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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의 시각

최근 러시아 비밀문서 공개로 밝혀진 쿠바 미사일 사건의 결정적 순간

흐루쇼프의 깨끗한 斷念과 케네디의 신중함이 인류를 구했다!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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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 실패의 교훈 잊은 푸틴, 위기 때 핵 쓸지도
⊙ 미국이 쿠바 침공했으면 현지 소련군은 핵으로 반격했을 것
⊙ 군 지휘관들이 정치인들의 핵 사용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착각
⊙ 미사일을 숨길 야자수 숲은 없었다… 은폐 불가능하다는 보고는 차단
1962년 6월 3일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미 문서기록청
  1962년 7월,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 미사일 부대 사단장 이고르 스타첸코(당시 43세)는 쿠바의 중서부 상공을 비행하는 헬기 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큰일 났다”는 생각을 했다. 7주 전, 그의 상관인 소련 전략미사일군 사령관 세르게이 비류조프가 농업 전문가로 위장하여 쿠바를 방문, 피델 카스트로 수상을 만나고 돌아와서는 소련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이런 보고를 했던 것이다.
 
  “쿠바의 야자수 숲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면 발각되지 않습니다.”
 
  스타첸코가 헬기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딴판이었다. 미사일 기지 건설 후보지엔 야자수가 15m 간격으로 드문드문 서 있는 데다가 숲 면적도 부지의 16분의 1에 불과하여 150km 북쪽에 있는 미국의 공중정찰부대로부터 미사일을 숨길 수 없다는 판단에 도달했다.
 
  문제는 스타첸코 장군의 이런 보고가 소련군의 관료주의에 걸려 흐루쇼프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흐루쇼프는, 핵탄두 탑재 미사일을 미국 몰래 쿠바에 배치, 협박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인류의 생존이 걸린 위험한 도박을 밀어붙이게 된다. 이는 그 자신의 정치적 생명도 끝장낸 운명적 결정이었다.
 

  1962년 10월 미국의 U-2 정찰기는 미사일 발사대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은 이틀 뒤 존 F. 케네디 대통령 책상 위에 올라갔다. 대통령은 전문가 회의를 소집, 며칠 동안 격론을 벌였다. 폭격, 침공 등 강경론을 누른 케네디는 ‘해상봉쇄’를 선택, 소련에 물러날 시간을 주었다. 흐루쇼프는 즉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퇴로를 모색한다.
 
  케네디는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과 주미(駐美) 소련 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의 비밀채널을 활용, 흐루쇼프에게 두 가지 약속을 했다. 소련이 미사일을 철수하면 앞으로 쿠바를 무력(武力)침공하지 않는다(공개적 약속), 터키에 배치한 핵미사일을 철수한다(비밀 약속). 흐루쇼프는 이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이는 세계를 구한 운명적 결정이었다. 케네디의 신중함과 흐루쇼프의 깔끔한 단념(斷念)이 인류를 살린 것이다.
 
  핵무기 사용으로 위협하는 푸틴과 김정은, 두 사람을 상대해야 할 바이든과 윤석열 대통령에게 교훈이 될 만한 기사가 미국의 격월간 잡지 《포린 어페어》 5~6월호에 실렸다.
 
 
  “디테일에 악마가 있다”
 
  최근 공개된 러시아 측 비밀자료를 근거로 하여 세르게이 다첸코(존스홉킨스대학 교수)와 블라디슬라브 주보크(런던경제대학 교수)가 같이 쓴 논문의 제목은 〈벼랑의 대실수(Blundering on the Brink)〉이다.
 
  러시아 국방부는 작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일 때 쿠바 미사일 사건 60주년을 맞아 관련 문서의 비밀등급을 해제, 공개했다. 이 문서 공개로 그동안 미국 등 서방세계에서 내놓았던 학설이 부정된 경우도 있다. 두 저자는 이 문서들이 ‘재앙과 평화 사이엔 전략적 사고뿐 아니라 운(運)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했다. 핵무기를 둘러싼 긴장 상태에선 예측 불가능한 경우의 수가 많다는 이야기이다. ‘디테일에 악마가 있다’는 말대로 사소한 것을 그르쳐 전체를 망칠 수도 있다. 민주적 의사 결정을 무시하는 독재자와 그를 둘러싼 관료주의가 자승자박(自繩自縛)의 결과를 낳은 사례가 흐루쇼프가 자신의 무덤을 판 쿠바 미사일 사건이었다.
 
  흐루쇼프는 1962년 5월 독단적으로 쿠바에 소련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심한다. 흐루쇼프는 그해 10월 케네디가 특별 방송을 통하여 해상봉쇄를 선언한다는 통보를 받은 직후 소련 지도층을 소집한 자리에서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미사일 배치의 목적이었다”고 변명했다. 흐루쇼프는 1961년 4월, 케네디 대통령 취임 직후에 있었던 ‘피그만 침공 작전’이 비록 실패했지만, 이는 연습게임이라고 보았다.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이 무너지면 소련과 자신의 권위도 큰 타격을 받을 것이고 이를 중국공산당이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흐루쇼프가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밀어붙이니 공산당과 군대에선 반론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는 미국의 코밑에 핵미사일을 몰래 배치하는 작전을 소수에 전담시켰다. 흐루쇼프가 국방자문위원회에서 방침을 밝힌 지 사흘 만에 총참모장과 국방장관이 공동서명한 침공계획이 만들어질 정도로 졸속이었다. 약 4만4000명의 군인과 120기의 각종 미사일, IL-28 폭격기 1개 연대, 미그 전투기 1개 대대, 4개 보병 연대, 2개 대공포(對空砲) 사단 등을 선박 편으로 수송하는 일 자체가 보안이 불가능한 대규모 작전이었다. 그래도 흐루쇼프는 비밀 유지가 가능하다고 믿었고 이견(異見)이 제기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는 공동 책임을 지우기 위하여 당과 군의 지도층 인사들로부터 작전에 동의한다는 서명도 받았다.
 
 
  異見은 묵살되었다
 
쿠바에 배치된 소련 미사일 배치도 중 일부. 야자수가 많지 않아 미사일 및 관련 시설들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사진=위키미디어
  1962년 6월 흐루쇼프는 소련 군사 지도자들과 만났는데 이 자리엔 쿠바 정부를 돕고 있던 군사 고문관 알렉세이 데멘티에프도 참석했다. 그가 “미군 정찰기로부터 미사일을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려고 하니 말리노프스키 국방장관이 책상 밑에서 걷어차면서 말문을 막았다. 위에서 밀어붙이니 반대를 해봤자 쓸데없다는 분위기가 깔렸다.
 
  7월 12일 선발대가 쿠바에 도착했다. 미사일 부대 사단장 스타첸코는 미사일 기지로 지정된 장소를 시찰하고 경악했다. 비류조프 사령관의 보고와는 달리 야자수가 숲을 이루긴커녕 듬성듬성 서 있는 데다가 제대로 된 지도(地圖)조차 없고 소련 장교들은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면서 통역자를 데려오지도 않았다. 급하게 스페인어 교육부터 받아야 했다. 쿠바 주둔 소련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이사 플리브 장군은 미사일 설치 장소 변경을 모스크바의 참모본부에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거절 이유는 “참모본부의 당초 방침과 어긋난다”였다.
 
  노출된 지역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기 위하여 땅을 팠더니 돌이 나와 고생하고, 전기는 쿠바와 소련의 사용 볼트가 맞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는가 하면, 허리케인 철을 만나 공사가 차질을 빚었다.
 
  이 모두가 흐루쇼프의 독단적 결정을 졸속으로 집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인데 문제는 자체 수정을 불가능하게 만든 공산당식 관료주의였다. 《포린 어페어》 논문 저자(著者)들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침공 작전에서 같은 실수를 했다고 지적했다. 측근들이 다른 의견을 내지 않은 걸 보면 쿠바 위기로부터 배운 것이 없어 보인다.
 
  쿠바 작전은 물량 면에선 대단한 성공이었다. 7~10월 사이 소련은 85척의 선박으로 흑해-지중해-대서양을 건너 8000대의 차량, 500대의 트레일러, 100대의 트랙터, 3만1000t의 연료, 2만4500t의 식량, 그리고 수많은 항공기와 미사일 등을 실어 날랐다. 소련이 이렇게 무리한 작전을 펴는데 미국이 10월 14일에 가서야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일종의 기적이었다. 미사일 기지 건설에 방해가 되었던 날씨는 미국의 정찰 비행도 방해했다.
 
 
  핵미사일 발사 준비 완료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10월 23일 쿠바 봉쇄령에 서명했다. 사진=미 의회도서관
  CIA는 8월에 대공포가 쿠바에 반입되는 것을 확인하고도 목적에 대하여 오판(誤判)했다. 소련 미사일 기지 보호용인데도 쿠바의 재래식 군사력을 공습으로부터 지키려는 것이라고 추정했다. 존 맥콘 CIA 국장만이 미사일 기지 건설로 보았다. 미국 U-2 정찰기가 2만m 상공에서 쿠바 상공을 비행하다가 소련 미사일 기지 사진을 찍은 것은 1962년 10월 14일이고 그 후 보름간 인류 공멸의 위기가 지속된다.
 
  케네디 대통령이 사회를 본 대책회의에서 해상봉쇄를 택하게 된 이유는 쿠바에 배치된 소련의 핵 투발(投發) 미사일이 발사 가능한 수준인가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핵폭탄이 미사일과 같이 반입되었는지도 불투명했다.
 
  이번에 비밀이 해제되어 밝혀진 바로는 10월 20일에 한 곳의 미사일 기지가 작전 가능하게 되었는데 8기의 미사일을 쏠 수 있었다. 미국의 해상봉쇄가 작동하고 있던 10월 25일에 두 기지가 작전 가능 상태로 전환되었다. 10월 27일 현재 24기의 미사일 발사대가 대기 상태였다. 핵폭탄 저장고와 미사일 기지 사이는 120~500km나 떨어져 있었다. 소련 지도부가 모스크바에서 명령을 내릴 경우, 실제 발사 시간까지는 14~24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위기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10월 27일 미사일 부대 스타첸코 사령관은 핵폭탄을 미사일 기지 근방으로 갖다 놓아 10시간 만에 발사할 수 있게 했다.
 
  만약 미국이 소련 미사일 부대의 이런 사정을 알았더라면 전면 공습으로 기지들을 모두 파괴할 수 있었겠지만, 소련과 쿠바의 대응으로 전쟁으로 확대되었을 것이다. 그런 공습을 받았을 때 소련군은 쿠바 내의 핵미사일로 미국을 칠 수 있었을까? 《포린 어페어》 논문 저자들은 최근 공개된 자료에 근거하여 이렇게 정리한다.
 
 
  미국이 침공했다면 핵전쟁으로 갔을 것
 
  쿠바에 들어온 소련군은 미국에 대한 핵 공격 권한을 미리 위임받은 적이 없었다. 발사 명령은 모스크바에서만 내리게 되어 있었다. 미군의 공격을 받는 경우에도 쿠바 주둔 소련군엔 핵으로 대응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 대통령이 해상봉쇄 선언을 한 10월 22~23일 고위 대책회의를 주재한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이번 작전에서 실수가 있었음을 인정하면서 쿠바 주둔군 사령관 플리브 장군에게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지 않고서는 전술핵이나 전략핵을 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행히 미군의 침공도 소련군의 핵 발사도 없었다. 만약 미군의 쿠바 침공이 시작되었다면 흐루쇼프는 쿠바 주둔 소련군의 괴멸을 지켜보기만 했을까, 아니면 핵으로 반격하여 미소(美蘇) 핵전쟁으로 확대되었을까? 후자(後者)의 가능성이 높다.
 
  이 논문 저자들은 소련군 지휘관들이 모스크바의 핵 발사 명령에 따랐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미사일 부대 사령관 스타첸코 장군도 나중에 “공산당과 소련 정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썼다. 저자들은 군 지휘관들이 정치인들의 핵 사용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착각이란 점을 보여준다고 했다. 푸틴이나 김정은이 핵 발사 명령을 내릴 때 말릴 사람이 없을 것이란 이야기로 들린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누가 먼저 권총을 뽑느냐로 승부가 결정되는 서부 영화의 결투 장면을 연상시킨다. 상대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미국과 소련은 미사일, 전폭기 등 핵 투발 수단을 총동원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작은 사고가 순식간에 핵전쟁으로 커질 수 있는 긴장 속에서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강경론을 누르고 이성적으로 행동한다. 지도력에 치명상을 입은 흐루쇼프가 부하들의 경멸 섞인 눈초리를 의식하면서도 패배를 받아들이기로 한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이 패배로 그는 2년 뒤 궁정 쿠데타를 자초, 실각한다.
 
 
  핵으로 선제공격해달라 한 카스트로
 
1962년 10월 25일 봉쇄선 인근으로 접근하는 소련 잠수함을 미 해군 정찰기가 감시하고 있다. 사진=미 해군
  10월 25일 흐루쇼프는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키기로 결심하고 케네디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미국이 쿠바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틀 뒤 흐루쇼프는 터키에 배치한 미국의 미사일을 철수하라는 조건을 추가했다. 27일 저녁 케네디 대통령은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을 미국 주재 도브리닌 소련 대사와 만나게 하여 비공식으로 터키 배치 미사일을 철수시키겠다고 통보한다. 케네디는 이 양보는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고 조건을 붙였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를 통해 흐루쇼프는 소련 대사에게 ‘미사일 철수 합의’란 말을 꼭 받아내도록 하라고 지시했음이 드러났다. 그렇게 해야 흐루쇼프는 소련공산당 지도부에 이번 게임에서 자신이 이겼다고 우길 수 있었다. 케네디는 이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흐루쇼프를 더 버틸 수 없도록 한 것은 10월 27일 오전의 미국 U-2기 격추 사건이었다. 쿠바 주둔 소련군 장교의 명령으로 정찰기가 떨어져 미군 조종사가 죽자 미국 여론은 쿠바 침공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이는 카스트로였다. 그는 흐루쇼프에게 메시지를 보내 “만약 미군이 침공하면 미국에 대한 선제적 핵 공격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흐루쇼프는 화를 내면서 “뭐야 이건, 미친 거야, 정신이 나간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논문 저자들은 “흐루쇼프는 감정적 인간이었지만 최대의 위험에 직면한 순간에 벼랑에서 벗어나는 결단을 내렸다”고 평했다. 흐루쇼프는 위기 중에 만난 인도 요인에게 “내가 살아온 경험에서 전쟁은 카드 놀이 같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카드 놀이를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고 털어놓았다 한다.
 
 
  푸틴은 교훈을 얻지 못했다
 
  쿠바 미사일 사건을 다룬 수많은 저작(著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책은 1971년에 나온 하버드대학 교수 그레이엄 앨리슨의 《결정의 핵심(Essence of Decision)》일 것이다. 앨리슨은 이 사건에 대하여 “핵 시대의 결정적 사건이었고 기록된 역사상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고 정의(定義)하였다.
 
  논문 저자들은 이번에 공개된 문서를 통하여 그동안의 연구 결과와 다른 점도 찾을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가장 주목한 점은 소련의 당군(黨軍) 지도부 내부에서 견제와 수정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작전의 성공은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 완료할 때까지 발각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 달려 있었다. 그러려면 노출된 장소에 기지를 만들면 안 되는데, 누구도 이미 결정된 장소를 바꾸자는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없었고, 흐루쇼프도 이 사실을 모른 채 밀어붙였다. 논문 저자들은 앨리슨이 《결정의 핵심》에서 내세운 주장을 반박한다.
 
  앨리슨은 소련군의 전략 교리는 위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그 교리를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두 저자는 쿠바 파견 소련군의 실무 장교들 선에선 ‘은폐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는데 이것이 상부에 의하여 묵살된 점이 가장 큰 실패 요인이라고 했다. 두 학자는 작전을 망친 책임자는 소련 전략미사일군 사령관 세르게이 비류조프라고 특정했다. 그는 농업 전문가로 위장하여 쿠바를 방문, 피델 카스트로 수상을 만나고 돌아와 흐루쇼프가 미리 결정해놓은 미사일 배치에 영합하는 보고를 한 사람이다.
 
  “쿠바의 야자수 숲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면 발각되지 않습니다.”
 
  두 논문 저자는 소련이 쿠바 미사일 사건 실패에 대하여 진지한 반성을 하지 않았고 교훈도 얻지 못하였으며 그것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작전 실패에 반영된 것 같다고 주장한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잘못을 덮는 것이 급해서 다른 사람의 책임을 추궁하기 어려웠고 비류조프는 참모본부의 전횡(專橫)에 책임을 전가(轉嫁)하면서 자신의 오판을 덮었다.
 
 
  흐루쇼프와 케네디의 신중함이 인류를 구했다
 
  두 저자 세르게이 다첸코와 블라디슬라브 주보크는 푸틴이 흐루쇼프가 처했던 상황과 비슷한 위기에 처해 있는데 흐루쇼프처럼 인류를 위한 결단을 내릴지는 의심스럽다고 썼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하나’라는 확신으로 강제 병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측근 누구도 반대를 하지 않았다. 푸틴은 흐루쇼프처럼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비밀주의와 관료주의에 기대어 전쟁을 벌였다가 낭패를 당하니 핵 발사 단추를 만지작거린다. 두 학자는 러시아군 참모본부가 쿠바 실패 사례를 소화하지 않았음이 명백하다고 했다. 흐루쇼프는 쿠바 미사일 위기 중에도 중국과 인도의 전투 중지를 위한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인도 요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전투를 중단시키려면 원인 규명에 주력하지 말고 정전(停戰)을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을 위하여 울부짖으며 복수를 다짐하는 일보다는 전투가 계속될 경우 죽게 될 생명을 구하는 데 힘을 써야 합니다.”
 
  두 학자는 흐루쇼프와 케네디는 서로의 금지선을 시험하지 않으려 조심했다고 얘기한다. 이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그 선이 어디인지는 두 지도자도 몰랐다. 흐루쇼프의 허영과 미움이 그를 최악의 실수로 몰아갔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는 타협을 택했고 케네디도 신중하게 대처하여 협상으로 인류를 핵 재앙으로부터 구했다.
 
  두 저자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푸틴은 절대로 핵무기를 쓸 수 없으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완승(完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썼다. 푸틴 주변에는 ‘러시아 없는 세계는 의미가 없다’면서 패배하기보다는 핵전쟁을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면서 “1962년에 그런 목소리가 이겼다면 우리는 지금 다 죽어 있을 것이다”고 했다.
 
  김정은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핵 발사 단추를 누르려고 할 때 북한 또한 말릴 사람이 없다.
 
 
  죽을 때까지 싸운 흐루쇼프
 
  쿠바 미사일 사건에서 패배한 흐루쇼프는 사람이 달라졌다. 기가 꺾였다고나 할까. 부하들의 시선도 싸늘해졌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암살되었을 때 흐루쇼프는 친구가 죽은 것같이 충격을 받고 비통해하였다. 당시 로버트 케네디와 아나톨리 도브리닌 대사는 케네디-흐루쇼프 회담을 준비하고 있었다. 흐루쇼프는 미국 대사관저를 방문, 방명록에 서명을 하다 울었다고 한다. 재클린 케네디 여사에겐 위로 편지를 보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 암살범 리 하비 오스왈드가 3년간 소련에서 살았다는 보고를 받고 신경이 쓰였다. KGB 국장으로부터 오스왈드가 비밀요원이 아님을 다짐받고는 안심했다.
 
  흐루쇼프의 인간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그가 소련공산당 정치국의 쿠데타로 밀려난 1964년 10월 이후였다. 흐루쇼프는 모스크바 교외의 저택에서 사실상 연금 생활을 보내면서 1971년에 죽을 때까지 혁명가로서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이 점에선 트로츠키와 비슷하다). 독재자는 권력을 놓치면 죽임을 당하든지 입을 닫고 죽은 듯이 살아야 하는데 그는 비밀리에 회고록을 써 적국(敵國)인 미국으로 밀반출시켜 그곳에서 출판하도록 했다. 소련공산당은 그가 녹음기를 앞에 두고 회고록을 구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여러 번 협박, 도청, 수색하였으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한때 흐루쇼프의 부하였던 정치국 위원 키릴렌코와 당의 규율위원회 위원장 펠세는 그를 불러 따졌다.
 
  “당과 국가의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중앙위원회의 일이지, 개인이 할 일이 아니다. 작업을 중단하고 원고를 넘겨라.”
 
  “회고록은 역사가 아니다. 개인의 관점일 뿐이다. 당신들의 요구는 헌법이 규정한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마음대로 해봐라. 내 연금, 아파트, 별장을 빼앗아가려면 그렇게 해봐라. 나는 그래도 먹고살 수 있다. 나는 금속기술자로 돌아가 일할 수도 있다. 아직도 내 기술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나는 배낭을 지고 구걸하면서 먹고살 자신도 있다. 사람들은 내가 필요한 물건들을 줄 터이지만, 당신들은 굶어 죽을 것이다.”
 
 
  스트로브 탈보트가 원고 편집
 
  흐루쇼프는 회고록 원고가 압수될 것을 두려워하던 중 정치범 출신인 빅토로 루이스(그는 영국 《런던 이브닝 스탠더드》의 모스크바 현지인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를 통해 미국의 주간지 《타임》과 연결되어 원고를 밀반출하기 시작했다. 이 원고를 편집하고 확인하는 일을 했던 사람이 후일 클린턴 정부 시절 국무부 차관이 되는 당시 《타임》지 기자 스트로브 탈보트였다.
 
  미국의 출판사 측에선 원고가 흐루쇼프 것이며 출판을 허가했다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서 중개자를 통해 모자를 선물했다. 흐루쇼프는 그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1970년 가을 문제의 회고록이 서양에서 출판될 것이란 사실이 미리 알려졌다. 소련공산당은 그를 호출하여 신문했다. 흐루쇼프는 자신이 원고를 밀반출시키거나 출판을 허가해주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소련공산당도 그 책이 조작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 데 만족하고 더 이상의 제재는 가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소련공산당 당규율위원회 위원장 펠세가 흐루쇼프의 행태를 스탈린식이라고 몰아붙였더니, 그는 “그렇다. 우리는 모두 스탈린이란 전염병에 걸렸었다. 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치유했으나 당신은 아직 그대로야. 나를 잡아 가두어, 나를 쏴버려. 드골이 죽었다는 뉴스를 오늘 라디오로 들었는데 그가 부럽다. 나는 정직한 사람으로 죽고 싶다.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싶다. 망치와 못을 가져와라”고 했다.
 
  이 무렵 흐루쇼프는, 한 극작가가 일생에서 무엇이 가장 후회스러운가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많은 피를 흘리게 한 것이지! 나의 팔꿈치까지 피가 묻어 있단다. 이것이 나의 영혼에 남아 있는 가장 끔찍한 기억이야.”
 
 
  위대한 인간성
 
전 남로당 간부 박갑동씨. 사진=조선DB
  약 20년 전 도쿄에서 남로당 간부 출신 박갑동(朴甲東)씨를 만났다. 하코네에서 열리는 북한 문제 세미나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내가 흐루쇼프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는 창 너머로 펼쳐지는 일본의 평화로운 교외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흐루쇼프 덕분에 살았습니다. 1956년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그가 한 그 유명한 스탈린 격하 연설로 해서 개인 숭배와 피의 숙청을 끊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공산권 안에 형성되었습니다. 나는 남로당 숙청 선풍에 걸려 투옥되어 있었는데, 김일성이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보스인 흐루쇼프의 노선에 맞추어 정치범들을 일시적으로 석방할 때 출옥했습니다. 그런 뒤 중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고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지요. 흐루쇼프의 역사적 연설로 세계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당내 집단학살이 사라졌습니다. 중국, 북한, 알바니아는 예외였습니다만. 그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한 공산주의자의 결단이 한국인의 운명에도 이렇게 구체적 영향을 끼쳤구나’ 하는 감회에 젖었다. 흐루쇼프는 인간이 해선 안 되는 일과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이다. 그의 정신적 제자가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자’ 고르바초프였다. 그가 소련 체제를 개혁하려다가 해체로 몰고 간 데 가장 분통 터져 한 사람이 푸틴이고 김일성, 김정일이었다. 권력을 가졌을 때나 놓은 뒤에나 변함없는 인간성을 보여준 흐루쇼프는 농부의 아들임을 자랑했고, 톨스토이를 도스토옙스키보다 더 좋아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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