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의 우수성 알리고 日帝 고발한 호머 헐버트… 《코리아를 어찌할 것인가?: 호머 헐버트 전기》
⊙ 일제 말 호국·충절·저항의 인물들 통해 민족의식 일깨운 안재홍… 《산문집: 영호남기행 1》
⊙ 반공기독교 사상으로 대한민국 뒷받침한 한경직… 《나의 감사》 《한경직의 기독교적 건국론》
⊙ 자유와 관용의 민주주의 추구했던 장덕수… 《장덕수 연구》
⊙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세운 이승만…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우남 이승만 평전: 카리스마의 탄생》
⊙ 일제 말 호국·충절·저항의 인물들 통해 민족의식 일깨운 안재홍… 《산문집: 영호남기행 1》
⊙ 반공기독교 사상으로 대한민국 뒷받침한 한경직… 《나의 감사》 《한경직의 기독교적 건국론》
⊙ 자유와 관용의 민주주의 추구했던 장덕수… 《장덕수 연구》
⊙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세운 이승만…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우남 이승만 평전: 카리스마의 탄생》
분단이 장기화되면서 한 가지 분명한 대비(對比)가 나타났다. 초기에 가난하고 희망이 없는 나라처럼 비쳤던 대한민국은 어느 시점 이후 흥륭의 길에 들어섰음에 반해, 역시 초기에 남한보다 훨씬 잘사는 것으로 비쳤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미 수십 년에 걸친 폭압과 굶주림의 비참에 빠진 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비를 바라보며, 우리는 자연히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실현한 지도자들의 사상과 행동을 재조명하게 된다. 마침 최근 몇 개월 사이 이 주제에 관해 세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이에 이 책들에 앞서 이승만 대통령과 한경직 목사(이하 전문에서 직함 또는 경칭 생략)에 관해 출판된 책들을 포함해 종합서평의 형식으로 이 주제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소개의 순서는 역사의 흐름에 맞췄다.
김동진, 《코리아를 어찌할 것인가?: 호머 헐버트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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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아를 어찌할 것인가?》(2025년) |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헐버트는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에 버몬트주에서 미들베리칼리지 총장이며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 그리고 뉴햄프셔주 다트머스칼리지의 설립자이면서 역시 개신교 목사의 손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개신교의 가풍이다. 설명이 필요 없듯, 버몬트주 그리고 뉴햄프셔주를 비롯한 동북부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주한 영국 개신교의 전통이 강한 곳이다.
미국이 독립하기 이전 영국 식민지 시절에 설립된 아홉 개 대학 가운데 마지막으로 1769년 12월에 개교한 다트머스칼리지는 《구약성경》 가운데 〈이사야 서(書)〉에 나오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학교의 지향으로 삼을 정도로 개신교의 전통을 중시했다. 헐버트는 바로 이 대학에 입학해 4년 동안 교육을 받으며 더더욱 기독교 정신을 내면화했다. 그가 훗날 친일적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미국의 주류 사회에서 일제의 조선에 대한 박해와 범죄를 고발하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은 글자 그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헐버트가 다트머스칼리지를 졸업하고 뉴욕의 유니언신학교에 재학하던 때인 1886년 9월에 고종은 귀족(양반)의 자제들에게 서양식 교육을 베풀기 위해 육영공원을 개교하면서 교관을 미국에서 초빙했다. 헐버트는 벙커 및 길모어와 함께 서울로 왔다. 이 학교가 1894년에 폐교된 이후 헐버트는 미국인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세운 배재학당에서 가르치기도 했는데, 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 이승만(李承晩)이었다. 헐버트는 이 학교에서 가르치면서 1892년에는 《코리아 휘보》라는 월간지를 창간했고, 1896년 4월 7일에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자 거기에 참여했으며, 1901년에는 《코리아 평론》을 창간했다.
이때만 해도 헐버트는 일제의 조선 정책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진출’하고 있다는 일제의 해명에 대해, ‘식민주의를 통한 근대화’는 자신이 구상하는 ‘기독교를 통한 근대화’와 비교해 뒤떨어진다고 보았을 뿐이다.
‘한글’의 우수성 알린 선구자
그러나 1905년에 들어서자,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친일 정책에 따라 일제가 1897년 10월 12일에 대한제국으로 격상한 이 약소국을 자신의 ‘보호국’으로 만들 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헐버트의 노력은 크게 보아 두 갈래로 나타났다. 첫째, 《코리아의 멸망》과 같은 저서의 출판으로 코리아의 역사, 특히 독립 의지를 미국 사회에 널리 알렸다. 그는 이 저서 그리고 이후의 여러 저술을 통해 한민족이 거북선을 발명했고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뛰어난 민족이라는 사실 그리고 ‘세상의 어느 문자도 겨룰 수 없는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을 창제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다. 특히 한글에 대해 보통 사람도 일주일 정도 공부하면 배울 수 있는 독창적이며 우수한 문자라고 격찬하며 한글로 세계 지리를 설명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1891년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판했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한글을 배우려는 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음을 생각할 때, 헐버트는 한글의 세계화에서 선구자였다고 저자 김동진 회장은 높이 평가했다. 이 점을 인정해,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둘째, 헐버트는 1907년 6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국제평화회의에 1905년 일제의 강압 아래 맺어진 조약의 부당성과 무효를 알리기 위해 고종이 파견한 이상설(李相卨)·이준(李寯)·이위종(李瑋鍾) 등 세 밀사와 발을 맞추었다. 일제의 훼방으로 참석하지 못했으나, 코리아의 독립을 위한 그의 자발적 헌신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 병행해, 그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국제사회에 널리 퍼뜨린 ‘고종 무능’설을 반박했다. 고종은 결코 취약한 암군(暗君)이 아니었음을 역설한 것이다.
헐버트의 헌신은 1919년 3·1 운동 직후에 다시 나타났다. 한민족의 이 거족적 운동 직후인 1919년 8월에 그는 미국 연방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일제 식민 통치의 잔학성을 고발하고 코리아의 독립을 호소하는 《코리아를 어찌할 것인가?》를 제출했다. 이 호소문에서 그는 3·1 운동이 글자 그대로 거족적인 ‘혁명’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3·1 혁명’으로 명명했고, 3·1 운동의 산물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의 합법적 계승자임을 확인하면서 그 역사적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
헐버트는 이어 한민족의 문화적 독창성과 우수성을 거듭 강조했다.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로서 한국인이 아리랑을 노래하면 워즈워스나 바이런 같은 시인이 된다”라고 칭찬하고, 1896년에는 아리랑을 최초로 서양 음계로 채보(採譜)하며 “아리랑은 한민족의 영원한 노래가 될 것”이라고 단언하는 등, 한민족의 문학적·음악적 재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그가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K-팝’의 등장을 예고한 것으로 저자 김동진 회장은 해석했다.
코리아가 해방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헐버트에게 배웠으며 한민족의 항일운동에 대한 그의 적극적 지지를 잘 알고 있던 초대(初代) 대통령 이승만은 그를 ‘국빈(國賓)’으로 초청했다. 기꺼이 응해 1949년 7월 29일에 서울에 도착했으나 여독에 여행 중에 걸린 폐렴이 겹쳐 8월 5일에 별세했다.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코리아에 묻히고자 한다”는 그의 뜻에 따라 서울 합정동 양화진에 있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공동묘원’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3월 1일에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으며, 그의 동상을 세워주었다. 그가 다트머스대학에서 훗날 당시로서는 최고의 학위였던 A. M. 학위를 받은 것을 고려하고 대체로 1900년 이후 국내외 인사들이 그를 ‘박사’로 부른 관례를 존중해 대한민국 정부는 훈장증에서 그를 ‘박사’로 호칭했다.
대한제국–대한민국의 계속성 뒷받침
그러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관련해 헐버트는 어떤 이론 또는 사상을 남겼을까?
가장 중요하게 그는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국가적 계속성과 동일성을 뒷받침해 주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일시적으로 소멸했으나, 3·1 혁명을 통해 그리고 그 산물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통해 복국(復國)되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 대한민국으로 연결되었다는 역사인식을 보여준 것이다. 이 역사인식은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前文)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대조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부분적으로 날조되거나 과장된 김일성(金日成)의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자신의 정통성의 근거로 삼기 위해 3·1 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낮춰보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자체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헐버트의 한국사 인식은 매우 값지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헐버트의 기독교 입국론(立國論)이다. 앞에서 자세히 살폈듯, 그는 모두 목사 집안이었던 친가와 외가의 가정교육 그리고 다트머스칼리지에서의 기독교 교육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으로부터 미국으로 이주한 개신교 신도들의 ‘청교도 정신’을 내면화하고 있었으며, 그 스스로 1893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자연히 미국의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리에 바탕을 둔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향했고, 이것은 물론 공산주의에 대한 전면적 반대와 짝을 이루고 있었다.
안재홍 글/황우갑·방유미 풀어 읽음,
《안재홍 산문집: 영호남기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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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홍 산문집: 영호남기행1》(2024년) |
호국·충절의 인물들 기려
민세가 1926년 4월 13~26일에 14일 동안 영호남 일대를 답사하며 1926년 4월 18일~6월 2일에 자신이 주필로 재직한 《조선일보》에 발표한 답사기를 민세아카데미의 황우갑 대표와 방유미 이사가 풀어 옮겼다. 민세는 원래 뛰어난 국사학자였다. 자연히 이 글은 곳곳에서 조선의 역사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인식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대체로 네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민세는 조선의 역사를 주변 국가의 침략과 조선의 저항으로 파악했다. 이 가운데 고려 말 왜구(倭寇)의 침략 그리고 조선조 때 임진(壬辰)·정유(丁酉)의 왜란(倭亂)에 주목하고, 전자의 경우 최영(崔瑩) 장군과 이성계(李成桂) 장군의 승전을 칭찬했으며, 후자의 경우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김시민(金時敏)·송상현(宋象賢) 등을 비롯한 관군 그리고 곽재우(郭再祐)와 김천일(金千鎰) 등의 의병의 투쟁과 논개(論介)의 순국(殉國)을 높이 기렸다. ‘기미년 만세운동’에 대해서도 다시 상기시켰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항일논조를 꺾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상황에서도 민세는 역사에서의 항일투쟁과 순국의 사례를 의도적으로 상기시킨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민세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 일신을 돌보지 않고 싸우다가 순절 또는 순국한 인물들의 사례를 상기시켰다. 나당연합군의 침략에 맞서 싸운 백제의 계백 장군, 고려 말에 이성계 세력의 회유에 굽히지 않고 고려에 충성한 정몽주(鄭夢周), 그리고 조선조 때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는 찬역(簒逆)에 반발해 일생을 은사(隱士)로 살았던 김시습(金時習) 등을 높이 칭찬했다. 다른 나라의 사례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초(楚)의 충신 굴원(屈原)이 임금에게 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결하면서 남긴 ‘어부사(漁父辭)’를 소개했다.
일제의 수탈 질타
둘째,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를 ‘일제의 탐욕사’로 질타한 민세는 ‘권력의 밑에서 유린당하는 조선의 민중’에 대한 동정을 나타내며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한 반감과 동포의 비참한 생활상을 자주 드러냈다. “내가 한스러운 것은 천 리 여행길에서 만난 우리나라의 산하에 나무나 풀이 보이지 않았다. 무너진 촌락에는 곳곳마다 힘든 얼굴빛에 흰옷 입은 이들이 방황하고 있다. … 고향에서도 최근 배고픔을 못 이길 지경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들었거니와 철길 따라 보인 각 지역마다 이런 비애가 없는 곳이 없을 것이다”라든가 “넓은 들, 좁은 두렁에서 썩은 풀을 깎고 있는 흰옷 입은 사람이 있다. 매우 굶주린 기색이다. … 궁핍과 무료에 깊이 빠진 그들의 가슴에는 표현하지 못하는 큰 슬픔이 있을 것이다” 또는 “황폐한 논과 들에서 쓸쓸히 노동하는 그들은 얼굴에 핏기도 없고 누르스름한 얼굴빛이 있을 뿐이다” 등이 그 사례들이다. 이것은 일제의 통치 아래 조선이 잘살고 있다는 일제 당국의 선전에 대한 반박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들 또한 품위와 정열이 저열하여 자연의 인간성이 마멸된 특수화된 부류들이다”라는 표현으로, 또는 “일본인 남녀 모두 ‘천지가 내 것이로다’라며 시끄럽게 뛰는 모습을 보는 것은 고약한 일”이라는 표현으로 일본인들을 질타했다. 동시에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 아리요시가 마산 안민고개에 신작로를 놓게 하고 ‘아리요시고개’라고 명명한 것에 대해 “그 유치함에 웃지 않을 수 없다”라고 조롱했다.
민중혁명과 민족기백 강조
셋째, 민세는 조선의 역사에서 부당한 권력에 저항했던 ‘민중혁명’을 자주 상기시켰다. 조선왕조 순조 때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 철종 때 진주에서 ‘흰띠에 죽창을 들고 힘차게 떨쳐 일어난’ 임술민란(壬戌民亂), ‘현대 민중혁명의 첫 번째 전쟁’으로 파악되는 ‘동학운동’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것은 민세가 은연중에 일제에 항거할 것을 부추겼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넷째, 민세는 조선의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부분을 일깨워 민족적 자존심을 갖게 했다. 예컨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고구려인의 웅대한 기백을 구현했다”라고 칭찬했다. 이런가 하면 고대 중국의 군벌(軍閥)이 전라도 남원에 ‘대방군(帶方郡)’을 세워 통치했다는 역사 왜곡을 비판했다.
그러면 민세는 앞으로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해방된 뒤 세울 국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구상을 갖고 있었을까? 이 기행문은 그것까지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관련된 구절은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귀여운 어린이들을 보며 … 문득 슬프고 침울한 마음이 들어 그들 장래의 운명에 의심을 품게”라든가 “우리가 겪는 저주의 멍에를 그들의 시대에까지 물려줄까 두려워함”에 그쳤다. 그러면서도 민세는 “오늘날 재능 있는 청년 동지들도 모두 각자의 소임을 얻게 하고 함께 천하의 민중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세상에도 봄빛 가득한 땅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를 표시했다. 이 책을 관류하는 민세의 사상은 저항민족주의와 자주독립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하겠다.
한경직, 《나의 감사》
이혜정, 《한경직의 기독교적 건국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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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감사》(2010년) |
오산학교·프린스턴신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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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경직의 기독교적 건국론》(2011년) |
한경직은 숭실대학을 졸업한 뒤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해 캔자스주 엠포리아에 장로교가 세운 엠포리아대학을 졸업한 데 이어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역시 장로교가 세운 프린스턴신학원을 졸업했다. 졸업 시점에 그는 결핵에 걸렸음을 알고 2년 동안 요양했다. 이렇게 국내외에서 기독교 학교와만 인연을 맺으며 성장했기에, 그는 기독교 정신을 깊이 내면화하고 있었고 기독교에 대립되는 유물론적 공산주의에 철저히 반대하게 되었다.
공산 체제 체험 후 월남, 영락교회 세워
귀국한 뒤 한경직은 신의주에서 제2교회 목사로 10년 동안 시무하면서 보린원이라는 이름의 고아원을 세웠다.
42세 때인 1945년 8월 15일에 일제의 항복 소식을 접하고 일본인 평안북도지사의 요청에 따라 신의주자치위원회를 조직하고 우선 치안 유지에 힘썼다. 처음에는 미군이 점령하는 것으로 알았으나 소련군이 점령하는 것에 자연히, 한경직의 표현으로, ‘분노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더구나 소련군이 점령 직후 여러 행패를 부리는 것을 목격하고는 거기에 대항할 필요를 절감해 개신교 교인들과 함께 신의주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여기서 당명에 ‘사회’가 들어간 이유는 소련군 그리고 거기에 동조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마치 소련군의 점령 아래 북한에서 평등사회가 실현될 것같이 선전하며 동포들을 기만하는 데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사회’라는 단어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우익 청년들의 요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 점령군이 기독교 자체를 탄압할 뿐만 아니라 공산당 외 다른 정당은 금압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는 1945년 10월 초순의 어느 날 급히 월남(越南)했다.
한경직은 서울에서 곧바로 베다니교회를 세웠고 영락교회로 발전시켰다. 이 교회에는 소련 점령군 그리고 그 아래 공산주의적 독재 정치를 펴는 김일성 정권에 반대해 월남한 북한 동포들이 대거 참여했고, 자연히 한국 사회에서 강력한 반공(反共) 세력의 중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북한 김일성 정권의 남침을 겪은 뒤 한경직과 영락교회의 반공주의는 자연스럽게 강화되었다. 이후 한경직은 북한의 남한 공산화 전략에 반대하는 노선을 흔들림 없이 걸었고, 이 노선에 서서 “군사정부를 뒷받침한다”는 비난을 감내하면서까지 역대 정부를 지원했다. 기독교 정신에 충실해, 일생을 청빈과 무소유로 일관한 그는 2000년 4월 19일에 98세로 소천했다.
이택선,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국가 건설의 시대 1945~1950》
《우남 이승만 평전: 카리스마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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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20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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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남 이승만 평전》(2021년) |
심지연, 《장덕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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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덕수 연구》(2025년) |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전 한국정치학회 회장이며 현 경남대 명예교수인 심지연(沈之淵) 박사는 해방 3년사에 관한 연구에서 수많은 저서를 출판한 한국정치학계의 선도적 학자다. 그가 이번에 출판한 위의 책은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1894~1947년)에 관한 결정적 저서로 대한민국 수립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우선 컬럼비아대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1925년 9월에 통과된 석사 학위 논문 〈마르크스 국가관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1936년 6월에 통과된 박사 학위 논문 〈영국의 산업평화 방법: 노동쟁의와 관련한 민주주의 연구〉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다. 석사 논문에서 장덕수는 마르크스의 사고와 이론 전체를 비판하며 “한때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라고 심 교수는 해석했다.
심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박사 논문에서 장덕수는 “민주주의는 다수가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이든지 달성해야 하는 단순한 다수의 지배가 아니며, 민주주의의 진정한 목적은 공동체 구성원은 누구든지 충분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가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전제 아래, 그는 “영국에서 실시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관용, 그리고 국가의 무소불위한 권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본성에 의해 추구된 통일성과 질서를 의미한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관용에서 더 나아가 통일성과 질서에 따르는 다양성과 유연성을 자유의 두 가지 현저한 특징”이라고 분석하고, 이 특징은 산업평화에 관한 영국식 설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장덕수의 이 관찰은 다양성을 배척하고 유일성을 앞세우며 유연성을 경시하고 지도자에 대한 경직된 충성으로 편향된, 이리하여 전체주의적 조류를 나타내는 오늘날 한국 정치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이게 된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충실하게 받아
이 논문들에서 보았듯, 장덕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충실하게 받아들이고 귀국했다. 그러나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한 그는 일제가 말기에 들어서면서 식민지 조선에 강요한 정책에 순응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언동을 보였고 이것은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해방 이후 그를 비난하는 근거가 되었다.
해방공간에서 장덕수는 자신의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과의 협력 노선을 제시하고 특히 미소 냉전의 전개를 직시하면서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 구상을 거부함과 동시에 유엔을 통한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의 불가피성을 옹호했다. 이것은 그가 백범 김구의 노선이 아니라 이승만의 노선을 따르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통일정부의 수립을 반대하고 분단 정권의 수립을 옹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고, 그렇게 해석한 세력에 의한 암살로 이어졌다.
위에서 살폈듯, 대한민국은 기독교 신앙의 바탕 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리를 지지하며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이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단독정부이면서 분단 체제의 출범이었으나, 마치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수립을 예견하면서 장차 통일독일의 모체이면서 발판이 되기를 결심하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리의 이념 아래 출범한 사실에 비견된다.
대한민국 건국정신을 생각게 하는 5명의 인물
대한민국은 또한 민세의 기행문에 나타났듯 열강에 둘러싸인 상황으로 그들의 침략을 자주 받았던 역사적 경험을 잊지 않고 외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지도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이때 경계의 대상은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북방의 소련과 중공 그리고 그들의, 특히 소련의 압도적 영향 아래 놓인 북한이었다. 이러한 경계심이 무엇보다 소련과 중공의 격려를 받은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에 개시한 남침(南侵) 전쟁에 맞서 곧바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 서방권의 지원을 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확실히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이끌었던 그 결정은 이후 남한에서만이라도 상대적 의미에서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생활의 터전을 마련했다. 우여곡절이 뒤따랐고 이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국민이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희생 위에서 대한민국의 5000여 만 국민은 북한의 2000여 만 인민의 참상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헐버트, 한경직, 그리고 이승만이 표방한 반공사상은 결코 시대착오적이지 않았다. 공산주의의 최악의 형태인 유일지도 체제를 옹호하는 주체사상을 앞세워 3대 세습 체제를 유지하는 북한 정권을 상대할 때 오늘날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북한의 남침을 앞둔 시점에서 대한민국 제헌국회 안에서 ‘민족·자주정신’을 앞세워 주한유엔코리아임시위원단의 철수와 주한미군의 철수를 공개적으로 요구한 세력이 있었음을 다시 기억하고, 마치 북한 정권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분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애국적이요 민족적인 행동으로 착각하는 반(反)대한민국적 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된다. 핵으로 무장한 채 대한민국을 협박하고 대한민국은 동족이 아니라고 공식 선언한 사실에서 우리는 김정은 정권의 본질을 새삼 깨달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신을 재음미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