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신격호 레거시’ 잇는 롯데家 맏외손녀, 장혜선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옳은 것은 한다’는 신격호 정신, 젊은이들에게 전파할 것”

  •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hychung@chosun.com
  • 글 : 고기정 월간조선 기자  yamko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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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우리 국민’ ‘우리 경제’를 입에 달고 살았던 ‘찐 한국인’”
⊙ “한국에서 번 돈을 10원도 일본에 가져가지 않았다”(故 신격호 명예회장)
⊙ ‘신격호 롯데 희망장학금’ ‘신격호 롯데 자선콘서트’ ‘신격호 롯데 나라사랑 장학금’ 등 운영 中
⊙ “無에서 有를 만든 할아버지의 정신 전파하는 것에 사명감”

장혜선
1969년생. 롯데장학재단 이사 역임. 現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롯데삼동복지재단 이사장
사진=조준우
많은 사람은 롯데그룹의 창업주인 고(故) 신격호(辛格浩·1921~2020년) 명예회장을 ‘은둔의 경영자’ ‘엄격한 카리스마의 사업가’로 기억한다. 장혜선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에게 그는 ‘베프(베스트 프렌드)’였고 가슴에 사무치는 존재다.
 
  롯데재단은 신격호 명예회장이 사재(私財)를 출연(出捐)해 만든 사회공헌 재단이다. 신 회장은 1983년 청년 인재 육성을 위한 롯데장학재단, 1994년 소외 계층 지원을 위한 롯데복지재단, 2009년에 울산 지역 내 사회 나눔을 위한 롯데삼동복지재단을 만들었다. 롯데재단은 지난 2025년 172억원을 집행해 사회 취약 계층을 도왔다. 지금까지 누적 지원 금액은 2650억원, 재단의 혜택을 받은 사람은 52만 8600명을 넘어섰다.
 
  신격호 회장의 맏외손녀인 장혜선 이사장이 롯데장학재단과 롯데삼동복지재단을 이끌고 있다. 장 이사장이 2년 전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으로 선임됐을 때 재계에서는 뜻밖이라는 시선이 많았다. 그는 어머니인 신영자 전(前) 롯데쇼핑 사장 겸 롯데복지재단 이사장, 여동생인 장선윤 롯데호텔 미주전략부문 부문장과 달리 한 번도 롯데의 경영에 발을 들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12월 5일에 서울 소공동 롯데빌딩 롯데재단 집무실에서 장혜선 이사장을 만났다.
 
 
  지난 2년 동안 만 명 이상 만나
 
롯데그룹 창업주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이하 사진=롯데장학재단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을 맡기로 했던 분이 사정이 생겨서 갑자기 다른 이사들이 저를 추천했습니다. 롯데삼동복지재단은 할아버지의 고향인 울산을 케어하는 곳이니까 당연히 패밀리가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컸고요. 느닷없이 롯데의 공익재단 세 곳 중 두 곳의 이사장을 맡게 됐는데 녹록지 않았습니다,”
 
  ― 지난 2년 동안 어땠습니까.
 
  “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만났어요. 저희는 1000명 규모의 큰 행사보다는 몇십 명씩 모이는 소규모 행사가 많은데 그 많은 사람을 만나려니 많이 바빴습니다. 쉼 없이 달려와서 후회는 없고,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 롯데 공익재단의 역사가 벌써 40년이 넘은 줄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조용히 일을 했으니까요. 제가 이사장을 수락하며 내건 조건은 ‘외부에 제가 맡게 됐다는 것을 알리지 말아 달라’였어요. 결국 이렇게 알려지게 됐지만요. 롯데의 다른 일이었다면 맡지 않았을 겁니다.
 
  롯데재단은 할아버지의 ‘나눔 철학’을 실현하는 곳이고, 할아버지가 늘 말씀하신 ‘현장 경영’과 ‘책임경영’ 철학이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재단은 혈혈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우유·신문 배달, 공장 일 등 온갖 허드렛일을 했던 할아버지가 바라셨던 풍요로운 세상의 밑거름을 만드는 곳입니다. 제가 밖에서 지켜보면서 재단 운영이 할아버지의 뜻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나 생각을 했는데 바로잡고 싶다는 생각에 이사장 직(職)을 수락했습니다.”
 
 
  ‘마음이 시켜서 하는 일’(신격호 명예회장의 재단 설립 이유)
 
장혜선 이사장이 ‘장혜선 가정밖청소년 장학금’ 행사에 참석해 장학생을 안아 주고 있다.

  ― 신격호 회장의 뜻은 어떠했는데, 어떻게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는 건가요?
 
  “할아버지가 재단을 만든 취지는 정말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것이었어요. 특정인에게 엄청난 유학비를 대주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잘하는데 정말 학비가 없는 친구들을 도와서 그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회에 나가서 또 다른 이를 돕고, 그렇게 선순환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었는데 이런 미묘한 부분까지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어머니인 신영자 이사장이 다른 복지재단의 전임이었는데 뭐라고 하시던가요.
 
  “엄마가 고령이시고 사실상 경영 복귀가 힘드시죠. 제가 이끌게 되어 다행이라고 하셨어요. 엄마가 ‘여걸(女傑) 경영자’로 알려졌는데, 외부에 비치는 이미지랑 달리 되게 여성스럽고 소녀 감성을 갖고 있거든요.(웃음) 비즈니스에서는 강하게 밀어붙이는 경우가 있지만요. 제가 너무 남자 같아서 평소에 혀를 끌끌 차셨는데 장학재단을 맡게 됐다니 안심하셨고, 저는 요즘도 엄마한테 재단 운영과 관련해 자문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장혜선 이사장이 ‘신격호 롯데 순직경찰관 의인 기념사업’ 행사장에 참석했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생전에 회고록인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에서 재단에 관해 이처럼 언급했다.
 
  〈나는 결코 나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기부나 봉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이 시켜서 하는 일. 이처럼 롯데는 더 많이 나누고, 더욱 봉사하는 미래를 지향할 것입니다.〉
 
  롯데장학재단은 스포츠 재능을 키워 가는 청소년을 위한 ‘신격호 롯데 재능장학금’, 순직 경찰관의 뜻을 기념하는 ‘신격호 롯데 순직경찰관 의인 기념사업’, 범죄 피해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의 청소년을 지원하는 ‘신격호 롯데 범죄피해가정 지원사업’,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공연하는 ‘신격호 롯데 자선콘서트’, 장애인에게 보조기기를 지원하는 ‘신격호 롯데 장애인보조기기 지원사업’, 소방관·경찰관 등의 자녀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신격호 롯데 나라사랑 장학금’ 등 국내 사업과, 캄보디아·필리핀·베트남 등의 인재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신격호 롯데 글로벌 장학금’, 의료 취약 계층을 지원하는 ‘신격호 롯데 해외의료봉사’ 등을 하고 있다.
 
 
  “공익재단 일도 현장에 가봐야 답이 있다”
 
  “제가 재단을 맡기 전에 부정적인 사람이었어요. ‘나 하나 한다고 뭐가 바뀌겠어?’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집안에서도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수습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습니다. 재단 운영을 맡아서 제가 진심으로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과연 이게 통할까 싶었는데, 되더라고요. ‘신격호 롯데 희망장학금’ 사업을 통해 ‘한마음 소통캠프’에서 만난 학생들은 주눅이 들어 있었습니다. ‘여건이 좋지 않아 장학금을 받는 것이 창피한 것이 아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이렇게나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고 했는데, 처음에 제 말에 반신반의하던 학생들이 갈수록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저희는 장학증서를 줄 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이 끝난 이후에도 지속해서 만나는데, 학생들이 달라지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때 제가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이거 된다, 이거야말로 선순환이다’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 눈에 띄는 변화가 있으니 일할 맛이 나겠네요.
 
  “제가요, 재단 맡고서 완전 인간이 바뀌었죠. 이제야 비로소 사람이 되어 가고 있어요.(웃음) 예전에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힘들고, 물론 여전히 강단에 서는 것은 스트레스지만, 진짜 두려움이 많았거든요. 지난 2년 동안 재단의 가장 큰 수혜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바로 저예요. 이제는 저 하나가, 또 우리 재단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그 도움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계속 굴러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 어떤 기준으로 지원 대상이 선정되나요.
 
  “할아버지의 뜻대로 소외 계층 삶의 질(質) 향상이 모토이다 보니 형편이 어려운 분들, 장애인, 독거노인, 한부모가정 등에 주로 지원합니다. 저는 모든 행사에 일일이 참석해요. 할아버지한테 배운 건데, 페이퍼로는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볼 수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군인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들을 만나 보니까 자녀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지원이 필요해 보여서 군인 자녀를 위한 온라인 교육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미혼모들에게도 단순히 금전 지원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막 나온 아기와 미혼모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훨씬 중요했습니다. 직접 현장에 가보면 우리 주위의 이웃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2025년 한 해 172억원 지원”
 
  ― 재단 사업마다 ‘신격호’ 이름이 들어가네요.
 
  “할아버지가 개인 돈을 내어 만든 재단이고, 신격호의 정신을 이어 가는 것이 재단의 존재 이유니까요. 제 이름을 붙인 사업도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장혜선 가정밖청소년 장학금’이고 또 하나는 ‘장혜선 위기임산부 긴급지원사업’ 입니다. 사실 장혜선 가정밖청소년 장학금은 지원을 중단하려던 사업이었습니다. 재단에서 이 사업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왜 우리가 가출 청소년을 도와야 하나?’라고 생각했거든요. 직접 그들을 만나 보니 이 친구들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부모에게 성적(性的), 정서적으로 학대를 당해서 집에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사회의 도움이 없다면 어떻게 이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 온전히 살아가겠습니까? 저희 같은 재단의 지원이 그들에게 절실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지원을 중단하려다가 오히려 규모를 넓혀서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직접 현장에 가보지 않았다면 이런 속사정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모든 일은 현장에 답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뜻을 받든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 재단 운영 자금은 어떻게 충당됩니까?
 
  “할아버지가 출연한 재산에 대한 이자 수익과 보유하고 있는 주식의 배당금으로 운영되며 지난 2025년 약 172억원을 지원했습니다. 앞으로 재단에서 운영할 수 있는 여유가 더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제게 할아버지는 베프”
 
신격호 회장의 딸인 신영자 전 롯데쇼핑 사장(왼쪽)과 그의 딸 장혜선 이사장.

  신격호 명예회장은 우리 역사의 거인(巨人)이다. 1921년에 울산에서 태어난 신 회장은 194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어린 시절에 알던 친구 하숙방에 얹혀살며 온갖 허드렛일을 했다. 작가를 꿈꿨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음을 깨달은 그는 와세다고등공업학교 화학과에 입학했고, 그를 눈여겨본 하나미쓰(花光) 전당포 주인의 도움으로 1944년에 커팅오일 제조공장을 세웠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장이 폭격을 받아 전소(全燒)했다. 신 회장은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포마드·크림 등 화장품 제조업으로 일어서 1년 6개월 만에 하나미쓰로부터 빌린 돈을 갚고, 보은 차원에서 집 한 채를 사줬다. 이후 그는 1948년에 오늘날 롯데그룹의 모체인 (주)롯데를 만들었고, 껌·초콜릿 등 제과사업을 시작으로 호텔롯데, 롯데칠성, 롯데푸드, 롯데유업 등 종합유통식품사업군으로 사업을 확대해 10위권의 재벌기업으로 키워 냈다.
 
  1997년 한국이 IMF 외환위기에 처해 해외 자본들이 한국에서 철수할 때, 신격호 회장은 오로지 나라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1000만 달러의 개인 재산을 투자하고 5억 달러의 외자를 한국에 들여왔다. 평소 강골이었던 그는 대한민국의 랜드마크인 롯데월드타워 완공(2017년)을 실현한 후 2020년에 향년 99세로 영면했다. 재벌가 창업주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숱한 인생 풍파를 겪었던 그는 언론 노출을 꺼렸고, 재계 모임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신격호 회장의 장녀가 신영자 전 롯데쇼핑 사장이고, 장혜선 롯데장학재단·롯데삼동복지재단 이사장은 그의 장녀다. 신격호 회장에게는 맏외손녀다. 신격호 회장이 작고하기 전까지 15년간 매주 두 번씩 꼬박꼬박 만났던 손녀이며, 신 회장에게 유일하게 반말을 했던 손녀이기도 하다.
 
  “제가 좀 유별나다는 얘기를 듣는 편인데 이상하게 할아버지랑은 모든 것이 잘 맞았어요. 저한테는 할아버지, 회장 그런 것보다 제 베프였어요, 베프.”
 
 
  “할아버지, 가족들로부터 상처 입어”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 말년의 할아버지와 손녀의 정기적인 데이트라… 무슨 얘기를 했나요.
 
  “아주 오랜 시간을 정기적으로 뵀기 때문에 저만 아는 비밀이 많네요. 할아버지는 10남매의 맏이였고, 장남으로서 동생을 자식처럼 키웠고 슬하에 자식들도 많았는데 오히려 가족들에게서 많은 상처를 받으셨어요. 원래 강인한 분이셔서 그런 얘기를 좀체 하지 않으셨는데 말년에는 그런 얘기를 자주 하셨어요.”
 
  ― 자식처럼 키웠던 동생과 의절하다시피 했고, 말년에는 아들 신동주–동빈 형제의 경영권 분쟁도 있고 그랬지요?
 
  “돌아가시기 전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떠올랐는지 자주 말씀을 하셨어요. 사실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이고 자랑스러운 롯데의 역사가 아닌 건 맞습니다. 제가 옳다 그르다고 말할 입장은 아닌데 할아버지가 속상해 하시는 것이 너무 싫었어요. 할아버지는 진짜 가족들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으셨어요.”
 
 
  “할아버지, 아주 심한 경상도 사투리 쓰셨다”
 
  ― 고(故) 신격호 회장은 일흔이 넘어서도 경영 일선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경영자 신격호는 어떤 분입니까.
 
  “정말 멋지고 완벽한 사람이죠. 천재적이고요. 일흔이 넘어서도 10년 전의 계열사 매출을 완벽하게 기억했고, 미래에 대한 식견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사업 한 영향도 있어 보이는데 과거의 일본은 우리보다 잘살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가 앞으로 현재의 일본을 따라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양국을 오가면서 활동한 덕분에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습니다.”
 
  ― 숫자에 대한 감각이 남다르셨던 모양입니다.
 
  “계열사 대표들이 할아버지께 경영 보고를 하려면 몇 주 전부터 준비해야 했을 정도로 숫자에 밝으셨습니다. 거기에 창업주가 갖추기 어려운 인성까지 갖춘 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화를 잘 내지 않으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쓰시는 제일 심한 말이 ‘바카야로(바보)’ 정도였습니다.”
 
  ― 할아버지랑 일본어로 대화하셨습니까.
 
  “아니요, 한국말로 했지요.”
 
  ― 롯데에서 일본어를 못하면 CEO가 되기 어렵다는 등 소문들이 있어서 여쭤 봤습니다.
 
  “하하, 전혀요. 할아버지는 아주 심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찐 한국인’이었어요. 단 한 번도 당신과 일본을 엮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 할아버지를 ‘찐 한국인’으로 기억하는 이유는요?
 
  “할아버지와 얘기를 하면 말끝마다 ‘우리나라가 잘살려면 이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 국민성이 말이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우리 국민’ ‘우리 경제’라는 단어를 하도 써서 제가 그만 하라고 얘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할아버지, 우리 먹고살기도 어려워. 롯데에 계열사만 80개가 넘는데 무슨 나라 타령이냐’고 했습니다. 인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정말 철이 없었고, 이제야 할아버지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저한테는 할아버지가 말끝마다 했던 ‘우리나라’가 가장 큰 유산이고 지금 제가 재단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 그럼에도 롯데에는 항상 친일(親日) 기업, 심지어 일본 기업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집니다.
 
  “할아버지 같은 애국자가 없었고, 할아버지는 나중에 재판을 받으면서도 ‘나는 한국에서 번 돈을 10원도 일본에 가져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일본에서 번 돈을 한국에 갖고 들어와서 사업을 일으켰는데 내가 왜 친일 기업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롯데에 씌워지는 친일 프레임이 정말 억울하셨던 겁니다. 말년에 편찮으실 때에도 ‘나는 우리나라를 이렇게 아끼고 사랑했는데 왜 몰라줄까’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할아버지, 일본에서 사업 했다면 훨씬 편하게 하셨을 것”
 
장혜선 이사장이 ‘신격호 롯데 글로벌 장학금(필리핀)’ 행사장에 참석해 장학생들을 격려하고 있다. 사진=롯데장학재단

  ― 사실 신격호 회장은 IMF 때 개인 사재를 한국으로 들여오는 등 한국이 IMF를 벗어나는 데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맞아요. 할아버지는 애초 일본에서 돈을 벌었잖아요. 아마 한국에 가져오지 않고 일본에서 사업 했다면 훨씬 편하게 하셨을 겁니다. 막상 한국에서 사업을 한다고 돈을 갖고 왔지만 1950년대의 우리나라에는 거의 시스템이 없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하나 만들려고 해도 다들 듣도 보도 못했으니까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고, 아무 시스템이 없었던 거죠. 하지만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번 돈으로 우리나라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잘살고 난 이후에 할아버지는 ‘외국인들이 한국을 찾으려면 유적지뿐만 아니라 볼거리, 먹을거리 등이 다 풍족해야 한다’며 쇼핑사업을 일으켰고, 잠실에 123층짜리 롯데월드타워를 만들었습니다. 그때에도 비행기 고도 문제, 일조권 문제, 교통 문제 등등 얼마나 문제가 많았나요.”
 
  ― 끝내 건물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많이 자랑스러워 하셨어요. 우리나라에도 시그니처가 되는 건물이 이제 생겼다고요.”
 
 
  ‘내가 한국 사람인데 뭐를 믿고 도와줬을까’
 
  장혜선 이사장에 의하면 신격호 회장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게 초창기 자금을 대줬던 하나미쓰 전당포 주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안고 있었다. 장 이사장은 “할아버지는 여러 차례 ‘내가 한국 사람인데 (그이가) 뭐를 믿고 도와줬을까’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말했다.
 
  “제가 볼 때는 할아버지가 도움을 준 사람이 훨씬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자신이 일궈 낸 것, 도움을 줬던 사람들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에게 작은 아이디어를 준 사람, 당신을 믿고 따랐던 사람, 고마웠던 사람들을 많이 기억하셨습니다. 말년에는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 손녀랑 정말 많은 말씀을 나누신 모양입니다. 따님인 신영자 사장을 예뻐하셨듯이 말이지요.
 
  “어휴, 할아버지는 엄마를 학교에 못 가게 할 정도로 옆에 끼고 계셨어요. 엄마가 학교(이화여대 가정학과) 시험이 있는 날에 할아버지께 ‘오늘은 진짜 학교 가야 한다’고 허락받고 나가셨을 정도였으니까요.(웃음) 할아버지랑 엄마가 싸우기도 얼마나 했는지요. 엄마는 ‘이게 건강에 좋다. 이걸 드셔야 한다’고 하면 할아버지는 끝까지 버티고, 그러다가 결국 딸 얘기를 듣는 모습을 제가 수십 년을 보고 자랐습니다. 할아버지랑 엄마가 워낙 각별해서 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우리 엄마도 돌아가시지 않을까 걱정했었습니다. 우리 엄마한테는 당신 어머니, 남편도 없이 세상에 오로지 할아버지 한 분뿐이었거든요. 더구나 할아버지가 엄마가 태어나기 전에 일본에 건너갔고 엄마가 큰 다음에 다시 나타났기 때문에 엄마에게 할아버지는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사실 엄마가 고생도 많이 했죠. 할아버지가 한창 사업을 하실 때 한 달은 서울, 한 달은 일본에서 머물며 경영을 하셨잖아요. 할아버지가 서울에 계실 때는 엄마를 매일 부르는 통에 엄마가 개인 약속을 하나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 신격호 회장은 99세까지 장수하셨고 워낙 강골로 알려져 있습니다.
 
  “네. 호텔에서 사셨는데 식사도 규칙적으로 하셨고, 하루 3시간은 끄떡없이 걸으셨어요. 굴비를 워낙 좋아하셨는데, 저한테 굴비를 뜯어서 주시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할아버지께서 서울과 일본을 오가며 경영하던 때는 비행기 편이 많지 않고 수속 시간도 길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몇 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셔서는 바로 부산에 가서 일을 보시고, 그다음에 울산을 가실 정도로 엄청난 강골이셨어요.”
 
  장혜선 이사장에게 롯데장학재단은 첫 번째 직장이 아니다. 그는 30대 초반에 광고사업을 했다.
 
  “가정주부로만 지낸 것은 아니고, 롯데와는 무관한 광고사업을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했는데 사업을 하다 보니 애초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더라고요. 회사가 2개, 3개로 늘어나면서 제가 애초에 꿈꾼 것과 달리 영역만 넓어지곤 했습니다. 어찌 보면 제가 지금 하는 일이 제가 애초 사업을 시작했을 때 꿈꿨던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 직장이 정말 좋습니다.”
 
 
  “할아버지는 남 앞에 나서는 것 싫어해”
 
  ― 어머니도 여동생도 롯데그룹의 주요 요직을 맡았는데, 장 이사장은 일절 롯데와 상관없는 일을 하셨네요.
 
  “저는 아녜요. 제가 롯데 관련 행사에 일절 얼굴을 내비치지 않으니까 한동안 기자들 사이에서 ‘신영자 맏딸 찾기’를 경쟁적으로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언론에 오픈되면 제 인생은 없는 거잖아요. 저는 할아버지, 엄마가 그런 것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을 지켜봐서인지 롯데가(家)라는 꼬리표가 너무 버거웠어요.”
 
  ― 신격호 회장은 ‘은둔의 경영자’라고 불리셨죠.
 
  “할아버지는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냥 내가 할 일을 묵묵히 하면 되지 내가 굳이 나설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많이 하셨습니다. 엄마도 뉴스에 이름이 나오는 것을 너무 싫어하셨습니다.”
 

  ― 재단의 각종 행사에 ‘신격호’ 석 자가 들어가는데,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실까요.
 
  “나무라실 것 같아요. 하지 말라고 했는데, 쓸데없는 일 한다고요. 하지만 저한테는 신격호 정신을 잇고 그 정신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제가 살아서 해야 할 일이도 하고요. 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년 정도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진짜 제가 죽을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말도 못하게 힘들었어요. 그런데 살더라고요. 엄마를 돌봐야 했거든요. 힘든 일이 생기면 할아버지 울산 산소에 가서 엉엉 울어요. 너무 창피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요.”
 
 
  “할아버지가 정말 그리워”
 
  ― 할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다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습니까.
 
  “할아버지, 너무 미안하다고, 내가 할아버지 덕에 이렇게 온전하게 살고 있다고,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리고, 보고 싶다고요.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워요.”
 
  인터뷰가 중단됐다. 대화를 나눌 때부터 시종일관 당당하고 솔직하며 거침이 없었던 그는 신격호 회장 얘기가 계속 이어지자 결국 굵은 눈물을 쏟아 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그는 ‘베프’인 할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 좀 전에 ‘신격호 정신’을 지키고 싶다고 했는데, 그 정신은 뭡니까?
 
  “옳다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 말에 휘둘림 없이 할아버지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은 하셨습니다. 반대로 옳은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이 신격호 정신입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할아버지의 정신을 꼭 배웠으면 합니다. 또 할아버지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분입니다. 요즘 청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일본 땅에서 저 밑바닥 일을 했던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그리고 결국 그룹을 일궈 낸 할아버지의 성공 신화가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형편이 어렵지만 씩씩하게 살아가는 청년들을 보면 ‘너는 우리 할아버지보다는 조건이 좋다’고 말해요. 미혼모들이 힘들어 할 때 ‘나도 딸 혼자 키운 싱글맘이야. 할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누구보다 내가 아파 봐서 그 마음을 아는데, 그래도’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는 시련을 할아버지가, 또 제가 겪고 있다는 부분에서 위로도 받습니다. 그렇게 서로 위로하는 삶이 좋은 것 아닐까요?”
 
 
  “좌절하는 젊은이에게 희망 주고 싶어”
 
사진=조준우

  ― 롯데재단이 꿈꾸는 미래는 어떤 모습입니까.
 
  “저희는 선순환을 꿈꿉니다. 저희가 하는 모든 일이 불씨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불씨는 꺼질 수도, 하지만 또 불을 붙일 수도 있습니다. 저희는 큰불이 될 수 있는 불씨를 살려 보자는 겁니다. 처음에 조용히 활동하다가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미혼모 문제, 가정밖청소년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왜 우리 사회가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를 알리려면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울러 할아버지가 남긴 나라 사랑의 정신을 꼭 20대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한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가 겪어 온 처절했던 젊은 시절을 바로 알려서, 오늘날 좌절하는 이 땅의 많은 젊은이에게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할아버지가 오늘날 전하고 싶은 메시지일 테니까요.”
 
  ― 2년 동안 1만 명에게 그 정신을 전파했으니, 또 1만 명에게 알리기 위해 나서야겠네요.
 
  “만 명에 만 명을 추가하는 것이 매년 이어지면 꽤 많은 숫자가 되지 않을까요? 그중 10%만 우리의 진심 어린 뜻을 받아 줘도 저는 이 사회가 보다 긍정적으로 바뀔 것 같아요.
 
  인터뷰를 하다 보니 할아버지가 더 만나고 싶어요. 그래도 약속을 지켰어요. 제가 항상 그랬어요. ‘할아버지, 나한테 잘해. 나중에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면 제일 많이 울 사람도, 제일 자주 찾아갈 사람도 나일 테니까. 할아버지 보라고 그러는 거 아냐, 내가 아마 그러고 싶을 거야’라고요.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죠. 나중에 할아버지 만나면 ‘너, 열심히 살았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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