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論史學者 鄭晉錫 교수가 추적한 한국 최초 여기자 李珏璟의 생애

「번민 끝에 飮毒… 남편 사랑하는 기생이 죽은 후」

  • : 정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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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晉錫
1939년 경남 거창 출생. 중앙大 영문과 졸업. 서울大 대학원 신문학과 석사. 런던大 정치경제대학 박사.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일본 천리大 교환교수. 재단법인 LG상남 언론재단 이사.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언론사」, 「인물한국언론사」, 「역사와 언론인」 등 펴냄.
1920년 9월 5일자 매일신보. 李珏璟의 입사를 알리는 기사가 게재돼 있다. 사진이 李씨의 얼굴이다.
1925년 7월27일 밤 11시.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 李珏璟(이각경)은 서울 笠井洞(입정동) 15번지에서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신음 중인 그를 집안 사람들이 발견하고 낙원동 仁濟病院(인제병원)에 연락하여 의사 朱榮善(주영선)이 달려와 응급치료를 했으나 이미 신경중추가 마비되어 소생 가망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1920년 9월 총독부 기관지 每日申報(매일신보)의 기자로 화려하게 등장하여 계몽적인 여성 관련 기사를 썼던 최초의 여기자로 활약했었고, 자살을 기도했던 당시에는 마포보통학교 訓導(훈도=교사)였던 첨단의 新여성 李珏璟은 세인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28세의 짧은 일생이 막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李珏璟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때는 「乙丑대홍수」로 알려진 500년 만의 물난리로 참담한 수해를 겪고 있던 무렵이었다. 乙丑대홍수는 기상관측이 실시된 이래 최대의 홍수 피해로 기록되고 있다. 한강 뚝이 무너져 서울의 이촌동, 용산, 마포 등 한강변 일대가 범람하여 물바다로 변했다. 1만5000여 호의 집이 침수되었으며 시내 중심지 곳곳과 종로, 관훈동 일대도 물에 잠기는 큰 피해가 발생했다. 전기와 수도가 모두 끊어지고 전차와 기차 통신기관을 비롯한 문명의 利器(이기)가 완전히 멈추어 서울은 도시 전체가 마비되는 혼란이 발생했다.
 
  이같은 물난리가 닥쳤던 무렵에 李珏璟은 왜 자살을 기도하였나? 李珏璟은 우리나라 언론사상 여자로서 선구적인 행적을 남긴 사람이며 여성의 전문직 진출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할 인물이다. 나는 20여 년 전부터 李珏璟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행적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상과 활동을 추적할 만한 기록은 너무나 빈약했다. 1920년에 每日申報가 공개 채용한 「부인기자」였다는 간단한 사실만 겨우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오랜 추적 끝에 10여 년 전에는 그가 경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한성고등여자학교 사범과를 졸업했다는 사실까지 밝혀냈으나, 무슨 이유로 기자생활을 마감했는지, 홀연히 언론계를 떠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는 李珏璟의 가족관계를 증빙할 문서와 함께 그의 음독자살을 보도했던 신문기사를 발견하여 신문사를 떠난 후의 생활에 관한 의문을 풀 수 있게 되었다.
 
 
 
 경기여고 출신 「부인기자」 제1호
 
  李珏璟은 매일신보의 첫 여기자 공개채용에 응시해서 탄생한 여기자였다. 그는 1920년 7월2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여기자를 채용한다는 「社告(사고)」를 보고 응모하여 9월부터 기자생활을 시작하였으므로 최초의 여기자인 동시에 공채 여기자 1호이기도 했던 것이다. 매일신보는 여기자를 모집하는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세계의 추세는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의 여성해방은 아직도 요원하다. 이를 통탄하고 가정개량과 여성계의 개조를 위해서 현숙하고 박학한 여기자를 모집한다>
 
  그런데 응모자격은 첫째 「家長이 있는 부인」이라야 한다는 점이 특이했다. 미혼 처녀가 기자로 활동하기에는 아직 때가 일렀던 것이다. 남편이 있는 「부인」이라야 남녀차별의 사회구조에서 여성의 지위를 체험하는 입장이 될 수 있고, 집안살림 경험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명칭도 「여기자」가 아니라 「부인기자」였다.
 
  매일신보가 부인기자를 모집하던 시점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된 지 약 3개월 후였다. 매일신보는 武斷정치 시기에는 한국인이 발행하는 민간지가 없는 상황에서 총독부 기관지의 특권을 누리며 유일한 한국어 신문으로 독점적인 지위에서 발행되었으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된 후에는 이들 민간지와 경쟁을 벌여야 할 입장이 되었다. 매일신보는 민간지 출현에 대처하여 편집국의 기구를 개편하는 동시에 조선일보, 동아일보와의 차별화를 시도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심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실시한 것이 부인기자 모집이었다. 李珏璟은 흔히 최초의 여기자로 알려진 조선일보의 崔恩喜(최은희)보다 4년 먼저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여기자 채용 사고를 낸 지 2개월 후인 9월5일자 매일신보에는 자랑스럽게 李珏璟의 입사를 알리는 기사가 실려 있다. 「금회에 본사 입사한 부인기자 이각경 여사, 오늘의 부인사회를 위하야 건전한 붓을 휘두를 그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본사가 이미 천하에 고함과 같이 다년간 현안중이던 여자기자의 채용문제가 비로소 해결하게 되었는 바 이번에 부인기자로 입사하게 된 여사는 원래 경성 출생으로 엄숙한 아버지의 교훈과 따뜻한 어머니의 무릎 아래서 장중의 보옥과 같이 黃口(황구)를 겨우 면한 때로부터 새로운 학교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는 바 그 사람됨이 총명한 중에도 정숙하므로 항상 학교의 온 존경과 온 사랑을 독차지하였었으며 거금 13년 전에 관립 한성고등여학교에 입학하야 대정 4년에 이르러 남의 뛰어나는 조흔 성적으로서 영광스럽게 졸업하얏다>
 
  이 기사는 李珏璟이 1915년(대정 4년)에 한성고등여학교의 技藝科(기예과)와 사범과를 졸업하고 東京으로 건너가 공부했으나 가정의 허락을 받지 못해 귀국한 뒤 교육계에서 2년 동안 종사하였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가 종사했다는 교육계가 어떤 학교인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부인기자가 입사했다는 기사와 함께 매일신보에는 李珏璟이 직접 쓴 「입사의 辭(사)」가 실려 있었다.
 
  李珏璟은 이 글에서 여기자로서의 사명감을 피력했다. 우리 사회는 예로부터 여자를 너무 멸시하고 무시하여 여자는 다만 남자의 종속적 물건으로 절대 복종하고 절대 무능한 것으로 생각해 왔으나 이는 잘못이라고 말하고 자신이 신문사업에 나선 책임은 참으로 무겁다고 기자로서의 포부를 밝혔다.
 
  李珏璟이 졸업한 한성고등여학교는 경기여고의 전신이다. 1908년 4월에 설립되어 교장에 魚允迪(어윤적)이 취임하고 7월6일부터 본과와 예과의 수업을 시작했다. 1911년 11월에 「고등여학교령」이 공포되면서 학교 이름을 「관립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바꾸고 본과와 기예과를 두었다가 1914년에는 사범과를 설치했다. 교육은 예과 2년, 본과 3년 과정으로서 모두 5년이 소요되었다.
 
  1920년을 기준으로 13년 전이라면 李珏璟은 1908년에 한성고등여학교가 설립된 해에 입학했을 터인데 경기여고 졸업생 명단에는 李珏璟이 1913년에 졸업한 제3회 졸업생 28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되어 있다. 이어서 사범과에 진학하여 1915년에 제1회로 졸업하였다. 사범과 졸업생은 22명이었다. 1913년 졸업생 가운데는 許英肅(허영숙)과 崔雪卿(최설경)이 있었다.
 
  許英肅은 후에 일본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고, 소설가 李光洙와 결혼하는 사람이다. 許英肅은 의사로 개업했다가 동아일보의 여기자가 된다. 崔雪卿은 崔南善(최남선)의 여동생으로 朴錫胤(박석윤)과 결혼했다. 朴錫胤은 東京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국제법을 연구한 인텔리였는데, 1930년 2월에는 매일신보의 부사장이 되어 2년 반 동안 재직하다가 만주국의 폴란드 주재 총영사를 역임했다.
 
 
 
  「부인기자」 李珏璟의 활동
 
 
  李珏璟은 入社 기사가 실린 지 열흘 뒤인 9월14일자부터 부지런히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부인기자의 활동」이라는 제목으로 창덕궁 至密女官(지밀여관)을 방문한 기사에 이어서 9월15일자부터는 고정제목으로 「부인기자의 가정방문기」를 게재했다. 그의 가정방문기는 9월15일자부터 9월21일, 9월28일, 9월29일자에 실렸다.
 
  이 해 말 12월5일자에는 「李伯爵邸(이백작저) 방문기」를 썼는데 「이각경 여사」라고 이름을 밝혔다. 李珏璟은 이때 매일신보의 자매지였던 日語신문 경성일보의 여기자 가마다(鎌田)와 동행하여 일본어 통역도 해 주었다. 또 12월29일자에는 「신사회에 입한 자매여 어찌 그다지 허영심이 많고 교만한가 참 속히 고칠지라」는 글이 실렸는데 마지막에 「부인기자」라고 표시하여 李珏璟이 쓴 기사임을 확인할 수 있다.
 
  李珏璟은 1921년 1월1일자에 「신년 벽두를 제하야 조선 가정의 주부께」라는 장문의 계몽적인 논설을 실었다. 한 페이지를 모두 차지한 이 논설은 「本社記者(본사기자) 李珏璟女史(이각경 여사)」라고 크게 이름을 밝힌 것이다.
 
  「우리 조선은 날과 달로 변하여 가는 이 시대를 당하여 지난 시대의 범절만 지킬 수도 없고 또 나날이 달라 가는 풍조를 다 숭상할 수도 없다」고 전제하고 여성계의 개량은 전통의 파괴가 아니라 이를 지켜가면서 고칠 것은 고쳐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개량을 주장하기 전에 보수라 하는 과거사 중에 좋은 것은 어디까지 보존하야 지켜가야 하겠다는 정신을 잊어버리고 이를 창도함은 아니외다. 원래 개량에 완전함은 보수에 대한 근본이 있은 후의 일을 말함인즉 이것을 오해하면 불가할 줄 생각하나이다>
 
  최첨단의 전문직 新여성이었던 부인기자 李珏璟이 보수와 개혁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는 이 글에서 조선 여성들을 향하여 첫째 시대됨을 알 것, 둘째 위생사상을 기를 것, 셋째 공덕심을 기를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長處(장처)는 보존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또한 조선 여성이 전부터 전해 오던 바와 오늘도 행하는 바 장점은 영원히 보존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조선 여성의 지켜야 할 장점으로 가정 안의 일은 여자가 다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책임관념에 투철하고 이에 대한 자신이 있어야 아름다운 덕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맡은 바 임무에 대한 사명감을 덕목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관념을 벗어나지 않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李珏璟의 논설이 실린 날인 1월1일자에는 「編輯局員點考(편집국원점고)」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는데 매일신보 편집국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李珏璟도 언급되어 있다. 「편집국 급사」라고 밝힌 필자는 가벼운 스케치풍으로 매일신보 편집국 기자들의 모습을 묘사한 가운데 편집국에 앉아 있는 李珏璟이 나오는 것이다.
 
  李珏璟은 그 후로도 여성을 위한 계몽적인 기사를 여러 편 실었다. 李珏璟이라고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기사 말미에 「부인기자」라고 쓴 기사는 모두 李珏璟이 쓴 것이 확실하다. 부인기자는 李珏璟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이다. 1월3일자에는 「子婦(며느리)를 둔 시부모여 며느리도 당신의 자식이어늘 왜 그리 노예시하는가」를 실었고, 2일 또는 3일 만에 한 번씩 「부인기자」로 필자를 밝힌 기사를 실었다.
 
  그 가운데도 「축첩에 대한 이해」(1.11), 「不正當(부정당)한 희망을 하는 媤母(시모)의 반성을 촉함. 동시에 시누이 되는 사람들도 간악한 행동을 버리시오」(2.18), 「浪遊(낭유)하는 남자의 悔改(회개)는 부인의 충고에 在(재)함, 우리 부인들은 우선 기생들의 화장을 본받지 말으시오」(2.20)와 같은 기사는 李珏璟이 봉건적인 가정에서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우회적으로 표출한 듯한 계몽적 기사들이었다.
 
  그러나 1921년 4월25일자에 실린 「新舊절충주의―혼례식은 이러케 함이 조아」라는 제목으로 金德成(김덕성)을 인터뷰한 기사를 마지막으로 그 이후에는 「부인기자」임을 밝힌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그 후로도 같은 형식의 인터뷰 기사는 실렸으나 李珏璟이 취재한 것인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李珏璟의 길지 않은 기자생활은 여기서 끝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李珏璟은 최초의 여기자로서 우수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며 부지런히 일했던 여성이었음을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면 李珏璟은 신문사를 떠난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20년의 추적과 새로운 사실
 
  여성의 언론계 진출이 점점 늘어나는 오늘날과 李珏璟이 최초의 여기자가 되었던 시절은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新여성 李珏璟은 활동적 전문직인 언론계에 진출한 여성이라는 희소가치 등으로 남다른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언론계에서 활동한 기간은 짧았고 홀연히 언론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였다.
 
  나는 李珏璟이 언론계에 입문하기 전의 학력과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한국 최초의 여기자가 된 이후의 활동을 추적하여 그의 행적이 조금씩 밝혀질 때마다 발표하였다. 내가 부인기자 李珏璟의 존재를 처음 언급한 것은 1981년 6월 서울대 朴有鳳(박유봉) 교수의 회갑기념논총에 게재한 「매일신보 연구」라는 논문이었다.
 
  이듬해 4월에는 월간 「마당」 잡지에 李珏璟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였다는 사실을 발표하였고, 10년 뒤인 1992년에는 李珏璟이 기자생활을 시작한 정확한 시기와 그의 사진이 실린 기사를 발굴하여 「시사저널」(9월17일자)에 발표했다. 시사저널에 실린 글은 1920년 9월5일자 매일신보 사회면 기사를 토대로 경기여고의 학적부를 조사하여 밝혀 낸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의문은 남아 있었다. 매일신보에 입사하던 당시 李珏璟은 이미 결혼한 「부인기자」였다. 그렇다면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의 후손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으나 추적이 불가능했다. 매일신보는 새로 입사한 최초의 여기자 李珏璟이 한성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東京으로 건너가 공부했으나 가정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귀국한 뒤 2년간 교육계에 종사하다가 기자가 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손녀로부터 온 전화
 
  이 기사를 근거로 경기여고의 전신인 한성고등여학교에 재학할 당시의 학적부를 찾아본 결과 李珏璟은 1897년(명치 30년) 2월19일생이었고, 살던 곳은 경성 북부 校洞(교동) 順學契(순학계) 21의 2번지)였다. 1914년에 補習科(보습과)를 졸업하고 사범과에 입학했는데 아버지 李鍾浩(이종호)는 양반 신분으로 재산은 중산층이었다. 학적부에 기록된 그의 성격은 「純良(순량), 方正(방정), 快活(쾌활)」이었고, 체격은 「强(강)」이었다. 사범과 1학년의 성적은 22명 가운데 16등으로 학과 성적의 석차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가족은 언니, 남동생, 여동생이 각각 한 사람씩이었다.
 
  李珏璟은 매일신보에 입사한 직후인 1920년 9월14일부터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쓴 기사는 1921년 4월까지는 찾을 수 있으므로 그때까지 근무했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 후에는 부인기자가 쓴 글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게 李珏璟에 관해서 흥미 있는 제보가 들어왔다.
 
  1999년 4월22일이었다. 李珏璟의 손녀라는 젊은 여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이름은 전성희. 李珏璟의 남편 全祐榮(전우영)은 3형제 가운데 차남이었다. 그런데 全祐榮과 李珏璟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기 때문에 全祐榮은 동생의 아들인 全炳龍(전병용: 1932년 2월25일생)을 양자로 입양하였다. 입양한 날짜는 출생한 지 1주일도 지나지 않은 3월1일이었다. 그러나 全祐榮은 全炳龍이 네 살이었던 1936년 8월12일에 사망하였다. 전성희는 李珏璟의 양자 全炳龍의 딸이었다.
 
  전성희가 내게 전화를 걸게 된 경위는 서울신문(대한매일)이 발행하던 월간 「Queen」 1998년 11월호에 실린 李珏璟에 관한 글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월간 Queen은 李珏璟이 최초의 여기자로 매일신보에 근무했다는 사실을 거의 내 논문을 보고 쓰면서 나와 인터뷰라도 한 것처럼 기사를 썼는데 몇 달 후에 우연히 그 글을 읽은 전성희가 내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나와는 관계없이 쓴 잡지의 기사로 인해서 나는 뜻밖에도 오랫동안 의문을 품고 있었던 문제에 관해서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李珏璟은 시부모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해서 자살했으며 당시 신문에 보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성희는 말했다. 사회 활동을 했던 신식 여성 李珏璟이 보수적이었을 시부모의 눈에는 마땅치 않게 비쳤을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39세의 나이에…
 
  李珏璟의 양자 全炳龍은 이미 사망했지만 그의 형 전병일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거주하고 있었다. 나는 전성희에게 LA에 살고 있다는 全炳龍의 형 전병일씨의 전화번호를 물어서 전화를 걸었다. 전병일씨는 李珏璟의 남편이자 자신의 仲父인 全祐榮이 일제시대에 조선은행 총재가 경영하던 남조선광업주식회사 전무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전성희의 도움으로 全祐榮과 李珏璟의 除籍簿(제적부)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일제 시대의 제적부는 복사된 상태가 흐리고 흘려 쓴 글씨 때문에 판독이 매우 어려웠으나 애써 읽어 보니 李珏璟의 사망 날짜는 1936년 2월24일 오후 2시, 사망한 장소는 서울 竹添町(죽첨정 3정목 543번지)으로 되어 있었다. 자살인지 병사인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았다. 1897년 2월19일에 태어난 李珏璟은 3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친 것이다.
 
  1897년 3월19일생이었던 남편 全祐榮도 아내가 죽은 지 반 년 후인 같은 해 8월12일 오후 5시 서울 橋北洞(교북동 6번지의 13)에서 사망하였다. 全祐榮이 사망하기 이틀 전인 8월10일에는 孫基禎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암울하던 일제 치하에 全국민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때였다. 나는 혹시라도 李珏璟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는지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외로 그의 제적부에 기록된 사망 날짜보다 11년이나 먼저 李珏璟의 자살 기사가 신문에 실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朝鮮日報의 元寧熙(원영희) 정보자료실장에게 혹시나 하고 문의해 본 결과 뜻밖에도 1925년 7월29일자 朝鮮日報에 李珏璟의 자살기사가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동아일보와 매일신보에도 같은 내용의 자살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손쉽게 찾아내었다.
 
  거슬러 올라가서 그보다 며칠 전 신문에서 李珏璟의 자살과 관련이 있는 文奇花(문기화)의 죽음에 관한 기사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 李珏璟이 자살을 기도했던 때에는 기자를 그만두고 공립마포보통학교의 여교사(訓導)로 근무 중이었다는 사실도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李珏璟의 가정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남편과 금실도 좋지 않았고 아이가 없었다. 李珏璟이 자살을 기도한 원인은 남편 全祐榮의 외도로 인한 가정불화였다. 남편의 애인이었던 기생 文奇花가 먼저 목숨을 끊었고, 뒤이어 첨단의 신여성 李珏璟이 연쇄자살을 기도하는 비극이 계속되었다.
 
 
 
 疑雲에 싸인 奇花의 死
 
  文奇花는 평양에서 태어나 서울 용산구 삼각동(三角洞 99번지)의 大正券番(대정권번)에 소속된 스무 살의 기생이었다. 사랑에 빠진 文奇花와 全祐榮은 1925년 7월12일부터 수유리에 있는 화계사로 도피하여 2, 3일 동안 달콤한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3, 4년 전부터 사랑을 속삭이면서 같이 살 것을 굳게 약속하였으나 본처 李珏璟의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비밀리에 사랑의 도피처로 택했던 화계사는 현재 강북구 수유 5동으로 서울시에 속해 있지만, 당시의 행정구역상으로는 崇仁面(숭인면) 수유리로 되어 있던 서울 교외의 한적한 장소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밀회 사실을 알아낸 李珏璟과 친정 어머니가 14일 화계사로 달려가서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바람에 두 사람의 단꿈은 깨어지고 말았다. 본처의 습격으로 모욕을 당한 文奇花는 7월15일 저녁(또는 오전) 9시경 한 장의 유서를 남겨 놓은 채 술에 취해서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애인 全祐榮 옆에서 아편을 먹고 자살하고 말았다. 스무 살 아직도 어린 나이였다.
 
  文奇花의 죽음이 李珏璟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신문 보도로 만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기사를 살펴보면 동아일보와 매일신보의 내용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동아일보는 文奇花가 본처와의 말다툼에 매질까지 당한 끝에 잘못을 뉘우치고 자살하였다는 요지로 보도하였다(동아일보 1925.7.17, 「華溪寺 僧房에서 美妓飮毒自殺, 술 취해 자는 정남의 엽헤서 한만흔 유서를 써 노코 자살」).
 
  그러나 매일신보는 文奇花가 죽은 원인을 여러 가지로 추리하면서 동아일보와는 달리 어떤 의혹이 있는 것 같다는 내용으로 보도했다. 매일신보는 「疑雲(의운)에 싸인 奇花(기화)의 死(사)」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지었다.
 
  <문기화는 전시의 본처에게 모욕을 당하고 분김에 약을 먹고 죽었는지 또는 정사를 할 목적으로 그리 하얏는지 알 수 없으며 일변으로 전시 본처가 약을 먹여 죽였다는 소문도 있다. 그리고 문기화의 시체에 림리한 피 흔적이 묻어 있다더라.〉(매일신보, 1925.7.17, 「화계사에 피서중 약을 먹고 죽엇다」)
 
  신문 기사는 李珏璟이 어떤 사람인지 신분을 밝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최초의 여기자였으며, 보통학교의 현직 여교사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기자는 그만두었지만 여교사도 아주 희귀한 직업이었다. 文奇花의 자살이 자신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자 李珏璟은 밖으로 나다니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李珏璟이 음독 자살을 택했을 때에 매일신보는 「문기화 죽은 후로 문제되는 이각경이가 또 독약을 먹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고, 조선일보는 「문제의 이각경, 번민 끄테 遂(수) 음독, 남편 사랑하는 기생이 죽은 후 여러 가지로 번민하다가 음독」이라는 제목으로 두 신문이 다같이 「문제의 이각경」으로 보도한 것을 보더라도 李珏璟은 죽고 싶도록 곤혹스럽고도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비록 남편의 외도에서 비롯된 사건이었지만 여성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했던 자신에게 쏠린 의혹과 사회의 냉혹한 시선에 고민했을 李珏璟의 처지가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스무 살 어린 기생이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자신에게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신문이 보도한 후에 번민을 거듭하고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李珏璟은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했다. 조선일보는 李珏璟이 투기로 인하여 文奇花와 격투를 벌인 끝에 文奇花를 자살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후회하고 自愧(자괴)하여 번민하다가 세상을 비관하여 자살하였다고 보도했다(조선일보, 1925.7.29). 매일신보는 李珏璟의 자살을 좀더 상세히 보도했다. 매일신보의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각경은 원래부터 내외간의 의가 화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시어머니의 구박을 견디지 못하여 독약을 먹으려다가 집안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약을 빼앗긴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더구나 전우영은 문기화와 정을 통하여 이각경을 돌아보려 하지 않았고, 행동이 너무도 방탕하므로 서로 자주 다투었다. 문기화가 자살한 후 이각경은 세상을 더욱 비관하여 불면증에 시달리고 정신에도 이상이 생겨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였다. 그러던 중 7월27일 또 전우영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시아버지로부터 질책을 당하고 자살하였다.〉(매일신보, 1925.7.30, 「남편의 방탕으로 음독한 신여성, 命在頃刻救濟絶望, 문기화 죽은 후로 문제되는 이각경이가 또 독약을 먹어」)
 
 
 
 죽기 전에 잊혀진 여기자
 
  이 사건은 봉건적인 사고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선각적인 新여성이 겪었던 신파극 같은 비극적 가정생활을 보여준다. 전문직 여성이 가정생활과 사회 진출을 병행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사회생활을 이해 못하는 시집 어른들과, 남자들은 죄책감 없이 바람을 피우고 예사롭게 첩까지 거느리기도 했던 당시의 풍조에서 최첨단의 사고를 지닌 여기자였고, 드문 직종이었던 공립학교의 여교사 李珏璟이 겪었을 갈등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의문이 있다. 李珏璟이 언제 사망했는가 하는 것이다. 신문이 보도한 1925년 7월27일 또는 그 이튿날인가, 除籍簿의 기록대로 1936년 2월24일인가. 장소도 다르다. 신문 기사의 거주지는 서울 笠井洞이었는데 제적부에는 竹添町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망 날짜와 장소가 모두 다르다. 그런데 1925년 7월의 신문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李珏璟이 죽었다고 단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소생의 가망이 없다고 쓰고 있다.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것이지 죽었다고 단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李珏璟은 이때 사망하지 않은 채 회복되어 1936년까지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1932년 3월1일에 입양된 양아들 全炳龍은 全祐榮과 李珏璟의 장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李珏璟이 1925년 7월에 사망했다면 우선 全祐榮이 재혼했을 가능성이 크다. 재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全炳龍이 사망한 李珏璟의 양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李珏璟은 全炳龍을 입양하던 1932년 3월에도 살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李珏璟은 자살을 기도했던 1925년 7월 이후에는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李珏璟과 全祐榮은 1897년에 정확히 1개월 차이로 태어났고, 1936년 2월과 8월에 6개월 간격으로 죽었다. 같은 해에 태어나서 같은 해에 죽는 것을 보면 천생배필 같기도 했지만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 둘 사이에는 아이도 없었다. 부부간의 불화가 시부모와도 원만하지 못한 관계로 발전한 것일까, 시부모와의 갈등이 두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것일까.
 
  일제시대에 여기자에 관해서 남아 있는 여러 기록 가운데 李珏璟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제적부에 의하면 李珏璟은 음독자살을 기도한 후에도 11년이나 살아 있었는데 그 동안에 언론계에는 여러 명의 여기자들이 뒤를 이어 등장했다. 崔恩喜(조선일보 1924.10∼1928)를 비롯하여 李珏璟과 함께 공부했던 許英肅(동아일보 1925.12∼1927.3)도 기자가 되었다. 그 이후로도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중앙일보에 여러 명의 여기자들이 활동을 벌였다.
 
  李珏璟이 생존했던 기간에 발행되던 잡지에서도 여기자가 직접 쓴 글이 실리고 여기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 좌담 같은 것이 여러 차례 실렸지만 李珏璟의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1938년 6월호 「여성」지에는 초기부터 여기자로 활약했던 인물들을 망라하여 그들의 후일담을 실었으나 거기에도 李珏璟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1933년 6월에 병사한 개벽사 여기자 宋桂月(송계월)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보다 3년 뒤에 사망한 李珏璟의 이름은 없었다. 비운의 첫 부인기자 李珏璟은 살아 있을 때부터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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