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

태국·캄보디아 분쟁의 원인과 향후 전망

역사적 상흔, 지도자 간 악연, 국내 정치 균열 등 복합적으로 작용

  • 글 : 송승종 대전대학교 특임교수·국제분쟁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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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정치에서 개인적 신뢰가 얼마나 덧없는지 보여줘
⊙ 아세안의 한계, 미·중 경쟁 등 복합적으로 작용
⊙ 태국 군부, 무력 분쟁 기화로 ‘사실상 쿠데타’… 2년 된 패통탄의 문민 정부 밀어내
⊙ 훈 센, 권력 승계한 아들에게 ‘민족주의적 업적’ 안겨주려 분쟁 촉발시켰다는 설 있어

송승종
육사 졸업, 국방대 국방관리학 석사, 미 미주리주립대 국제정치학 박사 / 국방부 정책실 미국정책과장, 충남대 초빙교수 역임. 現 육군 자문위원,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초빙교수, 연세대 국제대학원 객원교수, 한국국방외교저널(주) 대표이사 / 저서 《박정희 대통령: 미국 비밀해제자료를 중심으로》 《유엔 평화유지활동의 이해》 《컨플릭트》(공역)
지난 7월 28일, 훈 마넷 캄보디아 총리(왼쪽)와 품탐 웨차야차이 태국 총리 권한대행(오른쪽)은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의 중재로 휴전에 합의했다. 사진=신화/뉴시스
지난 7월 24일부터 30일까지 아세안(ASEAN)의 회원국인 태국과 캄보디아 사이에 수십 년 만에 가장 치열한 국경 무력(武力) 충돌이 벌어졌다. 금년 5월 말부터 소규모 교전(交戰)으로 시작된 국경 분쟁이 두 달 만에 전면전으로 비화(飛火)한 것이다. 불과 닷새간의 전투로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십만 주민이 피란길에 올랐다. 로켓포, 확산탄, 전투기 공습, 대규모 포 사격까지 동원된 전투 양상은 전쟁이라 할 만큼 격렬했다. 다행히 국제사회의 긴박한 중재(仲裁)로 7월 28일부로 양측은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휴전에 합의하여 교전을 중단했다.
 
  그러나 일시적 싸움 중단은 국제 관계에 있어 ‘쉬운 항목’일 뿐 앙금이 지금처럼 남아 있는 한 언제든 교전은 재개될 수 있다. 수십 년간 유지되어 온 평화를 깨고, 양국을 전면전의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자.
 
 
  ‘역사적 자존심’ 싸움
 
태국–캄보디아 국경 분쟁의 발단이 된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사진=AP/뉴시스
  이번 전쟁의 직접적 도화선은 ‘프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라고 불리는 고대 크메르 제국 시대의 사원들이다. 태국–캄보디아 국경을 따라 자리한 천년의 사원과 유적들은 두 나라 입장에서 역사적 자존심이 걸린 상징적 장소들이다.
 
  이 중에서도 단연 백미(白眉)는 11세기 앙코르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과 그 인근 지역이다. 태국과의 영유권 분쟁을 불러일으켰던 이 사원은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ICJ) 판결로 캄보디아 소유임이 확정되었다. 그런데 당시 사원 주변 4.6㎢에 달하는 부속 영토의 귀속 문제는 일부를 제외하고 해결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 ICJ 판결에 태국은 즉각 강력한 항의와 함께 전국적인 반대 시위를 벌이며 불만을 표출했다. 당시 태국 정부와 정치권은 ICJ 판결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공개적으로 반발했지만, 최종적으로 유엔 회원국으로서 법적 구속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태국 정부는 판결을 받아들이고, 1963년 초 사원 지역에서 철수하여 프레아 비헤아르를 캄보디아에 공식 반환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태국은 ‘해당 판결이 사원만 명시했지 주변 지역의 경계는 명확히 설정하지 않았다’며 지속적으로 문제 삼았다. 게다가 2008년 캄보디아가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태국 내 강경 민족주의 세력이 거세게 반발함에 따라, 2008~2011년 수차례 국지전(局地戰)이 발생하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이처럼 ‘국경지대의 사원’은 오랜 세월에 걸쳐 양국 간 영유권 갈등의 불씨로 남아 있었다.
 
 
  다시 ICJ로 달려간 캄보디아
 
  2025년의 분쟁 역시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문화유산을 둘러싼 영유권 분쟁에서 촉발되었다. 방아쇠가 된 사건은 5월 28일, 국경 미확정 지대에서 발생한 양국 군인의 충돌이었다. 특히 이 충돌은 프레아 비헤아르와 더불어 분쟁 지역으로 남아 있는 ‘따 크라베이(Ta Krabey)’ 등의 사원들 근처에서 벌어졌다는 점이 양국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건드렸다. 이날 교전으로 캄보디아 군인 1명이 사망하자 양측 군대는 즉각 접경(接境)지대에 병력을 증강 배치하며 강대강 대치를 이어갔다.
 
  나아가 캄보디아는 6월 15일 ICJ에 영유권 판단을 다시 요청하는 법적 대응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프레아 비헤아르뿐 아니라 ‘따 모안 톰’ ‘따 모안 터치’ ‘따 크라베이’ 등 분쟁의 불씨가 된 4개의 사원과 인근 지역의 주권을 확정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행보는 2013년 ICJ가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주변 영토를 캄보디아 소유로 인정한 판결에 고무된 캄보디아 측이 ‘한 걸음 더 나아간 승부수’를 띄운 것으로 평가됐다. 실제로 캄보디아는 190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태국(당시 시암) 간 조약의 부속지도(1:20만 축적 프랑스령 지도)를 근거로 들며 자신들에게 법리적 정당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태국은 자국이 작성한 보다 정밀한 1:5만 축적 지도를 고집, 기존 양자 협의의 기본 문서인 2000년 양국 국경위원회 MOU를 캄보디아가 위반했다며 맞섰다.
 
  두 나라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어려운 고대 사원의 영유권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국경 획정의 기술적 분쟁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裏面)에는 식민지 시기의 상처와 민족주의 내러티브가 자리하고 있다. 캄보디아 입장에서는 앙코르 제국의 유산인 사원들이 자국 소유임을 인정받는 것은 민족 정체성(正體性)의 회복과 직결된다. 반면 태국으로서는 프랑스 식민 지배 시절에 시암 왕국이 캄보디아에 할양한 옛 영토들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프랑스에 빼앗긴 영토’인 이 사원들을 이제는 되찾을 수 없다는 좌절감이 태국의 보수 진영과 군부 내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적 내러티브는 국민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래서 태국의 정치인들과 군부는 국내에서 위기가 벌어질 때마다 단골 메뉴로 캄보디아와의 사원 분쟁을 부각시킨다. 이를 통해 국수주의적 결속을 다지고 국내의 불만을 무마하려는 전략이다.
 
 
  포연에 노출된 문화유산들
 
  무력 충돌의 혼란 속에서 실제로 양국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전장(戰場)의 포연(砲煙)에 노출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교전이 벌어진 7월 25일, 태국군은 캄보디아 북방 지역인 오다르 메안체이주(州) 일대에 포병 및 공군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반격 작전을 전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접경 지역의 사원 여러 곳이 포탄 파편과 화염에 노출된 것으로 전해졌다. 반대로 태국의 경우, 캄보디아군의 포격으로 태국의 사원이 다수 자리한 수린주와 시사켓주의 마을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다행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프레아 비헤아르는 큰 손상을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일각에서는 “다음번에는 사원이 진짜로 불타는 참혹한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왔다.
 
  국제사회도 문화유산 파괴 가능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와 유네스코는 공동성명을 통해 “분쟁 당사자는 인류 보편의 유산에 대한 보호 의무를 준수하라”고 촉구했고, 프랑스와 인도 등 앙코르 문명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진 국가들도 유감 성명을 발표했다.
 
 
  탁신–훈 센 간의 30년 우정
 
2023년 8월 5일 탁신(왼쪽) 전 태국 총리는 훈 센 캄보디아 총리의 생일 파티에 참석해 선물을 주었다. 사진=AP/뉴시스
  태국–캄보디아 전쟁의 독특한 측면 중 하나는, 국가 간 분쟁에 전직(前職) 지도자 두 명의 개인적 악연(惡緣)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 지도자 개인 간의 관계가 양국의 전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경우는 매우 드문 사례다.
 
  2001년 태국 총리에 취임한 이후 탁신은 훈 센과 각별한 관계를 맺어왔다. 2006년 군부 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난 뒤에는 그 우정이 더욱 공고해졌다. 훈 센은 망명한 탁신에게 캄보디아 경제고문 직함을 주며 지원했고, 2009년에는 탁신을 ‘영원한 친구’라 부르며 자국에 머물도록 아량을 베풀었다. 이로 인해 태국 정부와 외교 분쟁이 일어났다. 탁신도 여동생 잉락 정부 시절(2011~2014년) 종종 프놈펜을 찾아 훈 센과 골프를 즐겼다. 2012년에는 태국의 ‘레드셔츠(탁신 세력)’ 지지자들이 훈 센 주최로 열린 친선 축구 경기에 함께 등장한 두 사람을 향해 환호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2014년 태국에서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잡자 훈 센은 약 200명의 태국 민주화 인사들을 캄보디아로 피신시키며 탁신 세력을 도왔다. 탁신은 이에 “아세안에는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두 명의 형제가 있다. 브루나이의 술탄(하사날 볼키아), 그리고 훈 센”이라고 말했다. 2023년 8월 훈 센의 71회 생일에는 탁신과 잉락 남매가 프놈펜에 초대받아 함께 축하했고, 이 자리에서 훈 센은 탁신을 자신의 ‘의형제(god brother)’라 부르며 각별함을 과시했다.
 
 
  ‘형제에서 적으로’
 
  이러다 바윗돌보다 단단해 보이던 우정이 2025년에 접어들면서 빠르게 깨지기 시작했다. 결정적 계기는 훈 센의 충격적인 폭로였다. 6월 말 훈 센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탁신의 딸인 패통탄 친나왓 태국 총리와 나누었던 전화 통화 녹취를 일방적으로 세상에 공개해 버린 것이다. 문제의 녹취 파일에는 패통탄 총리가 훈 센을 “삼촌(叔父)”이라고 부르며 국경 분쟁과 관련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제가 알아서 챙기겠다”고 말하는 대목이 담겨 있었다. 또한 그녀가 태국군 고위 인사에 대해 ‘험담’을 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역대급 폭로는 메가톤급 후폭풍을 가져왔다. 태국 국내에서는 총리가 캄보디아 측에 굽실거리며 밀약을 시도했다는 비난이 들끓었다. 보수 야당과 군부 세력은 패통탄 총리가 “가족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이익을 저버렸다”고 맹공을 퍼부었고, 심지어 반역죄에 해당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결국 7월 초 태국 헌법재판소는 ‘통화 스캔들’을 이유로 패통탄 총리의 직무 정지와 함께 윤리 위반 여부에 대한 조사 개시를 명령했다. 이로써 패통탄은 ‘식물 총리’ 신세가 되었다. 불과 취임 1년도 되지 않아, 그것도 대외 분쟁의 와중에서 태국의 지도부 공백이 발생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충격적인 폭로는 탁신–훈 센 간의 오랜 우정도 산산조각으로 박살 냈다. 훈 센은 공개 석상에서 탁신 일가를 향해 “배신자”라고 성토하며 “추가로 폭로할 민감 정보가 더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탁신도 가만있지 않았다. “너무도 가깝던 사람이 이럴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며 “국가적 문제가 생기면 나는 나라를 우선시한다. 친구와의 관계는 잊어버려야 한다”는 말로 훈 센을 향한 서운함과 분노를 드러냈다. 언론들은 일제히 “브로맨스의 파탄” “형제에서 적으로” 등의 표현으로 두 사람 간 결별을 대서특필했다.
 
 
  갈등의 원인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훈 센으로 하여금 이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의 결별을 작심하도록 만들었을까? 여러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훈 센이 캄보디아군 부사령관 출신인 장남 ‘훈 마넷’에게 권력을 승계(2023년 8월)한 이후, 캄보디아 내의 민심 결속을 위해 대외적 갈등을 의도적으로 부추겼다는 분석이 있다. 신임 총리가 된 아들에게 민족주의적 업적을 안겨주기 위해 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훈 센은 아들에게 정권을 물려준 뒤에도 상왕(上王)처럼 실권(實權)을 행사하고, 분쟁 초기부터 국경 일대에서의 전투 작전을 지휘하며 군통수권자처럼 행세했다.
 
  둘째로, 온라인 사기 조직의 문제로 두 사람의 우정에 균열이 생겼다는 설도 파다하다. 2023~2024년 사이 태국 정부가 불법 온라인 사기(보이스피싱 등) 조직을 때려잡기 위해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캄보디아 국경지대에 자리한 대규모 범죄 거점이 집중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훈 센의 핵심 측근들이 운영하던 이권(利權) 사업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훈 센이 이에 격노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는 소문이다. 실제로 탁신은 공개적으로 “훈 센의 조카와 중국계 자본이 결탁해 운영하던 초대형 보이스피싱 조직을 태국 수사 당국이 적발한 뒤로 관계가 급속히 나빠졌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비밀리에 추진했던 개인적 거래(권력 상층부의 인사 문제 등), 경제적 이해관계가 깨지면서 생긴 배신감과 불신이 국가 간 분쟁으로 비화했다는 음모론적 시각도 있다.
 
  결과적으로 탁신–훈 센 두 사람 모두 이번 사태에서 상처뿐인 ‘피로스의 승리’를 얻었을 뿐이다. 훈 센은 당초의 노림수대로 태국의 친(親)탁신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을지 모르나, 그 대가로 오랜 친구를 잃고 국제적 신뢰도에도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탁신 일가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을 뿐 아니라 “캄보디아와 내통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애써 복권시킨 딸의 총리직마저 잃게 되었다. 탁신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제 아무도 훈 센과는 이야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 통화를 몰래 녹음해 폭로할지 모르니까”라고 일침을 날렸다. 요컨대, 두 사람 간 오랜 우정의 파탄은 이번 분쟁의 비극적 원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국제정치에서 개인적 신뢰가 얼마나 덧없는지를 보여주는 냉혹한 사례로 남을 것이다.
 
 
  ‘쿠데타 3.0’
 
패통탄 전 태국 총리. 사진=AP/뉴시스
  2025년은 태국 정치에서 중요한 전환기로 기록될 것이다. 2023년 총선으로 출범한 패통탄 친나왓 총리의 문민 정부는 9년간의 군부 통치를 끝장낸, 신생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새싹은 국경 전쟁의 광풍(狂風) 속에서 빠르게 힘을 잃었다. 패통탄 총리는 훈 센의 녹취 폭로 사건으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직무가 정지되었고, 탁신계 원로 정치인인 품탐 웨차야차이 부총리가 총리 권한대행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품탐 대행은 과도기적 존재에 불과하여, 실질적인 국정 주도권은 다시 군부와 왕실 측으로 넘어갔다. 국경 분쟁이라는 국가 비상사태를 이유로 군 최고사령부가 안보 정책에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 기간 동안 태국군은 정부와 별개로 독자적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캄보디아군의 침략 만행”을 연일 규탄하고, 계엄령 선포와 국교 단절까지 들먹이며 강경 노선을 주장했다. 반면 문민 정부는 내정의 혼란 속에서 제대로 된 메시지 관리나 외교전을 펼치지 못했다. 이처럼 ‘한 지붕, 두 목소리’의 모양새가 되자, 국제사회에서는 “태국 정부가 군대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실제 캄보디아 훈 마넷 총리는 “방콕에 진짜 실권자가 나타나길 기다린다”는 말로, 자신들이 인정할 파트너는 태국 군부뿐임을 암시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태국 군부는 보무(步武)도 당당하게 정치 무대의 전면으로 복귀했다. 분쟁이 소강 국면에 접어든 직후인 7월 말, 태국군은 헌법재판소와 손잡고 패통탄 총리에 대한 탄핵성 결정을 이끌어냈다. 국가 안보에 위해를 끼쳤다는 명목이었다. 더불어 상원(군 출신이 다수인 임명직 상원)과 하원 일부는 패통탄 정부에 대한 불신임 연대를 형성해 새로운 연립 내각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외신들은 이를 “사법(司法) 쿠데타” “쿠데타 3.0” 등으로 표현하며 태국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했다.
 
 
  “이제는 군대가 나서야 할 시간” 선동
 
쁘라윗 웡수완 신임 태국 총리. 사진=AP/뉴시스
  결국 8월 중순 태국 의회는 군부·보수 진영 인사가 주도하는 거국내각 출범을 발표했다. 총리 권한대행이던 품탐은 물러나고 쁘라윗 웡수완(Prawit Wongsuwan) 장군이 이끄는 과도 정부가 들어섰다. 쁘라윗은 2014~2019년 총리를 지낸 전형적인 정치군인이다. 2023년 선거로 어렵사리 회복된 태국의 문민 정권은 이처럼 2년 만에 다시금 군부 통치의 그림자에 가려지는 신세가 되었다.
 
  태국 군부의 복귀는 예견된 수순이기도 했다. 태국은 근현대에만 13차례에 달하는 군사 쿠데타를 겪은 나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군부에 의해 축출되는 일이 반복되어 왔다. 특히 탁신 친나왓 총리 본인이 2006년 군부 쿠데타로 쫓겨났고, 그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 총리도 2014년 사법 쿠데타로 실각했다.
 
  탁신 일가와 군부–왕실 엘리트 간 권력 투쟁의 역사는 20년에 걸쳐 지속되어 온 태국 정치의 뿌리 깊은 균열이다. 2023년 선거에서 탁신의 딸이 승리하며 잠시 민주주의 시대를 개막하는 것 같았지만, 기득권 세력은 여전히 호시탐탐 권력 복귀를 노리고 있었다.
 
  이들에게 절호의 구실을 제공한 것이 바로 2025년의 국경 전쟁이다. 태국 보수 진영은 분쟁 초기부터 패통탄 정부를 향해 “국가 안보를 내팽개친 무능 정권”이라고 맹공격했고, 패통탄 총리의 훈 센 통화 스캔들이 폭로되자 기다렸다는 듯 “뻔뻔한 신뢰의 배반”이라며 문민 지도자의 축출 기회로 활용했다. 극우(極右) 성향의 퇴역 장성들은 TV에 나와 “이제는 군대가 나서야 할 시간”이라며 쿠데타를 공개적으로 촉구하기도 했다.
 
 
  미국의 개입
 
  태국–캄보디아 분쟁이 격화되자 워싱턴과 베이징도 바짝 긴장했다. 국경 충돌이 자칫하면 미·중 간의 대리전(代理戰) 양상을 띨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태국·캄보디아는 각각 미국·중국이라는 후원 세력을 배경에 두고 군사·경제 관계를 맺어온 국가들이다. 태국은 미국의 오랜 동맹국이며 안보 파트너인 반면, 캄보디아는 수십 년간 중국과 밀착해 “중국의 전략적 동반자”로 불릴 만큼 긴밀한 유대 관계를 형성해 왔다.
 
  분쟁 초기 미·중은 모두 사태 추이를 예의주시하며 각기 중재 의사를 타진했다. 하지만 태국 정부는 처음부터 “제3국의 중재 불필요, 양자 협의로 해결”을 강조하며 미·중(그리고 아세안 의장국 말레이시아)의 제의를 일축했다. 분쟁이 본격화된 7월 24일 무렵 미국과 중국, 말레이시아는 동시에 외교 채널을 통해 즉각 휴전 협상을 촉구했지만, 태국은 완강하게 거부하고 오히려 캄보디아와의 외교 관계를 격하하는 등 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그러나 전황(戰況)이 악화되고 사상자가 속출하자 태국의 입장도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전기(轉機)는 미국의 직접 개입에서 나왔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7월 하순, SNS를 통해 “두 나라가 싸우는 한 어떤 무역 협상도 진행하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다. 미국이 양국과 추진 중이던 상호 관세 인하 협상을 지렛대로 삼아 동시 압박에 나선 것이다. 결국 태국은 그동안 고집해 온 양자 협상 조건을 철회하고, 말레이시아 푸트라자야에서의 다자 휴전 회담에 응하겠다고 전격 결정했다. 이에 따라 7월 28일 말레이시아 주재로 태국·캄보디아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양국은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휴전”에 합의했다.
 
  결과적으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고강도 압박과 말레이시아의 외교적 중재가 주효했던 셈이다. 캄보디아 정부는 “평화 중재 노력”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트럼프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겠다고 발표하며 노골적으로 미국의 역할을 치하했다. 미국은 협상 타결의 대가로 태국·말레이시아·캄보디아에 대한 관세를 각각 36%·25%·49%에서 모두 19%로 인하하는 경제적 보상을 제공했다. 휴전을 성사시키는 대가로 관세 지렛대를 활용한 이러한 조치는 전쟁을 막기 위해 경제력을 외교적 무기로 동원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
 
 
  시험대에 오른 ‘아세안 중심성’
 
  2025년 태국–캄보디아 전쟁은 동남아의 작은 두 나라 사이의 국지적 충돌처럼 보이지만, 그 여파와 내포된 함의는 결코 작지 않다. 이 전쟁은 역사적 상흔(식민지 경계와 문화유산), 개인적 악연(탁신–훈 센 관계), 국내 정치 균열(태국 군부–문민 갈등), 지역 기구의 한계(아세안 중심성 약화), 그리고 초강대국 경쟁(미·중 패권 다툼)이라는 다차원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례다.
 
  이 중에서도 ‘아세안 중심성’에 문제가 생겼다. 이는 아세안이 지역 문제 해결의 중심이 되어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협력 메커니즘을 주도해야 한다는 의미다. 핵심은 아세안이 역내(域內)에서 자신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강대국들의 경쟁 구도 속에서도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내부 분쟁(회원국 간 전쟁) 없음’을 자랑으로 삼아왔던 아세안의 신화(神話)가 태국·캄보디아 전쟁으로 여지없이 깨졌다. 더욱 심각한 것은 분쟁 해결 과정에서 아세안이 아닌 미국의 강압으로 휴전이 이루어짐으로써, 아세안 중심성의 취약성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는 점이다. 아세안은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후부터 역내 문제 해결 능력을 의심받고 있었는데, 회원국 간 최초의 무력 충돌로 신뢰도가 한층 더 흔들렸다. 요컨대, 태국·캄보디아 분쟁을 계기로 ‘아세안 중심성’은 역사상 유례없는 혹독한 시험대에 오른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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