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국 정신의 심층탐험 ② 퇴계 이황 바로 알기

“퇴계는 한문을 한국말로 풀어내는 일을 가장 잘한 사람”

  • 글 : 최봉영 한국항공대(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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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자들조차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구름 잡듯 어설프게 말해
⊙ 한국인은 한문의 뜻을 새기고 푸는 한국말이 어설퍼 한문을 배워도 얼치기로 알아
⊙ 퇴계는 우리말(한국말)과 글(언문)로 중국에서 가져온 한문을 야무지게 묻고 따져
⊙ 퇴계는 朱子를 따라 배웠음에도 朱子를 넘어서다!

崔鳳永
⊙ 62세. 서울교대·건국대 영문과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석·박사.
⊙ 조선사회연구회장, 교육사학회장, 한국인격교육학회장,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 역임.
한국인이 쓰는 1000원짜리 종이돈에는 앞쪽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뒤쪽에 그가 지어서 제자들과 함께 공부하던 도산서당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돈에 나오는 도산서당은 실물을 바탕으로 그린 것인 반면에 퇴계의 얼굴은 짐작으로 그린 것이다.
 
  어떤 사람이 퇴계 얼굴을 짐작으로 그려 놓고서, 그것을 퇴계의 얼굴이라고 말한다면 그냥 웃고 말거나 아니면 꾸짖고 나무랄 것이다. 그런데 나라에서 퇴계의 얼굴을 짐작으로 그려서 돈에다 박아 놓고, 퇴계라고 일컬으니 웃기도 뭣하고 나무라기도 뭣하다.
 
  한국인이 돈에다가 퇴계의 얼굴을 짐작으로 그려 놓고서 퇴계라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절실한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아주 높게 사서, 누구든지 퇴계를 본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결과로, 퇴계의 얼굴을 그렇게라도 그려 놓고 크게 받드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우러러 받드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퇴계의 학문과 인격이 어떤 점에서 뛰어난 것인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생각으로 허튼짓을 하면서 다른 속셈을 차리는 일이 되고 만다.
 
  퇴계의 학문과 인격이 뛰어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매우 많지만 핵심을 또렷이 잡아서 알기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퇴계를 전공하는 학자들조차 문집이나 언행록에 나오는 글을 따다가 퇴계의 학문과 인격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만을 거듭 말하고 있다. 이러니 듣고 또 듣고, 읽고 또 읽어도 퇴계의 학문과 인격은 마냥 허공을 떠돌고 있다.
 
  학자들조차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구름 잡듯이 어설프게 말하는 것은 퇴계를 앞에서 마주보지 못하고 밑에서 우러러보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이건 밑에서 위로 우러러보게 되면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주 적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대부분 헛소리가 되고 만다. 우리가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퇴계를 눈앞에 세워 놓고 이리저리 돌려 가면서 이모저모로 묻고 따지고 푸는 일을 당당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퇴계 이황, 그는 누구인가
 
경북 안동 도산서원. 1547년에 세운 한국의 대표 서원이다.
  한국인이 퇴계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학자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퇴계는 살아 있을 때에 이미 학자로서 크게 이름이 났었고, 죽은 뒤에는 더욱 그러했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선비들은 그의 신주를 종묘와 성균관과 전국의 향교, 그리고 스무 곳이 넘는 서원에 모셔 놓고 제사를 지냈다. 그는 조선시대에 제사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는 조선왕조가 사라진 지 100년이 넘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퇴계가 학문으로 이루고자 한 것은 다른 선비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비들이 학문을 한 것은 작게는 벼슬을 얻기 위한 것이고, 크게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
 
  선비들은 벼슬을 위한 학문이 사람다움을 위한 학문에 바탕을 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선비들이 벼슬에 나아가기 위해 과거공부를 하게 되면, 오로지 합격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해야 했기에 사람다움을 위한 학문은 남의 일처럼 뒷전이 되고 말았다. 이런 까닭으로 선비들은 나이가 들어 가고 공부가 깊어질수록, 벼슬을 위한 학문과 사람다움을 위한 학문을 놓고 시름하는 일이 많았다.
 
  퇴계는 새로이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사대부 가문의 촉망받는 자제로 과거공부에 힘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과거에 붙어서 벼슬에 나아가는 일은 홀어머니가 크게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34세에 문과시험에 붙어서 벼슬길로 나아갈 수 있게 돼, 과거 준비를 위한 시험공부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벼슬살이를 위한 학문보다 사람다움을 위한 학문에 마음을 기울이게 되었다.
 
  퇴계는 관리가 되고 나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다른 이들과 겨루고, 다투고, 싸우는 일에는 관심이 적었다. 그는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이루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일에서 더욱 큰 즐거움을 얻었다. 이 때문에 그는 학자로서 묻고, 따지고, 푸는 일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궁금한 일이 있을 때마다 깊이 생각에 빠져서 몸까지 돌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이러한 것이 고질처럼 돼서 어찌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선시대에 선비들은 남송(南宋)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성리학, 곧 주자학을 좇아서 유학을 공부했다. 선비들은 명나라가 주자학을 천하의 학문으로 삼으려고 간행한 《소학집주》 《근사록집해》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서》 《자치통감강목》 《주자대전서》 《주자어류》와 같은 교과서를 그대로 따라서 배웠기 때문에 저절로 주자학도가 되었다. 명나라가 꿈꾸던 주자학의 세계가 조선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퇴계에게 주자는 학자로서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도록 교과서를 만들어 준 사람이었고, 관료로서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서 본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퇴계는 주자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배우고 이루어서 훌륭한 주자학도가 되고자 했다.
 
 
  퇴계가 큰 스승인 이유
 
퇴계 이황 선생의 도산서원 창건 450주년을 맞아 2011년 10월 18일 안동 도산서원에서 유생 80여 명이 참석, 퇴계 선생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퇴계가 학자로서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초학자의 경우에도 성리학의 규모와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했기 때문이다. 그는 성리학의 방대한 내용들 가운데 핵심만을 가려 뽑아서 10개의 그림을 그리고, 밑에다 풀이를 덧붙여서 《성학십도》를 만들어 새로이 임금이 된 선조에게 바쳤다. 그는 열여섯 살의 어린 임금이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곁에 두고서, 밤낮으로 눈길이 닿게 하여 학문에 도움이 되기를 당부하면서, 백성을 덕으로 다스리는 어진 임금이 되기를 바랐다.
 
  《성학십도》가 세상에 나오자, 초학자도 성리학의 골자를 한눈으로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성리학의 뼈대를 이루는 우주론과 심성론과 수양론과 학문론과 교육론이 어떠한 관계로 엮여 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율곡 이이는 이런 일에서 크게 자극을 받아, 성리학의 모든 내용을 하나의 체계에 요약하고 정리해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술했다. 이때부터 학자들은 《성학십도》와 《성학집요》를 길잡이로 삼아, 성리학의 핵심을 곧바로 파고들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로 성리학의 바탕을 이루는 이, 기, 심, 성, 정과 같은 기본 개념을 깊이 묻고 따지고 푸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조선의 성리학이 아주 색다른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퇴계는 평생 동안 오로지 주자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주자학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컸다. 그는 공자와 맹자에서 정자와 주자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정통을 지키고 이어 가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는 유학자일지라도 성리학의 정통에서 벗어난 이들을 단호하게 물리쳤다. 그는 주자와 어깨를 겨루었던 육구연(陸九淵)을 선불교에 흘렀다고 비난했고, 치양지(致良知)를 강조한 명나라의 왕수인(王守仁)을 육구연의 주장과 맥이 닿아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이 성리학과는 거리가 먼 학문을 한 까닭으로 문묘에서 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퇴계가 뛰어난 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여느 선비와는 다른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는 한문을 공부할 때에 한국말을 다루는 태도에서 다른 선비들과 크게 달랐다. 다른 선비들은 한문의 뜻을 한국말로써 풀어낼 때, 한국말의 뜻을 대충 알고서 풀어내는 반면에 퇴계는 한국말의 뜻을 하나하나 깊이 살펴서 속속들이 알고서 풀어내었다.
 
 
  諺解의 단계를 넘어 釋義의 단계로
 
  퇴계는 한문으로 적혀 있는 글의 내용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 한문의 뜻을 풀어내는 한국말의 쓰임새와 짜임새를 깊이 파고들어, 토씨의 미묘한 차이까지 하나하나 살펴서 섬세하게 풀어냈다. 예컨대 그는 《논어》에 나오는 ‘사무사(思無邪)’라는 구절을 한국말을 가지고서 “ 思이 邪이 업스미니라. 思이 邪이 업게 할디니라. ‘업게 할디니라’는 공부의 뜻이 담겨 있다(此有工夫說). 지금 내가 두 가지 풀이, 곧 ‘업스미니라’와 ‘업게 할디니라’를 살펴보니 두 가지 모두 살려 두어야 마땅하지마는, 단지 뒤에 나오는 ‘업게 할디니라’는 마땅히 ‘업게 호미니라’라고 말해야 한다(今按兩說皆當存之, 但下說當云 업게 호미니라)”라고 풀어냈다.
 
  퇴계는 이미 살아 있을 때부터, 한문을 한국말로써 풀어내는 일을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이름이 났었다. 선조 임금이 사서삼경(四書三經)과 같은 경서를 언해하는 일을 가지고, 신하들에게 경서의 토를 고치는 일에 대해서 묻자, 미암 유희춘은 “우리 동방에서 예부터 경전의 뜻을 곱씹어서 맛보고, 주자의 글과 말을 파고들어서 거듭해서 따지기로는 이황만한 사람이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퇴계가 한국말로써 한문의 뜻을 풀어내는 일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임을 말했다. 퇴계는 한문의 뜻을 한국말로 토를 붙여서 간단히 풀어내는 언해(諺解)의 단계를 넘어서, 한국말의 낱말과 토씨의 뜻을 깊이 살펴서 자세히 풀어내는 석의(釋義)의 단계로 나아갔다.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중국에서 가져온 한문을 배우고 쓰는 일은 한국말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예컨대 사람들이 《천자문》을 배울 때에 천(天)과 지(地)를 ‘하늘 천’과 ‘땅 지’로 뜻을 새기고, 교(敎)와 미(美)를 ‘가르칠 교’와 ‘아름다울 미’로 뜻을 새겨서 배웠다. 이런 까닭으로 한국말에서 하늘과 땅, 가르치다와 아름답다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지 못하면 천과 지, 교와 미와 같은 한자를 제대로 배우고 쓸 수가 없다.
 
  그런데 하늘과 땅의 경우에는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사물이어서, 한국말에서 하늘과 땅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지 못해도 천과 지를 배우고 쓸 수 있다. 그러나 가르치다와 아름답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관념이어서, 한국말에서 가르치다와 아름답다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지 못하면 교와 미를 배우고 쓸 수 없다. 이런 까닭으로 추상적 관념을 뜻하는 한자를 배우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것의 뜻을 새기는 한국말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인은 교와 미를 ‘가르칠 교’와 ‘아름다울 미’로 새기면서도, 가르치다와 아름답다의 뜻이 무엇인지 묻지 않게 됐다. 그들은 교와 미를 배울 때에 그냥 ‘가르칠 교’와 ‘아름다울 미’로 외워서 배운다. 이처럼 한자의 새김을 그냥 외워서 배우는 일이 오랫동안 계속되자, 어느 누구도 교와 미를 새기는 가르치다와 아름답다의 뜻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게 됐다. 이에 따라서 ‘가르칠 교’와 ‘아름다울 미’를 열심히 배우더라도 교와 미의 뜻을 아는 일은 끝내 흐릿한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퇴계, 어려운 한자 문구를 우리말로 풀어
 
1975년 8월 14일 현행 원 단위로는 최초로 발행된 1000원권. 퇴계 이황 선생을 모델로 한 1000원권은 그후 수차례 도안 및 크기 개선을 거쳐 오늘까지도 유통되고 있다.
  한국말에서 ‘가르치다’는 ‘갈다+치다’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이때 ‘갈다’는 어떤 것을 소리를 내어서 말하는 것을 말하고, ‘치다’는 어떤 것이 자라나도록 기르는 것을 말한다. ‘가르치다’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에 대해 말해 주어 어떤 것에 대한 앎이나 느낌이 자라나도록 길러 주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아름답다’는 ‘아름+답다’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이때 ‘아름’은 낱낱의 개체를 말하고, ‘답다’는 본래의 자질대로 된 상태를 말한다. 아름답다는 어떤 개체가 갖고 있는 본래의 자질이 다 이루어진 상태를 말한다.
 
  한국인이 가르치다와 아름답다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아는 상태에서 교(敎)와 미(美)를 ‘가르칠 교’와 ‘아름다울 미’로 새겨서 배우게 되면, 교와 미의 뜻을 깊이 묻고, 따지고, 풀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교와 미의 뜻을 골똘히 생각을 하더라도 깊이 들어갈 수가 없다. 이런 까닭으로 한국인은 한문의 뜻을 새기고 푸는 한국말이 어설프면 아무리 한문을 열심히 배우더라도 낱말의 뜻을 대충 알아보는 얼치기 상태에 머물고 만다.
 
  퇴계는 한문으로 된 경전의 뜻을 제대로 알아내기 위해서 한문의 뜻을 풀어내는 한국말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첫째, 퇴계는 책을 읽다가 어려운 한자 문구를 만나면 한국말을 가지고 뜻을 풀어서 알기 쉽도록 했다. 예컨대 환(還)이라는 글자의 뜻을 ‘語辭, 又 도로혀, 다함, 又 다시로, 又 갑다’로 풀고, 한(閒)이라는 글자의 뜻을 ‘노다, 又 쇽절없다, 又 힘힘타’로 풀었다. 송나라의 학자들이 일상말을 글로 적어 놓은 경우에 이런 일이 많았다. 뒷사람들은 퇴계가 제자들에게 한자 문구를 한국말로 풀어 준 것을 모으고 보태어서 《어록해(語錄解)》를 만들었다. 《어록해》가 세상에 나오자, 선비들은 한문의 뜻을 한층 또렷이 알 수 있었다.
 
  둘째, 퇴계는 경전을 읽다가 뜻이 아리송한 곳을 만나면 한국말을 가지고 뜻을 또렷하게 풀어서 드러내었다. 예컨대 《대학》에 나오는 ‘치지재격물’에서 재격물의 뜻을 ‘物을 격하욤에 인나니라, 一云 物에 格홈에, 此說誤’라고 풀었다. 그는 한국말 토씨에서 볼 수 있는 ‘을’과 ‘에’의 차이를 가지고 재격물의 뜻을 ‘물을 격하는 것에 있다’로 풀면 옳은 것이 되고, ‘물에 격하는 것에 있다로 풀면 그른 것이 된다’는 것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뒷사람들은 퇴계가 제자들에게 《사서〉와 《삼경》과 《심경》에서 뜻이 아리송한 곳을 한국말로써 풀어준 것들을 모아서 《사서석의(四書釋義)》 《삼경석의(三經釋義)》 《심경석의(心經釋義)》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석의(釋義)가 세상에 나오자, 선비들은 경전의 뜻을 한층 또렷하게 풀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갖가지로 의문이 일어나면서 여러 가지로 논쟁이 벌어져서 끝없이 이어지게 됐다.
 
 
  한국말로 마음을 노래하다
 
  퇴계는 한국말로써 한문의 뜻을 또렷하게 풀어서 배우는 일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말로써 삶과 학문을 노래해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지었다. 그는 앞의 여섯 곡에서 삶에 대한 포부를 노래하고, 뒤의 여섯 곡에서 학문에 대한 태도를 노래했다. 《도산십이곡》에는 한국인으로서 한국말을 가지고 학문도 하고 생활도 했던 퇴계의 모습이 매우 잘 드러나 있다. 퇴계는 《도산십이곡》을 언문으로 지어 놓고, 그것에 대한 발문을 한문으로 씀으로써 자신의 삶과 학문에서 한국말과 한문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퇴계는 《도산십이곡》을 짓게 된 까닭을 밝혀 놓은 《도산십이곡발》에서 ‘내가 마음에 느끼는 것이 있을 때마다 시에 담아서 드러냈지만, 오늘날의 시는 옛날의 시와 달라서 읊을 수는 있지만 노래로 부를 수는 없다. 노래로 부르고 싶다면 반드시 일상으로 오가는 한국말로 엮어야 한다. 나라의 풍속과 쓰는 말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헐뜯거나 나무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돌이켜 생각하건대, 내가 하는 일이 이즈음의 세속과 약간 맞지 않는 점이 있어서, 이러한 한가로운 일로 말미암아 시끄러움을 일으킬지도 알 수 없거니와, 또한 이러한 노래가 마음의 곡조와 음악의 절조에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가슴에 간직한 속뜻을 낮은 목소리에 담아서 조용하게 드러냈다.
 
  퇴계가 《도산십이곡》에서 노래하고 있는 삶에 대한 포부와 학문에 대한 태도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퇴계는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할 것인가라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알아주는 것을 바탕으로 하나의 큰 우리를 이루고자 한다. 그는 본래의 바탕에 터를 잡고 연기와 노을로 집을 삼고 바람과 달로 벗을 삼아서 허물이나 없는 사람으로 살고자 한다.
 
  둘째, 퇴계는 사람의 본성이 어진 것을 바탕으로 세상에 순박한 풍속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골짜기의 난초와 산마루의 구름을 바라보면서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태평스런 세상을 꿈꾸면서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울려서 생생하게 돌아가는 자연의 흐름과 함께하고자 한다.
 
  셋째, 퇴계는 책을 읽고 생각을 깊게 하여 이치를 깨달음으로써 귀와 눈이 밝아지는 즐거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귀머거리는 벼락을 맞아서 산이 무너져도 듣지 못하고, 장님은 하늘 가운데 해가 떠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하면서 학문으로 귀와 눈을 밝게 할 것을 말한다.
 
  넷째, 퇴계는 옛사람이 나를 볼 수 없고, 나도 옛사람을 볼 수 없지만 그들이 걸어간 길이 앞에 있기 때문에 따라갈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은 어리석은 사람도 알고 할 수 있을 만큼 쉬운 것이지만 제대로 알고 하는 일은 성인도 다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것이다. 사람은 올바른 길을 찾고서 따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깨치고 익히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
 
 
  理發과 氣發
 
銀泥를 입힌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 병풍.
  주자는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소옹, 나경언, 이연평과 같은 학자들이 주장한 바를 이리저리 엮어서 성리학을 집대성하는 과정에 논의를 말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그는 시기에 따라서 또는 경우에 따라서 말을 바꾸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속뜻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이로 말미암아 주자가 살아 있을 때부터 학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로 개념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논란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理)와 기(氣)에 있어서 선(先)과 후(後), 동(同)과 이(異)에 대한 논란, 성(性)에 있어서 물성(物性)과 인성(人性),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대한 논란, 심(心)에 있어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에 대한 논란을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처음으로 주자학을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주자학의 바탕을 이해하는 것조차 버거웠기 때문에 이, 기, 성, 심과 같은 개념에 대한 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가운데, 선비들이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단계에 이르자, 자연히 중요한 개념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게 됐다.
 
  퇴계는 한국말을 가지고 주자학을 깊이 파고들고 풀어내는 과정에 여러 가지로 논란의 씨앗을 만들었다. 퇴계로 말미암아 《대학》에 나오는 격물(格物)의 방법, 《태극도설》에 나오는 태극(太極)과 무극(無極)의 관계, 《중용》에 나오는 솔성(率性)의 성격,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따른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의 갈래와 같은 논의가 생겨나게 됐다.
 
  퇴계의 주장에서 비롯한 논의들 가운데서 가장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사단과 칠정에 따른 이발과 기발에 대한 논쟁이었다. 퇴계는 정지운이 《천명도설》에서 ‘사단은 이에서 발단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단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말한 것을 ‘사단은 이가 발동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동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고쳐야 뜻이 올바르게 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고봉 기대승은 퇴계의 주장대로 고치게 되면, 뜻을 그릇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퇴계가 논란의 중심에 자리하게 됐다.
 
  고봉 기대승은 32살에 문과에 합격해 벼슬길로 들어서자,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58세의 퇴계에게 편지를 보내서 사단과 칠정을 이발과 기발로 나누어서 풀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퇴계가 고봉에게 자신의 주장을 자세히 풀어서 친절하게 답장을 보내자, 두 사람은 나이를 잊은 채로 8년에 걸쳐서 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을 이어 갔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같은 선비들이 논쟁에 뛰어들어 논란을 키우게 되자, 수백 년에 걸쳐서 숱한 시비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됐다.
 
  퇴계는 고봉과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 자신이 주장한 바를 더욱 정밀하게 만들어서 사단은 ‘이가 발동하고 기가 따르는 것(理發而氣隨之)’으로, 칠정은 ‘기가 발동하고 이가 타는 것(氣發而理乘之)’으로 고쳤다. 이로써 그는 이와 기가 하나를 이루고 있지만 서로 섞이지도, 서로 떨어지지도 않는 관계에 있다는 성리학의 대전제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사람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에는 이가 발동하고 기가 따르는 경우와 기가 발동하고 이가 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마음의 일어남은 이와 기로 나누어서 말해야 함을 분명히 했다.
 
 
  당대 선비들은 퇴계의 깊이를 몰라
 
  퇴계는 사람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두 가지로 갈래를 나누어, 이치에 대한 깨달음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사단(惻隱之心,羞惡之心,辭讓之心,是非之心)으로, 기질에서 비롯하는 이끌림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칠정(喜,怒,哀,樂,愛,惡,欲)으로 보았다. 이로써 그는 사람이 말로써 생각을 펼쳐서 갖가지 것을 헤아리고 깨쳐서 갖게 된 이치로부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따로 떼어 또렷하게 보여줄 수 있게 됐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인의예지에 대한 이치를 깨닫고 이룰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개나 돼지가 마음이 일어나는 일에서 서로 다른 것이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퇴계가 이발과 기발에 대한 주장을 폈을 때, 선비들은 그것에 담겨진 뜻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주장을 거부하는 쪽은 물론이고 그의 주장을 수용하는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퇴계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절로 일어나는 일과 뜻으로 일어나는 일, 지각에서 비롯하는 일과 생각에서 비롯하는 일, 기질에 바탕을 둔 일과 이치에 바탕을 둔 일을 나누어서 하나하나 정밀하게 묻고 따지는 것을 깊이 살피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퇴계가 갈래를 섬세하게 나누어서 촘촘하게 풀어내는 단계에 이르면 퇴계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한 상태에서 이리저리 제멋대로 주장을 달리했다.
 
 
  퇴계에게 理는 ‘옳은 것’
 
  퇴계가 사단을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 칠정을 ‘기발이리승지(氣發而理乘之)’라고 말한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이(理), 기(氣), 발(發), 수(隨), 승(乘), 단(端), 심(心), 정(情)의 뜻을 어떻게 새기고 풀어 왔는지 알아야 한다.
 
  중종 때에 만들어진 《훈몽자회》와 선조 때에 만들어진 《한석봉천자문》에는 이를 ‘다스릴 리’, 기를 ‘기운 기’, 발을 ‘베풀 발’, 수를 ‘좇을 수’, 승을 ‘탈 승’, 단을 ‘끝 단’, 심을 ‘마음 심’, 정을 ‘뜻 정’으로 새기고 있다. 당시에 선비들이 한자를 배우고 한문의 뜻을 풀어내는 것은 모두 이러한 새김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퇴계가 사단과 칠정을 이발과 기발로 푼 것도 당연히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퇴계가 이(理)를 발하는 것으로 주장한 것은 당시에 이를 ‘다스릴 리’, 발을 ‘베풀 발’로 새겨 온 전통과 깊이 연관돼 있다. 한국말에서 다스리는 일과 베푸는 일은 사람이 마음으로 이치를 헤아려서 스스로 알아서 하는 일을 말한다. 이러한 것은 퇴계가 어린 시절에 이(理)에 대한 생각을 말한 것에 잘 드러나 있다. 《퇴계언행록》에 따르면 퇴계는 12살에 숙부인 송재선생에게 《논어》를 배웠는데, 하루는 ‘무릇 일에서 옳은 것이 이인 것입니까(凡事之是者,是理乎)’라고 물었고, 송재는 기뻐하면서 ‘너는 이미 글의 뜻을 깨쳤다’라고 말했다. 퇴계에게 이(理)는 ‘옳은 것(是者)’이면서 ‘~인 것(是)’이다. 이 때문에 인의예지의 이치에서 비롯하는 사단을 이가 발하는 것으로 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인은 한자를 배울 때에 이를 ‘이치 리’, 발을 ‘필 발’로 새긴다. 그런데 이를 ‘이치 리’로 새기는 것은 그 글자로써 그 글자를 푸는 것이어서 뜻을 새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발을 ‘필 발’로 새기는 것은 한자의 뜻을 새기는 것이 맞지만 ‘피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른 상태에서 그냥 ‘필 발’로 새겨서 외운다. 이러니 퇴계가 살아가던 때에 이와 발을 어떻게 새기고 풀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학자들조차 ‘다스릴 리’에서 볼 수 있는 임자의 줏대와 ‘베풀 발’에서 볼 수 있는 임자의 펼침에 대해서 전혀 생각을 못한 상태에서 말하고 싶은 대로 마구 떠들어 대고 있다.
 
 
  퇴계와 큰 사람
 
경북 안동의 유교문화박물관에 전시된 퇴계 선생의 서책.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되고자 한 사람의 모습은 큰 사람이었다. 그들은 학문으로 덕(德)과 인(仁)을 깨치고 익혀서, 생활로 그것을 이루고 쌓음으로써 갖가지 것을 하나로 어우를 수 있는 큰 사람이 된다고 보았다. 그들은 덕과 인을 큰 사람으로 나아가는 바탕으로 보았기 때문에 덕을 ‘큰 덕’, 인을 ‘클 인’, 의를 ‘클 의’로 새기고 풀었다. 예컨대 《광주천자문》에는 덕을 ‘큰 덕’, 인을 ‘클 인’, 의를 ‘클 의’로 새기고, 《석봉천자문》에는 덕을 ‘큰 덕’, 인을 ‘클 인’으로 새기고, 《훈몽자회》에서는 덕을 ‘큰 덕’, 인을 ‘클 인’으로 새기면서, 의의 경우에는 ‘맞을 의’라고 새기는 동시에 우리나라에서는 ‘클 의’라고 새겨 왔다고 말하고 있다.
 
  퇴계는 ‘큰 덕’, ‘클 인’, ‘클 의’를 바탕으로 세상에 널려 있는 모든 것을 하나로 어우를 수 있는 큰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가 나이가 드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학문에 깊이 빠져든 것은 학문으로 인격을 도야해 큰 사람이 되는 꿈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큰 사람이 되는 일에서 무엇보다도 큰 즐거움을 얻고 누렸다. 그는 이러한 즐거움을 더욱 고스란히 얻고 누리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두 개의 별호(別號), 곧 도산(陶山)과 퇴계(退溪)에 담아서 쉼 없이 열심히 가꾸어 나갔다.
 
  퇴계가 별호로 지은 도산은 사람이 끊임없는 도야(陶冶)의 과정을 거쳐서 큰 사람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러한 도야의 과정은 사람이 대상을 알아보고, 알아듣고, 알아차리고, 알아내고, 알아주고, 알아 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런 까닭으로 인격을 도야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문을 통해서 대상을 알아 가는 일을 깊고 넓게 만들어 가는 일이다. 퇴계에게 학문은 도야가 이루어지는 바탕을 갖추는 일이었다.
 
  퇴계가 되고자 한 큰 사람은 이쪽과 저쪽의 사이를 좋게 하는 일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국인은 사람이 제 밖에 있는 다른 것을 보아 주고, 들어 주고, 알아 주고, 돌보아 주어서 사이좋게 만들 때에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사이를 좋게 함으로써 좋은 사람이 된다. 퇴계가 되기를 바라는 큰 사람은 널리 사이를 좋게 하는 사람이다. 그는 세상에 널려 있는 모든 것들과 사이를 좋게 함으로써 아주 큰 사람이 되고자 했다.
 
  사람이 인격을 도야해 내 쪽과 네 쪽을 사이좋게 하는 것은 네 개의 단계를 밟아서 이루어진다.
 
  첫째, 사람은 갓 태어났을 때에는 오로지 저만 좋은 상태에 있기를 바란다. 갓난아기는 다른 사람의 바람이나 처지를 전혀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제가 좋은 것만 찾는다. 이것이 오로지 저만이 좋기를 바라는 개체 좋음의 단계이다.
 
  둘째, 사람은 태어나서 다른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는 과정에서 함께하는 이들의 바람이나 처지를 알아줄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이때부터 사람은 저들이 함께 좋은 상태에 있기를 바라는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저들끼리 함께 좋기를 바라는 집단 좋음의 단계이다.
 
  셋째, 사람은 저들의 밖에 남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남들을 알아줄 수 있는 힘을 갖는다. 남은 저들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깊이 살피고 깨달아야 남을 알아주는 마음이 생겨난다. 이런 사람은 남들까지 함께 좋은 상태에 있기를 바라는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저와 저들과 남들을 아우르는 모든 사람이 함께 좋기를 바라는 보편 좋음의 단계이다.
 
  넷째, 사람은 남의 밖에 갖가지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것들을 알아줄 수 있는 힘을 갖는다. 것은 남의 바깥에 그냥 물건으로 있기 때문에 아주 깊이 살피고 깨달아야 것을 알아줄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난다. 이런 사람은 것들까지 함께 좋은 상태에 있기를 바라는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저와 저들과 남들과 것들을 모두 아우르는 존재 좋음의 단계이다.
 
  사람은 인격을 도야해 모든 것과 어울릴 수 있는 힘을 갖춤으로써, 저들끼리 고루 하면서 남까지 두루 하고, 모든 것과 함께하는 삶을 꿈꿀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과 함께 어울려서 천지만물과 하나를 이루는 물아일체, 무위자연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퇴계가 도산서당을 지어서 이루고자 한 큰 뜻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와 세상살이
 
  퇴계는 문과를 거쳐서 벼슬에 나아간 뒤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벼슬살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아서 언제나 자연을 노래하면서 전원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이런 까닭으로 임금은 퇴계에게 벼슬을 내려서 서울로 불러올리고, 퇴계는 임금에게 벼슬을 돌려주고 시골로 물러나는 일이 거듭됐다.
 
  퇴계가 벼슬을 마다하고 시골로 물러나고자 한 것은 퇴계(退溪)라는 별호에 그 뜻이 잘 드러나 있다. 퇴계는 ‘물러나 있는 골짜기’를 뜻하는 동시에 ‘골짜기로 물러남’을 뜻한다. 그는 벼슬살이를 하는 일과 인격을 도야하는 일이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벼슬살이의 세계에서 권세를 다투는 일과 인격을 도야해 큰 사람이 되는 일을 함께 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골짜기로 물러나고자 했다.
 
  퇴계가 학자로서 꿈꾸었던 것은 끼리끼리 뭉쳐서 이익을 다투는 것을 벗어나서 남과 두루 하고, 것과 함께하는 큰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그는 선비들이 수십 년에 걸쳐서 인의예지를 공부한 사람임에도 끼리끼리 뭉쳐서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고 다투고 싸우는 일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싸움을 함께 할 수도 없고, 그치게 할 수도 없고, 두고 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마냥 물러나는 쪽을 생각했다.
 
  퇴계는 시골로 물러나도 끼리끼리 뭉쳐서 이익을 다투는 모습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시골에서도 양반이 상민을 누르고, 적자가 서자를 깔보고, 주인이 노비를 사고파는 일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까닭으로 그는 가족이나 이웃에서 떨어진 호젓한 골짜기에 작은 서당을 짓고서 사람다움을 꿈꾸었던 옛사람이 걸어간 길을 따라 걸었다. 그는 끼리끼리를 넘어서 남까지 두루 하고 것까지 함께할 수 있는 온전한 삶을 맛보고자 했다. 그는 깨달음이 무르익어 흥에 겨운 날이면 안개와 노을로 집을 삼고, 바람과 달을 벗을 삼아 모든 것과 함께 어울리는 즐거움을 노래했다.
 
 
  주자학자로서 퇴계보다 한국인으로서 퇴계에 주목
 
  오늘날 우리가 옛사람인 퇴계를 놓고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거듭하는 것은 퇴계가 소중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퇴계가 어떤 점에서 소중한 사람인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퇴계는 남의 나라의 글을 가져다가 공부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좋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는 한국인이 일상으로 쓰는 말(한국말)과 글(언문)을 가지고 중국에서 가져온 한문을 야무지게 묻고, 따지고, 풀었기 때문에 중국인도 생각하지 못한 곳까지 나갈 수 있었다. 이런 것은 《어록해》 《사서석의》 《삼경석의》 《심경석의》와 같은 것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둘째, 퇴계는 마음을 노래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좋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는 한국인이 한문으로 시를 짓더라도 마음을 노래하는 일은 한국말로써 해야 함을 분명히 했다. 그래야 몸과 마음이 하나를 이루어서 신이 나고 흥이 솟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언문으로 쓴 《도산십이곡》과 한문으로 쓴 《도산십이곡발》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셋째, 퇴계는 남의 나라에서 가져온 개념을 따라서 배울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좋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가 주자학을 배우는 일은 한국인이 한국말로써 갈고 닦아 놓은 개념을 가지고 중국인이 중국말로써 갈고 닦아 놓은 개념을 비춰 보아서 묻고, 따지고, 푸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는 이쪽과 저쪽의 개념을 하나로 아울러서 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됨으로써, 주자를 따라 배웠음에도 주자를 넘어서는 학자가 됐다. 이런 것은 퇴계가 사단과 칠정을 이발과 기발로 나누어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풀어내는 것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넷째, 퇴계는 학자가 학자로서의 분수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좋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는 선비들이 학문을 핑계로 끼리끼리 뭉쳐서 목숨을 걸고 권세를 다투는 것을 보면서 함께하지도 못하고, 그치게 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이러한 처지를 당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헤아리고, 그 가운데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을 가려서 그대로 이루고자 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시골로 물러나 학자로서의 분수를 지키며, 학문을 이루고 사람을 기르는 일에 힘을 쏟는 일이었다.
 
  퇴계는 남이 힘이 들어서 하지 않거나 꺼려서 하지 않는 일까지 꾸준히 참고 이뤄 내어 큰 학자가 됐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선비들은 그를 누구보다도 크게 높이고 받들었다. 《퇴계언행록》에 실려 있는 퇴계의 모습은 지극히 어질고 밝고 슬기로워서 마치 밝은 해가 하늘 높이 솟아서 온 누리를 환히 비추고 있는 것과 같다.
 
  선비들은 퇴계를 더없이 높이면서도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에는 관심이 적었다. 그들은 퇴계가 한국말로써 한문을 공부하던 방식, 퇴계가 한국말로써 마음을 노래하던 방식, 퇴계가 한국말로써 개념을 다루던 방식, 퇴계가 학자로서 분수를 지키던 방식을 가볍게 보아 넘겼다. 그들은 저마다 제 욕심을 차리는 일에 퇴계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자 했다. 이런 까닭으로 퇴계는 더욱 높아지고, 주자학은 더욱 융성해지는데도 당쟁은 날로 심해지고, 백성은 날로 고달파져서 결국에는 나라까지 잃어버리게 됐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퇴계는 중요한 분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퇴계가 중요한 것은 주자학자로서 퇴계보다 한국인으로서 퇴계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퇴계의 언행을 차분히 곱씹고 되새겨서, 우리에게 소중한 퇴계가 어떤 것인지 밝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옛날과 마찬가지로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퇴계를 끌고 다니는 일을 되풀이하게 된다. 이러니 우리는 퇴계를 말할 때마다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 얼치기로서 나대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 묻고 또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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