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의 인간탐험

새마을운동의 살아 있는 전설(傳說) 하사용(河四容)

만 86세 현역 농부의 적은 지금도 가난이다

  • 글 :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ksdhan@chosun.com
  • 글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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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이후 지금까지 45년 동안 새마을운동 강연만 3500여 차례
⊙ 새마을운동의 성공 요인은 잘살기 경쟁을 시켰다는 것
⊙ 朴正熙 대통령, “하사용씨는 우리 농민들의 위대한 교사이자 국민 모두의 훌륭한 교사”
⊙ 2015년에는 자비 들여 몽골에 새마을운동 정신 전파와 농업기술 전수
⊙ 머슴살이하러 춘천으로 떠났던 3년 빼고 태어난 곳에서 지금도 농부로 살아
⊙ 중국에서는 하사용씨 일대기 그린 소설 펴내 새마을운동 교재 삼기도

하사용
1930년생. 강외공립보통학교 2학년 중퇴 / 동탑산업훈장·국민훈장 목련장 수훈 /
새마을운동 지도자
1971년 가을의 일이다. 그해 봄에는 전국 3만3267개 마을에 시멘트를 지원하는 등 새마을운동이 본격화했다. 농림부는 새마을운동을 이끌 지도자 3만3267명에 대한 교육계획을 세워 청와대에 제출했다.
 
  소요예산 등에 대한 교육계획을 검토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당시 경제담당 특별보좌관이던 박진환(朴振煥) 전 서울대 교수(농협대학장 역임)와 농림부 장관을 집무실로 불렀다. 박 대통령은 두 사람에게 새마을 지도자 교육의 중점을 정신교육에 둘 것을 지시했다.
 
하사용씨는 늘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닌다. 신발을 벗자 하얗게 드러난 신발 자국이 그의 농사 이력을 말해주는 것 같다.
  “단시일에 3만3000여 명을 교육시킨다는 것은 하나의 궐기대회가 되고 말 것이다. 과거 자유당 시절에도 많은 수의 농민교육을 했지만 별로 효과가 없지 않았느냐. 한평생을 농촌 근대화를 위해 몸바치겠다는 사람이 1년에 1개 군에 한 사람이라도 나타났더라면 우리 농촌은 지금처럼 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에 열다섯 명도 좋고 스무 명도 좋으니까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한 2주일 동안 농촌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정신교육을 시키는 교육계획을 다시 만들어 보라.”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농림부 실무자들은 정신교육을 위주로 하는 새마을 지도자 교육계획을 다시 짰다. 정신교육을 담당할 강사진에는 종교계 지도자와 사회 저명인사들이 망라되었다. 바뀐 교육계획을 받아본 박 대통령은 종교계 인사들과 사회 저명인사들의 이름을 다 지웠다. 대신 하사용(河四容)씨 등 농촌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름을 직접 적어 다시 돌려보냈다.
 
  박 대통령은 지식인들의 교양으로 포장한 ‘죽은 언어’보다는 현장에서 나오는 투박하지만 ‘살아 있는 언어’가 농민교육에 더 효과적일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1970년 11월 서울 시민회관에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수여받고 있는 하사용씨. 그만 점퍼 차림이다.
  박 대통령이 새마을 강사진의 구체적인 예로 거명한 농부 하사용씨. 하씨는 어떻게 해서 박 대통령의 머릿속에 그 이름 석 자가 또렷하게 각인돼 있었을까.
 
  박 대통령과 하사용씨는 새마을 지도자 교육이 본격적으로 준비되던 그 한 해 전인 1970년 11월 11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전국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경진대회장에서 처음 만났다. 그 자리에 하씨는 검정 고무신에 점퍼 차림으로 아내 신경복씨(금년 5월 작고)는 스웨터 차림으로 참석했다. 모두가 양복을 차려입고 참석한 대회에서 하씨 부부의 복장은 파격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게다가 하씨는 이 대회에서 전국 1등으로 동탑산업훈장을 받게 돼 있었다. 대통령 앞에 양복, 구두가 아닌 점퍼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서 있는다는 것은 당시 공무원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무원들은 깨끗하게 차려입으면 그만이라는 하씨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원고 없는 발표에 즉흥연설로 화답한 박정희
 
하사용씨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훈장.
  당시 담당 공무원들을 더 기겁하게 한 것은 하씨의 성공사례 발표였다. 공무원들이 며칠을 밤새워 가며 작성해 준 원고를 버리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와 농사를 지으면서 겪었던 일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농사지을 땅이 한 평도 없어서 아내를 집에 두고 머슴살이를 떠났던 일 등을 이야기할 때는 울먹이기도 했고 자신이 개발한 최신의 농법을 소개할 때는 신나서 웃음을 머금기도 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고 있을 때 하씨 앞에는 박 대통령이 서 있었다. 하씨의 손을 잡은 박 대통령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박 대통령이 하씨에게 말했다.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산증인이십니다.”
 
  박 대통령은 하씨의 목에 동탑산업훈장을 걸어주고 치사를 시작했다. 박 대통령도 “이 치사문은 인쇄된 것이니 가지고 가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 충청북도에서 오신 농민 하사용씨의 성공사례가 너무나 큰 감명을 주었기에 본인의 소감을 말하겠습니다”면서 준비한 원고 대신 즉흥연설을 했다.
 
  “우리는 농촌개발에 헌신한 훌륭한 인물로서 걸핏하면 외국의 사례만을 인용합니다. 이제 우리 농촌에도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사용씨는 우리 농민들의 위대한 교사일 뿐 아니라 우리 모든 국민의 훌륭한 교사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말한 ‘우리 모든 국민의 훌륭한 교사’는 지금도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마을에서 여전히 농부로서 살고 있다.
 
  하사용씨는 1930년 4월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에서 태어났다. 청주시와 청원군의 통합으로 지금은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정중길로 주소만 바뀌었을 뿐이다.
 
  하씨는 어린 시절 두붓집에서 나오는 비지나 엿집에서 나오는 엿밥, 양조장에서 나오는 술찌끼를 얻어먹으며 컸다.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수업료를 내지 못해 2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열 살 때부터는 고물수집, 엿장사, 나무장사, 채소장사 등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닥치는 대로 했다.
 
  하씨가 부농(富農)으로 가는 농업에 눈을 뜨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채소장사를 하면서 채소농사를 짓는 화교(華僑)들의 수입이 높다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모르지만 당시 채소농사는 서울 근교를 비롯해 대부분의 지역에서 화교들이 도맡아 짓고 있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채소 같은 고소득 농사를 짓지 않는지 의아했지만 그로서는 농사를 지을 땅이 한 평도 없었다.
 
  의문만 있는 상태에서 6·25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에 한 번 끌려갔다가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한 후 군에 입대했다.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20사단에 배치되었다. 전투에 참가해 적들과 교전을 벌이던 중 부상을 당해 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부상을 치료하던 중 폐결핵이 발견됐다. 치료 불가능 판정이 나왔다. 의병제대를 했다. 제대 후 결혼을 했다. 움막집과 홑청 없는 이불 한 채가 그 신혼부부의 살림 전부였다.
 
  채소농사를 짓기 위해 땅을 빌리려 해봤지만 그에게 땅을 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머슴살이를 선택했다. 아내 몰래 집을 나와 걸식을 해가며 춘천까지 갔다. 그곳에서 3년간 머슴살이를 하고 새경 15가마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봉급 대신 끼니만 해결해 주는 식모살이였다. 아내의 모습에 설움이 북받쳤다.
 
 
  그가 해외에 나갈 때 꼭 챙기는 것들
 
새마을운동 초기, 현장에서 운동을 이끌었던 3인. 가운데가 하사용씨이고 왼쪽이 초대 새마을중앙회 회장 김준씨(작고), 오른쪽이 박진환 전 서울대 교수다.
  1957년에 쌀 열다섯 가마로 밭 270평을 구입하고, 그 밭 한편에 두 평 남짓한 움막을 지었다. 처음 가져보는 내 땅과 내 집이었다. 돌을 골라내고 흙을 퍼 날랐다. 미친 듯이 일만 했다. 남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농사를 지어서는 성공할 수 없었다. 밭에 채소를 심은 후 콩기름을 바른 종이를 씌워서 보온을 해주었다. 국내 최초였다. 그 최초는 훗날 최초의 비닐하우스 원예작물 재배로도 이어졌다. 주위 사람들은 종이 속에서 어떻게 작물이 자랄 수 있느냐며 조소를 보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는 남들보다 채소를 일찍 수확할 수 있었고, 일반 농사보다 열 배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땅을 더 사기 위해 1원도 헛되이 쓰지 않았다. 저축을 했고, 그 돈으로 매년 땅을 늘렸다. 또다시 결핵이 찾아왔지만 하늘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결핵을 이겨냈고 대통령으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받는 전국 1등 농민이 되었다.
 
하사용씨는 2015년 몽골에 4개월여를 머물며 농업 기술을 전수했다.
  정중리에 있는 하사용씨의 집을 처음 방문한 것은 2002년 2월이다. 14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그의 집을 다시 찾게 되었는데, 주변에 주택들이 더 들어선 것 빼고는 큰 변화가 없었다. 특히 71년에 지어진 그의 집은 그대로였다. 현관문 앞에 놓인 검정 고무신도 그대로였고 거실의 모습도 그대로였다.
 
  71년에 이 집이 지어질 때 슬래브 지붕으로 된 집은 근방에서 하사용씨의 집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45년이 된 지금 그의 집은 주변의 집들과 비교하면 많이 초라하다. 이 집은 원래 새마을 지도자들의 숙소로 25년 동안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씨에게 선진농법을 배우러 온 교육생들이 머물던 곳이다. 더 이상 새마을 지도자들이 머물 일이 없게 되면서부터 하씨 가족이 이 집을 사용하고 있다. 집은 초라해 보이지만 그는 농부로서는 보기 드문 수십억 원대 자산가다.
 
  현관문을 들어서는 기자 일행을 ‘청주시 새마을회’라고 새겨진 녹색 유니폼을 입은 하사용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자신의 녹색 유니폼을 가리키며 “내가 외국에 갈 때도 꼭 빼먹지 않는 게 태극기와 새마을 깃발하고 새마을 모자 그리고 이 유니폼이야” 하면서 웃었다.
 
  ― 검정 고무신은요?
 
  “그거야 신고 가는 거지.”
 
  그의 목소리는 우리 나이로 여든일곱 살이 된 노인 같지 않았다.
 
하사용씨의 집 거실에는 감사장, 위촉장 등이 가득 걸려 있다.
  거실에는 여전히 새마을운동과 관련한 감사장과 박정희 대통령과 찍은 사진 등이 걸려 있었다. 마치 2002년 2월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었다.
 
  ―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네요?
 
  “시간이 멈추긴 뭐가 멈춰. 나는 더 늙었고 마누라는 지금 없고.”
 
  ― 지금 밖에 비가 오는데 사모님은 들에 나가셨어요?
 
  “아니. 죽었어. 5월 1일에.”
 
  나이가 들면 다 그런 것일까. 그는 아내의 죽음을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아내 신경복씨도 고향에서 오랫동안 새마을 부녀회를 맡아서 일하는 등 두 사람은 ‘새마을 동지’다.
 
  ― 허전하시겠어요.
 
  “허전하지. 늘 있다가 없으니까. 부부끼리도 소중하다는 걸 죽고 난 후에나 알게 되는 것 같아.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말이 하나도 안 틀린 말이야. 김 기자도 집에다가 잘해.”
 
  ― 혹시 나중에 아내와 함께 묻히고 싶으신지요.
 
  “마누라가 싫어하겠지? 내가 6·25 참전 유공자야. 마누라를 지금은 선산에 묻었지만 내가 죽어서 현충원으로 갈 때는 그곳으로 함께 가야지. 60년 넘게 함께해 왔으니까 죽어서도 같이 가야지. 내가 데리고 있어야지.”
 
 
  단돈 10원도 빚진 적 없다
 
   그가 내민 사진첩을 넘기다가 박진환 교수, 김준 초대 새마을중앙회 회장(2012년 작고), 하사용씨 등 3명이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 박 교수님은 생존해 계시나요?
 
  “올해 93세인데 지금은 병원에 계셔. 김준 회장은 돌아가셨고.”
 
  잠시 말을 끊고 사진만 바라보던 하사용씨가 말을 이었다.
 
  “이런 사진 어디 가서 못 구할 거야. 나를 비롯한 이 사진 속 3명이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을 사실상 시작한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해. 박진환 교수는 청와대에서, 김준 회장은 새마을중앙회를 통해서 나는 현장에서 말야. 많은 분이 새마을운동을 자기 아이디어라고 하는데 아이디어는 어떨지 몰라도 시작은 이렇게 셋이야. 물론 박 대통령이 그 중심이고.”
 
  하씨는 최근까지 3500여 회에 걸쳐 새마을 강연을 했다. 이 가운데 1500여 회가 1970년대에 집중돼 있다. 70년대 하씨의 강연은 당시 수원에 있던 새마을 연수원은 물론 각 기업체, 관공서, 학교 심지어 교도소에서까지 초청을 받아 이루어졌다. 그는 당시 현대그룹 정주영(鄭周永) 회장과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내가 새마을 강연 때문에 정주영 회장과 울산에 몇 번 갔어. 정 회장이 내가 새마을 연수원에서 한 강의를 직접 듣고 나를 초청한 거지. 울산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내가 정 회장에게 ‘회장님 많이 부자신데 나는 내가 더 부자라고 생각해요. 회장님은 잠 안 오죠? 나는 돈 가진 사람들이 잠을 편하게 자는 사람들 없다고 봐요. 난 10원도 빚진 게 없으니까. 돈 달라는 사람도 없고 농부라 꿔달라는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마음만 생각하면 빚 없는 내가 최고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했더니 피식 웃으면서 ‘나는 수십억 빚이 있는데 진짜 잠이 잘 안 와요’ 하는 거야. 난 지금도 우리의 적은 가난이고 빚이 없는 놈이 제일 부자라고 생각해.”
 
  ― 정말 단돈 10원도 빌린 적이 없었습니까.
 
  “응, 단돈 10원도 남의 돈을 꿀 일이 없었어.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았지. 나는 철저하게 내 힘에 맞게 내 능력으로 가난을 이겨낸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어. 새마을운동의 자조(自助)정신도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
 
  이런 정신 때문이었을까. 그는 새마을운동 성공사례 발표 후 청와대에서 하사한 1000만원을 거부한다. 당시 1000만원은 땅 2만 평 정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하씨의 당시 농토는 3000여 평이었다. 영양실조로 결핵에 걸릴 정도로 먹지도 쓰지도 않으며 돈이 생기는 대로 저축만 했던 하씨가 270평의 땅을 3000평으로 늘리는 데 무려 1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1000만원 포상금 수령을 거부한 것이다.
 
  “처음에 보통 사람들은 1000만원을 거부했다는 얘기를 하면 ‘후라이 까는(거짓으로 과장하는)’ 걸로 알았어. 왜 안 받았느냐. 나는 목표한 것이 있으니까.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결한다 하는 결심 말야. 그때 당시 1000만원을 받아다가 내가 땅을 샀으면 좀 더 쉽고 편하게 부자도 될 수 있었겠지. 일을 안 해도 먹고살 수 있었겠지.”
 
몽골의 새마을운동은 민간단체 차원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정치인들의 관심도 높다. 몽골 체류 중 만난 국회의장 바투루 씨(왼쪽).
  ― 저라면 받았겠습니다.
 
  “그게 우리 농민들 정신을 망치는 거야. 내가 안 받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내가 내 힘으로 가난을 극복하고 말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살아나가는 과정에서 그 결심을 허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고, 또 하나는 내가 그런 것을 받고 이웃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냐,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이 그럴 거 아냐. ‘저 자식도 별 수 없이 정부에서 돈을 주니까 저만큼 큰 농장도 갖고 그러고 어쩌고 다니는 거지, 제까짓 놈이 무슨 재주로 그런 걸 하느냐.’ 이런 소리 듣는 건 뻔한 이치거든. 난 그게 싫었어. 난 가난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거든.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그 사람들도 열심히 일을 할 거 아니겠어?”
 
  ― 농민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내가 옛날에도 얘기했지만 정부가 자꾸 농민에게 무얼 주겠다고 그러면 안 돼. 정부가 그러는 걸 식물에 비유하면 ‘질소과다 현상’을 일으키는 거야. 질소과다 현상이라는 게 뭔지 알아? 질소를 많이 주면 당장은 빨리 자라지만 금방 썩어버리는 게 질소과다 현상이야. 내가 젊은이들한테 ‘농업은 투기가 될 수 없다. 돈 많이 들여가지고 쉽게 돈 벌 생각 절대로 하지 마라. 그런 식으로 하면 90% 이상이 실패다. 농업이라는 것은 자기가 노력한 만큼의 대가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농사를 지으려면 열심히 일한다는 마음 자세부터 가져야 된다’고 얘기하지만 소용없어. 지금 젊은 사람들 농사짓는 것 좀 봐. 거의가 건달 농사야. 자가용 타고 다니고, 아니 자기 돈이 있으면 타고 다녀도 되는데, 자기 돈도 아냐, 빚이라고.”
 
  ― 포상금 1000만원을 거부한 후 청와대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게 있습니까.
 
  “나는 몰랐지. 나는 떳떳했으니까 청와대 눈치 볼 필요가 없었잖아. 그러니까 반응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지. 아주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청와대에서 좋은 쪽으로 ‘세상에 이런 사람이 다 있느냐’ 하면서 놀랐다는 거야. 지금 생각해도 내가 그런 마음을 가졌었고 지금도 가지고 있는 것은 나한테는 생명이야. 그러니까 지금도 어느 나라 어떤 사람을 만나도 내가 고무신 신고도 당당하잖아?”
 
  ― 양복은 지금도 없습니까.
 
  “안 입어.”
 
  ― 있는데 안 입는다고요?
 
  “아니. 평생 양복 사본 적이 없어.”
 
 
  지구촌 새마을 지도자
 
   70년대에는 국내 새마을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 중심이었다면 요즘의 하사용씨의 강연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국, 몽골 등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우려고 한국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주된 강연의 대상이다. 그는 스스로를 ‘지구촌 새마을 지도자’라 부르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3월부터 6월 하순까지 아예 몽골에 머물면서 새마을운동 강의 및 농업 기술 전수를 하고 왔다. 애초 9월까지 머무를 예정이었지만 지나친 과로로 인해 6월 하순에 귀국했다.
 
  ― 몸이 어떻게 안 좋았습니까.
 
  “내가 나이를 먹었어도 체력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루에 700킬로에서 800킬로 정도의 거리를 이동하다 보니까 몸에 무리가 와서 쓰러지기도 했어.”
 
  ― 몽골서 새마을운동 강연을 들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내가 기록이 다 있는데 2014년에도 가서 하고 그래서 총 30여 회에 걸쳐 한 4000명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
 
  ― 몽골 정부가 초청해서 하는 겁니까.
 
  “아냐. 시민단체가 나서서 하는데 관심들이 많아. 국회의장도 관심을 보이고 그랬지.”
 
  ― 강연할 때 뭘 강조합니까.
 
  “내가 국내에서도 강조하는 것이지만 ‘3체’를 하지 말라고 하지. 있는 체, 아는 체, 잘난 체. 특히 지도자들이 ‘3체’를 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지.”
 
  ― 농업 기술은 어떤 걸 전수해 주고 온 겁니까.
 
  “한마디로 얘기하면 비닐하우스 농사인데 상추나 토마토 같은 시설 작물 재배법을 가르쳤어. 몽골 사람들이 유목민이 많잖아. 채소농사가 거의 없어. 다 중국이나 소련에서 수입해다가 먹고 있더라고.”
 
  ― 씨앗은 한국에서 가져간 건가요?
 
  “그럼. 씨앗도 사가고 거기 가서 비닐하우스도 만들고 하는데 비용이 4천만~5천만원 들었어.”
 
  ― 새마을운동중앙회에서 지원을 해주었나요?
 
  “아냐. 내 돈 들였지. 몽골은 우리와 똑같이 생겨서 애착도 가고 내가 지금까지 새마을운동 하면서 내 돈 많이 썼어. 절대로 알아달라는 소리는 아냐.”
 
  ― 비닐하우스 농사 전수로 유목민들 중에 정착해서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도 생겼겠네요.
 
  “첫술에 배부르나? 하지만 이제 생길 거라고 봐. 교육에 임하는 태도들이 참 진지했거든.”
 
하사용씨는 해마다 10·26 하루 전날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찾는다.
  하사용씨가 스스로를 ‘지구촌 새마을 지도자’라고 했듯이 그의 이름은 새마을운동에 관심이 많은 나라들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중국에서는 2007년 4월 그의 새마을운동 성공사례가 소설로 출간되기도 했다.
 
  《쉰멍(꿈을 찾아서)》이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중국의 가난한 농민이 우연히 한국의 새마을운동에 관한 뉴스를 보고 한국에 직접 가서 새마을 교육을 받고 돌아와 중국 농촌을 부자 마을로 만든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소득증대 성공의 줄거리가 바로 하사용씨의 이야기인 것이다.
 
  2006년 당시 중국의 국가주석이었던 후진타오가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접목해 중국의 신농촌 건설을 추진하라고 지시한 뒤 하씨는 중국 인민대회당에서도 새마을 강연을 하는 등 중국에서 새마을운동 강사로 높은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45년간 3500여 회의 새마을 강연을 한 하사용씨가 내리는 새마을운동의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경쟁이야. 경쟁을 시킨 거 그게 성공 요인이지. 지금처럼 돈 타내기 경쟁이 아니라 잘살기 경쟁을 시킨 거야. 농촌에서 퇴비증산 경쟁처럼 잘하면 조금 더 주고, 못하면 덜 주고 서로 경쟁을 시켰잖아. 경쟁을 통해서 자조정신을 심어준 거, 그게 새마을운동을 성공시킨 거야. 우선은 내 스스로 나를 도와야 남도 나를 도와주는 거 아니겠어.”
 
  ― 북한에는 새마을운동을 전수해 주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까.
 
  “왜 없겠어. 같은 민족인데. 나는 지금이라도 김정은이가 오라고 하면 갈 수 있어. 가서 새마을 정신도 심어주고 농업 기술도 가르쳐줄 수 있어. 북한이 지금이라도 최고의 적은 가난이라는 걸 알아야 해. 가난과 싸워서 이기면 다 해결되는 거야. 박정희 대통령은 그걸 알았고 김일성이나 김정일은 그걸 몰랐다는 게 이렇게 남과 북의 격차를 만들어놓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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