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만나는 일본 일본인 ⑤ 나가사키의 술들

최초로 서구식 와인 수입·보급

  • 글 : 모종혁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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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토열도에서 처음 가톨릭 받아들인 후쿠에지마 포도로 만든 고토와인
⊙ 에도 시대 ‘세계로 열린 창’ 나가사키 데지마
⊙ 에도 시대 순교의 현장 ‘운젠지옥’과 가톨릭 농민반란의 현장 시마바라
⊙ 에도 시대에 지어진 야마자키주조장에서 세이슈(淸酒), 쇼츄(燒酒) 등 빚어

牟鍾赫
1971년생. 중국정법대학 경제법학과 / 한국 투자기업 노무관리 컨설턴트, 중국문제 기고가, 방송 VJ·PD, 취재 코디네이터로 활동 / 저서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웹소설 《七天的愛在新疆》(중국어)
일본과 유럽을 연결해 주는 통로였던 오모테몬바시.
지난 10여 년 동안 출판되어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은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손꼽자면, 단연 《귀멸의 칼날(鬼滅の刃)》과 《진격의 거인(進擊の巨人)》이다.
 
  《진격의 거인》을 그린 만화가는 이사야마 하지메(諫山創)다. 《진격의 거인》을 처음 선보인 2009년에 겨우 23세였고 첫 데뷔작이었다. 이사야마는 1986년에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부터 체구가 왜소하고 건강이 좋지 않은 허약 체질이었다. 따라서 극도로 자신을 부정하곤 했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만화가의 꿈을 키워 크게 성공했다.
 
히타기차역 앞에 세워져 있는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 주인공 동상.
  이사야마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도시는 히타(日田)다. 히타는 ‘규슈(九州)의 작은 교토(京都)’라고 불릴 만큼 옛 건축물과 전통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규슈 북부 한복판에 자리 잡은 교통의 요지로, 예부터 상업이 발달했다. 하지만 19세기에 오이타(大分)현으로 편입된 이후 차츰 몰락하여 인구가 감소했고, 현재 주민 수는 5만9000여 명에 불과하다. 이런 히타 현실에서 이사야마는 슈퍼스타와 같은 존재다. 《진격의 거인》 주인공 상징물이 시내 곳곳에 세워져 있을 정도다.
 
 
  水鄕 히타
 
  그러나 히타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에도(江戶)막부의 직할지로서 번영을 누렸다. 에도막부는 전국에 산재한 다이묘(大名·영주)를 감시하고, 막부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교통 요충지와 항만, 광산, 산림 등지에 직할지를 두었다. 그러고 직할지에는 에도막부가 직접 관리를 파견해 다스렸다. 이러다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에 따라 에도막부의 통치권과 직할지가 천황에게 넘겨졌다. 따라서 에도막부의 직할지는 ‘덴료(天領)’라고 바뀌어 불리게 됐다. 히타 역시 덴료 중 하나였다.
 
  히타가 덴료가 된 이유는 아소산(阿蘇山)에서 발원해 히타를 가로지르는 지쿠고가와(筑後川)의 강줄기 덕분이다. 규슈 북부의 여러 지방에서 흘러내려온 여러 하천은 히타에서 지쿠고가와로 합류한다. 이로 인해 예부터 히타는 ‘수향(水鄕)’으로 불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강을 끼고 있는 지역은 배를 이용하여 물자를 옮기는 수운(水運)이 발달했다. 따라서 수운이 활발한 도시는 상업이 발달해서 번성할 수 있었다. 히타는 지쿠고가와를 끼고 있는데다, 규슈 북부의 중앙이라는 천연의 입지 조건까지 갖추었다.
 
  따라서 에도 시대에는 규슈 중부 및 히타 주변의 산림에서 벌채한 목재와 규슈 북부 각지의 물산이 히타로 먼저 이송됐다. 히타에서는 에도막부 관리의 감독 아래 이를 일본 중앙으로 보냈다. 이렇기에 에도 시대 히타는 수많은 물자와 각지의 상인이 몰리는 상업 도시로 발전하여 번영했던 것이다. 당시의 영화를 오늘날까지 간직한 곳이 있다. 히타의 중심가인 마메다마치(まめだまち)다. 마메다마치를 걷다 보면,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상점은 일본 전통의 신발이자 나막신인 게다(下駄)을 파는 가게다.
 
 
  게다와 간장
 
  왜냐하면 오래전부터 히타 주변의 산림에서 질 좋은 삼나무와 전나무가 많이 자랐기 때문이다. 삼나무는 훗날 ‘히타 삼나무’라는 브랜드까지 얻을 정도로 품질이 좋았기에, 이것으로 게다, 칠기 등의 목공예품을 만들었다. 특히 게다는 일본 3대 생산지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성장했다. 마메다마치의 한 상점에는 높이 4m, 폭 2m, 무게 1000kg에 달하는 일본에서 가장 큰 게다가 전시되어 있다. 히타기차역 대합실과 앞에 만든 랜드마크 HITA도 삼나무로 만들었다. 여기서 ‘I’는 사람이 들어가야 비로소 완성된다.
 

  히타는 물의 고장이라는 별명답게 풍부한 강물과 좋은 지하수로 간장, 니혼슈(日本酒), 맥주, 생수 등을 생산한다. 간장은 1843년에 설립된 히타간장(醬油)이 대표 브랜드다. 히타간장은 누룩으로 만드는 간장과 함께 곡물을 발효시켜 만드는 일본의 발효식품인 미소(味噌), 식혜와 비슷한 아마자케(甘酒) 등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업체다. ‘자연의 재료로 자연스럽게 만든다’는 회사 모토에 따라 지금도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제품을 생산한다. 그렇기에 1949년에는 천황에게 진상하는 간장으로 지정됐다.
 
  18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히타간장 본점에서는 다양한 간장과 미소의 시식이 가능하다. 필자도 히타를 방문하여 마메다마치에 있는 본점을 찾아 간장, 미소, 아마자케 등을 맛보았다.
 
 
  히나고텐
 
히나닌교는 천황 부부 인형에 전통 궁중의상을 입혀 놓은 것이다.
  가장 큰 기대를 안고 들렀던 곳은 히타간장이 운영하는 히나인형박물관 히나고텐(ひな御殿)이었다. 히나고텐에는 히타간장의 창립자 가문이 3대 동안 일본 전역에서 수집한 히나닌교(雛人形), 유명 인형 장인의 작품, 캐릭터 인형 등 4000여 개가 전시되어 있다. 히나닌교는 일본의 전통 축제인 히나마쓰리(雛祭り)와 관련이 있다.
 
  히나마쓰리는 여자아이가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고 미래에 행복해지기를 기원하는 날이다. 과거에는 음력 3월 3일에 열렸는데, 지금은 양력 3월 3일로 바뀌었다. 이날에 어린 여자아이가 있는 가정에서는 계단처럼 층층이 쌓아 올린 히나단(ひな壇) 위에 붉은 천을 깔고 히나닌교를 놓아서 복숭아꽃으로 장식한다. 히나닌교는 천황 부부나 신하의 인형에 전통 궁중의상을 입혀 놓은 것이다. 예전에는 5단 또는 7단으로 쌓았으나, 인형이 비싼 데다 둘 곳도 마땅치 않아 현재는 남녀 한 쌍으로 1단만 장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정성 들여 꾸미는 히나단이지만 히나마쓰리가 지나면 일찍 치워버린다. 늦게 치우면 여자아이가 게을러지고 시집을 늦게 가게 된다는 미신 때문이다. 히나고텐은 수많은 인형을 10개의 전시실로 나눠 전시하고 있는데, 에도 시대의 예술적인 가치가 뛰어난 히나닌교부터 유명한 가부키(歌舞伎) 배우 사노가와 이치마쓰(佐野川市松)의 모습을 본떠 만든 이치마쓰 인형까지 구경할 수 있다.
 
 
  300년 전 군초주조
 
1826년에 지어진 군초양조 저장창고는 현재 박물관처럼 꾸며 놓았다.
  니혼슈를 빚는 양조장은 히타 시내에 여러 곳이 있는데, 마메다마치 끝쪽에 자리 잡은 군초주조(薫長酒造)가 대표주자다.
 
  군초주조의 역사는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히타에는 자금을 다이묘나 상인에게 대여하는 금융업에 종사하던 치하라(千原家) 가문이 있었다. 치하라 가문은 부(富)를 축적한 뒤 사업을 여러 업종으로 확장했는데, 그중 양조업도 있었다. 같은 시기 후쿠오카에는 또 다른 양조업체 도미야스혼가(富安本家)주조가 있었다. 가문의 후손인 도미야스 유타카(富安豊)는 히타의 물에 주목해 치하라 가문으로부터 양조장과 저장창고를 사들였다. 1932년 도미야스는 세이슈(淸酒)를 빚으면서 군초라는 브랜드로 론칭했다.
 
  두 양조장의 전통이 결합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초주조 입구 옆에는 삼나무 잎을 모아 공처럼 만든 사카바야시(酒林)가 처마 끝에 매달려 있다. 그리고 건물 앞부분은 전시장으로, 군초주조에서 제조하는 수많은 세이슈와 쇼츄(燒酎)를 판매하고 있다. 전시장에서는 5종류의 술을 무료로 시음할 수 있다. 그 안쪽으로 술을 빚는 양조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가장 깊숙한 곳은 1826년에 지어진 저장창고로, 과거 술을 제조할 때 사용했던 양조 도구를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이다.
 
 
  세계로 열린 창 데지마
 
  필자가 나가사키(長崎)를 방문하면서 가장 기대한 명소는 데지마(出島)였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 일본에서 세 번째의 막부 정권인 에도막부가 성립됐다. 에도막부는 264년 동안 일본을 통치했는데 무가(武家) 정권 중 가장 오래 존속한 기록이다.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將軍)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로 ‘막번(幕藩) 체제’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갖추었는데, 이 덕분에 대규모 전쟁이 없었고, 무사 계급인 사무라이가 칼을 들 일이 거의 없었다.
 
  이로 인해 오늘날 일본의 근간이 만들어졌다. 높은 농업 생산성과 활발한 상업 거래에 기반한 경제 성장, 성(城)을 중심으로 한 도시화, 부유한 상인층의 등장, 가부키로 대표되는 평민의 유흥문화 등은 에도 시대에 형성됐다. 따라서 조선과의 국력 격차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대외 정책이었다. 조선과 에도막부는 모두 쇄국주의를 고집했다. 하지만 에도막부는 조금 달랐다. 데지마를 통해 네덜란드와 무역을 지속해서 했고, 조선에도 통신사 파견을 요청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특히 데지마가 끼친 파급력은 어마어마하다. 16세기부터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한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일본에 유럽의 신무기인 조총을 전수한 이도 포르투갈인이었다. 에도막부가 이런 포르투갈인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어 관리를 쉽게 하려는 목적으로 건설한 인공섬이 데지마였다. 하지만 완공된 지 3년 만인 1639년 가톨릭 포교 문제로 에도막부는 포르투갈인을 모두 추방했다. 대신에 데지마를 차지한 이가 네덜란드인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개신교가 득세했고 포교에 소극적이었으며 다른 종교에 관대했다.
 
 
  에도참부
 
나카사키 데지마의 상관장 저택 접견실. 식탁에서 와인은 빠지지 않았다.
  필자는 버스에서 내려 육지와 데지마를 연결하는 다리로 들어섰다. 데지마는 1.5ha로 축구장 2배보다 약간 크며, 형태는 부채꼴 모양이다. 출구는 길이 38.5m의 오모테몬바시(表門橋)인데, 에도 시대 당시 일본과 유럽의 유일한 통로였다. 데지마에 들어서면 길게 뻗은 도로 양옆으로 건물이 꽉 차 있다. 1641년 데지마에 입주한 네덜란드인은 상관과 숙소, 창고 등을 건설했다. 사실 데지마에 상주한 인원은 상관장, 서기관, 창고장, 의사 등 네덜란드인부터 인도네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하인까지 15명 안팎이었다.
 
  데지마가 북적였던 시기는 음력 6~7월부터 12월까지였다. 왜냐하면 이때 계절풍을 따라 네덜란드에서 동인도회사(VOC) 무역선 2척이 입항해서 머물다가 출항했기 때문이다. 교역품은 네덜란드에서 방모직물, 정향, 후추, 설탕, 유리제품 등을 수출했고, 일본은 은, 구리, 장뇌, 도자기, 옻칠유기 등을 수출했다.
 
  사실 거래 형태는 불평등했다. 네덜란드인은 일본어 통역사를 데려오거나 고용할 수 없었다. 일본인만 네덜란드어 통역사를 대동해 주도권을 잡았다. 따라서 네덜란드인은 일본 내 가격 정보를 최대한 수집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에도참부(江戶參府) 덕이었는데, 에도참부는 새로 부임한 상관장이 쇼군에게 인사하러 가는 행사다. 1859년까지 218년 동안 데지마 상관장을 157명이 역임했는데, 에도참부를 166회나 진행했다. 상관장 일행은 음력 1월에 데지마에서 출발했다. 3월부터 한 달 동안 에도에 머물며 쇼군에게 인사하고 5월이나 6월에 돌아왔다. 상관장 일행은 쇼군과 막부 고관에게 유럽의 진귀한 물품을 진상하고 많은 답례품을 받았다. 이때 일본 곳곳의 상업과 시장 동향을 알아내 무역 거래에 이용했다.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 난가쿠
 
나가사키의 구라바엔은 일본 근대화에 기여한 영국 상인 글로버의 저택으로 오페라 〈나비부인〉의 배경지다.
  이렇게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데지마에 살았던 네덜란드인은 무척 적적한 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에도막부가 금제(禁制)를 내려 평소 허가받지 못한 일본인의 데지마 출입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섭외한 게이샤(藝者)가 자유롭게 데지마에 가서 몸을 팔았다. 에도참부 과정에서 인연을 맺은 일본 관리도 데지마에 들어갔다. 이렇게 무역 거래, 에도참부, 데지마를 드나들던 일본인 등을 통해 네덜란드 문화인 난가쿠(蘭學)가 일본에 널리 퍼졌다.
 
  난가쿠는 네덜란드의 학문, 기술, 문화 등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선진 문명을 가리킨다. 일본의 선각자들은 대항해 시대 이래 급속도로 발전하던 유럽의 상황을 난가쿠로 체험하면서 실력을 키울 필요성을 느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큰 경제·사회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지만, 일본은 꾸준히 성장한 배경이다. 이처럼 데지마는 쇄국 정책 아래에서도 유럽과 소통하던 창구로, 눈부신 활약을 했다. 나가사키는 에도막부가 개항한 1854년 이후 첫 개항장으로 서구세계와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도시다.
 
  이를 알 수 있는 장소가 구라바엔(グラバ一園)이다. 구라바엔은 개항 직후 나가사키에서 활약했던 영국 상인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1838~1911년)의 저택과 정원이다. 글로버는 서구의 신식 무기와 탄약을 팔아 큰돈을 벌었다. 이로 인해 글로버 저택 주변에 외국인이 몰려 살면서 구라바엔은 나가사키의 외국인 거주지가 됐다. 또한 구라바엔은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글로버는 일본에서 최초로 증기 기관차를 운행했고 탄광을 인수해 운영했으며 나가사키 조선소의 운영에도 관여했다.
 
 
  고토와인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최초로 서구식 와인을 수입하여 보급했다. 네덜란드 상인이 가져와 데지마에서 마시고 쇼군과 막부 고관, 나가사키 관리 등에게 선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가사키와 에도에서는 와인을 기호품으로 손꼽았다.
 
  에도 시대 나가사키에서는 스테이크도 먹었다. 역시 네덜란드 음식 문화의 영향 때문이었다. 사실 7세기에 덴무(天武) 천황은 소, 돼지, 말, 개, 양, 닭의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했다. 그 뒤 일본에서는 1200년 동안 육식 금지령을 철저히 지켰다. 하지만 나가사키는 예외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필자는 나가사키를 떠나기 전 스테이크와 고토와인(Gotoワイン)을 먹고 마실 수 있는 전문 레스토랑을 찾았다. 고토와인은 나가사키 앞 고토(五島)열도에서 가장 큰 섬인 후쿠에지마(福江島)에서 자라는 포도로 빚는다.
 
  후쿠에지마는 고토열도에서 처음으로 가톨릭을 받아들인 곳이다. 1566년에 예수회 신부가 복음을 전했다. 비록 에도 시대에 가톨릭 신자는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지만, 극소수 주민이 숨어서까지 신앙을 지켰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 따라 1980년대에 후쿠에지마 주민은 포도나무를 심어 와인을 양조했다.
 
  포도나무는 척박한 땅일수록 더 깊게 뿌리내리는 생명력을 발휘한다. 또한 맺히는 포도 한 알 한 알에 더 강렬한 풍미를 담는다. 후쿠에지마 주민은 와인을 양조하는 과정에서 동백나무의 효모를 더해 향기가 좋게 했다. 이 덕분에 2021년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사쿠라 와인 어워드에서 금상을 탔다.
 
  후쿠에지마는 나가사키에서 유람선을 타고 가야 한다. 필자는 비록 고토와이너리는 방문하지 못했지만,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현지 스테이크를 먹고 고토와인을 마실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가사키의 가톨릭 순교자들
 
  가톨릭은 1560년에 포르투갈 신부에 의해서 일본으로 전래됐다. 당시 일본은 전국(戰國) 시대의 혼란기였다. 따라서 각지의 다이묘는 포르투갈 신부를 우대하여 그들의 과학 기술을 적극 받아들였다. 심지어 일부 다이묘는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했다. 대표적인 이가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으로 참전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다. 당시는 가톨릭교도를 ‘기리시탄(キリシタン)’이라고 불렀다. 전국 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처음에는 가톨릭에 관용적이었다. 하지만 가톨릭의 교세가 너무 빨리 확장했다.
 
  그래서 일본 신토(神道)나 불교의 세계관 및 가치관과 충돌하면서 사회적 혼란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도요토미는 1587년에 신부를 추방했다. 1597년에는 신부, 선교사, 교도 등 26명을 나가사키에서 처형했다. 출신은 일본, 스페인, 멕시코, 중국, 인도 등 다양했다. 1862년 교황 비오 9세가 이들을 성인(聖人)으로 올렸고, 이후 이곳은 일본의 대표적인 순교(殉敎) 성지가 되었다. 일본 26성인 순교지다. 사실 필자가 나가사키에서 처음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나가사키기차역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필자가 일본의 가톨릭의 전래 및 확장, 가혹한 탄압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한 편의 영화 때문이다. 2016년에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연출한 〈사일런스(Silence)〉다.
 
 
  영화 〈사일런스〉
 
  〈사일런스〉는 17세기 중엽 ‘시마바라의 난’이 진압된 직후 일본에서 벌어졌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한 예수회 신부가 배교(背敎)한 다른 신부를 찾아 일본에 온 뒤에 겪은 이야기다.
 
  신부 페레이라는 마카오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1609년 일본에 파견됐다. 일본어가 능통해져 일본교구를 총괄했으나 1633년 에도막부에 체포됐다. 그 뒤 심한 고문을 당해 배교하고 일본 이름을 받아 일본인처럼 살았다. 또한 체포된 선교사와 교도의 신문에 참여했고 배교를 권유했다.
 

  이런 사실이 유럽에 알려져 파문이 일어났다. 그래서 일본에 온 신부가 로드리게스다. 하지만 로드리게스도 막부에 잡힌 뒤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하고 일본인이 됐다. 그러고 페레이라와 함께 선교사와 교도의 색출에 앞장섰다.
 
  가톨릭은 규슈를 중심으로 전파되어 혼슈(本州)에는 신도가 적었다. 그러나 에도막부는 가톨릭이 일본의 사회 체제를 뒤흔든다고 판단해 탄압을 강화했다.
 
  본래 시마바라 지역은 기리시탄인 아리마 나오즈미(有馬直純)가 다스렸다. 1614년 막부는 아리마를 다른 지방으로 전봉(轉封)시키고 마쓰쿠라 시게마사(松倉重政)를 새 다이묘로 임명했다. 시게마사는 부임한 뒤 백성을 수탈하면서 성을 지어 1624년에 완공했다. 또한 기리시탄을 잡아 운젠(雲仙)으로 보내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다.
 
 
  ‘시마바라의 난’
 
일본 가톨릭의 역사에서 중요한 시마바라의 난 현장인 시마바라성.
  필자는 나가사키를 방문한 다음 날 신칸센을 타고 이사하야(諫早)로 갔다. 이사하야에 내려서는 운젠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운젠다케(雲仙岳)는 오래전부터 분화해 온 활화산이다.
 
  그 남부에 위치한 운젠지옥으로 향했다. 펄펄 끓는 유황수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시게마사는 이 유황수에 기리시탄을 맨발로 걷게 하거나 눕혀서 굴렸다. 이렇게 잔인한 고문을 벌여 강제로 개종시켰기에 ‘운젠지옥’이라고 불렸다. 운젠지옥에 가보니 끓어오르는 물과 짙은 유황의 냄새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시게마사가 죽은 뒤 아들인 마쓰쿠라 가쓰이에(松倉勝家·1597~1638년)가 다이묘를 계승했다. 가쓰이에는 백성의 고혈을 더욱 쥐어짰다. 이에 견디다 못해 1637년 12월에 기리시탄이 주동하여 농민들이 들고일어섰다.
 
  지휘관은 16세인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天草四郞時貞)였다. 가쓰이에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참패했다. 크게 당황하여 막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도착한 진압군을 맞아 봉기군은 용감히 싸워 무찔렀다.
 
  이에 막부는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각지의 다이묘에게 명령해 병사를 모았고, 봉기군보다 4~5배나 많은 12만 대군을 새로 편성했다. 진압군은 육지와 바다를 모두 포위하여 섬에 자리 잡은 하라성(原城)을 봉쇄했다. 하라성 내 봉기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식량이 바닥났음에도 물고기와 해초로 연명하며 투항을 거부했다. 1638년 4월 진압군은 총공격에 나서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봉기군을 몰살했다. 하지만 진압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후미에’와 ‘마리아관음상’
 
  시마바라의 난 이후 막부의 가톨릭 박해는 집요할 정도로 더 철저해졌고 혹독했다. 막부는 모든 백성을 불교 사찰에 등록하도록 해서 불자(佛子)로 만들었다. 다섯 집을 1조로 묶어 서로 감시하면서 기리시탄을 고발하도록 했다. 이런 탄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짜로 개종한 기리시탄을 가려내기 위해 막부는 후미에(踏み繪)를 강제로 집행해 검증했다.
 
  후미에는 예수나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새긴 목판이나 금속판을 바닥에 놓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가도록 하는 짓이었다. 만약에 밟지 못하거나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면 바로 잡아갔다. 기리시탄은 성상(聖像)을 훼손하는 데 큰 죄의식을 가졌기에 후미에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와중에도 기리시탄은 신앙을 버리지 않고 깊은 산속이나 외딴섬으로 들어가거나 해외로 떠났다. 산속과 섬에 사는 가톨릭교도는 신념을 속이기 위해 성모 마리아상 대신에 관음상을 집안에 모시고 예배를 드렸다.
 
  훗날 이를 ‘마리아관음상’이라고 불렀다.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한 뒤 막부는 폭정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나게 한 가쓰이에를 압송해서 참수했다. 그 뒤 시마바라는 번주가 여러 차례 바뀌다가 도쿠가와 가문의 친척뻘인 마쓰다이라(松平) 가문이 다스렸다.
 
  시마바라성은 동서가 360m, 남북은 1260m, 전체 성벽은 3900m에 달하는 큰 규모다. 비록 1874년 폐성령(廢城令)으로 천수각(天守閣)을 비롯한 건물은 철거됐지만, 성벽은 옛것 그대로다. 복원한 천수각에는 가톨릭의 전래부터 박해까지 전 시대의 많은 유물이 채워져 있다.
 
 
  마가타마
 
시마바라성 서쪽에 있는 무가저택 거리인 ‘부케야시키도리’.
  시마바라성 서쪽으로는 사무라이가 사는 부케야시키도리(武家屋敷通り)가 형성됐다. 여기에 마쓰다이라 가문과 함께 온 가신들이 저택을 지어 살았다. 세월이 흘러 살기 어려워진 사무라이 중 일부가 상인으로 변신했는데, 야마자키(山崎) 가문도 그러했다. 그래서 에도 시대 말기부터 식초, 간장 등을 제조해 팔기 시작했고, 1884년부터는 니혼슈를 양조했다. 20세기 들어 일본에서 니혼슈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야마자키 가문은 술을 빚는 데 집중했다. 이 덕분에 양조 기술은 장족의 발전을 거두었다. 1917년 일본에서 최고의 전통과 규모를 자랑하는 전국신주감평회(鑑評會)에서 1위를 차지했다. 현재 야마자키주조장은 에도 시대에 지어진 작업장에서 세이슈, 쇼츄 등을 빚고 있다. 대표적인 술로는 세이슈인 마가타마(まが玉)가 유명한데, ‘눈 무늬가 굽은 옥’이라는 뜻이다. 본래 마가타마는 사이타마(埼玉)현에서 살다가 시마바라의 다이묘로 왔던 마쓰다이라 가문의 상징 마크다. 오늘날 사이타마현의 현장(縣章)이기도 하다. 사이타마에 함께 이주해 왔던 야마자키 가문의 내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시마바라의 슬픈 역사를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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