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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시진핑의 역설

韓流 도약 계기된 限韓令

한국, 중국의 限韓令 이후 일본과 가까워지면서 시너지 효과 창출

글 :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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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이 동양의 할리우드 될 것”이라며 중국에 올인했던 이수만의 몰락
⊙ K콘텐츠, 限韓令 계기로 세계로 눈 돌리면서 진정한 글로벌 콘텐츠로 업그레이드
⊙ 중국 대중문화시장, 생각보다 소비여력·소비의욕 낮아
⊙ 중국 정부가 한한령 해제한다지만, 이제는 중국 대중이 반한 정서 표출
⊙ 〈이태원 클라쓰〉가 〈롯폰기 클라쓰〉로 리메이크, 〈미스터트롯〉 일본판 제작, 〈한일가왕전〉 방송 등 한일 협력 심화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2021년 11월 28일 미국 LA 소파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방탄소년단의 콘서트. 중국 한한령은 역설적으로 한류의 세계화를 촉진했다. 사진=연합뉴스
  글로벌 대중문화계에서 지난 1년여는 ‘일본의 부활’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붙을 만큼 일본 대중문화 콘텐츠의 글로벌 약진(躍進)이 크게 눈에 띄었다. 먼저 지난 3월 11일 열린 제96회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그간 존재감이 흐릿해졌다는 평가를 받던 일본 영화들이 오랜만에 상을 받았다. 장편 애니메이션상과 시각효과상 등 2개 부문 상이 쟁쟁한 할리우드 영화들을 제치고 일본 영화에 주어졌다.
 
  장편 애니메이션상은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돌아갔다. 이로써 미야자키 감독은 2002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수상에 이어 아카데미상을 2회 이상 수상한 최초의 일본인이 됐다.
 
 
  “일본 영화가 부활했다”
 
올해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한편 시각효과상을 수상한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이보다도 상징성이 크다. 일본에서 ‘특촬물(特撮物)’이라 불리는 일본식 특수촬영 블록버스터의 대표격 ‘고질라’ 시리즈 30번째 영화인 데다, 할리우드 주특기라 여겨져 온 시각효과 부문에서 해외 영화가 수상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작비 역시 미화(美貨) 기준 1500만 달러 이하로 만들어져 각각 1억 달러 이상이 투입된 할리우드 영화들에 맞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다는 점 등에서 더더욱 의미가 깊었다.
 
  이에 일본 최대 포털사이트 야후재팬의 관련 기사 댓글란에는 “일본 영화가 50년 만에 부활했다”는 등 격앙(激昻)된 반응들이 속속 튀어나왔다.
 
  아카데미상 수상보다도 더 눈길이 가는 건 두 영화의 북미 시장 흥행 성적이다. 지난해 12월 북미 개봉한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첫 주말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한 뒤 롱런해 북미에서만 5642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성과를 거뒀다. 이는 역대 일본 실사 영화 사상 북미 최고 흥행 기록이며, 21세기 들어 북미 개봉한 비(非)영어 영화 전체를 놓고 봐도 최고 흥행 기록이 된다. 쉽게, 〈기생충〉의 기록을 경신(更新)했다는 뜻이다. 한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도 〈고질라 마이너스 원〉 바로 다음 주 북미 개봉해 이번엔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기염(氣焰)을 토했다. 최종 흥행 성적도 4683만 달러로, 미야자키 감독 영화의 역대 북미 흥행 성적 중 최고치에 올랐다.
 

  물론 이처럼 일본 영화들이 ‘갑자기’ 치고 나오는 바람에 초미(焦眉)의 관심거리가 되긴 했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 꾸준히 성장해온 한국 영화의 글로벌 존재감도 여전하다. 위 제96회 아카데미상 시상식만 해도 그렇다. 비록 수상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미국 제작사 A24와 한국의 CJ ENM이 함께 제작한 한미(韓美) 합작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가 본상 부문이라 할 수 있는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로 지명되는 호재(好材)를 맞았고, 이 덕에 전 세계 흥행 수익 4192만 달러를 거둬들이며 저예산 독립영화로서 흥행 돌풍을 낳았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개봉 첫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등 유럽 시장에서의 성과가 남달랐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송하영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한국계 캐나다인 감독 셀린 송이 각본과 감독을 맡았고, 송 감독은 한국 영화 〈넘버 3〉 〈세기말〉 등을 연출한 송능한 감독의 딸이기도 하다. 주연도 한국 배우 유태오와 한국계 미국 배우 그레타 리가 맡았으며, 유년 시절 한국에서 인연을 맺은 소년·소녀가 소녀의 캐나다 이민으로 헤어졌다가 20여 년 뒤 미국 뉴욕에서 재회하는 상황을 담았다. 그래서 대사도 절반 이상이 한국어로 채워져 있다.
 
 
  코첼라 페스티벌의 한국과 일본
 
  이렇듯 한국과 일본이 미국 등 서구 대중문화 시장에서 ‘동시에’ 주목받는 광경은 현시점 대중문화 부문 곳곳에서 목격된다. 예컨대 TV드라마 부문도 그렇다. 〈오징어 게임〉 이후 세계 최대 OTT 넷플릭스를 무대로 한국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 〈더 글로리〉 〈마이 네임〉 등이 연이은 성공을 거뒀다면, 일본 드라마 역시 〈아리스 인 보더랜드〉 〈시티헌터〉 등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며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한편 대중음악 부문에서 ‘한일 동시 주목’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지난 4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코첼라 밸리에서 열린 북미 최대 음악 페스티벌 ‘코첼라 페스티벌(Coachella Valley Music and Arts Festival)’의 초청 아티스트 상황이다. 올해로 24회째를 맞이한 ‘코첼라 페스티벌’은 그에 초청받아 무대를 펼치는 것만으로 북미 및 서구 대중음악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아티스트 중 하나가 됐음을 인정받는 행사다.
 
  한국은 2016년 이후 블랙핑크, 에픽하이 등이 꾸준히 초청받아오다 올해는 역대 최대 규모인 7팀이 초청받았다. 아이돌그룹 르세라핌과 에이티즈부터 DJ 페기 구, 록밴드 더로즈 등까지 그 면면도 다양했다. 그런데 일본 J팝 아티스트들도 이번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역대 최다 초청을 받았다. 요아소비, 아타라시각코, 하쓰네 미쿠, 넘버아이, 아위치 등 5팀이며, 마찬가지로 아이돌그룹부터 솔로 힙합 아티스트, 가상(假像) 캐릭터인 버추얼 아이돌까지 다양한 면면으로 구성됐다.
 
 
  게토화되는 중국 문화
 
  말 그대로 세계 대중문화계의 ‘동아시아 열풍’이다. 근본적으로는 신(新)냉전 양강(兩强) 구도의 한 축(軸)으로서 중국의 정치·경제적 존재감과 위협감에 서구 사회의 관심이 동아시아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가 벌어진 현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기서 한국과 일본은 충분히 수혜(受惠)를 얻고 있지만, 정작 불을 지핀 중국의 대중문화는 그 수혜를 전혀 받지 못한 채 게토(ghetto)화되고 있는 아이러니가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
 
  실제 현실이 그렇다. 현시점 영화나 TV드라마, 대중음악, 만화 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중국 콘텐츠가 세계 무대에서 반향(反響)을 일으키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아장커, 장위엔, 로우예, 왕샤오슈아이 등 중국 6세대 감독들이 체제 비판적인 지하영화(地下電影), 즉 당국의 통제를 피해 만든 비(非)제도권 영화들로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는 경우는 종종 있어 왔지만, 그 성과가 글로벌 상업적 가능성 및 문화 영향력으로 이어진 일은 없다. 그저 중국계 1, 2세들 삶을 다룬 미국 등지 서구 콘텐츠만 세계 무대에서 눈에 띌 뿐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이미 존재한다. 중국의 문화적 ‘표현의 자유’ 문제라는 것이다. 전체주의 통제 사회 중국에선 글로벌 스탠더드에 걸맞은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기에 애초 자유세계와는 문화적 소통이 불가능하며 그러니 콘텐츠에서 이렇다 할 공감도 매력도 찾아낼 수 없다는 논리다. 확실히 이 부분은 문화예술 발전에 있어 핵심축에 해당하는 개념이기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그러나 근래 들어선 또 다른 측면도 종종 언급된다. 지금의 중국 대중문화계는 전반적으로 ‘활력’을 잃은 모습이라는 점이 생각보다 주요한 원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할리우드식으로 특수효과 등 제작 규모만 계속 커질 뿐 이렇다 할 산업적 이노베이션(innovation)은 보이지 않고, 전반적으로 예술창작 시스템의 환기(換氣)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렇게 점점 아이디어는 부실해지고 소위 ‘고인 물’이 돼간다. 어떤 의미에서 이 같은 산업적 활력의 부재는 ‘표현의 자유’ 이전의 문제라고까지 볼 만하다. 새로운 것을 시도해볼 역동성(力動性) 자체가 떨어지면, 지금 중국 대중문화계가 정확히 그러하듯, 그저 해외 콘텐츠를 거의 표절 수준으로 베껴 답습하는 일만 반복하게 마련이다.
 
 
  ‘限韓令의 축복’
 
  이에 지금의 중국 대중문화계 딜레마는 중국이 2016년 ‘주한미군 사드(THAAD) 배치 논란’을 기점으로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 유입을 보이콧하는 소위 ‘한한령(限韓令)’을 내린 데서부터 시작된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라는 주장도 진지하게 거론되는 실정이다. 나아가 그간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일본 대중문화가 어느 순간 되살아나 한국과 쌍두마차(雙頭馬車)로 동아시아 문화의 서구 시장 공략 한 축을 맡게 된 것 역시, 앞서 언급한 동아시아 문화에의 부풀어 오른 관심 외에, 바로 저 한한령이 일으킨 나비 효과가 일정 수준 존재한다는 것. 다소 복잡하게 들릴 수 있지만 풀어보면 쉽다.
 
  먼저 한한령 자체에 대해 새삼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한한령이 그간 한국 대중문화산업에 어떤 변화를 미쳤는지 정도는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7년여에 걸친 흐름을 잘 정리한 《조선일보》 2023년 12월 13일 자 기사 〈한국 때리기 나선 ‘한한령’… 중국이 오히려 피해 더 컸다[송의달 LIVE]〉를 보자.
 
  〈당시 중국 사업으로 큰돈을 벌던 한국 엔터테인먼트·게임 회사들의 주가(株價)는 폭락했다. ‘이제 한류(韓流)는 끝났다’는 탄식과 비관론이 들끓었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한한령에 따른 벼랑 끝 위기를 거뜬히 이겨냈다. 중국 취향에 억지로 맞추고 그들의 간섭을 수용하던 제작 방식을 벗어던진 게 승부수(勝負手)였다. 김윤지 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한한령을 계기로 K콘텐츠는 동남아와 북미, 유럽 등으로 눈을 돌리면서 진정한 글로벌 콘텐츠로 업그레이드했다”고 말했다.
 
  단적으로 2016년 60억 달러이던 K콘텐츠 총수출액은 2021년 124억 달러대로 5년 만에 배 넘게 늘었다. 중국인 멤버가 없는 방탄소년단(BTS)이 빌보드 차트 세계 1위에 올랐고,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4관왕 수상,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에미상 6개 부문 석권도 이어졌다. (…) 2015년 51개국이던 K팝 수출 대상국은 2021년 말 148개국이 됐다. 중국에서 6년 넘게 사실상 쫓겨난 K콘텐츠가 대중(對中) 의존을 끊고 진일보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한령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폭제였다.〉

 
  여기까지는 이미 언론미디어 보도가 꾸준히 이뤄져온 부분이라 많이들 인지하고 있을 듯싶다. 일시적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오히려 ‘한한령의 축복’이라고까지 여겨지고 있다는 점 말이다. 한국 대중문화산업 스스로는 좀처럼 결단하기 힘들었던 미래지향적 체질 개선이 한한령 덕에 ‘자동적으로’ 이뤄지게 됐다는 것이다.
 
 
  ‘안전한 시장’ 일본과의 상생
 
〈프로듀스 48〉은 한국과 일본 아이돌 가수와 연습생이 경쟁하는 한일 합작 프로그램이다. 사진=CJ E&M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함께 이뤄진 것이 한국 대중문화산업의 중심 타깃 시장 이동 및 전략적 파트너십 구축 대상의 변화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 대중문화계에선 ‘일본에서 시작해 중국으로 간다’는 말까지 돌 정도로 한류의 궁극적 목표는 15억 중국 시장이라는 ‘중국몽(中國夢)’이 강했지만, 한한령을 겪고 보니 중국은 그야말로 ‘어찌 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시장이었던 반면 일본은 아무리 혐한(嫌韓) 분위기가 일부 형성돼 있다 해도 정책적으로 문화 흐름 자체를 막지는 않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시장임을 뼈저리게 통감(痛感)한 것이다.
 
  이렇듯 일본 시장의 중요성이 더없이 강조되면서 이전까지 특별히 강조되지 않았던 일본과의 상생(相生) 전략도 적극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일본 시장에 침투해 시장을 키워나간다는 기존 전략에서 이제 수많은 일본 기업들과의 합작 및 인적(人的) 교류를 통해 밀도 높은 공생(共生) 관계를 형성한다는 전략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 그렇게 만들어진 촘촘한 관계망을 통해 시장 안정성을 드높인다는 발상이었다.
 
  그 첫 시도 중 하나가 2018년 Mnet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48〉이었다. 한국의 CJ ENM이 일본 연예기획사 오피스48과 합작, AKB48 등 오피스48 소속 걸그룹 멤버들과 한국 아이돌 연습생들을 한데 모은 후 그중에서 데뷔 멤버들을 오디션으로 선발해 한일 합작 걸그룹을 만든다는 기획이었다.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한 한일 합작 걸그룹 아이즈원은 한국과 일본을 차례로 오가며 현상적 인기를 구가했고, 곧 이 같은 발상은 K팝 업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됐다. 예컨대 CJ ENM에서 일본 현지화 K팝 그룹 JO1, INI 등을 관리하는 산하 레이블 라포네엔터테인먼트는 지배구조가 CJ ENM 70%, 일본 연예기획사 요시모토 흥업(興業) 30%로 구성돼 있다. 이 밖에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K팝 법인들이 많다.
 
 
  한국 배우에 일본 감독
 
한국의 인기 TV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는 일본에서 〈롯폰기 클라쓰〉로 리메이크됐다.
  한편, 영화나 TV드라마 등 영상미디어 분야에선 합작도 합작이지만 특히 일본과의 인적 교류가 한한령 이후 크게 활성화된 분위기다. 배우들은 물론이고 영화감독들까지 이에 동참하는 흐름이다. 이전부터도 한국 영화감독 곽재용 등이 일본 영화 연출을 맡는 경우는 있었지만, 근래 들어선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일본영화계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일본 영화계의 이단아(異端兒)로서 특히 서구 인지도가 높은 미이케 다카시 등 일본 유명 감독들이 한국 영화나 한국 TV드라마 연출을 맡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그렇게 5~6년이 흐른 지금 상황을 담은 더팩트 2024년 7월 22일 자 기사 〈[한일 콘텐츠 협업 (1)] 韓 배우에 日 감독… 함께 만드는 드라마·예능〉을 살펴보자.
 
TV조선은 일본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요시모토 흥업 등과 방송 포맷 사용권 등에 관한 제휴를 맺었다. 사진=조선DB
  〈국내 콘텐츠 기업들도 일본과 적극적으로 손잡고 있다. 중앙그룹 계열사인 스튜디오 SLL중앙은 지난 5월 17일 일본 TV아사히와 콘텐츠 비즈니스 분야 MOU를 체결했다. (…) TV아사히는 SLL 제작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를 〈롯폰기 클라쓰〉로 리메이크하며 인연을 맺어 콘텐츠 비즈니스 분야에서 협력 관계를 확대하겠다 밝혔다. CJ ENM은 앞으로 3년간 일본 지상파 방송사 TBS와 3편 이상의 지상파 드라마와 2편의 영화를 함께 만든다고 지난 5월 10일 밝혔다. CJ ENM은 “공동 제작 드라마는 TBS 채널을 통해 방영될 예정이고, 최소 1편 이상의 드라마는 내년 TBS 골든타임 편성이 이미 확정됐다”고 알렸다.
 
  드라마뿐 아니라 예능도 한일 합작이 활발하다. TV조선은 〈미스터트롯〉 시즌3와 함께 일본판 제작 소식을 최근 알렸다. 앞서 TV조선은 〈미스터트롯 3〉 론칭을 앞두고 일본 대형 엔터사 요시모토 흥업과 MOU를 체결했다. (…) 이에 앞서 MBN은 〈한일가왕전〉과 〈한일톱텐쇼〉를 방송했다. 지난 4월 2일부터 5월 7일까지 방송된 〈한일가왕전〉은 MBN 〈현역가왕〉과 일본 〈트롯걸즈재팬〉을 통해 선발된 톱7이 대결을 펼친 프로그램이다. 이후 이 프로그램의 확장판으로 지난 5월 28일부터 〈한일톱텐쇼〉가 방송되고 있다. (…) KBS 〈개그콘서트〉는 일본 개그맨과 합동 공연을 펼친다. 해당 공연 역시 요시모토 흥업과의 협업이다.〉

 
 
  일본, 자신들의 장점 재발견
 
  이처럼 한한령 이후 한국과 일본은 문화적으로, 또 문화산업적으로 역사상 가장 가까운 관계가 됐다. 산업적 운명공동체 관계가 점점 더 깊숙이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한일 대중문화산업은 서로 얻은 것이 상당하다는 관찰이다. 한국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불안정해진 영화와 TV드라마 등 영상미디어 분야의 상업적 기반 문제를 놓고 가장 충성도 높은 시장의 안정적 확보를 통해 활력을 제고(提高)하고 있다. 한편 일본은 특히 아이돌산업 등에서 한국의 시스템과 노하우를 습득하면서 엔터테인먼트라는 이름의 유행산업 속성에 대해 보다 글로벌한 비전을 얻어가게 됐다. 그렇게 한때 ‘고인 물’로 문제가 된 일본 대중문화산업에도 새롭게 ‘활력’이 불어넣어졌다는 분석이다. 또 있다. 필자는 올해 초 한 일본 대중문화 월간지 기자로부터 또 다른 한일 협력 관계 의의(意義)를 들은 바 있다.
 
  “한국과 문화산업적으로 가까워지게 되니 가장 먼저 한국에선 일본의 어떤 콘텐츠를 좋아하는지 관찰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의식 자체가 바뀐 부분이 크다. 늘 아이돌 댄스그룹이나 사실적인 스릴러 영화 등 한국이 이미 잘하는 것들을 쫓아가려다 보니 패배감만 커졌을 뿐,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특촬물 등 서브컬처 분야나 밴드음악 등은 역시 한국보다 일본 쪽 풀(pool)이 좋고 노하우를 갖췄기에 경쟁력이 있어 한국에서도 사랑받는다는 걸 알게 됐다. 결국 한국은 한국이 잘하는 것을 하고 일본은 일본이 잘하는 것을 하면 된다는 의식으로 분위기가 전환되면서 좋은 흐름이 나온 부분이 존재한다.”
 
  그렇게 한국과 일본 대중문화산업 간에는 이전까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윈-윈(win-win)’ 관계가 성립되고 있다는 얘기다.
 
 
  중국인들의 반한 의식
 
  그리고 이 같은 점에서 화두가 된 중국의 한한령을 놓고, 이제 그것이 한국에 어떤 의미였는지를 넘어 과연 중국에는 어떤 의미가 됐는지, 나아가 중국은 한한령을 통해 과연 무엇을 놓친 것인지 다시금 점검해보게 된다. 줄이자면, 중국은 바로 이런 대중문화산업 협력 관계를 통해 시너지를 내고 각자의 산업을 한 단계 진화시켜 글로벌로 나갈 채비를 갖출 수 있는 커다란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저 상대방 ‘돈벌이’를 막아놓는 것으로 타격을 주려 했던 얕은 발상이 오히려 한국 대중문화산업의 체질 개선을 돕고 글로벌화를 향해 나아가도록 등을 떠밀어준 남 좋은 일에 그치지 않고, 반대로 중국 스스로의 체질 개선과 의식 전환, 노하우 습득, 자본 흐름의 ‘고인 물’ 방지 등을 막아 세우는 결과를 낳게 됐다. 자유세계 선진국들에서 아무리 정치·외교적 갈등이 일더라도 왜 문화 교류만큼은 정책적으로 끝까지 방어하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그쪽이 자신들에게도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하기 때문이라는 걸 이해 못 한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딜레마를 이제 중국 당국에서 알아차렸다 해도 지금 시점까지 와선 상황을 되돌리기조차 힘들어졌다는 점이다. 예컨대 지난해 5월 한국 가수 정용화가 중국 OTT인 아이치이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 〈분투! 신입생반〉 심사위원으로 내정됐다가 중국 시민들의 거센 온라인 항의를 받고 불발된 상황, 또 다른 한국 가수 현아가 중국 우한시에서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하기로 예정됐다가 마찬가지 항의를 받고 참석이 취소된 상황 등을 들 수 있다. 애초 그런 방송과 행사에 출연이 내정됐었다는 점 자체가 일단 중국 당국으로부터는 통과된 사안이었다고 봐야 하는데, 그 소식에 중국 대중이 반발해 당국도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는 순서로 읽힌다.
 
  결국 지금 와선 중국 정부 차원에서 한한령을 완전 해제하려 해도 한한령이 시작되던 당시 온갖 미디어를 통해 쏟아낸 반한(反韓) 감정 자극 보도들과 각종 분위기 조성으로 인해 중국 대중의 의식과 정서에 반한 감정이 깊숙이 뿌리내려 상황을 되돌릴 수 없도록 발목을 잡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 탓인지 한한령은 여전히 풀릴 듯하다가도 도로 돌아가는 광경을 현재까지도 계속 반복하는 와중이다. 지난 6월에도 한국 록밴드 세이수미가 중국 베이징에서 7월 12일 열릴 예정이던 공연 허가를 받아 2015년 그룹 빅뱅의 투어 이후 한국 대중음악 아티스트의 중국 공연이 9년 만에 다시 성사되리라는 장밋빛 보도가 나왔었지만, 이 역시도 같은 달 말이 되자 특별한 이유 없이 허가가 취소되는 결말을 맞았다.
 
 
  꿈으로 끝난 이수만의 ‘중국몽’
 
이수만(오른쪽에서 넷째)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은 한동안 중국에 올인했지만 결국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사진은 리옌훙(왼쪽에서 넷째) 바이두 회장과 2014년 5월 8일 업무 제휴 협약식 때의 모습. 사진=SM엔터테인먼트
  끝으로, 이제는 한국 대중문화계에서 철 지난 이슈가 돼버린 저 ‘중국 의존도’ 문제를 다시 돌아보자.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다른 많은 산업 분야들처럼 이 부분에 오히려 ‘올인’을 건 대중문화 기업들이 많았다. 그야말로 ‘중국몽(中國夢)’이었다. 상품 시장에서 흔히 돌던 “빤스만 팔아도 15억 장”이라는 말로 한동안의 분위기가 대변된다.
 
  한국 대중문화계에서 ‘중국몽’에 가장 몰입했던 기업가로는 흔히 K팝 기업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설립자 및 초대 총괄 프로듀서가 꼽힌다. SM엔터테인먼트는 다들 알다시피 1990년대에 보이그룹 H.O.T.와 걸그룹 S.E.S.로 K팝 기업 선도(先導)주자로서 등장한 뒤 이후로도 보아, 동방신기, 소녀시대 등을 연달아 내놓으면서 한류의 기초를 쌓은 선구자 격 기업으로 여겨진다.
 
  이수만 전 총괄 프로듀서의 ‘중국몽’ 언급은 언론 보도상으로 기록된 것만도 2005년 정도부터다. 2007년에는 하버드대 MBA 과정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하는 자리에서 “동양의 할리우드는 어디에 생길 것인가? 누구나 똑같이 얘기한다. 중국”이라며 “중국이 전 세계 1등이 되도록 한국과 중국이 힘을 합쳐야 할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중국 의존’ 자체가 사운(社運)을 건 기업철학에 가까웠던 셈이다.
 
  아닌 게 아니라 2000년 H.O.T.가 한국 가수 최초로 중국 베이징 단독 공연을 단행한 이래 이수만 전 총괄 프로듀서는 늘 중국 시장을 강하게 의식해왔다. 보이그룹 동방신기에도 중국인 멤버를 넣을 계획이 있었고, 이는 보이그룹 슈퍼주니어와 걸그룹 에프엑스에서 실현됐다. 또 다른 보이그룹 엑소로 넘어가니 아예 팀을 둘로 쪼개 중국 유닛과 한국 유닛으로 나눠 활동시킨다는 실험까지 시도했다. 그리고 2016년 론칭된 보이그룹 NCT는 전체 멤버의 40% 정도가 중국계로 구성됐었다.
 
  그러나 ‘중국몽’에 몰입한 이수만 체제의 SM엔터테인먼트는 2010년대 들어 점차 과거의 위용을 잃어가더니 결국 1위 K팝 기업 자리도 일본과 미국 중심으로 글로벌 전략을 펼쳐나간 방탄소년단의 하이브에 빼앗기고 만다. 그렇게 이수만 전 총괄 프로듀서는 2023년 SM엔터테인먼트와 계약 종료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중국몽’의 실패에 대해 대중문화 업계에선 저 “빤스만 팔아도 15억 장”이라는 말이 대중문화산업에선 얼마나 허랑(虛浪)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는 반응들이다. 사실상 ‘한한령’ 이전부터도 중국 시장은 이미 뚜렷한 한계를 보여왔다는 것이다.
 
  15억 인구에 비해 실제 대중문화 소비 시장은 여전히 대중의 고른 소비 여력 및 보편적 문화의식에 기반한 소비 의욕 차원에서 생각만큼 크지 않았고, 그나마도 너무 많은 정부 당국의 간섭과 견제에 시달려야 했다.
 
  더 중요한 부분은, 문화 선도 국가 이미지가 없다 보니 중국에서 성공한 콘텐츠나 아티스트라고 해서 그 점 자체가 일종의 홍보 및 권위 요소로 작용해 다른 시장들로 유행이 퍼져나가는 효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K컬처가 미국 시장 반향을 통해 얻고 있는 효과를 전혀 기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한한령을 맞이하고 2021년 중국 대중문화계 정풍(整風)운동이라 불리는 칭랑(晴朗)까지 겪고 나니 이제 중국이라는 시장은 한국 대중문화산업 종사자들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진 개념이 됐다.
 
 
  같은 배를 탄 한일
 
  이 같은 ‘중국몽의 한때 추억’을 뒤로하고, 다시 서두의 일본 영화계 약진 소식으로 돌아가보자. 이제 이 부분은 그저 다른 나라 부러운 사연이 아니게 됐다. 지난해 12월 CJ ENM에서 80% 지분을 소유한 할리우드 제작사 피프스시즌이 일본 도호인터내셔널을 대상으로 2억2500만 달러 규모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진행, 도호인터내셔널 측이 피프스시즌 2대 주주(지분율 25%)로 올라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도호인터내셔널은 저 약진의 주역인 〈고질라〉 시리즈 IP(지적재산권)를 갖고 있으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일본 배급도 담당했던 도호영화사의 미국 법인이다. 그리고 지난 4월 피프스시즌 측은 향후 한미일(韓美日) 콘텐츠 협업으로 시너지를 내겠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한국과 일본 대중문화산업은 이렇게 각자의 장기(長技) 분야들을 내세우며 북미 및 세계 시장 진출을 향한 배에 같이 올라탄 셈이다. ‘한한령의 축복’으로부터 시작된 전혀 다른 미래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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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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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_H    (2024-08-29) 찬성 : 0   반대 : 0
유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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