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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 기념 특별 인터뷰

조계종 大宗師 月棲 스님

“마음만 잘 다스리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글 : 서철인  월간조선 기자  ironin@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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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 직후 지리산 공비 토벌에 투입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이 出家 계기
⊙ 조계종 중앙 종단 요직 두루 거쳐 2008년 조계종 최고의 품계 대종사(大宗師)에 올라
⊙ “야, 이놈아! 나도 사람인데 어찌 그(여자) 생각이 없겠느냐. 참고 견디는 것이지”(금오 스님)
⊙ “순간순간 깨달음에 이르지만 그 깨달음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쉬지 않고
    수행정진 중”

月棲 스님
⊙ 속랍 77세, 법랍 57세.
⊙ 1956년 화엄사에서 금오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 법주사 강원(講院) 대교과 졸업. 동국대 행정대학원 수료.
⊙ 경주 분황사, 불국사, 조계사 주지 역임, 제4·5·6·10·12대 중앙종회의원, 제8대 중앙종회의장,
    호계원장 역임.
⊙ 現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금오선수행연구소 소장.
⊙ 저서: 《월서선사 원경록(月棲禪師圓鏡錄)》 《행복하려면 놓아라》 《거울 속 성불의 길》 등.
  서울 삼각산 기슭에 깃들인 봉국사(奉國寺)는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가 창건한 고찰(古刹)이다. 조용하고 아담한 이 ‘도심 속 산사’에 어느 날 젊은 여신도가 찾아와 주지인 월서(月棲)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절은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스님이 웃으면서 “목욕탕”이라고 답했다. 여신도가 “우리 스님은 농담도 잘하시네요”라며 웃어넘기려 하자 스님은 정색을 하고 “자네, 왜 절에 오는가?”라고 되물었다. 여신도는 “부처님 만나러 오는데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너의 집에도 부처가 있는데 왜 여기를 와. 아직 자네는 때를 씻지 못했군.”
 
  여신도가 “우리 집에 부처가 있다니요?”라며 반문하자 스님은 “집에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부처이니 잘 모시라”고 말했다. 그러곤 “육신에 묻은 때를 벗기는 곳이 목욕탕이라면 마음의 때를 벗기는 곳이 절”이라고 설명했다.
 
  월서 스님의 법문집 《행복하려면 놓아라》에 나오는 일화다. 초파일을 앞두고 봉국사를 찾았다. 일화 속의 여신도처럼 스님에게 “부처는 어디에 계시냐”고 여쭈니 빙그레 웃으며 “부처는 마음속에 있다”며 “마음만 잘 다스리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답한다. 노승(老僧)의 얼굴에 퍼지는 미소가 만개한 벚꽃만큼이나 해사하다.
 
 
  理判과 事判을 오간 승려
 
  월서 스님은 경허(鏡虛)·만공(滿空)·보월(普月) 선사의 법맥(法脈)을 이은 금오(金烏) 선사의 제자다. 탄성(呑星), 월주(月珠), 월산(月山), 월천(月泉), 월탄(月誕) 등 50명에 이르는 금오 선사의 제자들은 돌림자가 주로 ‘월’자여서 ‘월자 문중’으로 통한다.
 
  금오 선사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전개된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섰다. 월서 스님은 젊은 시절 사형사제(師兄師弟)들과 함께 스승을 도와 종단 내 주요 사찰을 점거한 대처승을 몰아내고 계율을 바로 세우는 일을 했다. 체격이 우람한 그는 ‘호법신장’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를 계기로 종단의 요직인 총무원 총무부장·재무부장, 중앙종회의장, 호법원장 등을 두루 거쳐 2008년 조계종 최고의 품계인 대종사(大宗師)에 올랐다. 2005년에는 제32대 총무원장 선출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나 스스로 사퇴했다. 이후 스승인 금오 선사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과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에 교과서를 지원하고 학교를 짓는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다.
 
  스님에게 “종단의 요직을 두루 거친 만큼 총무원장 자리가 욕심났을 것 같다”고 하자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라며 이렇게 답했다.
 
  “당시 지관(智冠) 스님께서 나오지 않으셨다면 끝까지 욕심을 비우지 못한 채 경쟁했을 것입니다. 속랍은 물론 법랍으로도 저보다 윗분인 지관 스님과 경쟁할 수는 없는 일이라 판단해 물러섰는데, 결과적으로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퇴 후 본분인 수행의 길을 갈 수 있었으니까요. 돌이켜 보면 저는 이판승(理判僧·수행에만 전념하는 승려)과 사판승(事判僧·사찰의 행정이나 살림을 맡는 승려)을 오가며 살아왔습니다. 성불하기 위해 나름 열심히 노력했지만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이름 없는 수행승으로 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네요.”
 
  스님은 자신을 애써 포장하려 하지 않았다. 에둘러 말하는 법도 없었다. 한마디로 솔직담백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6·25 등 굵직굵직한 현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해 온 스님의 인생은 한 편의 대하드라마 같았다.
 
 
  금오 스님 은사로 출가
 
1984년 녹원 스님 총무원장(앞줄 맨 오른쪽) 임명장 수여식 후 성철 종정 스님(앞줄 가운데)과 기념 촬영. 당시 월서 스님(뒷줄 왼쪽에서 두번째)은 중앙종회 의장이었다.
  월서 스님은 1936년 경남 함양의 독실한 불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정서적으로 예민한 10대 중반 동족의 비극인 6·25가 터졌다. 전쟁 직후 함양 등 지리산 부근의 12개 마을에는 밤만 되면 공비들이 출몰해 약탈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마을 주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스님이 17세 되던 해 겨울, 군경 합동의 대대적인 공비 토벌 작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고향을 지킬 전투경찰 30명을 선발해 작전에 투입했는데, 월서 스님이 그중 한 명이었다.
 
  “당시 지원자가 5000명이었는데 용케 뽑혔어요. 덩치가 크고 눈빛이 살아있다고 여겼나 봐요. 8사단 작전사령부가 있던 노장대(함양 독바위) 부근에 배치되었는데, 공비들과의 접전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투입된 지 3일 만에 함께 입대한 동기 두 명이 죽고 없더군요.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 하는 전쟁의 한복판에 어린 제가 있었지요.”
 
  어느 날 작전사령부의 지시로 공비들이 드나드는 길목을 지키던 중 공비들의 습격을 받았다. 전투경찰 5명 중 둘은 죽고, 하나는 관통상을 입었으며, 살아남은 스님과 동기 하나는 공비들의 포로가 되었다.
 
  “공비들은 작전사령부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우리를 새끼줄로 묶은 후 죽지 않을 만큼 때렸어요. 그러곤 자신들의 진지로 끌고 가는데, 공비들의 본부로 가려면 8사단 앞을 지나야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저는 8사단 앞에 이르렀을 때 공비들을 어깨로 치고 무조건 언덕 아래로 몸을 굴렸어요. 총소리가 나면 위치가 발각돼 자신들도 몰살당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공비들은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온몸이 날카로운 바위와 그루터기에 찢겨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나무관세음보살’을 읊조리는데 목에 어머니가 호신용으로 걸어 준 옴마니반메홈 목걸이가 보였다. 그는 ‘부처님이 나를 살려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얼마 후 공비들은 진압되었고, 그는 군복을 벗었다. 전쟁의 참혹함에서 헤어났지만 선혈이 낭자했던 살생의 기억이 그를 괴롭혔다. 참다못해 자신을 살려준 부처를 찾아 고향 근처의 암자를 방문했다. 1956년 가을이었고, 실상사 약수암이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금오 스님을 알현하게 되었다. 고통을 한 짐 짊어지고 온 그에게 금오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우주의 섭리에서 보면 나고 죽는 것 또한 풀잎 위의 이슬처럼 허망한 것이네. 망상의 번뇌에서 벗어나 대자유를 얻고 싶으면 출가(出家)를 생각해 보게.”
 
 
  나를 비우는 탁발 수행
 
  얼마 후 그는 행자 신분으로 금오 스님을 따라 화엄사로 갔다. 원담 스님, 월주 스님, 탄성 스님이 동행했다. 금오 스님은 당시 대처승이 있던 화엄사를 정화했다. 월서 스님은 이곳 화엄사에서 사제(師弟)인 월령, 월초와 함께 사미계를 받았다. 그는 “요즘 들어 큰스님 생각이 더 간절하다”며 금오 스님 시봉(侍奉) 시절에 겪은 일화 몇 토막을 들려주었다.
 
  “우리 큰스님은 제자들을 엄하고 혹독하게 가르쳤어요. 새벽 3시 예불로 시작해 밤 9시까지 풀 뽑아라, 장작 패라, 한시도 몸을 쉬게 하지 않았어요. 잘못한 일이 있을 때면 몽둥이찜질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요새 젊은이들 같으면 하루도 참지 못하고 모두 도망쳐 버렸을 거예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 당시 스님이 그렇듯 호되게 하지 않았으면 방탕하게 살았을 겁니다. 혈기왕성한 때라 유혹이 많았거든요.”
 
  금오 스님은 제자들에게 인간으로서 가장 밑바닥 일까지 경험하게 했다. 시골 구석구석을 돌며 탁발(托鉢) 수행을 한 것. 탁발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나를 온전히 비우는 것으로 어느 정도 수행을 한 자가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좌들에게 탁발은 거지 노릇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처음에는 ‘내가 거렁뱅이 짓을 하려고 출가했던가’ 싶어 눈물이 핑 돌더라”고 했다.
 
  “우리가 탁발 수행을 하고 다닐 무렵은 6·25전쟁 직후라 먹을 것이 귀했어요. 게다가 상이군인이나 고아들도 많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밥그릇 지키기 위해 수시로 싸움을 걸어오는 이들과 부딪쳐야 했어요. 또한 일하기 싫으니까 거렁뱅이 짓을 하고 다닌다며 마을 청년들로부터 학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금오 스님의 탁발 수행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었다. 밥은 주는 대로 먹고 남과 절대 시비하지 않는다, 어느 집이든 마당 이상의 공간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집 안에 사람이 있건 없건 반야심경을 끝까지 읊는다 등이었다. 월서 스님의 이야기다.
 
  “한번은 어느 집에 갔더니 젊은 여인이 자꾸 방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더군요. 보리쌀이라도 줄까 싶어 흔들리는 순간 ‘들어가면 안 된다’는 스님의 말씀이 죽비처럼 날아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려서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여인은 딴 맘을 품고 있었던 것 같아요.”
 
  스님은 “체득만 한다면 탁발 이상의 수행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탁발은 1972년 유신정권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탁발을 위장한 사건이 잦아지자 법으로 금지한 까닭이다.
 
 
  20대에 욕망이 없다면 거짓
 
앉으나 서나 참선수행할 것을 강조한 금오 선사.
  혈기왕성한 20대 중반의 나이에 여인에 대한 욕망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월서 스님은 여자 문제로 승려 생활에 최대의 위기를 맞은 적도 있다. 금오 스님의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었다고 한다.
 
  “제가 동화사 말사인 보현사 주지로 있을 때입니다. 어느 날 절에 가끔 찾아오는 여신도가 제가 외출한 사이 제 방에 들어왔다가 잠이 들었던 모양이에요. 돌아와 보니 너무 깊이 잠들어 있는 데다 벌써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 있더군요. 별수 없이 방을 내주고 저는 옆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큰스님께서 노발대발하시며 저를 부르시더군요.”
 
  금오 스님은 아침 일찍 월서 스님의 방에서 젊은 여인이 나오는 걸 보고 큰일이 난 듯 절집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금오 스님은 제자를 불러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큰 벌을 내렸다. 모든 수좌 앞에서 죄를 고하고 가풍에 따라 벌을 받는 대중공사(大衆公事)라는 것이었다.
 
  당시 금오 문중의 가풍에 죄를 지은 사람은 ‘지리산 참회’와 ‘금강산 참회’라는 벌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지리산 참회는 3000배를 하는 가벼운 벌이었고, 금강산 참회는 모든 수좌가 몽둥이로 엉덩이를 내려치는 무거운 벌이었다. 그 무렵 동화사에는 100명이 넘는 수좌가 있어서 이 벌을 받을 경우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이 벌을 견디지 못해 승복을 벗고 하산한 수좌도 있었다고 한다.
 
  “큰스님께 오해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큰스님께서는 ‘애초부터 승려의 마음가짐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라며 금강산 참회 벌을 받게 하셨죠. 당시 볼기를 얼마나 맞았는지 1주일 동안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은 기억이 납니다.”
 
  금강산 참회로도 모자라 한 달 동안 대중공양주를 하는 벌까지 받았다. 이를 지켜본 수좌들은 “월서, 너 정말 대단하다”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월서 스님은 “혹독했던 이 경험 덕분에 번뇌와 망상이 끊이지 않던 20대를 참고 견딜 수 있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20대에는 여자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어느 날은 우리 큰스님께 ‘스님은 그 생각이 없으십니까’라고 여쭤 본 적이 있어요. 큰스님께서는 ‘야, 이놈아! 나도 사람인데 어찌 그 생각이 없겠느냐. 참고 견디는 것이지’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간혹 자신은 번뇌와 망상을 모두 초월했다고 말하는 승려가 있는데, 그 경우 위선이고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번뇌는 입적한 아라안과(阿羅漢果·부처가 되기 이전 가장 높은 단계에 오른 수행자) 스님을 화장한 재 속에도 남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번뇌를 조금씩 비워 가는 것이 수행이고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性澈 큰스님과 보낸 한 철
 
  월서 스님은 종단의 요직을 거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참선수행을 했다.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어도 새벽 3시면 일어나 예불을 드렸다. 스님은 “소임을 보면서도 생각의 꽁무니는 항상 선방에 있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소임을 하면서도 항상 근본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우리 큰스님의 화두(話頭)를 놓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큰스님은 늘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죠. ‘중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집착과 애욕을 끊어야만 한다. 이것은 마치 끊어지지 않는 쇠사슬과 같아 한 번 매이면 끊어 낼 수가 없다. 바른 수행을 하면 설령 애욕과 집착이 찾아오더라도 그것은 썩은 새끼줄 같아 쉽게 끊어 낼 수가 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참선수행만을 해야 한다’라고요.”
 
  월서 스님은 종단의 한 소임이 끝나면 걸망을 둘러메고 선방을 찾아들곤 했다. 덕분에 효봉(曉峰), 동산(東山), 서암(西庵), 청담(靑潭) 등 근현대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을 빠짐없이 친견했다. 1990년 중앙종회의장을 지낸 뒤에는 50이 넘은 나이에도 해인사 성철(性澈) 스님 밑에서 혹독한 하안거(夏安居)로 한 철을 보냈다. 원로 대접을 받으며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위치에서 해인사 선원을 찾아가 방부를 들인 그의 행동을 보고 당시 불교계 안팎에서 화제가 되었다. 그는 “당대 큰스님 중 성철 스님만 친견하지 못해 찾아뵌 것”이라며 성철 스님과의 첫 대면 장면을 소개했다.
 
  “해인사 선원에 갔더니 시자를 데리고 산책 중이던 성철 스님께서 대뜸 ‘네가 여긴 왜 왔느냐’고 물으시더군요. 제가 ‘한 철 나러 왔습니다’라고 답하자 큰스님께서는 ‘너, 불국사 주지도 했지? 여기 노잣돈 있으니 썩 가라’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휴지를 꺼내 주시더군요. 종단의 고위 간부였던 승려가 초심으로 돌아가 참선수행을 한다 하니 내심 기특해하며 당신 방식의 애정을 그렇게 드러내신 겁니다. 넓고 따스한 그 마음을 알기에 ‘에이 스님, 그게 어디 돈이에요. 휴지지’라면서 어리광을 부렸죠.”
 
  성철 스님에게 화두를 받으려면 3000배를 하는 것이 당시 통례였다. 월서 스님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찌는 듯한 무더위에도 해인사 장경각에서 하루에 3000배씩 절을 했다. 그리고 성철 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았다.
 
  월서 스님은 그해 여름 석 달 동안을 해인사 선원에서 보냈다. 당시 선방에는 70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법정 스님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조계종 종정(宗正)이자 해인사 방장(方丈)이던 성철 스님은 2년여 후 속랍 82세의 일기로 열반(涅槃)에 들었다. 월서 스님은 “그 여름 한 철이 아니었으면 성철 큰스님을 영영 못 뵈었을 것”이라며 “성철 큰스님은 검소하고 깨끗하면서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는 분이었다”고 말했다.
 
 
  계율은 무조건 지키고 따라야
 
스님은 번뇌를 조금씩 비워 가는 것이 수행이고 깨달음이라고 말했다.
  종단 직할 사찰인 봉국사 주지로 온 지 어느덧 15년이 다 되어 간다. 후학들을 챙겨야 할 나이인 스님은 “출가 인구가 갈수록 줄고 있어 걱정”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20~30년 전만 해도 한 해 500명씩 수계를 받았는데, 어느 순간 250명으로 줄어들더니 요즘에는 수계 받는 이가 100명이 채 되지 않아요. 종단에서는 과거 50세였던 출가 제한 연령을 40세 이하로 낮췄는데 결과적으로 우리 종단만 손해를 본 것 같습니다. 결혼 후 세속에 살다가 가산을 정리해 출가하고자 하는 이들이 꽤 되는데, 이들을 조계종에서는 받아 주지 않으니까 다른 종파로 갔지요. 그 때문에 지금은 출가 연령 제한을 없애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부처님 시대에도 출가 연령 제한이 없었거든요.”
 
  출가 인구는 줄었지만 조계종단은 1970년대 경제발전과 함께 양적으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 월서 스님은 “과거 큰스님들의 염원은 종단 내에 교육기관과 병원, 언론사 등을 두는 것이었다”며 “현재 동국대부속병원과 승가대, 불교방송 등이 자리를 잘 잡아 큰스님들의 염원은 이미 모두 이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출가 인구가 줄고 있는 현상에 대해 “조계종의 계율이 너무 엄해서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것 아니냐”고 하자 스님은 “계율은 근본적인 것이라서 변하거나 약화되면 승가가 무너진다”며 이렇게 말했다.
 
  “계율은 승려건 신도건 지키고 따라야 하는 불법(佛法)입니다. 계율을 등한시하고 어기면 돈과 여자를 탐하는 등 세속으로 흘러가게 되죠. 계율은 하나의 질서이자 나와의 약속입니다. 수행자가 계율을 어기게 되면 평생 씻지 못할 과오와 죄업에 시달리게 돼요. 한순간 잘못 생각해 계율을 파괴할 경우 평생 마음의 감옥에 갇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스님은 “출가 후 60년 동안 계율을 지키기 위해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살아왔다”며 “어렵고 힘들 때마다 좋아하는 게송을 읊조렸다”고 말했다.
 
  <십년불하축융봉(十年不下祝融峰)/관색관공즉색공(觀色觀空卽色空)/여하일적조계수(如何一適曺溪水)/긍수홍련일엽중(肯隨紅蓮一葉中): 십년 동안 축융산 아래 내려간 일 없어/색을 공으로 관해서 색이 자주 공해졌네./어찌 조계의 한 방울 물로/홍련 한 잎을 적실 것인가.>
 
  중국 당나라 때 태전 선사가 지은 이 게송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렇다.
 
  <당나라 한 고을에 부임한 한퇴지(韓退支)는 대단한 문장가이며 매우 유식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고을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는 태전 선사를 시기해 불교를 없애려 했다. 그는 태전 선사 수행처에 홍련이라는 관기(官妓)를 보내 3개월 동안 시중을 들게 하는 흉책(凶策)을 꾸몄다. 여인의 유혹을 통해 태전 선사를 파계시킬 작정이었다.
 
  뛰어난 미모의 홍련은 갖은 몸짓과 교태로 태전 선사를 유혹했지만 오직 수행으로만 일관하는 태전 선사는 요지부동이었다. 3개월 안에 유혹하지 못하면 한퇴지에게 처형당할 운명인 홍련은 시한이 다 되어 가자 두려운 나머지 목 놓아 울었다. 한밤중 기이한 여인의 울음소리를 들은 태전 선사는 홍련에게 그 연유를 들은 후 먹을 갈아 그녀의 치마폭에 편지를 썼다. 그 편지가 바로 이 게송이다.
 
  홍련은 산을 내려와 한퇴지에게 자신의 치맛자락을 보여주었다. 편지를 읽은 한퇴지는 스스로 뉘우쳐 태전 선사의 가르침을 받아 불교에 귀의했다.>
 
  태전 선사 이야기 속에는 ‘불교란 사람을 최고의 인격체로 만들어 주는 종교이며 하나의 위대한 법’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스님은 “계율은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몸에 배도록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사에 감사하며 사십시오”
 
  월서 스님은 팔순이 멀지 않은 나이에도 여전히 새벽 3시에 예불을 드리는 것으로 하루의 수행을 시작한다. 그는 “순간순간 깨달음에 이르지만 그 깨달음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쉬지 않고 수행정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 스님에게 “초파일을 맞아 중생들에게 한 말씀 해달라”고 요청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항상 공덕을 베풀며 사십시오. 또한 은혜를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부처님은 물론 부모와 형제와 사회와 국가에 감사하며 사십시오. 그렇게 감사할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이 긍정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때일수록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품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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