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익숙한 정치란 사람들 간에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현실 사회에서는 희소한 자원을 둘러싸고 갈등과 충돌이 끊이지 않는다. 이러한 갈등과 충돌을 방치할 경우 사회는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갈등을 조정하여 최적의 타협을 이끌어내는 것이 정치이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정치학자 이스턴(D. Easton)은 정치를 ‘한 사회의 가치들에 대한 권위적 배분’으로 정의했다. (중략) 해방(1945년 8월 15일)부터 정부 수립(1948년 8월 15일)까지의 한국 정치는 게임의 규칙이 이미 주어진 상태에서 분배의 문제만을 정하는 과정적이고 절차적인 것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 자체를 새로 선택하고 만들어야 하는 보다 근본적인 것이었다. 이 점에서 당시의 정치는 ‘이해 갈등 조정의 정치’보다는 ‘체제 선택과 국가 형성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고(故)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의 명저 《건국과 부국》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이해 갈등 조정의 정치’는 ‘평상(平常)의 정치’ ‘체제 선택과 국가 형성의 정치’는 ‘비상(非常)의 정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한국 정치의 비극은 ‘체제 선택과 국가 형성의 정치’ 과정이 너무 길었고, ‘이해 갈등 조정의 정치’의 경험은 너무 얕았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단, 건국, 6·25 전쟁, 휴전으로 인한 재(再)분단, 북으로부터의 빈번한 도발과 전복(顚覆) 공작, 절대 빈곤의 극복, 그리고 대한민국과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민족사의 정통성을 놓고 벌여온 총체적 경쟁’이 그 원인이었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의 경제적 발전으로 중산층이 형성된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폭발했습니다. 다행히 소위 ‘군사독재 정권’은 그런 ‘시대정신’을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전두환 정권이 지금 이란의 하메네이 정권이 그러는 것처럼 강경진압으로 대응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87체제’하에서 39년 동안 아홉 명의 대통령이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었습니다. 길고 길었던 ‘체제 선택과 국가 형성의 정치’의 시대가 끝나고 ‘이해 갈등 조정의 정치’의 시대가 온 것 같았습니다.
87체제하의 이념전쟁
착각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과 6·25 전쟁 이후의 강고한(강고해 보이던) 반공(反共) 체제하에서도 독버섯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좌익(左翼) 세력과 그 후예들이 ‘민주화운동’이라는 탈을 쓰고 우리 사회 곳곳에 진지(陣地)를 구축(構築)해 놓고 있다가 거세게 도전해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1980년 광주(光州)’에 충격을 받은 젊은 대학생들(소위 386 세대·1990년대 기준으로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은 ‘극악무도한 군사독재 정권’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겠다고 결심했고, 실제로 악마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들이 바로 주사파(主思派)였습니다.
양동안(梁東安) 전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1988년 《현대공론》 8월호에 실린 〈우익(右翼)은 죽었는가〉라는 글에서 좌익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데도 수수방관하고 있는 우익 세력의 무능과 비겁, 기회주의적 속성, 안이함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그런 상황이 계속될 경우 이 나라에는 처음에는 좌익 세력과 제휴한 세력의 정권이 들어서고, 그다음 단계에는 좌익 세력이 주도하는 연합 세력의 정권이 들어서고, 궁극적으로는 완전한 공산 정권이 들어설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양동안 교수의 경고를 ‘극우 또라이의 헛소리’로 치부했습니다.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 정권을 거치면서 주사파 386 세대는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각층에 똬리를 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개발연대의 주역들이 퇴장하면서 그들은 결국 오늘날 대한민국의 주류(主流) 세력이 되어버렸습니다.
노무현(盧武鉉) 정권의 출현은 그들의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이후 이명박(李明博)·박근혜(朴槿惠) 정권 등 소위 ‘보수우파’ 정권이 들어서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광우병(狂牛病) 선동과 탄핵(彈劾)이라는 역습(逆襲)을 받고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박근혜 탄핵’ 당시 태극기 집회가 열리는 곳에서는 ‘계엄령 선포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계엄령은 가능하지도 않고, 해서도 안 된다. 좌파와 싸워 이기려면, 저들이 수십 년 동안 차근차근 이념전쟁, 진지전(陣地戰)을 해왔듯이, 우파 역시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싱크탱크와 액션탱크를 만들고, 젊은이들을 키우고, 우파 생태계(生態系)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저 말고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기성 보수 세력은 이걸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스스로 공부하고, 보수 정당에서 정치를 해보려는 젊은이들이 나와도, 기성세대는 그들을 소모품·장식품으로만 여겼습니다. 선거 때에 보수 정당의 공천을 받는 이들은 결국 투사가 아니라 판사, 검사, 변호사, 박사, 의사, 아나운사(아나운서)였습니다.
12·3계엄과 ‘내란 재판’
보수 정당, 보수 세력이 지금 처해 있는 참담한 상황은 그 후과(後果)입니다. 문재인 정권의 실정(失政)과 조국(曺國) 사태로 386 운동권 세력의 위선과 무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후인 2022년에 치러진 제20대 대선(大選)은 이런 자들을 청소해 버릴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 이후 20여 년을 무사안일하게 흘려보내면서 늙고 낡아버린 보수 세력은 내세울 만한 주자가 없었습니다. 결국 노무현·문재인 정권과 코드를 같이하다가 그들과 관계가 틀어져버리면서 ‘스타’가 된 전직 검찰총장이 보수 정당의 대선 후보로 간택되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이런저런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980년대 전대협이나 1990년대 한총련 출신 같은 극좌(極左) 세력이 에워싸고 있는 후보를 앞에 두고서 보수 세력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재임 기간 내내 극좌 세력과 야당에 시달리던 검사 출신 대통령은 결국 12·3계엄이라는 자충수(自充手)를 두고 말았습니다. 극좌 세력과 야당은 신속하게 ‘내란(內亂) 프레임’을 씌웠습니다. 대통령직에서 파면되고, ‘내란 수괴(首魁)’라는 죄목으로 법정에 선 전(前) 대통령은 1월 14일 1심 최후진술에서 “비상계엄은 주권자인 국민들께서 제발 국정에 관심을 가지고 망국적 패악에 대해 감시·견제를 해달라는 호소였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특검은 그에게 사형(死刑)을 구형(求刑)했습니다. 아마 형량(刑量)이 문제지, 중형(重刑)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법적 심판을 떠나서라도 그는 시대착오적인 계엄령으로 대한민국호를 표류하게 만들고, 이 결과 국제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대한민국이 극좌 세력의 손에 넘어가게 만든 데 대한 정치적·역사적 책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구형에 즈음해서 형법이 내란죄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찾아보았습니다. 제87조에 이렇게 규정되어 있네요.
〈대한민국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서 국가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國憲)을 문란(紊亂)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자는 다음 각 호(號)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1. 우두머리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 2. 모의에 참여하거나 지휘하거나 그 밖의 중요한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 살상, 파괴 또는 약탈 행위를 실행한 자도 같다. 3. 부화수행(附和隨行)하거나 단순히 폭동에만 관여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폭동 이외의 방법으로 ‘대한민국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서 국가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한 자는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형법을 아무리 찾아봐도 그에 대한 규정은 없네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