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슬람 공화국, ‘신앙의 독점적 해석자’인 국가가 시민의 삶 전체 통제… 왕정 능가하는 폭압
⊙ 혁명 엘리트, 제재와 반미를 먹고 자라는 자신들만의 새로운 궁정 구축
⊙ 헌법과 선거는 ‘권력을 정당화하는 고도의 알리바이’로 전락
⊙ 국민의 생명·권리 보호 못 하고, 고대로부터의 ‘이란적 정체성’과도 멀어진 체제에 대한 사망 선고
⊙ 시위대의 팔레비 호명, 왕정복고의 기호가 아니라, 이슬람 공화국의 혁명 서사에 대한 부정
김덕일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서울대 국제대학원 국제학 석사, 튀르키예 보아지치대 정치외교학 박사 / 現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중동·이슬람센터 연구위원 / 저서 《거꾸로 가는 새로운 튀르키예》 《우리가 몰랐던 혁명의 세계사》(역서)
⊙ 혁명 엘리트, 제재와 반미를 먹고 자라는 자신들만의 새로운 궁정 구축
⊙ 헌법과 선거는 ‘권력을 정당화하는 고도의 알리바이’로 전락
⊙ 국민의 생명·권리 보호 못 하고, 고대로부터의 ‘이란적 정체성’과도 멀어진 체제에 대한 사망 선고
⊙ 시위대의 팔레비 호명, 왕정복고의 기호가 아니라, 이슬람 공화국의 혁명 서사에 대한 부정
김덕일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서울대 국제대학원 국제학 석사, 튀르키예 보아지치대 정치외교학 박사 / 現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중동·이슬람센터 연구위원 / 저서 《거꾸로 가는 새로운 튀르키예》 《우리가 몰랐던 혁명의 세계사》(역서)

- 지난 1월 4일 스위스에서 열린 반이란시위에서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초상이 불타고 있다. 사진=AP/연합
2026년 연초, 리알화의 기록적인 폭락과 초(超)인플레이션이 상거래를 마비시키자, 신정(神政) 체제의 전통적 지지 기반이었던 바자르 상인들은 셔터를 내렸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을 최루가스 연기가 뒤덮는 순간, 시위는 테헤란 도심을 넘어 시라즈와 타브리즈, 마슈하드까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히잡 대신 머리카락을 드러낸 청바지 차림의 여고생과 검은 차도르를 쓴 중년 여성, 1979년 혁명을 목격했던 아버지 세대부터 그 체제 아래 태어난 Z 세대까지 모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 유례없는 연대(連帶)는 이번 시위가 특정 계층의 경제적 불만을 넘어 체제 그 자체를 향한 집단적 분노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팔레비가 돌아온다.”
“자비드 샤(Javid Shah·국왕 만세)”
이번 시위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상징의 교체였다. 거리 곳곳에는 1979년 이후 지워졌던 팔레비 국왕의 초상이 다시 등장했고, 군중은 “자비드 샤(Javid Shah·국왕 만세)”를 외쳤다. 동시에 더 직설적인 구호인 “팔레비 바르미가르다드(Pahlavi barmigardad·팔레비가 돌아온다)”가 뒤따랐다.
이 구호들은 왕정복고(王政復古)의 기호가 아니라, 이슬람 공화국의 혁명 서사(敍事)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언어였다. 동시에 이슬람 혁명의 상징이었던 아야톨라 호메이니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의 포스터는 불태워졌다. 팔레비 왕정 시절의 ‘사자와 태양’ 문양 국기(國旗)가 전면에 등장한 반면, 이슬람 혁명 이후 제정된 국기는 끌어내려졌다. 이는 단순한 항의의 제스처를 넘어 이슬람 공화국이 47년 동안 축적해 온 혁명 서사 전체가 거리에서 와해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시위는 가장 불편한 질문과 마주한다. 팔레비 왕정 역시 억압적이었으며 민주적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왜 오늘날 이란의 거리에서 그 이름이 다시 불리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팔레비가 돌아온다”는 구호가 던지는 충격에서 잠시 물러나, 팔레비 왕정 당시의 이란을 다시금 들여다보아야 한다.
팔레비 왕정의 빛과 그림자
팔레비 정권 시절 자유분방했던 여대생들의 모습. 지금의 이란 여성들과는 천양지차다.팔레비 왕정 말기의 이란은 근대화(近代化)에 성공하고 있었지만, 그 성공의 역설(逆說) 때문에 무너지고 있었다. 고속도로와 공장, 대학이 속속 들어섰고, 테헤란의 스카이라인은 중동(中東)에서 가장 현대적인 풍경을 갖추어 갔다. 서구화(西歐化)와 세속화(世俗化)는 국가의 공식 노선이었으며, 여성의 공적(公的) 영역 진출과 교육 확대는 분명 이전과 다른 이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문제는 변화 그 자체가 아니라 변화의 방식이었다. 그것은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 아니라 위로부터 강제된 프로젝트였다. 근대화는 참여의 확대가 아니라 순응의 요구로 작동했고, 국가는 시민을 설득하기보다 앞서 달렸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충격도 컸다. 도시 일부는 급속히 번영했지만, 주변부와 농촌은 불평등을 감당해야 했다. 성장의 과실(果實)은 궁정(宮廷)과 소수의 엘리트, 신흥 자본에 집중되었고, 빈부격차는 눈에 띄게 확대되었다. 많은 이란인이 발전은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 발전 속에 자신은 배제되어 있다고 느꼈다.
특히 왕실의 사치와 특권은 국민의 가슴속에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심었고, 이는 곧 정치적 분노로 치달았다. 여기에 압제가 덧칠되었다. 팔레비 왕정하에서 선거와 의회는 존재했지만, 실질적 경쟁은 봉쇄되었고, 정치적 책임은 없었다. 비밀경찰 사바크(SAVAK)는 반정부 인사를 감시·구금·고문하는 공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국가의 통치는 대화가 아닌 관리와 억제의 기술로 환원되었다.
따라서 팔레비 왕정의 위기는 후진성(後進性)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근대화가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한 구조적 단절, 다시 말해 발전과 대표성 사이의 균열에서 비롯되었다. 국가는 강해졌지만, 시민은 정치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배신당한 혁명
이 불만이 더 이상 협상 가능한 수준이 아님을 폭력으로 확정한 사건이 바로 1978년 9월 8일, 테헤란 잘레 광장에서 발생한 ‘피의 금요일(Black Friday)’이었다. 군(軍)의 발포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이 사건은 이후 타협의 가능성은 사라졌고, 왕정의 마지막 언어는 정치가 아니라 총성이었다. 그리고 1979년 2월, 왕정을 지탱하는 축이었던 군이 중립을 선언하면서 팔레비 왕정은 무너졌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왕정의 몰락은 민주주의의 탄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공백을 채운 것은 왕정의 폭력보다 더 깊숙이 일상과 신앙, 그리고 개인의 신체까지 통제하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체제였다. 혁명은 해방의 언어로 시작되었지만, 그 언어는 곧 또 다른 형태의 지배로 이어졌다.
1979년 이란 혁명은 여러 혁명이 동시에 진행되었다가 끝내 하나의 혁명만 살아남은 사건이었다. 혁명 당시 거리에는 자유주의자, 세속 민족주의자, 좌파, 종교 개혁파, 여성 운동가, 울라마가 뒤섞여 있었고, 이들이 공유(共有)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팔레비 왕정을 끝내자는 최소한의 목표였다. 이런 점에서 이 혁명은 본질적으로 연합 혁명(coalition revolution)이었다.
그리고 이 연합을 가장 능숙하게 관리한 세력이 울라마였다. 혁명기의 호메이니는 이슬람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부패한 왕정과 굴욕적인 외세 의존을 비판하며 정의·독립·존엄을 약속하는 구원자의 얼굴로 등장했다. 그 인자한 이미지는 계급과 지역, 세속·종교의 균열을 넘어 ‘모두의 혁명’이라는 환상을 낳았다. 그러나 혁명이 권력 투쟁의 장으로 이동하는 순간, 호메이니의 본색이 드러났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
노벨 평화상 수상자 시린 에바디. 사진=조선DB제정된 헌법은 공화국의 외형을 유지했지만, 국민 주권은 신(神)에 귀속되었고 그 해석 권한은 엘리트, 그리고 그 정점(頂點)의 최고지도자(rahbar)가 주도하는 통치 체제에 집중되었다.
이것은 왕정처럼 정치적 반대를 억압하는 수준을 넘어, 국가가 신앙의 독점적 해석자가 되어 시민의 삶 전체를 통제하는 사상 초유의 종교 국가 체제였다. 왕정의 폭력이 왕권(王權)의 이름으로 행사되었다면, 혁명 이후 폭력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이 변화의 결과는 여성과 시민권 영역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다. 혁명에 참여했던 여성들은 혁명 직후 가장 먼저 규율의 대상이 되었고, 히잡 의무화는 국가가 개인의 몸과 신앙을 직접 관리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훗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시린 에바디(Shirin Ebadi)의 궤적은 이 전환을 상징한다. 혁명 이전 이란 최초의 여성 판사였던 그는 이슬람 공화국 수립 이후 직(職)을 박탈당했고, 이후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며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다. 이는 이슬람 공화국의 폭력이 일탈이 아니라 체제 논리의 귀결이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혁명은 체제로 굳어졌고, 그 체제는 경쟁을 허용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부터 이 혁명은 해방의 약속이 아니라 통치의 논리로 전환되었고, 그 순간부터 스스로 시효(時效)를 소진하기 시작했다.
‘대악마’ 미국
1980년, 혁명 직후 체제가 제도적 틀을 갖추기도 전에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다. 신생 이슬람 공화국에 이 전쟁은 체제의 사활(死活)이 걸린 실존적(實存的) 위기였다. 왕정 붕괴 이후 군 지휘 체계는 마비되어 있었고, 정규군과 급조된 민병대는 서로를 불신했다. 국가는 존재했으나, 아직 국가처럼 작동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전쟁은 역설적으로 체제의 인공호흡기가 되었다. 외부의 위협은 내부의 균열을 봉합했고,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은 전시(戰時)라는 명분 아래 연기되었다. 비판은 정치적 의견이 아닌 배신으로 낙인찍혔고, 체제는 스스로를 평가의 대상이 아닌 ‘포위된 공동체’로 재정의했다. 전쟁은 개혁이 아닌 통제의 기술을 축적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 과정에서 혁명수비대(IRGC)가 핵심 권력으로 부상했다. 혁명 수호를 명분으로 출범한 이들은 군사 작전을 넘어 물류, 건설, 에너지, 금융 등 국가 경제 전반에 침투했다. 특히 서방의 경제 제재(制裁)가 본격화되자 혁명수비대는 제재 우회를 명분으로 국가 자원과 밀무역 통로를 독점했다. 전시의 임시적 예외는 곧 상시적(常時的) 정상이 되었고, 혁명수비대는 국가를 지키는 조직에서 국가를 경영하는 실질적 행위자로 변모했다.
체제 연명(延命)을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장치는 반미(反美) 담론이었다. 미국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체제 존재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징으로 재정의되었고, 이를 압축한 언어가 ‘대악마(Great Satan)’였다. 1979년 주이란 미국대사관 점거 사건은 외교적 갈등의 결과라기보다, 혁명 내부에서 아군과 적군의 경계를 설정하는 정치적 의례(儀禮)로 기능했다. 대미 온건파와 타협 세력은 반혁명 분자로 낙인찍혔고 “외세가 항상 우리를 공격한다”는 피해 의식은 체제 운영의 기본 전제가 되었다. 반미는 외교 노선이 아니라 내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통치의 도구였다.
‘아가자데’
2024년 4월 하메네이의 정치 고문 알리 샴카니의 딸 결혼식. 보통 여성들에게는 히잡 착용을 강요하면서 혁명 엘리트들은 다른 삶을 사는 모습이 폭로됐다.반미는 또한 대중에게 저항경제(Resistance Economy)를 강요하는 토대가 되었다. 미국의 경제 압박에 굴하지 않기 위해 금욕(禁慾)과 고통을 감내하라는 설득은 반미라는 거대 서사가 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 저항의 실체는 철저히 불평등했다. 대중에게 저항은 생필품 부족과 초인플레이션을 견디는 고통이었으나, 혁명 엘리트에게 저항은 제재라는 장벽 뒤에서 독점 자본을 형성하는 기회였다. 혁명은 부패한 궁정을 비판하며 탄생했지만, 어느새 제재와 반미를 먹고 자라는 자신들만의 새로운 궁정을 구축했다.
이 위선(僞善)을 상징하는 단어가 바로 아가자데(Aghazadeh), 곧 권력자의 자식들이다. 반미와 저항경제가 공식 언어로 강요되는 동안, 그 언어에서 가장 자유롭게 벗어나는 집단이 누구인지 이란 사회는 너무 오래 지켜봐 왔다. 거리의 시민들에게 제재는 생존을 건 인내의 시험대였으나, 혁명 엘리트의 자녀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유학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북(北)테헤란의 풍경은 이 거대한 기망(欺罔)을 증명하는 공간적 증거다. 남(南)테헤란에서 도덕 경찰의 단속과 가난이 일상일 때, 북테헤란의 대로에는 초고가(超高價) 스포츠카가 줄지어 서 있다. 혁명은 고통을 분담하자고 말했지만, 그 고통은 늘 같은 사람들에게만 요구되었다.
결국 반미는 신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패의 책임을 외부로 이전하고 내부 통제를 강화하는 통치 기술이자, 기득권 구조를 지탱하는 장치였다. 같은 테헤란의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혁명 엘리트와 일반 시민 사이의 간극은 더 이상 단순한 경제적 불평등이 아니다. 종교라는 더 견고한 외피를 두른 격차는 팔레비 왕정 말기의 불평등보다 더 구조적이고 노골적이었다. 전쟁과 반미, 저항경제의 담론은 체제의 수명을 늘려주었지만, 체제가 평시 국가로 작동하는 법을 배울 기회를 박탈했다. 연명에는 성공했지만, 정치는 거기서 멈췄다.
민주주의의 가면
1979년 혁명 직후의 풍경은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가늠하기 힘든 거대한 열광의 도가니였다. 당시 탄생한 이슬람 공화국은 단순한 왕정 타도를 넘어, 냉전(冷戰) 질서가 강요하던 양자택일(兩者擇一)의 문법을 거부하는 파격적인 도전이었다. 당시 많은 지식인에게 서방의 자본주의가 약속한 풍요와 동구권 사회주의가 지향한 기계적 평등은 모두 ‘신의 부재(不在)’라는 근원적 한계에 봉착한 물질주의의 변주일 뿐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공백 속에서 이슬람 혁명은 영성(靈性)과 정치가 결합한 전대미문의 문명적 대안, 즉 어느 진영에도 자신을 귀속시키지 않는 독자적인 실험으로 추앙받았다. 특히 세속적 군부 독재와 전제적 왕정 사이에서 오랜 시간 신음해 온 이슬람권 지식인들에게 이슬람 민주주의의 청사진은 유토피아적 해법처럼 소비되었고, 이란은 이 모델로 전 세계에 호출되었다.
그러나 이 열광 속에서 결정적으로 간과된 사실이 있었다. 이 체제의 설계도는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아니라, 혁명의 이름으로 탄생한 새로운 권력을 항구화(恒久化)하기 위한 정교한 포장지였다는 점이다.
이슬람 공화국에는 분명 선거와 헌법이 있다. 그러나 이 제도들은 권력을 정당화하는 고도의 알리바이로 기능해 왔다. 전형적인 독재가 선거를 폐지하거나 노골적으로 조작하는 거친 방식을 택한다면, 이란은 선거를 유지함으로써 “민의(民意)를 존중한다”는 외형적 명분을 확보했다.
이 구조의 핵심에는 헌법수호위원회라는 가위가 존재한다. 이 기구는 선거 이전 단계에서 작동하며, 체제에 위협이 될 만한 모든 선택지를 사전(事前)에 차단한다. 유권자는 투표하지만, 무엇을 선택할지는 체제가 이미 결정해 놓는다. 팔레비 왕정이 선거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던 공허한 권위주의였다면, 이슬람 공화국은 선거라는 형식을 통치 기술로 완전히 흡수한 포화(飽和)된 권위주의다. 억압은 사라지지 않았고, 절차의 언어로 정제되며 오히려 더 교묘하고 위험한 형태로 진화했다.
‘개혁파 대통령’이라는 기만
물론 이에 대해 이것 또한 하나의 민주주의이며, 서구적 기준을 보편적 잣대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문화 상대주의적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제도적 형태가 다양하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양성은 권력의 비가역성(非可逆性)을 정당화하는 방패가 될 수 없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외형이 아니라, 권력이 시민에 의해 제한되고 교체될 수 있는지에 있다. 선택지가 제거된 선거, 시민의 권리를 방어하지 못하는 헌법은 문화적 특수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최소 조건이 파괴된 상태다. 이 기준은 특정 지역의 가치가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요구하는 실질적 요건이다.
이 체제의 기만성은 이른바 개혁파 집권 시기에 더욱 선명해진다. 개혁 성향의 대통령이 선출되면 체제가 내부로부터 변화하는 듯 보이지만, 그는 행정부 수반일 뿐 주권의 최종 보유자가 아니다. 군 통수권과 사법권, 핵심 경제 권력은 선출과 책임의 회로(回路) 밖에 있는 종신직(終身職) 최고지도자와 혁명 엘리트가 독점하고 있다.
이 거대한 구조 속에서 개혁파의 역할은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과 수사(修辭)의 속도를 조절하는 관리인에 머문다. 체제는 제한적인 개혁 담론을 허용해 대중의 불만을 흡수하고, 실패의 책임은 선출된 정치인 개인에게 전가(轉嫁)한다.
이 결과 사회에는 ‘투표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깊은 냉소(冷笑)와 무력감(無力感)이 축적된다. 이는 역설적으로 체제의 생명을 연장하는 폐쇄적 순환 구조를 완성한다. 후보 필터링은 이념을 넘어 정체성(正體性) 자체를 차단하며, 여성과 종교적 소수자가 의회에 진입하더라도 실질적 통치권은 시아파 남성 기득권층에게만 주어진다.
민주주의의 언어를 차용한 폭압
이 구조적 통제는 일상의 감시와 결합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슬람 공화국에서 법은 시민을 보호하는 보루가 아니라 복종을 강제하는 채찍으로 작동한다. 규제의 대상은 범죄를 넘어 시민의 태도, 언어, 복장, 그리고 온라인상의 사유(思惟)에까지 이른다. 국가는 시민의 몸에 새겨진 규율 준수 여부를 통해 충성도를 측정하고 통치의 명분을 갱신한다.
일상의 사소한 영역까지 정치화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시민을 끊임없이 잠재적 위반자이자 계도의 대상으로 위치시킴으로써, 국가의 개입과 통제를 상시화하기 위함이다. 선거로 지도자를 바꿀 수 없고, 국민투표로 헌법을 수정할 수 없는 체제에서 허용된 유일한 정치적 행위는 규율에 대한 복종뿐이다. 이는 미완(未完)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언어를 차용(借用)해 시민의 일상 자체를 식민화한 세련된 폭압이다.
이 모든 기만은 제도의 운용을 넘어 헌법의 언어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공화국 헌법은 피억압자(mostazafin)를 위해 압제자와 맞서 싸운다는 도덕적 사명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 명분이 향하는 곳은 정작 이란 시민이 아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안보와 신앙의 이름으로 짓밟힌다. 결국 헌법은 시민을 보호하는 규범이 아니라, 국가가 자행하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전도(轉倒)되었다. 피억압자의 이름을 참칭하며 정작 자국민을 압제해 온 이 체제가 과연 민주적 통치라는 이름으로 존속할 자격이 있는가.
일상화된 폭력
제대로 히잡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됐다가 의문사한 마사 아미니의 죽음은 이란은 물론 각국의 항의 시위를 유발했다. 사진=AFP/연합뉴스시민의 절박한 질문 앞에 제도가 침묵할 때, 체제가 선택한 대답은 언제나 폭력이었다. 헌법이라는 방패를 잃은 시민의 몸은 권력의 자의적인 통치가 실현되는 전장(戰場)이 되었다. 이제 이란에서 폭력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체제를 지탱하는 구조적 필연이자 일상이 되었다.
그 시작은 2009년이었다. 이란 사회는 물었다.
“내 표는 어디에 있는가?”
대선(大選) 직후 수백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녹색 운동’의 요구는 체제 전복이 아닌 선거의 투명성이었으나, 체제는 바시지(Basij) 민병대를 동원한 무력 진압으로 답했다. 네다 아가–솔탄(Neda Agha–Soltan)의 죽음은 선거라는 제도조차 권력을 가리는 방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란 사회 전체에 각인시켰다.
2019년, 질문은 생존의 영역으로 이동했다. 유가 보조금 철폐로 촉발된 항의에 체제는 ‘피의 11월(Bloody November)’이라 불리는 무차별 발포로 대응하며 폭력을 통치의 일상 문법으로 확정지었다.
마침내 2022년, 질문은 개인의 존엄과 신체적 자기결정권에 이르렀다. 마사 아미니(Mahsa Amini)의 의문사(疑問死)로 촉발된 “여성, 삶, 자유(Woman, Life, Freedom)”라는 외침은 체제가 개인의 삶 전체를 점유해 온 것에 대한 총체적 거부였다. 체제는 안구(眼球) 조준 발포와 공개 처형이라는 잔혹한 공포 정치로 응수했지만, 반복된 폭력은 오히려 공포의 역치(閾値)를 높였고 국가의 폭력은 더 이상 유효한 억제력이 되지 못했다.
이 지점에서 이란 사회에는 결정적인 균열이 발생했다. 국가는 더 이상 보호의 주체로 인식되지 않았고, 시민들은 국가와 감정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통치의 정당성은 제도 차원을 넘어 심리적·도덕적으로 무너져갔다.
시민에겐 강하고, 외적에겐 약한 이슬람 공화국
이란 혁명수비대는 대내적으로는 독재 권력의 전위이자 기득권 세력이고, 대외적으로는 이란 ‘혁명의 수출자’다. 사진=AP/뉴시스이러한 대내적 균열은 2025년 6월, 이스라엘과의 이른바 ‘12일 전쟁’에서 표출되었다. 체제가 수십 년간 스스로 ‘저항의 중심’이자 시아파의 맹주(盟主)로 묘사해 온 이미지는 핵심 통치 자산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그 위용이 허상이었음을 실시간으로 폭로했다. 강한 것은 무고한 시민을 향한 총구였을 뿐, 정작 국가를 지켜야 할 방공망(防空網)과 억지력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슬람 공화국은 종이호랑이였다.
더 치명적인 문제는 군사적 무력함 그 자체가 아니라 외부 충격에 반응하는 사회의 태도였다. 정상적인 국민국가에서 외부 위협은 내부 결속을 강화하지만, 이란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체제가 입은 타격은 국민에게 굴욕이 아닌, 억압적 정권에 대한 일종의 심리적 복수로 받아들여졌다. 이란 사회가 갈망한 것은 국가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들을 억눌러 온 체제가 무너지는 장면이었다. 이는 국민이 이미 국가와 감정적으로 완전히 결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 결별은 민생(民生)의 차원에서 더욱 잔혹하게 확인되었다. 이란 사회가 극심한 가뭄과 만성적 전력난 속에서 정전(停電)과 단수(斷水)를 일상처럼 견디는 동안, 체제의 자원 배분은 끝내 시민을 향하지 않았다. 국가는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가자지구의 하마스 등 대리 조직과 역외 영향력 유지에는 수억 달러를 투입하면서, 정작 자국민에게는 핵 프로그램과 체제 사수(死守)를 이유로 무조건적인 인내만을 요구해 왔다.
이 결과 거리에서는 마침내 체제의 가식적인 저항 담론을 정면으로 파기하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가자도 레바논도 아닌, 나의 목숨은 이란을 위해!”
외부의 전장과 이념에는 자원을 쏟아붓고, 자국민에게는 희생만을 요구해 온 체제에 대한 정치적 사망 선고였다.
그리고 체제가 이 분노 앞에 내놓은 최근의 대응은 거의 모든 국민에게 월(月) 약 7달러 상당의 소비 쿠폰을 지급하겠다는 발표였다. 이 사실은 체제가 국민의 생존을 더 이상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순간 이후, 국가의 폭력은 공포의 수단이 아니라 축적된 분노를 폭발시키는 최후의 불씨로 전락했다.
팔레비 왕정 몰락 직전과 유사
팔레비 왕정의 몰락 직전과 현재 이슬람 공화국은 붕괴의 전조(前兆)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무너진 민생 위에서 뒤늦게 선포된 샤(Shah)의 개혁은 이미 신뢰를 상실한 사회에 공허한 메아리로 울렸다. 오늘날 이슬람 공화국을 덮친 통화(通貨) 가치 폭락과 초인플레이션 역시 같은 궤적을 그린다. 이제 이란 사회에서 경제적 고통은 단순한 삶의 난관이 아니라, 체제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이유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두 시기를 관통하는 상징은 거리에서 울려 퍼진 동일한 구호, 마르그 바르 딕타토르(marg bar diktator·독재자에게 죽음을)다. 그러나 이 구호가 겨냥한 대상은 결정적으로 다르다. 1979년 이 구호는 권력 블록 바깥에 있던 바자르와 울라마 연합이 주도한 왕정 타도의 언어였다. 당시 바자르의 총파업은 왕정이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음을 알리는 결정적 신호였고, 경제적 고통은 파편화된 반대 세력을 하나의 혁명 연합으로 결집하는 촉매였다. 반면 오늘의 이란에서 독재자로 호명되는 대상은 혁명으로 탄생한 체제의 최고지도자, 즉 이슬람 공화국 그 자체다. 1979년 혁명의 물적 토대였던 바자르가 이제는 자신들이 세운 체제를 향해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체제가 맞이한 역사적 아이러니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슬람 혁명은 하나의 실험이었다. 해방과 존엄, 정의라는 언어로 출발한 이 혁명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담고 있었고, 유토피아를 약속했다. 그러나 해방의 언어로 시작한 실험이 억압의 구조로 굳어지는 순간, 그 정당성은 점차 무너져갔다. 이후 수십 년간 반복된 전쟁과 반미, ‘저항’의 신화는 혁명의 약속을 갱신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 혁명에서 탄생한 통치 체제를 연명시키는 공허한 서사로 기능해 왔다. 외부의 위협은 내부의 실패를 가리는 장치가 되었고, 저항은 신념이 아니라 동원의 언어로 전락했다.
그러나 거리에는 미국의 압박이 체제의 폭주를 견제해 주길 기대하는 표현들까지 등장했다. 이는 이란 사회에서 반미가 더 이상 체제 비판을 억누르는 도덕적 무기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반미 서사의 붕괴는 단순한 외교 인식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슬람 공화국이 수십 년간 독점해 온 국가 정체성의 언어 자체가 더 이상 사회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통치 체제는 과연 이란다운가?”
영국 등 해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란인들의 항의 시위에는 팔레비 전 국왕의 초상과 왕정 당시의 국기까지 등장했다. 사진=AP/연합외부의 적을 설정해 내부의 균열을 봉합하던 방식이 작동을 멈추는 순간, 질문은 자연스럽게 더 근본적인 층위(層位)로 이동한다. “이 통치 체제는 과연 이란다운가.” 이 질문이 지금 결정적인 이유는, 이것이 단순한 정체성 논쟁이 아니라 이란이 어떤 역사적 연속성을 국가의 기준으로 삼아 왔는가를 묻는 정치적 탄핵이기 때문이다.
이란 역사에서 고대(古代) 문명과 이슬람은 단절의 관계가 아니라, 재해석과 조정을 거치며 공존해 온 두 개의 축(軸)이었다. 이란인은 무슬림이면서 동시에 아케메네스 왕조에서 사산 왕조로 이어지는 찬란한 이란 문명의 후예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통해 자신을 이해해 왔다. 바로 이 중층적 정체성이 이란 사회가 스스로를 ‘이란’으로 인식해 온 최소한의 역사적 기준이었다. 그러나 이슬람 공화국은 시아파 이슬람 정체성을 유일한 국가 언어로 고정하며, 이슬람 이전의 역사와 문명적 기억을 체제의 공식 서사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해 왔다.
오늘날 이란의 거리에서 팔레비의 이름이 다시 들려오는 것은 왕정에 대한 향수(鄕愁)가 아니다. 그것은 이란 사회가 이슬람 공화국이 끝내 도달하지 못한 정상 국가의 기준선을 기준으로 현 체제를 재평가하고 있으며, 그 결과 이 체제가 이란의 역사적 감각과 문명적 균형에서 멀어졌다고 판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집단적 파산(破産) 선고다.
팔레비 왕정은 결코 민주적이지 않았으며 많은 이란인에게 경제적 고통을 안긴 체제였다. 그러나 최소한 그 시절에는 이슬람이 통치의 억압 기제로 독점되지 않았으며, 이란의 정체성을 범(汎)이슬람 정치 프로젝트에 종속시키지 않았다.
반면 오늘의 이슬람 공화국은 이란 사회에서 점점 더 낯선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종교는 통치의 도구로 고착되었고, 이란의 정체성은 레바논, 가자, 예멘을 잇는 이데올로기적 투쟁 서사에 함몰되었다. 결국 이란 사회가 팔레비의 이름을 호출하는 이유는 현 체제가 이란을 얼마나 ‘이란답지 않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뼈아픈 비교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유구한 이란 역사의 기준에서 볼 때, 이슬람 공화국은 더 이상 반서방 체제도, 저항의 전위(前衛)도 아니다. 그것은 이란이 수천 년에 걸쳐 축적해 온 정치적 절제와 종교적 균형, 문명적 자부심을 지속적으로 훼손해 온 하나의 통치 질서일 뿐이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보다, 사회 자체를 체제 존속의 인질로 삼아온 구조는 이제 더 이상 은폐될 수 없다. 따라서 지금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1979년의 혁명에서 출발한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실험이 시효를 다하고, 거리를 메운 수백만 시민에 의해 이란 사회와 그 역사 앞에서 평가되고 정리되는 과정이다.
역사적 시효가 다한 이슬람 공화국
최근 자행된 유혈 진압은 체제의 공고함을 증명하는 지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당성을 상실한 권력이 오직 공포라는 마취제에 의지해 연명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치명적인 방증(傍證)이다. 총구와 차단은 일시적인 정적(靜寂)을 만들 뿐, 시민이 거리로 나선 그 찰나, 체제의 도덕적 서사는 이미 사멸(死滅)했으며 정치적 패배는 확정되었다.
설령 시위가 억눌린다 한들, 역사는 이 순간을 기록할 것이다. 시민을 적으로 돌린 권력은 더 이상 미래를 통치할 자격이 없다. 그것은 단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역사적 시효가 만료된 권력의 단말마(斷末魔)에 지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