…’ 하시더니….”
자형도 한마디 했다.
“쿠데타 직후에 어디선가 비슷한 얘기를 들은 것은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사실이었네요.”
張勉, “이 罪過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어머니는 그날 저녁 장면 박사의 병실을 찾아갔다고 한다. 나중에 어머니는 아버지와 내게 이렇게 전했다.
“장 박사(장면 전 총리)는 내가 찾아올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으시더군요. 그러더니 무척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내가 참 미안하게 됐소. 그때 사실 오해를 했었소. 정 박사와 최 장군에게 이 죄과(罪過)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하시더군요. ‘이제 오해는 다 풀리신 건가요?’ 하자, 장 박사는 고개만 끄덕이시더군요.”
나중에 내가 좀 더 알아본 바로는 5·16 전 쿠데타 음모설이 횡행하고 있을 때, 민주당 정부의 일부 실세들이 정일형-김흥한-최경록 3인 음모설을 유포했다고 한다. 자유당이 몰락하고 민주당 내 구파마저 신민당을 만들어 떨어져 나가자, 이번에는 신파 안에서 권력다툼이 시작됐던 것이다. 권력을 자기들만이 오로지하려는 것이 권력의 속성일 것이다.
물론 장면 총리는 당시 그 얘기를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쿠데타라는 비상(非常)한 상황이 발생하고,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에 빠지자 장면 총리는 그 얘기를 떠올리고 주저앉아 버렸을 것이다. 자기 내각의 수석국무위원과 그의 사위인 전 총리비서실장이, 한때 자신과 가까웠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밀려난 전 육군참모총장과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생각에 정상적인 판단능력이 마비됐던 것이다.
그리고 장면 전 총리는 아버지와 최경록 장군을 오해했다는 것 때문에 두고두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나를 통해 그 사실을 털어놓고 부모님께 용서를 구했던 것이다. 그분은 착한 분이었고 신사(紳士)였다.
후일 나는 미국 미주리주립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이 일을 주제로 연구논문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를 극구 만류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한양대 법대에서 교단에 섰다. 1972년 조교수로 승진하자마자 나는 미국 미주리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신(維新) 직전이었다. 이 학교를 택한 것은 동서인 조순승(趙淳昇, 13~15대 국회의원)이 교수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계를 위해 세탁소를 차렸다. 우리 부부와 친하게 지내던 장원호(전 미주리대 석좌교수) 박사 부부, 미국인 친지가 각각 1000달러씩 출자했다. 낡은 세탁기 7대, 건조기 5대를 마련했다. 세탁소 이름은 기세 좋게 ‘Superior Laundry’라고 지었다. 하지만 가게 이름과는 달리 작고 초라한 시골 세탁소에 불과했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나와 장 교수를 대신해 아내와 장 교수 부인이 세탁소를 운영했다.
DJ의 웨스터민스터大 연설 주선
세탁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대중(金大中·DJ) 전 대통령 후보가 미주리를 방문했다. 인근 풀턴에는 웨스터민스터대학이 있었다. 1946년 3월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가 ‘철(鐵)의 장막’ 연설을 했던 유서 깊은 대학이었다. 나는 미주리 지역의 유학생들과 함께 DJ가 이 대학에서 연설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DJ는 페인트가 묻은 청바지 차림으로 달려온 아내를 보고 “아니, 정 박사님 며느님이 이렇게 고생을 하시느냐?”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 대학에서의 연설을 계기로 DJ는 미국과 일본에서 반(反)유신투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세탁소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내는 밤낮없이 일했지만, 수입은 신통치 않았다. 어느 날 아들 호준이가 세탁기에 볼펜을 집어넣는 바람에 세탁물에 볼펜 잉크가 번져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몇 달치 수입이 세탁물 변상에 들어가 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탁소는 문을 닫았다.
얼마 후 나는 바텐더로 취직했다. 처음에는 바텐더 보조로 들어갔는데 금방 일을 익혀 한 달 만에 바텐더가 되었다. 나는 미국인들이 해장술로 즐기는 ‘마오마우’를 특히 잘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때때로 두둑하게 팁을 받아 아내를 기쁘게 해주기도 했다. 주말에는 가족과 피크닉을 나갈 정도로 여유도 생겼다.
하지만 그 즐거운 일도 갑작스럽게 끝나버렸다. 어느 날 나 혼자 있는 시간에 흑인 권총강도가 들이닥친 것이다. 그는 샹들리에를 박살낸 후, 내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금고를 털어갔다.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 더 이상 바텐더 일을 할 수 없었다.
1974년 5월 나는 미 국무부 통역관 시험에 합격했다.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한국 저명인사들을 수행하면서 통역을 해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내가 모신 분들로는 고재호 대법관, 서민호 전 국회의원 등이 있었다. 어머니(이태영)도 모신 적이 있다.
부모님의 민주화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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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의원직을 상실한 아버지가 1977년 3월 14일 이철승 신민당 대표 등의 배웅을 받으며 국회를 떠나고 있다. |
내가 미국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한국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날로 거세지고 있었다. 민청학련 사건, 긴급조치9호 발동 등 정권의 억압도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반유신투쟁의 선봉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인 1973년 9월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 사건을 규탄하면서 ‘김대중씨 사건 조사특별위원회’ 구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이어 1974년 11월 27일에는 민주회복국민선언대회에 참여했다. 1974년 12월 14일 대정부 질의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하야(下野)를 권고했다. 격분한 공화당 의원들이 달려들어 폭행을 하는 바람에 아버지는 늑골이 부러지고 장이 파열(破裂)됐다.
1976년 3월 1일 아버지는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선생, DJ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참여했다. 이 사건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대통령 긴급조치9호 위반 혐의로 재판에 서게 됐다. 이듬해 3월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형이 확정되면서 아버지는 의원직을 상실했다. 중구에서만 8번 당선되었던 의석을 그렇게 잃은 것이다. 어머니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의석을 상실한 직후인 그해 4월, 종로-중구의 장기영(張基榮) 공화당 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당시는 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선출할 때였는데, 종로-중구의 국회의원이 모두 공석이 된 것이다.
국회의원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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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후 정일권 국회의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원선서를 했다.(앞줄 왼쪽) |
“첫째, 나는 네가 유신이라는 잘못된 시대에 정치를 시작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둘째, 네가 당선되면 내가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비롯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너를 떨어뜨리려 들 것이다. 셋째, 정치에 뛰어들어 박사 논문을 중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아보겠다”고 고집했다. 나는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신민당은 후보를 내지 않았다. 오제도(吳制道, 9·11대 국회의원)·강근호(姜根鎬, 전 11대 국회의원·군산시장 역임) 등 10여 명 이상이 출마했다.
유세는 내가 ‘정일형 박사의 아들’임을 알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유권자들은 아버지를, 그리고 아버지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다가 억울하게 의원직을 잃은 것을 알고 있었다. 선거비용이 모자라 집에 있던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화백의 동양화를 친구에게 맡기고 돈을 빌렸다. 나는 오제도 변호사와 함께 동반 당선됐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나는 김연준(金連俊) 한양대 총장을 찾아갔다. 대학 졸업 직후 교단에 설 수 있게 해주고, 미국 유학의 길도 열어주었는데, 그 후의(厚意)에 보답하지 못한 것을 사과했다. 김 총장은 기분 좋게 내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각하’들의 술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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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연두순시를 나온 박정희 대통령을 최경록 교통부장관(오른쪽)이 영접하고 있다. |
1978년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시내 술집으로 향하는데, 차가 광화문을 지나 효자동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내가 말했다. “청와대로 가는 것 같은데, 그럼 저는 이만 내리겠습니다.”
하지만 장군 출신 의원들은 나를 놔주지 않았다. 차가 청와대 입구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현관 앞까지 나와 부동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청와대 살림살이는 의외로 수수했다. 당시 TV는 다이얼(회전식 손잡이)을 돌려 채널을 변경했는데, TV수상기의 다이얼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나중에 10·26 현장에도 등장해 유명해진 시바스 리갈이 나오고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재미있는 것은 참석자들이 모두 서로를 ‘각하’라고 호칭한다는 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대 시절 선배이자 상급자였던 이종찬·민기식·최경록·장창국 의원들을 ‘각하’라고 불렀다. 과거에는 군 장성들을 ‘각하’로 호칭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장군 출신 의원들도 박정희 대통령을 ‘각하’라고 불렀다. 나만 ‘각하’가 아니었다.
이종찬·최경록 두 분은 당시 임명직 국회의원이던 유신정우회(유정회) 의원이었다. 하지만 두 분 모두 나름 직언(直言)을 하려고 애쓰는 것이 보였다.
최경록 의원은 “이제 산업화뿐 아니라 공해(公害)문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공해문제에 대해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만 해도 공해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불순한 일로 치부하던 시절이었다.
이종찬 의원도 “여기 정대철 의원도 와 있지만, 야당에 정부를 비판할 자유는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내게 물었다.
“정 의원은 유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 순간 이종찬·최경록·민기식 의원 등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열심히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려 했다.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이 내 옆으로 와서 지그시 발을 밟았다. 그렇게 해서 그냥 넘어가나 싶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유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는 “유신은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 잘못하고 있는 일”이라면서 그 부당함을 지적했다. 동석하고 있던 분들은 안절부절못했다.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은 담담하게 말했다.
“야당 의원으로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할 말을 하는 그 기개를 존경합니다.”
朴정권 퇴진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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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10월 7일 나는 국회 본회의에서 박정희 정권 퇴진을 요구, 파문을 일으켰다. |
내 발언이 끝난 후 동료 의원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특히 많은 신민당 의원이 “뭐 그리 잘났다고 돌출행동이냐?”면서 땡감 씹은 듯한 반응을 보인 것은 뜻밖이었다. 신민당 의원 중에서는 이중재(李重載) 의원 정도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면서 나를 칭찬해 주었다. 때문에 나는 나중에 의원들에게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여야 했다. 오히려 공화당 의원들 중에서 박찬종(朴燦鍾)·오유방(吳有邦) 의원 등 소장파(少壯派) 의원들이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잘했어”라고 격려했다.
공화당 긴급의원 총회가 열렸다. 김용태(金龍泰) 공화당 원내총무는 “제 아비가 간 길을 가게 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나를 제명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그걸 막은 것은 민관식(閔寬植) 의원이었다고 들었다. 민 의원은 그해 12월로 예정된 제10대 국회의원 총선 때 종로-중구에서 출마할 예정이었다. 그는 “지금 정대철 의원을 제명하면, 정 의원은 영웅이 되고, 나는 이번 총선에서 떨어지게 된다. 나를 생각한다면, 정 의원 제명을 신중히 생각해 주기 바란다”며 공화당 의원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어쩌면 과거 민주당 시절 아버지와 함께 정치를 했던 정리(情理)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민 의원의 아들과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
그해 12월 제10대 국회의원 총선. 첫 당선 때는 무소속으로 출마했었지만, 이번에는 신민당 공천을 받은 당당한 야당 후보였다. 유세 과정에서 나는 박정희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민관식 후보에게 결례(缺禮)를 하지 않으려 애썼다. 민 의원도 나에 대한 비판을 삼갔다. 결국 무소속 오제도 후보의 추적을 뿌리치고 우리 두 사람은 나란히 당선됐다.
제10대 총선에서 신민당은 의석 수에서는 뒤졌지만 전체 득표에서 공화당을 1.1% 앞서는 32.8%를 득표했다. 유신체제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