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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

수미 테리 사건으로 보는 워싱턴 로비

자연스럽게 인맥 쌓는 일본, 급할 때 ‘돈으로 구워삶는’ 한국

글 : 유민호  퍼시픽21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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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미 테리 사건은 최초의 한국계 연방 상원의원 후보인 앤디 김에 대한 경고일 수도”
⊙ 정보 수집 위한 소프트·하드 네트워크가 없는 한국, ‘한국계’에 매달리다 상대방 몰락시켜
⊙ 수미 테리에 대한 기소로 그친 것은 한국이 ‘우방국 프리미엄’ 덕 본 것
⊙ 일본 기업, 전직 고관을 ‘고문’ 영입해 고급 정보 획득하고 ‘합법적 보험’ 들어
⊙ 수미 테리 사건, 한미 관계가 아직 특급 비밀 정보를 나눌 사이가 아니라는 것 증명
⊙ 푸틴, 미국 기자 등 16명 내주며 자신의 비밀경호원 출신 암살자 크라시코프 데려가
⊙ 숄츠 독일 총리, 바이든 대통령에게 “당신을 위해, 일을 계속 추진할 것”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미 연방 검찰은 국정원 요원이 구매한 상품이 든 쇼핑백을 들고 수미 테리와 매장을 나서는 모습을 공개했다. 사진=미 연방 검찰
  ‘1년 52주, 2년 동안 104회 스페셜 시리즈로 만들 만한 흥미진진 스토리!’
 
  8월 초 미국·러시아 24명 스왑(Swap·교환) 뉴스를 본 순간 떠오른 생각이다. 미국이 8명, 러시아가 16명을 풀어준 세기적 ‘딜(Deal)’이 튀르키예 앙카라 공항에서 벌어졌다. 러시아가 넘긴 16명은 기자, 퇴역 군인, 반체제 인사 인권운동가들이다. 전부 스파이 혐의로 수감 중이었다. 미국이 넘긴 수감자도 스파이, 암살 같은 배경을 갖고 있다.
 
  미·러 스왑 뉴스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스파이 스토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무려 3년 이상 끈 양국 간 딜과 관련해 양국 대통령이 직접 관여했다는 점, 미국 CIA와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같은 정보기관이 주도했다는 부분, 스왑에 직간접 관련된 나라가 무려 10여 개국에 달하는 글로벌 인텔리전스란 점도 ‘아주’ 흥미롭다. 스파이 스왑은 스파이 사건 그 자체보다 몇 배 더 비밀스럽고도 흥미진진하다. 표면적인 뉴스와 실제 내막의 깊이가 전혀 다르다.
 
  명화(名畫) 감상법이지만, 눈앞에 보이는 그림이 전부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 밖 세계를 얼마나 이해하느냐가 명화 감상의 진수(眞髓)다. 단순히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그림 속에서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화가의 생각·꿈·인생, 당시 역사와 공기를 얼마나 ‘정확히’ 파악하는지가 명화 감상의 기본이다.
 
  24명 스왑 뉴스 중에서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석방이 헤드라인 뉴스다. 조감도(鳥瞰圖), 즉 새의 눈으로 내려다본다면 기자 석방은 눈요깃감 디저트에 불과하다. 1차, 2차 평면 뉴스가 아닌, 3차 입체적 차원에서의 세계를 관찰할 최적의 본보기가 24명 스왑 스토리 속에 녹아 있다.
 
 
  크라시코프와 나발니
 
  원래 미·러 스왑은 러시아의 철저한 무시로 아예 무산될 뻔했다. 그러나 체첸 지도자를 암살한 러시아인 바딤 크라시코프가 CIA에 포착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크라시코프의 전력(前歷)은 푸틴의 비밀경호원이다. 개인적으로도 푸틴과 가깝다. 크라시코프는 2019년 8월, 독일까지 건너가 체첸 독립운동을 벌이던 인물을 살해한다. 체포 뒤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며 비밀을 지킨다.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국가적 영웅인 셈이다. 푸틴은 수차례에 걸쳐 “크라시코프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이며 영웅”이라고 격찬했다.
 
  미국이 크라시코프를 넘길 경우 거기에 따른 반대급부가 반드시 따를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된다. 문제는 크라시코프가 독일 감옥에 수감된, 독일 주권하의 인물이란 점이다. 무려 1년 이상 설득하자 마침내 독일이 크라시코프 석방에 찬성한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었다. 스왑 리스트에 러시아 반체제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를 추가하는 것이었다. 나발니는 푸틴의 최대 정적(政敵)이다. 독성신경제 노비촉 테러를 당한 뒤 독일에서 치료를 받고 살아난 인물이다. 이후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 반푸틴 운동을 전개하던 중 수감된다. 크라시코프를 넘기는 대신 나발니를 돌려받는다는 것이 독일 정부의 조건이자 요구였다.
 
  미국은 자국민과 나발니가 포함된 석방자 명단을 러시아에 넘겼다. 러시아도 크라시코프가 석방된다는 전제하에 일단 응했다. 밀고 밀리던 협상 도중, 올해 2월 예상치 못한 사건 하나가 터진다. 나발니가 수감 중 갑자기 숨진 것이다. 러시아가 의도적으로 죽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예고된’ 비극. 미국의 묵시적 침묵하에 기획된 미·러 협상의 희생양이란 얘기까지 나온다. 푸틴이 크라시코프를 위해 정적 나발니까지 풀어줄 리가 없다는 것이 일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크라시코프 이펙트’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8월 1일 공항까지 나가서 미국과의 스파이 스왑으로 석방된 바딤 크라시코프를 맞이했다. 사진=AP/뉴시스
  결과적으로 나발니 사망은 스왑의 큰 장애물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이든은 올해 6월 초 독일 총리 울라프 숄츠에게 전화를 걸어 크라시코프 석방에 관한 최종 결심을 묻는다. 숄츠는 당시 “당신을 위해, 일을 계속 추진할 것이다(For You, I Will Try to Do This)”라고 말했다고 한다. 바이든의 친구로서, 미국의 우방으로서 크라시코프를 풀어주겠다는 의미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24명 스왑이 이뤄진다.
 
  주목할 부분은 스왑 대상자가, 러시아가 내준 사람이 16명으로 미국이 풀어준 8명보다 배나 많다는 부분이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크라시코프를 구하라”는 푸틴의 절대명령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지친 러시아인이 보면 ‘크라시코프 무사 귀환=푸틴의 위업, 러시아의 명예’로 받아들일 것이다.
 
  크라시코프의 석방은 푸틴의 목숨 유지와 직결된 문제라는 점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독재자는 대개 자기 주변 배신자에게 목숨을 잃는다. 비밀경호원 출신 크라시코프의 석방은 푸틴 주변을 120% 충성일꾼으로 채울 수 있는 최적의 약속이자 보상이다. 크라시코프 석방 당일, 푸틴은 직접 공항에 나가 자신의 충복을 기쁘게 맞이했다. ‘크라시코프 이펙트(effect)’라고나 할까? 적어도 당분간은, 내부 총질에 의한 푸틴 실각(失脚)은 없을 듯하다.
 
  24명 스왑 내막을 보면, 미국의 글로벌 전략과 네트워크에 새삼 놀라게 된다. 크게 두 가지다. 우방국과 함께 하나로 뭉쳐 러시아를 상대하는 미국의 협상력과 우방국의 미국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남다르다는 점이 감탄할 내용이다.
 
  첫째, 미국의 협상력을 보자. 미국은 스왑과 관련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러시아인 수감자를 찾아 나섰다. 서로 주고받기 위해서는, 매력적인 메뉴를 러시아에 보여줘야만 한다.
 
  독재국가의 관리는 스스로 나서서 메뉴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이다. 실패할 경우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회담장에서 일방적으로 큰소리는 칠 수 있지만, 자국 독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쇼’에 불과하다. 푸틴, 시진핑, 김정은을 제외한 모두가 파리 목숨이다. 미국이 구체적으로 제안하면 거기에 맞춰 반응하는 것이, 러시아·중국·북한의 공통적인 대응법이다.
 
  미국은 반대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그러하듯, 필요한 경우 밑에서부터 메뉴가 올라온다. 미국은 독일·슬로베니아·폴란드·쿠웨이트·남미에 이르는 수많은 나라와 접촉해, 푸틴의 입맛에 맞을 메뉴 작성에 들어갔다. 이라크 전쟁만이 아니라, 스왑조차 우방국들과 함께하자는 것이 미국의 21세기 협상 전략이다.
 
 
  미국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미국의 진짜 파워
 
  둘째, 미국에 대한 우방국들의 기대와 신뢰에 대해 알아보자. 간단한 의문이지만, 왜 각 나라가 자국민 석방을 위한 러시아와의 직접 딜에 나서지 않았을까? 푸틴을 상대로 한 협상이 성공하기도 어렵지만, 동등한 레벨의 보상이 이뤄질지도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아직’ 러시아는 대국(大國)이다. 대국 눈에는 대국 아니면 전부 소국(小國)이다. 중진국이나 중선진국, 나아가 ‘거의 대국’도 전부 소국이다. 슬로베니아는 러시아 고정간첩 부부 2명을 미국에 넘겼다. 200만 인구의 나라가 러시아 스파이 2명을 돌려보낸다고 해도 푸틴이 응할지, 격에 맞는 보상을 할지 아무도 장담 못 한다. 슬로베니아는커녕, 독일조차도 러시아를 상대로 한 직접 교섭에 나서기 어렵다.
 
  이와 같은 현실을 잘 아는 미국은 우방국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면서 함께 협상에 나섰다. 우방국들은 미국의 생각에 응했다. 21세기 외교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다. 아마 이면에서는 석방에 따른 미국 측의 반대급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미국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없다면 자국 주권하에 있는 러시아 수감자를 풀어줄 리가 없다.
 
  24명 스왑 과정을 보면, 러시아는 철저히 단독으로 움직이고 있다. 반면 미국은 우방국을 끌어들여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 과연 미국이 약해서일까? 눈앞의 힘자랑보다, 눈에 드러나지 않는 기대와 신뢰가 진짜 파워다.
 
 
  워싱턴은 100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
 
  당연하지만, 미·러 스왑의 중심 무대는 워싱턴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물론, 전 세계를 오가며 벌어진 첩보 드라마지만, 딜에 관련된 소프트·하드 네트워크의 중심은 바로 워싱턴이다.
 
  ‘뉴욕=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말이 있다. 워싱턴은 어떨까? 필자에게는 ‘워싱턴=아르고스(Argos)’로 느껴진다.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눈이 100개 달린 괴물이 아르고스다. 아르고스처럼 100개의 눈을 24시간 뜬 채 전 세계를 살핀다. 워싱턴은 뉴욕처럼 잠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평생 눈을 뜬 채 잠잘 수 없는 운명으로 태어났다.
 
  신화 속 아르고스가 음악을 듣다가 잠이 들면서 파국(破局)을 맞이하듯, 눈 100개를 가진 워싱턴도 시계(視界) 제로에 빠질 때도 있다. 멀리는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서, 가까이는 2001년 9·11 동시 테러 사건이 좋은 본보기다.
 
  그러나 전 세계 빅뉴스의 배경을 보면 ‘반드시’ 워싱턴 정치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 미국은 눈 100개를 굴리면서 지구 핵심 이슈에 적극 개입한다. 거꾸로 얘기하자면, 눈 100개에서 벗어난, 워싱턴 글로벌 정치가 작용하지 않는 문제는 이슈 자체가 될 수 없다.
 
  현재 미얀마에서는 민주 세력과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軍部) 세력 간의 내전(內戰)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물론 다른 나라 또한 대부분의 보통 사람은 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워싱턴 100개의 눈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미군을 쫓아낸 아프가니스탄이라지만, 아르고스 눈에서 벗어날 경우 지구 밖에 존재하는 혹성처럼 외면당한다.
 
  미·러 스왑은 바로 ‘워싱턴 아르고스 정치’의 결과물이다. 워싱턴 아르고스의 주식(主食)은 정보다. 워싱턴은 미국만이 아닌, 글로벌 정보의 보고(寶庫)다.
 
  정보는 공개적으로 떠도는 ‘인포메이션(information)’, 비밀로서 소수에게만 허용된 ‘인텔리전스(intelligence)’로 나눠진다. 팩트로서의 1차 정보, 분석으로서의 2차 정보, 평가로서의 3차 정보, 전망으로서의 4차 정보로도 분류할 수 있다.
 
  당연히 정보는 돈이다. 인포메이션보다는 인텔리전스가 고가(高價)로 거래된다. 인포메이션과 인텔리전스를 적당히 활용하면서 1차, 2차, 3차, 4차 정보로 갈수록 가격도 올라간다.
 
  필자는 1999년 이래, 워싱턴에 기반을 두고 에너지 관련 정보 비즈니스에 종사해왔다. 간단히 말해, 국제시장에서의 에너지에 관한 정책 관련 정보 수집·분석·전망이다. 간과하기 쉬운데, 워싱턴은 국제 에너지 가격과 정책을 결정하는, 에너지 관련 글로벌 총본부다. 에너지의 영역은 넓고도 깊다. 워싱턴의 모든 정보가 에너지 문제와 관련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8월 초 글로벌 주식 대폭락의 출발점도 워싱턴이다. 이란 미사일 발사대 배치가 워싱턴 정보망에 걸리면서 전 세계 주식이 급락(急落)한 것이다.
 
 
  한국계 최초 연방 하원의원의 몰락
 
최초의 한국계 연방 하원의원 김창준. 사진=퍼블릭 도메인
  아시아판 스파이 스토리라고 할까? 7월 17일 워싱턴발(發) 한국계 스파이 사건이 터졌다.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 대북(對北) 전문가인 수미 테리가 한국 국가정보원의 돈과 브랜드 가방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는 뉴스다. 문재인 정권 당시 저질러진, 아마추어 인텔리전스의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남을 외교적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스파이 사건이 발각됐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스파이 사건의 내용이 너무도 미개하고 무식하다. 미·러 스왑 내막을 보면 ‘돈으로 삶는다’는 식의 얘기는 전혀 없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우선이다.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흔히 보는 모습이지만, 무식하면 ‘여기 제일 비싼 와인 주세요’로 간다. 정보 수집을 위한 소프트·하드 네트워크가 없는 상태에서 돈으로 환심을 사려다 걸린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수미 테리의 경력과 한국어 능력이 국정원으로 하여금 작전에 나선 계기가 됐을 듯하다. 편견일지 몰라도, 워싱턴에 있는 한국 정보력을 보면 영어로 상대를 설득할 만한 능력 자체가 없다.
 
  1993년 한국계 최초의 미 연방 하원의원(김창준)이 탄생했다. 그는 3선까지는 성공했지만, 4선에서는 예비 선거에서 좌초했다. FBI가 불법선거자금 수사를 하면서 탈락한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가 있지만, 한국 정부가 기업·대리인을 통해 선거자금을 댄 것이 보도되면서 그의 정치생명도 끝났다. 서로 한국어로 소통하면서 정을 나누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 과정에서 한국식 뇌물이 제공됐다는 보도가 터져 나왔다. 한국계 최초의 하원의원을 추락시킨 장본인은 바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국인, 한국 정부인 셈이다.
 
 
  ‘우방국 프리미엄’
 
CSIS 선임연구원 시절의 수미 테리. 사진=조선DB
  어느 수준의 정보까지 국정원으로 흘러들어 갔는지 현재 보도된 뉴스만으로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수미 테리가 전직 CIA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직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급 정보를 가까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나름 이유와 명분이 있겠지만, 수천 달러짜리 브랜드 가방을 공짜로 받는다는 것은 ‘워싱턴 퇴출(退出)’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워싱턴 싱크탱크 최고 석학(碩學)이라도 영어 3500자 정도 리포트 하나에 250달러 정도를 받는다. 2~3시간 노동의 결과가 250달러란 점을 감안하면, 수천 달러 공짜 가방은 변명이 될 수 없다.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진실이 드러나겠지만,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워싱턴 룰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사건이 터진 직후, 한국에서는 “왜 우방국 한국을 스파이 범죄 국가처럼 다루느냐”는 불만이 들려온다. 필자는 정반대로 생각한다. 우방국 한국이니까 수미 테리 기소 수준에서 끝났다고 보는 게 합당할 듯하다.
 
  수미 테리는 미국 시민권자다. 한국에서는 부모나 출생지를 근거로 한국과 연계시키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수미 테리는 미국에 세금을 내고 투표권도 갖고 있는 미국인이다. 그나마 ‘우방국 프리미엄’ 덕분에 뇌물을 준 국정원 직원과 상부 책임자에 대한 사법 조치 없이, 전직 CIA 출신 미국 여성만 문제시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만약 비슷한 사건을 중국이나 남미 국가 등이 저질렀다면, 관계자 소환 요구와 국제수배 나아가 미국 출입국 금지로 이어질 수도 있다. 미국은 이 같은 조치를 국정원과 한국 정부에 취하지 않고 있다.
 
  황당한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수미 테리 사건을 보면 왜 아직도 ‘바가지요금’이 한국에 존재하는지 알 듯하다. 일본보다 소득도 높아졌고, ‘K-자화자찬’이 끊이지 않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뉴스가 있는데 외국인 상대 택시요금 부당 청구, 숙박비·식비 바가지다. 필자가 지난 4월 노량진 재래식 가게에서 경험한 일인데, 4800원짜리 물건을 구입한 뒤 1만원을 내자 잔돈을 5000원만 건네줬다. “200원이 모자란다”고 하자, 주인인 60대 남성은 오히려 “푼돈인데 뭘 그렇게 신경을 쓰냐”며 화를 냈다. 그러며 험악한 표정으로 동전을 거의 내던지듯 건네줬다.
 
 
  ‘선물’이라지만…
 
  브랜드 가방과 돈을 둘러싼 한국판 스파이 사건을 보면, 당시 가게 주인의 ‘푼돈 200원 논리’가 겹쳐진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인은 가게 주인 생각에 동의하거나, 무심결에 따라가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논리의 연장선에서 보면, 바가지요금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재료도 비싸고 여기저기 다 값을 올리기에 나도 좀 비싸게 받는데, 왜 나만 걸고넘어지냐’는 논리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격으로, 200원에 대한 일을 이렇게 넘기면 나중에 2만원, 20만원, 200만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처음부터 이런 ‘푼돈 200원 논리’에 동의하는 한국인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끼리끼리 어울리다 보면 어느 틈엔가 ‘푼돈 200원 논리’에 대충 흡수되고, 이후 2만원, 20만원을 넘어 200만원, 그 이상으로 올라가도 무덤덤해진다. ‘자주 보고, 그러다 보니 식사도 하면서 얘길 나누게 됐고 그 과정에서 정성으로서의 선물을 제공했을 뿐…’이라는 것이 수미 테리 사건에서 나오는 변명 중 하나다.
 
  미국은 1센트, 일본은 1엔 단위로 계산을 한다. 한국으로 치면 10원짜리 정도다. 바가지요금이나 소도둑 근절용 ‘정신무장’으로서의 1센트, 1엔이라 볼 수 있다.
 
 
  ‘일본=돈 로비’라는 착각
 
  수미 테리 사건과 비교되는 모습이지만, 일본만큼 워싱턴 정보에 혈안(血眼)이 되어 있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필자는 일 때문에 일본인들과 만날 기회가 많다. 현재 워싱턴에 있는 일본 종합상사만 해도 100여 개가 넘는다.
 
  한국에서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일본=돈 로비’라는 등식이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뉴스인, ‘일본 돈 로비로 워싱턴 공격’이란 식의 스토리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일본이 워싱턴 로비에 쓰는 돈의 규모는 일본 국력 수준에 준하는 평균 정도에 그친다. 한국이 생각하는 ‘일본=왕창 돈 로비’는 피해의식에 기초한 편견에 불과하다.
 
  사실 ‘일본=돈 로비’는 일본인 스스로가 만든 말이기도 하다. 돈이 아니라, 군대와 무기를 직접 보내라는 보수계의 생각이 ‘일본=돈 로비’란 내부 비난으로 바뀐 것이다.
 
  국정원 직원이 브랜드 가방을 구입해 직접 넘겼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귀를 의심했다. ‘한국=돈 로비’란 생각과 함께, 한국식 ‘푼돈 200원 논리’의 연장선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회사 부장이 신입사원들을 불법 안마시술소에 데려간 뒤, 비용을 회사 카드로 처리했다는 식으로 들렸다. 일본에서는 이 같은 일이 벌어질 수가 없다. 도덕이나 윤리의식 때문이 아니라, 불법 비용을 회삿돈으로 처리할 경우 책임이 자기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을 아낀다는 이유로, 불법 지출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평소 고맙기 때문에 수천 달러짜리 가방을 선물한다는 것은 ‘푼돈 200원 논리’에서나 가능하다. 가방을 구입한 국정원 직원도 문제지만, 비용 지출을 허락한 상사가 있다는 점에서 국정원 전체가 ‘푼돈 200원 논리’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수미 테리 사건에서 나타난 국정원의 행적은 워싱턴 정보를 대하는 일본의 자세나 방식과 너무도 다르다. 일본은 어떤 식으로 아르고스 100개의 눈에 접근할까?
 
  크게 두 가지다. 모두에게 공개될 투명한 돈과 파티나 만찬을 통한 개인적 교류로 나눠진다. 공익에 주목하는 워싱턴 정책 집단의 재정은 기업이나 개인 기부금에서 시작된다. 워싱턴에 있는 200여 개의 크고 작은 싱크탱크가 대표적인 본보기로, 연방세법 501(C) 조항에 따라 기부도 받고, 세금도 면제된다.
 
  한국 기업도 행하고 있지만, 일본 법인들은 이들 501(C) 대상 조직에 대한 기부를 ‘정례화’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기업 수가 많은 만큼, 기부금 자체도 많다. 따라서 아시아 문제에 주목하는 워싱턴 싱크탱크라면 일본이 행한 기부금이 넘친다. 당연히 기부한 기업은 세금공제 혜택을 받는다.
 
  501(C)에 해당되는 조직의 기본 방침이지만, 외국 정부의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 개인이나 기업은 되지만, 외국 정부는 기부 자격에서 제외된다. 국정원은 한국 정부 조직이다. 따라서 싱크탱크에 기부할 수도 없고, 연구원에게 선물을 줘서도 안 된다. 기부와 관련해 싱크탱크는 기부자의 생각에 맞춘 정책을 논의할 필요도 없다. 기부는 받지만, 기부자 생각의 반대로 나아갈 수도 있다.
 
 
  정보 교류의 장, 홈 파티
 
  두 번째, 파티·만찬을 통한 교류는 어떤 식으로 이뤄질까? 일본 대사관의 경우 온갖 명목으로 파티를 연다. 워싱턴 정책 관계자라면 대사관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다. 일단 음식도 좋고 아시아 관련 정보와 네트워크가 전부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정보와 네트워크의 교류는 집에서 이뤄지는 홈 파티에서 시작된다. 주말이 되면 워싱턴 주재원들 집 여기저기서 파티가 벌어진다. 남자만이 아니라, 부인이나 자식도 전원 참석한다. 아무리 많아도 30여 명 수준으로 곳곳에서 열린다. 가능하면 자기가 알고 지내는 미국인을 데려와 서로 소개하면서 친분을 넓혀간다. 일단 홈 파티에서 얼굴을 익힌 뒤 밖에서 다시 정식으로 만나 친분을 되새긴다.
 
  워싱턴에는 의외로 일본어가 가능한 미국인이 많다. 당연히 홈 파티는 일주일간 수집한 워싱턴 정보의 교환 무대이기도 하다. 어느 레스토랑 메뉴가 좋다는 가십에서부터, 워싱턴 외교가나 정책 기관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얘기들이 교환된다. 물론 미국인에게 일본의 입장과 상황도 알린다. 소위 워싱턴 일본통의 대부분은 이 같은 홈 파티를 통해 자신의 인맥과 정보력을 넓힌다.
 
  한국은 어떨까? 일단 홈 파티에 익숙하지 않다. 취미나 담소에 집중하는 파티 문화 자체가 드물기 때문일 듯하다. 열더라도 남자를 중심으로 한 술판으로 변한다. 한국의 경우 워싱턴을 떠나는 순간, 현지와의 연(緣)도 끊어진다. 후임자에게 자신의 네트워크를 물려주는 경우도 드물다. 일본은 다르다. 중요한 인물은 식사나 홈 파티를 통해 서로 연결시켜준다. 인맥 독점도 드물고, 주재원이 일본으로 돌아가도 현지와의 연이 그대로 유지된다. 물론 이런 상황에 연이 있는 미국인이 도쿄로 부임할 경우 교류는 한층 더 심화될 수 있다.
 
 
  ‘자리’ 주면서 정보 확보
 
  현지 미국인 적극 활용은 일본식 정보 수집 방식 중 하나다. 수미 테리 사건이 터진 4일 뒤인 7월 20일, 흥미로운 워싱턴발 뉴스 하나가 떴다. 일본 최대 철강업체 일본제철이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을 고문으로 영입했다는 속보다. 미국 철강회사 US스틸을 인수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도 이어졌다.
 
  폼페이오 영입 기사를 보면, 워싱턴 글로벌 정치를 대하는 한일 간 차이점이 선명히 떠오른다. 한국은 직접 ‘돈’을 주면서 정보를 얻으려 하지만, 일본은 ‘자리’를 주면서 정보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비슷한 듯하지만, 불법과 합법으로 나뉠 수 있다.
 
  워싱턴 내 일본 대기업에 들러보면, 현지 채용 미국인 특별고문이 ‘반드시’ 있다. 대부분 유령 고문으로, 회사 출근은 거의 없다. 그러나 행사나 파티, 네트워크가 필요한 곳에는 반드시 나타난다. 고문 영입 비용은 최하 수십만 달러부터 시작된다. 필자가 보기에 폼페이오 영입에 따른 비용은 1년에 최하 수백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퍼스트 클래스 비행기와 특급호텔에 지출될 비용은 따로 계산된다.
 

  알 파치노 주연의 영화 〈대부(Godfather)〉 3부작을 본 사람이라면 ‘돈 콜레오네’ 바로 옆에 누가 앉아 있는지 기억할 것이다. 바로 변호사다. 유럽 선진국이 그러하듯, 일본은 법과 네트워크에 특화(特化)한 고문 하나 영입에 수십만·수백만 달러를 퍼붓는다. 엄청 비싸지만, 고급 정보를 얻고 만약에 대비한 ‘합법적인’ 보험이라 보면 된다.
 
  한국 기업도 고문을 두고 있긴 하다. 그러나 내막을 보면 위인설관(爲人設官)에다 한국계 고문이 대부분이다. 고급 정보나 보험이 아니라, 서울 회장님의 한국계 친구를 위한 자리에 불과하다. 도움은커녕 짐만 될 뿐이다.
 
 
  최초의 한국계 연방 상원의원 후보
 
한국계 최초로 미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하는 앤디 김. 사진=AP/뉴시스
  8월 7일,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팀 월츠 미네소타 주지사가 결정됐다. 바로 다음 날, 일본의 신문·방송에 팀 월츠와 만났던 일본인, 일본 미디어와의 인터뷰 내용이 폭증했다. 공화당 부통령 후보자 J.D 밴스도 마찬가지다. 부통령 후보 선정 즉시, 과거 일본인이 행했던 밴스에 대한 인터뷰가 넘쳐났다.
 
  두 사람을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눈 한국인, 한국 미디어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트럼프는커녕, 그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2024년 여름 한국 외교의 현실이다. 필요할 때 왕창 돈으로 구워삶는 것이 아니라, 평소 파티나 식사를 통해 인간관계를 다지는 것이 외교의 기본이다.
 
  최근 워싱턴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60대 일본인과 통화를 했다. 수미 테리 문제와 관련해 얘기를 나누던 중 한국계 최초의 연방 상원의원 후보자가 된 뉴저지주(州) 출신 연방 하원의원 앤디 김이 화제가 되었다. 그 일본인은 “수미 테리 문제가 앤디 김에 대한 경고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미국 연방 상원의원은 미국 대통령에 버금가는 자리다. 연방 상원의원을 통하면 백악관·의회·행정부 그 누구와의 접촉도 가능하다. 한국인이라면 앤디 김이 당선되도록 지원하고 싶을 것이다. 한국 정부도 이 같은 사실을 놓칠 리가 없다. 상원의원 민주당 최종 후보 경선과 관련해, 앤디 김에 대한 한국계의 지원·지지가 엄청나다고 한다. 뉴저지주는 한국인이 몰려 사는 곳이기도 하다.
 
  앤디 김에 대한 이런 지원 열기는 좋지만, 자칫 미국법에 저촉될 수 있다. 한국 정부와 관련된 돈이 들어갈 경우, 고의성 여부와 무관하게 선거법 위반으로 체포될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뉴저지주 전임 상원의원은 이집트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서 실각했다. 2006년부터 뉴저지주를 장악한 민주당의 밥 메넨데즈가 그 주인공이다.
 
  우연이자 필연이지만, 수미 테리 사건이 터진 바로 그날, 메넨데즈는 뇌물 수뢰 관련 16개 사안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한국계 최초의 연방 하원의원 김창준씨는 한국 정부의 지나친 관심 때문에 실각했다. 노파심이지만 앤디 김의 성공을 원한다면 무관심이 최고의 지지와 지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특급 비밀 정보 나눌 수 있어야 진정한 우방
 
  이스라엘-이란 긴장 고조,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 전쟁,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운명, 총리가 도망간 방글라데시 신정부, 대만해협의 안전, 북핵에 맞선 미국의 대응….
 
  전부 워싱턴 아르고스를 통해 다뤄지거나 다뤄질 글로벌 테마이자 숙제다. 재삼 강조하지만, 워싱턴 아르고스를 감동시킬 진짜 무기는 신뢰에서 출발한다. 반미(反美) 신자들이 보면 불편하겠지만, 워싱턴 아르고스 눈의 수와 관찰력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불빛이 다소 약해지긴 했지만, 황혼(黃昏)의 대국은 아니다.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백야(白夜)의 나라’라고 할까? 따뜻하지 않다고 무시하기 십상이지만, 그 빛이 사라지는 순간 방향도 잡기 어려운 암흑세계로 변할 수 있다.
 
  스파이 스왑도 우방·동맹과 함께한 나라가 미국이다. 약해서가 아니라, 서로 믿기 때문에 함께 갈 수 있다. ‘스파이’란 말이 들어간다는 것은 특급 비밀 정보가 곳곳에 깔려 있다는 의미다. 진짜 친구이자 우방국은 이 같은 특급 비밀 정보를 나눌 수 있고, 나눠야만 한다.
 
  수미 테리 사건은 한미 관계가 아직 특급 비밀 정보를 나눌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호 신뢰다.
 
  숄츠 총리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바이든에게 말했다.
 
  “당신을 위해, 일을 계속 추진할 것이다.”
 
  과연 한국 지도자가 동맹국 대통령에게 이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까? 아직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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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kamori    (2024-08-22) 찬성 : 0   반대 : 0
항상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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