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규는 광복군 3지대장으로 활약… 해방 직후 중국 동포 수만 명 귀국시켜
⊙ 김학규 아내 오광심도 교육자·연락 공작원·정치조직가·광복군 참모로 독자적 궤적 가져
⊙ 오광심 “나는 김학규를 만나 동냥질밖에 한 게 없어”
⊙ 김구 피살 사건에 연루돼 수감되면서, 오광심은 남편 옥바라지와 병시중으로 고생
⊙ 독립군의 모습… 대중에게 각인된 폭탄 투척, 옥중 투쟁, 봉오동·청산리 같은 전투만 강조되는 현실
⊙ 김학규 아내 오광심도 교육자·연락 공작원·정치조직가·광복군 참모로 독자적 궤적 가져
⊙ 오광심 “나는 김학규를 만나 동냥질밖에 한 게 없어”
⊙ 김구 피살 사건에 연루돼 수감되면서, 오광심은 남편 옥바라지와 병시중으로 고생
⊙ 독립군의 모습… 대중에게 각인된 폭탄 투척, 옥중 투쟁, 봉오동·청산리 같은 전투만 강조되는 현실

- 김학규 장군의 아들 김일진 독립기념관 이사.
이것은 백파(白波) 김학규(金學奎·1910~1967년) 장군이 1940년 11월 중국 전시(戰時) 수도 충칭(重慶)에서 행한 광복군 선무연설의 서두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뜨겁고 열정적으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그의 삶은 가시밭길을 헤쳐온 항일(抗日)의 첨병(尖兵)이었다.
김학규 장군은 조선혁명군 양세봉(梁世奉·1896~1934년) 사령관의 참모장,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광복군 주(駐)상해판사처장을 맡는 등 다양한 직책에서 헌신했다. 주중미군(駐中美軍)과 합동 작전으로 특수공작반(OSS)을 설치하여 국내 진공(進攻) 작전을 도모하던 중 조국 해방을 맞았다. 진공 작전은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에서 해외 양성 군대나 무장대를 국내로 침투시켜 식민지 통치를 전복하려는 군사 작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2년 뒤인 1948년 4월 단신 귀국했으나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 1949년) 시해 사건의 주범인 안두희의 배후 인물로 몰려 억울한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후 생활고와 병마 속에 잊혔지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로 뒤늦게나마 그의 활동과 헌신이 알려졌다.
한때 더불어민주당 김희선 전 의원이 선거 홍보물에 ‘독립군 김학규 장군의 손녀’라고 표기하면서 그의 이름이 다시 회자되며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일이다.
기자는 지난 1월 8일 경기도 고양에서 김학규 장군의 친아들 김일진(金一鎭·72)씨를 만났다. 현재 성악가인 그는 천안에 소재한 독립기념관 이사를 겸직하고 있다.
김학규 장군은 김봉수(金鳳洙) 여사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다. 장남 김일현(金一鉉)은 6·25 전쟁 당시 육군 대위로 참전했으나 행방불명이 됐다. 김학규 장군은 광복군으로 전선을 누비던 시절 만난 동지 오광심(吳光心·1910~1976년) 여사와 재혼해 아들 김일진을 얻었다.
김희선 전 의원과 김학규 장군의 혈연관계
더불어민주당 김희선 전 의원은 의성 김씨고, 김학규 장군은 안동 김씨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선거 홍보물에 ‘독립군 김학규 장군의 손녀’라고 기재한 김 전 의원을 검찰에 고발했다.
2006년 서울고등법원은 “김학규 장군은 김희선 의원의 작은할아버지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혈연관계의 존재를 인정했다.
본관이 다른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김학규 장군과 김희선 전 의원의 할아버지 김성범은 친형제 관계가 맞다. 사연은 이렇다. 어머니 선우순이 남편인 의성 김씨 김순옥이 사망한 뒤 안동 김씨 김기섭에게 재가하면서, 김학규만 안동 김씨 호적에 올랐다. 이미 성인이었던 김성범은 기존 의성 김씨 호적을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김학규 장군은 어머니의 재가 과정에서 안동 김씨 호적에 등록되면서 의성 김씨 족보에서는 이름이 지워졌다. 일부에서는 족보 미기재와 본관 불일치를 들어 혈연관계 자체를 부정하지만, 법원은 관련 자료와 정황을 토대로 작은할아버지 관계임을 인정했다.
2006년 서울고등법원은 “김학규 장군은 김희선 의원의 작은할아버지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혈연관계의 존재를 인정했다.
본관이 다른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김학규 장군과 김희선 전 의원의 할아버지 김성범은 친형제 관계가 맞다. 사연은 이렇다. 어머니 선우순이 남편인 의성 김씨 김순옥이 사망한 뒤 안동 김씨 김기섭에게 재가하면서, 김학규만 안동 김씨 호적에 올랐다. 이미 성인이었던 김성범은 기존 의성 김씨 호적을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김학규 장군은 어머니의 재가 과정에서 안동 김씨 호적에 등록되면서 의성 김씨 족보에서는 이름이 지워졌다. 일부에서는 족보 미기재와 본관 불일치를 들어 혈연관계 자체를 부정하지만, 법원은 관련 자료와 정황을 토대로 작은할아버지 관계임을 인정했다.
만주 일대 수많은 동포 귀국시켜
광복군 제3지대장을 지낸 김학규 장군과 아내 오광심 여사.김학규 장군의 업적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일은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던 수많은 동포를 귀국시킨 일이다. 다음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등재된 백파의 활동 상황이다.
〈1941년 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취임한 뒤, 안후이성(安徽省)의 푸양(阜陽)에 근거지를 두고 대일선전·초모공작·정보수집을 지도하는 한편, 유격전을 전개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주중미군과 합동 작전으로 특수공작반(OSS)을 설치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도모하던 중 조국 광복을 맞았다. 1945년 8·15 광복 뒤에 광복군 총사령부의 주상해판사처처장(駐上海辦事處處長)에 임명되어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였으며, 안전 귀환을 위해 활동하여 3만여 명의 교포를 귀국시켰다.
1946년 9월 한국독립당의 만주특별당 부위원장에 취임하여, 교포 1만2000여 명을 미군 비행기로 호송하여 톈진(天津)에서 귀국시켰다. 1948년 4월 귀국하고 7월 한국독립당의 조직부장에 취임하였다.〉
김학규 장군의 ▲상하이·중국 각지 교포 3만여 명 귀환 ▲1946년 미군 항공기 편으로 1만2000여 명 톈진 경유 귀환은 독립기념관 자료, 국가보훈처 공훈기록, 광복군사·상하이 교민사 관련 연구 등에서 일관되게 반복 인용된 정설에 가까운 업적이다. 김일진 이사의 말이다.
“대중은 독립운동가라 하면 보통 폭탄 투척, 전투 지휘, 옥중 투쟁 같은 극적인 장면만 기억합니다.”
김학규 장군은 교포 보호, 치안 유지, 수송·호송·귀환 행정을 지휘했다. 그러나 “광복 직후 수만 명을 살려낸 인물”이라는 기억보다 안두희 배후설에 휘말린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더 오래 남았다.
“독립운동사를 바라보는 눈에는 개인의 기억도 있고, 학자의 시각도 있겠지요. 그런데 제가 드리고 싶은 얘기는, 만주에서 중국군과 합작해 싸운 독립운동의 큰 흐름이 국내에선 거의 지워져 왔다는 점입니다.”
— 선친의 독립운동 경로부터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버지는 어렸을 때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지금 그곳에 가보면 허허벌판입니다. 그런 곳에 이시영(李始榮·1869~1953년) 선생, 이회영(李會榮·1867~1932년) 선생 같은 분들이 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길렀습니다. 아버지는 이후 조선혁명군으로 활동했고, 양세봉 장군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김 이사는 이런 말을 보탰다.
“만주사변 이후 중국군과 합작했던 전선은 싹 사라지고 봉오동·청산리 같은 전투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게 정치적인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승만 정권 반대’라는 문장의 실제 의미
김일진 이사의 사진첩에 보관 중인 백범 김구 사진.“그때 최전방에서 활동한 쪽이 3지대였고, 초모공작(招募工作)을 통해 주로 학도병, 중국군에 포로가 됐던 사람들을 모아 병력을 만들어 2지대로 보내는 식으로 최전방에서 움직였습니다.”
초모공작이란 인재를 모집하는 활동을 말한다. 백파는 중국 각지의 한인 청년과 노동자를 대상으로 독립군·광복군 지원자를 모집하거나 일본군·친일 세력에 대한 귀순을 유도하는 일을 주도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김학규 장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김학규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다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5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형을 살다가, 1950년 6월에 석방되었다.〉
이 서술에서 말하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는 흔히 생각하는 정치적 반대나 반정부 활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실질적 의미는 김구 암살 사건과 관련해 제기된 ‘배후 의혹’에 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1995년 12월 18일 발표한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 보고서〉에 따르면, 1948년 12월 20일경 만주 봉천에서 알던 최모(某)라는 청년이 김학규 장군을 찾아와 “서북청년단 내에 김구 선생 암살단이 생겼다. 주의하라”고 제보했다. 그러나 그해 연말까지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자 김학규 장군은 그 청년의 말을 실없는 이야기로 여기고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후 김구 암살 계획은 서북청년단 일부 인물이 한국독립당에 가입하면서 구체화됐다. 안두희는 서북청년단에서 처외삼촌뻘이 되는 홍종만을 만나게 됐고, 홍종만의 권유로 1949년 4월 14일 한국독립당 당원증을 발급받았다. 당시 김학규 장군의 직책은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이었다.
결과적으로 김학규 장군은 안두희와 홍종만의 숨은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이들을 정상적인 청년 당원으로 판단해 김구에게 소개했고, 그해 6월 26일 오전 11시 안두희는 김구를 경교장에서 권총으로 살해했다. 이는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대한 정치적 암살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가장 중대한 정치적 암살 사건
김학규 장군의 아들 김일진 이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아버지는 군인이었고 정치에는 문외한이었습니다. 안두희가 같은 평남 평원 출신이라며 접근했고, 홍종만이라는 사람이 함께 식사하면서 ‘유능한 장교니 한독당에서 일하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군인이 정당에 가입하는 것이 문제라는 걸 아버지는 몰랐던 거죠. 당원증을 써달라고 해서 써줬고, ‘비밀 당원’ 표시까지 해줬다더군요.”
1948~49년 당시 김구에 대한 암살 위협이 상존해 신분이 불확실한 자의 경교장 출입은 극도로 통제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독당 관계자·청년 조직원·연락원 신분은 김구에게 접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이 점이 훗날 김학규 장군에게 결정적인 불리한 정황으로 작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일진 이사는 이어 이렇게 말했다.
“그 ‘비밀 당원’ 표시가 단서가 돼 아버지는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15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가족의 고난이 시작됐죠.”
김학규 장군은 15년형을 채우기 전에,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군이 마포형무소의 사상범들을 대거 석방하는 과정에서 풀려났다. 다만 김일진 이사에 따르면, 한 교도관이 김학규 장군을 존경해 ‘일반 사상범’으로 분류해 주었고, 이 덕분에 북으로 끌려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실은 훗날 김학규 장군 추도식에서 당시 교도관이 직접 찾아와 애도하는 와중에 밝혀 알려지게 됐다.
안두희보다 더 오래 복역
김구 암살범 안두희와 광복군 지휘관 김학규 장군의 사법적 처우는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안두희는 김구를 살해한 직후 체포돼 재판으로 넘겨졌고,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징역 15년으로 감형됐고, 이후 한국 전쟁 시기 특별사면과 가석방을 거쳐 비교적 이른 시점에 사회로 복귀했다. 사형이 선고되지 않았고, 실제 복역 기간도 수년 수준에 그쳤다.
반면 김학규 장군은 광복군 제3지대장을 지낸 항일 무장투쟁의 핵심 인물에다 김구 암살 사건과 관련해 배후라는 특별한 증거가 없음에도 구속 조치됐다. 이후 장기간 수감 생활이 이어졌고 연좌제로 오랫동안 자유를 박탈당했다.
이 과정에서 김학규 장군은 사회적 낙인과 정치적 고립을 동시에 겪었다. 출소 이후에도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며 사실상 공적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의 항일 공적은 오랫동안 조명받지 못하다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부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김일진 이사는 호흡을 고르며 설명을 계속했다.
“장흥 장군[독립운동가로, 중국군 헌병사령부 상위(上尉), 소교영장(少校營長) 등으로 복무하며 항일운동가의 신변 보호와 재정 지원에 헌신한 인물]의 아드님이 제게 전한 이야기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헌병대에서 안두희는 침대와 소파에서 자고, 아버지는 지하실에 감금된 채 손이 뒤로 묶인 상태로 ‘개같이’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장흥 장군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항의하자, 결국 그마저도 좌천됐다고 했습니다.”
“김학규 장군인 줄 알았더라면…”
— 고문에 가담한 쪽 한 인물이 뒤늦게 반성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셨다고요.
“호주에 사는 황명하씨라는 분이 있습니다. 광복군유족회에 가입해 있는 분인데, 그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요양원에 있던 한 헌병 관계자가 ‘그 사람이 김학규 장군인 줄 알았으면 그렇게 심하게 고문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하며 울었다는 겁니다. 제가 초등학교 5~6학년 때였는데, 김구 사건이나 그 수사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아버지는 덜덜 떨며 밥도 제대로 드시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아버지에게 가해진 회유와 협박이 가혹했던 것이겠죠.”
— 김학규 장군과 김구 선생의 관계는 한마디로 어떤 관계였나요.
“완전히 종속적인 관계였습니다. 김구 선생이 명령하면 무조건 따르는 사이였죠. 정치적 동지라기보다는, 아버지에게 백범은 상관이었습니다. ‘김구가 잘했다, 못했다’를 따지는 관계가 아니라, ‘하라면 하는’ 관계였습니다.”
김학규 장군은 귀국 후 김구의 경교장에서 함께 기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경교장은 단순한 사저가 아니라 한국독립당의 본거지이자 임시정부 계열 인사들의 정치·조직 활동 공간으로, 출입이 극도로 제한된 장소였다. 김학규 장군은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에 대해서는 “실효가 없고 북한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김구를 떠나지 않았다.
— 백범의 죽음은 김학규 장군에게 큰 충격이었겠군요.
“엄청난 충격이었죠. 솔직히 말하면 집안의 몰락이 김구 선생과의 일로부터 비롯됐다는 인식도 있어요. 아버지는 ‘김구 선생에게 가는 대신 별이나 준다고 할 때 군에 가서 별이나 달고 육사(陸士) 교장이나 할걸, 왜 정치를 한다고 쓸데없는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김학규를 만나 동냥질밖에 한 게 없어”
— 어머니는 김구 선생의 죽음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어요. 생각조차 하기 싫었을 거예요.”
— 조심스러운 가정입니다만, 만약 김구 선생이 암살되지 않았다면 김학규 장군의 삶도 달랐을까요.
“완전히 달랐을 겁니다. 우선 광복군에서 훈련받은 병사들을 정규군에 편입할 수 있었을 테고, 그러면 6·25 때도 대응이 훨씬 수월했을 겁니다. 전술을 알고 실무를 아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 김학규 장군의 시선에서 볼 때, 김구 선생의 암살은 개인 범죄였습니까, 조직적 범죄였습니까.
“아버지는 조직적인 범죄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 김학규 장군의 옥살이와 이후의 은둔은, 단지 개인의 불운으로만 볼 수 없고 해방 이후 좌우 갈등이 심했던 한국 정치의 산물이라고도 생각하십니까.
“저는 좌우 이념의 희생양이라 봅니다. 우리 민족끼리 좌우로 갈라져 싸운 데서 희생이 나온 것이고, 거기에 친일 세력과 독립운동 세력의 갈등, 또 먼저 권력을 차지하려는 세력 다툼까지 겹치면서 아버지가 희생양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 집안 형편은 어땠습니까.
“어머니는 정말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살았어요.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물건을 떼다가 팔기도 하고, 심지어 미군 부대 양공주들한테 담배를 사 와서 팔기도 했습니다. 바느질, 삯일…. 정말 안 해본 게 없었어요. 고생을 무진장 하셨죠.
어머니가 늘 하던 말이 있어요. ‘나는 김학규를 만나 동냥질밖에 한 게 없다’고요.
가끔 광복군 출신 중에 형편이 좀 나아 보이는 분들을 찾아가면 도와주는 분도 있었어요. 그런데 군에 남은 이들한테는 아예 가지 않았죠. 방첩(防諜)에 걸리면 큰일 나니까요. 그래도 집에 찾아와 도와주는 분들이 몇 분 계셨습니다.”
— 서울 망원동 어느 부근에서 살았습니까.
“망원동 57-188번지였습니다. 그 땅은 박정희 정권 시절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배려로 준 겁니다. 어떤 분은 연희동으로, 어떤 분은 동교동으로 갔고, 일본 적산 가옥을 받거나 주인 없는 땅을 받은 경우도 있었죠.
아버지는 ‘나는 망원동이 좋다’고 했어요. 허허벌판에서 오리도 키우고, 닭도 키우고, 당근·파·셀러리 같은 것도 심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쪽에 약 2000평을 불하(拂下)받았습니다. 개울이 졸졸 흐르니 좋다고 생각한 거죠. 다만 비만 오면 하천이 범람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김학규 장군은 땅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었던 사람으로 전해진다. 장충동 쪽에서 쫓겨난 피란민들이 갈 곳이 없자 망원동으로 하나둘 몰려들었고, 결국 200평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내어주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알짜배기 땅이죠. 지금 망원동 땅값이 얼마나 비쌉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돈이나 땅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던 분이었어요.”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이 없어라’
젊은 시절의 애국지사 오광심.1930년 조선혁명당에 가입해 활동했고, 만주사변 이후 교직을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조선혁명군 유격대·한중연합 항일전에 참여, 특히 지하연락 공작을 맡았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만주 독립군의 관내 이동을 요청하자, 김학규 장군이 임정에 파견될 대표로 선발됐고 오광심 여사가 동행했다. 1934년 5월 초 부부는 농부 부부로 변장해 단둥-칭다오-난징으로 이동했다. 난징에서 김학규 장군이 작성한 장문의 보고서를 만주 본부로 보내야 했고, 오광심 여사가 해당 임무를 맡았는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원고지 200장 분량의 보고서를 통째로 외워 만주로 가 구술 보고를 했다고 한다. 이후 변절자의 방화로 집이 불타는 사건에서 심한 화상을 입고 산간 바위굴에 숨어 치료를 했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다시 난징으로 가 비준서를 전달하며 통일전선 운동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오광심 여사는 임정과 독립운동 세력의 ‘연결자’로서의 굳은 결의를 노래로 남겼다.
〈비바람 세차고 눈보라 쌓여도 /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 어두운 밤길에 준령을 넘으며 / 님 찾아 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하략)〉
오광심, “광복군 지대장 김학규의 참모이자 기밀 담당 비서”
김학규 장군의 장례식은 1967년 9월 26일 오전 11시 서울 세종로 예총회관 앞뜰에서 정일권 총리와 유진오, 이범석, 최두선씨 등 저명인사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사회장으로 엄수됐다.임시정부가 충칭에 안착한 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창설이 이뤄지고, 오광심 여사는 김학규 장군과 함께 총사령부의 사무·선전 업무를 담당했다. 1942년 이후 군무부가 모병(초모공작)을 강화하며 제3지대를 편성하자, 오광심 여사는 김학규 장군과 함께 전선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했다. 최종적으로 안후이성 푸양에 정착해 1945년까지 항일투쟁을 전개하며, 오광심 여사는 ‘지대장 김학규의 참모이자 기밀 담당 비서’로 활동했다. 제3지대의 초모 성과는 두드러졌고, 미국 OSS와의 한미연합 작전 추진에도 관여한 것으로 서술된다.
일제 패망 후 김학규 장군이 상하이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사무소인 주상해판사처를 설치해 처장으로 활동할 때, 오광심 여사는 이를 도와 동포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고 상하이 교민 3만여 명 귀환에 진력했다. 1946년에는 선양으로 진출해 확군 및 교민 귀환을 도왔고,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1948년 4월 귀국했다.
김학규 장군이 김구 피살 사건에 연루돼 수감되면서, 오광심 여사는 옥바라지와 병시중으로 고생했다고 전해진다. 김학규 장군은 1967년 사망, 오광심 여사는 1976년 생을 마감했다. 김일진 이사의 말이다.
“저는 제가 고생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생은 어머니가 했죠. 저를 키우기 위해 먹고살려고 온갖 일을 다 했어요. 그런데도 저를 곱게 키웠어요. 남들보다 옷도 더 잘 입히려고 했고, 공부도 시켜야 하니까 과일도 챙겨주고, 남들 못 하는 걸 해주려고 애썼습니다.”
여름에도 긴소매 옷만 입은 이유
김일진 이사는 어머니 오광심 여사의 삶을 떠올리며, “역사책에 기술된 것과 달리 단 한 줄의 공적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전선의 영웅담’이라기보다 살아남기 위해 맨몸으로 통과해야 했던 생존의 서사에 가까웠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어느 겨울, 눈이 잔뜩 쌓인 날 독립군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는데 일본군이 순식간에 주위를 포위했어요. 누가 밀고를 한 것이죠. 일본군은 불을 지르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사람마다 사격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어요.
그때 어머니는 뒤쪽으로 돌아 창문을 깨고 빠져나와 산으로 올라갔다고 해요. 독립군은 산을 타면 못 잡는다는 말이 따라붙을 만큼, 어머니는 산을 잘 탔다고 해요. 산중으로 몸을 숨긴 뒤에는 바위 아래에 웅크리고 있다가, 해가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빠져나왔다고 해요.
나중에 어머니를 염할 때 여기(팔)가 다 타서…. 어머니가 여름에도 긴소매 옷만 입은 이유가 그 화상 자국 때문이란 걸 알게 됐어요.
두 달 뒤, 어머니는 마침내 아버지의 처소로 돌아왔죠. 그런데 그사이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줄 알고 이미 제사를 지냈다고 해요. 모두가 놀랐고 ‘죽은 사람이 돌아온’ 꼴이 되었다고 합니다.”
— 어머님은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제가 대학(72학번)을 졸업하자마자, 4월 무렵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늘 ‘나는 너한테 짐이 되지 않을 거다’고 했어요.”
— 두 분은 동작동에 함께 묻혀 계시지요?
“네. 동작동에 함께 묻혀 있습니다. 어머니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장군이었던 아버지는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생사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고 업적도 많잖아요. 어머니도 물론 업적이 많은데, 두 분이 똑같이 독립장입니다. 솔직히 아버지는 조금 더 올려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대통령장 같은 것으로요. 전례를 보면 ‘힘 있는’ 사람들은 대통령장으로 올라간 경우도 있는데, 막상 ‘한 일’을 보면 별로 없는 분들도 있어요.”
장군의 두 배우자
김학규 장군의 가족사는 독립운동의 그늘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장군의 두 배우자 모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깊은 고생을 겪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첫 부인 김봉수 여사는 남편이 귀국한 뒤 “자식 셋을 키우는 동안 당신은 무엇을 했느냐”는 말로 오랜 세월의 원망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학규 장군이 독립운동에 매달린 사이, 홀로 아이들을 키워야 했던 고달팠던 현실에서 나온 말이었다.
재혼한 부인 오광심 여사 역시 평탄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일진 이사는 어머니가 결혼 이후 ‘동냥질’밖에 한 것이 없다는 한탄을 여러 차례 들었다고 회고했다.
독립운동과 수감, 피란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생계와 가사를 책임져야 했던 처지를 압축한 표현이었다.
이에 대해 김일진 이사는 “두 분 모두 고생하셨다”고 말했다. 그는 “김봉수 여사 역시 충분히 인정받아야 할 분”이라며 “당시 ‘민며느리’ 형태로 어린 나이에 결혼해, 한 사람이라도 더 가족을 챙기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1남 2녀의 자녀들이 태어났고, 가족의 부담은 고스란히 부인들에게 남겨졌다는 것이다.
“형인 김일현은 6·25 당시 군인으로 참전했다가 행방불명됐습니다. 당시 집안에서 아버지에게 ‘후방으로 좀 빼달라’는 식의 요청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다 후방으로 빼면 나라는 누가 지키냐.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해요.”
‘동지형 부부’
— 형의 시신은 찾았습니까.
“못 찾았습니다. 행방불명입니다.”
— 아버지의 전처 쪽 가족과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예전에는 서로 말조차 섞지 않고 살다시피 했습니다. 인정하지 않았고, 저도 그랬고, 어머니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다 같은 나이가 되고 늙으니, 지금은 잘 지냅니다.”
— 어머니가 전처에 대해 알게 된 건 언제입니까.
“해방 직후에는 귀국한 독립운동가들의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아, 당시 반도호텔 같은 곳에서 지내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전처와 전처 자녀들이 나타난 겁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총각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부인이 있었던 거죠. 어머니 입장에서는 큰 충격이었을 겁니다.”
— 아드님이 보기에 두 분은 ‘동지형 부부’였습니까.
“동지형에 가깝죠. 아버지와 어머니가 열 살 차이였거든요. 저도 재혼을 해보니, 부부 사이에 1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면 오히려 그런 관계가 됩니다. 부부라기보다 같이 버티고, 같이 움직이는 사이가 되는 거죠.”
— 두 분이 항일 운동을 할 때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독립군 시절 어머니가 마적단에 붙잡혀 팔려갈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머니가 마적 두목에게 ‘내가 김학규의 부인이다. 너희 이러면 안 된다’고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그러자 마적단 쪽에서 ‘김학규?’ 하며 깜짝 놀랐다고 하더군요. 잠시 뒤 누군가가 와서 ‘제가 잘못했습니다’며 절을 하듯 사과했고, ‘예전에 김학규 장군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이 있다’면서 어머니를 아버지가 있는 곳까지 직접 데려다 드렸다고 합니다.”
— 집에서는 김학규 장군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그냥 ‘아버지’였나요?
“아버지라고 불렀어요. 아버지를 장군님이라고 불렀을 리가 있나요? (웃음) 어머니는 아버지를 ‘여보’라고 했고요.”
— 김학규 장군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사람입니까.
“곧은 사람이었습니다. 송죽 같은 사람, 고단해도 꺾이지 않는 사람. 특별한 영웅이라기보다, 바르게 살려고 애쓴 보통사람이었어요. 생활은… 무능할 정도로 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누가 도움을 주려고 돈을 가져오면, 그걸 또 동네 어려운 사람들에게 다 나눠줬어요.”
제5대 국회의원에 한독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
한독당 후보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무렵의 김학규.“엄격했습니다. 종아리를 많이 맞았습니다. 또 아버지가 직접 영어와 한자를 가르쳐줬죠.”
— 당시 정치권 인사들과도 접촉이 있었습니까.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집 앞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고 있는데, 검은 차가 한 대 와 서더군요. 그러곤 누군가 내리는데 김두한(金斗漢)이었습니다. 아버지께 ‘한독당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려는데 추천해 달라’고 했고, 아버지가 당시 한국독립당 총재였으니까 추천을 해준 거죠. 그렇게 김두한은 국회의원이 됐고, 이후 유명한 ‘똥바가지 사건’ 같은 일도 벌어졌습니다.”
— 아버님도 직접 국회의원에 출마하신 적이 있나요.
“있었죠. 그런데 지역이 경기도 수원(당시 화성군 을)이었어요. 그 과정에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조금 있는 돈마저 다 사라졌죠. 차라리 서울 중구나 용산 같은 데 나갔으면 그나마 사람들이 알아봤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남습니다.”
김학규 장군은 1960년 제5대 한독당 최고 대표위원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4.26%의 득표율로 낙선하고 말았다. 전체 17명 후보 중 9위였다.
지금도 추도식에 광복군 유족들 모여
김학규 장군의 장례식 후 유해는 차량으로 광화문과 숭례문을 거쳐 동작동 국립묘지로 운구되어 애국선열 묘역에 하관, 안장했다.— 가족들이 아버님을 회상할 때, 가장 자주 떠올리는 장면이 있습니까.
“추도식입니다. 초창기 추도식 때는 광복군 2지대·3지대 대원들이 300~400명씩 몰려왔어요. 그 많은 분을 먹이려고 어머니가 직접 시장에 가서 돼지머리를 몇 개씩 사고, 홍어도 구하고, 술도 잔뜩 사고, 그릇이며 밥까지 챙겨 트럭에 싣다시피 준비했습니다.
그만큼 대원들이 ‘장군을 추모하겠다’며 모여든 겁니다. 다른 독립지사 추도식에선 보기 힘든 장면이었죠.”
— 지금도 추도식에 사람들이 많이 옵니까.
“지금도 오십니다. 예전처럼 수백 명은 아니어도, 60~70명은 꾸준히 옵니다. 보통 다른 추도식은 20~30명이면 끝나는데, 아버님 추도식은 지금도 비교적 많습니다. 그분들이 아버님의 곧은 성품을 기억하고 있는 거죠.”
오마이뉴스의 2025년 9월 21일 자 〈김학규 오광심 애국지사 제58회 추모식〉 기사에 따르면 이번 추모식에는 염정림 서울남부보훈지청장, 이기중 광복회 부회장(이종찬 광복회장 추모사 대독), 장병화 한국광복군유족회장, 김창제 목사(김학규 장군 외증손), 서주식 장로(김학규 장군 손녀사위) 등 유족, 보훈단체 관계자, 일반 시민 등 약 1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 과거 옛 동지들, 그러니까 3지대 대원들은 광복 이후 어떻게 살았습니까.
“아버지가 그런 고난을 겪는 걸 보면서, 대부분 숨어 살았습니다. 앞으로 나서지 않았어요.”
— 이후 후손들과의 인연도 이어졌습니까.
“제가 유족회를 만들었습니다. 이름은 ‘한국광복군 유족회’입니다. 대략 100명 정도를 모아서 회비를 모아 행사 때마다 함께합니다.
우리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의병·독립군·광복군은 같은 핏줄이고, 오늘의 군인까지도 같은 핏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창군 기념식 행사도 유족들이 후원하고 있죠. 국가에 손 벌리지 않고 여러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그런데 보훈부가 유족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네. 저희가 사단법인을 만들려고 했는데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유가 뭐냐면, ‘광복군 기념사업회’가 이미 사단법인으로 등록돼 있다는 겁니다. ‘안 해주면 국방부로 가겠다. 어차피 군인이고 광복군이니까’ 이런 식으로 말하긴 했습니다만, 어쨌든 저희는 저희대로 행사를 계속하고 있어요.”
김학규 장군과 오광심 여사는 평생 민족의 광복을 위해 싸웠으나 해방 이후에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비극적 삶을 살았다. 김학규 장군은 억울한 옥살이와 생활고 속에서, 오광심 여사는 옥바라지와 생계 전선을 오가며 고난의 세월을 견뎠다. 그들이 남긴 것은 화려한 영웅담이 아니라, 신념을 지키며 묵묵히 버텨낸 동지의 삶이었다. 이렇게 조명받지 못한 역사 속 이름들을 다시 불러내는 일은 우리에게 남겨진 책임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