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一浩
⊙ 1959년 충남 부여 출생.
⊙ 대전고 졸업, 서울대 미학과 졸업. 同 대학원 문학 석사, 철학 박사.
⊙ 충남대 조소과 교수, 제2대 대전시립미술관 관장, 제5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전시총감독, 현대미술학회 회장 역임.
⊙ 저서: <미술은 언어다> <감성으로 보고 이성으로 읽는다> <예술의 길 문화의 길>
<예술과 상징, 상징형식> 등.
⊙ 상훈: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1995), 월드컵 기랑(문화 부문).
⊙ 1959년 충남 부여 출생.
⊙ 대전고 졸업, 서울대 미학과 졸업. 同 대학원 문학 석사, 철학 박사.
⊙ 충남대 조소과 교수, 제2대 대전시립미술관 관장, 제5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전시총감독, 현대미술학회 회장 역임.
⊙ 저서: <미술은 언어다> <감성으로 보고 이성으로 읽는다> <예술의 길 문화의 길>
<예술과 상징, 상징형식> 등.
⊙ 상훈: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1995), 월드컵 기랑(문화 부문).

- [그림1] 성 마태의 상징, 필사본 성경 더로우 북, 650~700년경, 더블린 트리니티 대학.
고대 그리스의 고전적 전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실적 묘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찬란했던 그리스 미술의 전통이 이제 필요 없어진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의 묘사 능력이 떨어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보다는 미술의 역할이 달라졌다고 봐야 한다. 중세시대가 요구하는 미술의 기능이 달라졌기 때문에 표현 방식도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흔히 중세를 神(신) 중심의 인간관이 지배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인간의 행위와 자연현상을 신의 섭리나 메시지로 해석하고 평가했던 시기인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미술은 미술작품이라는 그 자체의 목적을 갖기보다 신의 메시지나 기독교의 교리 전달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사용됐다.
교리서 속의 삽화나 교회 건축 및 그 안에 장식된 조각과 회화가 또 다른 하나의 복음서 역할을 했으며, 無學(무학) 文盲者(문맹자)들의 교화용으로 쓰인 것이다. 영원하고 무한한 권능을 가진 신에 대한 이야기를 유한한 인간이 감각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중세미술을 유지시켜 온 하나의 근간이었다.
사실적 묘사보다 상징성 강조
이런 관점에서 중세미술은 神的(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인간이 만들어낸 감각적인 형태) 사이에 일종의 類比(유비)관계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또 미술이 종교적 기능을 발휘하도록 이성적인 설명보다 사람들의 감성에 다가가는 형태를 취하게 됐고,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 형상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림 1]은 마태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사실적인 묘사도 보이지 않는다. 구불구불 서로 뒤엉켜 있는 선들이 이루는 복잡한 무늬와 형태들은 신비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림의 배경은 황금빛으로 처리돼 있다. 성질이 쉽게 변하지 않는 황금을 통해 마태의 순수성과 영원성을 표현하고 있다. 현세를 떠난 초월적인 분위기를 황금빛으로 연출하고 있는 셈이다.
중세미술 작품 대부분이 그렇듯 이 작품의 작가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 중세인들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예술가의 재주는 미술작품을 통해 당연히 신에게 봉헌돼야 한다고 믿어 작가가 누구인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미술이 종교색을 띠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 해답은 로마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알렉산더가 죽고 난 후 알렉산더 제국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기원전 3세기경부터 국가를 이루었지만 그리스의 지배하에 있다가 강성해진 로마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로마는 알렉산더 제국을 넘어서는 세계 대제국으로 성장했고, 유럽 정치 세력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부상하게 된다.
로마인들은 명상적이고 사색적인 그리스인들과 달리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민족이었으며, 순수미술작품보다 도로, 水路(수로), 시가지 장식과 같은 실용적 목적의 구조물을 많이 만들어냈다. 미술의 경우 그리스 미술의 대부분을 模作(모작)하거나 그대로 수용했다. 우리가 고대 문화를 일컬어 그리스·로마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로마는 대제국의 광대한 영토와 다양한 이민족의 통치를 위해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인 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 330년경 새 수도 비잔티움(후에 콘스탄티노플로 불림)을 건설하게 된다.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면서 바실리카라는 교회당 건축 양식이 생겨났는데, 그것은 밖에서 祭式(제식)을 올리는 고대 신전과는 달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구조의 건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그 내부를 조각과 회화로 장식하면서 종교미술의 길이 열렸다.
새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정한 이후 로마는 100년도 되지 않아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제국과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제국으로 분열된다. 그리고 서로마제국은 북쪽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아 476년 멸망했으며, 동로마제국은 1453년 오스만 튀르크에 멸망할 때까지 1000년을 지속하게 된다.
초현세적 분위기의 중세 초기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서구 유럽에서는 고대 시대가 막을 내리고 중세가 시작됐으며, 고대 그리스 미술은 새로운 미술 양식인 중세 종교미술로 대체됐다. 중세 종교미술은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인 5세기부터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되는 14세기까지 대략 1000년에 걸쳐 지속됐다. 이 시대의 미술은 보통 세 시기로 구분된다.
[그림 1]과 같이 초월적이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종교적 의미만을 강조했던 초기 500년의 시기, 교회건축을 바탕으로 종교미술의 형태가 다듬어지면서 로마네스크 양식이 중심이 된 시기, 마지막으로 중세 후기 고딕건축 양식을 중심으로 종교미술이 개화한 시기 등이다.
[그림 2]는 6세기경 이탈리아 라벤나에 지어진 산 비탈레 교회당 내부에 있는 모자이크 벽화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동로마제국에서 지속된 종교미술을 비잔틴 미술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비잔틴 미술의 표현 방식을 따르고 있는데, 그 안에는 의미를 중시하는 초기 종교미술의 성격도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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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2]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모자이크, 526~547, 라벤나, 산 비탈레 성당. |
그림을 보면 황제 바로 옆에 막시미아누스 대주교가 있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대주교에게 황금접시를 봉헌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사실주의적 묘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딱딱하게 묘사된 옷 주름 뒤로 길게 늘여진 인물들은 그 어떤 무게감이나 깊이감이 보이지 않는다. 초현세적 분위기를 상징하는 황금빛 배경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을 배경으로 묘사된 인물들이 부유하는 듯 비현실적이다. 종교적 의미만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요하지 않은 병사들은 왼쪽 구석으로 몰았고, 방패로 가려 놓았다. 방패 위에는 X와 P가 교차된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데, 여기서 X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상징하며, P는 길게 늘여진 모습이 목동의 지팡이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성직자의 牧者(목자)로서 사명을 의미한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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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3] 산타마리아 델 그라체 성당 전면, 6세기경, 그라도, 이탈리아. |
교회 건물 전면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매일 해를 빼앗아 가는 서쪽이 악의 근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성당 내부에는 그리스도가 저주받은 자와 구원받은 자를 심판하는 심판관의 모습으로 묘사돼 있다.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억제하고 정신적인 것만 강조했던 초기 종교미술은 중세 중기로 접어들면서 변화를 보인다. 사람들은 실제로 우리의 삶이 정신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악마적인 것 세속적인 것 감각적인 것과 더불어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 악마적이고 세속적인 것과 싸우고 극복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 구원의 심판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추앙했다.
이런 종교적인 배경 속에서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이 탄생했다.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은 여전히 종교적인 의미에 충실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을 나타내는 방식은 변화했다.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측면이라 여기던 사실적 묘사를 어느 정도 허용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관심도 증가했다.
뾰족한 첨탑,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오색 영롱한 빛의 세계가 연상되는 고딕건축 양식은 중세 후기 종교미술을 대표한다. 여기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보이기 시작한 미술작품 속의 감각적인 요소들이 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사실적인 묘사를 향한 노력들도 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육중한 돌기둥이나 石壁(석벽) 대신 가느다란 기둥과 철, 유리 등을 사용하여 내부를 밝고 광대하게 만들었다.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한 첨형 아치를 이용하여 건물의 다양한 형태와 변화를 추구했다. 그 위에 스테인드글라스의 화려함을 덧붙여 신비스러운 종교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교회에 대한 개념이 악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요새에서 인생의 여행길에서 안식과 환희를 얻게 하는 장소로 바뀐 것이다.
이때부터 교회는 천상의 도시를 상징하게 됐고, 사람들은 그 교회를 장식하기 위해 미술작품이 추구하는 감각적인 것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보는 이의 감성에 호소하는 사실적 묘사가 뒤따랐다. 사람들은 미술을 통해 종교적인 메시지만을 나타내려 했던 시도에서 종교적인 이야기를 보다 설득력 있고 화려한 묘사의 형태로 나타내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자연히 감각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과 어떻게 하면 감각적인 세계를 잘 나타낼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매달렸다. 이처럼 중세 후기에 이르면서 미술은 또다시 사실적인 묘사의 길로 향하게 됐고, 세속적이라는 점에서 미술작품의 감각적 형태들을 피하고 정신적인 의미만을 강조했던 초기 종교미술로부터 벗어났다.
르네상스로 이끈 천재 화가 지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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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4] 시모네 마르티니, 수태고지, 1333,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
[그림 4]는 중세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들 중 한 명인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묘사나 표현 방식이 종전에 비해 훨씬 자연스럽다. 천사장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와서 수태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고, 책을 읽다가 그 사실을 듣게 된 마리아가 놀라며 부끄러워하고 있다. 양쪽에는 로마시대 두 순교자의 모습을 그려 넣어 전체적으로 성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중앙의 수태고지 장면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배경의 아치가 뾰족한 첨형이라는 점에서 고딕 양식의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종전의 작품에 비해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묘사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마리아가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조금 어색하고, 여전히 황금빛 배경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초기 종교미술의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않았음을 또한 알 수 있다.
시모네 마르티니와 같은 시기에 살았고 중세 후기의 천재화가로 불렸던 지오토의 작품을 보면 이런 부자연스러움의 많은 부분을 극복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지오토의 ‘이집트로의 탈출’([그림 5])을 통해 우리는 중세 종교미술에서 르네상스 사실주의 묘사로 전환된 전기가 이 천재화가에 의해 마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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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5] 지오토, 이집트로의 탈출, 1303(추정), 프레스코, 파두아. |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지오토가 조각보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회화에 조각의 묘사 개념인 입체성을 도입했고, 환영 창출로 생동감 있는 미술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오토의 이러한 천재성은 다른 나라에까지 멀리 전파되었으며, 많은 화가의 귀감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르네상스 미술로 이어지면서, 미술사적으로 또 다른 하나의 새롭고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