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가 후예들, 살인혐의자·사업가·정치인·모델·배우 등 다양한 삶 영위
⊙ 이란의 레자 팔레비, 반정부 세력의 구심점 역할 자임하지만 한계
⊙ 민간인 살해·마약·정부와의 소송으로 말썽 많은 이탈리아 사보이아 왕가의 후예들
⊙ 루마니아·그리스 왕가 후손들, 정치와는 선 그어
⊙ 유럽의회 의원으로 유럽 통합에 기여한 오스트리아의 오토 폰 합스부르크
⊙ 이란의 레자 팔레비, 반정부 세력의 구심점 역할 자임하지만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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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자 팔레비(가운데)가 어린 시절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 국왕, 파라 왕비와 함께.
이란 ‘백색혁명’과 ‘이슬람 혁명’
레자 팔레비는 지난 1월 16일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란의 유혈 사태를 비난했다. 사진=AP/뉴시스팔레비 왕조는 카자르 왕조(1794~ 1925년)의 군인이었던 레자 팔레비(레자 샤 1세·1877~1944년, 재위 1925~41년)가 개창했다. 레자 샤 1세가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과 소련이 이란 국토를 분할 점령한 상황에서 열강(列强)의 압력으로 퇴위(退位)한 후, 그의 아들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가 즉위했다.
팔레비 2세는 1951년 석유 국유화(國有化)를 추진한 모하메드 모사데크 총리와 갈등을 빚다가 이탈리아 로마로 망명했으나, 미국과 영국이 사주한 군부(軍部) 쿠데타 덕분에 권좌에 복귀했다. 이후 그는 석유 수입을 기반으로 ‘백색혁명’이라고 불린 급격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비밀경찰 사바크에 의한 인권 유린이 자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슬람 성직자들과 바자르 상인들의 반발이 거세졌고, 이는 1979년 일련의 격렬한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다. 팔레비 2세는 1979년 퇴위했고, 이듬해 이집트 카이로에서 사망했다.
왕세자 레자 팔레비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당시 미국에서 전투기 조종사 훈련을 받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1980년 그는 카이로에서 상징적인 즉위식을 열고 자신을 ‘레자 샤 2세’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후 레자 팔레비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무국적자 신세로 전락한 그와 가족들은 왕정 지지자들의 후원을 받았지만, 후원자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의 여동생과 남동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레자 팔레비는 이란계 미국인 변호사 야스민과의 사이에 세 딸을 두고 있다. 레자 팔레비는 2013년 ‘자유선거를 위한 이란국민위원회(INC)’를 결성하고 의장을 맡았다. 그는 INC를 이란 반정부 세력의 구심점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으나, 내분 및 이란 국내에 대한 영향력의 한계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레자 팔레비는 지난 수년 동안 이란 내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고 이란이 미국·이스라엘과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자 목소리를 높여 왔다. 작년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현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붕괴할 경우 자신은 과도정부를 이끄는 데 도움을 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임시 행정부를 위한 100일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이에 앞서 레자 팔레비는 2023년 이스라엘을 방문, 홀로코스트 추모 행사에 참석한 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미국·이스라엘에 의지하는 듯한 이러한 행보는 이란 국내외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레자 팔레비는 현재 ‘왕위 계승자’가 아닌 ‘국민 화해를 위한 상징적 인물’이라고 자신을 낮추고 있다. 그는 “이란이 자유로운 선거, 법치주의, 여성 평등권 등을 향해 나아가는 데 기여하고 싶다”면서 향후 이란 정치 체제는 국민투표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전제정(專制政)을 펼치다가 혁명으로 붕괴된 왕조의 후예인 데다가, 47년간 고국(故國)과 연계가 끊어졌던 그의 장래는 여전히 미지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伊 사보이아 왕가의 후예
사보이아 왕가의 마지막 3대. 왼쪽부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움베르토 2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사진=퍼블릭 도메인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축출된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왕가. 천 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사보이아 왕가(1003~1946년)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1820~1878년, 재위 1848 ~78년) 시절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위업(偉業)을 달성했다. 하지만 손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1869~1947년, 재위 1900~47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기이던 1922년 파시스트당의 쿠데타(‘로마 진군’)에 굴복,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년)를 총리로 임명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를 전쟁으로 몰고갔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1946년 퇴위하고 아들 움베르토 2세(1904~1983년)가 그해 5월 즉위했으나, 국민투표로 왕정이 폐지되면서 한 달 만에 폐위됐다. 그 바람에 움베르토 2세는 ‘5월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는 사보이아 왕가를 추방하면서 헌법에 ‘남계(男系) 후손 전원의 입국 및 체류 금지, 왕실 자산 국유화’ 등의 조항을 두었다. 이에 대해 개인의 기본권까지 박탈한 ‘공화정의 과잉’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2002년 이탈리아 의회가 관련 헌법 조항을 수정·폐지하면서 56년 만에 사보이아 왕가 남계 후손의 귀국이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움베르토 2세의 아들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1937~2024년)가 귀국했으나, ‘파시스트 정권을 허용한 왕가의 후예’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1978년 자신의 요트 근처에서 잠을 자고 있던 독일인 청년을 자신의 고무 보트를 훔쳤다며 총으로 쏴 죽인 혐의로 법정에 서는가 하면, 마약 중독 의혹, 성매매 알선 논란, 무솔리니 옹호 발언 등으로 왕가의 평판을 더욱 추락시켰다. 귀국 후 왕실 복원을 주장하면서 국유화된 가보(家寶)들을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하기도 했다.
현재 남계 후손의 수장(首長)인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53)는 헌법 조항 수정 후 귀국, 여러 토크쇼와 예능에 출연하며 미디어 활동을 활발히 해 왔다. 그도 이탈리아 정부와 중앙은행을 상대로 왕실 보석 반환 소송을 진행했지만 2025년 패소했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유럽인권재판소(ECHR)까지 법적 대응을 이어 가겠다고 밝혔다.
존경받는 합스부르크 왕가 후예들
오토 폰 합스부르크. 사진=EU1919년 탄생한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왕가의 복위를 막기 위해 ‘합스부르크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후손들은 정치 권리 박탈, 왕가 재산 몰수, 가문 전체를 대상으로 한 입국 금지 등의 제재를 받았다.
1996년 오스트리아가 EU에 가입함과 동시에 국경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입국 금지가 사실상 해제되었다. 이어 2011년 6월에는 선거권 제한 조항도 폐지되면서 왕가 후손들의 정치적 권리가 회복되었다. 카를 1세의 아들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1912~2011년)는 오랜 망명 생활 끝에 독일에 정착, 기독교사회당 소속으로 20년간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약했다. 냉전 해체 후에는 동유럽 국가들의 EU 가입에 앞장섰다. 2011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은 “역동적인 삶을 살았던 그는 유럽 공동체에 중요한 원동력이 된 위대한 인물”이라고 추도했다.
오토의 뒤를 이은 카를 폰 합스부르크(65)는 문화유산 보호 활동을 하는 블루실드 국제위원회 회장, 유럽의회 의원 등을 지냈으며 여러 미디어 매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의 아들인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폰 합스부르크(28)는 레이싱 드라이버로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근근이 명예 지킨 루마니아의 미하이 1세
전 루마니아 국왕 미하이 1세.루마니아의 마지막 국왕인 미하이 1세(1921~2017년, 재위 1927~30년·1940~47년)는 독일을 통일한 호엔촐레른 왕가의 방계(傍系)인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왕가 출신이다. 그는 영국·스페인·그리스 왕가와 혈연관계에 있는데,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는 그의 8촌, 부군 필립 공(그리스 왕가 출신)은 5촌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하이 1세는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안토네스쿠 장군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황(戰況)이 불리해지자 미하이 1세는 쿠데타를 일으켜 안토네스쿠 정권을 타도하고 연합국 편으로 말을 갈아탔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친소(親蘇) 공산 정권의 수립을 막지는 못했다. 미하이 1세는 1947년 퇴위했고 이듬해 국외 추방되었다. 그는 이후 스위스에 정착해 항공기 조종사, 농업 경영 등 다양한 직업을 영위하면서 가족과 함께 검소한 삶을 살았다.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이 타도된 후 루마니아 정부는 1992년 미하이 1세의 귀국을 허용했다. 그가 귀국했을 때는 부쿠레슈티에서 10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그를 보러 나왔다고 한다. 이를 보고 놀란 이온 일리에스쿠 정권은 그의 귀국을 금지했다. 그는 1997년 다시 귀국을 허용받았고, 2017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현재는 미하이 1세의 장녀 마르가레타(76)가 ‘루마니아 왕관의 수호자’라는 칭호 아래 다양한 자선 활동과 함께 왕가의 명예를 지켜 가고 있다.
선거로 총리 오른 불가리아의 ‘소년왕’
시메온 2세(왼쪽)는 2003년 총리로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만났다. 사진=퍼블릭 도메인불가리아의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 역시 루마니아 왕가와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이 왕가 역시 독일 및 영국 왕실과 연결된다.
2차대전 당시 추축국(樞軸國)에 가담했던 불가리아는 패전과 함께 소련군에게 점령당했다. 당시 국왕은 1943년 나치와 손잡고 독재 정치를 펼치던 아버지 보리스 3세(1894~1943년, 재위 1918~43년)가 급사한 후 왕위를 물려받은 시메온 2세(1937년~)였다. 9살의 어린 국왕은 1946년 국민투표로 왕정이 폐지된 후 외국으로 추방됐다. 이집트를 거쳐 스페인에 정착한 시메온 2세는 이후 사업가로 성공했다.
1990년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1996년 왕가에 대한 귀국 금지가 해제되자 시메온 2세는 불가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시메온 2세 국민운동’을 창당, 2001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그는 국회의원은 아니었지만 의회의 승인을 받아 ‘원외(院外) 인사’ 신분으로 총리가 되어 2005년까지 재임했다. 폐위된 국왕이 민주 선거를 통해 행정부 수반으로 복귀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다.
다양한 삶을 사는 그리스 왕가의 후예들
그리스 글뤽스부르크 왕가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대원칙을 어기고 정치에 개입하다가 몰락을 자초했다.
덴마크에서 비롯된 이 왕가의 국왕들은 나치의 침략과 전후(戰後) 공산 세력의 도전을 이겨 냈으나, 국왕이 국민이 선출한 총리와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혼란을 야기했다. 마지막 국왕인 콘스탄티노스 2세(1940~2023년, 재위 1964~73년)는 1965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파판드레우 총리를 일방적으로 해임해 국민적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혼란의 와중에 1967년 4월 ‘대령들의 정변’이라고 불리는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자 콘스탄티노스 2세는 쿠데타를 추인했다. 같은 해 말 그는 역(逆)쿠데타를 배후 조종했다가 실패한 후 나라를 떠났다. 군사 정권은 1973년 공화정을 선포했고, 군사 정권이 무너진 이듬해 국민투표에서 왕정 폐지가 확정됐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2013년 귀국해 2023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스 왕가의 후예들은 정치적 야심을 포기하고,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평온한 삶을 선택했다. 성공한 투자 컨설턴트인 파블로스 데 그레스(58) 왕세자는 “왕정복고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라고 선을 긋고 있다. 다른 후손들은 사진작가, 배우, 금융인, 모델 등으로 활동하는 한편, 사교계 명사(名士)로서 삶을 즐기면서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