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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의 라운지

부활의 리더 김태원

“케이팝에 뿌리가 없으면 광대만 남는다”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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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년째 현역 활동 중인 부활, 올겨울에 14집 발표
⊙ “허공에 가득한 멜로디, 음악을 듣지 않고 살아온 세월을 이제 보상받고 있다”
⊙ 2014년에 신해철 · 김지훈 잃고 극도의 우울증
⊙ “종교는 믿어도, 안 믿어도 좋은 것, 죽는 순간까지 아름답고 싶다”
⊙ “한국 음악을 위해서라면 유희열과 함께 십자가 멜 수 있다”

金泰源
1965년생. 1985년 ‘부활’ 활동 시작 이후 13장의 정규 앨범 발표, 現 대구가톨릭대 실용음악과 석좌교수. 저서 《우연에서 기적으로》 출간
사진=조준우
  ‘북쪽 바다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살았다. 크기가 수천 리나 되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붕(鵬)이라는 새가 되었다. 붕의 등은 몇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날아간다. 대붕이 남으로 날아갈 때는 삼천리 파도를 타고 구만리 상공에 올라 여섯 달이 지나야 쉰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편 첫 부분이다. 곤의 변신은 축적의 힘으로도,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도 읽힌다. 장자는 은유(隱喩) 속에서 2000년을 살아남았다.
 
  지난 7월 28일 경기도 고양의 한 카페에서 김태원(57)씨를 만났다. 록밴드 ‘부활’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 방송인이다. 부활 결성 전부터 그는 기타리스트로 유명했다. 흔히 김도균(백두산), 신대철(시나위)과 함께 한국 3대 기타리스트로 꼽힌다.
 
 
  37년 차 현역 밴드 부활
 
김태원은 김도균·신대철과 함께 한국 3대 기타리스트로 꼽힌다. 사진=부활엔터테인먼트 제공
  부활은 1985년에 활동을 시작해 13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한국 록 밴드들 중 부활의 위치는 특별하다. 다른 밴드들이 대부분 해체하거나 활동을 중단한 반면 부활은 37년째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조급증처럼 한두 곡만 모이면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시대에 기승전결(起承轉結)을 갖춘 정규 앨범을 고집하는 것도 독보적이다. 리더 김태원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그는 부활의 곡 중 거의 대부분을 작사 작곡했다. 조금 놀라운 건 가사다. 부활 노래에 어린 특유의 감성은 가사 덕이 크다.
 
  ‘이 새벽 나를 걷게 하는 알 수 없는 이에게/ 지루한 기다림을 길들어 내는 신이여’(불면 중), ‘비밀처럼 계절이 흘러 상처들이 아물어 가면/ 설레이던 너는 한 편의 시가 되고’(비밀 중),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너무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 엄마가 혼잣말로 하시던 얘기가 자꾸 생각이 나는 날’(친구야 너는 아니 중) 이 중 ‘친구야 너는 아니’는 이해인 수녀가 노랫말을 지었다.
 
  부활의 37년엔 부침(浮沈)이 많았다. ‘희야’(1986년, 1집)가 크게 히트했고, 김태원은 대마초 흡입으로 두 차례 감옥에 다녀왔다. ‘사랑할수록’(1993년, 3집)을 녹음한 후, 노래를 부른 3대 보컬 김재기의 죽음을 겪어야 했다. 3집은 130만 장 넘게 팔렸고, 부활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2002년, 부활은 2대 보컬이었던 이승철과 재결합, 명곡 ‘네버 엔딩 스토리’를 내놓는다. 음악은 큰 사랑을 받았고 이승철과는 다시 헤어진다.
 
  김태원은 2008년 대중의 시야 한중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가끔 한마디씩 던지는 묘한 김태원식 유머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국민할매’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남자의 자격〉 〈위대한 탄생〉 〈나 혼자 산다〉 등 예능 프로그램을 누볐다. 광고에 출연해 ‘혼자 왔니?’라는 유행어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다 2014년이 되고 그를 예능에서 자주 보기 힘들어졌다. 몸이 안 좋다는 소식, 부활 14집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이따금씩 들려왔다.
 
  최근 그가 다시 대중에게 바싹 소환됐다. 유희열의 표절 논란 때문이다. 한국 가요를 사랑하는 일반인들은 혼란스러워하는데, 평론가나 음악가들 소위 업계 종사자들은 조용했다. 그러던 차에 김태원은 솔직히 의견을 말했다. 음악평론가 임진모와 함께 출연한 MBC 〈100분 토론〉에서였다. 김태원이 300곡이 넘는 곡을 만들고도 표절 시비에 걸린 적이 없었다는 점이 새삼 다시 부각됐다.
 
 
  ‘추모의 아이콘’
 
  그와 마주 앉았다. 굵은 체인으로 된 목걸이, 눈을 가린 검은 선글라스. 그런데도 희한하게 수행자의 느낌이다. 면벽수행하다 잠시 나온 이를 붙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 든다. 표절이니 뭐니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일들은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졌다. 그가 1993년부터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고 한 게 생각났다.
 
  ― 요즘도 매일 일기를 쓰나요.
 
  “지금도 써요. 일기를 통해 저 자신과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어디에 있었고 뭐가 즐거웠다고 써요. 어린이들이 쓰는 일기와 비슷해요. 특별한 날엔 문장이 길어지죠.”
 

  ― 특별한 날이 언제인가요.
 
  “여러 친구가 세상을 떠났어요. 제가 ‘추모의 아이콘’이 된 것 같아요. 그날이 되면 길게 일기를 쓰지요. 1993년 8월 11일에 김재기가 세상을 떠났어요. 8월 11일이 되면 홈페이지에 글을 써요. 떠오르는 생각들. 팬들이 읽어보면 난해할 거예요. 개인적이고 특이한 은유를 많이 씁니다.”
 
  ― 그러면 팬들이 무슨 뜻인지 못 알아보잖아요.
 
  “숨기는 것도 좋아요.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우연히 제 글을 봤는데, 그때 알아채는 겁니다. ‘아, 이제 이 얘기를 알겠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김재기의 죽음
 
김재기가 부른 ‘사랑할수록’이 담긴 부활 3집 〈기억상실〉.
  ― 김재기씨가 돌아가신 지 29년이 됐네요. 그날이 지금도 떠오르나요.
 
  “스튜디오에서 ‘사랑할수록’ 녹음을 하고 그 친구와 헤어졌어요. 그날 밤 전화가 왔어요. 차가 견인이 돼서 찾으러 가야 되는데 과태료 3만4000원이 없다고요. 그 돈이 저에게도 없었어요. 돈이 없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몇 시간 후에 전화가 왔어요. 교통사고가 났다고.”
 
  3대 보컬인 김재기는 이날 다른 이에게 돈을 빌려 견인된 차를 찾아오다 빗길에 중앙선을 넘어온 차와 충돌해 사망했다. 당시 김태원은 부활 3집을 내주겠다는 레코드사를 어렵게 찾아 부활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그때 3만원이 없었다는 게 너무 자존심이 상해요. 팀의 리더가, 그것도 서른 살이 넘은 성인이… 3만원만 있었으면 됐잖아요. 3집 재킷을 보면 멤버가 둘이에요. 김재기 그리고 저. 드럼, 베이스도 저희에게 안 왔어요. 너무 가난해 보이니까. 부활의 역사를 슬프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굉장히 슬픕니다. 날개를 달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하지요.”
 
 
 
김지훈과 신해철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세상에 없는 이들을 말한 적이 있다. 김재기 그리고 밴드 ‘숲을 나는 새’의 기타리스트 김지훈이다. 201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의 순간 김지훈에게 김태원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시 태어나라.’
 
  “김지훈이라는 친구는 재능이 있었지만 꽃을 피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어요. 그러면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한 친구는 제 의상 코디네이터였던 친구입니다. 예능 첫 방송을 하기 직전이었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제 집에 왔어요.”
 
  ― 평소 알던 사이였나요.
 
  “모르는 사이였죠. 제 어릴 때 친구가 소개해서 왔다는 겁니다. 뭐하시는 분이냐니까 코디네이터래요. 그렇게 저의 방송을 도와주다 4년 후에 세상을 떠났어요. 어린 친구였는데.”
 
  ― 다른 한 분은요.
 
  “신해철이에요. 신해철이 고3 학생일 때 처음 만났어요. 얘기를 나눠보니 그 나이에 생각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에요. 차원이 달라. 신해철이 처음엔 기타를 치려 했어요. 그런데 기타 실력이 너무 안 느는 거야.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기타는 안 될 것 같다.’ 그랬더니 고백을 하더라고요.”
 
  ― 무슨 고백이요.
 
  “다한증이 있던 겁니다. 손에서 땀이 너무 많이 나서 슬라이딩(slide up·기타의 기술 중 하나)도 안 되고 기타 줄이 금방 녹슨다는 겁니다.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작곡을 하라고 얘기해줬어요. 그 누구보다 거룩하게 술을 마셨던 친구예요.”
 
  ― 신해철씨는 너무 갑자기 세상을 떠났지요.
 
  “죽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신해철은 운이 좋은 겁니다. 길게 아프다 죽은 것도 아니고, 그 나이에 한 획을 그었잖아요. 자랑스러워요. 제가 배운 것도 많고요.”
 
  ― 죽은 친구들이 그립겠어요.
 
  “그렇죠. 김재기, 신해철, 김지훈. 생각이 통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김지훈과 신해철 이 둘을 2014년에 잃었어요. 그해 마침 정동하가 팀을 탈퇴했고요. 극도의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이후 입원을 몇 번 했어요. 몸이 다 된 거죠. 부활 14집이 올겨울쯤 나옵니다. 13집 이후 10년 정도 걸린 셈입니다.”
 
  ― 한 번 다시 만나보고 싶기도 한가요.
 
  “아니, 만나게 될 테니까요. 상갓집에서도 눈물이 안 나더라고요. 많은 일을 겪었지요. 음악도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 내세(來世)를 믿는군요.
 
  “뭐가 어쨌든 밑져야 본전입니다. 죽은 후에 뭔가 있다고 생각하고 죽는 거나 없다고 생각하고 죽는 거나 죽는 건 같습니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임종할 때 밝고, 그 반대는 어두워요. 그렇다면 전자(前者)가 되어야죠. 죽는 그 순간에도 가족들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요.”
 
  얼핏 냉소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답을 하던 그가 갑자기 나지막이 허밍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인터뷰 도중 그런 순간이 꽤 자주 찾아왔다. 젊은 시절부터의 습관이란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바울(Paul), 가톨릭 세례명이다. 그의 아내 이현주씨는 독실한 신자다.
 
 
  종교 경전 耽讀
 
  그도 젊은 시절 어느 순간, 신(神)이 절실했던 것 같다. 성경이며 코란이며 경전(經典)을 찾아 탐독했다니 말이다.
 
  ― 경전을 읽고 내린 결론이 뭔가요.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은 게 종교라는 결론입니다. 좋은 일을 하면 하나님이 상을 준다든가 하는 건 모순이라 생각해요. 조건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끝까지 가면 하나로 보여요. 이름만 다르고요. 어디는 알라, 어디는 하나님, 어디는 부처님. 이름이 많은 것이지 하나가 아닐까.”
 
  듣고 있으려니 왠지 신이(神異)한 체험도 했을 것 같다.
 
  ― 신기한 체험은 한 적 없나요.
 
  “김재기가 사고를 당한 밤이었어요. 꿈을 꿨어요. 나무로 된 문에 ‘부활’ 글자가 나타나더라고요. 갑자기 그 글자에 불이 활활 붙었어요. 꿈에서 깨고 바로 전화를 받았어요.”
 
  꿈처럼 부활은 다시 부활했다. 김재기의 데모(demo·샘플 음원) 녹음을 담아 발표한 ‘사랑할수록’이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김재기와 음색이 비슷한 동생 김재희가 4대 보컬로 들어와 노래했다.
 
  ― 또 그런 체험을 한 적이 있나요.
 
  “감옥살이 두 번 했잖아요. 두 번째 때 꿈을 꿨어요. 제 방에 여러 명이 앉아 있는데, 그 사람들이 갑자기 썰물처럼 창문으로 확확 나가더라고요. 연기가 돼서요. 순식간에 저만 남았어요. 다 어디 갔지? 그다음 날 잡혔어요.”
 
 
 
끊는 건 없다, 참는 것

 
  ― 마약 중독은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을 파괴하는 거니 좀 관대하게 보기도 하잖아요? 알코올 중독도 그렇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약 중독으로 감옥에 가면 가족이 함께 수감 생활을 하는 게 됩니다. 알코올 중독이 되면 사람이 무척 지저분해집니다.”
 
  그는 술을 안 마신 지 2년이 됐다고 했다.
 
  ― 유혹을 느끼지 않나요.
 
  “모든 유혹이 절 쫓아다닙니다. 끊는 건 없어요, 참는 거지. 마약은 두 번째 잡히고 더러워서 안 한다고 끊었어요. 술은 끊기 힘들었죠. 술을 마셔야 친구들과도 만나고 이야기하며 스트레스를 풀게 되니까요. 술을 안 마시니 친구들을 잘 안 만나게 되죠. 그런데 또 고독해야만 곡을 쓸 수 있어요.”
 
  예술계에는 광기와 중독, 예술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오래된 통념이 있다. 2400년 전에 벌써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천재성으로 유명한 모든 사람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슈만, 베토벤, 고흐, 발자크, 버지니아 울프, 에드거 앨런 포, 이들은 정신의 한 부분이 불안정했던 천재들이었다.
 
  음악계에는 그 영향이 더 짙다. ‘27세 클럽’이란 게 있을 정도다. 27세에 요절한 뮤지션들을 뜻한다. 서양판 아홉수라고 할까.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커트 코베인, 에이미 와인하우스 외에도 수십 명이다. 약물 중독과 자살로 죽은 경우가 많다. 유독 기타리스트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광기에서 나오는 빛으로 반짝이는 음악을 얼마간 내놓고 스러진 별들이다. 27세에 죽은 지미 헨드릭스를 넘어 밥 딜런처럼 80년을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부활 활동 초기와 지금의 자신을 비교했을 때 변한 게 있나요.
 
  “저는 완전 다른 사람입니다. 20년 전에 저를 알았던 사람이 그러더군요. 술 마시며 대화를 해보니 옛날의 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고요. 스스로를 바꾸려 굉장히 노력했습니다. 그래야 음악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고 생각했죠. 더 바뀌어야 해요. 자신을 바꾸는 건 지루하고 고통스럽지만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태어나서 사는 동안, 한 번이라도 나를 바꿔볼까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한국 3대 기타리스트
 
  ― 예전엔 어떤 사람이었나요.
 
  “사회성이 아예 없었어요. 아무도 안 만났으니까요. 음악적인 아집은 또 장난이 아니었어요.”
 
  ― 김재희씨가 이런 얘길 하더군요. ‘사랑할수록’이 히트를 해서 방송 출연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친한 연예인이 없다고요. 록커가 아닌 가수들이랑은 대기실에서 말도 못 섞게 해서요.
 
  “제가 그런 사람이었다니까요. 편견과 차별이 가득했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별로 주목을 못 받았어요. 그래서 사회성이 없었을 겁니다. ‘사람들이 왜 나에게 관심이 없지’… 일종의 질투였던 거죠. 인간의 질투심은 발전하기에 굉장히 좋습니다. 좋은 건 적당히 질투해도 됩니다.”
 
  ― 여학생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기타를 시작했다면서요.
 
  “그랬죠. 기타 때문에 욕하는 습관도 버렸어요.”
 
  ― 기타랑 욕이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중학교 때 기도를 했어요. 신께 조건을 건 겁니다. ‘제가 기타리스트로서 살 수 있게 해주신다면 욕을 죽을 때까지 안 하겠습니다.’ 그러고 지켰어요. 지금은 육두문자를 일부러 입에 올리려 해도 못 해요.”
 
  예능 프로그램으로 김태원을 만난 세대는 아마 모를 수 있는데, 그의 기타 연주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1집의 ‘인형의 부활’이나 2집의 ‘천국에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배신의 아이콘
 
2002년 9월 ‘네버 엔딩 스토리’로 활동하던 시절의 부활. 왼쪽부터 김태원, 채제민, 서재혁, 엄수한, 이승철. 사진=조선DB
  1대 보컬 김종서부터 11대 보컬 박완규까지 37년간 10명의 보컬이 부활에 머물렀다 떠났다. 이들 중 이승철의 탈퇴, 재결합 이야기는 꽤 오랫동안 회자됐다.
 
  “1986년에 ‘희야’가 나오고, 이승철씨가 탈퇴했어요. 그때부터 제 자아(自我)를 찾기 시작했어요. 제가 저를 위로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어요.”
 
  ― 왜요.
 
  “너무 괘씸해서 죽을 것 같은 느낌. 어릴 때였으니까요. 화병이었던 거죠. 근데 그걸 숨겨야 하니까 안에서 곪는 겁니다. 그걸 못 견뎌내면 보통 세상을 떠나지 않나요? 음악이라는 끈, 그리고 아내 때문에 죽을 수 없었어요.”
 
  ― 9대 보컬이었던 정동하씨도 아쉽게 팀을 떠났지요.
 
  “사실 제가 서운했던 계기가 있었어요. 제가 옆에 있는 걸 모르고 그 친구가 누구와 전화통화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해요. ‘오늘 송달수씨 노래합니다.’ 전화를 끊기에 제가 물었어요. ‘우리 레퍼토리에 송달수씨라는 노래가 있니?’”
 
  ― 그게 무슨 노래인가요.
 
  “얼굴이 하얘지더니, ‘네버 엔딩 스토리를 자기는 그렇게 부른다’고 해요. 생각했지요. ‘나는 목숨 걸고 만든 노래인데 애착이 전혀 없구나.’”
 
  ‘네버 엔딩 스토리’는 김태원이 아내와 아이들을 캐나다로 떠나보낸 후 외로움, 자살 충동과 고투(苦鬪)한 끝에 만들어낸 노래다. ‘손 닿을 수 없는 저기 어딘가’란 구절로 노래는 시작된다.
 
  ― 보컬을 뽑는 기준이 있나요? 인성을 본다든지요.
 
  “인성을 어떻게 알아봅니까. 그건 시간이 지나봐야 아는 건데요. 부질없더라고요. 여러 번 배신을 겪고 나서 깨달았어요.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을 가르쳐선 안 돼요. 가르치는 척도 하면 안 되고요. 내가 하는 얘기를 상대도 다 알고 있어요. 제가 에너지가 있으니 제 얘기를 듣는 척은 해도요. 서로 피곤한 겁니다.”
 
  ― 리더가 완벽주의자라 멤버들이 힘들었던 거 아닌가요.
 
  “완벽이라기보다는 기본적인 삶의 패턴을 말하는 겁니다. 더 뛰어나지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은 열심히 살았어’ 이 정도는 들을 수 있도록 얘기해주는 거예요.”
 
  ― 녹음을 너무 많이 시켜서 목이 상한 멤버도 있다면서요.
 
  “솔직히 얘기하면, 제가 뒤집어쓰는 겁니다. 리더가 책임져야지 그럼 누가 책임집니까.”
 
  ― 편견과 차별이 가득했던 예전 모습을 버린 계기가 있었나요.
 
  “어느 순간 의문을 갖기 시작했어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후 국가가 나뉘고, 지금까지도 전쟁을 하고 있고 사람들은 수없이 죽어왔다. 지구인이 진화가 덜 돼서 차별과 편견이 존재하는 거 아닌가.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누군가 선구자가 음률로든 시로든 자꾸 메시지를 전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러면 나부터 편견을 버리자. 댄스 가수가 뭐 어떤가. 음악 하는 사람들끼리 만났다가 싫으면 헤어지기도 하는 거지.”
 
  (여러 번 당한) ‘배신의 아이콘’ ‘추모의 아이콘’, 그는 ‘xx의 아이콘’이라며 스스로를 표현하는 걸 재밌어했다. 상업적인 표현으로 자조(自嘲)하며 키득거리는 게 즐거운 듯했다.
 
 
  청각과 후각 잃어
 
김태원이 2011년 〈남자의 자격〉에 출연할 때의 모습. 사진=뉴시스
  예전에 유명한 트로트 가수를 인터뷰할 때 일이다. 카지노에서 억대 도박을 했다는 루머(?)에 휘말린 적이 있는 가수였다. 인터뷰 도중 ‘카지노’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글자 그대로 펄펄 뛰는 모습에 상당히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카지노에 갔는지 캐물은 것도 아니었다.)
 
  김태원은 좀 달랐다. 감옥, 배신, 외로움, 무슨 얘기가 나와도 답에 그다지 망설임이 없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며 특별한 계기 없이 자신을 바꾸려면 정신이 여간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면이 산처럼 단단하고 풍요로운 사람으로 보였다.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울창해, 낮에도 어스름한 삼나무숲과 놀러 온 아이들을 품어주는 연못을 모두 갖춘 산 말이다.
 
  몸 상태는 그의 유머만큼 여유가 있진 않은 듯했다. 그는 한쪽 귀의 청각을 잃었고, 패혈증을 앓은 뒤엔 후각을 잃었다. 그는 스스로를 ‘질병의 아이콘’이라 표현했다.
 
  ― ‘질병의 아이콘’까진 아니지 않나요.
 
  “위암과 간암 수술을 했죠. 오랜 기간 영양실조였고요.”
 
  ― 식욕이 없나요.
 
  “예능에 한창 출연할 때는 심신이 너무 피곤해서 먹기 싫었어요. 그럴 시간에 자고 싶었죠. 매일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왔으니까요. 제 생에서 그런 적이 없었거든요.”
 
  ― 피곤했겠네요.
 
  “〈남자의 자격〉 할 때는 머리가 다 빠졌어요. ‘국민 할매’라는 캐릭터에 딱 맞았죠. 탈모인 줄 알았는데 아내는 자꾸 영양실조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남자의 자격〉 끝나고 스트레스 덜 받고 잘 먹으니 머리가 나더라고요.”
 
 
  예능으로 부활 알려
 
  ― 그런 방송이 보기엔 재미있어 보이는데 스트레스가 큰가 봐요.
 
  “출연료를 받으니 분명히 역할을 해야 하잖아요. 역할을 한다는 게 굉장히 스트레스예요. 나중엔 몸이 붓고 복수가 차고 몸에 난리가 났어요. 내 몸이 곧 죽게 생겼는데 모른 척하고,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하고 꿋꿋이 방송을 했어요. 성공했지. 부활을 알렸으니까.”
 
  부활을 알린 정도가 아니었다. 2008년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후 몇 년 동안 줄곧 그는 예능의 최상위 포식자였다. 다른 출연자와 말도 안 섞고 출연자 대기실에서 침묵을 지키던 사람이 어쩐 일일까.
 
  “평소 늘 생각했어요. ‘딱 한마디를 던져도 음악 하는 후배가 영향을 확 받을 정도로 수양을 쌓아야 한다.’ 예능 할 때 이게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우리나라에서 웃기는 걸로는 5위 안에 드는 친구들이 제가 등장하니 말을 못 하는 거예요. 제가 승부욕이 강한 데다가 짧고 명료하게 치고 빠지니까요.”
 
  ― 그건 어디서 공부한다고 되는 게 아닐 텐데요.
 
  “오랜 시간 연마한 거니 당할 수가 없지요. 나중엔 이런 생각까지 했어요. ‘저 사람들 앞길에 내가 끼어들어서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특히 윤석이한테 미안했죠.”
 
  당시 이윤석은 ‘국민약골’ 캐릭터로 한창 활동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질병의 아이콘’이 바로 옆에 나타난 거였다. 이경규는 당시 상황을 ‘국민약골 옆에 산송장이 나타났다’고 표현했다.
 
  ― 같이 출연한 개그맨들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네요.
 
  “제가 늘 주장하는 건데, 녹화 전에 계산을 하고 오면 얘기가 잘 안 됩니다. 에너지가 없어져요. 무조건 떠오르는 대로 얘기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평소에 바탕색이 아름답게 칠해져 있어야 해요. 그 위는 한 획을 어떻게 그어도 그림이 됩니다.”
 

  ― 그게 무슨 말인가요.
 
  “박완규란 친구가 상당히 고집이 셉니다. 음악도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만 들었으니까요. 제가 그랬어요. ‘어떤 장르의 음악이 다른 장르보다 더 훌륭하다 이런 얘기는 죽을 때까지 하면 안 된다. 생각을 아예 고치든지, 끝까지 숨기든지 알아서 해라. 음악은 다 같다고 생각해야 해.’”
 
  ― 순간적으로 생각을 꾸며대지 말고 옳다고 믿는 대로 평소에 마음을 다져놓으라는 얘기군요.
 
  “화장실에서 직원 둘이 대화를 해요. ‘김 부장 말이야 이번에 뭐가 어쨌는데’ 그때 김 부장이 볼일을 보고 나오는 겁니다. 그럼 그 직원들은 속으로 그래요. ‘내가 왜 그랬지?’ 그럴 필요가 없게 하면 돼요. 부장의 위치를 인정해버리면, 부장이 앞에 있든 없든 욕할 이유가 없습니다.”
 
  ― 그게 쉽나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 그런 척하면 스트레스 때문에 암 걸립니다. 그냥 평소에 그런 사람이 되면 됩니다. 엄청 힘들 것 같지만 오늘부터 시작하면 돼요. 바탕을 갖추면 생방송에 나가도 실수를 안 합니다. 이상한 생각을 안 하니 이상한 게 나올 수가 없어요. 평소에 욕을 안 하니 욕이 나올 수 없듯이요. 그게 안 되면 생방송 못 합니다.”
 
  ― 생방송에 안 나가면 되잖아요.
 
  “라이브 공연도 생방송과 같습니다. 관객과 같은 시공간에 있잖아요. 정말 고맙다고 생각하며 관객을 바라봐야 해요. 얼마 전에 〈열린음악회〉에 출연해서 이렇게 인사했어요. ‘고맙습니다. 건강하셔서.’ 준비한 게 아니에요. 관객들을 보니 떠오른 거죠. ‘여러분이 건강하시니 저희가 음악을 할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란 뜻이에요. 농축해서 말하는 걸 좋아합니다.”
 
  ― 습관적으로 스스로를 면밀히 관찰하는군요.
 
  “그렇죠. 전 더 변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사색을 합니다. 인간의 수명은 유한한데, 안 좋은 사건들을 스스로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죠. 이젠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제 마음이 별로 동요하지 않습니다. 2011년 한창 예능에서 잘나갈 때 청와대에 초청받은 적이 있어요.”
 
 
  청와대에 돈가스 없어
 
2011년 12월 7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과학 인재 초청 행사에 참석해 강연 중인 김태원. 사진=연합뉴스
  ― 2011년이면 이명박 대통령 시절이군요.
 
  “과학 인재들 앞에서 강연을 했어요. 끝나고 식사를 하자고 권하더군요. 그때 이 대통령이었나, 김윤옥 여사였나 제게 물었어요.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나요?’”
 
  ― 뭐라고 답했나요.
 
  “‘저는 돈가스를 좋아합니다. 돈가스 되나요?’ 그러고는 뒤꼍에 나가서 몰래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옆에 쓱 와요. ‘김태원씨죠?’ 그러더니 담배를 한 개비 달래요. 경호실에 계신 분이었어요. 둘이 담배 피운 기억이 납니다. 음악에 대한 확고함이 있기 때문에 그때도 지금도 저는 거칠 것이 없어요.”
 
  ― 돈가스는 먹었나요.
 
  “청와대에 돈가스는 없더군요.”
 
  ― 어쨌든 흥미로운 경험이었네요.
 
  “그때 청와대를 들어가며 옆에 타고 있던 코디네이터에게 말했어요. ‘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니니?’ 사람들이 저를 너무 거룩하게 보는 거예요. ‘내가 그 정도로 거룩한 사람이 아닌데’ 저 자신이 거품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한 거죠.”
 
  ― 예능에 출연한 걸 후회하나요.
 
  “지나온 시간은 한 점도 후회 안 합니다. 그런데 부활을 살리기 위해 시작한 예능이니, 적당히 정점을 찍고 스스로 내려와야 되는데 그 맛을 봐서 섭외가 들어오면 거절을 못 하는 겁니다. 예능에 나가면서 모든 공연이 매진됐으니까요. 관객 연령층이 20대에서 70대까지예요. 정말 아름다워요.”
 
 
  구두쇠와 죄책감
 
  인터뷰 중인 카페 벽엔 클림트의 그림이 여러 장 걸려 있었다. 〈키스〉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갑자기 청소기 얘기를 꺼냈다.
 
  “15만원짜리 물걸레 청소기를 샀어요. 제가 구두쇠 기질이 있어요. 아내가 뭘 사는 것도 싫어했어요. 그러다 이번에 청소기를 샀는데 엄청나게 편한 겁니다. 제가 아내에게 그랬어요. ‘내 재산 절반은 당신 거니까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
 
  ― 구두쇠 기질이 갑자기 없어졌나요.
 
  “제 아들이 발달장애인이에요. 이유도 알 수 없이 그냥 돈을 모아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내가 떠나고 난 후 상황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들과 같은 날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죠. 아내는 신부님들과 친분을 쌓으며 기부를 많이 해요. 청소년회관 같은 걸 건립해 훗날 아들이 지낼 곳을 마련해주겠다는 생각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나 어차피 아들은 아들의 몫을 갖고 태어난 건데요.”
 
  이 얘기를 하며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아들 우현 군은 자폐성 발달장애 2급이다. 아내 이현주씨와 우현 군은 필리핀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음악과 방송에 집중하며 아들의 장애는 외면했다는 죄책감을 오랜 시간 갖고 있었다. 방송에 출연해 여러 번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2011년 ‘폴제페토’라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었다. 기타를 만드는 회사다. 세례명 ‘폴’과 피노키오를 만든 할아버지 ‘제페토’를 합친 이름이다. 제페토의 마음으로 동양인 체형에 맞는 기타를 제작한다는 뜻이었다. 고령으로 현업에서 은퇴한 현악기 장인과 장애인 근로자를 채용했다. 굳이 사회적 기업을 시작한 건 아들에 대한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폴제페토는 어떻게 됐나요. 회사 이름이 멋져요.
 
  “악기 소리가 더 멋져야 되는데 아직 노하우가 부족해요. 지금은 잠시 접었어요. 우리나라에도 전통이 오래된 악기 회사가 많아요. 그사이를 못 뚫겠더라고요. 언젠가 다시 할 겁니다.”
 
  죄책감의 시간도 지나고 이제 그는 아들을 그 존재 자체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도 無音으로 관람
 
김태원이 2011년에 출간한 자전 에세이 《우연에서 기적으로》.
  ― 무심결에라도 표절할까 봐 음악을 잘 안 듣는다는 게 사실인가요.
 
  “잘 안 듣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듣습니다. 사람이 피폐해지죠.”
 
  ― 부활 앨범에 클래식이나 영화 음악을 기타 버전으로 편곡한 곡들이 실려 있던데요. 13집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2번을 편곡한 연주가 실려 있고요. 클래식은 들으시나 봐요.
 
  “클래식 멜로디로 가요를 만들 수 있나요? 클래식을 좋아해요. 가사가 없어서 저를 건드리지 않아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2번은 엄청나게 많이 들었어요.”
 
  ― 음악을 안 들으면 영화는 보나요.
 
  “영화는 많이 봅니다. 넷플릭스에 있는 영화는 거의 다 봤습니다. 영화에 배경 음악이 있잖아요. 그게 신경이 쓰여서 음량을 0으로 해놓고 보죠. 소파에 앉아서 기타를 들고 눈으로는 영상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하지요. 그러다 멜로디나 글이 떠오르면 기록하고요.”
 
  ― 최근에 재미있게 본 영화가 있나요.
 
  “〈올 이즈 로스트(All is lost)〉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인공입니다.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가 없어요. 혼자 요트 타고 가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배가 파손돼 물이 들어와요. 혼자 해결하는 내용이에요. 이런 영화를 좋아합니다. 〈캐스트 어웨이〉 〈빠삐용〉.”
 
  그가 쓴 책 《우연에서 기적으로》에는 이런 글이 있다. ‘무인도에서 탈출해 처음 만나는 사람을 대하듯 다른 모든 사람을 대한다면 어떤 관계에서도 실패하지 않을 거다.’ 음악을 위해 음악이 없는 방 안에 스스로를 유폐하고 지내왔기에 할 수 있는 조언이다.
 
 
  허공에 떠 있는 멜로디
 
  “음악을 듣지 못하는 엄청난 괴로움에 대한 보상이랄까, 이젠 뭘 적어도 걱정이 없어요. 멜로디가 허공에 떠다녀요. 구름 뒤나 나무 옆, 가을의 잎이나 겨울의 눈에 멜로디가 숨겨져 있어요. 찬바람을 만나면, 예닐곱 살에 동네 골목에서 맡은 냄새가 떠올라요.”
 
  ― 멜로디가 허공에 떠다니는군요.
 
  “음악 생각이 안 돌아가면 사는 것 같지가 않아요. 너무 오랫동안 그런 생각만 하고 살았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고요. 지금 제가 얘기하는 게 자랑거리가 이제는 못 돼요. 옛날엔 진정한 음악이 뭔지 논하기도 했는데 요즘엔 다들 이렇게 나와요. ‘왜 그리 어렵게 작곡을 해?’”
 
  ― 요즘은 보통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작곡을 하더군요. 샘플 음원을 제공하는 작곡 프로그램도 있고요.
 
  “저는 컴퓨터가 없어요. 소파 옆에 놓인 통기타 한 대와 녹음할 수 있는 전화기 한 대가 전부예요. 전엔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어요. 아마 제가 마지막 남은 아날로그 작곡가일지 몰라요. 컴퓨터로 작곡하는 것보다 고통스럽지만, 여기에 희열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봐요. 편리한 프로그램을 먼저 알아버린 친구들이 이전 방식으로 거꾸로 회귀하기는 너무 힘들 겁니다.”
 
  ― 음악을 만들 때 작곡이 먼저인가요, 작사가 먼저인가요.
 
  “입구는 여러 곳에 있습니다. 주제가 제일 중요합니다. 주제가 떠오르면 앞뒤 얘기를 만들면 됩니다. 주제가 만약 ‘아픔’이다, 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 아팠지?’ 스프링노트 한 권에 쓴 다음 고르고 줄입니다. 가사가 완성되면 멜로디를 골라서 맞춰봅니다. 그런 후 밴드 멤버들과 함께 편곡하고 노래하지요.”
 
  ― 노트 한 권 가득 쓸 게 떠오르나요.
 
  “아직 비어 있는 노트를 보면서 비어 있지만 쓰여 있다고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 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기 안에 갖추고 있어요. 그걸 발견하는 게 창작이죠.”
 
  ― 제목은 어떻게 정합니까.
 
  “떠오를 때가 있어요. 영어를 잘 몰라서 생긴 행운도 있어요. 케니 로긴스의 노래 ‘더 모어 위 트라이(The more we try)’를 듣고 제목이 무슨 뜻인지 아내에게 물었어요. ‘우리가 노력할수록’이라고 알려줬어요.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지은 제목이 ‘사랑할수록’이에요.”
 
 
  “여파가 커서 미안한 마음”
 
  ― 유희열씨 표절 논란에 대해 발언하신 게 큰 화제가 됐지요.
 
  “저는 그냥 느낀 대로 얘기한 건데 여파가 너무 커서 미안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제가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던 것 아닌가, 비슷하다고 하면 ‘표절했다’고 하고 다음 곡 쓰면 되지, 그런 생각이었어요. 한 번은 꼭 터져야 될 일이긴 했습니다. 이런 얘기를 뻔뻔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안 되거든요.”
 
  사실 유희열 표절 논란에서 가장 놀라웠던 건 표절 여부가 아니라 논란에 대응하는 유희열 측의 대응이었다. 그는 사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검토 결과 곡의 메인 테마가 충분히 유사하다는 것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긴 시간 가장 영향받고 존경하는 뮤지션이기에 무의식 중에 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유사한 진행 방식으로 곡을 쓰게 되었고 발표 당시 저의 순수 창작물로 생각했지만 두 곡의 유사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충분히 살피지 못하고 많은 분들에게 실망을 드린 것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랜 팬들에게 이것은 마치, 오랜 시간 추억과 감성을 공유하며 친구라 생각했던 이가 솔직한 사과를 건네야 할 타이밍에 법무법인에서 작성한 듯한 유감 표명의 내용증명을 보내온 것 같지 않았을까. 그 뒤로도 혼란스러운 얘기들이 계속 들려왔다.
 
  ‘유사성을 확인했지만 법적 조치가 필요한 정도는 아니’라는 원곡자 사카모토 류이치의 입장문(?)이 일제히 보도됐다. 알고 보니 이 입장문은 사카모토 류이치 측에서 유희열 측에 보낸 사적인 서신이었고, 유희열 측은 동의도 구하지 않고 서신을 입장문처럼 언론에 배포했단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암투병 중이다. 지난 6월 문예지 《신초》에 실린 글에 사카모토는 자신이 ‘직장암 4기 투병 중이고, 치료하지 않으면 여명(餘命)은 6개월’이라 썼다.
 
  ― 유희열씨의 다른 곡들에도 표절 논란이 번지고 있더군요.
 
  “유희열이라는 분의 감성을 제가 알거든요. 머리가 좋고, 너무 할 일이 많아서 나름대로 생각해낸 방법인 것 같아요. 그 대가라고 봐요. 이해해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해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니에요. 이제 사람들이 표절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일본곡을 베끼는 이유
 
사진=조준우
  ― 이전에도 보면 유독 일본 노래를 표절한 경우가 많습니다.
 
  “정서가 비슷하니까요. 예전 음악이라도 일본에서 한 번 ‘떴던’ 음악은 우리나라에 오면 떠요. 그 공식을 아는 거예요. 정도(正道)는 아니고, 후미진 길이에요. 후미진 길이지만 ‘인기’라는 도착 지점은 같아요. 일본어 발음의 특징 탓도 있었어요.”
 
  ―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일본어엔 받침이 없잖아요. 노래를 만들 때 말이 안 되는 일본어 발음을 붙여서 만들면 쉽게 곡이 만들어지기도 해요. 그렇게 작곡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러다 자기가 베끼는지도 모르고 베끼는 거예요. 저는 그게 뭔가 자존심이 상해서 20대 중반부턴 허밍을 하며 작곡했어요.”
 
  ― 표절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논란도 있어요. 판정기관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고요.
 
  “전문가라고 음악이 다르게 들립니까. 이번처럼 음악을 듣는 분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게 나은 것 같아요. 이제 뮤지션들이 표절을 무서워할 거예요. 이번 사태가 한국 음악을 위한 십자가라면 유희열씨와 제가 멜 수 있어요.”
 
  ― 한국 가요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음악에 미친 사람이 아니면 음악을 하면 안 돼요. 돈에 미친 사람이 음악을 이용하면 안 된다고요. 시간이 지나면 다 보입니다. 박완규는 음악에 미친 사람입니다. 저도 그렇고요. 제가 음악에 미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기획사라도 차렸겠죠.”
 
  ― 왜 안 차리셨어요.
 
  “미국이든 어디든 음악에 반발 정도 걸치고 있던 뮤지션들이 많았잖아요. 그 사람들 지금 어떻게 됐나요. 시간의 흐름에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젊을 때는 고개도 숙일 수 있어요. 그런데 늙으면 한 번이라도 고개를 숙이는 상황에 놓이면 안 되거든. 그렇다고 거룩하거나 할 필요도 없고, 내가 지나갈 때 아무도 이상한 소리 안 하고 지나가게 할 정도로 살면 성공하는 겁니다. 운 좋으면 막판에 아티스트라는 말도 들을 수 있겠죠.”
 
  ― 그래서 박완규씨가 팀을 탈퇴할 때 ‘몸은 다쳐도 되는데 솔(soul·영혼)은 안 다치게 해라’고 당부한 건가요.
 
  “돈 벌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 친구를 ‘뺑뺑이’ 돌릴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솔만은 지키라고 한 거죠. 몸이 건강하고 영혼이 없는 것도 위험합니다.”
 
 
  “자기 표절한 적 없어”
 
결성 37년을 맞은 부활(왼쪽부터 채제민, 최우제, 김태원, 박완규). 사진=부활엔터테인먼트 제공
  ― 음악에 미친 사람을 어떻게 알아보나요.
 
  “표현할 길이 없는데, 육감이라 할까요. 말하는 걸 10분만 들어보면 딱 알아요. 가끔은 알면서도 속으려고 사건 속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런 고뇌가 저한테 곡을 만들어줬으니까요.”
 
  ― 이번 유희열씨 표절 논란 발언 후 ‘김태원은 자기 표절하지 않냐’는 반박도 있었는데요.
 
  “저도 궁금해요. 비슷하다는 곡을 저에게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전 제 음악과 비슷한 음악을 만든 적이 없거든요. ‘비밀’과 ‘5월의 눈사람’이 같다는 거예요. 들어봤죠. ‘전혀 다른데 왜 자기 표절이라는 거지?’ 진짜 같다고 생각해 물어보는 건지, 제가 제 단점을 얘기하길 바라는 건지 그걸 모르겠어요.”
 
  ― 음악의 색이나, 언어의 톤이 일관된 걸 자기 표절이라 표현하는 건 아닐까요. 예를 들면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어떤 걸 들어도 라흐마니노프잖아요. 바흐도 그렇고요.
 
  “제가 새로운 곡을 쓰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데… 그런 얘기만 하지 말고 자료를 정확하게 누가 제시했으면 좋겠어요. 표절을 제가 진짜 했다면 남의 거 베끼는 것보단 자기 표절이 그나마 나은 거 아닙니까.”
 
  ― 유희열씨의 노래 중 스무 곡 넘는 곡에 표절 의혹이 제기됐더군요. 유희열씨 측은 인정하지 않고요.
 
  “유희열씨는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영향을 받아서 작곡하는 습관이 있다면 버리고, 정도를 걸어야겠죠. 저도 다시 시작했잖아요. ‘재기(再起)의 아이콘’ 아닙니까. 대마초도 끊고 술도 끊었잖아요.”
 
 
  케이팝에 뿌리가 없다
 
  ― 레퍼런스(reference) 작곡이라고 하더군요. 특정 음악을 모티브로 곡을 만드는 방식인데 케이팝에선 일반적인 방식이라고요.
 
  “이상한 단어가 많이 생겼더군요. 케이팝엔 뿌리와 알맹이가 정확히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아이돌들은 광대로 끝나요. 돈 버는 사람은 따로 있고요. 사람은 다 나이가 듭니다. 음악을 하고 싶다면 결국 싱어송라이터가 돼야 해요. 땅 같은 데 관심이 있으면 아예 거기로 가시면 되고요.”
 
  ― 그런 고민 탓일까요. BTS는 그룹 활동을 일단 중단했어요.
 
  “방탄소년단은 엄청난 축복을 받았지요. 저는 이런 걱정을 해요. 만약 BTS에게 누가 ‘한국에는 어떤 음악의 전통이 있나, 누가 있나’ 질문을 던졌을 때 말문이 막히면 안 되거든요. 박혁거세처럼 알에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 한국 가요의 알맹이는 어디에 있는데요.
 
  “뿌리에 있죠. 뿌리를 부정하면, 뿌리 없이 나무가 자라는 형상이잖아요. 꽃이 화려하게 피고 나무가 커질수록 무거워질 텐데, 그러면 언젠가 쓰러집니다. 안 쓰러지려면 뿌리가 있어야 해요. 뿌리는 그 친구들의 음악적 선배들입니다. 일제 시대까지 거슬러 가야 해요. 그 역사를 알아야 해요.”
 
 
  아이돌들에게 멘토 필요
 
  ― 일제 시대까지 가나요.
 
  “흑인들이 노예생활하며 목화를 따면서 솔 음악이 나온 거 아닙니까. 가장 슬픈 노래예요. 어떻게 보면 가스펠도 솔 스타일이에요. 그런데 그런 한(恨)으로 보면, 우리나라가 안 지거든. 강대국 중간에 끼여서 침범당하고, 유린당하고 전쟁터였잖아요. 엄청난 한이 있는데 이런 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이런 얘기가 그들에게 줄줄 나올 수 있어야 되거든요.”
 
  ― BTS뿐 아니라 케이팝 스타들 사이에 뿌리를 찾아보자는 움직임이 있어 뵈진 않네요.
 
  “케이팝 하는 친구들도 정말 깨어 있다면 스스로 멘토를 찾아 나서야 해요. ‘누구의 말도 안 들어도 그 사람 말은 내가 들어야겠다’ 이런 사람을 찾아야 해요. 많은 부작용이 없어질 수 있어요.”
 
  인터뷰 시간이 훌쩍 흘렀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기도, 아직 못 들은 얘기가 많은 것 같기도 하다. 김태원도, 그와 함께 온 매니저도 어쩐지 시간을 재촉하지 않는다. 진짜 고수(高手)들은 바쁘지 않다. 37년간 사랑을 노래한 뮤지션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질 때였다.
 
  ― 사랑은 뭡니까.
 
  “모든 이야기의 결론 아닌가요. 각자 다른 길로 가지만 사랑이라는 곳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 모든 일의 열쇠. 어떤 노래도 사랑으로 풀어갈 수 있어요.”
 
  올겨울쯤 만날 부활 14집의 결론도 사랑일까.
 
  “은유,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이 제가 누구인지 눈치를 채면 점점 곡을 쓰기 힘들어져요. ‘저 사람의 정체를 모르겠다’고 할 때는 끝까지 저를 바라봐주시겠지요.”
 
  알듯 모를 듯한 말을 남기고 그는 은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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