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950년부터 1953년의 한국전에서 유엔의 깃발 아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우리의 전우들을 기억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잊히지 않을 것이다.(한국전 참전용사 요크 지부 회원들의 낭독문)
⊙ 한국전은 영국이 20세기 참전한 전쟁 중 세 번째 큰 전쟁… 연인원 8만 명 참전, 1078명 전사, 2674명 부상, 1060명 실종·포로
⊙ 2004년 한국군 참전용사 만남 계기로 영국군 참전용사 요크 지부와 인연
⊙ 요크 지부, 42년 만인 2003년 문 닫아… 지부 깃발은 전쟁기념관, 참전용사 기념사진은 주영 한국 대사관에 기증
⊙ “한국 떠난 후 처음으로 만난 한국인”이라며 반가워한 참전용사
⊙ “할아버지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다는 걸 알게 됐다”는 여성
⊙ “진짜 영웅들은 부산에 누워 있는 사람들”(참전용사 켄 켈드)
⊙ “그걸 어떻게 잊어? 그날 내 전우가 200명이나 죽었어”(1·4후퇴 직전 장흥 해피밸리 전투 생존자)
김용필
1965년생.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영국 브래드퍼드대 고고학(Scientific Method in Archaeloly) 석사,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 現 엘리시움 헬스케어 수석팀장 / 저서 《후크고지의 영웅들》(공역)
⊙ 한국전은 영국이 20세기 참전한 전쟁 중 세 번째 큰 전쟁… 연인원 8만 명 참전, 1078명 전사, 2674명 부상, 1060명 실종·포로
⊙ 2004년 한국군 참전용사 만남 계기로 영국군 참전용사 요크 지부와 인연
⊙ 요크 지부, 42년 만인 2003년 문 닫아… 지부 깃발은 전쟁기념관, 참전용사 기념사진은 주영 한국 대사관에 기증
⊙ “한국 떠난 후 처음으로 만난 한국인”이라며 반가워한 참전용사
⊙ “할아버지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다는 걸 알게 됐다”는 여성
⊙ “진짜 영웅들은 부산에 누워 있는 사람들”(참전용사 켄 켈드)
⊙ “그걸 어떻게 잊어? 그날 내 전우가 200명이나 죽었어”(1·4후퇴 직전 장흥 해피밸리 전투 생존자)
김용필
1965년생.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영국 브래드퍼드대 고고학(Scientific Method in Archaeloly) 석사,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 現 엘리시움 헬스케어 수석팀장 / 저서 《후크고지의 영웅들》(공역)

- 라미 현 작가가 찍은 영국군 참전 용사 요크지부 회원들.
“저는 여러분께 몇 개의 숫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078, 2674, 1060.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많은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사람들은 일부만을 기억하거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1078은 전사자의 숫자입니다. 2674는 부상자의 숫자입니다. 1060은 실종됐거나 포로로 잡혀간 숫자입니다.
한국전은 영국 역사에서 20세기에 영국이 참전한 세 번째로 큰 전쟁이었습니다. 1차대전, 2차대전 그리고 한국전. 저 숫자들은 한국전에서 영국군에서 발생한 전사자, 부상자, 실종 및 포로들의 숫자입니다. 영국은 포클랜드에서 255명을, 이라크에서 179명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457명을 잃었습니다. 한국에서는 1078명을 잃었습니다. 영국은 연(延)인원 8만 명이 넘는 육군, 해군 그리고 공군을 보내 한국에서 싸웠습니다. (중략)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에 감사를 드립니다.”
1995년 7월 어느 날, 나는 김포공항에서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서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하고 문화재 유물 보존처리, 그중에서도 금속 유물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다. 5년만 공부를 하고 오겠다는 약속을 부모님께 드리고 떠난 유학길이었지만, 그 5년은 어느새 30년이 되고 말았다. 1997년 11월 IMF 사태의 직격탄을 맞았지만 위기의 순간을 버텨 냈고, 그 위기를 버티기 위해 시작한 아르바이트 일이 천직(天職)이 되었다. 그 일을 하면서 수많은 영국인을 만났다. 그들 중 일부가 한국전 참전용사였거나 미망인 또는 참전용사의 가족들이었다.
한국을 떠날 때 나는 나의 영국 생활이 5년이 아니고 30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두 아이가 영국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할 것 역시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가장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수많은 영국군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가족들을 만나고, 그들과 가족 같은 관계를 만들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한국전 정전 70주년 행사
2023년 9월 10일 이든 캠프에서 열린 영국군 참전용사 기념식.2023년 9월 10일, 나는 한국전에 참전했던 영국군 참전용사들을 포함한 수백 명의 예비역 영국군 용사들과 가족들 앞에서 위의 연설을 했다. 매년 이든 캠프에서는 영국군 참전용사들과 예비역들이 모이는 행사가 있었는데, 코로나-19(코비드)로 인해 중단되었다. 3년여에 걸친 록다운이 해제되고 처음으로 다시 이든 캠프에서 열린 그날의 행사는 한국전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특별히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위한 행사로 기획되었다. 나는 한국인을 대표해서 초대를 받아 짧게나마 연설을 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날 행사에 참석한 수백 명 가운데 한국인은 나와 아내, 둘뿐이었다. 수백 명의 영국군 노병(老兵)들이 참석했고, 그중에는 수십 명의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계셨다. 그들은 북부 잉글랜드의 각지에서 오셨다. 아버지를 모시고 참석한 아들과 딸, 할아버지를 모시고 온 손자, 먼저 세상을 뜬 남편을 대신해 온 미망인들. 그분들은 행사가 끝나자마자 내 곁으로 왔다. 그들은 한국인이 이 행사에 참석해서 감사의 말을 해줬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을 흘렸다. “한국을 떠난 후 처음으로 만난 한국인”이라며 내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린 노병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위대한 일을 하신 줄은 미처 몰랐다”며 감격해 하는 손자도 있었다. 그는 자기도 군인이 되기 위해 사관생도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남편이, 시아버지가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영웅 대접을 받을 줄 몰랐다며 감격스러워 했고, 한국인에게 이렇게 감사의 연설을 듣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며 기뻐했다.
매리와 로널드
매리 버켓(Mary Birkett). 내가 매리를 만난 것은 2004년 무렵이었다고 기억한다. 일 때문에 매리의 집으로 방문했는데, 내 소개를 마치자마자 한국인이냐고 물어 왔다. 내 이름을 듣고 바로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매리의 남편 로널드 서그든(Ronald Sugden)은 결혼 직후 입대했고, 신병 훈련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한국행 수송선에 올라야 했다. 로널드의 나이는 19세였고, 로열 레스터(Royal Leicester) 연대의 이병이었다. 몇 번의 편지를 주고받은 후 매리는 남편 로널드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매리는 국방부로부터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남편 로널드의 실종을 알리는 전보였다. 매리는 로널드가 과연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받았는지가 제일 알고 싶었다고 했다. 로널드는 결국 실종자로 최종 분류되었다. 그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고, 로널드의 이름은 부산 유엔묘지에 실종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銅版) 위에 남게 되었다.
매리는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울었다. 다행스럽게도 매리는 2003년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로널드가 실종된 전투 지역인 임진강 일대와 부산의 유엔묘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
이렇게 나와 영국군 참전용사들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내 친구들이 많이 죽었어”
영국군 참전용사가 보여준, 영국군 전선을 시찰하는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왼쪽)의 사진.2003년 무렵이라고 기억한다. 역시 일 때문에 집으로 찾아가 만났던 한 노병이 몇 장의 사진을 앨범에서 꺼내 보여 주었다. 이름 모를 고지 위에 헬기가 내려 있었고, 영국군 장교와 미군 장성이 악수를 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미군 장성의 군복엔 미 8군 마크가 선명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이라면서, “이제 너무 오래된 일이라 그 장군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미군 장성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미 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이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반대편 고지를 찍은 거라며 보여 준 사진에는 영국군의 포격으로 포탄이 터지는 고지의 모습이 선명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노병은 사진을 보여 주며 자신의 한국전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면서 결국은 울기 시작했다. “내 친구들이 많이 죽었어”라면서.
아내가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다가 만난 참전용사는 수원에서 태어났다는 아내의 말에, 자신의 부대가 수원에도 주둔을 했었다며 반가워했다. 이야기 끝에 노병은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당신이 입던 코트를 아내에게 주려 했다. “줄 게 없어서 미안해”라며. 노병의 기억 속 한국은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나라였으니까, 뭐라도 주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라미 현과의 만남
이렇게 한국전 참전용사들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회사 방침 상 업무로 만난 이들과 개인적인 접촉은 허용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회사 일로 정기 미팅을 할 때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한국전에 참전한 유엔군 노병들의 사진을 찍어 드리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라미 현(한국명 현효제) 작가를 인터넷에서 알게 됐다. 그 당시만 해도 라미 작가가 아직 방송에서 알려지기 전이었다. 그는 참전국을 방문해서 현지에서 촬영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원봉사자를 찾고 있었다. 이렇게 라미 작가와의 인연이 시작됐고, 나의 한국전 참전용사들과의 인연 제2막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중부와 북부 지방에서 많은 참전용사들을 찾아뵙고, 사진 촬영도 하고, 사진 액자 증정식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요크의 한국전참전용사회 지부 회원들과 더욱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영국의 한국전참전용사회는 1981년에 창립되었고 이후 영국 각지에 지부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요크 지부는 1982년 결성되었다. 나는 라미 작가의 활동으로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여러분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을 해놓고 무슨 행사 때나 오고, 사진 액자를 전해 줄 때 한번 만나고 모른 척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회사 근무와 겹치지만 않으면 매달 있는 지부의 정기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결혼 반지를 물려준 로버트
2차대전 당시 버마(현 미얀마)와 인도의 임팔 전역(戰役)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해리 글레든(Harry Gledden)은 2차대전이 끝난 후 예비역으로 편입됐지만, 한국전이 발발하자 바로 재소집되어 파병되었다. 한국전에서 돌아와 다시 예비역이 되었지만 1956년 수에즈 분쟁이 터지자 다시 재소집되어 수에즈에도 파병되었던 역전의 용사였다.
버마에서, 한국에서 바로 옆에 있던 동료가 저격수의 총에 쓰러지는 경험을 두 번이나 한 해리는 늘 자신의 삶은 그냥 보너스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혼자 살았는데, 내가 찾아가면 차를 끓이고 비스킷을 담아 내왔다. 그는 늘 환하게 웃으면서 “난 혼자라 갈 곳도 없어. 그래서 매일 집에 있어. 언제든 놀러 와”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코비드가 터지고, 아무도 누군가의 집을 방문할 수 없는 시간이 이어졌고, 그 와중에 해리는 혼자 쓸쓸히 우리 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몇몇 친척들의 참석만 허용됐다. 나나 다른 참전용사들은 참석하지 못했다.
로버트 놀러(Robert Knowler). 로열 후사르 기갑연대(King’s Royal Hussars Regiment) 전차병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노병인 그는 참전용사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늘 부인과 함께 모임과 행사에 참석하셨는데, 어느날 저녁 식사 준비를 같이 하던 중에 갑자기 부인이 쓰러졌다. 불행하게도 부인은 로버트의 품에 안겨 구급차가 오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 그날 이후 로버트는 두문불출하기 시작했고, 모임에도 더 이상 나오려 하지 않았다. 요크 모임이 있는 날, 내가 좀 더 일찍 집에서 출발해서 로버트를 모시고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자면 한 시간은 더 일찍 출발해야 했고, 때론 교통 체증에 우리 두 명 모두 모임에 늦기도 했다.
그날도 아내와 같이 방문을 했는데, 로버트에게 약속을 했다. 일요일 점심에 올 테니 같이 나가서 선데이 런치(영국에는 일요일 점심을 온 식구들이 나가 같이 외식을 하는 전통이 있다)를 같이 먹자고. 로버트는 좋아하면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갑자기 로버트가 반지함을 하나 가져오더니, 가져가라고 했다. 로버트와 부인의 결혼 반지였다. “내가 죽고 나면 아무도 이걸 간직해 줄 사람도 없고, 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텐데, 너라면 이걸 간직해 줄 것 같다”면서 가져가라고 했다. 로버트와 부인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차마 거절을 못 하고 받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로버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됐다. 선데이 런치도 같이 못 했는데….
후크 고지의 영웅들
2023년 7월, 강원도 철원 일대에서 벌어진 ‘후크 고지 전투’에 참전한 로버트 메도우즈의 장례식. 태극기가 보인다.콜린 헤이콕(Colin Haycock). 영국 해군으로 한국전에 참전, 동해안에서 작전 중 해안포의 직격탄을 맞아 동료가 전사했다. 콜린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 왔을 때 용산 전쟁기념관에 새겨져 있는 유엔군 전사자 동판에서 콜린의 전우 이름을 사진 찍었다. 콜린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자 그는 조용히 울기만 했다.
콜린에게는 딸이 한 명 있는데 정신지체로 요양원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나를 아들이라 생각한다고 했고, 정말 아들처럼 대해 주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장을 수정해서 자신의 물건 중 한국에 관련된 것은 모두 나에게 물려준다고 했다. 콜린이 세상을 떠난 후에 나는 그의 훈장과 사진, 기록들을 전달받았다. 지금도 부인을 정기적으로 찾아뵙고 있다.
로버트 메도우즈(Robert Meadows). 요크 지부의 회계 담당이었다. 나폴레옹의 군대를 워털루에서 격파한 듀크오브웰링턴 연대(Duke of Wellington Regiment·이하 듀크 연대) 소속으로, 유명한 후크 고지(Hook Hill) 전투에서 싸웠던 분이다. 지부 해산을 얼마 앞두고 우리 곁을 떠났다. 장례식엔 고인이 근무했던 3개 연대의 깃발과 함께 태극기를 든 기수(旗手)들이 도열해 있었다.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은 없었지만 태극기는 있었다.
켄 켈드(Ken Keld). 듀크 연대의 일원으로 한국전에 참전, 후크 고지 전투에서 싸웠다. 누구보다 참전용사회 일에 적극적인 노병이었다. 그는 자신이 겪은 한국전쟁 이야기를 손수 타이핑하고 프린트해서 책을 만들었다. 그는 그걸 내게도 선물로 주었다. 이 책은 2021년 한국에서 《후크고지의 영웅들》(타임라인 펴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나도 공동번역자로 작게나마 그 책 출간에 일조했다.
할아버지의 인식표
2025년 6월 25일, 요크의 세인트존대 아시아연구소 주최의 ‘잊혀진 전쟁, 한국전과 듀크 연대’. 왼쪽부터 참전용사 켄 켈드, 시릴 휘터(Cyril Whiter·참전 메달 수여자), 필자, 그리고 로버트 바네스(Robert Barnes·세미나 주최자) 박사.이 인연으로 나는 2025년 6월 25일 요크의 세인트존대(St. John University) 아시아연구소 주최로 핼리팩스(Halifax)의 듀크연대박물관에서 개최된 한국전과 듀크 연대의 전투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 세미나에는 한국전에 참전했던 듀크 연대의 생존 노병들과 가족들 그리고 한국전에 대해 연구하는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이 많이 참석했다. 세미나에서 나는 듀크 연대가 방어에 성공했던 후크 고지 전투의 내용과 의의 그리고 성과에 대해 발표를 했다. 발표에 이어 짧게나마 연설을 할 기회가 있었다.
“듀크 연대의 수많은 군인들, 그리고 한국을 위해 싸운 수많은 나라의 다른 군인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삼성 노트북도, 갤럭시 폰도, 현대차도, 기아차도, BTS도, 〈오징어게임〉도 없었을 겁니다.”
이 말에 많은 분들이 웃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유! 참전용사들은 자유를 지켜 주셨습니다. 한국인들이 누리는 자유, 그것을 지켜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웃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몇몇은 울기 시작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한 젊은 여성이 와서 자기가 하고 있던 목걸이를 보여 주었다. 그냥 목걸이가 아니고, 영국군 인식표였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듀크 연대 군인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는데, 돌아가시는 날까지 한국전에 대한 말씀은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아마도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가 평생 간직했던 인식표를 자신의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다녔다고 했다. 그녀는 이날 행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할아버지가 겪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어서 한달음에 달려왔다고 했다. 그녀는 나의 짧은 강연과 참전용사 두 분의 무용담을 듣고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무엇보다 내가 했던 말, “자유! 참전용사들은 자유를 지켜 주셨습니다”라는 말에 너무나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구나, 정말 용기 있는 일을 하셨고, 정의로운 일을 하셨다는 걸 알게 됐다”면서 “이렇게 말해 주는 한국인들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그녀가 보여 준 인식표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가득했다. ‘고지 위를 뛰어다니고, 참호 속에 웅크려 있고, 바닥을 포복으로 기어다니며 생긴 상처들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참호 속에 웅크리고 앉아 포탄의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면서 가슴이 먹먹했다.
브래드퍼드 시청의 태극기
2021년 10월 핼리팩스 민스터에서 거행된 듀크 연대의 연례 행사에서 6·25전쟁 당시 저격수로 참전했던 조 베일스와 필자.행사 중에, 코비드 기간에 세상을 떠난 듀크 연대 출신 노병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순서가 있었다. 코비드 기간중 20여 명의 노병들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한국전 참전용사였다.
행사에는 10여 명의 참전용사가 참석했다. 그중 조 베일스(Joe Bailes)는 한국전에서 저격수와 경기관총 사수로 활약했는데, 거동이 불편해서 휠체어를 타고 왔다. 딸과 연대 관계자가 아주 정중하게 내게, 참전용사들이 입장할 때 조의 휠체어를 밀고 제일 앞에서 입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너무나 영광스러운 자리에 그런 일을 맡겨 주어서 감사했다.
행사가 끝난 후 많은 분이 나를 찾아와 행사에 참석해 주어 고맙다고 했다.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내 손을 잡고 우는 분이 많았다. 이든 캠프 행사 때처럼, 한국을 떠난 후 처음 만나는 한국인이라며 반가워하는 분들도 있었다.
2023년 9월, 내가 사는 브래드퍼드(Bradford)시의 시청 개청 150주년을 맞아 일반인들에게 청사 전체가 개방되는 행사가 있었다. 브래드퍼드에 산 지 30년이 되어 가는데, 일 때문에 시청 회의실에 몇 번 가본 게 전부라 호기심에 가봤다.
브래드퍼드 시청 2층 로비에 영구 전시된 태극기와 참전용사회 지부의 깃발.그런데 시청 2층 로비 한쪽에 태극기가 전시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교민회도 없고 한국인이라고는 브래드퍼드대의 유학생 몇 명과 우리 가족을 포함해 딱 두 가족밖에 없는 도시의 시청 2층 로비에 커다란 태극기가 전시되어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청 직원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2014년 4월 2일 브래드퍼드 시청에서는 한국전참전용사회 웨스트요크셔 지부가 해산하는 해단식을 거행했고, 시 정부는 태극기와 함께 지부의 깃발을 시청 2층 로비에 영구 전시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한국인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이 도시가 한국전을 잊지 않기 위해 태극기와 지부 깃발을 영구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1·4후퇴를 가능케 한 해피밸리 전투
2023년 1월 3일. 요크 지부의 새해 첫 정기 모임이었다. 론 머피(Ronald Murphy)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다른 참석자들이 다들 무슨 날이냐고 묻자, 론은 “오늘이 해피밸리(Happy Valley) 전투 한 날이야”라고 했다. 같이 참석했던 부인이 “당신은 그런 날짜를 아직도 기억을 해?” 하고 농담처럼 말하자, 론이 버럭 화를 냈다.
“그걸 어떻게 잊어? 그날 내 전우가 200명이나 죽었어.”
우리가 1·4후퇴라고 기억하는 시간이 있다. 론은 1951년의 그 1·4후퇴를 가능하게 한 해피밸리 전투의 생존자였다.
1951년 1월 2~3일 양일간 영국군 로열 얼스터 대대(Royal Ulster Battalion)와 중공군이 경기도 장흥의 한 계곡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얼스터 대대는 부대가 거의 전멸하는 수준의 사상자를 냈지만, 중공군의 서울 진입을 막았다. 그 덕분에 서울 시민들의 피란이 가능했다. 이틀간의 전투에서 얼스터 대대는 157명의 전사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냈다. 20여 명이 중공군에 포로로 잡혔다. 탱크 13대를 잃었다. 그 이틀간의 전투에서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고 살아남은 대대 병력은 고작 30명 남짓이었는데, 론도 그중 한 명이었다.
“너는 이제부터 요크 지부 회원이야”
2021년 12월의 성탄절 파티 겸 사진 액자 기증식. 주영 한국 대사관 무관부에서 참석과 함께 재정 지원을 해주었다.요크 지부에 매달 참석하던 어느 날, 회장 스탠리 브룩스(Stanley Brookes)가 “너는 이제부터 요크 지부 회원이야”라고 말했다. 이 말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는 나도 그때는 몰랐다.
요크 지부의 노병들은 코비드 이후 한 명 두 명씩 우리 곁을 떠났다. 지부에는 4명만이 남게 됐다. 2023년 2월의 정기 모임에서 지부는 해산을 결의했다. “당장 3월부터 더 이상 모임을 하지 말자”는 의견도 나왔다.
나는 코비드 때문에 6·25 70주년 행사도 못 했는데 이렇게 해산을 하는 건 너무 성급한 결정이라 생각했다. 7월 27일이 정전협정 70주년이 되는 날이니, 해산을 하더라도 정전 70주년 행사를 한 후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참전용사들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지부는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것인데, 계속해서 회원들이 세상을 떠나는 상황에서 회비 수입은 계속 줄어들었고, 적립해 두었던 기금도 거의 바닥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행사를 열기도, 파티를 열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의 성탄절 파티는 내가 주영 한국 대사관 무관부에 협조 요청을 해서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대사관 무관과 직원들이 요크까지 와서 같이 행사에 참석해 준 적도 있었다. 한번은 무관부 측에서 아예 행사 자체를 다 맡아서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7월의 정전협정 70주년 행사는 런던에서도 큰 행사가 있어서 무관부에서도 지원을 할 여력이 없었다. 내 사비(私費)를 털어서라도, 한 분만이라도 오신다면, 행사는 꼭 열어 드리겠다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지부 마지막 행사에 참전용사 네 분만 오시라고 해서 행사를 할 순 없었다. 그래서 이미 작고한 참전용사의 부인들과 가족, 요크의 한인 교회 목사님께 연락을 드려 교회 신자들도 함께해 주십사 요청을 드렸다. 덕분에 교회 측의 지원과 함께 많은 신자들이 참석했다.
하지만 인원수가 늘어남에 따라 비용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내 사비를 털어서 감당하기엔 벅찬 수준이 되어 버렸다. 그때 이런 사정을 알게 된 한국에 있는, 만나 본 적도 없지만 소셜미디어(SNS) 상에서 알고 지내던 분들이 성금을 보내 주기 시작했다. 그 성금 덕분에 요크 지부의 마지막 행사를 정말 성대하게 잘 치를 수 있었다.
요크 지부의 유산들
2023년 7월 27일 한국전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이자 요크 지부의 마지막 집회 모습이다. 이 집회를 끝으로 지부는 해산했다.그렇게 행사를 마치고 지부는 해산했다. 42년의 활동을 마치고 지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지부가 나에게 남긴 것들이 있었다. 전임 회장 스탠리가 “넌 이제부터 요크 지부 회원이야”라고 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지부의 상징인 깃발, 42년 동안 활동하며 남긴 기록들, 그리고 라미 현 작가가 요크 지부 참전용사 9명의 단체 사진을 찍어 제작해 기부한 커다란 사진 액자를 처리하는 문제였다.
지부 해산 후 짧은 시간 내에 지부의 임원진들이 한 명씩 우리 곁을 떠났다. 관례대로라면 요크 민스터로 가서 영구 게양됐어야 할 지부의 깃발이 갈 곳을 잃고, 돌아가신 스탠리 전 회장의 자택에 남겨지게 됐다. 그렇게 남겨 둘 수가 없어서, 고민 끝에 남은 참전용사들께 지부의 깃발을 한국의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기증하자고 제안했다. 남은 네 명도 동의했다.
전쟁기념관 측에는 이미 여러 번 참전용사들의 한국전 개인 사진첩이나 다른 물건들을 내가 한국에 갈 때 가져가 그분들의 이름으로 대신 기증해 드린 적도 있었고, 듀크연대박물관 측으로부터 후크 고지 전투의 전투일지 및 한국전 관련 문서들을 PDF 파일로 입수해 기증한 적이 있어서 제안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담당 학예사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듯하다며 기념관의 고위층과 상의해야 한다고 했다. 기념관 측과 몇 번 이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기증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요크 지부 깃발은 또 하나의 군기
북부 잉글랜드 지역의 영국군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행진. 지부의 깃발마다 태극 문양이 들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2016년 혹은 2017년의 사진이다.그때 내가 전쟁기념관 측에 보낸 메일의 일부이다.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한국전쟁은 공식적으로 종전(終戰)이 된 전쟁이 아니고 휴전 상태이지만, 지금도 끝나지 않은 전쟁입니다. 그리고 유엔이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적을 격퇴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권한을 부여한 무력 집단으로 유엔군을 구성했던 전쟁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우리의 6·25에 대한 관심은 전쟁 전 상황과 정전협정까지라고 보여집니다.
휴전이 되고,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많은 병사들은 본국으로 귀국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들에게 한국전은 현재진행형이었고, 그래서 다시 모여 참전용사회를 결성하고 매달 모여 먼저 간 전우를 기억하고, 살아남은 전우와 함께 한국전을 기억하고, 한국을 응원하며 한평생을 보내신 분들이십니다. 이제는 한국전쟁 이후(Post Korean War)에 대한 기록들도 챙겨야 할 시점이 되지 않았나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떻게 싸웠는지도 중요하지만, 끝나지 않은 전쟁을 그들이 어떻게 기억하고, 활동했고, 기록했는지를 우리가 관심 갖고 남겨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죽어서도 이분들은 이 깃발 아래서 장례를 치르기도 합니다. 이분들은 이 깃발 아래서 매달 모임을 하셨고, 모임이 시작할 때는 “중대 차려(Company, Attention)!” 끝날 때에는 “중대 해산(Company Dismissed)!”을 외치셨습니다. 제대했지만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그 하나의 이유로 평생 군인의 모습을 자신들의 삶의 일부로 가지고 사신 분들이시죠.
이 깃발은 단순히 지부의 깃발이 아니고, 그분들에게는 또 하나의 군기(軍旗)입니다.
첨부한 사진은 각 지부들이 다 모여 행사할 때의 사진이고, 가운데 사진은 요크 지부의 6·25 기념식 행사, 그리고 마지막은 최근 작고하신 참전용사의 장례식 사진입니다. 태극기가 함께했습니다. 유니언 잭은 없는데…. 이런 분들이십니다. 기념관에서 이런 점들을 고려하셔서 좋은 결정을 내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존하신 지부의 참전용사 한 분 한 분께 설명을 드렸고, 모든 분들이 대찬성을 하셨습니다. 기념관 측에서 꼭 받아 주길 바란다시면서,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이며 가족들에게 대대로 자랑거리가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지부의 깃발은 한국에 남게 되었지만, 한 가지 더 남은 숙제가 있었다. 바로 라미 현 작가에게 기증받은 사진 액자였다. 이 사진 액자를 요크의 육군박물관에 기증하려는 논의도 있었지만, 어떤 이유 때문인지 거절당했다. 액자는 갈 곳이 없이 지부의 마지막 모임 장소였던 클럽(York Railway Bowls & Social Club)의 메인 홀에 2년 넘게 남아 있었다.
참전용사 사진은 주영 한국 대사관에 기증
참전용사들의 사진을 찍은 작가 라미 현(왼쪽 끝)이 요크 지부 참전용사 단체 사진을 주한 영국 대사관에 기증했다.그런데 2025년 6월 한국에서 라미 현 작가의 참전용사 사진전시회에 주한 영국 대사가 관람을 온 것을 계기로 똑같은 사진, 똑같은 크기로 제작된 두 번째 액자가 서울의 주한 영국 대사관에 기증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게 됐다. ‘이 사진을 런던의 주영 한국 대사관에 기증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주저하고 있던 차에, 이 소식은 반가운 뉴스였다. 잊힌 전쟁으로 치부되는 한국전쟁. 하지만 연인원 8만 명이 넘는 병력을 보내 피를 흘린 혈맹인 영국. 주한 영국 대사관과 주영 한국 대사관에 같은 모습의 참전용사 사진이 영구 전시된다는 것은 참으로 깊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속에는 비록 9명의 모습만이 담겨 있지만, 그 사진에는 8만 명이 넘는 영국군의 희생과 헌신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진을 양국 주재 대사관에 영구 전시한다는 건 한국과 영국이 어떤 관계인지를 한눈에 보여 주는 것이며, 양국의 국민들이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겠다는 무언(無言)의 약속이자 상징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영 한국 대사관 무관부를 통해 기증 의사를 전했는데, 하루 만에 회신이 왔다. 감사히 받겠다는 회신이.
2025년 11월 24일 월요일, 런던의 스미스 스퀘어 홀(Smith Square Hall)에서 주영 한국 대사관 주최로 ‘한국의 날’ 행사가 있었다. 한국과 영국의 각계 인사들이 초청된 자리에서 사진 액자 기증식이 열렸다. 이 행사에서 사진 속 9명의 참전용사 중 한 분이자 《후크고지의 영웅들》의 저자인 켄 켈드가 기증을 하면서 짤막한 소감을 밝혔다[켄 이외의 생존자는 존 우드퍼드(John Woodford)이다].
“진짜 영웅들은 부산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야”
2025년 11월 24일 요크 지부의 참전용사 단체 사진은 주영 한국 대사관에 영구 기증되었다.행사가 끝날 무렵, 켄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오늘 수고 많으셨고, 연설 중에 제 이름도 언급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다. 켄은 “네가 다 한 거고 난 그냥 오늘 참석만 한 거니, 당연히 네 이름을 말했어야지”라고 했다. 나는 “아닙니다. 오늘의 주인공, 영웅들은 사진 속 용사분들이시고, 그중 한 분이신 켄 당신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켄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지. 진짜 영웅들은 부산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야.”
순간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당황스러웠고, 죄송했다.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참전용사들을 잘 알고 이해한다고 믿어 왔는데, 그분들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그들의 진짜 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싸워 본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요크 지부의 명예회원으로서 나에게 남겨진 일 세 가지 중 두 개를 완수했다. 남은 한 가지의 임무는 후크 고지 전투의 전승비(碑) 건립이다. 2021년 《후크고지의 영웅들》 한국어판 출판을 계기로 후크 고지 전투 전승비를 건립하자는 민간인들의 모임이 결성되었지만, 사업의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후크 고지 전투에 참전한 용사 중 생존한 분들의 숫자도 이제 얼마 되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사업을 시작해서, 한 분이라도 더 살아 계실 때 완성된 전승비의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을 뿐이다. 기증식 행사에서도 영국 측, 한국 측의 여러분들께 사업 취지와 목적 그리고 상황을 설명드리고 도움을 간곡히 요청했었다. 어떻게든 도와주시겠다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다행이었다.
수많은 영국군 참전용사들을 만나면서 겪은 이야기를 다 하자면 책 한 권이라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즐거웠던 일, 행복했던 일, 슬펐던 일, 난처했던 일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단연코 확실하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은 한 번도 한국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참전용사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우리에게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간은 우리 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잊히지 않을 것”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나라에서, 소리 없이, 아무 대가 없이, 묵묵히 참전용사들을 지원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크게 한 일은 없지만, 이 글을 통해서 그런 분들께도 감사 드리고 싶다. 그리고 언제든 참전용사들의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던 주영 한국 대사관 무관부의 모든 직원분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그중에서도 무관부의 박정향 선임실무관께 큰 감사를 드린다.
요크 지부의 참전용사들은 매달 여는 모임의 시작을 먼저 간 동료들에 대한 묵념 후에, 이 낭독문을 다 함께 큰 소리로 외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We remember our comrades who gave their lives in the defence of freedom under the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during and since the Korean War 1950 to 1953. Not one of them is forgotten before God.
(우리는 1950년부터 1953년의 한국전에서 유엔의 깃발 아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우리의 전우들을 기억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잊히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모든 참전용사들께 감사 드린다. 그분들이 한국을 잊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분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