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총·극약 지니고 잠자리에…
6代 독자인 李박사로부터 『아들 낳지 못했다』고 구박받기도…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보여준 超人的 절약생활…
『저렇게 살려면 우리는 대통령 안 한다』(경무대 사람들)
오스트리아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살다 간 프란체스카 리. 가난한 망명정객의 비서였으며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였던 그녀에 대한 평은 그리 후하지 못하다. 그녀의 유능하고 헌신적이며 알뜰한 면모까지 몰락한 자유당 정권에 대한 가혹한 평가 속에 함께 묻혀버렸다. 초대 퍼스트 레이디가 바라봤던 건국 대통령은 「정치를 하기에 너무 정직한 사람」이었다. 프란체스카의 가장 큰 관심은 대통령의 건강이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오해를 받았다. 남편과 사별한 후 22년간 지극히 한국적인 할머니로 살다 간 프란체스카의 증언 등을 통해 李承晩 建國 대통령을 만나본다
자동차 경주 선수와 결혼했다가 이혼6代 독자인 李박사로부터 『아들 낳지 못했다』고 구박받기도…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보여준 超人的 절약생활…
『저렇게 살려면 우리는 대통령 안 한다』(경무대 사람들)
오스트리아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살다 간 프란체스카 리. 가난한 망명정객의 비서였으며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였던 그녀에 대한 평은 그리 후하지 못하다. 그녀의 유능하고 헌신적이며 알뜰한 면모까지 몰락한 자유당 정권에 대한 가혹한 평가 속에 함께 묻혀버렸다. 초대 퍼스트 레이디가 바라봤던 건국 대통령은 「정치를 하기에 너무 정직한 사람」이었다. 프란체스카의 가장 큰 관심은 대통령의 건강이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오해를 받았다. 남편과 사별한 후 22년간 지극히 한국적인 할머니로 살다 간 프란체스카의 증언 등을 통해 李承晩 建國 대통령을 만나본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인 雩南(우남) 李承晩(이승만) 박사의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여사. 유능하고 헌신적이며 알뜰하다는 평가에서, 人(인)의 장막으로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아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장본인이라는 평가까지 그녀에 대한 世評(세평)은 극단을 오간다.
자신의 대학원 논문을 바탕으로 「한국의 퍼스트 레이디」라는 책을 낸 고승현(단국대 대학원 정외과 졸업)씨는 책 서두에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사실 그리 인기 있는 영부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문화와 풍습이 다른 나라의 영부인으로서 국민들의 사랑을 받기보다는 오해와 편견에 둘러싸여 살았다. 한때는 외신에서 「한국의 마리 앙트와네트」로 표현할 정도로 권력과 자기 욕심을 채우는 여인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렇듯 프란체스카 여사는 여러 가지 소문들 속에서 국민의 비난을 받는 영부인이었다』
2001년 3월을 사는 사람들은 프란체스카를 어떻게 평가할까. 비난도 찬사도 아닌 무관심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그녀가 떠난 지 겨우 9년이 지났으나 사람들은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 프란체스카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서울 이화장을 방문하여 李承晩 대통령의 아들 李仁秀(이인수) 박사(정치학·前 명지대 교수)와 며느리 曺惠子(조혜자) 씨를 만나 프란체스카 여사에 관해 새로운 얘기를 듣고 싶다고 말했을 때 曺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어머니에 대해 국민들은 아는 게 없어요. 뭐든지 다 새롭다고 보면 돼요』
프란체스카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 교외 인 서스도르프에서 1900년 6월15일에 태어났다. 아버지 루돌프 도너는 철물무역을 하면서 소다水를 개발하여 청량음료 공장을 경영했다. 딸 셋 가운데 막내인 프란체스카가 수학과 외국어에 재능을 발휘하자 아버지는 家業(가업)을 물려주기 위해 상업학교에 진학시켰다. 어릴 때 남자처럼 키우기 위해 머리를 짧게 잘라주기도 했다. 프란체스카는 상업학교 졸업 후 농산물중앙근무소에서 근무하다가 스코틀랜드로 유학, 그곳에서 영어통역관 국제자격증을 획득했다. 독일어와 불어에 능통한데다 속기와 타자 특기도 보유했다. 그녀는 20세에 자동차 경기선수 헬무트 뵈링과 결혼했으나 4년 만에 이혼했으며 자녀는 없었다.
결혼 반지 값도 신부 부담
그녀는 1933년 2월21일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 여행을 하다가 제네바의 드 루시 호텔 식당에서 李承晩 박사와 우연히 합석하게 되었다. 당시 제네바의 국제연맹본부에서 국제회의가 있어 호텔 식당마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李박사는 불어로 감사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으며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본 아페티』(맛있게 드세요)라고 인사한 후 음식을 먹었다.
절인 배추와 소시지 하나, 감자 두 개의 간소한 식사를 하는 기품 있는 동양신사에게 호감을 느낀 프란체스카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를 물었다. 신사가 코리아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프란체스카가 여행 직전에 읽은 책이 바로 「코리아」였던 것이다. 그녀가 『코리아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들이 산다지요』하고 화제를 꺼내자 李박사는 몹시 반가워했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다.
다음날 신문에 李承晩 박사에 관한 기사가 실리자 프란체스카는 그 기사를 오려 호텔 안내 데스크에 맡겼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차를 마시게 되었다. 李박사가 어려운 가운데 독립운동을 한다는 걸 알고 프란체스카는 봉사를 자청, 몇 건의 서류를 타이핑해 주었다. 계속 돕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으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어머니가 귀국을 서두르는 바람에 그녀는 예정을 앞당겨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게 되었다. 프란체스카는 어머니 몰래 김치맛 나는 사워크라푸트 한 병을 호텔 고용인에 맡기고 떠났다.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뒤 프란체스카는 어머니의 감시를 피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회사를 수신처로 제네바에 있는 李박사와 서신을 교환했다. 그해 7월7일 모스크바 가는 길에 비자를 받으러 빈에 왔던 李박사는 프란체스카와 재회했다. 李박사는 그날 프란체스카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르쳐 주었고 일기에 그날의 만남을 「비엔나 연사」(戀事, the Vienna Affair)라고 표현했다.
두 사람은 많은 어려움과 반대를 물리치고 1934년 10월8일 미국 뉴욕에서 결혼했다. 李박사는 59세, 프란체스카는 34세였다. 프란체스카의 어머니는 『나이가 지긋한 동양신사라 아무 탈이 없을 줄 알고 합석했는데 내 귀한 막내딸을 그토록 멀리 시집 보내게 되다니』라며 애석해 했다.
후일 프란체스카는 며느리 曺惠子씨에게 『친정 어머니나 언니들이 알았으면 기절했을 일이지만 실은 내 결혼 반지 값은 신부인 내가 지불했다』고 일러주었다. 결혼비용도 모두 프란체스카가 부담했다. 李박사로부터 받은 선물은 녹두알만한 제주도産 진주알 한 개가 전부였다.
개혁적이면서 보수적인 李承晩:아내에게 『부엌일은 못 돕는다』 선언
李承晩 박사는 1875년 황해도에서 6代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양녕대군 16세손으로 아버지 李敬善(이경선)씨는 譜學(보학)과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은 유교적 선비였으며 살림은 넉넉지 못했다. 李承晩은 열다섯 살 때 부모가 간택한 동갑나기 朴承善(박승선)씨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아홉 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후일 두 사람은 이혼했다.
李承晩은 소년기에 科擧(과거) 등과를 목표로 서당공부를 하였다. 1894년 터진 淸日(청일)전쟁 와중에 과거 제도가 폐지되자 1895년 2월 주변의 권유로 미국인 선교학교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이를 계기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이후 미국에 유학하여 조지워싱턴大(학사)와 하버드大(석사), 프린스턴大(박사)에서 국제정치학과 神學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李承晩은 한국인으로서 박사학위 최초 소유자가 됐다. 그래서 대통령 시절에도 李박사로 불렸다.
李承晩 박사는 1910년에서 1912년까지 2년간을 제외하고 광복 때까지 주로 미국에서 생활하였다. 아들 李仁秀 박사는 『東京제대 출신들과 일제 치하를 겪은 사람들이 일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달리 일제를 거치지 않은 李박사는 우리나라의 눈으로 세계를 보았다』고 평가했다.
「李承晩의 삶과 꿈」의 저자 연세대 국제대학원 柳永益(유영익) 석좌교수는 『李承晩은 보기 드문 언론인 출신 학자형 정치가』라며 『同시대의 다른 독립운동가 혹은 외국의 최고지도자에 비해 수준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평생 왕성하게 집필활동을 했다』고 기술했다. 이와 함께 『배재학당 시절부터 西向路線(서향노선), 즉 개혁 노선을 밟았다』고 평했다.
조선시대 서당공부로 시작해 미국에 유학, 박사학위를 딴 李承晩은 개혁적이면서 보수적인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양반가의 6대 독자였던 李박사는 결혼하자마자 프란체스카에게 『한국의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서 아내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일러주었다. 프란체스카도 친정에서 『정숙한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부엌일을 도움받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 남편의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