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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을 만든 사람들

IMF 사태를 넘어

“합의서명 사진 보며 당시의 치욕과 부끄러움 되새긴다”

글 :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

정리 : 서철인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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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흘린 전쟁은 아니었지만 외환위기는 우리 역사의 가장 참담했던 경제적 수모 중 하나다. 외환위기는 그야말로 ‘국난’(國難)이었고, IMF 협상 테이블은 총성 없는 전쟁터였다. 당시 한국은 잠시 몸을 피할 참호 하나 파 놓지 못한 상황에서, 국제적 룰과 심판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는 강력한 상대와 협상을 해야 했다.

⊙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으로 인한 금융·기업부실 누적돼 오다 외부 충격으로 폭발
⊙ 기아그룹 문제 해결 시간 끈 것이 가장 뼈아픈 패착
⊙ IMF 측 ‘협약 내용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3당 후보의 각서까지 요구
⊙ 성공보다 실패가 우리 삶에 더 큰 교훈을 준다는 것 뼈저리게 느껴
⊙ 개방화·세계화 통해 우리 경제구조 시장형으로 변해

鄭德龜
⊙ 1948년생.
⊙ 고려대 상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메디슨교 경영대학원 졸업.
⊙ 재정경제원 대외경제국장, 기획관리실장, 제2차관보, IMF협상 수석대표, 재정경제부 차관,
    산업자원부 장관, 제17대 국회의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및 국제금융연구센터 소장 역임.
⊙ 저서: <거대중국과의 대화> <키움과 나눔을 넘어서> <외환위기 징비록> 등 다수.
임창렬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가운데)과 미셸 캉드쉬 IMF 총재(오른쪽)가 1997년 12월 3일 오후 세종로 정부청사에서 내외신 보도진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국제통화기금(IMF) 긴급자금지원 최종 협상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왼쪽 끝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개인적으로 내가 겪은 외환위기 경험은 아주 특별하다. 우선 위기발생 원인의 생성과 축적, 위기의 확산, IMF 협상, 뉴욕외채협상, 외평채 발행, 저금리 체제 전환, 금융·기업 구조조정, 중소기업 긴급보호 등 외환위기의 전 과정에 현역 경제관료로 직접 참여했다.
 
  소를 잃는 데도 기여하고, 외양간을 고치는 데도 기여한 셈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우리 경제의 배를 가르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고, 호수의 물이 완전히 말라 바닥이 드러난 뒤 밑에 널려 있는 수많은 쓰레기를 치우는 경험도 하였다.
 
  돌이켜 보면 1997년은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 못지않게 아쉬움도 큰 해였다. 당시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했더라면 온 국민에게 지독한 고통을 안긴 IMF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말이다. 위기가 목전에 닥치기 전까지 수차례에 걸쳐 경보음이 울렸건만 그때마다 이를 무시했다는 후회도 막급했다. 1997년 말 서울 힐튼호텔에서 밤을 꼬박 새우며 IMF와 자금지원 협상을 벌일 때, 그리고 1998년 초 뉴욕외채협상 테이블에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들을 받아들여야만 했을 때 나는 참을 수 없는 모멸감과 울분으로 잠을 설치곤 했는데 그때마다 초동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쉬움이 가슴을 짓눌렀다.
 
 
  1980년대 초부터 누적돼 온 위기
 
1997년 10월 19일 당-정 정책협의에서 강경식 부총리(가운데)가 재정경제원 정덕구 기획관리실장(왼쪽), 윤증현 금융정책실장(오른쪽)과 함께 증시 추가 부양책을 신한국당 이해구 정책위의장 등에게 설명하고 있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는 어느 날 갑자기 닥친 환란이 아니었다. 과거로부터 서서히 누적돼 왔던 것이 외부 충격으로 한순간에 폭발했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1980년대, 특히 우루과이라운드가 시작된 1987년부터 세계 경제 시스템은 개방을 통한 경쟁체제로 급속히 바뀌었다. 국제정치 또한 냉전체제에서 탈냉전체제로 이행되면서 경쟁을 가속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세계 각국의 최우선 과제는 바로 생존하는 것이었다. 국가는 물론 기업과 개인 모두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한국은 달랐다. 1987년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과 함께 정치가 경제를 압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문제를 경제논리보다는 정치논리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사회 각 분야에서 일었다. 5년 대통령 단임 정치의 폐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세계는 급격히 탈냉전화하고 있었으나 한반도에서만은 여전히 남과 북이 대치하는 냉전체제가 지속되고 있었다.
 
  국내의 정치·경제 지배구조 역시 낡은 면모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내외 상황이 변함에 따라 국내 정치와 경제구조 역시 그에 걸맞게 바뀌어야 했음에도 전혀 그렇지 못했다. 여전히 박정희식 개발 모델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고 있었다. 더욱이 정치인-관료-재벌로 이어지는 트로이카 의사결정구조는 건재했고, 이를 대체할 시장형 의사결정기구와 새로운 정부기능은 아직도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5년 단임 대통령들은 자기 임기 동안의 전환기 관리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이연(移延)시키면서 위기관리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특히 집권 말기에는 권력누수 현상으로 위기에 거의 손을 쓰지 못했다. 바로 이러한 취약 시기에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닥쳐 왔던 것이다.
 
  전환기적 상황에선 대의(大義)를 위해 소리(小利)를 희생시키는 다소 잔인한 선택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5년 단임 대통령, 또는 그 뒤를 이을 대통령 후보들은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는 쪽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다. 위기에 대한 근본적 처방을 내놓기보다 ‘표와 국민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한국 정치권과 정부가 1997년 8월 또는 9월에 집중력을 발휘해 위기를 관리했었다면, 또한 국회가 제때 금융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면 어떻게 됐을까 종종 생각해 본다. 아마 환란을 외화유동성 위기단계로 축소하고, 그 발생 시점도 1998년 이후로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며, 1998년 4월의 러시아 위기와 1999년 7월의 대우그룹 부도 사태, 그리고 그 이후 수차례 이어진 여진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두 번의 경보음 외면
 
한보사태로 구속되는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 한보사태는 IMF사태로 가는 예고음이었다.
  한국 경제가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던 1997년, 위기를 알리는 징후는 여러 차례 있었다. 첫 번째 경보음이 울렸던 시기는 한보철강 부도 이후 기아그룹 부도유예 적용 전까지라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대기업 부도’라는 경제 문제는 국회 청문회를 거치며 정치 문제로 비화됐고, 그 과정에서 시중은행장들이 구속됐다. 특히 한보그룹의 여신을 맡았던 은행 임원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일련의 비정상적인 사태가 이어지면서 금융권의 기능은 마비됐고, 이는 결국 기업 연쇄부도의 단초를 제공했다.
 
  두 번째 경보음은 동남아 국가들의 외환위기였다. 이는 나라 밖에서 울려온 사이렌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과 비슷한 경제구조와 성장역사를 갖고 있는 동남아시아 각국이 외환위기에 처했을 때 한국 정부는 한보와 기아사태로 인해 밖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기아그룹 문제를 이런저런 이유로 단숨에 해결하지 못한 채 시간을 끈 것이 가장 뼈아픈 패착이었다.
 
  한보철강의 자금난과 부도설은 이미 1996년 7월부터 주식시장과 주변에 유포되고 있었다. 다만 1996년 9월부터 그해 연말까지 시중은행들이 4000억원을 지원한 데 이어 1997년 1월 초 다시 1200억원을 긴급 지원해 간신히 시간을 벌고 있을 뿐이었다.
 
  한보철강의 부도는 금융시장 경색이라는 후유증을 낳았을 뿐 아니라 한국 경제 전체에 큰 부담을 안겨 줬다. 부도를 낸 한보철강의 1997년 2월 기준 자산은 5조원이었다. 하지만 총부채는 그보다 1조6000억원이나 많은 6조6000억원에 달했다. 이 차액은 고스란히 금융기관의 손실로 돌아갔다.
 
  3월 초에는 쌍용, 두산, 한일, 진로, 거평그룹 등이 위험하다는 루머가 증권시장 주변을 맴돌았다. 금융시장의 악순환으로 삼미특수강과 진로그룹이 부도를 냈다. 금융시장이 극도의 혼란에 빠질 위험에 처하자 은행들이 부도위기에 처한 기업의 어음을 일정 기간 돌리지 않기로 약속하는 부도유예협약을 맺었지만 미봉책(彌縫策)에 불과했다.
 
  대농, 한신공영, 부산 태화백화점 등이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기아그룹도 자금압박으로 위태위태했다. 한보그룹 부도 이후 신용위험에 민감해진 제2금융권이 부실기업 대출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자 기아그룹이 자금난에 빠진 것이다. 기아그룹은 과잉투자와 판매부진으로 부채가 많은 데다 단기부채비율이 50%가 넘었다. 기아그룹도 부도유예협약 대상으로 전락했다.
 
  정부와 채권단의 기아 처리 방안은 단순 명확했다. 다른 부실기업과 마찬가지로 먼저 경영진을 퇴진시킨 뒤 채권단이 중심이 돼 각 계열사에 대한 정밀실사를 벌여 회생 가능한 기업은 살리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정리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런 부실기업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김선홍(金善弘) 기아그룹 회장은 채권단의 퇴진 요구를 이런저런 핑계로 따돌렸다. 그러는 사이 시장에 악성 루머가 유포됐다. 금융시장에 불안이 커져 가자 정부는 기아자동차를 법정관리에 넣은 뒤 산업은행이 출자전환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이를 기아의 공기업화, 국유화로 받아들여 주식을 대거 매도했다. 그로 인해 주가가 폭락했고, 한국의 대외 신인도가 크게 추락했다.
 
  기아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무디스와 S&P(스탠더드앤드푸어스) 등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낮췄다. 신용평가사들이 한국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하자 국내에 들어와 있던 외국자본은 기다렸다는 듯 서울을 빠져나갔다.
 
 
  국가신용등급 추락
 
임창렬 경제부총리가 1997년 11월 30일 밤 서울 힐튼호텔에서 ‘IMF와의 협상이 타결됐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 금융시장은 1997년 10월 말부터 일대 혼란에 빠져들며 붕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태국에서 시작된 동남아시아 외환위기가 마침내 서울에 도달한 것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기아사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사태수습에 나섰으나 국제 금융계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 한국을 떠난 상태였다. 게다가 동남아시아 외환위기가 서서히 북상해 홍콩 주식시장마저 폭락을 거듭했다. 800억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던 홍콩도 국제 투기자본의 공격에 흔들리고 만 것이었다.
 
  재경원은 10월 29일 채권시장 조기 개방과 현금차관 도입 확대, 예치 및 소지 목적의 외화매입 금지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금융시장안정대책’을 서둘러 내놓았다. 한국은행은 달러화에 대한 시중의 수요를 잡기 위해 시중은행에 1만 달러 이상의 달러를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실수요증명서를 받도록 긴급 지시했다. 외환시장의 안정을 겨냥한 조치들이었다.
 
  그러나 한번 신뢰를 잃은 외환시장은 정부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환율이 급락하며 좀처럼 안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재경원은 더욱 강력한 처방을 했다. 금리나 환율 가운데 하나를 포기하는 대신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외환 중에서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것을 투입해서 환율을 방어한 것이다.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0월의 마지막 날 무디스는 국내 4개 주요 은행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했다. 외환은행의 장기신용등급을 Baa1에서 Baa2로, 제일은행과 서울은행, 상업은행의 장기신용등급을 Baa2에서 Baa3로 떨어뜨렸다. Baa3는 투자부적격 단계인 정크본드(Junk Bond) 바로 위 등급이었다. 이날 환율과 코스피는 더욱 폭락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느낌이었다. 재경원은 달러 이탈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를 확대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소용없었다.
 
  다급해진 정부는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일본 정부는 미국과 합의한 내용을 들며 거절했다. 동남아시아 외환위기가 확산되자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11월 초 일본 총리에게 보낸 공식서한을 통해 금융위기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가 생기더라도 양국 간 해결방식을 취하지 말고 IMF를 통해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요청했다.
 
  마지막 탈출구였던 일본으로부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정부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IMF에 도움을 요청하는 길밖에 없었다.
 
 
  강경식 재경원 부총리 전격 교체
 
  1997년 11월은 숨 가빴다. 일요일에는 캉드쉬 총재와 강경식(姜慶植) 부총리의 극비 회동이 있었고, 화요일에는 금융개혁법안의 국회통과가 무산됐다. 가장 바쁜 날은 19일이었다. 이날 아침 재경원 금융정책실은 오후 강경식 부총리가 발표하기로 예정돼 있었던 금융시장안정대책 보도자료를 만들고 내용을 점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10시 쯤 청와대에 보고하러 들어갔던 강 부총리가 경질되고 후임으로 임창렬(林昌烈) 통상산업부 장관이 임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돌발 사태였다. 금융시장안정대책을 준비하느라 바삐 움직이던 금융정책실 직원들은 강 부총리 이임식에 참석하랴, 신임 임 부총리에게 보고할 현안자료 챙기랴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움직여야 했다.
 
  당시 나는 재경원 살림을 총괄하는 기획관리실장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부총리 이임식과 취임식을 준비하는 일을 맡았다. 임 부총리는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부총리 집무실에서 윤증현 금융정책실장으로부터 전임 부총리가 준비해 놓은 금융시장안정대책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임 부총리는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대부분 수긍했으나 환율변동폭을 15%로 확대한다는 대목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환시장의 상황으로 미뤄볼 때 환율변동폭이 늘어나는 만큼 원화가치가 절하될 것이 분명한데 확대 폭이 너무 크지 않으냐는 의견이었다. 임 부총리는 환율변동폭을 일단 10%까지만 확대해 놓고 시장상황을 지켜보자고 제안했다.
 
  임 부총리는 “정부가 이번에 발표한 금융시장안정대책이 외국 기관투자가들의 호응을 얻어 외채상환 기간이 연장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낙관론을 폈다. 강경식 전임 부총리는 이날 “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한다”는 입장을 밝힐 예정이었다. IMF행을 부인했다는 점에서 임 부총리는 전임 부총리와 거꾸로 간 것이었다.
 
  당시 재경원 직원들은 임창렬 부총리의 기자회견을 지켜보면서 그가 일부러 IMF행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임 부총리는 일단 뭔가 노력을 해 본 후 그래도 안되면 IMF로 가겠다는 판단에 그같이 발언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초기 위기대응에 실패하면서 그동안 묻혀 있던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각 부문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악순환의 고리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외화유동성 위기는 금융위기로 이어졌고, 이는 경제 전반의 위기로 확산됐다. 아울러 대량 실업과 자살 등 심각한 사회문제도 야기했다. 외화유동성 공급만으로 상황을 정리하기에는 위기가 너무 깊고 넓게, 그리고 길게 진행됐던 것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우리나라는 3개의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첫 번째 터널은 IMF 등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부족한 외화유동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우리는 위기가 재발하지 않도록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구조개혁을 단행해야 했다. 그것이 두 번째 터널이다. 세 번째 터널은 미시·거시경제를 선순환 궤도로 재진입시키는 것이었다.
 
  1997년 11월 당시 한국 정부의 외환보유고는 계정상으로만 볼 때 적지 않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당장 사용가능한 외환보유고는 100억 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
 
 
  IMF의 가혹한 협상 조건
 
임창렬 부총리(오른쪽)가 1997년 12월 3일 정부제1청사에서 자신이 서명한 IMF 구제금융신청 의향서를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에게 넘겨주면서 악수를 하고 있다.
  1997년 11월 26일, 정부와 IMF 간 협상이 시작될 즈음 재경원 제2차관보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재경원 제2차관보는 국제금융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나는 정부와 IMF 간 자금지원 협상을 맡게 됐다.
 
  IMF는 한국 정부가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가혹한 조건들을 제시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후진국형 경제체질을 선진국형으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당장은 입에 쓰지만 장기적으로는 몸에 좋은 보약”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IMF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체질개선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요구대로 우리 금융시장의 빗장을 일거에 풀어 버리면 국내 금융기관이나 기업들은 막대한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다.
 
  재경원 협상팀은 한국의 경제상황을 최대한 반영한 협상조건을 IMF에 내밀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 경제시스템이 붕괴된 것을 눈으로 확인한 IMF 협상팀은 한국 정부가 제시하는 자료조차 믿으려 하지 않았다.
 
  IMF는 기본적으로 자유시장경제를 표방하고 있다. 그 나라가 IMF의 조건들을 수용하게 되면 그 나라의 경제시스템 또한 자연스럽게 아메리칸 스탠더드에 맞춰지게 된다. 거칠게 말하면 IMF의 조건을 수용한다는 의미는 곧 미국 경제의 우산 아래로 편입되는 것을 뜻한다. 재경원 실무팀은 IMF와의 협상과정에서 미국의 이 같은 속셈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재경원은 협상팀을 구성한 뒤 곧바로 협상전략을 세웠다.
 
  IMF와의 협상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될 분야는 금융부문 구조조정이라 예상했다. 그중에서도 금융기관 통폐합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IMF는 부실 금융기관을 정리하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높았다. 재경원은 영업폐지보다는 합병과 영업양수도(어떤 회사의 영업사업 부문을 다른 회사에 매각하는 것) 등을 통해 부실 금융기관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눈물의 합의서 초안
 
  11월 28일 금요일은 IMF와 협상을 벌이던 재경원 직원들에게 몹시 바쁜 하루였다. 이날은 한국 정부와 IMF 간의 협상에서 분수령이 된 날이었다. 임창렬 부총리는 이날 일본으로 건너가 미쓰즈카 대장상에게 도움을 청했다. 미쓰즈카는 “한국이 무너지면 일본도 흔들린다”며 IMF와 별도로 한국에 달러를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는 “IMF 지원을 받는 게 옳다”며 거절했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까지 나섰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일본이 등을 돌리자 IMF와 협상을 벌이고 있던 재경원은 상심했다. IMF가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한국 정부로서는 수용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코너’에 몰린 것이다.
 
  이날 오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청와대에 전화를 걸었다. 클린턴은 김 대통령에게 “한국의 외환위기는 심각하다. 서둘러 IMF와 협상을 끝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한국은 심각한 국면에 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점잖은 조언이었지만 속뜻은 경고에 가까웠다.
 
  클린턴 대통령의 전화 한 통은 위력이 컸다. 김영삼 대통령은 곧 바로 강만수(姜萬洙)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IMF와의 협상을 서둘러 12월 초까지 끝내라고 지시했다.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협상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재경원은 일단 협상에 꼭 필요한 소수 정예로 별도의 협상팀을 구성해 힐튼호텔에 투입하기로 했다. 내가 IMF 협상의 전면에 나선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강만수 차관이 힐튼호텔에 파견된 한국 협상단의 수석단장이었고, 나는 교체 수석대표였다.
 
  힐튼호텔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11월 28일 늦은 오후였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한국 협상단의 의지는 결연했다. 11월 28일 힐튼호텔에서의 첫날밤, 한국 협상단은 한데 모여 IMF의 요구사항이 무엇일지 점검하고 그에 대한 대응논리를 찾느라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한국 협상단이 밤샘 논의를 끝내고 잠깐 쉬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 29일 새벽 6시30분쯤 IMF 실무협상단이 자금지원 조건을 제시해 왔다. ‘대기성 차관의 정책이행 조건’이란 명칭의 문건, 이른바 합의서 초안이었다.
 
  ‘한국 정부는 앞으로 3년간 IMF와 합의한 대기성차관협정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IMF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다.’
 
  합의서 초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이어 한국 정부와 IMF가 합의해야 할 3년간의 경제조정 프로그램 내용이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이 초안에 임창렬 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서명해서 IMF 이사회에 제출하면 협상은 끝나는 것이었다.
 
  협상조건을 꼼꼼히 읽어 보던 한국 협상단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IMF가 제시한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한국 경제와 국민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3당 후보의 각서까지 제출
 
임창렬 부총리(가운데)와 이경식 한국은행총재(오른쪽)가 1997년 12월 3일 정부제1종합청사에서 IMF 구제금융신청 의향서에 서명하는 모습을 미셸 캉드쉬 IMF 총재(왼쪽)가 바라보고 있다.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다.
  합의서 초안이 제시된 이후 12월 3일까지 약 5일 동안 한국과 IMF의 실무협상단은 열 차례 이상 합의서 초안을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협상이 그만큼 치열했다.
 
  IMF와 가장 첨예하게 맞붙었던 쟁점은 부실 종금사 가운데 몇 개를 폐쇄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IMF에서는 합의서가 IMF 이사회에 올라가기 전에, 즉 캉드쉬 총재와 임창렬 부총리가 합의서에 공식 사인하기 전에 12개 부실 종금사를 퇴출시키라고 요구했다. 오랜 줄다리기 끝에 재경원은 청솔, 경남, 경일, 고려, 삼삼, 신세계, 쌍용, 한솔, 항도 등 9개 종금사의 업무를 정지시켰다.
 
  여기서 한 가지 해 두고 싶은 말은 “종금사를 먼저 정리해야 달러가 들어온다”는 IMF의 주장에 밀려 협상이 타결되기 전에 종금사를 무더기로 영업정지시켰지만, 당시 일부에서 문제 삼았던 것처럼 정부가 부실은행을 살리기 위해 종금사를 희생시켰다거나, 영업정지 대상 종금사를 선정하는 과정에 어떤 의도가 개입된 사실은 결코 없었다는 것이다.
 
  12월 3일 아침 7시35분. 그동안 나이스 단장을 원격조종하며 한국을 애먹이던 캉드쉬 총재가 김포공항으로 입국했다. 임창렬 부총리와 김영삼 대통령 등을 만나 한국 정부를 굴복시키기 위해 온 것이다. 임 부총리와 캉드쉬 총재는 곧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한국 협상단에서는 내가, IMF 실무협상단에서는 나이스 국장이 배석했다.
 
  네 사람이 협상에 대해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누던 중 캉드쉬 총재가 갑자기 임 부총리와 할 얘기가 있다며 나와 나이스 단장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방에서 나오면서 순간 새롭고 까다로운 조건이 추가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아니나 다를까, 20~30분이 지나서 임창렬 부총리가 나를 방으로 부르더니 한국말로 “저 친구가 꽤 까다롭게 나오는구먼, 3당 대통령 후보의 각서를 받아 오래. 일단 청와대에 보고를 해야겠지”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자금지원 합의서까지 작성해 놓고 서명식만 남겨 놓은 상황에서 새삼 밀고 당기기를 할 처지도 아니었다.
 
  청와대에 캉드쉬 총재의 요구를 있는 그대로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청와대 경제수석실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그쪽이라고 별다른 묘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캉드쉬 총재가 요구하는 대로 해야지, 어쩔 도리가 없는 것 아니냐”는 김영삼 대통령의 의중을 전해 들은 게 오전 10시30분쯤이었다. 오전 중 하기로 했던 서명식은 오후로 미루고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3당 후보들로부터 각서를 받아 오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3당 후보의 각서를 받는 임무는 내게 떨어졌다. 일단 총지휘는 내가 맡고, 재경원 고위 간부들이 직접 3당 후보를 찾아가서 서명을 받아 오기로 했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에게는 강만수 차관이, 국민신당 이인제(李仁濟) 후보에게는 안병우(安炳禹) 차관보가 가기로 했다. 문제는 당시 제1야당이었던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 후보였다. 여당과 정부의 실정(失政)으로 나라 경제가 나락에 떨어진 만큼 그 책임은 여당과 정부가 져야 한다는 것이 국민회의와 김대중 후보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쉽게 각서에 서명하지 않을 게 뻔했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끝에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김원길(金元吉) 정책위의장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김원길 의장은 오랫동안 재경위에서 활동했던 국민회의 내 경제통이어서 재경원의 딱한 처지를 이해해 줄 것으로 믿었다. 우여곡절 끝에 3당 후보의 각서를 모두 받았다.
 
 
  3당 후보 성격 드러낸 각서
 
  각서에는 현 정부와 IMF 간에 체결된 협약 내용을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3당 후보들의 약속이 담겨 있었다. 각서에 서명을 하는 데도 3당 후보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회창 후보는 재경원에서 만든 원안에 직접 서명했고, 이인제 후보는 재경원의 원안에 자신의 인장으로 박범진 사무총장이 대신 날인하게 했다. 그러나 김대중 후보는 재경원 원안을 일일이 살펴본 뒤 일부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수정했다. 김대중 후보는 각서를 받으러 온 김원길 의장에게 IMF 사태를 촉발한 책임은 현 정부(김영삼 정부)에 있다는 것을 못 박고, 그렇지만 앞으로 IMF와의 약속은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내용을 첨부하라고 지시했다. 김원길 의장은 재경원 원안 대신 별도의 각서를 따로 작성해 김대중 후보에게 서명을 받았다.
 
  이틀 뒤인 12월 5일 미국 워싱턴 소재 IMF 본부에서는 IMF 이사회가 열려 약 6시간에 걸친 격론 끝에 한국에 대한 자금지원 승인이 떨어졌다. 서명식이 끝난 뒤 임창렬 부총리는 침통하고 회한에 찬 어조로 대국민 담화문을 낭독했다. 이어 캉드쉬 총재가 나와 이번 협상을 계기로 한국 경제가 거듭날 것을 기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나는 가끔 서명식 당시 사진을 꺼내 보곤 하는데 사진에 잡힌 내 표정은 너무나 침통하다. 아마 내가 갖고 있는 사진 가운데 가장 침통한 표정이리라. 임창렬 부총리와 캉드쉬 총재가 앉아서 합의서에 서명하는 바로 뒤에 내가 서 있다.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는 그 사진을 보면 지금도 당시의 참담했던 심경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진다. 정말이지 치욕적인 역사의 한 장면에 내가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후 재경부 차관이나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내면서 힘들 때면 당시의 사진을 꺼내 보곤 했다. 내가 이 사진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그 사진 속에 있는 내가 그 어느 때보다 겸손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진을 보면서 당시의 치욕과 부끄러움을 되새겨 스스로를 낮추게 되고, 그런 마음으로 일상에 임하면 틀림없이 실수가 적어진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우리 삶에 더 큰 교훈을 준다는 것을 나는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IMF 자금지원 그 후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총재가 1998년 1월 12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고 있다. 왼쪽부터 휴버트 나이스 IMF 아·태국장, 캉드쉬 총재, 김대중 당선자, 박태준 자민련총재.
  한국 정부가 IMF에 구조를 요청한 이후 우리는 1997년 12월 3일 IMF 스탠바이 협정자금을 비롯해, IMF 긴급 고리자금인 SRF 자금, IBRD와 ADB 등 개발금융기관 지원자금, G7 등 선진국들의 후원자금 등을 포함해 총 575억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자금공급 계획을 확정했다.
 
  그러나 이 같은 자금공급 계획은 구제금융 지급조건이 현실에 맞지 않는 등 불합리한 점이 많았고, 지급 스케줄 또한 지나치게 먼 미래에 배분되었기 때문에 발표 직후부터 시장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그 결과 유동성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말았다.
 
  특히 초기 대응과정에서 IMF와 미 재무부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늑장 대응한 데다, 한국 정부도 처음에는 대통령 선거 바람에 휩쓸려 어정쩡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외화유동성 위기가 금융위기, 경제위기로 확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외화유동성 위기의 불길은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나서야 잡히기 시작했다. 소방수인 IMF가 갖고 온 물은 거센 불길을 잡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IMF가 초기 진화에 실패한 가운데 외환위기의 불은 때마침 불어 온 대통령 선거란 세찬 북서풍을 타고 더욱 확산됐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나서야 불길은 조금씩 약해졌고, IMF와 한국 정부 사이에 존재하던 불신과 불확실성이 정리되면서 급격히 누그러졌다.
 
  한국 정부는 1997년 12월 21일부터 12월 24일까지 IMF와 세칭 ‘IMF 플러스’라고 불리는 수정협상을 벌여 200억 달러에 달하는 IMF 자금을 조기에 제공받기로 합의했다. 큰 불길이 잡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대형 화재로 이어질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국내 금융기관들의 단기외채였다. 1997년 12월, IMF와 G7을 중심으로 한 채권국들은 상호 합의하에 자국 채권은행들에 대한 행정지도에 나서 채권회수를 막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매우 불안정하고 유동적이었다.
 
  한국 정부는 1998년 1월 18일 뉴욕에서 채권은행단과 외채 만기연장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218억 달러에 달하는 외채의 만기를 1년, 2년, 3년으로 연장하고, 기간마다 각기 다른 금리를 적용하는 것이 협상의 골자였다.
 
1998년 1월 3일 서울역앞 대우센터 로비에서 열린 '나라경제 살리기 위한 금모으기운동'에 반지와 목걸이 장신구 등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뉴욕외채협상이 진행되던 1998년 1월 26일 인도네시아가 지불유예 선언을 해 상황이 악화되기도 했으나 국제 금융시장에서 한국의 새 정부 정책에 신뢰를 보내며 협상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고, 마침내 1998년 1월 29일 외채 만기연장 협상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외화유동성 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김대중 정부는 위기의 단초가 된 한국 경제와 사회의 구조적 문제, 즉 비시장적 요소들을 시장형으로 전환하는 대대적인 구조개혁에 착수한다.
 
  김대중 정부는 금융부문, 기업부문, 노동부문, 정부 등 공공부문의 4대 부문에 대한 개혁을 표방하며 엄청난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그 결과 금융과 기업부문의 개혁은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으나 노동부문과 공공부문에 대한 개혁은 강한 정치적 저항에 부딪혀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특히 2000년 4월의 개혁은 더 이상 내실 있게 추진되지 못했다. 결국 4대 부문 개혁은 막대한 재정적자만을 초래한 채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말았다.
 
  대우그룹의 도산은 겨우 위기진정 국면으로 접어들던 한국 경제를 다시금 뒤흔들어 놓았다. 막대한 규모의 추가 공적자금이 투입됐고, 그 여파를 극복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아울러 기업들이 연쇄 도산하고 구조조정 과정에서 퇴출된 노동자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한국 경제는 총량 면에서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자칫 악순환의 궤도에 빠져버릴 수도 있는 형국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최우선 과제는 경제를 선순환 궤도로 바꾸어 놓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수출을 정상화해 무역수지를 흑자로 돌려놓아야 하고 생산과 출하, 제조업 가동률 등을 증가시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 실업률을 감소시켜야 했다.
 
  아울러 적절한 유동성관리를 통해 성장에 필요한 통화를 공급하고 과잉유동성에 의한 물가상승과 실물자산 투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다.
 
 
  세계를 보는 국민의 시각 변화
 
1997년 12월 2일 금융노련의 IMF 구조조정안 반대집회에 참가한 한 조합원이 ‘IMF=나의 실직?’이라고 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정부는 지나치게 총량지표의 호전에만 관심을 보였고, 이러한 확장적 재정금융정책으로 도처에 버블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2000년으로 접어들면서 다시 정치의 계절이 시작됐다. 노동부문에 대한 개혁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한 채 도처에서 저항에 직면하고 있었으나 총선을 의식한 정부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공기업 민영화 등 공공부문에 대한 개혁 역시 강한 반발에 부딪혀 추진력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가운데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의 조기 극복을 정치적 성과로 내세워 총선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당시 한국 경제는 세 번째 터널 속에 갇혀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엄청난 규모의 실업을 해소하는 데 정권의 생사를 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기존의 취로사업형 일자리 창출은 실업문제를 해결할 근본대책이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는 IT산업을 중심으로 한 벤처기업 육성에도 적극 나섰다.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 너무 강한 지원책이 동원됨으로써 IT부문에 버블이 생기고 금융·재정지원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면서 연쇄도산과 각종 비리사건에 빠져들고 말았다.
 
  내수부문의 진작을 통해 경제성장 기조를 선순환 기조로 돌려놓으려는 정부의 정책은 신용카드의 남발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급격한 가계부채 증가와 신용불량자 양산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한 저금리 정책의 결과 확대된 과잉유동성이 신용카드 버블과 만나 화폐의 유통속도를 가속화시키고 부동산 등 실물투기를 부추겨 결국 경제의 안정성마저 해치게 됐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은 과거 30년간 유지해 온 박정희식 개발모형(양적 성장 정책)의 한계를 인식하고 경제발전 전략을 전면 수정하기에 이른다.
 
  1987년 이후 한국 사회는 민주화 체제로 이행됐다. 하지만 경제발전 전략은 특별히 변한 게 없었다. 관치금융과 정경유착 관행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었고 정치권과 관료, 그리고 재벌로 이어지는 3각 지배구조는 그대로 존속해 있었다.
 
  외환위기는 이런 구조를 한순간에 바꾸어 놓았다. 개방화와 세계화를 통해 우리 경제구조는 시장형으로 넘어갔고, 양적 성장 위주의 전략도 경쟁력 제고를 통한 생존에 무게중심을 두는 쪽으로 변했다.
 
  1998년 IMF의 캉드쉬 총재는 한국의 외환위기가 전화위복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국제금융계의 시각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위기에 수반되는 고통이 크고 부수적으로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라고만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만 위기를 통해 한국 국민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고, 새롭게 정립한 경제관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해 왔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점에서 위기가 웨이크업콜(wake up call)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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